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의 언어 남과 북의 만남이 있을 만하면 서로 언어가 달라졌을 텐데 어쩌나 하는 말들이 많아진다. 워낙 오랫동안 분단되어 있었으니 걱정을 겸해 하는 말들이다. 사실 북쪽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좀 어색하거나 ‘티’가 나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 역시 어느 방언 지역 출신이나 국외 동포들의 말에서 느끼는 약간의 어색함만 가지고 언어가 달라졌다고까지는 하지 않는다. 말한 사람의 특이한 말버릇이 아닌가 하는 정도의 느낌도 든다. 그러면서 북에서 쓰는 말을 가지고는 유독 예민하게 무언가 ‘이질감’을 느낀다. 북한의 말에서 이질감을 강하게 하는 것은 일상 어휘가 아닌 사회정치적 표현들이다. 국회 격인 ‘최고인민회의’라든지, 예비군에 해당하는 ‘로농적위군’이라든지, 국방부와 같은 개념인 ‘인민무력부’, 사회주의 농업 단위인 ‘협동농장’ 등은 마치 완전히 딴 세상을 가리키는 말처럼 들려 생소하기 짝이 없다. 반면에 일상어는 그리 큰 차이가 없다. 옛날의 평안도 방언은 서울말과 차이가 많았지만 이미 20세기 초부터 평양을 중심으로 중부 방언과 합류를 했기 때문에 ‘이질화’라는 말은 그리 적절치 않다. 그러나 종종 두메산골의 강한 사투리가 혼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1990년대 초 북의 한 인사가 남쪽의 기자에게 “집에 인간이 몇이오?”라고 물어서 “북한은 이제 유물론 사상에 젖어 가족도 인간이라 부른다”는 오보를 내기도 했다. 북한의 방언학 서적에는 “아직도 평안북도 산골에서는 ‘식구’를 ‘인간’(잉간)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는 구절이 나온다. 유물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낯설어진 관계가 더 문제였을 뿐이다. 좀 더 자주 만나고 함께 문제를 풀어가다 보면 이 모든 것이 지난날의 ‘추억의 말실수’로 기억되는 ‘좋은 날’이 오지 않을까 한다.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 뉘앙스 차이 대화에서 문법이나 발음 못지않게 매우 예민한 것은 ‘뉘앙스’(어감)이다. 북한에서는 이 말을 ‘뜻빛갈[깔]’이라고 한다. 뉘앙스의 차이는 대화 참여자들의 ‘마음’, 곧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예민한 부분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앞으로 남과 북의 만남에서도 이 부분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1970년대, 남과 북의 관계가 얼음장처럼 얼어붙어 있을 때 어느 중립국에서 양쪽의 유학생이 우연히 마주쳤다. 남쪽 유학생이 “외국 생활에 어려움이 많으시죠?” 하고 인사하자 상대방은 “우리 조선사람들이 워낙 이악해서 일없습네다” 하고 답변했다. ‘이악하다’는 ‘야무지다’라는 뜻이다. 이미 그 뜻을 알고 있던 남쪽 유학생은 “아, 네. 악착같다는 말씀이시죠?”라고 아는 척했는데 여기서 사달이 났다. 북의 유학생은 어찌 동족에게 악착같다는 모진 말을 할 수 있냐고 서운해했다는 이야기다. 남쪽 사회는 워낙에 극심한 경쟁 체제를 경험해서인지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든지 공부했다든지 하는 말을 해도 그리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북한의 사전이나 문학작품 등에서는 “지주들의 악착같은 착취” 하면서 좀 더 심한 표현으로 많이 쓰인다. 그러니 그들 나름 동족한테 사용하기에는 마땅치 않게 느꼈을 것이다. 또 달리 남쪽에서 ‘소행’이라 하면 괘씸한 짓을 가리키지만 북에서는 선행을 했을 때도 사용한다. 앞으로 남과 북이 만나면 단어 자체를 몰라서 저지르는 오해 못지않게 뉘앙스 차이 때문에 민망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선전용 확성기 철거하듯이 조금씩 서로의 방송도 개방하고, 출판물도 자유롭게 읽어볼 수 있게 되면 이러한 문제들은 아마도 저절로 풀려나가지 않을까 한다. 뉘앙스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는 뜻이다.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한승원의 글쓰기 교실 나만의 글쓰기 비법 딱딱한 이론을 앞세우지 않은 글쓰기 강의 글을 쓰는 데에는 왕도가 없다. 