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열의 힘 대통령의 나들이를 보도하다가 잇달아 방송 사고를 내는 것을 보니 무척 오래전 사고를 또 되돌아보게 된다. 1950년대에 일어난 수준 이하의 활자 오식 사고였다. 어느 신문사에서 한자로 ‘대통령’이라고 인쇄해야 하는데 실수로 개 견(犬) 자의 ‘견통령’이라고 식자를 해버린 것이다. 신문사 대표가 구속되기까지 했었다. 요즘은 언어 규범 체계도 정비되고 편집과 인쇄의 첨단화가 이루어진 마당에 아직도 오류 소동이 일어나는 게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도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들의 이름과 그림 문서에서 사고가 났다. 구겨진 태극기만이 문제가 아니라 매체의 정보 전달과 검증 체계 자체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닌가 한다. 꽤 오래전부터 언론계에서는 ‘교열 부서’를 없애고 외주화에 힘썼다. ‘그까짓’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무에 그리 중요한가 싶었던 모양이다. 정보화 기술의 진전이 교열 부서를 만만해 보이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보 전달의 고도화로 단순 맞춤법 정도가 아니라 정보 경로, 저작권, 그림 문서의 출처 등 과거보다 교열 대상이 폭증했다. 활자를 쓸 때보다 더 큰 대형 사고가 나기 쉬워진 면도 있다. 사실 언론 매체처럼 다량의 언어 정보를 생산하는 기관일수록 ‘유능한 교열팀’이 더욱 필요하다. 기사의 언어적 적절성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맞는 ‘사회적 감수성’을 문장에 반영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제는 오히려 교열 부서를 더 강화할 필요가 있다. 언론 매체는 편집의 자유도 필요하지만 언어에 대한 책임도 필요하다. …………………………………………………………………………………………………………… 말과 시대상 꽤 널리 사용되었는데 어느 결엔가 사람들이 쓰지 않게 되면서 사라져 가는 말들이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정치권에서 ‘사쿠라’라는 말이 허다히 사용됐고 80년대만 해도 ‘다방’에 가면 ‘레지’라는 종업원들이 차 시중을 들었다. ‘북한’을 가리켜 보통 ‘북괴’라고 했다. 넘치도록 흔하게 쓰던 말들인데 이젠 마치 근대 이전의 어휘처럼 느껴진다. 교실에 아이들이 넘쳐나고 버스에는 승객들이 타져나갈 듯해서 교실과 버스 모두 ‘콩나물시루’라는 말로 표현을 했다. 시장에는 ‘미제’와 ‘일제’ 물건이 더 인기가 많았고, ‘양키 물건’ 파는 아줌마들도 곳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국산품 애용’이라는 구호가 여기저기 휘날렸고 ‘전매청’ 직원들은 ‘양담배’ 단속을 다녔다. 일반적으로 어휘가 많을수록 좋은 일이라고 생각들 하는데 돌이켜보니 그동안 사라져 간 어휘가 그리 아깝거나 아쉬운 말들이 아니다. 추억에 담아둘 만은 하지만 현실로 받아들이기에는 매우 고달픈 단어들이었기 때문이다. 없어져 준 게 고맙기만 하다. 그런 점에서 언어도 진화와 도태가 필요하다. 지금 사용하는 단어 가운데 먼 훗날 지긋지긋했던 말로 기억에 남을 것은 무엇이며, 없어져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될 어휘는 무엇일까? 아마도 갖가지 혐오 발언, 갑질 언어, 차별 언어, 막말과 독설, 그리고 각종 망언 등, 이러한 말들의 목록이 그 언젠가 지금의 시대를 평가하고 규정하는 도구가 되지 않겠는가? 이러한 말들 때문에 지금 이 시대가 되돌아보기 싫은 ‘어둠의 시대’로 낙인찍히지 말았으면 한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한승원의 글쓰기 교실 제20교시 음악을 향해 날아가는 글과 이야기 하는 글 - 글쓰는 묘미 알면 누구나 시와 소설도 쓸 수 있다. 1. '문예'란 '문어'와 비슷한 어떤 것 아닐까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나 하겠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였다. 입학을 하고 나서 처음 맞이하는 금요일의 6교시 수업시간...... 선생님께서는 들어오시자 마자 출석부를 교탁위에 내려놓으시더니, 칠판에사 축구반 배구반 농구반 정구반 원예반 문예반 서예반 미술반 합창반, 하고 줄줄이 써 내려가셨다 그러고는 그 가운데서 어느 한 가지를 택하라고 하셨다. 매주 금요일 마다 5교시 수업이 끝난 다음, 자기 마음에 맞는 반을 찾아가 두 시간 동안 취미 활동을 한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특별활동' 이었다. 그런데 나는 시골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녀서 그랬는지, 그 전까지 특별활동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당연히 어느반을 선택해야 하는지도 달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시간이 다 끝나갈 때 까지도 반을 전하지 못한 채 막막해 하고 있었다. 그 때 한 친구가 말했다. "우리 문예반으로 가자" 문예반이라니? 나는 친구의 얼굴을 멀거니 건너다 보았다. 사실 나는 '문예'라는 것이 무얼 뜻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순간 내 머릿속에는 '문어'라는 낱말이 떠올랐다. 문어를 문예라고도 하는 것일까. 