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흰구름 단상 9 하얀 마가렛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어찌 꽃들은 그리도 자기의 때를 잘도 알아 피고 지는 것일까. 늘 조심스럽고 성실하면서도 명랑한 모습의 한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조촐한 꽃. 수도자의 모습도 이와 같았으면 한다. 우리 성당 앞 십자로의 느티나무는 어느새 키도 많이 크고 잎사귀도 많이 달았다. 1991년 9월, 수녀회 60주년 기념식수로 심은 나무가 해를 거듭할수록 풍채를 자랑하고 있구나. 느티나무야. 너는 매일 성당의 종소리를 제일 가까이 듣고 있지? 수녀들의 인사 이동이 있을 적마다 떠나는 이들과 보내는 이들의 겉모습과 속마음을 누구보다 많이 지켜볼 수 있지? 우리집에 드나드는 다양한 손님들의 표정과 마음도 읽을 수 있지? 네가 곁에 있으므로 우리는 늘 정겨운 느낌이 들고 든든하단다. 10 옷장에 걸어 두었던 옷들을 다 꺼내어 다림질하고, 떨어진 곳은 꿰매고 하는 일이 즐거웠다. 사무실에서 하루 종일 서류를 만지는 일과는 다른 느낌이다. 늘 별것도 없는 빤한 살림인데도 한번 움직이려면 무엇이 그리 많은지. 좀더 깔끔하고 소박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미루어 두곤 하는 나를 반성한다. 정신의 소유도. 물질의 소유도 모두 필요 외에 여분으로 갖는 것은 자유로운 삶을 방해한다. 예전에 비하면 수도자의 삶의 양식도 많이 편리해지고 부유해졌다고 볼 수 있다. 각 개인이 자기 스스로 절제하고 제동을 걸지 않는다면 타락하기 쉬울 것이다. 원내에 새 건물을 짓는 어수선한 틈을 타 30년 만에 도둑이 두 번이나 들어 우리 모두를 놀라게 했다. 한번은 우리가 깊이 잠든 밤에, 한 번은 우리가 길게 기도하는 주일 아침에 주방의 유일한 철창까지 부수고 들어와 마음놓고 볼일을 본 듯하다. 경리실의 높다란 유리문을 깨고 약간의 현금을 훔친 뒤 의자 뒤에 커다란 발자국까지 남겨 놓고 갔다. 그후로 할 수 없이 곳곳에 쇠창살을 하게 되니 날마다 투명하게 탁 트인 유리창으로 꽃, 나무, 하늘, 바다를 내다보던 나의 기쁨이 절반은 줄어든 셈이다. 30년 전의 이곳 산, 바다, 언덕은 평화로웠고, 문단속을 좀 소홀히 해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인심도 갈수록 각박해지고 이런 속에 살아야 하는 우리의 모습도 답답하고 우울하다. 하지만 몇 차례나 우리를 몹시 놀라게 한 밤손님의 그 마음도 편치는 않으리라. 11 "수녀님, 우리 여기 놀이터에서 아주 조금만 놀다 가도 돼요."고 우리가 외출할 때마다 동네 어린이들은 우리 유치원을 가리키며 묻곤 한다. "그래. 조금만 놀다 가라.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야지. 응" 하고 대답하며 그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는 공간이 없음을 아쉬워한다. 어린이들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린 시절, 마음껏 뛰놀아야 어른이 돼서도 구김살없는 사랑을 할 수 있고 인생의 어려움도 잘 헤쳐 갈 수 있을텐데... 아이들의 웃음을 보니 내 마음도 밝아졌다. <시나라고 가는 길>이라는 어린이 시 낭송집도 들으며 동심으로 돌아가 본 날이었다. 어린이들의 순결한 목소리를 들으면 괜히 눈물부터 난다.