이것은, 글이란 것은 반드시 이러 이러한 방법으로 써야 가장 잘 쓸 수 있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는 뜻의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이 글쓰기 강의를 시작하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첫째, 내가 소설가에 뜻을 두고 글쓰기 공부를 처음 시작할 때에 참고했던 글쓰기 공부에 관한 몇 가지 책들은 한결같이 딱딱한 이론을 앞세우는 것들뿐이었다. 나는 열일곱 살이 되던 해부터 문학병이 들었고, 그때부터 글쓰기 공부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 이후 그 어느 누구의 강의나 저서를 통해서도 글쓰기의 비법다운 비법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둘째, 지금 나의 문장쓰기, 구성하기, 글 속에 주제담기 비법은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터득된 것이다. 지금 내가 하려는 글쓰기 공부 강의는 나의 그러한 많은 시행착오의 일화와 그것을 통해 얻어진 나만의 비법을 후배들에게 전해주려는 것이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해준 <문학사상사> 여러분에게, 이 책을 위해 여라가지로 도와준 제자 박창희에게 깊이 감사한다. 제1교시 자기만이 쓸 수 있는 글이란 어떤 것인가, 생명이 있고 감동을 줄 수 있는 글 1. 엿장수 이야기 옛날에 장사하는 수법이 탁월하여 돈을 많이 번 엿장수 한 사람이 있었다. 무엇을 해서 먹고살까 하고 궁리하던 한 청년이 그 엿장수를 찾아갔다. "저에게 장사비결을 가르쳐 주십시오." 청년이 그 엿장수에게 간곡히 말했다. "정히 그렇다면 엿판을 하나 만들어 짊어지고 나를 따라다니면서, 내가 하는 걸 잘 보고 장사하는 법을 배우시오." 청년은 그 엿장수가 시키는 대로했다. 탁월한 엿장수가 엿판을 짊어진 채 앞장서 가고, 청년은 제자가 되어 뒤를 따랐다. 앞장을 선 스승 엿장수는 가위질 소리를 멋들어지게 내고, 엉덩이춤에다 어깨춤까지 추면서, "둘이먹다 한 사람이 죽어도 모르는 울릉도 호박엿 사시요오" 하고 노랫가락을 섞어 가며 외쳤다. 뒤따라가는 제자 엿장수는 그 소리를 아무리 따라하려 해도 목구멍 속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앞장서 가는 스승 엿장수가 뒤따르는 제자 엿장수에게 얼른 따라해 보라고 재촉했다. 제자 엿장수는 조금 전에 스승 엿장수가 소리친 말을 열심히 따라 외웠다. 한데 앞장선 스승 엿장수가, "첫사랑의 맛같이 새콤달콤한 울릉도 호박엿이요오 엿 사시요오" 하고 말을 바꾸어 소리쳤다. 뒤따르는 제자 엿장수는 또 그말을 열심히 외웠다. 그러자 스승 엿장수는 또 말을 바꾸었다. "장가 못 간 총각은 장가가게 하고, 시집 못 간 처녀는 시집가게 하는 울릉도 호박엿이요오" 그러고는 제자에게 얼른 따라해 보라고 재촉했다. 제자 엿장수는 또다시 조금 전에 스승이 한 말을 머릿 속에 외워 담았다. 그런데 스승 엿장수는 곯리기라도 하듯이 또 말을 바꾸어 소리쳤다. "시어머니가 이 엿을 먹으면 주름살이 펴지고, 며느리가 먹으면 나온 입이 들어가는 울릉도 호박엿이요오, 엿사시요오" 그 때까지 제자 엿장수는 한마디도 외치지를 못했다. 스승 엿장수가 제자 엿장수를 향해 무얼 하고 있느냐고, 얼른 따라 외쳐 보라고 재촉했다. 제자 엿장수는 그 재촉에 못이겨, 앞장선 스승 엿장수가 소리를 지른 다음에 기껏, "내 것도" 하고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은 앞장서서 다니는 스승 엿장수의 엿은 사는데, 뒤따라 다니며 "내것도" 하고 외치는 제자 엿장수의 엿은 사려고 하지 않았다. 제자 엿장수는 사람들이 왜 자기의 엿을 사려고 하지 않는지 알 수가 없덨다. 그는 슬픈 목소리로, 스승이 외친 다음에 곧 목청이 터지도록 외치고 또 외쳤다. "내 것도오" 이 세상에는 그 스승과 같은 엿장수가 한 사람만 있어야 한다. 두 사람은 필요하지 않다. 제자 엿장수는스승 엿장수를 따라서 "내것도오" 하고만 외칠 것이 아니라, 자기만이 할 수 있는 말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자기의 호박엿을 먹어보고 또 먹어 본 다음에 그것의 맛과 향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자기 혼자서만 외칠 수 있는 독특한 말(상업적인 기술 혹은 상업적인 구호)을 연구해 내야 한다. 그것을 연구하려고 자기의 호박엿을 맛보는 과정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하자. 자기의 혓바닥마저도 달크무레한 그 호박엿물을 따라 목구멍으로 넘어가 버리려 할 만큼, 그맛디 달고 구수하고 새콤하게 느껴 졌다. 