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끝이 당신이다 제대로 된 청소는 구석에 숨은 먼지를 치웠느냐에 달려 있다. 문 뒤에 숨은 먼지를 쓸어 담지 않았다면 청소를 제대로 한 게 아니다. 열심히 설거지를 했어도 접시에 고춧가루가 하나 붙어 있으면 말짱 도루묵이듯이. 청소의 성패가 마지막 먼지에 달려 있다면, 말의 성패는 말끝에 달려 있다. 조사나 어미처럼 말끝에 붙어 다른 단어들을 도와주는 것들이 말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준다. 특히 어미를 어떻게 쓰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마음 상태, 성격, 타인과의 관계, 지위가 드러난다. 당신이 어제오늘 보낸 문자나 채팅 앱을 다시 열어 살펴보라. 용건은 빼고 말끝을 어떻게 맺고 있는지 보라. 친한지 안 친한지, 기쁜지 슬픈지, 자신감 넘치는지 머뭇거리는지, 윗사람인지 아랫사람인지 다 드러난다. 친할수록 어미를 일그러뜨려 쓰거나 콧소리를 집어넣고 사투리를 얹어놓는다. ‘아웅, 졸령’ ‘언제 가남!’ ‘점심 모 먹을껴?’ ‘행님아, 시방 한잔하고 있습니더’ ‘워메, 벌써 시작혀부럿냐’. 친하지 않으면 ‘-습니다’를 붙인다. 학생들과 친구처럼 지내봤자, 결석을 통보하는 이들은 ‘이러이러한 사유로 결석하게 되었습니다’ 식으로 메일을 보낸다. 용기가 흘러넘치던 학생한테서 받은 ‘죄송한데 사유는 비밀이고 오늘 수업 결석하겠습니다’가 최대치였다. ‘패랭이꽃도 예쁘게 피고 하늘도 맑아 오늘 결석하려구요!’라는 메일을 받는 게 평생소원이다. 세월이 지나면 말끝이 닳아 없어지기도 한다. ‘어디?’-‘회사’-‘언제 귀가?’-‘두시간 뒤’. 말끝이 당신이다. …………………………………………………………………………………………………………… 고급 말싸움법 매사를 힘의 세기로 결판내는 약육강식의 습관은 말싸움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상대를 반드시 ‘이겨먹어야’ 한다는 마음의 밑바닥에는 ‘나는 옳고 상대는 그르다’는 독선이 깔려 있다. 상대방은 뭔가 꿍꿍이가 있고 이기적이다. 내가 이겨야 정의의 승리다. 이런 전투 상황을 벗어날 비법이 있다. 말싸움 중간중간에 ‘물론’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다. 말싸움은 자기주장을 상대방에게 관철시키는 게 목적인데, 이를 더욱 확실하게 성취하는 방법 중 하나는 ‘반론에 대한 고려’이다. 내 주장에도 허점이 있을 수 있고, 상대방의 주장에도 쓸 만한 구석이 없지 않다고 인정해주는 단계. 이 ‘반론에 대한 고려’는 ‘물론’이란 말로 구현된다. 자기 말만 하다가도 ‘물론’이 떠오르면 브레이크가 걸리고 뒤를 돌아보게 된다. 총을 내려놓고 싸움 없는 중립지대로 모이자는 뜻이 아니다. 스스로 적진에 뛰어들어 보라는 말이다. 상대방의 안마당을 거닐면서 그에게도 모종의 ‘이유’가 있음을 알아보자는 것이다. 덕을 쌓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배려심인데, 내가 틀릴지도 모른다는 성찰과 자신감이 없으면 할 수 없다. 남는 문제는 누가 먼저 ‘물론’을 떠올리느냐이다. 아무 논리 없이 위계와 완력으로 사람을 찍어 누르는 무도한 사람을 앞에 두고 나만 손해 보라고? 그런 사람 앞에서조차 ‘물론’이란 말을 ‘기어코’ 떠올릴 수 있다면, 그리하여 모든 인간에겐 존재의 이유와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음을 알게 될 때, 우리 사회는 조금 더 차분해지고 깊어질 거다. 물론 그걸 이용해먹는 자들이 득실거리지만! 김진해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양약고구(良藥苦口) / '효험이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뜻으로, 충언(忠言)은 귀에는 거슬리나 자신에게 이롭다는 말.