Board 삶 속 글 2022.08.21 風文 R 414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심훈편" - 심훈(1901~1936) 소설가, 시인. 본명은 대섭. 서울 출생. 상해 원강 대학 중퇴. 중앙 일보 학예 부장 역임. 오늘날도 널리 읽히는 농촌 계몽 소설 "상록수"의 작가 심훈. 그는 당시의 선각자들이 거의 그러했듯이 '조선 만중의 구원'을 늘 염원했던 민족주의자였다. 3.1운동에 참가하여 복역한 후 상해에서 망명 생활을 했고 귀국 후 신문 기자 생활을 하다가 영화에 투신, 1926년에 "먼동이 틀 때"를 각색, 감독하는 정력적인 활동을 보여 주었다. "상록수"는 충남 당진으로 잠적하여 쓴 것으로 동아 일보 현상모집의 당선작인데, 당시의 시대상을 여실히 반영시켜 크게 반향을 일으켰던 작품이다. 7월의 바다 흰 구름이 벽공에다 만물상을 초 잡는 그 하늘을 우러러보아도, 맥파만경에 굼실거리는 청청한 들판을 내려다보아도 백주의 우울을 참기 어려운 어느 날 오후였다. 나는 조그만 범선 한 척을 바다 위에 띄웠다. 붉은 돛을 달고 바다 한복판까지 와서는 노도 젓지 않고 키도 잡지 않았다. 다만 바람에 맡겨 떠내려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나는 뱃전에 턱을 괴고 앉아서 부유와 같은 인생의 운명을 생각하였다. 까닭 모르고 살아가는 내 몸에도 조만간 닥쳐올 죽음의 허무를 미리다가 탄식하였다. 서녘 하늘로부터는 비를 머금은 구름이 몰려 들어온다. 그 검은 구름장은 시름없이 떨어뜨린 내 머리 위를 덮어 누르려 한다. 배는 아산만 한가운데에 떠 있는 '가치내'라는 조그만 섬에 와 닿았다. 멀리서 보면 송아지가 누운 것만한 절해의 고도다. 나는 굴 껍데기가 닥지닥지 달라붙은 바위를 짚고 내렸다. 조수가 다녀나간 자취가 뚜렷한 백사장에는 새우를 말리느라고 공석을 서너 잎이나 깔아 놓았다. 꼴뚜기와 밴댕이 같은 조그만 생선이 섞인 것을 해쳐 보려니,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이 외로운 섬 속에도 사람이 사나 보다.' 나는 탐험이나 하듯이 길로 우거진 잡초를 헤치고 인가를 찾아 섬 가운데로 들어갔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잡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 모르는 딸 있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아비 홀로 두고 영영 어디 갔느냐? 어려서 부르던 노래를 휘파람 섞어 부르며, 뱀이 지나간 자국만치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언덕으로 올라갔다. 과연 집이 있다! 하늘을 꿰뚫을 듯 열 길이나 까마아득하게 솟아오른 백양목 그늘 속에서 게딱지 같은 오막살이 한 채를 발견하였다. '저기서 사람이 살다니 무얼 먹고 살까?' 나는 단장을 휘두르며 내려갔다. 추녀와 땅바닥이 마주 닿은 듯한 그나마도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 속에서 60도 넘어 보이는 노파가 나왔다. 쑥방석 같은 머리를 쓰다듬어 올리면서 맨발로 나오더니, "아, 어디서 사시는 양반인데... 이 섬 구석엘 이렇게 찾아 오셨시유?"하고, 바로 이웃집에서 살던 사람이나 만난 득 얼굴의 주름살을 펴면서 나를 반긴다. "여기서 혼자 사우?" 나는 그 노파가 말을 잊어버리지 않은 것을 이상히 여길 지경이었다. "아들허구 손주새끼허구 살어유." "아들을 어디 갔소?" "중선으로 준치 잡으로 갔슈." 노파는 흐릿한 눈으로 아득한 바다 저편을 건너다본다. 그 정기 없는 눈동자에는 무한한 고적에 속절없이 시들어 가는 인생의 낙조가 비치지 않는가? 백양목 윗가지에는 바람이 씽씽 분다. 이름도 모를 물새가 흰 날개를 펼치고 그 위를 난다. "쓸쓸해서 어떻게 사우?" 나는 저절로 한숨이 쉬어졌다. "여북해야 인간 구경두 못 허구 이런 데서 사나유. 농사처가 떨어져서 죽지 못해 이리루 왔지유." 나는 차마 더 묻기 어려워 머리를 숙이고 돌아서는데, 노파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침침한 부엌 속으로 들어간다. 수숫대로 엮은 울타리 밖에는 마늘과 파를 심었다. 북채만한 팟종에는 씨가 앉아 알록달록한 나비가 쌍쌍이 날아다닌다. 조금 있자, "이거나 하나 맛보시유."하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돌아다보니 노파는 손바닥만한 꽃게 하나를 들고 나왔다. 내 어찌 불쌍한 노파의 친절을 물리치랴. 나는 마당 구석에 가 쭈그리고 앉아서 짭짤한 삶은 게발을 맛있게 뜯었다. 그대로 돌아 설 수가 없어 백동전 한 푼을 꺼내어, 한사코 아니 받는 노파의 손에 쥐어 주고 나왔다. "아아, 인생의 쓸쓸한 자태여!" 나는 속으로 부르짖으며 그 집 모퉁이를 돌아 나오려는데, 등 뒤에서, "응아, 응아" 어린애 우는 소리가 들렸다. '어린애가 우는구나? 그 늙은이의 손주가 우나 보다.' 나는 발을 멈추었다. 