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집과 여자 습관은 무섭다. 한자 ‘女’를 ‘계집 녀’라고 배워서 아직도 이 글자를 보면 ‘계집’이란 말이 튀어나온다. 초등학생용 한자책을 보니 이제는 ‘여자 녀’로 바뀌었다(‘어미 모’, ‘아비 부’도 ‘어머니 모’, ‘아버지 부’로 바뀌었고, ‘지아비 부’도 ‘남편 부’라 한다). ‘계집’을 ‘여자’로 바꾼다고 성차별이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시대 변화를 반영하고 차별 극복 의지 정도는 보여준다. 배제가 아닌 평등의 뜻풀이가 필요한 이유이다. 말 나온 김에 <표준국어대사전> 뜻풀이에 ‘계집’이란 말이 들어간 단어를 찾아보았다. 사전 만들 당시 성차별에 대한 감각이 부족했음을 알 수 있다. ‘노비: 사내종과 계집종’, ‘더벅머리: 웃음과 몸을 팔던 계집’, ‘뜬색시: 바람난 계집’, ‘민며느리: 며느리로 삼으려고 관례를 하기 전에 데려다 기르는 계집아이’, ‘본서방: 샛서방이 있는 계집의 본디 남편’, ‘여우: 하는 짓이 깜찍하고 영악한 계집아이’, ‘요부: 요사스러운 계집’. 세상은 바뀌는 데 사전은 제자리걸음이다. 모두 ‘여자’로 바꾸면 훨씬 현대적(!)이다. ‘사내’도 마찬가지라고 하겠지만, 엄연히 둘은 위계가 다르다. ‘사내’는 “‘남자’나 ‘남편’을 이르는 말”이지만, ‘계집’은 “‘여자’나 ‘아내’를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낮잡아 본다’는 것은 시선의 높낮이가 있다는 뜻일 텐데, 그 차이를 줄이는 게 말의 진보다(‘사내’도 ‘남자’로 바꾸는 게 낫다). 끝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살지만 시간을 감각할 수는 없다. 감각할 수 없으면서도 알고 싶으니 눈에 보이는 걸 빌려다가 쓴다. 시간을 움직이는 사물로 비유하는 게 제일 흔한 방법이다. 하루가 ‘가고’, 내일이 ‘다가오고’, 봄날은 ‘지나가고’, 시간은 ‘흐르고’, 휴가를 ‘보낸다’는 식이다. 공간을 뜻하던 말을 시간에 끌어와 쓰기도 한다. 그중 하나가 ‘끝’이다. 애초에 ‘끝’은 ‘칼끝’, ‘손끝’처럼 물건의 맨 마지막 부분을 나타낸다. 영화를 끝까지 보거나 책을 끝까지 읽는다고 할 때도 영화나 책의 맨 나중 위치를 말한다. 조용필이 항상 맨 마지막에 나오는 것은 ‘끝’을 어떤 일의 클라이맥스로 여기는 우리의 성향을 반영한다. ‘오랜 수련 끝에 달인의 경지에 오르다’나 ‘고생 끝에 낙이 온다’처럼 ‘끝’이 앞일과 뒷일을 잇는 ‘문지방’ 구실을 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최초(원조)만큼이나 ‘최종’에 대해서 궁금해한다. 시간에 처음과 끝이 있을 리 없지만, 사건에는 처음과 끝이 있다. 입학식과 졸업식을 거창하게 치르듯이 과정보다는 처음과 끝을 중심으로 기억한다. 개인이 사건과 역사라는 말 위에 올라타면 마른 나뭇가지처럼 삶은 ‘시작’과 ‘끝’의 연속으로 또각또각 끊어진다. 생로병사의 외줄을 타는 인간은 특히 ‘끝’에 주목한다. 죽음의 방식을 삶의 성패로 여긴다. 종료의 의미로 ‘끝이 나다’라고 하는데, 싹이 나고 털이 나듯이 끝도 ‘난다(!)’. ‘끝’을 ‘없던 것의 생성’으로 보는 것이다. 보통은 생의 끝이 불현듯 다가오는데, 누구는 의지적으로 끝을 냈다. 삶, 정말 모를 일이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흰구름 단상 3 미국 제네시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유진 수사님이 어디서 구했는지 내가 좋아하는 시인 조이스 킬머(Joyce Kilmer)의 사망 이후 그를 추모하는 글이 실린 1918년 8월 19일자 <뉴욕 타임스>의 추모 기사 원본을 오려서 보내 주어 얼마나 기뻤는지! 거의 80년 된 기사이니 빛깔이 바래고 찢어져서 너덜너덜해졌지만 원본만이 줄 수 있는 독특한 느낌... 