귀순과 의거 남과 북이 증오에 익숙해진 지 퍽 오래다. 그래도 근간에는 같은 말도 어느 정도 가려가며 쓰려는 것 같아 다행이다. 한때는 ‘괴뢰’라는 말을 썼지만 어느 결엔가 그 말은 사라졌다. 괴뢰는 꼭두각시란 뜻인데 요즘 북한 정책은 아무리 봐도 너무 뻣뻣해서 그렇지 누군가의 꼭두각시인 것 같지는 않다. 분단 이후 도대체 몇 명이나 북에서 남으로, 혹은 남에서 북으로 삶터를 바꿨을까? 철책선을 둘러보면 도대체 이렇게 엄중한 차단선을 어찌 감히 넘어갈 엄두를 냈는지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럼에도 그것을 넘었다면 필경 이해하기 어려운 깊은 곡절과 사연이 있었으리라. 우리는 그렇게 70여 년을 보냈다. 우리는 북에서 남쪽으로 넘어오는 것을 ‘귀순’이라고 한다. ‘반역의 진영’에서 마음을 바꿔 ‘순종’을 하려 한다는 뜻이다. 반대로 남에서 북으로 넘어가는 것을 북에서는 ‘의거’라고 한다.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주관적인 이름 짓기인가? 적대적이던 쪽으로 국경을 넘는 것은 비상한 각오 없이는 불가능하다. 또 그럴 만한 ‘절박함’도 있어야 한다. 그런 것을 이렇게 ‘순종’이나 ‘정의’라는 단순 유치한 개념으로 묶어버리는 일은 온당한 언어 사용이 아니다. 그냥 정치적으로 이용하겠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임의로 국경선을 넘는 것은 정확하게 표현하면 ‘망명’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복잡한 ‘정치성’과 개인의 ‘내면적 아픔’이 뒤엉켜 있다. 우리가 민주 사회를 지향한다면 북에서 오는 사람들이 배가 고파 왔건, 음악이 좋아서 왔건, 철학적 근거를 가지고 왔건 ‘망명자’라는 객관적 신분과 그에 걸맞은 법적인 보호를 해 주는 것이 옳다. 올바른 명칭과 올바른 법적 대우, 그리고 인간적인 존중, 이것이 민주 사회가 향해야 할 바른 태도이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3. 함께 사는 삶 사신도 감동한다 - 주양자 지난해 여름이었다. 김군이 인턴이 되어 처음 맡은 환자가 운 나쁘게도 정성 어린 치료에도 불구하고 계속 상태가 나빠졌다. 그리고 며칠 밤을 잠도 못 자고 수고한 보람도 없이 환자는 숨이 멎었다. 의사가 되어 처음 담당한 환자가 죽었다고 느꼈을 때 그는 하늘이 내려앉는 것 같아 정신없이 울었다. 죽은 사람이 가슴을 마구 흔들고 하필이면 내가 처음 맡은 당신이 죽었느냐고 환자의 옷이 흠뻑 젖도록 울부짖엇다. 얼마를 그랬을까. 달려온 간호사가 제지를 해 정신을 차리고 환자를 들여다보니 죽은 자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의학적으론 김군이 울부짖을 때 그의가슴을 흔들어댄 것이 심장 마사지 효과를 내어 소생시켰다는 결론이 나왔지만, 나는 지금도 김군의 피눈물 나는 정성이 사신을 감동시켜 죽은 자를 이승으로 되돌려 주었다고 믿고 있다. (국립의료원 의로부장) 봄비가 개이면 - 정순님 봄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휴일 오후였다. 방안에서 책을 정리하고 있는데 누가 "누나!"하며 부르는 소리가 들리기에 내다보니 우리 집에 신문배달을 하던 소년이 서 있었다. 나는 의아해서 "아니, 너 웬일이니? 이렇게 비가 오는데, 다시 신문 배달하기로 했니?" 하며 그 아이의 손을 살펴보았다. 신문 꾸러미는 없었다. 아이가 말했다. "아니에요. "저번에 누나한테 신문 구독료를 받아 가고 거스름돈을 안 드렸잖아요. 미안해요. 엄마 병환이 더 악화되어서 요양원에 따라가 있느라고 그랬어요." 아이는 말을 마치며 100원짜리 동전 하나를 내밀었다. 나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일이었다. "어머니 병이 무엇이길래 그러니?" 