불현듯 그 어린애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한번 안아 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 없어 발을 돌렸다. 토굴 속 같은 방 속에서 어머니의 젖가슴에 달라붙어 젖을 빠는 것은 이 집의 옥동자였다. 그 침침한 흙방 속이 이 어린애의 흰 살빛으로 환하게 밝은 듯, "나 좀 안아 봅시다." 나는 손을 내밀었다. 살이 삐죽삐죽 나오는 배옷 한 벌로 앞을 가린 젊은 어머니는 부끄러워 머리를 들지 못한다. 노파는, "이 더러운 걸..."하며, 손주를 젖에서 떼어나간 내 팔에 안겨 준다. 어린것은 젖살이 포동포동하게 오른 사지를 바둥거리며 내 얼굴을 말끄러미 쳐다본다. 울지도 않고 낯도 가리지 않고 반가운 인사나 하는 듯 무어라고 옹알거린다. 고사리 같은 손가락을 제 힘껏 감아쥐고는 놓지를 않는다. 까만 눈동자의 별같이 영롱함이여! 조그만 코와 입 모습의 예쁨이여! 나는 가슴에 옮겨드는 어린 생명의 따스한 체온에서 떨어지기 어려웠다. 이 고도의 어린 주인을 떼치고 차마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바다 위에는 저녁 바람이 일어 성낸 물결은 바윗돌에 철썩철썩 부딪친다. 내 얼굴에는 찬 빗발이 뿌리고 백양목은 한층 처창한 소리를 내며 회색빛 하늘을 비질한다. 내가 그 집에서 나오자 어린애는 다시 울었다. 걸어오면서도, 배를 타면서도, 등 뒤에서 '응아, 응아' 하는 소리가 바람결을 따라 들렸다. 머리 위에서 날으는 물새의 소리조차 그 어린애의 애처로운 울음 소리인 듯. '그 어린애가 잘 자라는가?' '그들은 그저 그 섬 속에서 사는가?' 그 뒤로 나는 바람 부는 아침, 눈 오는 밤에 몇 번이나 베갯머리에서 이름도 모르는 그 어린 아이가 병없이 자라기를 빌어 주었다. 그 애처로운 울음 소리가 언제까지나 내 귓바퀴를 돌며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 뒤로 1년이란 세월이 꿈결같이 흘렀다. 며칠 전에 나는 마을 젊은 친구들과 함께 숭어 잡는 구경을 하려고 나갔다가 '가치내' 섬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그 노파와 젊은 며느리는 전보다도 갑절이나 반가이 나를 맞아 주었다. 그들은 1년에 한두 번 사람 구경을 하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인듯... 그러나 어린애는 눈에 띄지 않는다. "어린애 잘 자라우?"하고 묻는데, 때묻은 적삼 하나만 걸친 발가숭이가 토방으로 엉금엉금 기어나오지 않는가? 작년에 내가 대접을 받은 꽃게 발을 뜯어먹으며, 두 눈을 깜박깜박 하고 우리 일행을 쳐다본다. "오오, 네가 벌써 이렇게 컸구나." 나는 그 어린애를 끌어안고 해변을 거닐었다. 어린애는 1년 동안에 몰라보도록 컸다. 오래 안아 주기가 힘이 들 만치나 무거웠다. 그 날은 바다 위에 일점풍도 없었다. 성자의 임종과 같이 수평선 너머로 고요히 넘어가는 태양을 바라보며, 나는 석조에 타는 붉은 물결을 멀리 보며 느꼈다. 이 외로운 섬 속, 쓰러져 가는 오막살이 교목과 상록수와 같이 장성하는 것을 생각할 때, 한없이 쓸쓸한 우리의 등 뒤가 든든해지는 것같이 느껴지지 않는가!
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1. 소원성취는 마음먹기 나름 그녀의 항아리가 안겨준 교훈 - 데브 맥크러리 샤논 래스트와 그녀의 남편은 새집의 진입로 양쪽 끝에 점토 꽃 항아리를 놓고 싶었다. 하지만 마땅한 것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샤논은 교외의 폐업한 산 안토니오 모텔 밖에 놓여진 네 개의 점토 항아리를 발견했다. 그녀는 최저 가격으로 그것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모텔 주차장 간판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다. 그리고 가구가 들어찬 300여개의 방이 달린 모텔에 곧 헐릴 것이고, 집기는 단 한가지도 팔지 않겠노라는 말을 들었다. 그녀는 점토 항아리를 손에 넣을 방법을 찾고야 말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사방팔방으로 전화를 한 결과, 모텔을 매물로 내놓은 캘리포니아의 한 회사와 연락이 닿았다. 그리고 회사의 허락 하에 모텔 집기를 무료로 치워주는 책임을 맡았다. 샤논은 가출하고 학대받은 어린이를 위한 '청소년 대책회'에 전화를 걸었다. 그곳에서 비용 마련을 위해 운영하는 알뜰 가게는 독지가의 기탁을 목마르게 원했다. 그녀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구세군과 정박아 시민 협회를 비롯한 수 십개의 다른 기관에 전화했다. 열흘 내에 트럭이 모텔에 들이닥쳐 가구를 전부 싣고 갔다. 그 결과, 청년 대책회의 알뜰 가게에 상품이 가득 찼고 다른 협회의 사정도 엇비슷해졌다. 샤논 래스트의 원래 의도는 개인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힘을 합해서 일할 생각을 갖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자부심을 심어 놓았다. 