나는 어촌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부들이 바다에서 잡아다가 말려가지고 시장에 내다 팔곤 하는 '문어'에 대해서만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더 방황하고만 있을 수 없어서 친구들을 따라 문예반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리하여 한 일주일이 꼬박 흐른후, 나는 맨 처음으로 특별활동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문예반 지돌르 맡으신 선생님께서는 먼저 '문예'라는 말의 뜻을 설명해 주셨다. 그때 나는 그만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문예는 '문학예술'의 줄인 말이라는 것이었다. 또 그 속에는 시, 소설, 희곡, 평론, 수필 따위의 장르가 들어있다고 했다. 2. 초등학생들이 읽어야 할 동화를 고등학교 때에야 읽었다. 그런데 그 멋모르고 들어갔던 문예반 이후 내 인생에 있어서는 매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 해 초봄에 나는 생전 처음으로 <소공자>,<암굴왕>,<철가면>,<십오소년 표류기> 따위의 동화책들을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남들은 이미 초등학교 시절에 읽었을 그 책들을 나는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읽었다는 이야기 이다., 그러니 나의 책 읽기가 얼마나 늦은 것이었는지 쉬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 책들을 읽고 깜짝 놀랐다. "아하, 이렇게도 아름답고 슬픈 세계가 있었구나!"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디 세상에는 교과서와 참고서와 사전, 그리고 학생들이 즐겨읽는 월간잡지 <학원>만 있는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 되어서야 만난 문학의 세계는 마치 꿈속과 같은 별천지와 다름이 없었다. 현실세계와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신기한 새 세상'이었다. 늦게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듯이, 어느 땐가 부터 나는 동화책이나 소설책을 읽느라고 밤을 하얗게 밝히곤 했다. 달콤한 과자를 맛보고 난 아이가 밥을 먹으려 하지 않고 단 과자만을 찾듯이, 나는 다른 공부는 제쳐두고 시집과, 소설책 ,동화책 들을 읽는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3. '문학'과 '문학 아닌것'의 차이 그런데 나를 그렇게 매료시킨 '문학'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시와 소설의 문장 차이를 알아보기 전에, 먼저 문학과 문학 아닌 것 은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지부터 살펴 보도록 하자. 진달래는 진달랫과의 낙엽 활엽 관목, 산간 양지에 나며, 높이는 2-3미터 정도 됨, 잎은 어긋남 봄에 엷은 분홍색 꽃이 잎보다 먼저 가지 끝의 곁눈에서 1개씩 나오는데, 그것이 2-5개가 모여 달림 꽃은 아이들이 따먹음. 한국, 일본, 만주, 중국 북부, 몽고 북부, 우수리 등지에 분포함 이것은 진달래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국어 사전의 한 대목이다. 이 글은 우리의 현실 생활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명백하고도 객관적인 진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글은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쓰여진 것일 뿐, 우리 삶의 아름다움이나 아픔, 고통, 절망, 행복 따위를 담아내는 '문학'과는 엄연히 구별되는 것이다. 즉 '문학 아닌 글'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글들은 주로 '바깥 세계'에 대한 것을 지향하고 있다. 말하자면 대체로 정보를 전달하거나 어떤 사실을 설명하고 논증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그에비해 문학은 그 글을 쓴느 사람이 가슴속의 세계로 나아간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의 약산 진달래 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이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이것은 김소월의 <진달래 꽃>이라는 시이다. 우리에게 현실적인 정보를 주지 않을뿐더러, 객관적인 설명이나 논증도 하지 않는다. 즉 실생활에 보탬이 되는 글은 아니라는 뜻이다. 다만 한 편의 시로서, 그것을 지은 사람의 아픈 감정(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기 싫어하는 한스러운 정서)을 진실되고 아름답게 그려 보이고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것이 문학이다. 문학은,<진달래 꽃>처럼 가슴속으로 아련히 밀려드는 정서를 음악적인 가락에 실어 담아 내기도 하고, <심청전>이나 <춘향전>처럼 특수한 재미와 감동을 자아내기 위해 있을법한 이야기를 상상하여 그럴듯하게 꾸며 내기도 한다. 4. 소설의 문장이란 그렇다면 소설과 시의 문장은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있을까? 