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엔 저지른다 뻔한 얘기지만 양반과 상민을 구별하는 사회는 능력과 상관없이 날 때부터 한 사람이 가게 될 삶의 방향이 얼추 정해져 있다. 인류사는 삶의 향배가 미리 정해진 사람의 수를 줄여온 역사다. 그런데 태생부터 꼬리표를 달고 사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말에 여러 ‘가치’를 부여하는데, 보통은 부정 또는 긍정의 꼬리표를 달아 놓는다. 사전의 뜻보다 이렇게 은근히 달아 놓은 가치의 꼬리표가 영향력이 더 크다. 인간의 소통은 정보 공유보다는 감정과 평가의 교류가 목적인지도 모른다. 낙인은 은밀하되 노골적이다. 나도 ‘똑똑하다’는 말보다 ‘잘난 척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그러거나 말거나). 비슷한 모습이어도 ‘검소한’ 사람과 ‘인색한’ 사람은 전혀 다르다. ‘당당하다, 늠름하다, 굳세다’와 ‘도도하다, 되바라지다, 건방지다, 드세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차별의 강이 놓여 있다. ‘저지르다’는 ‘죄를 짓거나 잘못을 범한다’는 뜻이다. 아예 단어 자체에 ‘죄나 잘못’이 적혀 있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저지르다’ 앞에는 ‘범죄, 범행, 죄, 잘못’ 따위의 낱말이 드글거린다. 부정적인 힘이 하도 강해 ‘일’처럼 중립적인 말도 전염시켜 ‘일을 저지르다’라고 하면 뭔가 잘못을 범한 것 같다. 말의 교란과 삶의 확장은 이렇게 달린 꼬리표를 ‘분연히’ 떼어낼 때 일어난다. 아이들은 ‘저지레’를 하며 자란다. ‘저지르다’가 새로운 시도나 도전의 의미로, 궁극에 가서는 ‘감행’과 ‘전복’의 의미를 얻을 때까지 올해는 전에 없던 의지로 일을 저지르자. …………………………………………………………………………………………………………… ‘죄송하지만’ 감정을 싣지 않고 말하기도 어렵지만, 감정을 싣지 않고 해석하는 건 더 어렵다. 무술을 배우기 시작하고 얼마 안 지나 독일계 캐나다인인 샤론은 내 눈을 쳐다보며 당장 손톱을 깎으라고 말했다. 손톱이 길면 수련 중에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타투 예술가인 보리아는 나를 던지다가 내 안경이 바닥에 떨어지자 사과는커녕 다음 시간부터는 안경을 고정시킬 줄을 구해 오라고 했다. 그들은 관계의 깊이보다는 내용 자체(메시지)를 얼마나 적확하게 표현하느냐에 집중했다. 잘 모른다고 우회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한국처럼 배려하기와 눈치보기가 뒤엉킨 사회에서 사람들은 할 말을 제대로 못 한다. 위력을 앞세운 막말은 난무하지만 힘의 차이를 뛰어넘는 ‘평등한 말하기’란 어렵다. ‘이렇게 말하면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부터 한다. 말을 꺼낼지 말지부터 고민이니, 애써 말을 꺼내도 말을 휘휘 돌리게 된다. 엉겁결에 튀어나오는 말이 ‘죄송하지만’이다. 관계에 기름칠하는 말이다. 공공장소에서 심하게 떠드는 사람에게 “죄송하지만, 조용히 해주세요”라고 한다. 건질 게 하나도 없는 말을 듣고도 “말씀 잘 들었습니다”라는 빈말을 한다. ‘죄송하지만’으로 말을 시작한다는 건,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세운 사회질서와 사회적 삶이 태생적으로 취약하다는 걸 보여준다. 나의 말걸기가 ‘정상적인’ 기존 질서를 방해하는 게 아닐까 걱정할 때마다, 한국어라는 언어생태의 보수성을 거듭 확인하고 우리 사회의 불안전성을 절감하게 된다. 