여러 시인들이 추모 시구를 모아 놓은 내용도 마음에 들어 몇 개 복사해서 피천득 선생님과 대학에서 영문학을 강의하는 벗들에게도 나누어 주어야겠다. `시는 나와 같은 바보가 짓지만 나무를 만드는 건 하느님뿐` 이라고 노래한 J. 킬머의 `나무들`이란 시가 어느 때보다도 생각나는 날이다. 사소한 일로 마음이 부대끼고 갈등 속에 있다가도 창 밖의 나무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진다.`뭐 그걸 가지고 그래?`하며 빙그레 웃는 것도 같고... 나무의 모습을 닮은 성자들의 모습도 떠오르고. 4 간밤엔 웬 꿈을 그리도 많이 꾸었을까? 평소 생활을 반영해 주기도 하는 꿈의 세계. 그냥 무시해 버리기엔 너무 많은 의미가 있음을 나도 자주 체험하는 편이다. 피정중에도 지도자들이 가끔 꿈을 주제로 묵상시키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깨고 나면 잊어버리는 꿈이 더 많지만 수도원에 오래 살면서 나의 꿈의 세계도 이젠 좀 정화되고 아름답게 성숙되고 있음을 문득 느끼며 스스로 고마워할 때가 있다. 5 "수녀, 잘 있었나? 실은 간밤 내 꿈에 수녀 얼굴이 보여서 말이야. 혹시 무슨 근심거리가 있는가 하고 전화 걸었지." 아침에 걸려 온 구상 선생님의 전화. 몇 년 전. 내가 매스컴에 시달리며 괴로워할 때도 옆에 함께 안타까워하시며 힘과 위로가 되어 주셨던 선생님은 내가 당신의 조카딸쯤 되는 것 같다고 웃으신다. "시인 노릇보다도 수녀 노릇을 더 잘해야 한다."고 당부하시던 선생님은 오늘도 사면이 시집으로 둘러 싸이고 새소리도 들리는 서재에서 시를 쓰고 계시겠지.
Board 삶 속 글 2022.08.19 風文 R 519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설의식편" 설의식(1900~1954) 평론가, 언론인. 호는 소오. 함남 출생. 일본 니혼 대학 사학과 졸업. 동아 일보 편집 국장, 부사장, 새한 민보 사장 역임. '일장기 말소 사건' 당시의 동아 일보 편집 국장이었던 설의식은 민족주의자였으며 그의 날카로운 비평문 속에는 민족주의적인 사관과 지사풍의 자세가 담겨 있다. 그의 필치에는 독자들의 마음을 격동시키며 청신하게 각성시켜 주는 매력이 있다. 사물을 관조하되 근원으로부터 꿰뚫는 눈이 있었으며 거기에 유머와 위트까지 곁들여 그를 뛰어난 에세이스트로 빛나게 하였다. 수필집으로 "해방 이전", "화동 시대" 등이 있으며 '유관순 추념문'이 유명하다. 돼지의 대덕 금년은 세차 간지로 정해니 풀어서 '돼지해'다. 부르기가 거북한 이름이다. 더럽고, 못나고, 먹기만 하고, 놀기만 하는 일체의 악명을 온통 돼지에게 돌리어 '돼지 같은 놈, 돼지 같은 놈' 하고 거세가 일치하야 나무라는 관계상, 어학만으로는 불쾌한 이름으로 정론이 되어 있다. 그렇게 불쾌하거든 애초에 쓰지 말 일이다 쓴다고 할진대, 자 갑자, 을축으로부터 임술, 계해에 이르는 육갑의 노선은 수미일관이니 하는 수 없다. 요즈음 세태처럼 방편대로 뜯어 고치는 '뒤범벅'일 수는 없다. 성립이 급하다고 기정된 수의 법문을 즉석에서 고치는 '입법의원'처럼, 그렇게 간단하게 '정인'의 호랑이로 고칠 수는 도저히 없는 노릇이다. 작년은 병술이니 '개'요, 재작년은 을유니 '닭'이다. 닭이라 하면 새벽을 연상하야 서광을 의미하고, 각성을 우의하야 태동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랬는지, 을유의 재작년에 해방의 서광을 보았고 대업의 태동을 보았다. 새 날이 밝는다고 닭은 울었지만 아직도 새벽이었던지라. 강산을 얼빤--한 어둠 속에서 갈피를 못 찾았고 민중은 늦잠이 풀리지 못한 채 허둥지둥하였다.'닭'으로 표현하기에 거의 알맞는 정도의 동태였음은 묘한 일이었다. '개'는 영역감에 민첩한 동물이요 영지욕에 탐람한 동물이다. 그러므로 자령을 편수하기에 사력을 다하여 덮어놓고 배타를 일삼아 짖기를 잘 한다. 