내가 묻자 아이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올해 중학교 2학년인 소년의 아버지는 작년 가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어머니가광주리 장사로 간신히 끼니를 이어 가고 있었는데 엄마 마저 갑자기 결핵이 도져서 요양원에 가 있다고 했다. 어머니 병간호를 해야 하기 때문에 동생 둘을 데리고 요양원 근처로 이사를 간다고 했다. "누나, 미안했어요. 일찍 갔다 드리려고 했는데." 아이는 말꼬리를 흐리면서 인사를 꾸벅 했다. "아니 얘, 잠깐만." 나는 주머니를 모두 털어 아이가 내민 돈과 함께 쥐어 주며 얼마 안되지만 어머니에게 과일이라도 사다 드리라고 말했다. 아이는 끝내 거절을 했다. "누나 성의는 고맙지만 남의 도움을 받을 만큼 어리진 않거든요." 아이는 씩 웃더니 빗속으로 뛰어갔다. 나는 한참 동안 그 아이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그래, 이 봄비가 개이면 해가 환하게 비추고 새싹이 돋듯 네 앞길에도 머지않아 밝은 햇살이 비칠 거야. (힉생)
Board 삶 속 글 2022.05.18 風文 R 861
도청도설(道聽塗說) / 길거리에 펴져 돌아다니는 뜬소문을 이르는 말. 《出典》'論語' 陽貨篇 / '漢書' 藝文志 ⑴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論語》'陽貨篇'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하는 것[道聽而塗說]은 덕을 버리는 것이다[德之棄也]." 길거리에서 들은 말[道聽]을 마음에 간직하여 자기 수양의 양식으로 삼지 않고 길거리에서 바로 다른 사람에게 말해 버리는 것[塗說]은 스스로 덕을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좋은 말은 마음에 간직하여 자기 것으로 하지 않으면 덕을 쌓을 수 없다는 말이다.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하고 천도(天道)를 지상(地上)에서 행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던 공자는,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가 스스로 억제하고 인덕(仁德)을 쌓으며 실천해 나가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덕을 쌓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고《論語》에서 이르고 있다. ⑵ 후한시대, 반고(班固)가 엮은《漢書》'藝文志'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대체로 소설이란 것의 기원은 임금이 하층민의 풍속을 알기 위해 하급 관리에게 명하여 서술토록 한 데서 비롯되었다. 즉, 세상 이야기라든가 길거리의 뜬소문은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하는[道聽塗說]' 무리가 지어낸 것이다. 소설이란 말은 이런 의미에서 원래 '패관(稗官)소설'이라고 일컬었으나 나중에 그냥 '소설'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유사어】구이지학(口耳之學), 가담항설(街談巷說), 유언비어(流言蜚語)
Board 고사성어 2022.05.18 風文 R 800
