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원의 글쓰기 교실 제6교시 : 직유법과 은유법은 글맛을 돋운다. -'무엇은 무엇과 같다' '무엇은 무엇이다'의 묘미 1. 무심히 던졌던 한 마디 강도 푸르고 산도 푸르고 하늘도 푸르고 길섶의 풀잎도 푸르다. 이러한 문장이 하나 있다고 하자. 얼핏보면 매우 잘 쓴 문장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이 문장은 뜻이 아주 애매모호하다. 이 문장을 쓴 사람과 읽는 사람 사이에 드높은 성벽이 가로막혀 있는 느낌이. 그렇다면 그 성벽이란 어떤 것일까? 중학교 2학년때, 나는 아주 절친한 친구와 짝이 되어 무척 기뻤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그 친구와 나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심각하게 사이가 나빠져 버리고 말았다. 그 이유는 대수롭지 않은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점심시간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다 들어온 친구는 운동장에서 느꼈던 신나는 기분을 떨쳐 버리지 못한 채 한창 들 떠 있었다. 그는 여느때 처럼 내 자리로 와서 책상 위에 엎드려 있는 나에게 실없이 장난을 걸었다. 옆구리에 간지럼을 먹이기도 하고, 뒤통수를 슬쩍 때리며 킥킥 거리기도 하고 ...... 하지만 나는 그 장난을 받아줄 만큼 마음이 여유롭지 못했다. 그 전날 저녁, 평소에 좋아하던 여학생에게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격으로 학원비가 든 지갑까지 잃어 버린채 맥이 빠져 있던 참이었다. 그래서 "뒈지지 않으려면 건드리지 마"하고 거칠게 말을 뱉아 버렸다. 내 말을 들은 친구는 나의 어깨를 흔들면서, "무슨일 있었어?"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중대한 일이라도 생겼으면 위로를 해 주겠다는 뜻인 듯. "이 자식아 건드리지 말라고 그랬잖아? 너 정말 죽을래?" 나는 친구의 손을 뿌리치며 이렇게 소리치고는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야아, 왜 그러니? 말좀 해봐"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라구" 친구는 자신의 위로와 친절이 순식간에 거부당한 것이 분하고 억울한 듯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새삼스럽게 따지고 들었다. "야, 뒈지지 않으려면 건드리지 말라고? ... 아니, 이제보니까, 너 사람을 아주 우습게 여기는구나." 그제야 나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나는 애써 표정을 부르럽게 바꾸면서 "아무것도 아니니까 상관하지 마"하고 말했다. 그것은 '네가 상관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니 모른 체해 달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친구는 "아무것도 아니라니? 아니긴 뭐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야? 내가 싫으면 솔직하게 싫다고 그래 그래 정 싫으면 선생님한테 자리를 바꿔 달라고 할 테니까"하고 토라져 버렸다. "아니라니까" 나는 다시 강하게 부인했다. 그것은 '절대로 너와 짝이 된 걸 못마땅하게 여겨서 그렇게 말을 한 것이 아니다' 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그렇지만 친구는 나의 뜻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신경질 적인 목소리로 "너는 '아니라니까'라는 말 말고는 할 줄 아는 말이 없니? 말끝마다 '아니라니까, 아니라니까......' 나는 네가 '아니라니까'라고 할 때마다 속이 상해 죽겠어"하고 말했다. 나는 이제 어떤 말을 하더라도 토라진 친구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그렇듯 절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날 저녁에는 슬프고 쓸쓸한 심정을 가누지 못한 채 혼자서 맥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 날 밤 내내 엎치락 뒤치락하다가 친구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왜 '뒈지지 않으려면'이라는 극단적인 말을 했는지, 또 '건드리지 마라'고 한 말의 의미는 무엇이었는지, '아니라니까'라는 말은 어떤 뜻으로 했는지에 대해 누누이 설명했다. 그런데 그러한 설명을 하면 할수록 더욱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나의 구구한 설명을 친구가 오해할까 두려워 졌다. 이제 한 마디 한 마디의 말 그 모든 것이 무서워 졌다. 나는 친구가 꼬투리를 잡을 수 있을 만한 말에 대해 또 설명하고, 그 설명 가운데서 마음에 걸리는 부분을 도다시 설명하였다. 그러고 나소 보니 공책 9쪽을 빽빽하게 메워 놓았다. 그 때 무심히 던졌던 '뒈지지 않으려면 건드리지 마라'는 한 마디가 나와 친구사이의 감정을 이토록 복잡하게 비틀어 놓은 것이다. 이렇듯 우리들이 사용하는 말 한마디 한 마디는 내 뜻을 상대방에게 온전히 전달해 주지 못할 때가 있다. 또 전해질 필요가 없는 뜻까지 전해져서 감정을 상하게 하기도 한다. 글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글을 길게 써 보아도 내가 말하려는 내용이나 감정, 기분이 읽는 이에게 쉽게 전달되지 않을때가 있다. 이럴 때 우리는 비유를 사용한다. 2. 무엇은 무엇과 같다. 이글의 앞머리에 인용한 문장은 '푸르다'란 말을 생각 없이 너무 함부로 써 버렸다. 낱말은 쓴다고 해서 그 뜻이 오롯이 다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 '푸르다'는 말은 어떤 부분에서는 그 느낌을 온전히 전해 주지만, 또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그 뜻을 제대로 전해주지 못하고 있다. 이 때, 글쓴이가 자신의 뜻을 보다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 동원하는 것이 비유이다. 강, 산, 하늘, 풀잎이 똑같이 푸르를 수는 없다. 그런데도 이 글을 쓴 사람은 '푸르다'라는 낱말 하나로 일관하고 있으니 아주 무책임하다고 할 수 있다. '푸르다'라는 낱말이 표현해 낼 수 있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비유는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사용하는 표현 수단이자 장치이다. (1) 옥색 비단을 깔아 놓은 것 같은 강 (2) 진한 쑥물을 부려 놓은 듯한 산 (3) 쪽물을 들여 놓은 듯싶은 하늘 (4) 늦은 가을 아스팔트 바닥에는 은행잎들이 노랑나비들의 시체처럼 퍼덕이고 있었다. (5) 함박꽃 마냥 탐스런 눈송이가 쏟아지고 있었다. (6) 황소같이 큰 파도들이 모래톱을 들이받고 있었다. (7) 직유법은 안내원이나 누님처럼 다정다감한 비유법이다. (8)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받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의 걸음도 시원하다. -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중에서 (9) 넓바우 연안에서 잎에 잔등 위로 펼쳐진 하늘에 민들레 꽃가루 같은 별들이 달려 있었다. 