잠을 자면 눈썹에 서케가 서리처럼 허옇게 슨다는 음력 정월 열나흘날 초저녁 이었다. 진메 잔등의 검은 솔 숲 위로, 올 볏짚(철 이르게 익은 벼의 짚)으로 엮은 샛노란 맷돌 방석 같은 달이 솟았다. 안마당에 절진 했던(가득 찼던) 어둠이 구정물 통에 맹물을 퍼 넣듯 묽어 졌다. 달을 보는 순간 얼굴이 달떡같이 둥글납작한 달식이가 생각났다. - 한승원의 <혜신의 늪> 중에서 이것은 소설의 문장이다. 문장 하나하나가 생각의 단위로 되어있다. 그리고 이 문장의 연결 방식이 시간의 순서에 따라 이루어 지고 있다. 어떤 사물(달)을 표현하기 위하여 비유(올볏짚으로 엮은 샛노란 맷돌같은 방석)를 동원하고 있다. 또 문장고 문장 사이에는 원인과 결과라는 질서가 놓여 있다. 가령 '달'이 진메 잔등의 검은 솔 숲 뒤로 떠오르자 '얼굴이 달떡 같은 달식이가 생각났다'는게 그것이다. 한마디로 소설은 지어낸 이야기 이다. 그래서 그 속에는 인물들이 나오고, 시간과 장소가 나오고, 사건이 있고, 지은이의 사상과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 난다. 지은이의 마음에 따라 슬픈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이러한 소설 문장에서는 음악적인 가락(리듬) 따위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소설의 문장은 대개 '대화' 와 '지문' 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화는 등장인물이 한 말을 독자가 직접 듣도록 따옴표를 써서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대화하는 사람의 이름이나 모습은 당연히 문장속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 뒤에 숨어있게 마련이다. 반면에 지문은 그것을 말하는 사람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난다. 지문은 인물들이 지껄인 대화를 보충해 주기도 하고, 그런일이 벌어지게 된 상황이나 사건의 모양 진행과정 등을 안내해 주기도 한다. 그래서 지문에는 대개 묘사적인 것과 설명적인 것이 혼합되어 있다. 나는 그 새끼무당이 어디엘 갔느냐고 윤월 무당에게 물었다. "제 언니들 굿하는데 따라갔지. 저도 살아살라면을 굿을 배워야 할것이 아니여?" 오래지 않아서 그 새끼무당이 굿판에서 돌아와 가지고 윤월이 무당에게 인사를 했다. "인사 드려라. 내 삼촌이 되는 어른이시다. 아주 훌륭한 글을 많이 쓰는 어른이시다." 새끼무당은 윤월이 무당의 어린시절 그 얼굴 그 자태를 빼다가 박아 놓은 것이었다. 윤월이 무당보다 약간 더 호리호리하고 목이 길고 얼굴이 갸름한 것이 다다르면 다를 듯 싶었다. - 한승원의 <새끼무당>중에서 이 문장의 지문들이 '설명적'인 것이라면, 다음의 것은 '묘사적' 인 것이다. 한여름의무더위를 무더위를 표현하고 있다. '덥다'는 말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지만, 독자는 숨막히는 더위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묘사의 힘 때문이다. 불덩이 같은 햇볕이 내리쬐었다. 담 위로 올라간 호박덩굴 잎사귀 들은 뜨거운 물을 뿌려 놓은 것처럼 처져 있었다. 삽살개가 그 호박 잎사귀 같은 혀를 내놓고 헐떡리며 나무 그늘 밑으로 들어가 쓰러지듯이 누웠다. 그는 선풍기 바람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선풍기 바람마저 뜨거웠다. 등과 겨드랑이에는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땀방울들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숨이 막혔다. 5. 시의 문장이란 불이 켜진다. 밤이면 집집마다. 불이 켜진다. 멀리 가까이 우는 듯 속삭이는 듯 불이 켜진다. 사랑하는 이들의 사랑하는 이들의 우는 듯 속삭이는 듯 불이 켜진다. - 김춘수의 <밤이면> 이 글은 밤이면 불이 켜지는 모습을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는 시이다. 문장의 연결은 행갈이(줄을 바꾸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 시의 문장을 살펴보면, 시간적인 순서 또는 원인과 결과에 의한 질서를 전혀 따르지 않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시는 머릿속에 하나씩 떠오르는 연상 작용(이미지)의 질서를 따르고 있다. 밤에 불이 켜지는 모습에서 '울음가 속삭임'을 연상하고, 다시 나아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그 시 속에 숨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에서는 다른 장르의 글에서는 찾기 어려운 음악적인 가락을 느낄 수 있다. 마치 노래를 부를 떄와 같이 말에 가락이 실려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시에 쓰인 말의 가락을 '운율'이라 한다. 운문과 산문을 가르는 가장 큰 기준은 바로 이 운율이다. 운율을 느낄 수 글을 운문이라 하고, 운율을 느낄 수 없는 글을 산문이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는 마음 속에 떠오르는 생각이나 느낌을 운율이 담겨이쓴ㄴ 말로 압축해서 나타낸 글이라 할 수 있다. 참,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행갈이만 한다고 해서 다 시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쾌적한 자연이 있습니다. 