《出典》'史記' 留侯世家 / '孔子家語' 六本篇 이것은 孔子의 말씀으로《孔子家語》'六本篇',《설원(說苑)》'정간편(正諫篇)'에 실려 있다. 효과가 있는 좋은 약은 입에 넣을 때 쓰고, 사람들에게 듣는 충고는 좋은 말일수록 귀에 들어올 때 거슬린다는 뜻이다.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좋은 약은 입에는 쓰지만 병에는 이롭고, 충고하는 말은 귀에는 거슬리지만 행실에 이롭다. 殷나라 탕왕(湯王)은 곧은 말을 하는 충신이 있었기 때문에 번창했고, 夏나라의 걸왕(桀王)과 殷나라의 주왕(紂王)은 무조건 따르는 신하들이 있었기 때문에 멸망했다. 임금에게 다투는 신하가 없고, 아버지에게 다투는 아들이 없고, 형에게 다투는 동생이 없고, 선비에게 다투는 친구가 없다면 그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임금이 잘못을 저지르면 신하가 諫해야 하고, 아버지가 잘못을 저지르면 아들이 諫해야 하고, 형이 잘못을 저지르면 동생이 諫해야 하고,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면 친구가 諫해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나라에 위태하고 망하는 징조가 없고, 집안에 패란(悖亂)의 악행도 없고, 부자와 형제에 잘못이 없고, 친구와의 사귐도 끊임이 없을 것이다. 孔子曰 良藥苦於口而利於病 忠言逆於耳而利於行 湯武以棍棍而昌 桀紂以唯唯而亡 君無爭臣 父無爭子 兄無爭弟 士無爭友 無己過者 未之有也 故曰 君失之 臣得之 父失之 子得之 兄失 之 弟得之 己失之 友得之 是以國無危亡之兆 家無悖亂之惡 父子兄弟無失 而交遊無絶也. 【원 말】양약고어구(良藥苦於口) 【동의어】충언역어이(忠言逆於耳), 간언역어이(諫言逆於耳), 금언역어이(金言逆於耳)
Board 고사성어 2022.07.17 風文 R 1089
1도 없다 “4시가 뭐냐, 네시라고 써야 한다.” 선생님은 학생을 보면서 꾸짖었다. 말소리에 맞춘 표기가 자연스럽다는 뜻이자, 표기란 그저 말소리를 받아 적는 구실을 할 뿐이라는 생각이다. 신문에는 ‘7쌍의 부부 중 5쌍은 출산했고, 1쌍은 오는 10월 출산을 앞두고 있다’고 쓰여 있다. 이런 기사는 읽기에 껄끄럽다. ‘칠쌍’으로 읽다가 다시 ‘일곱쌍’으로 바꾸어야 한다. 머릿속 전광판에 ‘7(칠)’과 ‘일곱’이 동시에 껌뻑거린다. 문자와 발음이 어긋나 생기는 일이다. ‘하나도 없다, 하나도 모른다’를 ‘1도 없다, 1도 모른다’로 바꿔 말하는 게 유행이다. 표기가 말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한국어에 서툰 어떤 가수가 ‘뭐라고 했는지 1도 모르겠’다고 쓴 게 발단이었다. ‘1도 없다’는 한자어와 고유어라는 이중체계를 이용한다. 고유어 ‘하나’를 숫자 ‘1’로 적음으로써 새로운 말맛을 만든다. 아라비아숫자를 쓰면 고유어보다 ‘수학적’ 엄밀성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예순두살’이라고 하면 삶의 냄새가 묻어 있는 느낌인데, ‘62세’라고 하면 그냥 특정 지점을 콕 찍어 말하는 느낌이다. 소주 ‘한병씩’보다 ‘각 1병’이라고 하면 그날 술을 대하는 사람의 다부진 각오가 엿보인다. 이 칼럼에 대해 ‘재미가 하나도 없다’고 하는 사람보다 ‘재미가 1도 없다’고 하는 사람에게 이가 더 갈릴 것 같다. 여하튼 변화는 가끔은 무지에서, 가끔은 재미로 촉발된다. 새로운 표현을 향한 인간의 놀이를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미꾸라지가 헤엄치는 웅덩이는 썩지 않는다. …………………………………………………………………………………………………………… 황교안의 거짓말? 확실하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거짓말할 이유가 없다. 