사회적 안전함이 단도직입적 말하기를 가능하게 한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한용운편" 한용운(1879~1944) 시인. 승려. 법호는 만해. 충남 홍성 출생. 한학 수학. 33인 중의 하나인 그는 "님의 침묵" "알 수 없어요" 등 예술적. 사상적 깊이가 있는 시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어려서 신동으로 불리었고 18세 때는 동학에 참여하였고 그 후 승려로 한국 불교계의 혁신을 도모하였고 만주에 건너가 독립 운동에 공헌하였다. 최후의 오분간 벌써 근 30년의 회상이다. "음빙실문집"에서 얻은 기억의 한 토막이다. 지나의 양계초가 무술 정변에 실패하고 미국에 망명하였을 때에 미국 조야 인사를 방문하였는데 모건은 미국에서 유명한 부호요, 기업가요, 돈도 많고 일도 많은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어떠한 사람을 면회하든지 5분 이상을 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모건은 부호요 거상이니만큼 면회하는 사람도 많을 것인즉, 그 만큼 바쁜 사람으로 그만한 사람을 면회하자면 오랜 시간을 허비할 수가 없는 것도 사실이겠지만, 그보다도 그에게는 그만한 능력이 있었던 것이니, 능력이라는 것은 그의 두뇌를 말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심상한 방문객도 없지는 않겠지마는 대부분은 일이 있어서 찾는 사람일 것이요, 그 중에 복잡한 사단과 장황한 이론을 필요로 하는 방문도 많았을 것이다. 그리하면 어찌하여 다만 5분간의 면회로 그러한 일들을 해결할 수가 있는지가 의문이네, 모건은 어떠한 복잡한 일을 당하든지 지엽의 토의를 필요로 하지 아니하고 편언척어로 요령을 포착하여 단도 직입, 언하에 신속히 판단하고, 한 번 판단하면 여하한 경우라도 그것을 변개 하는 일이 없다 한즉 그는 그러한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로 그러한 판단력과 의지력이 있어서 5분간의 면회로도 미해결의 일은 없다 한다. 모건은 대부호이니만큼 미국 정부에서도 그에게 돈을 꾸어 쓰는 일이 있는데, 그러한 때에는 대통령이 직접 모건을 방문하게 된다. 모건은 대통령의 방문에도 물론 5분 이상을 허비하지 않는다 한다. 모건은 일개의 우연한 부상이 아니라 실로 일종의 걸물인 것이 틀림없는 것이다. 양계초가 그를 찾은 것은 소관이 있어서가 아니라 일종의 호기심이었던 것이니만큼 그들의 면회는 3분간에 끝났는데, 양이 떠날 때에 자기에게 기념될 만한 말을 청한즉 모건은 '성공은 최후의 5분간에 있다'는 간단한 말로 고별사를 지었다 한다. 세계적 부호요 서반구적 걸물인 모건으로 당시 지나 일폭의 풍운아로서 정변에 실패하고 천애윤락 이역에 망명하여 미래의 부침이 적어도 4억만 생령에 관심되는 양계초에게 기념적으로 준 말이라면 반드시 심상할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대적 추상보다 그 말 자체를 음미하면 실로 우리들의 좌우명이 될 만한 말이다. 이 말은 중도의 실패에 낙망하지 말고 최후까지 노력하라는 뜻이다. 사람이 경영하는 일은 성공을 목표로 하지 않는 일이 없고 성공까지에는 반드시 다소의 시일이 요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시일을 두고 참담 경영하던 일이 최후의 종국은 5분간으로서 족한 것이다. 구인의 산은 최후의 일궤를 가하는 5분간으로 부족이 없는 것이다. 일을 영위함에는 시간의 조만도 문제이지만 성공의 5분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성공기의 지속이 그 일을 영작하는 노력의 질적 양적의 다과로 정비례될 뿐이다. 