가득 밀려 오른 바닷물은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원시 양서류 처럼 넘실거리면서, 잠든 사람의 숨길 처럼 불규칙적으로 게으르게 모래톱을 핥고 있었다. 그 물결에서 별들이 덩어리지기라도 하고 더욱 잘게 깨어지기도 하였다 - 한승원의<아리랑별곡> 중에서 위의 물장들은 직유법이 잘 드러나 있는 예들이다. 직유법은 비유법 가운데서 가장 소박하고 친근한 비유이다. 고급스런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어렵거나 까다롭지도 않다. 딱 보면 그 느낌이 그대로 와 닿으므로 부담스럽지 않다. 길눈이 어두운 사람을 손잡아 안내해 주는 예쁜 안내원이나 누님처럼 다정다감한 비유법이다. 그만큼 호소력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비유법이기도 하다. 직유법은 표현 하고자 하는 대상, 즉 '원래의 생각(원관념)'에다가 '비유가 동원된 생각(보조관념)'을 고리로 연결해 놓은 것이다. 손을 잡아 안내해 주는 고리들은 '~처럼','~듯이','~같이','~듯싶다','~마냥','~인 양' 등이 쓰인다. 그래서 직유법은 '무엇은 무엇과 같다'의 형태를 띤다. 하나의 문장 속에 '원래의 생각'과 '비유가 동원된 생각'이 어우러져 그 의미를 더욱 생생하게 드러내 준다. 이 때, 이 둘 사이에는 반드시 같거나 비슷한 점이 있어야 한다. (6)의 '황소같이 큰 파도들이 모래톱을 들이 받고 있었다'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 파도 = 원래의 생각 . 황소 = 비유가 동원된 생각 . 같이 = 위의 두 개념을 연결시켜주는 고리 여기서 '원래의 생각'과 '비유가 동원된 생각'은 '크다'는 점에서 같다고 할 수 이싿. 이번에는 독자들이 보내 온 글들 중에서 직유법이 잘 쓰인 문장 하나를 인용해 보겠다. 어미새가 알을 보호하듯(이) 조심스럽게 내 맘에 품어둔 꿈이 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어떤 것이 '원래의 생각'이고, 어떤 것이 '비유가 동원된 생각'이며, 또 어떤 것이 둘을 '연결시켜주는 고리'인지 각자 생각해 보자. 3 무엇은 무엇이다. 글을 쓰는데 있어 비유법은 싸움터에 나간 장수가 비밀스럽게 숨겨 가지고 있다.가, 문득 꺼내 휘두르는 칼과 같다. 그러므로 비유법을 적절하게 잘 쓰는 사람일수록 글을 잘 쓴다고 할 수 있다. 비유법 중에서 직유법 보다 약간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은유법이다. 은유법은 직유법에서 사용하던 연결고리를 생략한 모양새이다. 그래서 은유법은 '무엇은 무엇이다'의 모양으로 나타난다. '황소같이 큰 파도들이'라는 말은 은유법으로 바꾸려면 '같이'를 생략하면 된다. 즉'파도는 황소이다'가 그것이다. 그러면 밑줄친 부분에 유의하면서, 아해의 예문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1) 낙엽은 폴랑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 길은 한줄기 구겨진 넥타이 처럼 풀어져 일광의 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 열차가 들을 달린다. -김광균의 <추일서정>중에서 (2)고독은 나의 광장 나의 침실 나의 우주 나의 초원 -조병화의 <고독> 중에서 (3) 이슬은 가을 예술의 주옥편이다. 하기야 여름엔들 이슬이 없으랴? 그러나 청랑 그대로의 이슬은 청랑 그대로의 가을이고야 더욱 청량하다. 싱싱한 가을 아침 풀잎마다 꿰어진 이슬 방울들의 영롱도 표현할 말이 막히거니와, 달빛에 젖고 벌래 노래에 엮어진 그 청신한 진주 떨기야 말로 보는 이의 눈만 부실 뿐이다. -이희승의 <청추수제> 중에서 (4)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이브먼트(포장한 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피천득의 <수필> 중에서 이제 은유법이 무엇인지 머릿속에 어느정도 개념이 잡혔으리라 믿는다. 그렇다면 앞에서 직유법의 예로 들었던 문장을 모두 은유법으로 바꾸어 보도록 하자 .옥색 비단을 깔아 놓은 것 같은 강 - 강은 옥색 비단이다. .진한 쑥물을 부려 놓은 듯 한 산 - 산은 진한 쑥물이다. .쪽물을 들여놓은 듯싶은 하늘 - 하늘은 쪽물이다. .늦은가을 아스팔트 바닥에는 은행잎들이 노랑나비들의 시체처럼 퍼덕이고 있었다. - 은행잎들은 노랑나비들의 시체이다. .함박꽃마냥 탐스러운 눈송이가 쏟아지고 있었다.-눈송이는 함박꽃이다. .황소같이 큰 파도들이 모래톱을 들이받고 있었다.-파도는 황소이다. .직유법은 안내원이나 누님처럼 다정다감한 비유법이다. - 직유법은 안내원이나 누님이다. 4. 직유법이나 은유법이 잘 드러난 글 이번에는 독자들이 보내 온 글들 중에서 비유법을 한번 훑어보도록 하자. 아래 문장은 직유법이 잘 드러나 있는 것이다. (잘못된 장래의 희망을) 겨울이 가고 봄이 왔을 때 얼음이 녹고 눈이 녹듯이 서서히 녹여서 저 수평선 너머의 바다로 던져 버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문장은 앞뒤가 안맞는 부분이 있다. 다음과 같이 고쳐 보자. (잘못된 장래의 희망을) 겨울이 지나 따스한 봄이 왔을 때 햇살이 얼음을 녹이고 눈을 녹이듯이 서서히 녹여서 저 수평선 너머의 바다로 던져 버려야 할 것이다. 왜 이렇게 고쳐야 하는지 자세히 살펴본다면 매우 흥미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쓸모 없이 지내고 있는 시간이 아깝지 않느냐고, 내 마음속 어느 깊숙한 곳에서 내 뒤통수를 내리쳤다. 위의 문장에서 '내 뒤통수를 내리쳤다'를 직유법으로 바꾸어 보는건 어떨까? 내 뒤통수를 내리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문장도 다음과 같이 고치는 것이 바람직 하다. 어느 부분을 어떻게 고쳤는지 살펴보기 바란다. 이렇게 쓸모 없이 지내고 있는 시간이 아깝지 않느냐는 생각이, 내 마음속 어느 깊숙한 곳에서 뒤통수를 내리쳤다. 다음 문장도 직유법을 잘 쓰고 있다. 나의 미래는 뿌연 안개에 가려져 있는 것만 같다. 이것을 은유법으로 바꾸어 보도록 하자. 나의 미래는 뿌연 안개이다. 5. 비유는 글쓴이의 개성에 따라 다르다. 직유법과 은유법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직유법은 그 뜻을 쉽게 알 수 있어 친근하고 소탈한 반면, '같이','처럼','듯이','마냥' 등의 연결고리를 붙이기 때문에 조금은 너덜너덜해 보인다. 이에 비해 은유법은 그 연결 고리를 생각하기 때문에 깨끗하고 산뜻한 느낌을 준다. 그런만큼 은유법은 좀 거만해 보이고 쌀쌀해 보인다고 할까. 하지만 이 둘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훌륭하다고 한 마디로 잘라 말할 수는 없다. 둘 다 그 나름의 장.단점이 있으니까. 글을 쓰면서 직유법으로 쓸 것인가, 은유법으로 쓸 것인가 하는 것은 그 글을 쓰는 사람의 성격이나 취향에 따라 다를 뿐이다. 생각해 봅시다. 1. 비유법 중에서 가장 소박하고 단순한 것은 직유법이다. 이 직유법에는 반드시 연결 고리가 사용된다. 그렇다면 그 문장이 직유법을 쓰고 있음을 단박에 알아차릴수 있는 그 연결고리로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아는대로 적어보자. 2. '내 마음은 호수요'나,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다'등은 은유법의 대표적인 예 들이다. 이 문장을 직유법으로 바꾸어 보고 은유법과 직유법은 djEJs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해 보자.