침경은 고사하고 접경도 못 할 정도로 날뛰고 싸움을 잘 한다. 냄새도 잘 맡지만 꼬리도 잘 흔든다. 한 술 밥에도 꼬리를 흔들고 한 덩이 고기에도 아양을 부린다... 이렇게 쓰다가 보니 '개' 이야기가 아니라 작년 1년간 걸어온 우리 자신의 자화상 같아서 붓이 저절로 멈추어진다. 자괴와 자책을 느끼는 까닭이다. 을유가 그렇고, 병술이 그런지라, 정해의 금년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혹은 무엇을 계시하는가? 엉터리없는 '해'자에다 연을 달아서 돼지의 대덕을 일컬어 보자. 돼지라고 더러운 것을 자진하여 즐겨할 이치는 천만에 없겠다. 집이거나 자리거나 사람들이 더럽게 하여 주니까 그저 순수할 뿐이겠다. 매사에 까다롭지 않은 태음적 기질이 유달리 드셀 뿐이다. 미추와 편부에 대한 둔감이라 하기보다도 그를 초월한 태연자약이니 말하자면 포용 중에도 대포용이다. '하해는 불관오독지수'라 하야 하해가 가진 관용의 지덕을 일컫거니와 이 같은 논법으로는 돼지의 그 점이 실상 돼지의 미덕인 것이다. 그런고로, 나무라기보다도 차라리 이 잡을 나위도 없이 광막한 돼지의 대덕을 우리도 본떠서 금년 1년은 태음적으로 나갈 수 없을까? 숙시라 할 것 없이, 숙비라 할 것 없이, 대포용, 대둔감으로 거세정조를 한입에 집어 삼키고 상하좌우를 한 팔에 끼어 품는, 그러되 태연자약하는 그러한 지도자가 과연 없을 것인가? 해년을 위하여 우리는 이것을 대망한다. 먹기만 하고 놀기만 하는 돼지의 살림을 '악'으로 지목하야 모두들 나무라기만 한다. '제 똥 구린 줄 모른다'는 속담도 있지마는 책기엔 불충이요 책인엔 충인 식으로 책돈에는 어찌도 그리 충실한가? 먹기만 하고 놀기만 하여서 그야말로 돼지같이 살진 사람이 인세에는 과연 없는가? 돼지는 놀고 먹을지언정 그래도 최후는 '살신성인'의 대희생을 천성으로 각오한 짐승이다. 사람에게 이 각오가 있는가? 중생의 번영을 위하여 자신의 1명을 버리는 희생, 그를 감수하는 대덕을 가진 자 과연 몇이나 되는가? 글 아는 돼지가 있어서 만일 이 수록을 읽는다면 독파 지차에 빙그레 웃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방성하야 대곡할 것이다. 돼지를 못났다고 하는 것은 아마 그 체국을 가라킴이리라. 특히 없는 듯한 짧은 목과 명목만의 그 꼬리를 가리킴이리라. 미상불 '볼품'으로는 낙제다. 거듭 말하거니와 오직 '볼품이 없을 뿐'이다. 이 볼품 때문에 못났다고 하는 것은 볼품만으로 발라 맞추려는 덜 익은 사람들의 덜 익은 말이다. 볼품 있는 꼬리로서는 금류에 공작이 있고 수족에 여우가 있다. 필자는 공작의 꼬리를 미워한다. 그 오만불손한 꼬리! 유한 마담의 부화와 같은 그 잡색의 어지러운 꼬리, 시대가 시대인만큼 형식의 장식에 흐르는 값싼 무지개적 환몽의 상징 같은 그 꼬리를 필자는 즐기지 않는다. 더구나 간사하고 요망한 여우적 꼬리, 하늘거리고 날름거리고, 이리로 알랑, 저리로 달랑거리는 그 환술적 꼬리는 애초에 불취다. 돼지에게 있어서는 볼품 있는 꼬리가 본질적으로 필요치 않았다. 볼품보다는 '속품'으로 살아가는 돼지의 처세관으로도 그러하거니와, 청빈에 자안하고 누옥에 자적하는 그 심법상으로도 아도에 필요한 흔드는 꼬리의 소유가 필요치 않았다. 배추동물로서의 지체와 명분을 확보하기 위하여 꼬리의 명목만 세우면 그만이다. 이로써 못났다 할진대, 차라리 명분 있는 속품의 못난이가 될지언정 신기루 같은 볼품의 잘난 이는 안 되겠다! 하는 것이 돼지의 소신이요 또 본회인 것이다. 사람으로서 돼지의 이같은 심경에 공명하는 자 그 얼마나 될 것인고! 돼지는 목이 짧다. 사뭇 없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짧다. 없기론 생선이 1위여 포유족엔 아마 돼지가 상석일 것이다. 그러나 목이 짧으니까 반드시 못난 것이요, 길어서 잘났다는 논법은 어디에 있는가? 목이 길기론 기린이 수석이다. 그런 실상 길어서 결이다. 