그리고 그것을 삼키고 나자 뱃속이 개운해 지고, 머릿 속이 환해 지는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얼굴 살결 또한 희어지는 것 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바로 그 말을 외치면 디는 것이다. "혓바닥까지 넘어가는 훌륭한 호박엿이요오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인 아들 딸한테 먹이면 지능지수가 높아지고, 중학생인 아들 딸들판테 먹이면 국어, 수학, 영어 시험에 모두모도 백점만 맞게 되는 호박엿이요오 고등학생인 아들딸한테 먹이면 대학에 누워서 들어가게 되는 울릉도 호박엿이요오" "처녀가 먹으면 피부가 고와지고 총각들이 먹으면 힘이 세어지는 호박엿이요오" 제자 엿장수가 이렇게 자식들의 교육문제와 피부미용에 대한 소리를 곁들어 외친다면, 기껏 사랑놀음의 말만 앞세우고 외치는 스승 엿장수 보다 훨씬 많은 엿을 팔 수 있지 않을까? 2.누가 써도 마찬가지인 글 글을쓸 때, 우리들이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첫째, 누가써도 마찬가지인 글을 써서는 안된다. (1) 까마귀과에 속한는 종으로, 우리나라의 외딴 섬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번식하는 흔한 텃새이다. 몸길이는 약 45센티미터이며, 암수의 깃털은 동일하다. 머리, 등, 가슴, 꽁지는 광택 있는 검은색이며 배는 흰색이다. 날개의 일부분은 흰색이며 나머지 부분은 진한 청록색이고, 부리와 다리는 검은색이다. 주로 시골, 인가 주변, 들판, 야산 도시의 공원 등에서 무리를 지어 산다. 둥우리는 소나무, 아카시아, 밤나무, 미루나무, 버드나무 가지위에 짓고, 여섯 개 정도의 알을 낳는다. 개구리, 곤충, 보리, 쌀, 콩 등을 먹는다. (2) 남아메리카 원산지인 식물로 우리나라에 오래 전에 들어와 전국의 산과 들에 자라고 있는 바늘꽃과의 두해살이 풀이다. 높이는 50-90센티미터쯤 자라고, 굵고 곧은 뿌리가 나는데 한 개 혹은 여러개의 대가 곧게 자란다. 뿌리에서 나온 잎은 사방으로 둥글게 퍼지며, 줄기에서 나온 잎은 끝이 뾰족한데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다. 7월과 9월 사이에 노란 꽃이 피고, 잎 겨드랑이에 한 개씩 달린다. 저녁 때에 노란색으로 피었다가 아침에 햇빛이 비치면 곧 시드는데, 약간 붉은 빛이 돈다. 꽃받침은 네 개로 두 개씩 함쳐지며, 꽃이 피면 뒤로 젖혀진다. (3) 우리나라의 이름은 대한민국입니다. 대한민국은 북한과 남한 둘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북한은 공산주의 국가이고, 남한은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대한민국은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나라이며,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불립니다. 대한 민국은 면적이 좁으며 사람들이 많이 살아 인구밀도가 높습니다. 그리고 춘하추동이 뚜렷합니다. 봄은 따듯하고 온갖 새들이 노래를 부르며 예쁜 꽃들이 많이 피어납니다. 여름은 매우 덥고, 8월은 1년중 가장 더운 달입니다. (4) 우리나라의 국기는 태극기로, 태극은 우주 만물의 근원을 나타내는데, 네 귀에는 건(하늘), 곤(땅), 감(물), 이(불)를 나타내는 검은색의 네 괴가 있다. 우리나라 꽃은 무궁화 이며, 국가는 안익태님께서지으신 애국가이다. 우리나라 국토 면적의 70퍼센트가 산지 인데, 대부분 복쪽과 동쪽이 높고 서쪽과 남쪽이 낮다. 우리나라는 아시아 대륙과 태평양 사이에 있어 계절풍기후를 이룬다. 겨울에는 삼한 사온 현상이 아타나고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하다. 위애 든 보기 (1)은 '까치'에 관한 글의 일부이고, (2)는 '달맞이꽃'에 대한 글의 한 대목인데, 백과사전의 그것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3)과 (4)는 ;우리나라'라는 제목의 글로서, 독자들이 보내온 글 중에서 두편을 골라 앞부분을 인용했다. 이 글들은 모두 누가 써도 마찬가지인 내용의 글이다. 내용과 문투가 이미 어떤 생각의 틀 속에 들어가 있는 상식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글을 쓰게 되는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자. 주어진 어떤 제목을 앞에 놓고, 그 제목이 주는 고정 관념에 얽매이게 되면 이렇게 백과사전 투의 상식적인 글을 쓰게 도니 . 이런 글을 '기술하는 문장의 글' 이라고 말하는데, 아무리 매끄럽게 다듬고 수식어들을 동원하여 치장을 하고 엄살을 피우더라도 절대로 좋은 글이 될 수 없다. 읽는 사람에게 아무런 감동도 줄 수 없는 글이기 때문이다. 곧 생명이 없는, 죽은 글이라는 뜻이다.