그리고 오늘 래스트 부부의 저택 진입로 양쪽에는 각각 두 개의 점토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단도적입적인 접근이 일궈낸 사랑 사랑을 구함은 곧 생명을 구하는 것이다. - 레오 버스카글리아 죤 그레이 박사 나는 보니가 처음으로 안아 달라고 청했던 때를 기억한다. 그 요청은 우리의 관계를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그녀는 내가 안아 주지 않는 것을 유감스러워하는 대신 그냥 요청했다. 그것은 나에게 대단한 사랑의 선물이었다. 그녀는 나를 가장 사랑하는 길이, 내가 그녀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관계를 발전시키는 가장 중요한 기술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지금도 그녀가 안아 달라고 청했던 첫 순간을 기억한다. 당시 나는 내 방에 서 있었고, 그녀는 피곤해 죽겠다는 말을 했다. "아아, 정말 힘든 하루였어." 그리고 그녀는 한숨을 푹 내뱉었다. 그 몸짓은 안아 달라는 그녀의 언어였다. 하지만 내 눈과 귀에는 피곤한 안색과 긴 한숨뿐이었다. 나는 그녀가 혼자 있고 싶어하리라는 엉뚱한 상상을 했다. 그녀는 나름대로 원하는 바를 명백하게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요구를 알아차리고 반응하지 못한 나의 부족에 불만을 품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우리 사이의 넓은 골을 훌쩍 넘어 원하는 것을 직설적으로 요청했다. "죠, 나를 껴안아 줄래요?" 내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나는 말했다. "그럼." 나는 곧장 그녀에게 다가가서 곧장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녀는 내 품에서 다시 한숨을 내뱉고 안아 줘서 고맙다고 했다. 나는 대답했다. "언제든지 말만 해." 그러자 그녀가 키득키득 웃어댔다. 나는 반문했다. "왜 그러지?" "당신은 안아 달라는 요청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는군요."
Board 추천글 2022.08.21 風文 R 1484
토사구팽(兎死狗烹) -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삶아 먹힌다는 뜻. 곧 쓸모가 있을 때는 긴요하게 쓰이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헌신짝처럼 버려진다는 말. 《出典》'史記' 淮陰侯列傳 十八史略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를 멸하고 한(漢)나라의 고조(高祖)가 된 유방(劉邦)은 소하(蕭何) 장량(張良)과 더불어 한나라의 창업 삼걸(創業三傑) 중 한 사람인 한신(韓信)을 초왕(楚王)에 책봉했다.(BC 200) 그런데 이듬해, 항우의 맹장(猛將)이었던 종리매(鍾離昧)가 한신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 고조(高祖)는 지난날 종리매에게 고전했던 악몽이 되살아나 크게 노했다. 그래서 한신에게 당장 압송하라고 명했으나 종리매와 오랜 친구인 한신은 고조의 명을 어기고 오히려 그를 숨겨 주었다. 그러자 고조(高祖)에게 '한신은 반심(反心)을 품고 있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진노한 고조는 참모 진평(陳平)의 헌책(獻策)에 따라 제후들에게 이렇게 명했다. "모든 제후(諸侯)들은 초(楚) 땅의 진(陳:河南省 內)에서 대기하다가 운몽호(雲夢湖)로 유행(遊幸)하는 짐을 따르도록 하라." 한신이 나오면 진(陳)에서 포박하고, 만약 나오지 않으면 진(陳)에 집결한 다른 제후들의 군사로 한신을 주살(誅殺)할 계획이었다.고조의 명을 받자 한신은 예삿일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래서 '아예 반기(反旗)를 들까'하고 생각도 해 보았지만 '죄가 없는 이상 별일 없을 것'으로 믿고서 순순히 고조를 배알하기로 했다. 그러나 불안이 싹 가신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한신은 자결한 종리매의 목을 가지고 고조를 배알(拜謁)했다. 그러나 역적으로 포박 당하자 한신는 분개하여 이렇게 말했다. 교활한 토끼를 사냥하고 나면 좋은 사냥개는 삶아 먹히고 하늘 높이 나는 새를 다 잡으면 좋은 활은 곳간에 처박히며, 적국을 쳐부수고 나면 지혜 있는 신하는 버림을 받는다고 하더니 한(漢)나라를 세우기 위해 분골쇄신(粉骨碎身)한 내가, 이번에는 고조의 손에 죽게 되는구나. 果若人言 狡兎死 良狗烹 高鳥盡 良弓藏 敵國破 謀臣亡 天下已定 我固當烹 【원 말】교토사 양구팽(狡兎死 良狗烹) 【도의어】야수진 엽구팽(野獸盡 獵狗烹)
Board 고사성어 2022.08.21 風文 R 892