그 길다란 목을 늘이어 좌로 우로, 혹은 전후로 상하로,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는 그 줏대 없는 겁쟁이 태도는 보기에 어떠한가? 이리 살피고 저리 살피면서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는 그 보조는 풍신 좋은 체구와는 전연 딴판이다. 이로써 기린 자신에 욕은 될지언정 자랑될 이치, 천만에 없겠다. 돼지는 다행으로 짧아서 곧은 목이다. 고집은 셀지 모르나 좌고우시의 추태는 있을 수 없다. 목표를 향하여 일직선으로 직진할 뿐이다. 그러기에 '저돌지용'이라 하야 부탕도화의 용과 검산 도수를 초개같이 보는 유진무퇴의 용은 오직 돼지에게 있는 것이다. 정해의 금년은 돼지의 대덕을 본뜨자. 대포용, 대희생, 대용맹으로 신지를 향하여 일로로 직진하자!
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1. 소원성취는 마음먹기 나름 나는 좋아, 그런데 왜 청하지 않니? 데이비드 A. 맥클란 박사 <설교사의 입담>의 저자 열쇠 제조기 판매 사원이 한 철물점 주인에게 그 기계로 열쇠를 만드는 시범을 보여줬다. "정말 놀라운 기계가 아닙니까?" 판매 사원이 물었다. "그렇구려." "이 기계는 훌륭한 투자인 동시에 많은 시간을 단축해 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겠지요." "그런데, 왜 사지 않습니까? "그런 댁은 왜 나에게 사라고 청하지 않소?" 요청하지 않으면 손해 2년 전 시카고 대학은 마샬 필그 백화점 재단의 필드부인에게 백만 달러의 기부금을 받았다. 신문에서 그 기사를 읽은 노스웨스턴 대학의 행정부는 큰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필드부인은 일리노이의 에반스톤에 거주했고, 노스웨스턴 대학 역시 일리노이의 에반스톤에 위치했다. 그런 그녀가 왜 노스웨스턴 대학 대신 시카고 대학에 돈을 줬을까? 노스웨스턴 대학의 사무관이 필드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그 이유를 묻자, 그녀가 대답했다. "시카고 대학에서 기부를 청해 왔으니까요. 댁들은 요청하지 않았잖수?" 시도하지 않으면 영영 잃을 거예요 패티 오버리 우리 엄마는 19살 때 우리 아빠와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 두 분은 내내 같은 학교를 다닌 사이였다. 하지만 우리 아빠는 19살 때 우리 엄마에게 청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엄마는 다른 남자의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했다. 그리고 일년 후 그는 담낭 섬유증으로 죽었다. 우리 엄마는 갓 스물에 과부가 된 것이다. 우리 아빠는 그녀가 이제 자유로운 몸이라는 사실을 알고 데이트를 청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존심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우리 친할머니는 헛된 자존심이 아들의 인생을 망치고 있음을 알았다. 두 번째 기회가 왔는데도 여전히 요청을 못 하다니! 친할머니는 마침내 우리 외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어서 함께 계획을 짰다. 우리 엄마는 외할머니와 외출을 나갔고, 우리 아빠는 친할머니를 모시고 나갔다. 그리고 너무 우연찮게도 그들은 서로 마주쳤다. 그 몇 달 후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단 한번의 요청이 가져온 미래 데이브 오 내 평생 가장 중요했던 요청은 나에게 첫 번째 판매 일자리를 가져다 주었다. 나는 15살 되던 해 여름에 한 건축 회사의 창고에서 일했다. 