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3. 함께 사는 삶 꽃을 퍼뜨리는 기쁨 - 오윤현 세상 보기를 시인보다 더 평화롭게 살펴보고, 꽃을 자식만큼 사랑하는 노인이 바로 '꽃씨 할아버지', 최영만 씨(66세, 강원도 태백시)이다. 1968년부터 22년 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족두리꽃, 접시꽃, 분꽃 등 이름만 들어도 가슴속 물기가 차오르는 꽃씨를 전국 방방곡곡에 나누어 온 최영만 할아버지. "어머님께서도 꽃 가꾸기를 무척 좋아하셨어요. 초가집 앞 허술한 화단에 모란이나 도라지꽃, 봉선화 등을 가꾸셨는데, 꽃이 필 때쯤이면 내게 늘 '너도 남의 앞에 꽃이 되어라. 그리고 꽃을 사랑하거라'고 일러주셨어요." 사실 그때만 해도 최영만 할아버지는 꽃이 지닌 부드러운 아름다움이라든가, 요염한 빛깔과 꽃에서 묻어나는 향취의 참맛을 몰랐다. 고향인 진천에서 농사를 짓던 할아버지는 1966년 가을 가까스로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 태백시 광산 보안지도소 수위로 취직했다. 낯선 곳으로의 첫 이주였다. 그런데 그가 태백에 와서 처음 본 것은 앞뒤로 꽉 막힌 검은 산과 새까만 시냇물, 그리고 공터에서 맘껏 자란 쑥대와 잡초뿐이었다. 마음의 쓸쓸함과 황량함을 뭐라 표현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게 몇 날이 지난 어느 날 이른 아침, 지도소 안을 청소하던 그의 눈에 싱싱하게 피어난 한 무더기 나팔꽃 넝쿨이 강렬하게 들어왔다. 나팔꽃은 그 진한 싱싱함으로 주위의 황량함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때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바로 꽃 가꾸기였다. 그 다음해에 그는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검게만 보이는 공터에 채소와 화초 씨앗을 뿌렸다. 하지만 결과는 생각한 것보다 훨씬 형편없었다. 지질이 썩 좋은 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다음해부터는 고향의 어머니 생각도 간절하고, 또 억쎈 들꽃이라면 이 정도 땅에서도 굳세게 자라 줄 것 같아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꽃씨를 심어 보았다. 그해 가을 그는 처음 자기 눈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이 심은 작은 씨앗에서 저렇게 곱고 탐스러운 여러 송이의 꽃들이 피어난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누군가 마치 마술을 부려 놓은 것 같았다. 그해 가을 그는 자신에게 '꽃'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도록 혜안을 키워 준 어머니에게 사랑의 보답으로 몇 가지 꽃씨를 보내 드렸다. 그후에도 몇 년 간 계속해서 많은 양의 꽃씨를 어머니께 보내 드렸는데 그때마다 어머니는 고맙게도 마을 어귀에 그 꽃씨를 심어 아름다움을 가꾸어 내시곤 했다. "그러던 어느 해 가을이었어요. 꽃씨를 수확했는데 어머니께 보내 드리고 나서도 많은 양이 남았어요. 며칠을 궁리하다가, 버리기엔 너무 아깝고 해서 가까운 관공서로 무조건 보내 주었지요." 겨울이 물러가고 한참 지나서 민원 서류 한 통을 떼기 위해 면사무소에 들렀던 그는 우연히 인부들이 사루비아와 코스모스 씨앗을 정성들여 땅 속에 묻고 있는 것을 보았다. 씨앗의 출처를 물어 자신이 보낸 것임을 확인한 그는 그 자리에서 또 하나의 희망을 갖게 됐다. 청와대를 비롯한 전국의 관공서로 자신이 모은 코스모스며 맨드라미, 봉선화, 해바라기 등속의 씨앗을 보내기로 작정한 것이다. 꽃씨를 보내는 소박한 그의 일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러자 봇물 터진 듯 사람들의 주문이 쇄도해 왔다. (샘터 기자) 일본을 다시 생각한다 - 김승한 아이가 학교에 다니게 됐는데 한국인 자녀를 위한 학교엔 빈자리가 없었다. 도쿄의 경우엔 한국 아이들이 다닐 수 있는 한국 학교가 단 한 군데밖에 없다. 따라서 정원에서 한 명이 빠져 나가면 대기 신청 순위에 따라 전학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전학 첫날 아이는 담임 선생님과 교장 선생님에게 첫 인사를 드렸다. 일본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아이를 수용하게 된 학교측은 아마 내심 크게 당황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무 걱정하시지 말라, 최선을 다해 교육할 터이니 긴밀하게 상의하자, 이웃나라 어린이를 학생으로 받게 되어 기쁘다는 인사까지 덧붙였다. 