그래서 어쩌라고 타협이 아닌 파국의 선택. 한 줌의 여지나 온기도 담지 않고 날리는 회심의 카운터펀치. 싸늘하다. 기병대처럼 옥죄어오는 상대의 논리를 이 말 한 방이면 단숨에 날려버릴 수 있다. ‘그래서’라는 접속사로 받아주는 척하다가 ‘어쩌라고?’라는 물음으로 대화는 끝. 상대방에게도 뾰족수가 없고 그저 자기 생각을 강요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 알려주는 신호. 논리를 비논리로 종료시키는 게 가장 큰 특징이다. ‘논리’는 인과관계의 문제다. 벌어진 사건의 원인을 어딘가에서 찾아 이어붙일 때 ‘논리’가 생긴다. 사람들이 찾는 원인은 자연법칙이 아니라 사회적 상식이나 억견, 편향, 수지타산을 반영한다.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말이 갖는 힘은 이런 인과관계를 비슷비슷한 다른 인과관계로 대체하지 않고, 인과관계 자체를 싹둑 잘라 땅바닥에 패대기쳐 버리는 급진성에서 나온다. 역사와 경험의 축적물이든, 고결한 사유에서 나온 것이든 ‘당신 논리는 똥’이라고 야유한다. 당신의 때 묻은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 방식을 바꿀 생각이 없으니 꺼지라. 처세술이나 정신 승리법이 아니다. 만인에 의한 만인의 미디어가 난무하고 진실보다는 진영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이 찢어진 세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한 방편이다. 어른이 없고 세대는 단절되고 소문은 난무하되 공통의 감각과 인식은 옅어진 시대에 자신을 지키고 옹호하는 말. 부모든, 친구든, 역사든 무엇이든 의심하겠다는 주체 선언. 물론 이 말을 밥 먹듯이 하다간 전후좌우 가로세로를 분간 못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예리한 칼일수록 나를 벨 수도 있는 법. ‘사흘’ 사태 사과가 두 쪽 나듯 세상은 ‘사흘’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로 나뉘었다. 몰랐던 자들은 ‘그것도 모르냐’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8월15일부터 17일까지 이어지는 휴일을 ‘사흘 연휴’라는 제목으로 뽑자 일군의 무리가 ‘3일 연휴인데 왜 사흘인가?’라는 허를 찌르는 질문을 했다. 흔한 ‘3일’ 대신 ‘사흘’이라는 말을 곳간에서 꺼내 쓰니 어휘력이 모자라는 사람들은 ‘4일 쉰다’는 기대와 착각을 했다. 잘못 알고 나흘을 쉬었다면 몇 명은 직장을 잃거나 ‘창피하다’란 외마디와 함께 애인에게 버림받는 시련을 겪었을지 모른다. 구글 번역기도 ‘사흘’을 ‘four days’로 번역해 혼란을 가중시켰고, 몇 년 전에 ‘사흘’을 ‘4흘’로 쓰거나 ‘나흘’의 뜻으로 ‘4흘’이라고 쓴 기자의 이름이 알려졌다. 말은 어머니로부터 평등하게 배우지만 어휘력은 사람마다 다르다. 독서량의 영향을 받고 얼마나 반복하느냐에 달려 있다. 최근 3년 안에 ‘이레 만에’나 ‘여드레 동안’이란 말을 쓴 적이 있는가? 하물며 ‘아흐레’를? ‘섣달’이 몇 월이더라? 삼짇날은? 망각은 낱말의 세계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말은 거저 배우는 것이지만 기억하고 자주 써야 자란다. 게다가 말소리와 뜻은 틈만 나면 딴 데로 튈 생각만 한다. 소리만 비슷하면 무작정 엉겨 붙는다. ‘엉뚱한’이란 뜻의 ‘애먼’이 비슷한 소리인 ‘엄한’에 속아 ‘엄한 사람 잡지 마’라고 잘못 쓰는 것도 같은 이치다. ‘디지털 포렌식’이란 말을 들을 때마다 내 머릿속엔 ‘방식’의 ‘식(式)’이 떠오른다. 소리는 의리가 없다. 바람둥이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흰구름 단상 6 미국 오하이오에서 마종기 시인이 보내 준 두권의 시집. <그 나라 하늘빛>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를 여러 번 읽었다. `바람의 말` `나비의 꿈` `비오는 날` `우화의 강`은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시들이다. 평범한 일상의 삶. 남들이 그냥 지나치기 쉬운 것들에서 그토록 깊고, 절제되고, 따뜻한 시를 끌어낼 수 있는 시인의 눈과 마음을 한껏 부러워했다. 장미꽃 우표가 붙은 그의 편지도 시만큼이나 아름답고 따뜻하다. 어느 성당 기공식에서 기념 삽질을 하며 흙을 붓다가 하늘이 너무 아름다워 왈칵 눈물이 나더라는 이야기도 했다. 아동문학가로 널리 알려진 그의 아버지 마해송 씨의 동화 `모래알고금` `앙그리께`를 밤새워 읽던 어린 시절의 추억도 새롭다. 7 `세상 어디엔가 우리가 아직 가보지 못한 골목길과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던 꽃밭이 숨어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희망적인 일이겠니 세상 어디엔가 우리가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가슴 두근거려지는 일이겠니!` 나태주 시인의 <사랑이여 조그만 사랑이여> 라는 시집 속의 모든 말들은 모두 깨끗하고 아름답다. 