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된 기억 단어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애가 닳고 약이 올라 그 단어 주변을 계속 서성거린다. 비슷한 발음의 단어를 입에 굴렸다가 뱉어내고, 비슷한 뜻의 표현을 되뇌면서 추격한다. 가리키는 대상이 구체적이고 협소할수록 더 빨리 사라진다. 그래서 이름(고유명사)을 가장 먼저 까먹는다. 그다음이 일반명사, 형용사이고 동사가 마지막으로 사라진다. 단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이 늙어가고 있음을 직감한다. 머리에 구멍이 숭숭 나고 있고 내 안에 문제가 생겼음을 알아챈다. 어딘가 막히고 끊어지고 사라져 가고 있다. 늙는다는 건 말을 잃는 것. 우리 어머니도 말년에 말을 잃어버렸다. 말동무가 없던 게 큰 이유였지만 스스로를 표현할 힘도 잃어버렸다. 나도 단어를 잃어버림과 맞물려 점점 완고해지고 있다. 완고하다는 건 약해졌다는 뜻. 일반적으로 실어증의 원인을 ‘망각’에서 찾지만, 프로이트는 정반대로 해석한다. 실어증은 망각이 아니라 ‘심화된 기억’이라는 것이다. 특정 시기에 대한 기억만 강렬하게 남고 나머지는 사라진 결과이다. 언어능력이 제대로 작동하는 사람은 같은 말을 눈치껏 달리 표현하거나 고친다. 어제의 기억과 오늘의 기억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직조한다. 말을 잃어가고 있는 사람은 고체처럼 하나의 기억에 사로잡혀 같은 말을 끝없이 반복한다. 백오 세의 우리 할머니가 ‘○○는 왜 안 와?’, ‘우리 집엔 언제 가?’라는 말을 한자리에서 수십 번 반복하는 것도 그의 기억에 사람과 공간에 대한 그리움이 인쇄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신의 기억에는 어떤 말이 인쇄되어 있는가? ……………………………………………………………………………………………… 하루아침에 하루아침에 벌어진 일이다. 마스크 없이 버스 타기 꺼림칙하고 주가는 곤두박질치고 거리는 스산하고 사람들은 흩어졌고 형이 죽었다. 이전과 이후가 달라졌고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우리는 바쁘다. 일이 닥치고 나서야 ‘여기는 어디?’라고 묻는다. 조짐이 왜 없었겠냐마는 직전까지 모르다가 하루아침에 당했다고 착각한다. 물론 엄청나게 긴 시간을 뜻하는 ‘겁’(劫)이란 말도 안다. 천지가 한번 개벽할 때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사이. 가로세로 40리나 되는 큰 바위를 백년에 한번씩 얇은 옷으로 스쳐 마침내 그 바위가 닳아 없어지는 시간.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이다. 그래서인지 짧은 시간을 표현하는 말이 많다. ‘찰나’(刹那)는 75분의 1초. 이게 얼마나 짧은지 실을 잡아당겨 끊어지는 순간이 64찰나나 된다. ‘순식간’은 눈 한번 깜박이고 숨 한번 쉬는 사이다. ‘별안간’은 스치듯 한번 보는 동안이고, ‘삽시간’은 가랑비가 땅에 떨어지는 사이다. 아찔할 정도로 빠르다. ‘갑자기, 졸지에, 돌연, 홀연, 각중에, 느닷없이’ 같은 말도 어떤 일이 짧은 시간에 뜻밖에 벌어졌다는 느낌을 담는다. 그에 비해 ‘하루아침’은 숨이 덜 차다. ‘찰나, 순식간, 별안간, 삽시간’이 시간의 한 지점을 수직적으로 지목한다면, ‘하루아침’은 그걸 조금이나마 수평적으로 펼쳐놓는다. ‘찰나’나 ‘영겁’에 비해 ‘하루아침’은 시간의 질감이 느껴진다. 찰나에 서 있는 인간에게 ‘하루아침’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를 알아차릴 수 있는 과분하게 여유로운, 그만큼 미련이 남는 시간이다.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최남선편" 최남선(1890~1957) 문인, 국학자, 사학가. 호는 육당. 서울 출생. 국학 수학, 일본 와세다 대학 중퇴. 독립 선언문을 기초한 사람으로 유명한 최남선은 한국 최초의 신체시와 시조 등 많은 문학 작품을 발표하였다. 언문 일치의 문장, 자유시의 제창, 시조의 현대화, 수필체 문장의 도입 등 분멸의 공적이 많다. 국토 예찬 우리의 국토는 그대로 우리의 역사이며, 철학이며, 시이며, 정신입니다. 