Board 고사성어 2022.06.18 風文 R 783
새로운 한자어 한자어는 중국어(한어)에서 유입된 어휘인데 워낙에 오랜 세월 동안 영향을 받아온 탓에 어떤 말들은 마치 토착어인 듯 익숙하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도 불편하거나 생경하기만 한 한자어들도 있어서 그때그때 말을 다듬어 쓸 필요가 있다. 1992년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은 이래 문물 교류의 폭도 넓어지고 새로운 중국식 어휘도 많이 들어왔다. 중국에서는 자동차를 기차(汽?)라고 한다. 정보는 신식(信息), 텔레비전은 전시(??), 쇼핑은 구물(?物) 등 우리가 알고 있던 한자어들과는 다르다. 이러한 새 한자어에 해당하는 말은 이미 우리한테도 있기 때문에 별 영향이 없다. 우리한테 없는 개념은 아예 중국 발음 그대로 들어왔다. 유커(游客)니 산커(散客)니 하는 말들이다. 근간의 남북 관계를 다루면서 중국 측에서 해법으로 제시한 용어들이 눈에 띈다. 쌍중단(雙中斷), 쌍궤병행(雙軌竝行), 쌍잠정(雙暫停)과 같은 단어들로, 쌍중단은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과 한-미 연합훈련을 동시에 중단하는 것이고 쌍궤병행은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 평화협상의 동시 진행을 말한다. 쌍잠정은 양측의 군사 경쟁을 잠시 멈추자는 말이다. 모두 중국어다운 함축성이 돋보이나 우리 언어 감각에는 낯설기 그지없다. 차라리 좀 길더라도 ‘쌍방 (잠정) 중단’이라든지 ‘쌍방 동시 진행’ 같은 식으로 말하는 것이 우리한테는 더 편리할 것 같다.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은 우리의 명운이 걸려 있는 일이다. 또 국제적인 이해관계도 복잡하고 의견들이 엇갈리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우리한테 익숙지 않은, 중국식 표현법 혹은 ‘비핵화 프로세스’니 ‘시브이아이디’(CVID) 같은 영어식 표현 등이 나돌아다닌다. 그러나 다시 보면 한반도 문제 해결에 대한 최후의 동의권은 바로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그러니만큼 우리가 잘 이해하고 혼란을 느끼지 않는 말로 그 개념이 정리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 이름과 실천 이름을 짓는 일은 매우 자의적인 행동 같지만 사실 명명자의 마음속 이념이나 가치관의 영향을 심하게 받는다. 여자아이의 이름을 ‘예쁜이’라고 지으면서 그저 예뻐서 그렇게 지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여성의 삶에서 미모가 우선적이라는 가치 지향의 태도가 나타난 것이기도 하다. 남자아이 이름에 용감할 용(勇)자를 넣는 것도 그러한 해석이 가능하다. 인명이나 지명만이 아니다. 공공의 목적이나 가치중립적인 활동을 지향하는 조직의 명칭도 은연중에 일정한 이념적 냄새를 숨기지 못한다. 어느 지방의 지방자치 조직에는 ‘새마을과’라는 부서도 있었다. 곧 없앤다니 다행이다. 한때 대학에 ‘학도호국단’이란 어용 학생조직이 당연하다는 듯 모든 학생들을 단원으로 삼고 있던 시절도 있었다. 이제는 검찰청에서도 서슬 퍼렇던 ‘공안’이라는 부서가 사라진다고 한다. 사실 공공의 안전이라는 그 낱말 뜻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단지 그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횡포가 그 이름에 대한 거부감을 불러온 것이다. 유혈이 낭자하던 프랑스혁명 시기의 ‘공안위원회’만큼은 아니었지만 그 이름으로 나라의 안전을 구실 삼아 사람들의 천부적 권리에 상처를 많이 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다 보니 ‘공안적 시각’이란 말은 수구적이고 냉전적인 안보중심적 시각이라는 의미나 다름없이 사용되었다. 과거를 반성하고 이름을 뜯어고치는 것을 말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새로운 이름으로 또 마찬가지 행동을 하게 되면 우리 모두에게 허무감만 남길 것이다. ‘보안사’를 ‘기무사’로 바꿨는데 이름만 바꿨지 알맹이는 그대로가 아닌가? 껍데기만 바꾸는 일이 지속된다면 이름을 바꿀 때마다 오히려 그 이름에 대한, 또 언어에 대한 신뢰만 그만큼 떨어질 뿐이다. 지속가능한 이름은 지속가능한 실천이 전제될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3. 비유가 돋보이는 글 이번에는 '이성친구의 모순성' 이라는 제목으로 보내온 독자의 글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이성친구란 무엇일까. 사전에도 나오지 않은 이 별 것 아닌 존재는 지금 우리에겐 너무나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한 번도 사귀어 보지 못한 나조차도 말이다. 남녀간의 강한 본능일까. 남자만 보면 좋아지고 여자만 보면 부끄러워지는., 하느님께서 주신 하나의 혜택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남녀가 만나서 하나의 결실을 맺고...... 그런 위험한 일들, 왜 이리도 하고 싶은지 내 자신도 이해할 수 없다. 중학교라는 곳에 와 보니까 더욱 이것을 강조하는 것이 눈에 보이고 있다. 가정책에 노오란 별표를 몇 개씩 쳐 놓은 곳엔 '사춘기의 이성교제는 성관계나 건전하지 못한 이성에 대한 관심이 아니어야 한다.' 라는 것...... 나도 모르게 웃음을 토했다. 길거리에서 팔짱을 끼고 좋아하는 중.고등학생, 남의 눈은 의식하지도 않은채 길거리에서 진한 포옹을 나누는 나의 선배들...... 그들이 왠지 미워 보인다. 그들이 왠지 나빠보인다. 난 이런 교과서에서 나올 듯한 딱딱한 모순만을 가지다 이렇게 용기없는 사람이 된 것일까, 내가 그들을 이토록 미워하는 건 아마 내가 가지지 못한 그 무엇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성친구란 결코 나쁜것만은 아니다. 난 물론 서로를 존중하고......뭐 이런말은 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시기가 너무 빨랐을 뿐...... 어른이 아니기 때문...... 이 말 말고는 달리 할 말도, 하고 싶은 말도 없다. 마음의 성숙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상 남녀의 이성 교제는 위험한 모험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음 세대에게도 적용될지 아무도 모른다. 여기서 '마음의 성숙'이란 표현은 재미있는 비유이다. 우리들의 몸이 성숙해 가는 것은 쉽게 눈에 보인다. 사춘기 시절의 남성과 여성은 한 해가 다르게 키가 크고 어른스럽게 변해 간다. 