비오는 날, 숲의 향기를 맡으며, 새소리를 들으며 이 시집을 읽으면 사슴 닮은 눈을 지닌 옛 친구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나도 늘 좋은 시를 쓰고 싶다. 어쩌다 시상이라도 떠오르면 그 생각을 놓치지 않으려고 메모지에 적어서 베개 밑에 깔고 자곤 한다. 자다가도 생각이 나면 적어 놓으려고, 그리고 새로 솟은 생각을 더 깊이 익혀 두고 싶어서..., 남들은 단 몇 분 만에 읽어 버리고마는 짧은 시라도 쓰는 이에게 그것은 하나의 커다른 기다림이고 인내의 열매이다. 8 `우리들보다 더 힘들게 살면서도 언제나 우리들보다 더 먼저 용서하는 새들` `가벼운 것일지라도 새들은 가끔씩 깃털을 버리는가 보다 버릴 것은 버리면서 가볍게 하늘을 나는가 보다` 권영상님의 새들에 대한 시 몇 구절을 새소리 들으면서 읊어 보았다. 최근에 작가로부터 받은 동시집 <아흔아홉 개의 꿈>의 갈피마다 살아 숨쉬는 아름다운 시어들. 그의 동시들은 내가 가장 많이 편지나 카드에 인용하는 시이기도 하다. 오늘은 고운 꽃다발을 선물로 받아 마침 먼 나라에서 수녀원을 방문한 손님에게 드렸더니 매우 기뻐하였지. 결국 선물은 돌고 도는 것, 그래서 더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자기만을 위해서 꽉 붙들고 있는 것보다는 좀 아까운 생각이 들더라도 더 필요한 이에게 선뜻 내어 놓을 수 있는 선선함이야말로 인색한 것보다 훨씬 바람직하다.
Board 삶 속 글 2022.08.20 風文 R 454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설의식편" 설의식(1900~1954) 평론가, 언론인. 호는 소오. 함남 출생. 일본 니혼 대학 사학과 졸업. 동아 일보 편집 국장, 부사장, 새한 민보 사장 역임. '일장기 말소 사건' 당시의 동아 일보 편집 국장이었던 설의식은 민족주의자였으며 그의 날카로운 비평문 속에는 민족주의적인 사관과 지사풍의 자세가 담겨 있다. 그의 필치에는 독자들의 마음을 격동시키며 청신하게 각성시켜 주는 매력이 있다. 사물을 관조하되 근원으로부터 꿰뚫는 눈이 있었으며 거기에 유머와 위트까지 곁들여 그를 뛰어난 에세이스트로 빛나게 하였다. 수필집으로 "해방 이전", "화동 시대" 등이 있으며 '유관순 추념문'이 유명하다. 수천석두 중학 시대의 도화, 습자는 으레 을이었다. 그만큼 나는 그림과 글씨에 재주가 없었다. 재주는 없었으나, 취미는 또 무던하여서 서, 화를 즐겼다. 기능의 부족을 감상으로써 보충하려는 심산인지도 모른다. 하여간 이와 같은 심경으로 그림을 모았다. 원래 힘 부족이라 고급품은 생염도 못 하였고 그저 너저분한 고물상을 뒤졌을 뿐이다. 그나마도 만만한 것은 또 구복을 위해서 팔기도 하였다. 두제의 문구가 남아 있는 현판 중의 하나이니 추사의 글씨다. 이것만은 팔 수가 없어서 서재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글씨 때문만이 아니라, 그 내력에 있어서 심금에 울리는 귀중한 마디가 있는 까닭이다. 한문이나마 이 글을 쓰는 핑계도 여기에 있다. 수천석두--물이 돌머리를 뚫는다. 이 문구의 출현은 함경도가 본향이 아닐까 싶다. 내 조상과도 관련이 있는 듯싶어서 유다른 감흥을 느끼는 것이다. 이유는? 그 유래를 풀기 위하여 이야기는 옛날로 올라간다. '문불과장의요, 무불과첨사'--서북인에 대한 이 같은 악정을 뒤집기 위해서 일어선 홍경래란은 누구나 다 아는 이조사상 뚜렷한 자취다. 옛날에는 역적으로 몰았거니와, 오늘에 있어서는 시대적 감각에 피가 통하는 혁명의 선구적 의의를 가지는 것이닌 번거롭게 따질 필요도 없겠다. 이 혁명의 풍운아가 동지를 얻으려고 서북을 유력하여 관북에 이르렀다. 함북과 함남 경계선에는 마천령이란 산이 있었다. 그 산상에 지었다고 전하는 시에 '마천령상파운좌, 만학천봉차제조' 마천령 꼭대기에 구름을 헤치고 앉았으니 만학천봉이 차례로 조회한다. 시구에 나타난 그의 심혼에는 이미 제왕적 기백이 보였던 것이다. 그는 무용뿐이 아니라 시문에도 이같이 능숙하여 곳곳에 심회를 남겼던 것이다. 함남의 수부, 함흥에는 반룡산 기슭으로 흐르는 성천강이 있으니 '함흥차사'로 이름 있는 함남의 큰 강이다. 이 반룡산 꼭대기에 앉아서 지은 시-- '산욕도강강두립, 수난천석석두회' 산은 강을 뛰려고 강머리에 섰는데, 물은 돌을 뚫기 어려워 돌머리를 돌더라. 제1구는 붕정을 달리는 의취가 있으나 제2구 '난'가에 이르러 이미 지기가 부족하였다. 이는 실패가 암시된 일종의 언참이기도 하였다. '수난...' 대신에 '수장천석-물이 장차 돌을 뚫으려고...' 이렇게 되었다면-그 같은 시가 튀어나올 수 있도록 그의 저력이 절대하였다면 성공하였을 것이라고 후세의 평은 애달파하는 것이다. 이 사실의 확, 불확은 모르겠다. 그러나 함남 주읍에는 널리 퍼진 전설이니, 관북 지방에서 유배 생활을 겪은 추사는 이 글을 따서 이 글씨를 썼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굴러서 오늘에 내 서재를 단속하고, 그리고 나로하여금 이 글을 쓰게 한 것이다. '수천석두'-물이 돌을 뚫는다. 아마 이것은 '불능'에 속할 것이다. 맹자는 '협태산이초북해'를 불능의 일례로 들었다. 