편리한 생활이 있습니다. 자연과 가족이 되고 이웃과 따스한 정을 나누는 즐거운 하루가 시작됩니다. 풍요한 행복의 약속을 '태양열 주택'에서 이루십시오 이것은 태양열 주택의 좋은점을 선전 하고 있는 광고 문안이다. 여느 시 못지않게 행갈이를 했지만, 이 글은 실용적인 가치를 전달 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을 뿐 결코 시로서의 모습은 갖추어져 있지 않다. 6. 갈매기와 구제불능 그러면 이번에는 독자들이 보내 온 글들 중에서<갈매기>라는 시와 <구제 불능>이라는 콘트를 차례로 감상해 보자. (1) 끝없이 출렁거리는 바다 위 푸른 창공에서 노닐고 있는 너 너를 보니 부럽기 그지 없구나 푸름의 속에 하얀 네가 끼여 한결 멋이 더해졌구나 내 마음속의 창공에서 놀아보지 않으련 너의 자유를 한 순간이나마 느껴 보고 싶구나 (2) 개학후 보름이 지나면 학업 성취도 평가 시험을 보게 된다. 그 시험을 조금이라도 잘 보려면 미리 공부를 해야 했다. 서점에 가서 아무 문제집이나 하나 골라 사 가지고 나왔다. 집에 오자마자 맨 뒤의 답안지를 북 찢어내고 열심히 문제를 하나하나 풀어 나갔다. 신기하게도 내가 푼 답들은 거의 백 퍼센트 답안지의 그것과 동일했다. 문제들이 어쩐지 쉽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자신 만만해 졌다. '내가 그동안 학교에서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아직도 공부한 내용들이 기억에 남아 있어서 이러는 모양이다.' 하고 생각하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머리가 아주 좋고 공부 잘 하는 만능 천재인 듯 싶었다. 웬만큼 공부를 했다 싶어 펜 뚜껑을 닫고 문제집을 덮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아, 내 눈앞에서 선명하게 들어온 '1' 이라는 숫자! 아, 이때껏 내가 푼 것은 1학년용 문제집이었다. 하늘에선 우르릉 꽝 하는 날벼락이 떨어지고, 머릿속엔 온통 1 이라는 숫자만 가득 차 있었다. 엄마께 '문제집이 너무 쉬운 것 같다'고 오랜만에 잘난체를 한번 해 보려고 했는데...... 잠시후면 나에게 날아올 엄마의 무섭고 차가운 꾸중의 말이 나의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이어 내가 그동안 아껴 모은 황금 같은 용돈들이 하나하나 서점으로 날아가는 애처러온 광경이 눈앞에 펼쳐 졌다. 이후 나는 자칭 만능 천재에서 '구제불능'의 아이로 불리게 되었다. '아, 신이시여. 언젠가는 꼭 나에게서 구제 불능이라는 닭의 머리 같고 어처구니 없고 흉측스럽고 망측스러운 이름을 떼어 주시옵소서' 생각해 봅시다. 1. 문학과 문학이 아닌 것은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말해 보자. 2. 시와 소설의 문장은 언뜻 보기만 해도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자.
현대소설용어사전 <자> ● 자연주의 소설 자연주의 소설이 형성된 배경으로는 흔히 세 가지의 사실이 거론된다. 첫째로는 19세기 리얼리즘 소설이 지녔던 현실 묘사의 정신이 자연주의 소설에 와서는 더욱 구체화되고 심화되었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모든 생물의 발생과 변화를 과학적 체계 안에서 설명하려고 한 다윈의 진화론적 인식 방법이 인간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객관적으로 해부하고자 하는 자연주의적 성찰의 근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셋째로 콩트를 비롯한 실증주의 철학자들의 결정론적 인간관, 즉 인간은 자신의 의식과 행동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적 조건들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는 생각은 인간을 환경의 피조물로서 제시하려는 자연주의 소설의 동기를 이룬다. 문학사에서 최초의 자연주의 소설은 일반적으로 콩쿠르 형제의 '제르미니 라세르퇴'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연주의 소설은 과학적 객관성을 그 특성으로 해부적 기법과 세밀한 묘사를 보여 준다. 그리하여 실험성이 강한 작품을 주로 산출하는데, 에밀 졸라의 '루공 마카르 총서',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 등이 대표적 작품이다. ● 자유 연상 소설에서 '의식의 흐름'이 나타나는 방식 가운데 하나로, '내적 독백'과는 구별된다. 내적 독백이 침묵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등장 인물의 직접적인 언술의 형태를 지닌다면, 자유 연상은 감각적인 인상을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언술적 형태를 지니지 않는다. 다시 말해, 자유 연상은 타인이나 자신을 포함한 어떤 대상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니라 감각 기관을 통해 지각된 인상을 언어화한 것이다. 요컨대, 이것은 직접적인 인상이긴 하지만 작중 인물의 내면에서 언술적 형태로 발화되지 않는 감각의 인상을 기록한 것일 뿐이다. 