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와 인사 인사라는 것은 참 특이한 행동이다. 자주 만나거나 드물게 만나거나, 만날 때마다 생략할 수 없는 것이 인사이다. 정중하게 고개 숙이든지, 반가움을 화려한 언변으로 드러내든지, 아니면 그냥 어깨를 툭 치든지, 어떤 방법으로라도 우리는 ‘서로 우호적인 사이’라는 것을 반드시 드러낸다. 말은 꼭 필수적인 것은 아니지만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 인사를 나눌 때 되도록 ‘부정적인 표현’의 말은 피한다. 건강이 어떠냐는 인사에는 대충 괜찮다고 말하면 그만이지 시시콜콜 불편한 부분을 말하지는 않는다. 가족 모두 안녕하시냐는 질문 투의 인사도 덕분에 모두 평안하다고 말하면 그만이다. 그 정보의 진위 여부는 인사에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서로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거나 유지하는 데에 더 큰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표현을 피하고 싶을 때 가장 편한 인사 소재는 역시 ‘날씨’이다. 그날의 날씨로 말문을 열면 거의 부정적 표현을 피할 수 있다. 나에게 추우면 상대방도 춥고 나한테 더우면 상대방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너무 추워졌어요”라고 날씨에 대해 짤막하게만 언급하고 “네, 그러네요” 하며 긍정적인 응답이 나오면서 ‘인사’가 이루어진다. 상대방의 근황이 어떤지 잘 몰라도 건넬 수 있는 좋은 인사말이 된다. 날씨와 아예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국무장관이 북한 쪽에다가 “날씨 이야기라도 좋다”고 언급한 말은 바로 그런 점에서 적절한 실마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만나서 미사일 이야기부터 하자고 하면 보나 마나 이런저런 문제로 꼬이기 십상일 것이다. 대개의 인사는 날씨에서 시작해서 본론으로 들어가기 마련이다. 여러 해 만에 닥친 한파라고 한다. 이 맹추위가 지혜로운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기회를 열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과잉 수정 사람들은 말을 하면서 이왕이면 멋있게 보이고 싶어 한다. 그러다 보니 그냥 편하게 말하면 될 것을 지나치게 규범을 의식하다가 오히려 이상한 말이 나온다. 이런 것을 ‘과잉 수정’이라고 한다. 특히 방언 사용자가 표준어를 말할 때, 외국어를 배울 때 자주 일어난다. 잘 모르는 지식으로 아는 척하다가도 일어날 수 있다. 카페에서 음료수를 주문한다. “파인[pain]주스요” 하고 파인(‘pine’)이라고 발음을 제대로 했는데, 상대방이 “아, 네. 파인[fain]주스요?” 하며 ‘fine’에 해당하는 발음을 하면 그 순간 그것이 더 정확할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 쉽다. 영어를 배울 때 그 부분이 늘 우리의 취약점이었기 때문이다. 외래어를 쓰면서, 우리의 ‘ㅍ’ 발음이 종종 영어의 ‘f’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해 나오는 경우가 많다 보니 그런 과잉 발음을 하게 된다. 그러나 딱히 그런 이유만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외국어 혹은 외래어를 사용할 때 유난히 ‘본토 발음’, 더 나아가 미국식 발음에 집착을 한다. 그러한 발음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더 나은 교육을 받았고, 더 많은 지식을 가졌고, 또 그러하니까 사회적으로 유리한 지위에 있을 거라는 추측, 그리고 그에 대한 부담감이 작용하는 것 같다. 그래서 뷰티숍이 아니라 미국식 발음에 가까운 ‘뷰티샵’으로, ‘록 음악’도 ‘락’ 혹은 ‘툅’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외래어 표기의 안정성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과잉 수정 행위의 근저에는 사회적 차별에 대한 공포가 숨어 있는 셈이다. 