난중의 난사를 가리켜 '하늘의 별따기'라고 우리의 속언은 전하여 온다. '수천석두'도 그만 못지않게 지난사요 불능사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와 같은 '말'은 있을 수 있다. 그 같은 '의욕'과, 그 같은 '신념'과, 그 같은 '용기'는 있을 수 있고 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기함동서구, 각축오대주'-이 같은 일이 있을 수 없으나, 이와 같은 노래가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1차 혁명은 '동자군'의 피로써 계승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의욕이 있어도 되기가 어려운 것이 세상사거든, 하물며 당초부터 의욕도 없음이랴? 가능, 불가능의 수판만 따져 가지고야 어디서 용기가 생길 것이냐? 가능하면 하고 가능치 못하면 그만둔다--이와 같은 심법으로야 무엇이 얻어질 것이냐? 얻어진들 몇 푼짜리가 될 것이냐? '수천석두!' '수난천석두회'가 아니라 '수장천석두회' 그렇다! 의욕과, 신념과, 용기를 가지자. 희망으로 맞아야 할 신춘에 이와 같은 희망을 가지자. '수천석두'의 희망을 가지자. 얼마나 어려운 일인고! 그러나 또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일 것인고! '수천석두!' 아침 저녁으로 이것을 바라보는 나는 저절로 젊어지는 것이다. 늙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1. 소원성취는 마음먹기 나름 단 한마디 말이 가져온 성공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이들은 모두 원대한 목표를 지녔다. 그들은 너무 높아서 때때로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에 초점을 맞춘다. - 오리슨 스위트 마든 존 앳사라프 인디아나 리맥스 사장 내가 얼굴에 철판을 깔고 지금의 동업자들에게 나를 동업자로 만들어 달라고 했던 말이 내 일생 일대 최고의 요청이다. 그들이 말했다. "그게 정확하게 무슨 뜻이오?" 나는 말했다. "나는 기꺼이 일하고, 창조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사업 확장을 원하고, 나는 그 책임을 맡을 수 있습니다." 그 요청은 동업 관계와 인디아나 리맥스를 변화시켰다. 우리는 1988년에 약 천 5백만 달러 어치의 공사 수주 한 건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1994년에는 일억 5천만 달러에 해당하는 16,500개의 주택을 팔았다. 95년의 목표액은 2억 달러이다. 그 한가지 요청은 나를 백만장자로 만들어 줬다. 한 통의 전화가 가져다 준 행복 - 킴벨리 웨일 1995년 5월 31일 나는 일리노이 주의 한 여성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1년 전 그녀는 내가 근무하는 잭 캔필드의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서 로저 크로포드의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고 요청했다. 로저 크로포드는 손가락이 단 세 개밖에 없는 몸으로, 뛰어난 동기 부여 강사이자 저자가 된 인물이었다. 나는 그녀의 편지에 감동받은 나머지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여기 그 편지의 일부를 공개한다. 킴에게 ...(생략) 나는 작년에 당신의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로저 크로포드의 연락처를 물어봤던 사람입니다. 당신은 매우 친절하게 그의 전화번호와 주소를 찾아 줬어요. 나는 그 이후 내 인생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려 드리고자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나는 '경력 쌓기 세미나'에 참석한 후에 '자기 존중법'이라는 테이프를 주문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전에는 한 번도 자기 발전 테이프를 들어본 적이 없었던 내가 그것을 주문하고 듣기 시작했던 것 자체가 놀라운 일입니다. 다음 날 나는 아동 복지국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우리의 입양 신청서를 갖고 있는데, 혹시 손가락이 없는 아이를 고려해 보겠느냐는 전화였습니다. 21개월 된 이고르는 태어날 때부터 양손에 손가락 하나씩과 양쪽 발에 발가락 두 개씩 달려 있었답니다. 그때부터 나는 아주 열심히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주님의 인도하심과, 내가 워낙 우둔하므로 주님이 내 귀에 대고 크게 소리쳐 달라고 청했습니다. ...