트럭에서 무거운 짐을 부려서 창고 구석구석으로 운반하는 일이었다. 한참 후에야 나는 창고 외에 또 다른 건물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바로 사무실 건물이었다. 그리고 그 건물에 대한 아주 중요한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첫째는 그곳에 냉난방 시설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거기 사람들은 땀을 흘리거나 지저분하지 않았다. 둘째는 여자들이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곳이 일하기에 훨씬 좋은 곳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화장실을 사용하려고 그 건물에 들어갔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나오는 길에 총지배인과 판매부장의 대화를 엿들었다. 그 내용인즉, 회사에서 가장 유능한 전화 판매 권유 사원이 아프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부족한 일손을 메울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나는 복도에 멈춰 서서 벤 크래머에게 말했다. 오늘날 나는 그를 '벤 삼촌'이라고 애정을 담아 부르고 있다. "벤," 그가 나를 돌아보자, 내가 청했다. "나에게 그 일을 시켜주실래요?" 그는 '안돼'하고 딱 자르고, 다른 사내와 계속 이야기를 했다. 난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나를 다시 돌아보자, 내가 다시 청했다. "시켜주세요. 네?" 그 요청은 나에게 첫번째 판매 일자리를 가져다 줬다. 그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본 다음에 손가락으로 퉁기며 말했다. "얘야, 이리 따라 오너라." 그리고 그는 나를 방으로 데려갔고, 잠재 고객을 알아보는 방법을 가르쳐 줬다. 내가 그날 그 시간에 그 청을 하지 않았더라면 내 인생이 지금쯤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
Board 추천글 2022.08.19 風文 R 1460
촌철살인(寸鐵殺人) - 간단한 경구(警句)로 어떤 일의 급소를 찔러 사람을 감동시킴의 비유. 《出典》'學林玉露' '학림옥로(學林玉露)'라는 책은 남송(南宋) 때의 나대경(羅大徑)이, 찾아오는 손님들과 주고받은 청담(淸談)을 시동(侍童)에게 기록하게 한 것으로 '天地人'의 세 부분 18권으로 구성된 책이다.그 중 '지부(地部)' 제7권 <살인수단(殺人手段)>에는 종고선사가 다음과 같이 선(禪)을 논하여 말했다. 비유하면 한 수레의 병기를 싣고서 하나를 희롱하여 마치면 또 다른 하나를 꺼 내 가지고 와서 희롱함과 같지만, 이것이 곧 사람을 죽이는 수단은 아니다. 나는 곧 단지 촌철(寸鐵)이 있으므로, 문득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이것은 그가 선(禪)의 요체(要諦)를 갈파한 말이므로, 살인이라고 하지만 물론 칼날로 상처를 입히는 것을 뜻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 속의 속된 생각을 없애는 것'을 뜻한다. 아직 크게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그 속된 생각을 끊어버리기 위하여 성급하게 이것 저것 대답을 해 오겠지만, 정신의 집중이 부족하기 때문에 모두 날것들뿐이다. 그와 같은 칼로는 몇 천 몇 만 개나 되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 모든 일에 온 몸과 온 정성을 다 기울일 때, 충격적으로 번득이는 것, 이것이야말로 큰 깨달음인 것이다.