물론 여기에서 영위하는 일이라는 것은 산판상으로 타산하여서 전도를 예측할 수 있는 대금업이나 토목 공사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전도의 성패를 알 수 없으면서도 사람으로서 당연히 당할 일을 말하는 것인데, 사람이 하고자 하는 일은 매양 순경보다 역경을 당하는 일이 많게 되는 것은 조화용의 장난인지도 모른다 하려니와, 그보다도 순경에 처한 사람보다도 역경에 있는 사람이 하고자 하는 일이 많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궁할수록 달하고 싶고 퇴할수록 진하고 싶은 사람의 욕망이라고 하느니보다 차라리 생물의 본능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자고로 위대한 사업은 흔히 역경을 만난다고 하지마는 위대한 사업일수록 역경에서 출발하기가 쉽게 되느니 그 출발점이 역경인지라 그 진로가 순경일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그들에게 순경이 있다면 그것은 이른바 성공하는 최후의 5분간으로부터일 것이다. 그러므로 천하의 모든 역경에 선 사람들도 순경을 개척하기 위하여 노력한다면 마땅히 그것을 먼저 간파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아니하여 일을 영위하다가 곤란이 있다고 중도에 퇴보한다든지 진로를 변경한다면 그것은 최초의 본의가 아닐 뿐 아니라 그 사람에게는 언제든지 성공은 없을 것이니, 그러면 그 사람의 일생은 실패와 비애로 시종할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소위에 대하여 일시적 성취가 사람으로 그것을 영위하고 거기에 용진하여 백절불굴, 쉬지 않고 행하다가 광란을 기도에서 돌이키고 대하를 장경에서 붙들어서 성공의 최후 5분간을 본다면 사람의 희열이 거기에 있고 진정한 행복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세도의 일빈일소에 영수향응하여 조동모서로 종작이 없어 부침하는 경박아, 천장부에게는 각각으로 실패의 5분간을 계속할 뿐이다.
일거양득(一擧兩得) - 한 가지 일을 하여 두 가지 이익을 거둠. 《出典》'春秋後語' 戰國策 진(秦)나라 혜문왕(惠文王)때의 일이다. 중신 사마조(史馬金昔)는 어전에서 '중원으로의 진출이야말로 조명시리(朝名市利)에 부합하는 패업(覇業)'이라며 중원으로의 출병을 주장하는 재상 장의(張儀)와는 달리 혜문왕에게 이렇게 진언했다. "신이 듣기로는 부국을 원하는 군주는 먼저 국토를 넓히는 데 힘써야 하고, 강병(强兵)을 원하는 군주는 먼저 백성의 부(富)에 힘써야 하며, 패자(覇者)가 되기를 원하는 군주는 먼저 덕을 쌓는 데 힘써야 한다고 합니다. 이 세 가지 요건이 갖춰지면 패업은 자연히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하오나, 지금 진나라는 국토도 협소하고 백성들은 빈곤합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면 먼저 막강한 진나라의 군사로 촉(蜀) 땅의 오랑캐를 정벌하는 길밖에 달리 좋은 방법이 없는 줄로 압니다. 그러면 국토는 넓어지고 백성들의 재물은 쌓일 것입니다. 이야말로 '일거양득(一擧兩得)'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천하를 호령하기 위해 천하의 종실(宗室)인 주(周)나라와 동맹을 맺고 있는 한(韓)나라를 침범하면, 한나라는 제(齊)나라에 구원을 청할 게 분명하며, 더우기 주나라의 구정(九鼎)은 초나라로 옮겨질 것입니다. 그땐 진나라가 공연히 천자를 위협한다는 악명(惡名)만 얻을 뿐입니다." 이에 혜문왕은 사마조의 진언에 따라 촉 땅의 오랑캐를 정벌하고 먼저 국토를 넓혔다. 【동의어】일거양획(一擧兩獲), 일전쌍조(一箭雙鳥), 일석이조(一石二鳥) 【반의어】일거양실(一擧兩失)