문학 아닌 채 가장 명료하고 정확하고, 또 재미있는 기록입니다. 우리 마음의 그림자와 생활의 자취는 고스란히 똑똑히 이 국토 위에 박혀서 어떠한 풍우라도 마멸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믿습니다. 나는 우리 역사의 한 작은 학도요, 우리 정신의 한 어설픈 탐구자로서, 진실로 남다른 애모와 탄미와 함께 무한한 궁금스러움을 이 산하대지에 가지는 것입니다. 자갯돌 하나와 마른 나무 한 밑동도 말할 수 없는 감격과 흥미와 또 연상을 자아냅니다. 이것을 조금씩 색독이나마 하게 된 뒤부터 우리 나라가 위대한 시의 나라, 철학의 나라임을 알게 되고 또 완전, 상세한 실물적 오랜 역사의 소유자임을 깨닫게 되고, 그리하여 쳐다볼수록 거룩한 우리 정신의 불기둥에 약한 시막이 퍽 많이 아득해졌습니다. 곰팡내나는 서적만이 이미 내 지견의 웅덩이가 아니며 한 조각 책상만이 내 마음의 밭일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도리어 서적과 책상에서 불구가 된 내 소견을 진여한 상태로 있는 활문자, 대궤안에서 교정받고 보양을 얻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통절히 느꼈습니다. 묵은 심신을 시원히 벗어 던지고, 자유로운 공기를 국토 여래의 상적토에서 호흡하리라 하는 열망은 시시각각으로 나의 가슴을 태웠습니다. 힘 자라는 대로,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국토 예찬을 근수하기는, 나로서는 진실로 숭고한 종교적 충동에 끌린 바로서, 부득불연한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큰 재미와 힘을 여기서 얻었고, 얻고, 얻을 것이니, 생활의 긴장미로만 해도 나의 이 수행은 오래도록 계속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국토에 대한 나의 신앙은 일종의 애니미즘일지도 모릅니다. 나의 보는 그것은 분명히 감정이 있으며 웃음으로 나를 대합니다. 이르는 곳마다 꿀 같은 속삭임과 은근한 이야기와 느꺼운 하소연을 듣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의 심장은 최고조의 출렁거림을 일으키고 실신할 지경까지 들어가기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때의 나는 분명한 한 예지자의 몸이요, 일대 시인의 마음을 가지지만, 입으로 그대로 옮기지 못하고 운율 있는 문자로 그대로 재연하지 못할 때, 나는 의연한 일 범부며, 일 박눌한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섭섭히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내 하면, 나의 작은 재주는 저 큰 운의를 뒤슬러 놓기에는 너무도 현격스러운 것이니까, 워낙 애닯고 서운해할 염치가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혹은 유적, 혹은 전설에 내일을 기다리기 어려운 것도 있고, 혹은 자연의 신광, 혹은 역사의 밀의에 모르는 체할 수 없어서, 변변하지 않은 대로, 간 곳마다 견문 고검의 일반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는 진실로 문장으로 보거나 논고로 볼 것이 아니요, 또 천 년의 숨은 자취를 헤쳤거나 만인의 심금을 울릴 무엇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런대로 우리 국토에 대한 뜨거운 마음이 넘쳐 나온 것이니, 내게는 휴지로 버리기 어려운 점도 없지 아니합니다. 이러므로, 다만 한 가지 또 어슴푸레하게라도, 우리 정신의 숨었던 일면이 나타난다면 물론 분회의 다행입니다. 그렇진 못할지라도, 우리 청전구물에 대한 나의 애처롭고 안타까운 정리를 담은 것이 혹시나 강호의 동정을 산다면, 이 또한 큰 소득입니다. 아무튼 우리 국토의 큰 정신을 노래해 내는 이의 어릿광대로 작은 끄적거림을 차차 책으로 모아 갈까 합니다. 