그리곤 아이에게 일본 단어 세 가지를 외우게 했다. 오미즈(물), 오테아라이(화장실), 이타이(아파요). 수업중에 목이 마르거나 급한 일이 생기면 그 말을 선생님께 하라고 가르쳤다. 교장 선생님은 한국 어린이를 책임지게 된 만큼, 자신과 담임 선생님도 한국어를 배워서 아이와 교류할 작정이라고 했다. 이쪽이 송구스럽기도 했고 의례적인 인사치레려니 하며 흘려 버리고 말았다. 전학했을 때는 여름이었다. 별탈 없이 그 해를 보내고 이듬해 정월이 되었다. 한겨울에도 거의 영상의 기온이던 도쿄에 함박눈이 쏟아지고 영하로 급강하했던 1월 중순, 새벽 출근길에 그 초등학교 앞을 지나게 되었다. 두툼한 방한복을 입은 한 노인이 빗자루로 등교길에 쌓인 눈을 치우고 있었다. 마스크를 썼는데 낯이 익었다. 가가이 다가가자 노인은 마스크를 풀었다. 그는 교장 선생님이었다. 아이들이 행여 미끄러져 다칠까 봐 선생님이나 관리인들보다 일찍 나와 눈을 치우는 게 분명했다. 놀라운 일은 그 다음이었다. 일본어로 아침 인사를 하자 교장은 한국어로 이렇게 답했다. "안녕하십니까? 날씨가 많이 추워졌지요?" 한국어를 배운 지 일곱 달 만에 교장 선생님은 그렇게 말했다. 일순, 놀라움보다는 전율에 가까운 감정에 휩싸였다. 아이가 별탈 없이 학교에 다녔던 배경에는 교장 선생님과 담임 선생님의 철저함과 집요함이 있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MBC 주일 특파원 역임)
Board 삶 속 글 2022.06.09 風文 R 538
문경지교(刎頸之交) / 생사를 같이하는 친한 사귐. 또 그런 벗. 《出典》'史記' 廉頗 藺相如列傳 전국시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의 신하 유현(劉賢)의 식객에 인상여(藺相如)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에게 빼앗길 뻔했던 천하 명옥(名玉)인 화씨지벽(和氏之璧)을 원상(原狀)대로 가지고 돌아온 공으로 일약 상대부(上大夫)에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인상여의 지위는 조나라의 명장으로 유명한 염파(廉頗)보다 더 높아졌다. 그러자 염파는 분개하여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싸움터를 누비며 성(城)을 쳐서 빼앗고 들에서 적을 무찔러 공을 세웠다. 그런데 입밖에 놀린 것이 없는 인상여 따위가 나보다 윗자리에 앉다니……. 내 어찌 그런 놈 밑에 있을 수 있겠는가. 언제든 그 놈을 만나면 망신을 주고 말테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인상여는 염파를 피했다. 그는 병을 핑계대고 조정에도 나가지 않았으며, 길에서도 저 멀리 염파가 보이면 옆길로 돌아가곤 했다. 이같은 인상여의 비겁한 행동에 실망한 부하가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 그러자 인상여는 그를 만류하며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염파 장군과 진나라 소양왕과 어느 쪽이 더 무섭다고 생각하는가?" "그야 물론 소양왕이지요." "나는 소양왕도 두려워하지 않고 많은 신하들 앞에서 소양왕을 혼내 준 사람이야. 그런 내가 어찌 염파 장군 따위를 두려워하겠는가? 생각해 보면 알겠지만 강국인 진나라가 쳐들어 오지 않는 것은 염파 장군과 내가 버티어 있기 때문일세. 이 두 호랑이가 싸우면 결국 모두 죽게 돼. 그래서 나라의 안위를 생각하고 염파 장군을 피하는 거야." 말을 전해 들은 염파는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몰랐다. 그는 곧 '웃통을 벗은 다음 태형(笞刑)에 쓰이는 형장(荊杖)을 짊어지고[肉袒負荊]' 인상여를 찾아가 섬돌 아래 무릎을 꿇었다. "내가 미욱해서 대감의 높은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소. 어서 나에게 벌을 주시오."하고 염파는 진심으로 사죄했다. 그날부터 두 사람은 '刎頸之交'를 맺었다고 한다. 【동의어】문경지계(刎頸之契) 【유사어】관포지교(管鮑之交), 금란지계(金蘭之契), 단금지계(斷金之契)
Board 고사성어 2022.06.09 風文 R 813