여성은 살갗이 하얘지고 가슴이 부풀어 오르고 머릿결이 고와진다. 또 남성은 수염이 나고 변성기가 되면서 가슴이 떡 벌어진다. 그런데 마음의 성숙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어리광을 부리지 않게 되어가는 것,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을 자제하고 나보다 나은 사람에게 부러움 없는 박수를 보낼 줄 알게 되어가는 것, 이것이 바로 마음의 성숙일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결실', '교과서에 나올듯한'과 같은 표현도 모두 비유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결실'이란 말은 나무가 대지에 뿌리를 내린 뒤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 처럼, 남녀도 만나 사랑을 하게 되면 그 열매로 서로 아이를 낳게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교과서에나 나올 듯한' 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실제로 교과서에서 나왔다는 것이 아니라 교과서라는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느낌을 읽는 이에게 전달하려는 것이다. 자, 그러면 이제 이 글을 함께 다듬어 보도록 하자. 이성친구란 무엇일까.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이 별스럽지 않은 이성간의 사귐이란 말은 지금 우리의 가슴속에 매우 버거운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남자 친구를 한 번도 사귀어 보지 못한 나조차도 이성 친구에 대한 생각을 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곤 하니 말이다. 그것이 바로 남녀 모두 어찌할 수 없는 본능일까. 여성은 훤칠하고 씩식한 남자만 보면 가슴이 두근거려지고, 남성은 얼굴이 예쁜 여자만 보면 접근해 보고 싶어지는 심리, 그것은 어쩌면 하느님께서 주신 하나의 혜택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남녀가 만나서 사랑을 고백하고 그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소유하고 그런 다음 하나의 결실을 맺는 것....., 그런 것들은 우리처럼 이제 사춘기에 접어든 학생들에게는 아직 엄두도 낼 수 없는 위험스런 일들이다. 그렇다는 것을 아고 있으면서도 남성과 여성은 왜 이다지도 서로의 신비한 세계를 알고 싶어지는지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다. 중학교에 진학을 하고 나니까, 가까운 친구들이 초등학교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이성 친구 문제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러다 보니, 옷차림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고 머리모양을 예쁘게 만들려 하고, 의젓하게 행동하려 하고. 이성친구를 의식해서 호들갑스럽게 소리쳐 웃기도 하는 것이 자주 눈에 띈다. 가정책에 노오란 별표를 몇 개씩이나 쳐 놓은 곳엔, '사춘기의 이성교제는 성관계나 건전하지 못한 이성에 대한 관심이 아니어야 한다'라고 쓰여 있다. 이것을 읽을 때마다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곤 한다. 길거리에서 이성 친구들과 팔짱을 끼고 다니는 중.고등학생들, 남의 눈을 의식하지도 않은채 아무데서나 진한 포옹을 나누는 선배 오빠 언니들...... 나는 왠지 그들이 미워 보인다. 어쩐지 부도덕해 보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마저도 이성 친구에게 관시이 많은 것이 사실이면서도 그들을 좋지 않게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 오히려 모순된 것일까. 아니면 도덕 교과서에나 나올듯한 케케묵은 생각을 가지고 살다 보니 진짜로 용기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걸까. 아니, 내가 글들을 이토록 미워하고 부도덕하게 보는 것은, 내가 가지지 못한 그 무엇을 그들이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질투와 시기심이 생겨서 그러는지도 모른다. 우리도 자라면 이성친구를 사귀게 될 것이다. 이성친구를 사귀는 것은 결코 나쁜 일만은 아니다. 사람이 이성친구와 사귀는 것은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일 중의 하나일 것이다. 우리 집안에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시고, 우리는 그분들의 금슬 좋은 삶 속에서 태어난 존재들이 아닌가, 하늘이 있으니 바다가 있고, 산이 있으니 강물이 있듯이, 나는 물론 이성간에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를 사랑하고...... 아직 중학생인 우리로서는 더 깊은 것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겠다. 우리가 이성친구 문제에 신경을 쓰기에는 지금 시기가 너무 이르다. 어른이 될 때까지 당분간 보류해 놓고 지금은 공부를 하는 것이 좋겠다. 마음의 성숙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 있는 우리 사춘기 시절의 이성 교제는 위험한 모험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 이말은 다음 세대에게도 그대로 적용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4. 맺음말 이럿듯 비유는 나타내려고 하는 대상이나 내용을, 읽는이가 알기 쉬운 다른 대상이나 내용에 빗대어 보다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청잣빛 하늘이 육모정 탑 위에 그릿듯이 곱고 연못 창포앞에 여인네 맵시 위에 감미로운 첫 여름이 흐른다. 라일락 숲에 내 젊은 꿈이 나비처럼 앉은 정오 계절의 여왕 오월의 푸른 여신 앞에 내가 웬일로 무색하고 외롭구나 밀물처럼 가슴속으로 몰려드는 향수를 어찌하는 수 없어 눈은 먼 데 하늘을 본다. 기인 담을 끼고 외따른 길을 걸으며 걸으며 생각은 무지개처럼 핀다. 풀냄새가 물큰 향수보다 좋게 내 코를 스치고 청머루 순이 뻗어 나오던 길섶 어디메선가 한나절 꿩이 울고 나는 활나물 혼닢나물 젓갈나물 참나물 고사리를 찾던- 잃어버린 날이 그립구나, 나의 사람아. 아름다운 노래라도 부르자. 아니 서러운 노래를 부르자. 