Board 고사성어 2022.08.19 風文 R 681
한글의 역설 한국어에 영어가 많이 섞여 있어 걱정인 분들이 많다. 허약한 주체의식이나 문화 사대주의 등 관념적인 곳에서 원인을 찾는다. 하지만 문자학의 측면에서 보면 한글이 갖고 있는 역설적 성격 때문이다. 알다시피 한글은 말소리를 작은 조각으로 쪼개어 적을 수 있는 문자라 어떤 말이든 ‘비슷하게’ 표시할 수 있다. 소리만 본뜰 뿐 뜻을 담지 않아 몸놀림이 가볍다. 들리는 대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망설임 없이 적는다. 한국어로 통하는 한글은 외길인데, 중국어로 통하는 한자는 세 갈래 길이다. 음과 뜻이 한 몸인 한자는 낯선 외국어를 만나면 움찔한다. 음으로 적을지(음역), 뜻으로 적을지(의역), 둘 다 살려 적을지(음의역)를 매번 고민해야 한다. 예컨대, ‘咖啡(카페이)’(커피), ‘巧克力(차오커리)’(초콜릿), ‘喜来登(시라이덩)’(쉐라톤), ‘沙发(사파)’(소파)는 영어 발음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电视(뎬스)’(텔레비전=전기+보다), ‘电脑(뎬나오)’(컴퓨터=전기+뇌), ‘电影(뎬잉)’(영화=전기+그림자), ‘手机(서우지)’(핸드폰=손+기계)는 의역한 것이다. 한편 ‘可口可乐(커커우커러)’(코카콜라=입에 맞고 즐기기 좋다), ‘咖啡陪你(카페이페이니)’(카페베네=커피(음)+당신과 함께(뜻)), ‘星巴克(싱바커)’(스타벅스=별(뜻)+벅스(음))는 음과 뜻을 적절히 섞어 만든 것이다. 한글은 쉬운 만큼 외국어가 빨리 들어오고, 중국 한자는 어려운 만큼 천천히 들어간다. 문자는 외국어 수용에 영향을 미친다. 문화 사대주의 때문이 아니다. 말을 고치려면 작은 말씨름이 붙었다. 언어순화 정책을 비판한 칼럼 ‘고쳐지지 않는다’(4월6일치)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언어는 퇴행하지 않고 달라질 뿐, 걱정도 개입도 말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한글문화연대에서 ‘공공언어 개선 전문가 토론회―언어에 대한 개입은 정당한가’라는 주제로 맞짱토론을 제안했다. 영화처럼 ‘17 대 1’의 상황이었다. 외래 요소로 요동치는 언어를 보는 두 관점. 쉽고 바른 우리말로 바꿔야 한다는 ‘개입주의, 처방주의, 순화주의’ 측과 기왕 들어온 거 잘 어울려 지내자는 ‘자유주의, 설명주의, 기술(記述)주의’ 측. 혁명가와 구경꾼의 거리만큼 둘 사이에는 장강 하나가 흐른다. 지금의 언어순화는 언어민족주의가 아닌, 언어 인권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고 한다. 공공기관의 언어만큼은 이해하기 쉬운 말을 쓰자는 취지다. 환영. 성과도 있다. 인정. 하지만 주체를 바꾸자. 말에 대한 최종 책임은 ‘사회적 개인’의 몫이다. 국가는 개인의 말에 대해 ‘맞고 틀림’을 판정할 권한이 없다. 우리의 비극은 이 권한을 아직도 국가가 틀어쥐고 있다는 점. 그 결과 언론출판계를 비롯한 시민영역에서 새로운 개념이나 다양한 번역어를 유통·경합시키고 어느 하나로 모아가는 ‘말의 발산과 수렴’의 장마당(언어시장)이 사라져버렸다. (공무원을 포함한) 모든 개인은 더 소통력 있고 평등한 언어를 구사하려고 애써야 한다. ‘쉬운’ 한국어는 단어가 아닌 글쓰기나 말하기 역량의 문제이다. 이런 ‘언어 감수성’을 기르려면 책을 읽고 글을 쓸 시간이 필요하다. 언어에 대한 문제가 실은 언어 밖의 문제인 셈이다. 이를테면 자율성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기도일기 사랑의 말은 6 편지나 대화에서 `사랑하는 XX에게`라고 표현하는 것조차 쉽지 않을 때가 있다. 듣기엔 아름답고 포근한 느낌을 주지만 실상 이 말엔 얼마나 큰 책임의 무게가 따르는가? 