이제 그 첫권로 내는 "심춘 순례"는, 작년 삼월 하순부터 수미 50여 일간,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순례기의 전반을 이루는 것이니, 마한 내지 백제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신악의 여훈을 더듬는 것이요, 장차 해변을 끼고 내려가는 부분을 합하여 서한의 기록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진인의 고신앙은 천의 표상이라 하여 산악으로써 그 대상을 삼았으며, 또 그들의 영장은 뒤에 대개 불교에 전승되니, 이 글이 산악 예찬, 불도량 역참의 관을 주는 것은 이 까닭입니다. 적을 것도 많고 적을 방법도 있겠지만, 매일 적잖은 산정을 발섭하고 가쁜 몸이 침침한 촛불과 대하여 적는 데도 이것도 큰 노력이었습니다. 선재와 행문이 다 거침을 극한 것은 부재 이외에도 까닭이 없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고치자니 새로 짓는 편이 도리어 손쉽고, 새로 짓자니 그만 여가가 없으므로 숙소에서 주필하여 날마다 신문사로 우송하였던 원고를 그대로 배열하게 되었습니다. 후안의 꾸지람은 얼마든지 받겠습니다. 행중에 여러 가지 편의를 주신 연로의 여러 대방가, 특히 각 산의 법승들에게 이 기회에 심대한 사의를 드립니다. 또, 남순 소편에 다소라도 보람 있는 구절이 있다면, 이는 시종 일관하게 구책 유액의 노를 취해 주신 여러분의 현교와 암시에서 나온 것임을 아울러 표백해 둡니다.
전전긍긍(戰戰兢兢) - 매우 두려워 벌벌 떨며 두려워함.《出典》'詩經' 小雅篇 '전전(戰戰)'이란 몹시 두려워서 벌벌 떠는 모양이고, '긍긍(兢兢)'이란 몸을 움추리고 조심하는 모양을 뜻한다. 이 말은 중국 최고(最古)의 시집(詩集)인《시경(詩經)》'소아편(小雅篇)'의 '소민(小旻)'이라는 시(詩)의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데 그 시의 내용은 모신(謀臣)이 군주의 측근에 있으면서 옛 법을 무시한 정치를 하고 있음을 개탄한 것으로 다음과 같다. 감히 맨손으로 범을 잡지 못하고 [不敢暴虎] 감히 걸어서 강을 건너지 못한다 [不敢憑河] 사람들은 그 하나는 알고 있지만 [人知其一] 그밖의 것은 전혀 알지 못하네 [莫知其他] 두려워서 벌벌 떨며 조심하기를 [戰戰兢兢] 마치 깊은 연못에 임하듯 하고 [如臨深淵] 살얼음을 밟고 가듯 해야 하네 [如履薄氷] 또《논어(論語)》'태백편(太伯篇)'에 보면, 曾子가 병이 重해지자 제자들을 불러서 말 "내 발을 펴고, 내 손을 펴라.《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매우 두려운 듯이 조심하고, 깊은 연못에 임한 것 같이 하고, 얇은 얼음을 밟는 것 같이 하라.'고 했다. 지금 이후로는 나는 그것을 면(免)함을 알겠구나, 제자들아." 曾子有疾 召門弟子曰 啓予足 啓予手 詩云 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 而今而後 吾知免夫 小子. 【동의어】전전긍긍(戰戰兢兢) 【유사어】소심익익(小心翼翼)
Board 고사성어 2022.08.07 風文 R 847
공교롭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우연히 일어났을 때 쓰는 말. 하지만 어근인 ‘공교’(工巧)는 반대로 ‘솜씨 있고 실력 있다’는 뜻이다. 뛰어난 장인은 작은 실수도 놓치지 않는 섬세함으로 공교한 기술을 연마한다. ‘공교한 작품’은 요행이 아니라 성실한 노력과 몰입의 열매다. 홀로 보낸 시간의 두께에 비례한다. 그래서 ‘공교롭다’는 말에는 우연한 일의 뒷면에 인연의 그물이 촘촘히 쳐져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 ‘우연찮게’(우연하지 않게)가 ‘우연히’란 뜻과 같아진 것처럼, ‘공교롭다’는 한 낱말 안에 ‘우연과 필연(운명)’이 하나라고 새겨놓았다. 공교롭게도 코로나는 우리 사회의 약점을 드러내고 있다. 코로나는 사회경제적 약자, 배제되고 뒤처지고 깨어진 자들에게 가장 먼저 찾아와 가장 노골적으로 괴롭히다가 가장 나중까지 머무를 것이다. 공교롭게도 코로나는 신천지 교단의 폐쇄성을 숙주 삼아 우리 사회를 들쑤시고 있다. 배타성, 선민의식, 물신숭배, 성장제일주의는 신천지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에는 독특한 도자기 수리 기법이 있다. ‘금 꿰매기’, ‘금 수선’ 정도로 읽히는 긴쓰쿠로이(金繕い)는 깨어진 도자기를 버리는 대신 옻 성분의 접착제로 조각을 이어 붙이고 금가루로 칠을 하여 깨어진 도자기만의 아름다움을 새로 창조하는 기술이다. 