Board 고사성어 2022.08.03 風文 R 790
괄호, 소리 없는 말은 소리에 높낮이를 주거나, 늘이거나, 짧게 끊거나, 뜸을 들이는 방식으로 말하는 이의 의도를 다양하게 담는다. 이에 비해 글은 평평하여 목소리를 담지 못한다. 이를 흉내 내려고 기호를 쓰는데, ‘?’를 붙이면 말끝을 올리고 ‘!’가 나오면 감탄하는 마음이 생기며 ‘…’ 앞에서는 말끝을 흐린다. 그중에 괄호가 있다. 소인배인 나는 나이가 들수록 말이 많아졌다. 말을 하면서도 머릿속에 따로 떠오른 생각마저 주절대니 난삽하다. 학생들한테 한 학기 공부한 보람을 묻는 질문지를 만들면서도 이런 식이다. ‘강의 내용 중에서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이 있었나요?(있기나 하겠습니까마는….)’ 나에게 괄호는 마음속에 떠오른 딴소리를 묻어두지 않고 드러내는 장치다. 관객한테 들리도록 하는 혼잣말이다. 방금 한 말이 온전하지 않아 비슷한 말이나, 덧붙이는 말이나, 대꾸하는 말을 한다. 괄호는 제 목소리를 갖지 못한 말이고, 철저히 ‘을’이다.(수학에서 괄호는 ‘갑’이다. ‘3* (2-1)’은 괄호부터 계산해서 ‘3’이다.) 괄호 다음에 오는 조사는 괄호 안의 말을 무시하고 원래의 말에 맞추어 붙인다. ‘모레(수요일)는’이라고 하지, ‘모레(수요일)은’이라고 안 쓴다. 그래서 짐짓 읽고도 읽지 않은 듯, 말하고도 말하지 않은 듯 해야 한다. 하지만 목소리 없는 이 군더더기는 지금 매끄럽게 내뱉는 말의 뒤편에 실은 다른 표현이 철철 넘친다고 소리친다. 괄호 속 존재는 소거되어야 할 잉여가 아니라 복권되어야 할 아우성이다. 그래서인지 괄호를 보면 혁명이 떠오른다. …………………………………………………………………………………………………………… 반격의 꿔바로우 아침 일찍 빈병을 챙겨 슈퍼에 갖다 팔려고 나서는데, 아내는 오후에 가라고 말린다. 아침부터 빈병을 갖고 가면 장사하는 사람들이 싫어한다고. 하루 매상이 마수걸이에 달려 있다는 생각은 이 무심한 사회에서도 여전히 남아 있다. 습관은 잘 안 바뀐다. 말에 대한 잔소리꾼들은 말소리의 변화를 ‘말세적 징후’로 보는 습관이 있다. 말은 타락을 반영하기도 하고 부추기기도 한단다. 그야말로 슈퍼맨이다. 그들이 거론하는 징후 중 하나는 사람들 말이 점점 ‘쎄지고’ 있다는 것이다. 주범은 된소리다. ‘잘렸어’ ‘세게’ ‘소주’라 해야 하는데 ‘짤렸어, 쎄게, 쏘주’라고 하니 사회는 더 거칠고 강퍅해진다는 거다. 된소리를 경멸하는 태도는 외래어 표기법에도 녹아 있다. 베트남어 등 몇몇 언어를 빼면 원칙적으로 외래어 파열음(k, t, p)은 ‘ㅋ, ㅌ, ㅍ’으로 쓰지 ‘ㄲ, ㄸ, ㅃ’으로 쓰면 안 된다. ‘마오쩌둥’처럼 ‘ㅆ, ㅉ’이 허용되는 경우도 있지만, ‘꼬냑, 싸이코, 모짜르트’가 아닌 ‘코냑, 사이코, 모차르트’처럼 써야 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래서 길에서 만난 중국음식 하나가 흥미롭다. ‘꿔바로우[鍋包肉]’. 지금의 외래어 표기법으로 중국어를 표기할 때 ‘ㄲ’은 절대로 쓸 수 없다. 원칙을 따르자면 이 음식은 ‘궈바러우’ 정도로 써야 할 텐데 이를 얼마나 따를까. 그렇다고 ‘탕수육’처럼 우리 한자음에 따라 ‘과포육’이라 하면 장사를 포기하는 일일 테고. 기자들이 흔히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이 말의 미래를 ‘좀 더 지켜봐야겠다.’ 된소리의 반격이 이미 시작된 걸까?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Board 고사성어 2022.08.02 風文 R 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