행여 나의 말투나 발음이 남들한테서 손가락질받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말을 이렇게 불편하게 만든다. 말은 소통만이 아니라 지위와 신분을 ‘슬며시’ 보여주는 기능도 하기 때문이다. 마치 옷차림이 재력을 과시하는 기능도 하듯이 말이다. 불평등한 사회는 말도 불편하게 만든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2. 잊을 수 없는 사람 3. 함께 사는 삶 약속 - 김묘선 대학 2학년 때의 가을이었다. 체전이 있어 매스 게임 연습을 할 때였는데 손에는 반경 7센티미터 정도 되는 공을 갖고 하기로 되어 있었다. 공의 표면에는 노란 칠을 해야 된다기에 페인트 상점에 갔더니 큰 돈이 되는 일도 아니고 괜히 귀찮기만 하다면서 거절을 했다. 몇 군데 퇴짜를 맞고 어느 조그만 페인트 상점엘 가서는 사정을 하다시피 해서 맡겨 두고 나왔다. 공을 찾아 가기로 한 날 아침. 등교길에 들렀더니 아직 칠이 되어 있지 않았다. 작은 물건이라 깜박 잊었다는 것이었다. 그때 당장 칭을 한다 해도 마르지 않아 가져갈 수도 없고 걱정이 되어 우두커니 서 있으니 몇 시에 사용할 거냐고 묻는다. 오후 세 시라고 대답했더니 걱정 말고 학교에 가면 아주머니를 시켜 그 시간까지 갖다 주겠다고 학번과 이름을 적어 놓고 가라고 했다. 믿어지지 않는 말이었지만 서 있는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기에 학번과 이름을 적어 놓고 학교로 갔다. 매스 게임 연습을 할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오지 않자 체념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상점과 학교와는 상당히 먼 거리에 있었으니까. 그런데 매스 게임이 막 시작될 무렵인 5분 전 세 시에 그 아주머니가 노란 공을 가지고 나타난 것이었다. 난 의외의 일이고 또 너무 고마워서 펄쩍펄쩍 뛰며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그 아주머니는 나와 약속 시간을 지키기 위해 택시를 타고 학교까지 온 것이다. 공을 페인트 칠한 값과 택시 요금과는 약 네 배의 차이가 있었는데 택시 요금이 더 많은 것임을 그 아주머니도 알고 나도 알고 있었다. (신평초등학교 교사) 거룩한 3천 원 - 이장규 한 환자가 업힌 채 들어왔다. 얼핏 보기에도 때는 이미 늦은 것 같았다. 심한 호흡 곤란, 어깨로 숨을 쉬고 있었다. 즉시 엑스선 사진을 찍게 하고 필름을 들여다보았다. 말기 폐암이었다. 그를 데리고 온 검둥이같이 새까맣게 탄 남자들은 어떻게든 손을 좀 써달라고 떼를 썼다. 그들은 광부들이었다. 어차피 최후 수단으로 코발트를 쓰는 도리밖에 없었지만 그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은 뻔했다. 며칠이 지나자 환자의 상태는 다소 호전되는 듯이 보였다. 호흡이 수월해졌고 혈담이 줄고 통증이 가라앉은 것이다. 환자의 얼굴에는 핏기가 돌았고 광부들의 얼굴에도 희망이 보였다. 그들이 병구완을 하는 정경은 참으로 눈물겨웠다. 그런데 어느 날 환자의 상태가 갑자기 나빠졌다. 순환 장애가 온 것이고, 그날 밤 환자는 죽었다. 조용한 임종이었다. 며칠 후 광부들이 다시 찾아왔다.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그 친구가 유언을 했어요. 저희들 복 얼마라도 좋으니 돈을 마련해서 암과 싸우는 선생님들에게 전해 달라는 것입니다. 너무 약소해서 부끄럽습니다만 아시다시피 저희들은 노동자입니다. 선생님, 사양 마시고 제발 받아 주십시오. 가엾은 친구를 대신해서 부탁드립니다." 그들은 '금일봉'을 내놓고 달아나다시피 나가 버렸다. 3천 원이었다. 순간 나는 그들이 끼니를 거를 것이라고 직감했다. 1969년 가을 신문회관에서 한 창립총회가 조촐하게 열리고 있었다. 사단법인 (한국암연구원)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힘에 겨웠던 내 노력의 결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앞으로 할 일이 더 걱정이었다. 우선 기금을 모으는 것. 앞서 일본의 세계적인 병리학자 '요시다'교수는 암 연구기금으로 한국에서 우선 3만 불 정도 확보하면 일본측에서도 3만 불을 기부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다. 나는 만사를 제쳐놓고 동분서주 했다. 국회의원도 만나 보고 선배들을 찾아다녔다. 