흉터를 금빛으로 탈바꿈함으로써 부서짐을 감추지 않고 그 또한 역사로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자세다. 우리가 신의 피조물이라면 이 깨어진 세상에서 더욱 연대할 의무밖에 없다. 깨지고 찢어진 사회를 이어 붙이는 공교한 실력을 추구할 뿐이다. 우연이란 없다. …………………………………………………………………………………………………………… 이단 다른[異] 끝[端]. 끝이 다르다. 시작과 중간은 같았다. 다른 옳음. 무엇이 옳은지 다르게 생각하는 데서 오는 갈라짐. ‘옳지 않다’고 하려면 ‘옳음’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옳지 않음은 진리에 미달했다기보다는 거짓의 편에 섰다는 뜻에 가깝다. 어떤 이야기 구조 속에 있느냐에 따라 이단은 서로를 향하는 총알. 이단에 속한 사람은 전통과 권위에 도전한다. ‘이단아’라는 말에는 ‘권위에 맞섬, 엉뚱함, 아웃사이더, 혁신’의 이미지가 풍긴다. 유독 기독교에 이단·사이비가 많은데, 신이 자신의 모습 그대로가 아닌 인간의 모습으로 왔다는 데에 이 종교의 심오함과 딜레마가 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아니 상상으로밖에 가늠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믿음의 체계이다. ‘신이면서 인간’인 예수. ‘A이면서 B’라는 등식은 동시에 ‘A도 아니고 B도 아니’라는 말도 된다. 신이면서 인간인 존재는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존재다. 그게 기독교의 시작점이다. 그래서 쉽게 끝이 달라진다. ‘알 수 없는’ 존재가 우리 곁에 온 사건 때문에 이단에 잘 빠지는 걸까? 아니다. 그 역사적 사건이 ‘반드시’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에 한 번 더 벌어져야 한다는 욕망이 근본 문제다. 자신이 끝이자 시작이려고 하는 욕망. 우리는 끝도 시작도 아닐지 모른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예수는 신이면서 인간이었다.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었다. 우리도 나이면서 남이다. 나도 아니고 남도 아니다. 이 둘 사이의 줄타기는 삶 속에 뒤엉켜 거듭 드러날 뿐. 그 외에는 모른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신채호편" 신채호(1880__1936) 사학자. 호는 단재. 충북 청주 출생. 순수한 민족주의적 역사관으로 당시의 식민주의적인 일체의 학설들을 배격하었으며 항일 운동의 이념적 지도자로 언론계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일본 관헌에 체포되어 여순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차라리 괴물을 취하리라 1 한 사람이 떡장사로 득리하였다면 온 동리에 떡방아 소리가 나고, 동편 집이 술 팔다가 실패하면 서편 집의 노구도 용수를 떼어 들이어, 진할 때에 같이 와~하다가 퇴할 때에 같이 우르르 하는 사회가 어느 사회냐. 매우 창피하지만 우리 조선의 사회라고 자인할 수밖에 없다. 삼국 중엽부터 고려 말일까지 염불과 목탁이 세가 나, 제왕이나 평민은 물론하고 남은 여에게 권하며, 조는 손에게 권하여 나무아미타불한 소리로 팔백 년을 보내지 안하였느냐. 이조 이래로 유교를 존상하매, 서적은 사서오경이나 그렇지 않으면 사서오경을 되풀이한 것뿐이며, 학술은 심, 성, 이, 기의 강론뿐이 아니었더냐. 이같이 단조로 진행되는 사회가 어디 있느냐. 예수교를 믿어야 하겠다 하면, 삼두락밖에 못 되는 토지를 톡톡 팔아 교당에 바치며, 정치 운동을 한다 할 때에는 이발사가 이발관을 뜯어 가지고 덤비나니, 이같이 뇌동부화하기를 즐기는 사회가 어디 있느냐. 2 개인도 사회와 같아 갑종교로 을종교를 개신하거나, 갑주의로 을주의에 이전할 때에 반드시 주먹을 발끈 쥐고 얼굴에 핏대가 오르며 씩씩하는 숨소리에 맥박이 긴급하며, 심리상의 대혁명이 일어나 어제의 성사가 오늘의 악마가 되어 무형의 칼로 그 목을 끊으며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구적이 되어 무성의 총으로 그 전부를 도륙한 연후에야 신생활을 개시함이 인류의 상사어늘, 근일의 인물들은 그렇지도 안하다. 