보리밭 푸른 물결을 헤치며 종달이 모양 내 마음은 하늘 높이 솟는다. 오월의 창공이여. 나의 태양이여 -노천명의 <푸른오월> 이 시는 시인의 자유분방한 상상을 상징적 수법으로 포착한 시이다. 화창한 초여름날 산책을 하며 아름다운 경치를 보다가, 문득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슬픔을 느낀다. 화사한 오월의 아름다움이 시인의 초라함과 대비되면서,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던 어린 날이 그리워 지는 것이다. 시인을 서러움으로 물들인 그 화사한 오월은 '계절의 여왕'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시인은 '오월'을 '여왕'에 빗댐으로써 계절중에서 오월이 가장 아름답고 우아하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오월은 무한히 아름답다고 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또렷하게 그 느낌이 가슴에 와 닿지 않는가? 이것이 바로 비유의 참맛이다. 생각해 봅시다. 1. 우린는 글을 쓸 때, 여러 가지 비유를 동원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2. 강나루 건너서/밀밭길을,//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길은 외줄기/남도 삼백리.//술 익는 마을마다/타는 저녁놀.//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 박목월의 <나그네>를 감상해 보고, 대표적으로 쓰인 비유법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한승원의 글쓰기 교실 나만의 글쓰기 비법 5교시 - 비유, 글쓴이의 느낌을 그대로 나타내라 - 비유는 공감을 이끌어내는 생생한 글을 만든다. 1. 배 타고 강 건너가기 여러분들은 매일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 학교에 가곤한다. 만약 여러분들이 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드넓은 강을 건너야 한다면 어떻게 할까? 무작정 물속으로 뛰어들어 헤엄쳐 볼 것인가? 그랬다가는 학교가는건 고사하고 물에빠져죽기에 꼭 알맞다. 그럴때는 강 너머로 안전한게 건너갈 수 있는 도구를 이용해야 한다. 배나 뗏목같은 것 말이다. 아니면 다리라도 놓아야 한다. 이 때 강을 건너는데에 사용하는 배나 뗏목, 다리 같은 것이 문장에서의 비유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비유란 주제(학교)를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자 장치이다. "어머니, 어머니, 굉장해요! 정말정말 굉장해요!" 하고 창길이는 현관 안으로 들어서면서, 그야말로 감격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뭐가 굉장하다는 말이냐? 차근차근 말해봐라." 어머니는 여느 때 덜렁대는 버릇이 있는 창길이를 꾸짓으며 말씀하셨다. "정말이야 무지무지 굉장하다구요!" 하지만 창길이는 여전히 흥분된 목소리로 외쳐댔다. 위의 글을 쓴 사람은 자기의 글에 비유를 동원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감격어린', '굉장해', '정말정말', '무지무지하게' 이런말들로는 그 글을 쓴 사람의 감정을 제대로 전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턱대고 물 속에 뛰어든 다음, 헤엄을 쳐서 강을 건너겠다는 사람과 똑같이 어리석은 것이다. 앞의 글에서 '창길이는 현관 안으로 들어서면서, 그야말로 감격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고 하는 부분을 함께 고쳐보도록 하자. 창길이는 현관안으로 들어서면서, 난생처음 쌍무지개를 보고 돌아온 소년처럼 상기되어 소리쳤다. 이렇게 비유를 해 놓고 보니까, 어머니 앞에서 감격적으로 말하고 있는 창길이의 모습이 요술처럼 강한 영상으로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가? 이번에는 다음의 글들을 비교해 보도록 하자. (1) 진짜로 무더운 날씨였다. 할아버지께서 "아이고, 그 날씨 한번 무지무지하게 덥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아버지께서도 "굉장히 덥구나" 하셨고, 형도 "아이고 더워서 그냥 미치고 환장하겠네 하였다." 잠시 후에는 어머니께서도 "나, 이렇게 더운날씨는 생전 처음보겠네 휴우 덥다"하고 말씀하셨다. (2) 섭씨 40도가 넘는 한증막 속에 들어 앉아 있는 것 같았다. (3)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마당에는 하얀 불볕이 쏟아졌다. 밖에 나갔던 바둑이가 혀를 길레 빼늘이고 헐떡 거리며 들어와 담벽 그늘에 주저 앉았다. 돌담벽에 기어올라가는 호박덩굴의 입사귀들이 바둑이의 혀처럼 늘어져 있었다. 담벽에 둘러선 감나무에 매달린 잎사귀 하나 움직거리지 않았다. 선풍기를 틀고 얼굴을 그 앞에 들이밀어 보지만 그 바람마저 후끈거렸다. 등줄기에는 벌레가 기어가는 것 처럼 땀방울이 스멀스멀 기어 내렸다. (1)은 비유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의 글이므로, 공연히 엄살과 허풍만 떨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2)는 단 한마디의 비유를 통해서 그 무더움의 정도를 명쾌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글은 매우 차분하고 여유가 있다. (3)은 무더위를 아주 차근차근하게 묘사해 주고 있다. 작가가 설명을 하려 애쓰지 않고 그 상황을 그대로 드러내 주어(형상화시켜) 읽는이가 저저로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래서 이 글속의 무더위는 읽는이의 가슴마저도 답답하게 할 만큼 절실하다. 2. 나의 느낌을 읽는이에게 그대로 우리는 다름 사람의 마음속에 나의 인상을 뚜렷이 심어주고 싶을 때,옷차림을 돋보이게 하든가 액서사리를 하든가 해서 시선을 끌려고 한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읽는이에게 나의 감정이나 기분을 보다 잘 보여주기 위해서는 갖가지 비유들을 사용한다. 내가 느끼는 것들을 읽는이의 가슴에 고스란히 옮겨주고 싶은 까닭이다. 그러므로 비유의 글을 쓰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번에는 비유가 잘 드러나 있는 글을 한 편 소개할까 한다. (4) 우리 집 현관 앞 마당에는 붉은 모란나무가 세 그루 있다. 나무의 키가 내 가슴께에 이르는데, 그 가지와 잎이 무성하여 현관에서 마당으로 나가는 길을 늘 비좁게 한다. 