혼성어 말이란 것은 늘 바르게만 하게 되지 않는다. 종종 이지러뜨리고 삐뚤게 하기도 한다. 그래서 반듯한 말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을 속상하게 하기도 하지만, 자극적인 표현을 선호하는 연예계나 광고계 같은 데서는 오히려 좋은 반응을 얻기도 한다. 단어를 형성할 때는 나름의 규칙을 제공하는 조항들이 있다. 이른바 ‘문법적인 요소’들이다. 그런 것을 이용해서 말을 만들면 ‘이론적’이고 단정해 보인다. 그러나 말을 즐기려는 사람들은 이론적인 것보다는 ‘직관적’인 것을 더 선호한다. 그래서 어휘를 규칙에 따라 조립하기보다는 범벅을 만들어 의미보다 느낌을 얻으려 한다. 그러다 보니 희한한 어휘가 주조되기도 한다. 어느 방송에서 방영되는 ‘… 들었쇼’라는 프로그램은 오타가 아니다. 의도된 작품이다. 또 ‘소통’이 아닌 ‘쇼통’이란 말도 나타난다. 일반적인 어휘 의미에다가 무언가의 ‘느낌’을 더 얹어서 표현하려는 시도이다. ‘일코노미’라는 말도 독신자들이 많아진 세태의 여러 모습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혼술, 혼밥’처럼 일종의 ‘혼성어’들이다. 혼성어 가운데 이미 잘 알려진 것은 영어의 ‘브런치’가 대표적이다. 아침식사(브렉퍼스트)와 점심식사(런치) 중간에 먹는 끼니를 일컬으며 요즘은 우리도 그냥 ‘아점’이라고들 한다. 한국식 영어를 뜻하는 ‘콩글리시’도 여기에 든다. 이러한 결합에는 기존의 ‘문법’이라는 요소를 부차적으로 다루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 좀 거북한 표현이 될 수도 있고 또 달리 인상적인 표현이 되기도 한다. 좀 과잉 혼성이라 할 만한 것도 눈에 띈다. 서울의 시민 공공 자전거를 ‘따릉이’라고 하는 것은 꽤 맛깔스러운데 그 애용자를 ‘따릉러’라고 하는 것은 무언가 너무 나갔다는 느낌이다. 마음에 꽂히는 재치는 남용보다는 ‘파격과 절제’에서 더 반짝이지 않을까 한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콩글리시 우리 한국인들이 자신들이 쓰는 영어를 장난스럽게 일컫거나 답답해하며 부르는 말이 ‘콩글리시’이다. ‘한국식 영어’의 별명인 셈이다. 다른 나라들을 둘러보아도 이러한 별명이 생기지 않은 경우가 없을 정도로 웬만한 곳에서는 모두 그들 영어의 특징을 꼬집는 별칭을 갖추고 있다. 싱가포르의 싱글리시, 말레이시아의 맹글리시, 파키스탄에는 파클리시가 있다. 영어 보급률이 높은 북유럽에서도 덴마크의 영어는 댕글리시, 스웨덴의 영어는 스웽글리시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다. 옛날에 동아시아에 한자가 퍼지면서 일본식 한자, 한국식 한자(이두), 베트남식 한자(쯔놈) 등이 생겨났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싱가포르의 싱글리시를 비롯해서 아시아 사람들의 영어는 악센트와 억양에 특징이 있다. 아시아 영어는 대개 단어마다 강세를 강하게 드러낸다. 그래서 물 흐르듯이 들리지 않고 시끄럽다는 인상을 준다. 그리고 전체 고저의 변화가 별로 없어서 단어마다 발에 걸리듯이 매끄럽지 못하다. 그러나 이것이 또한 현실의 영어이기도 하다. 유창한 영어에 목말라했던 아시아인들은 줄곧 영미식 영어만을 유일한 학습 목표로 삼아왔다. 그러나 이젠 오히려 영어 사용자의 다수가 아시아인들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반대로 영어가 아시아인의 편의에 부응할 필요도 있다. 이젠 아시아인들에게 편한 일종의 ‘(동)아시아 영어’, 즉 어느 정도 아시아화시킨 ‘영어 통용어’가 필요할 때가 된 것 같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학습자들의 부담을 덜고 오히려 영어를 더욱 국제적인 도구로 활성화시킬 수 있다. 오로지 원어민다운 영어만을 향해 질주하는 현재의 영어 교육은 고급 전문가 교육에서나 의미가 있을 뿐, 보편 교육으로는 문제가 있다. 지금 동아시아인들은 영어 교육에 엄청난 시간과 비용을 치르면서도 그 대가를 못 받고 있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