공자를 독신하던 자가 이제야 예수를 믿지만 벌써 36년 전의 예수교인과 같으며, 제왕의 충신으로 자기하던 자가 처음으로 민주주의를 존봉하지만, 마치 자기의 모복증에서부터 민주의 혼을 배워 가지고 온 것 같으며, 그러다가 돌연히 딴 경우가 되면 바울이 다시 안연도 될 수 있으며, 당톤이 다시 문천상도 될 수 있으며, 바쿠닌의 제자가 카이제르의 시종도 될 수 있으니, 이것이 무슨 사람이냐. 그 중에 아주 도통한 사람은 삽시간에 애국자, 비애국자, 종교가, 비종교가, 민족주의자, 비민족주의자의 육방팔면으로 현신하나니 어디에 이런 사람이 있느냐. 그 원인을 소구하면, 나는 없고 남만 있는 노예의 근성을 가진 까닭이다. 노예는 주장은 없고 복종만 있어, 갑의 판이 되면 갑에 복종하고, 을의 판이 되면 을에 복종할 뿐이니, 비록 방촌의 심리상인들 무슨 혁명할 조건이 있으랴. 3 손일선의 삼민주의는 민주주의, 사회주의 등을 혼동하여 그리 찬탄할 가치는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래도 주의는 주의다. 우리의 사회에는 수십 년 동안 지사, 위명자가 누구든지 한 개 계시한 소주장도 없었다. 그리하여 일시의 활용에는 썩 편리하였다. 실업을 경영하는 자를 보면 나의 의견도 실업에 있다 하며, 교육을 실시하려는 자를 보면 나의 주지도 교육에 있다 하며, 어깨에 사냥총을 메고 서북간도의 산중으로 닫는 사람을 보면 나도 네 뒤를 따르겠노라 하며, 허리에 철추를 차고 창해역사를 꿈꾸는 자를 보면 내가 너의 유일한 동지로다 하고, 외인을 대하는 경우에도 중국인을 대하면 조선을 유교국이라 하며, 미국인을 대하면 조선을 예수교국이라 하며, 자가의 뇌 속에는 군주국, 비군주국, 독립국, 비독립국, 보호국, 비보호국, 무엇이라고 모를, 집을 수 없는, 신국가를 잠설하여 시세를 따라 남의 눈치를 보아, 값나가는 대로 상품을 삼아 출수하는도다. 애재라. 갑신 이후 40여 년 유신계의 산아들이 그 중에 시종 철저한 경골한이 몇몇이냐. 4 어떤 선사가 명종할 때 제자를 불러 가로되, "누워 죽은 사람은 있지만 앉아 죽은 사람도 있느냐?" "있습니다." "앉아 죽은 사람은 있지만 사서 죽은 사람도 있느냐?" "있습니다." "바로 사서 죽은 사람은 있으려니와 거꾸로 사서 죽은 사람도 있느냐?" "없습니다. 인류가 생긴 지가 몇만 년인지 모르지만 거꾸로 사서 죽은 사람이 있단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 선사가 이에 머리를 땅에 박고 거꾸로 사서 죽으니라. 이는 죽을 때까지도 남이 하는 노릇을 안 하는 괴물이라, 괴물은 괴물이 될지언정 노예는 아니 된다. 하도 뇌동부화를 좋아하는 사회니 괴물이라도 보았으면 하노라. 관악산중에 털똥 누는 강감찬의 후신이 괴물이 아니냐. 상투 위에 치포관을 쓰고 중국으로 선교온 자가 또한 괴물이 아니냐. 이는 군함, 대포, 부자유, 불평등, 생활 곤란, 경제 압박 모든 목하의 현실의 대적이지 못하고 도피하여 이상적 무릉도원의 생활을 찾음이니 무슨 괴물이 되리오. 5 조선인같이 곤란, 고통을 당하는 민족 없음을, 따라서 조선에서 무엇을 하여 보자는 사람같이 가읍할 경우에 있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경우가 그렇다고 스스로 퇴주하면 더욱 자살의 혈에만 근할 뿐이며, 남의 용서를 바라면 한갓 치소만 살 뿐이니, 경우가 그렇다고 남의 용서를 바랄까, 치소만 살 뿐이니라. 스스로 퇴거할까, 더욱 자살의-중간 누락-경우가 이러므로 조선에 나서 무엇을 하려 하면 불가불 그 경우에서 얻는 전염병을 예방하는 방법이 있어야 할 것이다. 안순암이 처음 이성호를 보러 가서 목이 말라 물을 청하였다. 그러나 물은 주지 않고 이야기만 한다. 밤이 으슥한 뒤에, 성호가, "이제도 목이 마르냐?" 하거늘, "사실대로 목마른 증은 없어졌습니다." 한즉, 성호가 가로대, "참아 가면 천하의 난사가 다 오늘 밤의 목과 같으니라."하였다. 이같이 목말라도 참고, 배고파도 참고, 불로 지져도 참고, 바늘로 손, 발톱 밑을 쑤셔도 참아, 열화지옥의 만악을 다 참아 가는 이는 아마 도학 선생 같은 이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