진짜 거짓말은 속이려는 의도가 있고 거기에서 생기는 이익을 본인이 독차지하는 경우다. 학점이 엉터리이고 토익 점수도 낮은 아들 얘기로 그가 얻을 이익은 없다. 레이건은 갖가지 눈먼 예산을 찾아 먹는 ‘복지여왕’이라는 가짜 인물을 만들어 민주당의 복지정책을 비판해 집권까지 했다. 이 정도라야 거짓말이다. 둘째, 재미있자고 이야기했을 뿐이다. 이야기를 박진감 넘치게 끌고 가기 위해 주인공을 ‘내가 아는 청년’이라고 숨겼다. 의도대로 청중이 인물의 정체를 궁금해했는지는 모르지만, 이야기꾼이 쓰는 고급 기법이다. 실패와 좌절의 아픔이 깊고 현실과 불화할수록 반전의 맛이 강하다. 재미를 위해 아들 스펙을 낮추었기로서니 비난할 일이 아니다. 점수를 올려 말했어도 거짓말이 아니다. 셋째, 그의 진심이다. 청년 일자리 문제는 특강 시작 5분 만에 나온 주제다. 장장 10분 동안 공들여 대답했다. 그의 해결책은 딱 두 가지였다. 하나는 경제가 나아져야 일자리가 많아지는데 이 정부가 경제를 망쳤다. 민생투쟁으로 체득한 깨달음이라니 뭐라 하겠는가. 사달은 둘째. 설령 일자리가 많아진들 각자가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실력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라는 것. 스펙보다는 특성화된 개인 역량을 길러라.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 그의 소신이자 철학이다. 그는 보수파가 가진 정치적 상상력의 최대치이자 모범답안이다. 개인의 성공과 실패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마음의 습관. 하지만 멘토의 위로나 꼰대의 지적질이 정치인의 언어일 수 없다. 김진해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양상군자(梁上君子) / 대들보 위의 군자라는 뜻으로, ① 집 안에 들어온 도둑의 비유. ② 천정 위의 쥐를 달리 일컫는 말. 《出典》'後漢書' 陳寔傳 후한 말엽, 진식(陳寔)이란 사람이 태구현(太丘縣 : 河南省 所在) 현령(縣令)으로 있을 때, 그는 늘 겸손한 자세로 현민(縣民)의 고충을 헤아리고 매사를 공정하게 처리함으로써 현민으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런데 어느해 흉년이 들어 현민의 생계가 몹시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날 밤, 진식이 대청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웬 사내가 몰래 드러와 대들보 위에 숨었다. 도둑이 분명했다. 진식은 모르는 척하고 독서를 계속하다가 아들과 손자들을 대청으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악인(惡人)이라 해도 모두 본성이 악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습관이 어느덧 성품이 되어 악행도 하게 되느니라. 이를테면 지금 '대들보 위에 있는 군자[梁上君子]'도 그렇다." 그러자 '쿵'하는 소리가 났다. 진식의 말에 감동한 도둑이 대들보에서 뛰어내린 것이다. 그는 마루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했다. 진식이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네 얼굴을 보아하니 악인은 아닌 것 같다. 오죽이나 어려웠으면 이런 짓을 했겠나." 진식은 그에게 비단 두 필을 주어 보냈다. 이로부터 이 고을에 다시는 도둑이 나타나지 않았다. 時勢荒民儉 有盜夜入其室 止於梁上 寔陰見乃起自整拂 呼命子孫 正色訓之曰 夫人不可不自 勉 不善之人未必本惡 習以性成 遂至於此 梁上君子者是矣 盜大驚自投於地 稽?歸罪 寔徐 譬之曰 視君狀貌不似惡人 宜深剋己反善 然此當由貧困 令遺絹二匹 自是一縣無復盜竊.