잡것의 가치 잡스럽다는 말의 ‘잡’은 순수하지 못하고 이것저것 뒤섞인 것이라는 뜻이다. 대상의 가치를 낮추어 보는 말이다. ‘잡것, 잡놈, 잡년’과 같은 말은 아예 사람의 품격을 낮춰 보게 만든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생각해서 ‘순수’라는 것이 과연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잡’이란 말이 들어가도 그 의미가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경우가 꽤 있다. ‘잡곡’이 건강에 더 좋다고 한다. ‘잡지’에는 이런저런 유익한 정보가 꽤 많다. ‘잡채’나 ‘잡탕’, ‘잡어매운탕’도 이젠 어엿한 메뉴에 속한다. 한때는 ‘잡기’와 ‘잡학’이라는 말에 깔보는 의미가 있었지만 이제는 이런 것들도 다 ‘교양’ 속에 들어가 있다. 아직 ‘잡담, 잡소문, 잡음’ 등에는 부정적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요즘은 잡담 같은 방송프로도 많고 잡소문 전하는 뉴스도 많다. 잡음은 오히려 기계 작동의 문제를 알려주는 신호음 구실을 한다. ‘잡초’도 환경 보전에는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하며 ‘잡념’이 새로운 착상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사람의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잡상인’이라는 말은 잡스러운 상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점포 가진 상인들이 고정된 점포를 가지지 못한 상인들을 경계하며 쓰는 말이다. 옛날의 과거시험에는 ‘대과’가 있고 ‘잡과’가 있었다. 대과는 요즘 말하는 인문학에 가까운 분야로 출세의 지름길이었다. 그리고 잡과는 공학이나 의학 같은 기술직이었고 신분이 낮았다. 세월이 흘러 새로운 분야가 대세가 되었다. 요즘 어느 인문학도가 감히 공학과 의학을 잡과라 하겠는가? 그저 ‘문송합니다’ 하고 뒷전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는 시대 아닌가. 잡된 것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다양한 가치를 보여준다. 그렇게 되면 낡은 것도 새로워질 수 있고 작은 것도 더 커질 수 있는, 기회가 넉넉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한다.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 분단 중독증 1991년 남과 북은 유엔에 동시 가입함으로써 ‘사실상’ 별개의 나라가 되었다. 분명히 ‘조국은 하나다’였는데 ‘하나였다’가 된 것이다. 그럼 이제 우리를 가리키는 말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대한민국’ ‘우리나라’ ‘한국’은 다 같은 말인가? ‘대한민국’은 남한의 헌법상 국호이다. 특히 축구 응원에서 ‘대한민국’을 많이 썼다. 그러다가도 남북 친선 축구에서는 그 말을 삼갔던 것만 보아도 그 느낌이 온다. 한 방송을 보니 “불가리아(약 11만㎢)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크기의…”라는 설명이 나온다. 이때의 ‘우리나라’는 남한(약 10만㎢)을 가리키는 셈이다. 베트남(약 33만㎢)에 대한 소개에서도 “우리나라의 약 3.3배에 달하는 면적에…”라는 표현은 우리나라를 남한으로 말할 때 가능하다. 우리에게 우리나라란 여권 없이 마음대로 쉽게 오가는 영토를 가리키는 셈이다. 반면에 ‘한국’이라 하면 남북한을 통틀어 가리키는 느낌이 든다. 인터넷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고 ‘한국 전쟁’ ‘한국어’ ‘분단 한국’ 등의 표현에서도 ‘한국’이 남북을 다 아우르는 포괄적인 의미를 보여준다. ‘한국사’에는 북한 역사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그러나 지난 평창겨울올림픽 폐회식에서 토마스 바흐 올림픽위원장은 “한국과 북한이 평화를 위해 함께했다”고 치하했다. ‘남한과 북한’이라고 했다면 별로 어색하지 않았을 텐데 ‘한국과 북한’이라고 대등하게 나열한 것 자체가 마치 비문법적인 말 같아 보였다. 이러한 낯선 표현은 앞으로 국면이 바뀌어 가면서 점점 더 심해질 것이다. 한국이 남북한 같기도 하고 남한 같기도 한 여러 장면이 나타나는 경우 말이다. 이 모두 우리의 지독한 분단 중독의 후유증이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낯선 말들에 익숙해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슬슬 그 중독에서 깨어나야 한다.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3. 함께 사는 삶 비밀의 얼굴 - 최윤 나는 몇 년 전, 명동 성당에서 열린 프랑스 성서학자 강연의 통역을 부탁받은 적이 있었다. 그 기회로 수녀님과 몇 번 통화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정작 그 강연날 어찌된 영문인지 나는 그만 시간을 한 시간이나 착각해, 내가 막 강연장을 떠나려는데 전화가 울렸다. 이미 오백여 명의 사람들과 강연자가 기다리고 있고 수녀님은 혹시나 해서 전화를 걸어 보았다는 것이다. 미안함과 당혹감에 나는 제대로 사과도 못하고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달려갔으나 결국 꼬박 한 시간이나 늦게 그 장소에 도착했다. 