어머니의 내리사랑, 언니의 내리사랑이 지극함을 체험할 때면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내리사랑을 더욱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수도원 안에서 내게도 사랑을 베풀어야 할 대상이 날로 많아지지만 난 내리사랑은커녕 동료들과의 마주사랑도 잘 못하고 있으니 언제 한 번 제대로 사랑의 명수가 되는 기쁨을 누려 볼 수 있을까 걱정이 되네. 7 `우리는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의 필요에 민감해져야 한다. 바로 그러한 데서 공동체가 시작될 것이다` 라는 쟝 바니에의 말을 새겨들으며 이것이 곧 사랑의 아름다운 속성이라 생각해 본다. 그러나 인간의 본능적으로 자기중심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어 이웃의 필요보다는 자신의 필요에 더 민감하도록 길들여졌기에 이웃을 위한 사랑의 민감성을 잘 키워 가도록 더욱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8 진정 자유로운 사람은 마음을 넓혀 가는 사랑 안에서 남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과 언짢은 일로 서먹한 사이가 되어도 누구도 선뜻 다가가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 때 먼저 용기를 내어 지난 일을 잊고 마주 웃을 수 있다면 그가 곧 승리자이고, 둘 사이에 막혔던 벽을 용서와 화해로 허물어뜨리는 큰 기쁨을 맛볼 수 있으리라. 이것이야말로 `여러분 안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시오`하는 복음을 실천하는 길이다. 누구에게도 꽁한 마음을 품지 않도록 관용의 소금을 늘 지니고 살아야겠다. 흰구름 단상 1 비온 뒤의 하늘. 하늘 위의 흰구름. 구름이 아름다운 날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다른 곳으로 잠시 시선을 둔 사이 어느새 모양이 바뀌는 구름. 어린 시절 그리 했던 것처럼 잔디밭에 누워 흰구름을 실컷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 구름에 대한 노래, 구름에 대한 시, 구름에 대한 그림을 모으며 나는 구름이 좋아 수녀 이름도 구름(Cloud)으로 하지 않았던가. 시인 헤세(Hesse)와 셸리(Shelley)의 `구름`. 성서에 자주 나오는 구름의 상징성을 논문으로 쓰고 싶던 나의 갈망도 이젠 구름 속에 숨고 말았다. 푸른 하늘 위에 점점이 떠있는 흰구름처럼 내 안에 떠다니는 구름 같은 생각들을 종종 종이 위에 적어 둔다. 그래서 `흰구름 단상`이라 부쳐 놓고 내 생각들을 그려 넣으면 이것이 후에는 시와 수필의 소재가 되고 편지도 된다. 2 나이 들수록 새로운 사귐, 새로운 만남이 혹시 사랑으로 오더라도 왠지 두렵다. 누가 이것을 케케묵은 생각이라 비웃어도 어쩔 수 없다. 항아리 속의 오래된 장맛처럼, 낡은 일기장에 얹힌 세월의 향기처럼, 편안하고 담담하고 낯설지 않는 것이 나를 기쁘게 된다. 새 구두를 며칠 신다가도 이내 낡은 구두를 다시 찾아 신게 되고, 어쩌다 식탁에서 자리가 모자라서 두리번거리다가 새 얼굴인 수녀들이 오라고 해도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벗들을 얼른 찾아가게 된다. 새로운 것에 적응하면서 살 수 있는 개방성과 선선함이 좋은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 역시 옛 것이 좋고 오래된 것, 낯익은 것에 집착하는 나이기에 가끔은 답답하리만큼 보수적이고 고루하다는 평을 듣는지도 모르겠다.