신문사 사장에게 모금을 신문사 사업으로 해줄 것을 간청하기도 했다. 눈보라치는 착 밖을 내다보면서 신문사 사장은 딱하다는 듯 말했다. "이 엄동설한에 누가 돈 한 푼 내주겠소." 크리스마스 실을 본떠 모금에 관한 입법 조치를 관계 당국에 조르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국민들 부담이 큰데..." 차관은 말끝을 흐려 버렸다. 어느 재벌을 찾아갔을 때는 비서한테 망신을 당했다. 나는 거지가 아니라 의사이자 교수고 차관보급의 공무원이었다. 정말 거지가 되어 이런 꼴을 당했다면 아마 자살했을 것이다. 3년에 걸친 나의 고생은 마침내 무위로 돌아갔다. (한국암연구원)은 부실 단체라는 낙인이 찍혀 이제 정부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허탈과 비애와 분노에 잠겨 있던 바로 그때 나는 3천 원을 받은 것이다. 그토록 애타게 구하던 처음이자 마지막 돈이었다. 그 우락부락하게 생긴 광부들 마음속에 어쩌면 저토록 아름다운 마음이 움텄을 것인가? 그리고 이 소중한 돈을 어떻게 써야 그들의 뜻을 살릴 수 있을 것인가? 며칠을 두고나는 깊은 사색에 잠겼다. 그것은 인생을 사색하는 것이었다. (암학회장 귀하. 여기 무명의 한 광부가 유언으로 남긴, 그리고 그 동료들이 끼니를 굶어 모은 성금 3천 원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 암 연구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길 희구하면서 보내 드립니다. 기증인은 얼마 전 폐암으로 사망했습니다.) (원자력위원회 위원) 새 시계와 바꾼 것 - 이관옥 겉보다는 속이 중요하다면서 헌옷도 곧잘 고쳐 입고 낡은 시계를 갖고 다녀도 조금도 불평이 없던 딸이 두어 달 후면 여고를 졸업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느닷없이 딸아이가 물었다. "엄마, 제 졸업 선물은 뭘 주실 거에요?" 내가 말했다. "글쎄다. 시계가 너무 낡았으니 새것으로 하나 사줄까? 어떤 모이 좋으니?" 그러자 뜻밖에도 딸아이가 말했다. "제가 한 번 직접 사보고 싶어요. 돈으로 주시겠어요?" 돈으로 달라는 데는 좀 의아하긴 했지만 원래 딸아이 일로 걱정해 본 적이 별로 없던 터라 더 캐묻지 않고 당장 시계값을 주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은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딸은 시계르 사 오지 않았고, 1주일이 지났는데도 시계에 대해서 한 마디의 이야기조차 드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의 담임 선생으로부터 뜻밖의 전화가 왔다. "K라는 학생의 밀렸던 수업료를 보내 주셔서 그 학생이 졸업 시험에 참가하게 되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하게 되었으니 참 감사합니다." 나는 잠시 어리둥절했으나 곧 짐작할 수 있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K라는 학생은 딸의 가까운 친구로 퍽 얌전한 학생인데, 홀어머니 밑에서 집안일을 도우며 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사정을 할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후 딸이 학교에서 돌아왔다. 나는 짐짓 물었다. "시계는 사 왔니?" 딸아이가 대답했다. "차차 살 거예요." 그렇게 말하고는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그 애 방으로 따라 들어가서 선생님이 고맙다는 전화를 주신 얘기를 했다. "엄마, 죄송해요. 사실 전 새 시계가 꼭 필요치 않아요. 거짓말 한 것 용서하세요. 그동안 물어 보시면 어떡하나 걱정했어요." 딸아이는 울기 시작했다. 내가 말했다. "아니다. 울지 마라. 새 시계를 포기한 것 때문에 한 친구가 졸업을 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이냐. 과연 우리 딸은 장하다." 나는 어린 딸의 그 순진한 우정에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서울대 음대 교수)
Board 삶 속 글 2022.05.20 風文 R 713