여름철에 비가 올 때면 그 잎들은 물을 품고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흩뿌리곤 해서, 나는 그 가지들을 끈으로 묶어 뒤쪽으로 잡아당겨 놓곤 한다. 몇 해 전에 이미 나이가 많은 것을 사다가 심어두었기 때문에 우리 식구들은 해마다 5월 초순쯤이면 벌어지곤 하는 진홍에 보랏빛이 섞인 모란 이삼십 송이씩을 볼 수 있다. 그 꽃송이들이 하루쯤의 시차를 두고 모두 벌어질때면 온 집안이 불을 밝힌 듯 훤해 진다. 그때마다 그 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웃음과 가슴 두근거리는 환희의 말들을 가볍게 내지르곤 한다. 그래서인지 우리 식구들은 마당 가득히 모란이 피는 여름철이면 내내 넉넉해 지고 또 들뜨게 된다. 모란나무에 사슴뿔처럼 생긴 갈색 움이 트는 것은 4월 초순이다. 나는 이 때쯤이면 이미 5월에 피어날 꽃송이들의 수를 알아차린다. 모란의 살색 움은 처음부터 꽃송이의 모양새를 갖추고 나오므로, 이때부터 나는 날마다 그것들의 수를 헤아리며, 찬란한 5월의 대기 속에서 흐드러지게 벌어질 꽃송이들을 머릿속에 그려 보면서 그 날을 기다린다. 그런데 지난 4월에 나는 모란나무가 틔운 음을 보고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갈색 움 속에서 솟아올라야 할 꽃송이 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세 그루의 나무 가운데 오직 하나의 가지만 꽃 모양새를 갖춘 움을 밀어 올리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 만에야 나는 '아차, 그렇구나' 하고 속으로 부르짖었다. 나는 모란나무들이 너무 무성하여 귀찮다는 생각을 한 나머지, 지난해 늦은 가을 잎사귀들이 다 떨어졌을 때 모란나무 가지들의 가운데 부분을 모두 끊어 버렸던 것이다. 그래도 다음해에 나오는 새 움들은 별일 없이 꽃들을 만들어 내리라는 생각을 하며. (5) 꽃 모양새를 갖춘 움을 밀어 올린 그 가지는 다른 가지들에 비해 길이가 짧은 까닭으로 유일하게 잘려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이 얼마나 미련한 사람인가, 모란나무가 늦가을에 잎을 떨어뜨리면서 다음해에 피울 꽃을 미리 준비해 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나는, 이 글을 쓴 사람은 (4)에서 모란나무의 가지를 자른 일화 하나를 그저 담담하게 말하고 난 뒤, (5)에서 주제를 이야기 하고 있다. 그 주제는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경계'하는 것이다. 자기의 편의에 따라 자연의 순리를 무너뜨려 놓고는 자연에게서 거저 얻으려고만 하는 인간의 심리를 경계하고 있다. 그러한 주제를 보다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글쓴이는 여러 가지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
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3. 함께 사는 삶 어울려서 산다 - 정일문 24분 만에 와야 할 차가 48분 만에 나타났다. 승객들은 끊임없이 이리 밀리고 저리 조여야만 했다 역에 닿을 때마다 비명이 일더니 구로역에서는 아우성으로 변했다.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렸고 이어서 누군가가 어린이를 보호하자고 소리쳤다. 그러자 신통하게도 안쪽 의자에 앉아 있던 젊은이들이 일어났다. 대신 아기를 업은 아주머니가 앉혀졌고 어른들의 다리 사이에서 울고 있던 아이가 빠져 나왔다. 그러나 즐거운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차가 관악역에서 특급 열차를 먼저 보내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을 때였다. 그렇잖아도 늦은 차가 대기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승객들은 잔뜩 떫은 감 베어물은 얼굴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내 옆의 술기운이 눈가에 게슴츠레 나타난 젊은이가 앞으로나선 것은. 그는 식 웃으면서 말했다. "승객 여러분, 우리 조금만 더 기분 좋게 참읍시다." 무슨 또 술주정인가, 승객들은 두리번거렸다. 그의 동행인 듯한 그러나 그보다도 더 취해서 흔들리는 젊은이가 그를 제지하려고 하였으나 그의 열선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여러분, 우리 나라의 정치는 날로 밝아지고 잇습니다. 우리도 마음을 밝게 가집시다. 옆 사람하고 이야기도 나누면서 신문도 서로 바꿔 보면서 즐겁게 기다리십시다요.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기다려 왔습니까." 그러자 저 안쪽에서 누군가가 "옳소" 하고 찬성을 표시했다. 여기저기서 키들키들 웃음이 터졌다. 짜증으로 뒤범벅이 되었던 차안에 어떤 바람 같은 것이 지나는 느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노래 하나 하시요" 라고 누군가가 받아서 말했다. "좋지요" 라고 젊은이가 응하자 여러 군데서 박수가 나왔다. 실로 놀라운 발전이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기도 어려운 누가 감히 낯선 사람들 앞에서 정치가 어떻다고 말하며 나설 수가 있었는가. 그리고 누가 감히 옳다고 화답할 수 있었는가. 우리는 그저 하염없이 홀로 타고 홀로 내리며 홀로 생각할 뿐이었지 않았는가. "그럼 제가 노래를 하겠습니다. 그 대신 여러분, 길을 가실 때 구세군의 종소리를 들으시거나 불우한 이웃을 돕자는 모금함을 보시거든 제 노래를 생각하시어 그냥 지나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의 입에서 노래가 흘러 나왔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젖는 배사공..." 끝절에 이르러서는 안쪽의 누군가가 그의 노래를 따라서 불렀다.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수원시 화서동 거주) 어떤 부자 - 강길웅 휠체어마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베드로 형제가 새벽 일찍 혼자 화장싱에 가다가 넘어지는 통에 엉덩이를 다쳐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러자 아들 분도가 매일 찾아와서 성화를 대었다. "아브디 언데 와?" 벙어리는 아니지만 분도는 말을 잘 못하며 또 알고 있는 단어도 몇 개 되지 않았다. 그러자 아버지가 좀 퉁명스럽게 물었다. "뭣 땜시로 매일 찾아와서 성가시게 구느냐?" 