당혹감으로 말하자면 정작 강연의 뒷절차를 책임 맡은 수녀님의 입장이 더할 터였다. 그러나 허겁지겁 내가 도착했을 때, 강독과 찬송가로 차분히 한 시간을 메우고 있던 수녀님은 오히려 내게 미소를 지으며 귓속말로 속삭였다. "딱하셔라. 택시 안에서 내내 얼마나 조바심이 나셨겠어요. 잠시라도 숨을 돌리세요." "빨리 시작하시죠"도 아니고 화가 난 얼굴은 더욱 아니어서, 내 마음을 꼭 집어 위로하는 수녀님의 여유와 이해심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나는 종교를 가진 사람은 아니지만 이 작은 사건으로, 기독교적인 사랑, 용서라는 말의 비밀을 언뜻 본 기분이었다. (소설가, 서강대 불문과 교수) 잊지 못할 두 가지 빚 - 윤석금 나에게는 두 가지 빚이 있다. 어느 날 고향 친구가 회사로 놀러 왔다. 어린 시절에 만나 보고는 정말 오랜만에 만난 친구였다. 차를 한 잔 나누며 이런 저런 말을 주고받던 중 자연스레 사업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내가 말했다. "사업은 잘되는데 자,금이 부족해." 그러자 그 친구가 물었다. "얼마나 돈이 필요해?" 친구간에 나누는 대화라서 나는 스스럼없이 말했다. "한 2억 정도 필요하지." 별뜻 없이 지나가는 말로 했을 뿐인데, 뜻밖에도 친구가 말했다. "돈이 필요하면 갖다 써." 너무나 서슴없이 돈을 갖다 쓰라는 친구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나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분간이 잘 안돼 재차 물었다. "나는 담보로 잡힐 만한 것도 없는 사람인데 자네가 어떻게 큰 돈을 빌려 주겠어?" 그랬더니 그 친구는 역시 거리낌없이 말하는 것이었다. "어음이나 끊어 주고 빌려 가." 나는마음속으로 기쁘기 그지없었으나, 너무 쉽게 돈을 빌릴 수 있게 된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고향 친구라지만 별 교류도 없이 지내다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거액을 빌려 주겠다고 선뜻 나서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 당시, 그 친구는 작은 규모의 신용금고 회사의 이사였다. 사장도 아닌 이사가 선뜻 2억 원씩이나 빌려 주겠다니 어떻게 믿을 수 있었겠는가? 어쨌든 그 친구는 자기의 말대로 그 다음날 1억 원을 빌려 주었고, 그 뒤 여러 번에 걸쳐 나는 5억 원을 더 빌려쓰게 되었다. 그 친구는 자주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산골 중에서도 산골에서 태어났는데, 누구 한 사람이라도 성공해야지. 그러니 네가 한 번 성공해 보렴. 나는 너를 믿어. 네가 성공한다면 그게 나의 기쁨이야." 또 한 가지 빚은, 우리 회사의 대표적 상품인 (어린이 마을)을 개발하면서 우리 직원들로부터 도움을 받은 일이다. (어린이 마을)은 개발 당시 우리 문화, 우리 자연을 담아서 아동들에게 읽힘으로써 잊혀져 가고 있는 우리 것을 회복시킨다는 편집 이념을 고집스럽게 지켜서 개발한 상품이었다. 그런데 촬영한 사진이나 완성한 그림이 취지에 맞지 않아 폐기하기가 일쑤였다. 결국 당초 에상했던 개발비를 무려 2배나 초과하게 되었고, 우리 회사의 재정 상태로는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우리 것의 회복이라는 기치와 함께 회사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만든 책이기 때문에 상업성은 별로 없다고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들이 많았다. 하지만 간부들의 만류에도 나는 본책 열두 권, 부속도서 스물네 권 중 겨우 1차로 완성한 본책 세 권으로 판매를 시작했다. 그 책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판매가 되지 않았다. 그랬으니 만류하던 판매사원들과 간부들의 실의와 불만도 대단했다. 설상가상으로 판매의 부진에다 재정의 어려움, 직원들의 불안이 겹쳐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고통스러웠다. 나는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판매인들의 사기를 돋구지 않으면 안된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판매 매니저들을 모아 놓고 신념을 불어넣었다. "여러분들은 이제 허리가 아파서 돈을 다 못 주울 테니, 열심히 해보시오." 그들은 듣는 둥 마는 둥 했지만 나는 힘을 주어 열 번 스무 번 반복해서 말했다. 그러자 놀라운 변화가 왔다. 몇몇 매니저들이 정말 그럴까 하며 반신반의하더니 차츰 긍정적인 반응으로 호응을 해오는 것이었다. 나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역설했다. "고객에게 한 시간씩, 개발 취지와 우리 것이 필요성을 설명한 후 책을 권하시오." 그러자 판매에 변화가 일더니 (어린이 마을)은 폭발적으로 수요가 급증하기 시작했고, 회사는 최악의 위기에서 일대 전환할 수 있었다. 만일 우리 직원들이 나를 따르지 않았더라면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실패를 했을지도 모른다. (웅진그룹 회장)