자유 연상을 뚜렷한 창작 기법으로 활용한 예로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건의 잠깸', '율리시스', 포크너의 '음향과 분노' 등을 들 수 있다. ● 자전적 소설 자전적 소설은 허구적 서사물이라는 점에서 '전기'나 '자서전'과는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허구'의 실제 성격은 작가 개인의 구체적 경험과 관련을 맺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 작가는 작품의 예술적 목적을 강조하기 위하여 자신의 개인적 경험의 어느 부분을 생략하거나 집중적으로 강조하며, 혹은 필요하다면 어떤 부분들을 조작해 내기도 한다. 한 인물의 생애를 다루는 형식을 취하기 때문에 자전적 소설은 방대한 양의 내용을 수록하고, 다소 느슨하고 개방된 플롯을 통해 한 인물을 둘러싼 물리적 사회적 환경, 일상사 및 미세한 의식들을 치밀하고 섬세하게, 다소 장황하게 제시한다. 이광수의 '나/소년편', 박태순의 '형성',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 등은 그 대표적 작품이다. ● 장면과 요약 장면은 서사물에서 이야기의 시간과 서술의 시간이 동일한 지속성을 갖는 경우를 말하며, 요약은 이야기의 시간이 서술의 시간보다 긴 경우를 가리킨다. 장면의 일반적인 구성 요소들은 대개 대화나 비교적 짧은 지속성을 갖는 뚜렷한 물리적 행위들이다. 장면은 이야기 전개의 극적 기법을 대표하는 것으로, 화자의 의견이나 논평 등이 개입되지 않은 채 사건이나 행위의 전개 과정을 그대로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반면, 요약은 등장 인물의 과거나 이야기의 배경을 독자들에게 일괄해서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등 이야기 속에서 긴 시간적 지속성을 갖는 사건이나 행위들을 간략하게 언급할 때 사용되며 화자의 개입을 강하게 드러낸다. ● 재현(representation) '다시 제시한다.'라는 의미의 재현이라는 용어는 서양에 있어서 문학 이론의 탄생과 함께 등장했다. 문학이 가시적이며 현실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어지는 어떤 것을 재현한다는 생각은 고대 철학자들의 문학 이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플라톤은 문학 작품에 재현되는 것이 이데아의 가상(假像)이라고 보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의 보편적 원리라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은 보통 '모방'이라고 번역되는 '미메시스((mimesis)'이다. (→참고 : '미메시스'항) ● 전기(傳奇) 소설 근대적인 의미의 소설이 수립되기 이전, 중국 및 우리 나라의 산문 문학에서 널리 유행되었던 서사 장르의 하나로, 전기(傳奇)라는 말은 '기이한 것을 기록한다.'는 뜻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전기 소설이라 불리는 작품들에는 현실적으로 믿기 어려운 괴기하고 신기한 내용들이 중점적으로 표현되며, 현실적 인간 세계를 벗어나 천상과 명부(冥府), 용궁 등에서 전개되는 사건들, 초인적 능력을 발휘하는 인간이나 자연물 등이 그 내용의 중심을 이룬다. 고대의 서사물에 있어 전기적 요소란 서사물을 형성하는 주요 요소 중 하나였으며, 원시적 서사 형태인 신화, 민담, 전설 등에는 전기적인 요소가 많이 담겨 있다. ● 전쟁 소설 전쟁의 상황과 체험을 집중적으로 재현하며 전쟁이 초래한 참혹한 삶의 정황, 그 비인간적이면서도 야만스런 살상의 현장을 이야기의 주된 배경으로 삼는 소설 일반을 지칭한다. 전쟁의 상황이란 인간의 이기적이며 야수적인 공격 심리가 적나라하게 폭로되는 현장이면서, 이와는 상반되는 인간적 성향, 즉 용기, 인간애, 자기 희생의 정신이 숭고하게 발현되기도 하는 흥미있는 현장이라는 사실 때문에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줄곧 서사 문학이 선호하는 제재가 되어 왔다. 호머의 고대 서사물인 '일리아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레마르크의 '서부 전선 이상 없다', 노먼 메일러의 '나자(裸者)와 사자(死者)' 등이 대표적 작품이다. ● 전형성(type, typicality) 특정한 역사적 단계에 처해 있는 어떤 특정한 사회의 성격과 내부적 모순을 잘 드러내 보여 주는 대표적인 성질들 혹은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는 요소들이 소설 속에 잘 반영된 경우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주로 인물이라는 요소에 관련된 개념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인물뿐만 아니라 사건 배경, 행위 배경 등의 넓은 의미를 포함한다. 곧, 전형화란 것은 객관적 진리를 목표로 하는 예술적 일반화의 독특한 방식으로서 개인적인 것 속에 있는 사회적인 것을, 특수한 것 속에 보편적인 것을, 우연적인 것 속에 있는 합법적인 것을, 여러 현상들 속에 있는 본질적인 것을 발견해 내고 끄집어내어 예술적으로 설득력 있게 표현하는 방식이다. ● 전후 소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삶의 상황과 문제들을 다룬 소설을 지칭한다. 전쟁의 상흔을 안고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불안과 허무, 기존의 모랄에 대한 반항 등이 흔히 취급되는 제재들이다. 한국 문학에 있어서 전후 소설은 6.25 전쟁 이후 나타나게 된다. 한국의 전후 소설은 전후의 상황에서 비롯된 허무주의와 실존적 불안감을 근거로 하여 출발한다. 즉, 기존의 전통적 모랄에 대한 부정 의식과 극도의 불안과 허무주의가 나타난다. 