내심으로는 기특해 하면서도 너이에 걸맞지 않게 바보스런 아들을 보고 짐짓 한 번 소리쳐 본 것이었다. "아브디 없으니까 혼다 무더워서 못 다겠어." 나이가 쉰이 다된 늙은 아들이 아버지 없이 혼자 무서워서 못 자겠다고하자 아버지 눈에 금방 이슬이 맺혔다. 분도는 베드로 형제의 양아들이다. 1949년생이라 나이는 쉰이 다되었지만 지능과 정신 연령은 세 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양아버지인 베드로 형제는 올해 일흔일곱에 앞 못 보는 봉사이며 두 다리는 절각 되었고 또 손가락이 없어 거동이 아주 불편한 분이다. 그런데 두부자가 서로 잘살고 있다. 본래 베드로 형제는 열두 살에 나병을 얻어 열네 살에 소록도에 입원을 했으니 그동안 소록도에서 산 햇수만도 63년이 된다. 경상도 어느 시골에서 오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다가 어느 날 복숭아뼈 부근에 반점 같은 것이 생기면서 부기가 있었는데 아무리 눌러도 아프지 않았다. 그리고 열세 살 때는 눈썹이 몽땅 빠지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베드로 소년은 동네의 눈총을 받았으며 1년 이상 집 안의 골방에 갇혀 지냈다. 결국 베드로 소년은 관에 신고되어 다른 환자들과 함께 트럭으로 열차로 그리고 나중에는 부산에서 배를 타고 소록도에 입원했는데 그때 함께 입원한 환자들이 삼백 명쯤 되었다고 한다. 그때 아버지가 소년 베드로를 전송하면서 "너는 오늘부터 내 자식이 아니다. 그리고 나도 네 아비가 아니다"라고 했단다. 그후로 베드로 소년은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으며 또 한 가족을 한 번도 만난 적도 없었다. 베드로는 보통학교(초등학교)에서도 공부를 잘했고 말도 잘 들어서 병원 직원들 뿐만 아니라 주의 여러 어른들로부터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 결혼도 하여 가정을 꾸렸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자 다른 어린 환자들을 양자로 삼아 그들을 보살펴 주곤 했다. 그러나 결과가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러 양자를 기르면서 많은 고통을 겪었다. 첫 번째 양자가 마약에 빠져 결국 자살했는가 하면 두 번째 양자도 그 행실이 좋지 못하다가 일찍 병사했고, 세 번째도 병사했으며, 네 번째는 여식이었는데 처녀 때 행방불명이 된 채 지금껏 소식이 없다. 그들 모두가 너무 일찍 병을 얻은 충격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주위에서 베드로 형제를 비난하는 자들도 없지 않았다. 발 없고 손 없는 어른이 아이들을 이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베드로 형제가 마음으로 입은 상처도 상당했다. 자신은 부모와 형제로부터 버림을 받았는데 결국 자신이 기른 양자들로부터도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다시는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고 내 사는 대로만 살겠다고 다짐했으나 그러나 사랑을 나누지 못하는 것은 더 큰 지옥이었다. 바로 그때 나타난 것이 '분도'였다 분도는 나병에다가 말도 그저 '어, 어' 밖에 못하는 일종의 벙어리였으며 지능은 아주 낮은데 그때 당시 나이는 서른이 넘었다. 사무실에서는 이래서는 안되겠다 해서 보호자를 찾은 것이 결국 베드로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제 눈도 멀고 할멈도 없는 데다가 손발이 성치 못한 불구의 몸으로 도저히 분도를 키울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러나 주위에서 배드로 영감만이 분도를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하여 나중에는 흔쾌히 양자로 받아들였는데 이래서 분도가 베드로 형제의 다섯 번째 양자가 되었다. 베드로 형제는 남의 아이들을 키워 봤기 때문에 사람 다루는 기술을 나름대로 터득하고 있었다. 분도의 그 쓰레기 같은 소지품들을 다 태워 버리고 일체 새것으로 바꿔 주었으며 "바보도 사람이다!" 라는 인격에 대한 존경심으로 말 못하는 그를 달래고 얼러서 사람 노릇을 하게 만들었다. 분도는 다른 어린아이들이 그렇듯이 뭘 갖는 것을 좋아했다. 이를테면 볼 줄도 모르면서 시계를 차는 것을 원했으며, 들을 줄도 모르면서 카세트 녹음기를 달라고 졸라댔고, 그리고 자전거를 원해서 자전거를 사주기도 했다. 시계는 여전히 볼 줄을 모르지만 그러나 다른 것들은 제법 듣고 다루게 되었다. 그런데 묘한 것은 베드로 형제가 참사랑을 쏟자 분도 쪽에서도 참사랑이 솟구치게 된 것이었다. 아버지 소중한 줄을 깨닫게 되어 말도 제법 배우고 사람 노릇을 하게 되었으며, 이제는 베드로 형제의 손발과 눈귀가 되어 하나부터 열까지 지성으로 아버지를 받드는 것이었다. 이걸 보고 사람들이 감탄을 했다. 분도가 모자라기는 한참 모자라지만 그러나 심성은 참으로 고운 사람이다. 아버지가 아파서 미사에 못 나오면 자기도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나한테 와서 아버지가 아프다고 일러준다. 산에서 밤을 주워다가 아버지께 드리며 아버지 먹으라고 졸라댈 때는 눈물을 자아내기도 한다. 세상은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다. 작은 자를 큰 사람으로 보는 눈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는 마치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이나 세상으로부터 오는 은혜가 다른 것이다. 우리도 진정 작은 자를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작은 자 안에 우리의 미래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분도 형제가 그것을 보여 주고 있다. (소록도성당 주임신부)
Board 삶 속 글 2022.06.17 風文 R 502