Board 삶 속 글 2022.08.18 風文 R 470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설의식편" 설의식(1900~1954) 평론가, 언론인. 호는 소오. 함남 출생. 일본 니혼 대학 사학과 졸업. 동아 일보 편집 국장, 부사장, 새한 민보 사장 역임. '일장기 말소 사건' 당시의 동아 일보 편집 국장이었던 설의식은 민족주의자였으며 그의 날카로운 비평문 속에는 민족주의적인 사관과 지사풍의 자세가 담겨 있다. 그의 필치에는 독자들의 마음을 격동시키며 청신하게 각성시켜 주는 매력이 있다. 사물을 관조하되 근원으로부터 꿰뚫는 눈이 있었으며 거기에 유머와 위트까지 곁들여 그를 뛰어난 에세이스트로 빛나게 하였다. 수필집으로 "해방 이전", "화동 시대" 등이 있으며 '유관순 추념문'이 유명하다. 헐려 짓는 광화문 헐린다 헐린다 하던 광화문은 마침내 헐리기 시작한다. 총독부 청사 까닭으로 헐리고 정책 덕택으로 다시 짓게 된다. 원래 광화문은 물건이다. 울 줄도 알고, 웃을 줄도 알며, 노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아는 사람이 아니다. 밟히면 꾸물거리고 죽이면 소리치는 생물이 아니라, 돌과 나무로 만들어진 거물이다. 의식 없는 물건이요, 말없는 건물이라 헐고 부수고 끌고 옮기고 하되, 반항도 회피도 기뻐도 설워도 아니 한다. 다만, 조선의 하늘과 조선의 땅을 같이한 조선의 백성들이 그를 위하여 아까워하고 못 잊어할 뿐이다. 오랜 동안 풍우를 같이 겪은 조선의 자손들이 그를 위하여 울어도 보고 설워도 할 뿐이다. 석공의 망치가 네 가슴을 두드릴 때 너는 앎이 없으리라마는 뚜닥닥 소리를 듣는 사람이 가슴아파하며 역군의 연장이 네 허리를 들출 때에 너는 괴로움이 없으리라마는 우지끈 하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허리 질려 할 것을 네가 과연 아느냐 모르느냐? 팔도 강산의 석재와 목재 인재의 정수를 뽑아 지은 광화문아! 돌덩이 한 개 옮기기에 억만 방울의 피가 흐르고 기왓장 한 개 덮기에 억만 줄기의 눈물이 흘렀던 광화문아! 청태 끼인 돌 틈에 이 흔적이 남아 있고 풍우 맞은 기둥에 그 자취가 어렸다 하면, 너는 옛 모양 그대로 있어야 네 생명이 있으며 너는 그 신세 그대로 무너져야 네 일생을 마칠 것이다. 풍우 몇백 년 동안에 충신도 드나들고 역적도 드나들며, 수구당도 드나들고 개화당도 드나들던 광화문아! 평화의 사자도 지나고 살벌의 총검도 지나며, 일로의 사절도 지나고 청국의 국빈도 지나던 광화문아! 그들을 맞고 그들을 보냄이 너의 타고난 천직이며 그 길을 인도하고 그 길을 가리킴이 너의 타고난 천명이었다 하면 너는 그 자리 그 곳을 떠나지 말아야 네 생명이 있으며 그 방향 그 터전을 옮기지 말아야 네 일생을 마칠 것이다. 너의 천명과 너의 천직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였거니와 너의 생명과 너의 일생은 헐리는 그 순간에, 옮기는 그 찰나에 마지막으로 없어지고 말았다. 너의 마지막 운명을 우리는 알되 너는 모르니, 모르는 너는 모르고 지내려니와 아는 우리는 어떻게 지내랴? 총독부에서 헐기는 헐되 총독부에서 다시 지어 놓는다 한다. 그러나 다시 짓는 그 사람은 상투 짠 옛날 그 사람이 아니며 다시 짓는 그 솜씨는 웅건한 옛날의 그 솜씨가 아니다. 하물며 이때 이 사람의 감정과 기분과 이상이야 말하여 무엇하랴? 다시 옮기는 그 곳은 북악을 등진 옛날의 그 곳이 아니며 다시 옮기는 그 방향은 경복궁을 정면으로 한 옛날의 그 방향이 아니다. 서로 보지도 못한 지가 벌써 수년이나 된 경복궁 옛 대궐에는 장림에 남은 궂은비가 오락가락한다. 광화문 지붕에서 뚝딱 하는 망치 소리는 장안을 거쳐 북악에 부딪친다. 남산에도 부딪친다. 그리고 애달파하는 백의인의 가슴에 부딪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