여기에 서구의 '분노한 젊은이(Angry young man)'나 '비트 세대(Beat Generation)', 실존주의 등이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장용학의 '요한 시집', '비인 탄생', 손창섭의 '비 오는 날', 서기원의 '이 성숙한 밤의 포옹', '암사 지도', 이범선의 '오발탄' 등은 그 대표적 양상들이다. ● 절정(climax)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비롯된 전통적 플롯 개념으로, 한 편의 서사물을 설명할 때 플롯이 전개되는 단계의 하나이다. 플롯이 전개되는 단계는 보는 사람에 따라 3, 4, 5단계로 나뉘어지지만 어떤 방식을 택하든 그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갈등과 절정이다. 일반적으로 절정은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는 지점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 앞에서부터 복잡하게 얽혀 온 갈등이 첨예하게 충돌하여 이떤 상태로든 깨어져 버리거나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이며,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는 순간으로, 그 이후로는 플롯이 해결의 단계로 전개되는 순간이다. ● 주인공(hero, heroin) 이야기 문학에서 사건을 주도하는 자질을 가리키며 일반적으로 독자들이 공감을 느끼는 인물이다. '히어로'와 '히로인'은 그 말들의 내포가 가지는 '영웅성'이 지시하듯이 대개는 뛰어난 능력이나 위대한 운명의 소유자들이었던 고대 서사물의 주역들을 분별하기 위해 창안된 용어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용어가 사용되는데 있어서 도덕적 평가는 반영되지 않는다. 부연하자면 모든 '히어로'나 '히로인'이 선량하거나 도덕적으로 정당한 인물은 아니며, 예컨대 악덕한 남자나 사악한 여자도 서사물의 중심 인물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이 용어는 선악의 개념이나 인물의 역할의 크기와 무관하게 주인물(main character)을 뜻하는 일반적인 개념으로 사용된다. ● 중편 소설 대체로 단편 소설보다는 길고, 장편 소설보다는 짧은 소설을 일컫는다. 중편 소설은 단편 소설에 비해서 단일화의 효과와 긴박한 구성, 그리고 경이로운 결말 처리 방식에 덜 의존하며 장편 소설에 견준다면 사건과 인물들의 양상이 상대적으로 압축되어 있다는 특성을 가진다. 윤흥길의 '장마', 최창학의 '창', 이청준의 '이어도'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수서양단(首鼠兩端) // 진퇴, 거취를 결정하지 못하는 상태. 《出典》'史記' 魏其武安侯列傳 전한 7代 황제인 무제(武帝 : BC 141-87)때의 일이다. 5代 문제(文帝)의 황후의 조카인 위기후(魏其侯) 두영(竇?)과 6代 경제(景帝)의 황후의 동생인 무안후(武安侯) 전분은 같은 외척이었지만 당시 연장자인 두영은 서산 낙일(西山落日)하는 고참 장군이었고, 전분은 욱일 승천(旭日昇天)하는 신진 재상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두영의 친구인 관부(灌夫) 장군이 고관 대작(高官大爵)들이 모인 주연(酒宴)에서 전분에게 대드는 실수를 범했다. 사건의 발단은 관부가 두영을 무시한 한 고관을 힐책(詰責)하는데 전분이 그 고관을 두둔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관부가 한사코 사죄를 거부하자 이 일은 결국 조의(朝議)에 오르게 되었다. 양쪽 주장을 다 들은 무제는 중신들에게 물었다. "경들이 판단컨대 어느 쪽에 잘못이 있는 것 같소?" 처음에는 의견이 둘로 나뉘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두영의 추종자로 알려진 내사(內史) 정당시(鄭當時)조차 우물쭈물 얼버무리는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자 어사대부(御史大夫) 한안국(韓安國)도 명확한 대답을 피했다. "폐하, 양쪽 다 일리가 있사와 흑백을 가리기가 심히 어렵나이다." 중신들의 불분명한 태도에 실망한 무제가 자리를 뜨자 조의는 거기서 끝났다. 전분은 화가 나서 한안국을 책망했다. "그대는 어찌하여 '구멍에서 머리만 내밀고 좌우를 살피는 쥐[首鼠兩端]'처럼 망설였소? 이 사건은 시비곡직(是非曲直)이 불을 보듯 훤한 일인데…. 그대와 더불어 대머리가 벗겨진 늙은이를 해치우려 했는데, 어찌하여 애매한 태도를 취했는가?" 與長孺共一禿翁 何爲首鼠兩端. 【동의어】수시양단(首施兩端) 【유사어】좌고우면(左顧右眄)
Board 고사성어 2022.07.10 風文 R 902
지식생산 예로부터 문자를 쓴다거나 안다고 하는 말은 일반적으로 한문 능력을 가리켰다. 그만큼 한문은 대표적이면서도 지배적인 기록 수단이었다. 후에 훈민정음이 만들어져 언문이라는 별칭을 얻었을 때도 한문은 한 수 높은 ‘진서’라고 일컬어졌다. 지금은 누구도 한문을 진서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자의 세상을 조금이라도 들여다본 사람은 새로운 진서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음을 금방 눈치챌 수 있다. 바로 영어로 된 글이다. 과거의 한문이 동아시아 정도를 지배했다면 이제 영어는 명실공히 세계를 뒤덮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고등교육기관인 대학이다. 대학에서 개설한 강좌에는 ‘원서 강독’이라는 강의가 있다. ‘원서’의 사전적 의미는 베끼거나 번역한 책의 ‘원래의 판본’이다. 그러나 실제로 강의에 사용되는 ‘원서’는 그저 영어로 된 교재일 뿐 그것이 어떤 ‘원래 판본’이 아닌 경우가 많다. 