배수지진(背水之陣) / ① (물러설 수 없도록)물을 등지고 적을 치는 전법의 하나. ②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경우의 비유. 《出典》'史記' 淮陰侯列傳 / '十八史略' 한나라 고조 유방(劉邦)이 제위(帝位)에 오르기 2년 전(BC 204)의 일이다. 명장 한신(韓信)은 유방의 명에 따라 위(魏)나라를 쳐부순 다음 조(趙)나라로 쳐들어갔다. 그러자 조나라에서는 20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조나라로 들어오는 길목인 정형(井?)의 협도(狹道) 출구 쪽에 성채(城砦)를 구축하고 방어선을 폈다. 이에 앞서 군략가인 아좌거(李左車)가 재상 진여(陳餘)에게 '한나라 군사가 협도를 통과할 때 들이치자'고 건의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는데, 첩자를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한신은 서둘러 협도를 통과하다가 출구를 10리쯤 앞둔 곳에서 일단 행군을 멈췄다. 이윽고 밤이 깊어지자 한신은 2,000여 기병을 조나라의 성채 바로 뒷산에 매복시키기로 하고 매복 임무를 맡은 장수에게 이렇게 명했다. "본대(本隊)는 내일 싸움에서 거짓 패주(敗走)할 것이다. 그 때 제군들은 적이 비운 성채를 점령한 뒤 한나라 깃발을 세우도록 하라." 그리고 한신은 1만여 군사를 협도 출구 쪽으로 보내어 '강을 등지고 진을 치게[背水之陣]' 한 다음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성채를 향해 나아갔다. 이윽고 날이 밝았다. 한나라 군사가 북을 울리며 진격하자 조나라 군사는 성채를 나와 응전했다. 2-3차 접전 끝에 한나라 군사는 퇴각하여 강가에 진을 친 부대에 합류했고, 승세(勝勢)를 탄 조나라 군사는 맹렬히 추격해 왔다. 한편 이러한 틈에 매복하고 있던 2,000여 한나라 기병대는 성채를 점령하고 한나라 깃발을 세웠다. 강을 등지고 진을 친 한나라 군사는 물러나지도 못하는 상황인지라 필사적으로 대항하여 싸웠다. 이에 견디지 못한 조나라 군사가 성채로 돌아와 보니, 한나라 깃발이 나부끼고 있지 않는가. 당연히 전쟁은 한신의 대승리로 끝났다. 전승 축하연 때 부하 장수들이 배수진(背水陣)을 친 이유를 묻자 한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군사는 이번에 급히 편성한 오합지졸(烏合之卒)이 아닌가? 이런 군사는 사지(死地)에 두어야만 필사적으로 싸우는 법이다. 그래서 '강을 등지고 진을 친 것[背水之陣]'이다." 【동의어】배수진(背水陣)
Board 고사성어 2022.06.17 風文 R 718
우리와 외국인 제 나라에서 살고 있으면 내국인이고 나라를 떠나면 외국인이 된다. 그러니 똑같은 사람이 서 있는 장소에 따라 그 명칭이 달라지는 셈이다. 대화를 하다가 ‘나’가 ‘너’가 되기도 하고 ‘너’가 ‘나’가 되기도 하듯이 말이다. 일종의 대명사 같은 용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휘 자체가 아니라 일정한 공간적 자리매김에 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 다녀온 사람의 이야기다. 로스앤젤레스 시내의 한 카페에 한국인 유학생들이 모여서 왁자지껄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참 떠들다가 그중 하나가 “야, 여기 외국인들도 많은데 우리가 너무 시끄럽게 굴었다. 창피하니까 좀 조용히 하자” 하더란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엄밀하게 말한다면 사실 그 유학생들 자신이 외국인들이고 그 주변 사람들이 내국인이다. 우리는 혹시 말이 잘 통하면 ‘우리’, 잘 안 통하면 ‘외국인’, 이렇게 딱지를 붙이며 살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외국인이라는 말 자체가 불필요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왜 일상적으로 ‘국적’에 신경을 써야 하는가 하는 의문도 있다. 과거에는 외국인을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기도 했다. 그들은 뭔가 있어 보였고 우리는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와 ‘그들’의 차이가 점점 흐릿해진다. 세계화의 일정한 단계에 들어선 요즘은 국경 너머의 문제가 갑자기 닥쳐와 우리 문제가 되기도 한다. 경제 위기, 증오와 갈등, 심지어 초미세먼지까지 바깥의 문제이자 우리의 문제가 되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외국인이냐 내국인이냐 하는 것보다는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 문제’로 세상을 보는 것이 더 올바른 태도가 아닐까 한다. 이제는 우리들만의 세계도 없고 우리를 빼놓는 세계도 있을 수 없다. 곧 우리가 세계이고 세계가 우리인 셈이다. 우리의 문제와 세계의 문제를 하나의 틀에서 보는 눈이 필요하다.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 글자 즐기기 한글은 모아쓰기를 한다. 낱낱의 글자가 각자의 소리를 독립적으로 가지고는 있지만 사용할 때는 음절을 이루는 단위로 모아써야 한다. 그러나 최근에 휴대전화가 발전하고 새로운 통신수단이 꽃피면서 자모의 새로운 사용법이 활발해지고 있다. ‘ㅋㅋㅋ’나 ‘ㅎㅎㅎ’처럼 낱글자만으로 마치 풀어쓰기를 한 것처럼 늘어놓는 현상 말이다. 그렇게 낱글자를 풀어놓은 것을 보면 이것이 말인 듯, 소리인 듯, 아니면 그저 감정의 표시인 듯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매우 복합적인 기능과 의미를 낱낱의 자모로 표시하는 현상이다. 아예 가게 상호를 그런 식으로 지은 곳도 있다. 그렇다면 “키읔키읔키읔 카페에서 만납시다”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다. 이 사람 저 사람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대부분이 ‘ㅋㅋㅋ’는 ‘크크크’로, ‘ㅎㅎㅎ’는 ‘흐흐흐’로 읽고 있다. 그렇다면 아예 ‘크크크’와 ‘흐흐흐’로 적으면 아무 문제가 없을 듯도 하지만 그렇게 적으면 이렇게 낱글자로 표기한 근본 의도와 욕망을 망가뜨린다. ‘ㅋㅋㅋ’와 ‘ㅎㅎㅎ’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과, 입술을 깨물며 그것을 참으려는 표정을 떠올리게 되지 않는가? 게다가 ‘ㅠㅠㅠ’처럼 눈물 흘리는 모습을 글자 형상으로 나타내면서 상형문자 기능까지 흉내 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인정’을 ‘ㅇㅈ’으로, 대답할 때 쓰이는 ‘응’을 ‘ㅇㅇ’으로, ‘잘 자’를 ‘ㅈㅈ’으로 줄여서 표기하기도 한다. 마치 문자가 언어와 정확히 일치되던 시대가 지나가고 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 무겁고 두터운 언어 규율을 피하고 자잘한 문자 사용의 잔재미를 맛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대에 들어온 게 아닌가? 문자는 언어를 재생산하는 일에만 종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사용자들의 즐거움과 멋을 위해서 오락 기능도 가져야 하는가 보다.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