Board 삶 속 글 2022.06.08 風文 R 667
속담 순화 속담은 장삼이사 김지이지 이 세상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며 느낀 바와 깨달은 바를 압축적으로 표현해 놓은 일종의 경구들이다. 그러한 어구에는 수많은 민초들의 삶에서 체험되고 재현되어 온 지식들이 더께더께 덧쌓여 있다. 그러나 어쩌랴! 이러한 민초들의 집단 지식에도 심각한 남성 중심의 편견이 여기저기 깔려 있는 것을. 속담 가운데 여성과 연관되는 항목만 찾아보면 여지없이 민망할 정도로 여성을 능멸하거나 깔보는 말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가장 밑바닥에서 서로 의지하며 살아온 기층 서민들 속에서도 여성들은 또 한번 사정없이 짓밟힌 것이다. ‘여자’나 ‘아낙’이라는 단어는 그중 점잖은 편이고 주로 ‘계집’ 혹은 무슨 ‘년’이라는 표현이 흔하다. 국어학자나 사전 편찬자들의 덕목은 이러한 속담도 ‘귀한 언어 자원’ 혹은 ‘유산’으로 소중히 다루는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사흘을 안 때리면 여우가 된다”는 식의 구절을 속담집이나 사전에 그대로 올리는 것이 과연 ‘윤리적으로’ 타당한가? 요즘 성추행이나 성폭력에 분노하는 흐름에 비추어 본다면, 가해자들이 여성에 대한 온갖 추잡한 표현이 사전에 버젓이 나와 있더라고 핑계를 대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이다. 시대가 변하면 안 쓰이는 말이나 기억에서 멀어지는 말도 생긴다. 예를 들어 그리 많이 쓰이던 ‘레지’라는 말은 어느새 가물가물한 옛말이 되었고, ‘괴뢰’라는 말은 두메산골의 사투리 같은 느낌이 날 정도가 되었다. 시대가 지나가고 딴 세상이 된 것이다. 이젠 국어학자들도 사전에서 성평등에 어긋나는 속담들을 거두어들일 때가 된 것 같다. 그런 속담들은 이제 전문가용 ‘연구 자료 수첩’이나 과거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특수한 역사 자료집’ 속에 갈무리해 두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참여해야 할 역사의 흐름이기도 하다.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 파격과 상식 남과 북의 예술단이 서로 방문 공연을 하며 새로운 분위기가 무르익어간다. 그동안 빙하기가 꽤 길었음에도 다행히 서투른 실수나 오해 같은 것 없이 좋은 성과를 거둔 것 같다. 팽팽하던 긴장을 풀어내는 데는 역시 운동경기와 예술공연을 당할 만한 것이 없는 것 같다. 그러면서 이번 남북 접촉에 대한 보도에서는 자주 ‘파격’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일상화된 격식과 관행을 깨뜨린다는 뜻이다. 사전을 보면 ‘파격 대우’나 ‘파격 인사’에서처럼 타성을 극복한다는 적극적인 의미가 보이기도 하고 ‘파격 의상’ ‘파격 노출’처럼 지나치게 튄다는 의미도 보여준다. 그러나 답답하기만 하던 남북 관계에 있어서는 좀 튀더라도 어느 정도 파격은 필요하다고 본다. 한쪽이 파격을 행하는 것은 사실은 상대방도 좀 신선한 모습을 보여달라는 신호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시는 과거로 되돌아가지 말고, 돌이킬 수 없는 새로운 단계에 함께 들어서자는 제안이 맥락에 담겨 있기도 할 것이다. 상대가 파격적 행동을 하면 사실 우리도 파격을 보여줘야 할 부담이 생긴다. 그래야 서로에 대한 신뢰가 생기고 다시는 지난날의 헛된 수순을 되풀이하지 않게 될 것이다. 북쪽의 고위 책임자가 공개적으로 자신에게 책임이 있음을 털어놓거나 최고 지도자의 부인이 통치자를 ‘남편’이라고 불렀다고 해서 오로지 북쪽의 변화만 강조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 마음에는 늘 남쪽은 ‘정상’이요 북쪽의 일은 ‘정상’이 아니라는 선입관이 강하다. 냉정히 본다면 비정상적인 분단 상황에서 제대로 정상적인 것이 남과 북 어느 구석에서나 있을 수 있었겠는가? 분단이 빚은 답답한 관행을 벗어나 끊임없이 파격을 연출하면서 서로 함께 상식의 사회로 들어설 세기의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