오히려 이것저것 짜깁기한 것이 더 흔하다. 그런데도 영어로 된 책은 ‘원서’라는 호칭을 얻고, 한국어 서적일 경우는 분명히 ‘원서’의 자격을 갖추었음에도 그러한 이름을 쓰지 않는다. 어느 언어가 지배적인지 한눈에 드러난다. 우리가 한문의 지배에서 벗어난 것을 자랑하고는 있으나 사실은 한문에서 영문으로 지배 체제만 바뀐 게 변명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 지식은 예나 지금이나 ‘번역된 지식’의 수준에서 ‘원천 지식’의 주변부만 맴돌고 있는 셈이다. 이제는 글자 자랑보다는 창의적인 글쓰기를 통해 지식 생산의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들어서는 일이 더욱 시급하다. ………………………………………………………………………………………………… 동의함 우리가 하는 일부 행동들은 남이 먼저 수행한 행위가 전제되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무언가에 ‘반대하는 행동’은 누군가가 선행하는 어떤 행동을 했을 때에야 가능하다. 곧 ‘반대’는 누군가의 ‘의견’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행위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의한다’는 행위 역시 상대방의 ‘의견’이나 ‘제의’가 앞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뚱딴지같은 말이 된다. 컴퓨터나 인터넷의 각종 이용 도구를 처음 사용할 때는 그 사용 약정을 읽고 ‘동의 여부’를 표시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그 약정문의 길이도 엄청나지만 글자의 크기도 깨알 수준이어서 일일이 읽어가며 태도를 정할 수가 없다. 또 각종 서류 양식 기준에 따르다 보면 그 약정문에 동의를 아니 할 재간도 없다. 결국은 찜찜하지만 ‘동의함’을 선택하게 된다. 이러한 동의 역시 그 상품 제공자의 의견이나 제안이 있어야 맥락이 제대로 성립한다. 그러나 인터넷 이용 도구나 상품의 약정에서는 제공자의 요구와 일방적인 개념 정의만 있을 뿐 자신들의 책임이나 의무를 명시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런 것이 없는 ‘동의’는 사실상 ‘동의함’이라고 쓰고 ‘승복함’이라고 읽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생산자와 판매자가 시장을 지배하면서 나타나는 패배한 소비자의 모습이다. 이제는 각종 규약이나 약정의 문장 자체가 ‘소비자의 맥락’으로 다시 쓰여야 한다. 시장은 상품 제공자들만의 힘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상품 제공자와 소비자의 균형 잡힌 상호 행위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여백 가득히 사랑을 - 노은 낯선 대문 틈으로 엿본 아버지의 구두 훤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 '애수의 소야곡'을 즐겨 부르시던 멋쟁이 우리 아버지. 아버지는 마흔 두 살의 나이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내 기억 속에는 늘 마흔 두 살의 젊은 나이로 살아 계신다. 내가 은발의 할머니가 된 뒤에도 아버지는 여전히 젊은 모습으로 살아 계실 것이다. 어릴 적 아버지의 선글라스를 통하여 바라본 이 세상은 참으로 신비로운 파랑이었다. 아버지의 어깨에 올라앉아 지붕 위의 호박을 딸 때 세상은 그 얼마나 경이로운 것이었던가. 크고 넓고 따스한 세상을 나는 아버지의 창문을 통하여 내다보곤 하였다. 아버지는 세상을 향하여 활짝 열린 내 창문이었다. 영화 흥행업을 하시던 아버지 덕분에 나는 어릴 때부터 영화와 인연이 많았다. 내가 살던 광주 시내의 영화관은 언제나 나를 위하여 활짝 열려 있었다. 어머니 등에 업혀서부터 보기 시작한 영화 덕분에 어릴 적부터 내 머리 속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떠돌고 있었고, 그것이 내 문학 수업의 바탕이 되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가 집에 가져다 놓으신 시나리오를 읽으며, 극장에서 아버지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같은 영화를 수없이 되풀이하여 보면서 나는 다른 사람들의 삶을 기웃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영화는 화려하지만 그 뒷면에는 어둡고 고단한 인생의 그늘이 짙기 드리워져 있는 것처럼 삶은 한 편의 영화 같은 것이라고 배우며 자랐다. 유난히 자식 사랑이 깊으셨던 아버지는 아들뿐 아니라 다섯이나 되는 딸자식들을 소중히 여기셨는데, 첫딸인 나에게 가장 많은 정을 베풀어 주셨다. 여학생이 된 나를 위하여 연두색 이층 필통과 얼굴에 바르는 크림, 멋진 만년필, 하얀 레이스가 고운 속치마를 사 들고 오시기도 하였다. 어쩌다 내 종아리에 상처라도 나면 흉터가 남지 않아야 한다며 빨간 약을 예쁘게 바르시고는 호호 불어주시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감한 성격의 아버지는 때때로 연애 사건을 일으켜 나를 미움과 혼란의 늪에 빠져들게도 하였다. 아버지를 기다리던 그 낯선 골목의 막막한 어둠 속에서 나는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에 작은 가슴을 떨곤 하였다. 