동병상련(同病相憐) // ① 같은 병의 환자끼리 서로 가엾게 여김. ② 어려운 사람끼리 동정하고 도움. 《出典》吳越春秋 闔閭內篇 전국시대인 기원전 515년, 오(吳)나라의 공자(公子) 광(光)은 사촌동생인 오왕(吳王) 요(僚)를 시해한 뒤, 오왕 합려(闔閭)라 일컫고 자객을 천거하는 등 반란에 적극 협조한 오자서(伍子胥)를 중용했다. 오자서는 7년 전, 초나라의 태자소부(太子小傅) 비무기(費無忌)의 모함으로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있던 아버지와 역시 관리였던 맏형이 처형당하자 복수의 화신이 되어 오나라로 피신해 온 망명객이었다. 그가 반란에 적극 협조한 것도 실은 유능한 光[闔閭]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초나라 공략의 길이 열릴 것이며 초나라를 공략해야 부형(父兄)의 원수를 갚을 수 있으리라는 원려(遠廬) 때문이었다. 그 해 또 비무기의 모함으로 아버지를 잃은 백비가 오나라로 피신해 오자 오자서는 그 를 오왕 합려에게 천거하여 대부(大夫) 벼슬에 오르게 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오자서는 대부 피리(被離)에게 힐난을 받았다. "백비의 눈길은 매와 같고 걸음걸이는 호랑이와 같으니[鷹視虎步], 이는 필시 살인할 악상(惡相)이오. 그런데 귀공은 무슨 까닭으로 그런 인물을 천거하였소?" 피리의 말이 끝나자 오자서는 이렇게 대답했다. "뭐 별다른 까닭은 없소이다. 하상가(河上歌)에도 '동병상련(同病相憐)'이란 말이 있듯이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백비를 돕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지요." 그로부터 9년 후 합려가 초나라를 공략, 대승함으로써 오자서와 백비는 마침내 부형의 원수를 갚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오자서는 불행히도 피리의 예언대로 월(越)나라에 매수된 백비의 모함에 빠져 분사(憤死)하고 말았다. 【유사어】동우상구(同憂相救), 동주상구(同舟相救), 동기상구(同氣相救), 동악상조(同惡 相助), 동류상구(同類相救), 오월동주(吳越同舟), 유유상종(類類相從)
Board 고사성어 2022.05.20 風文 R 1127
말과 상거래 시장에서 상인은 고객을 끌려고 소리 높여 상품을 ‘선전’한다. 그리고 또 말로 씨름하며 ‘흥정’을 한다. 옥신각신하다가 ‘협상’에 성공하면 거래가 이루어진다. 종종 중간에 중개상이 끼어들기도 한다. 이래서 시장은 늘 말로 소란하고 시끄러웠다. 이런 시장을 단숨에 조용하게 만든 것은 ‘정찰제’였다. 고객은 살지 말지를 조용히 결정만 하는 피동적인 처지가 되었다. 말을 안 한다 해도 조금씩 말하는 틈새가 생겼다. 계산대에서 포인트가 있냐는 둥, 회원 카드가 있냐는 둥 하며 자잘한 대화는 계속되었다. 점원과 잡담을 나누는 단골도 생겼다. 또 틈틈이 ‘행사’를 기획하며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이런 작은 시끄러움마저 날려버린 것이 바로 ‘자판기’이다. 인간의 상업 활동이 이렇게까지 비언어적이 된 적은 없었다. 그러면서 고객은 더욱 소외되어갔다. 한술 더 떠 이제는 ‘언택트’라는 용어도 나타났다. 점원이 고객한테 다가가 말을 거는 것을 삼가는 서비스를 말한다. 마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기특한 생각 때문이란다. 일인 가구 시대의 특이한 현상이라고도 한다. 그러면서 고객의 언어는 점점 시장에서 퇴출되고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언어로 화려한 수사와 형용을 하게 만들던 ‘상업’이 너무 점잖아진 것이다. 고객들은 어느새 광고와 전자 거래, 직구, 택배 등의 포위망에 갇혀 말을 잃고 있다. 이제 고객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시장의 선전과 광고만이 요란하다. 현대의 고객들은 자신의 큰 무기였던 ‘흥정’을 어느 결에 잊었다. 말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으면 스스로 힘을 잃게 된다. 고객들도 보장된 언어적 권리를 열심히 사용해야 한다. 상품 정보, 반품 조건, 유효 기간 등을 꼼꼼하고 치열하게 따지지 않으면 시장에서 패배자가 되고 말 것이다. 시장에서는 언어가 돈보다 더 중요한 무기이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