(생략) 나는 테이프를 듣던 중에 로저 크로포드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생략) 그는 비정상인 손으로 생활하는 삶에 조언해 줄 수 있는 적격자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 순간, 나는 주님이 내 귀에 대고 크게 소리치셨음을 깨달았습니다. 만물은 우주의 창조주께서는 그 당시 나에게 그 테이프를 듣게 하심으로써 블라그래드의 고아원에 있는 한 소년이 미국의 우리 가족의 구성원이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생략)그 다음에 로저 크로포드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전화는 불통이었고, 나는 그 도시의 전화국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전화국은 친절하게도 번호부를 다 뒤진 끝에야 로저 크로포드의 번호를 찾아 줬습니다. 나는 그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한 여성이 전화를 받자, 그곳이 로저 크로포드 댁이냐고 물었어요. 그녀는 그곳이 그의 부모 댁이라고 답변하더군요. 그녀는 바로 로저 크로포드의 어머니였어요! 우리는 오랫동안 통화했고, 그녀는 나의 용기를 북돋아 줬습니다. 아무래도 주님이 그 대화를 베푸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여러 주일에 걸쳐 기다린 끝에 아이의 의료 진단서와 사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작은 소년이 우리 가정에 딱 맞는 아이라고 결정했습니다. (그 즈음, 아이오와 데스모와인에 사는 5살 짜리 소녀가 그림 그리기 대회에서 우승하는 사건이 벌어졌답니다. 그 일화가 지방 신문에 실린 이유는 호프 양이 양손에 손가락이 하나씩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침 우리 어머니는 데스모와인에 사셨고, 그 기사를 오려 나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나는 호프 양의 어머니에게도 연락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시점에서 호프 양이 그리기 대회에서 일등의 영예를 차지한 일이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 보이지 않아요.) 5월 14일 우리는 모스크바행 비행기에 올랐고, 5월 27일 이고르는 앤드류가 되었습니다. 이제 앤디가 우리 가족이 된 지 거의 일년이 되었습니다. 앤디는 행복하고, 우리 가족을 위한 완벽한 아기입니다. 나는 그 아이를 자식으로 맞은 지 2,3주일이 지나자 앤디가 장애아라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그가 할 수 없는 일이 없었으니까요. 앤디는 5살 짜리 누이와 잘 지내고, 제 누이는 그를 무척 사랑한답니다. 킴, 우리가 한 가족이 된 계기를 마련해 줬던 당신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당신은 낯모르는 타인에게 진정한 친절을 베풀어줬어요. 신이 당신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홀리 케이 보냄.
Board 추천글 2022.08.20 風文 R 1488
태산북두(泰山北斗) ① 태산과 북두성. ② 세상 사람으로부터 가장 존경을 받는 사람.《出典》'唐書' 韓愈傳贊 唐나라 때 4대 시인(四大詩人)의 한 사람으로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굴지의 명문장가로 꼽혔던 한유(韓愈 : 字는 退之)는 768년 지금의 하남성(河南省)에서 태어났다. 그는 9대 황제인 덕종(德宗 : 779-805) 때 25세의 나이로 진사(進士) 시험에 급제한 뒤 이부상서(吏部尙書)까지 되었으나 황제가 관여하는 불사(佛事)를 극간(極諫)하다가 조주자 사(潮州刺史)로 좌천되었다. 천성이 강직했던 한유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좌천, 파직(罷職) 당했다가 다시 등용되곤 했는데 만년에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역임한 뒤 57세를 일기로 상을 떠났다. 이처럼 순탄치 못했던 그의 벼슬살이와는 달리 한유는 '한유(韓柳)'로 불렸을 정도로 절친한 벗인 유종원(柳宗元 : 字는 子厚)과 함께 고문부흥(古文復興) 운동을 제창하는 등 학문에 힘썼다. 그 결과 후학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에 대해《唐書》'韓愈傳'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당나라가 흥성한 이래 한유는 육경(六經)을 가지고 여러 학저들의 스승이 되었다. 한유가 죽은 뒤 그의 학문은 더욱 흥성했으며, 그래서 학자들은 한유를 '泰山北斗'를 우러러보듯 존경했다. 自愈沒 其言大行 學者仰之 如泰山北斗云. 【준 말】태두(泰斗), 산두(山斗) 【동의어】여태산북두(如泰山北斗)
Board 고사성어 2022.08.20 風文 R 10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