낯선 대문 틈으로 엿본 그 마당에 쌓이던 차가운 달빛, 그리고 댓돌 위에 놓여 있던 아버지의 구두, 내 어깨를 어루만지던 서글픈 바람마저도 이제는 그리움으로 되살아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 사건으로 크게 싸우셨을 때 내가 누구의 편을 들었던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슬그머니 아버지 곁에 서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미움의 사랑의 깊이를 감히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므로.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병석이 누우신 아버지. 아버지에게는 6.25의 상처가 깊이 남아 있었다. 육군소위로 전투에 참가했다가 시체 더미에 묻혀 있던 아버지를 지나가는 군의관이 발견하여 간신히 살렸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자리에 누우셨다.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은 가슴이 탁 트이는 콜라 한 모금이었다. 그때만 해도 한겨울에 콜라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온 가족이 콜라를 구하기 위하여 광주 시내를 샅샅이 찾아다녔던 생각이 난다. 아버지는 마지막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으셨다. 대전 국립묘지 장교 묘역에 '육군 소위 노용기'로 누워 계시는 아버지를 찾아갈 때 우리 가족은 언제나 콜라부터 챙긴다. 아버지 덕분에 우리 가족 모두가 콜라광이 된 것은 물론이다. 아버지는 아낌없이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셨다. 아버지의 창문을 통하여 나는 사랑과 죽음의 의미를 배웠다. 그리고 삶은 한 편의 영화 같은 것이고. 화려하면서도 서럽고 감동적인 것이 바로 우리들의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다.
Board 삶 속 글 2022.07.08 風文 R 435
좋음과 나쁨 사회가 발전해 간다는 뜻은 달리 말해 삶이 점점 더 복잡해져 간다는 말이기도 하다. 복잡해질수록 알아야 할 정보도 많아진다. 날씨와 관련해서도 옛날에는 덥다거나 춥다거나 하며 문장으로 표현했지만 점점 복잡한 세상이 되면서 각종 수치와 측정 단위를 사용하게 된다. 일정한 현상을 정밀하게 객관화하는 말은 숫자만한 것이 없다. 기온과 체온은 숫자로 몇 도인지를 백분위로 표현한다. 그리고 습도는 백분율로, 바람의 속도는 초당 몇 미터, 비가 올 확률은 몇 퍼센트, 기압은 몇 ‘헥토파스칼’ 등등 양적인 정보를 보여주는 단위가 대단히 많다. 그뿐인가? 길거리의 소음이 심하니 시끄러움을 표시하는 단위 ‘데시벨’도 알아야 한다. 요즘은 빛이 너무 밝아서 공해를 일으킨단다. 빛의 밝기는 ‘럭스’를 쓰는데 몇 럭스 이상이 우리 눈에 해로운지 잘 모르겠다. 오존의 농도는 ‘피피엠’이라는 무척 낯선 단위가 사용된다. 우리가 알고 지내야 할 숫자와 단위가 너무 많다. 게다가 이제 와선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가 우리를 예민하게 만든다. 미세먼지의 크기도 ‘마이크로미터’라는 낯선 단위를 쓰지만 다행히 시민들한테 경고하는 경우는 ‘좋음’과 ‘나쁨’이라는 편안한 단어를 쓴다. 무슨 뜻인지 금방 알 수 있다. 평어이기 때문이다. 보통사람들에게는 숫자보다 평어가 더 편하다. 양적인 의미보다 질적인 의미가 더 유용하기 때문이다. 전문가에게는 양적인 정보와 질적인 정보 다 필요하겠지만 보통사람한테는 질적인 정보만 있어도 충분하다. 소음도 차라리 ‘시끄러움’과 ‘조용함’, 너무 심하면 ‘귀 아픔’ 정도로 표시해주는 게 훨씬 유용하지 않을까. 오존 농도 역시 ‘외출 가능’ ‘외출 조심’, 이렇게 표기해준다면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한테 얼마나 편하겠는가? ………………………………………………………………………………………………… 제2외국어 교육 현재 공교육의 교과목 가운데 하나로,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 것이 ‘제2외국어’ 과목이다. 우리의 교육과정에서는 ‘영어’만이 가장 중요한 외국어로 대접받고 있다. 제2외국어는 입시 반영 비율도 보잘것없다. 해당 전공 영역에서는 행여 수험생들한테 선택을 더 받아볼까 해서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난이도를 낮추고 있다. 무의미한 자해 행위일 뿐이다. 유럽연합의 경우 ‘국어 더하기 둘’이라는 정책을 채택하고 있다. 자신의 국어에다가 같은 유럽연합 회원국 언어 둘을 선택하게 하는 정책 설계이다. 그 까닭은 영어의 독점을 피하기 위해서다. 만일 국어에다 외국어 하나를 선택하게 한다면 유럽인들도 별수 없이 영어만 택하게 될 것이다. 다양한 외국어 학습을 장려하기 위해서, 그리고 ‘유럽 언어들’의 공멸을 막기 위해서, 두 개의 외국어를 선택하게 한 것이다. 우리는 제1외국어 교육을 다양화했다는 것이 영어, 실용영어, 영어독해와 작문 등이다. 무조건 영어 하나만 배우라는 강제 조항이나 다름없다. 시장이 세계화되듯 교육도 함께 세계화되면서 이젠 어린 시절을 중국어권이나 일본어권에서 보내는 경우도 많아졌다. 그들이 자연스럽게 배운 외국어를 지워버리고 또 다른 외국어인 영어만을 학습하게 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외국에 나간 학부모들은 억지로 비싼 수업료를 내면서 따로 영어 학교에 자녀를 보내기도 한다. 이제는 제1외국어도 학습자가 여러 언어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게 할 때가 된 것 같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