Board 고사성어 2022.07.16 風文 R 1180
‘짝퉁’ 시인 되기 우리는 언어가 쳐놓은 거미줄에 걸린 나방이다. 태어나자마자 따라야 할 말의 규칙들이 내 몸에 새겨진다. 여기서 빠져나오려면 언어의 찐득거리는 점성을 묽게 만들어야 한다. 시는 우리를 꼼짝달싹 못하게 옭아맨 기성 언어를 교란하여 새로운 상징 세계로 날아가게 하는 로켓이다. 거기에는 새로운 언어, 새로운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 담긴다. 하여 진부한 기성 언어에 싫증이 난다면 ‘짝퉁’ 시인이 되어보자. 쉽다.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명사와 동사를 다섯개씩 써보라. 이를테면 ‘바람, 하늘, 망치, 구두, 숟가락’ ‘두드리다, 먹다, 자르다, 깎다, 튀다’. 이들을 맘대로 섞어 문장을 만들라. ‘바람이 하늘을 두드린다’ ‘구두가 망치를 먹었다’ ‘숟가락이 바람을 잘랐다’ 식으로. 이러다 보면, 근사한 문장 하나가 튀어 오른다. 그걸 입안에서 오물거리다가 옆 사람한테 내뱉어 보라. “저기 바람이 하늘을 두드리는 게 보이나요?” 그러곤 한번 씩 웃으면 끝. 시인은 문법과 비문법의 경계 위에서 줄타기를 하는 광대다. 문법에 얽매이면 탈주의 해방감을 영영 모르며, 비문법에만 탐닉하면 무의미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친다. 문법과 비문법, 질서와 무질서, 체계와 비체계 사이에 서는 일은 언어의 가능성을 넓힐뿐더러 세계의 변화 가능성을 도모하는 수련법이다. 이렇게 자신을 말랑말랑하게 만들고 유연한 자세로 세상을 다르게 보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세상은 새롭고 싱싱한 언어들로 채워질 것이다. 얕은 수법이지만, 반복할 수만 있다면, 누가 알겠는가, 당신 안에서 시인이 걸어 나올지. …………………………………………………………………………………………………………… ‘짝퉁’ 철학자 되기 당신에겐 어떤 문장이 있는가? 당신에게 쌓여 있는 문장이 곧 당신이다. 당신을 사로잡던 말, 당신을 설레게 하고 가슴 뛰게 한 말, 내내 오래도록 저리도록 남아 있는 말이 당신을 만들었다. ‘집은 사람이 기둥인데, 사람이 없으니…’ 할머니는 기울어지는 가세를 낡은 기둥에서 눈치챘다. 철학은 말을 음미하고 곱씹고 색다르게 보는 데에서 시작한다. 어느 학생은 ‘오른쪽’이란 말을 ‘북쪽을 향했을 때의 동쪽과 같은 쪽’이라는 사전 뜻풀이가 아닌, ‘타인과 함께 있기 위해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는 매력적인 뜻으로 바꾸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오른쪽 귀를 앓아 늘 다른 사람 오른쪽에 있었다. 몸의 철학이다. ‘흙먼지 속에 피어 있는 것이 기특해서 코스모스를 좋아한다’는 엄마의 말을 기억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말 한마디의 철학.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서 건져 올린 삶의 이치. 고유어도 좋고, 한자어도 좋다. 주워들은 말이면 어떻고 책에서 길어 올린 말이면 어떤가. 매일 쓰는 말을 재음미해 보라. 그런 말에 다른 뜻을 덧입혀 다시 말해 보자. 휴대전화를 꺼내 사전 찾기 놀이를 해 보라. 예를 들어 ‘우듬지’ ‘간발(의 차이)’ ‘소인(消印)’ ‘며느리밑씻개’ ‘미망인’. 그러다 보면 몰랐던 뜻이 툭 솟아올라 놀라기도 하고, 말이 이 세계의 부조리를 어떻게 증언하고 있는지 알고 가슴을 치기도 할 것이다. 우리 각자가 말의 주인이 되어 삶의 철학을 늘 탐구할 때라야 막말, 선동, 혐오발언이 난무하는 지금의 정치언어에 놀아나지 않게 된다. 김진해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양두구육(羊頭狗肉) / 겉으로 훌륭하게 내세우나 속은 변변찮음.《出典》'晏子春秋' 無門關 揚子法言 춘추시대, 제나라 영공(靈公) 때의 일이다. 영공은 궁중의 여인들에게 남장(男裝)을 시켜놓고 완상(玩賞)하는 별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취미는 곧 백성들 사이에도 유행되어 남장한 여인이 날로 늘어났다. 그러자 영공은 재상인 안영에게 '궁 밖에서 남장하는 여인들을 처벌하라.'는 금령(禁令)을 내리게 했다. 그러나 그 유행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영공이 안영에게 그 까닭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전하께서는 궁중의 여인들에게는 남장을 허용하시며서 궁 밖의 여인들에게는 금령(禁令)을 내렸습니다. 하오면 이는 '밖에는 양 머리를 걸어 놓고 안에서는 개고기를 파는 것[羊頭狗肉]'과 같습니다. 이제라도 궁중의 여인들에게 남장을 금하십시오. 그러면 궁 밖의 여인들도 감히 남장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영공은 안영의 진언(眞言)에 따라 즉시 궁중의 여인들에게 남장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자 그 이튿날부터 제나라에서는 남장한 여인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임금께서는 궁중에서는 미인에게 남장하는 것을 용서하면서도, 궁중 밖에서는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것은 마치 소의 머리를 문에 걸어놓고 안에서는 말고기를 파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왜 궁주에서는 미인에게 남장시키는 것을 금하지 않는 것입니까? 궁중에서 금한다면 궁중 밖에서도 감히 남장하는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君使服之於內 而禁之於外 猶懸牛首于門 而賣馬肉於內也 公何以不使內勿服 則外 莫敢爲也. 【동의어】현양수매마육(懸羊首賣馬肉), 현우수(매)마육(懸牛首(賣)馬肉) 【유사어】양질호피(羊質虎皮), 현옥고석(衒玉賈石)
Board 고사성어 2022.07.14 風文 R 1147
형용모순 아무래도 인간은 복종보다는 삐딱한 쪽을 선택한 듯하다. 말에도 꾸미는 말과 꾸밈을 받는 말이 날카롭게 맞서는 형용모순이란 것이 있다. ‘네모난 동그라미’ 같은 표현이 그 예이다. 현실에 존재할 수 없고 논리적으로도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당신 머릿속에서는 어느새 동그라미를 네모나게 누르거나 네모를 동그랗게 당기고 있을지 모른다. 이런 표현은 상상력을 자극하고 다른 세계를 꿈꾸게 한다. 모종의 진실을 담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맞이하여 ‘침묵을 듣는 이’에게 강으로 오라고 청할 수 있다. ‘눈뜬장님’과 함께 ‘산송장’이 된 친구의 병문안을 갈 수도 있다. 형용모순은 생활 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 ‘다시마 육수’에는 고기가 들어가지 않는다. ‘닭개장’에는 개고기가 없다. 어느 냉면집에선 ‘온냉면’을 끓여 판다. ‘아이스 핫초코’는 땀을 식혀준다. 종교에 쓰인 형용모순은 반성 없는 일상에 대한 각성의 장치다. 도를 도라 말할 수 있다면 그건 도가 아니다. 부처가 있으면 그냥 지나가고 부처가 없으면 더 냉큼 지나가라. 예수는 원래 하나님이셨지만 자신을 비워 사람이 되었다. 가난하고 비통한 사람은 복이 있다! 이런 형용모순도 있다. 가령, ‘시민군’. ‘시민’이면서 ‘군인’. 비극적 결합이다. 총을 만져본 적도 없는 학생들도 있었다. 39년 전 오늘, 새벽 도청의 시민군은 계엄군에게 모두 사살, 체포되었다. 진압 후 계엄군은 능청스레 광장 분수대 물을 하늘 높이 솟구치도록 틀었다고 한다. …………………………………………………………………………………………………………… 언어의 퇴보 말 몇마디만 듣고도 그 사람 고향을 어림잡을 수 있는 경우가 있다. 그게 꽤나 솔깃했던지 동서양 가릴 것 없이 발음으로 네 편 내 편 갈라 해코지를 한 사례들이 많다. ‘쉽볼렛 테스트’라는 유명한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길르앗과 에브라임이라는 유다의 두 파벌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패전한 에브라임 사람들이 강을 건너 도망치는데, 길르앗 사람들이 길목을 막아서며 ‘쉽볼렛’이라는 단어를 말해보라고 시킨다. 제대로 못 하고 ‘십볼렛’이라고 하면 잡아서 죽였다. 그 수가 4만2천명이었다. ‘쌀’을 ‘살’이라 하면 죽이는 격이다. 관동대지진 때 일본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본말로 ‘15엔 50전’(주고엔 고주센)이란 말을 시켜 제대로 못 하면 조선인이라 하여 바로 살해했다. 발음이 생사를 갈랐다. 나는 가끔 태극기집회에 간다. 그곳엔 어떠한 머뭇거림도 찾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부추겼고, 확신에 찬 1만명은 마치 한 사람 같았다. 그 한 사람이 되지 못하면 다 빨갱이였다. 언어는 퇴보하고 있었다. 막힌 하수구처럼 다른 말은 흐르지 못했다. 고향을 알면 빨갱이인지 알 수 있단다. 소득주도성장 때문에 나라를 망친 대통령은 빨갱이다. 북한에 돈을 제일 많이 갖다 바친 전임 대통령은 빨갱이다. 노란 리본 달고 다니는 놈들은 빨갱이다. 그래서 다 죽여야 한다. 빨갱이면 왜 죽여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먼저 죄인이라 불러놓고 죄목을 찾는다. 비통함이 없는 분노는 얼마나 위험한가. 망설임이 없는 적개심은 얼마나 맹목적인가. 거기, 나의 아버지들이 단어 하나를 부여잡고 막무가내로 앉아 있다. 김진해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