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실과 야생, 학교 부모는 아이가 타인과 적절히 교류하는 존재로 성장하는 걸 돕는다. 이러한 사회화는 대부분 말로 이루어지므로 사회화의 핵심은 언어 학습이다. 사회화와 언어 학습은 동전의 양면이다. 아이를 식물에 비유한다면 자녀 양육을 ‘온실 모형’과 ‘야생 모형’으로 나눠볼 수 있다. 온실 모형 속 부모는 아이를 끊임없이 보살펴야 하는 식물로 대한다. 부모는 아이와 말을 많이 나눈다. ‘이게 뭐예요?’라 물으면 친절히 설명해주고 ‘네 생각은 어떠냐?’고 되묻는다. 질문과 설명 중심의 대화를 통해 지식을 습득하는 방식을 자연스럽게 익힌다. 자기 생각을 잘 드러낸다. 틈나는 대로 ‘잠자리에서 책 읽어주기’를 한다. 공룡이든 자동차든 ‘꼬마’ 전문가가 되는 걸 대견해한다. ‘티라노사우루스’, ‘안킬로사우루스’의 습성과 생김새, 생존 시기를 좔좔 외면 환호한다. 야생 모형 속 부모는 아이를 대지의 비바람과 햇볕을 받고 자연스럽게 자라는 식물로 대한다. 아이는 가만히 ‘냅두면’ 알아서 자란다. 아이의 삶에 시시콜콜 간섭하지 않는다. 친구들이나 다른 관계에서 스스로 살길을 찾아가길 바란다. 잠자리에서 책을 읽어주지 못한다. 집 안은 대체로 조용하다. 대화보다는 지시와 명령의 말이 많다. 자기 생각을 드러내는 데 서툴다. 물론 현실에선 두 모형이 뒤섞여 있다. 다만, 온실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더 많은 인정과 성공의 기회가 주어지는 건 분명하다. 집에서 이미 연습했기 때문이다. ‘야생’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학교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나? 학교는 말을 둘러싼 사회적 격차를 좁히고 있나, 더 벌리고 있나? 의미의 반사 솔직히 의미는 ‘별것’이 아니다. 팔랑귀다. 시시때때로 변한다. 의미는 사전에 실린 뜻풀이가 아니다. 머릿속에 고정되어 있지도 않다. 말과 세계 사이도 헐겁다. 그 사이를 사람들끼리의 상호작용과 사회적 실천이 채운다. 그래서 의미는 가변적이고 사회적이다. 검찰 개혁에 비판 게시글을 쓴 검사에게 “이렇게 커밍아웃해 주시면 개혁만이 답입니다”라고 한 장관의 말이 구설에 올랐다. 글쓰기 선생 눈에는 문장이 어색한 게 먼저 눈에 들어왔지만(뭔 말이지?), 사람들에게는 ‘커밍아웃’이란 말이 문제였다. 이 말이 반복되어 쓰이자, 성소수자 단체와 진보정당에서 “커밍아웃이 갖는 본래의 뜻과 어긋날뿐더러 성소수자 인권운동이 걸어온 역사성을 훼손하는 일”이라는 성명서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의미는 저작권을 주장할 수 없다. 소수자의 희생과 저항의 역사가 담긴 언어도 예외일 수 없다. 오용이나 퇴행이라고 볼 필요가 없다. 소수자들도 자신을 향한 혐오 발언을 낚아채서 그대로 돌려줌으로써 발언의 효과를 없앴다. 밥에 돌 씹히듯 들리겠지만, ‘이게 나라냐?’라는 구호를 빼앗아 ‘(그럼) 이건 나라냐?’라고 되받아친다. 자신에게 유리한 의미를 퍼뜨리기 위해 열심히 투쟁 중이다. 벽에 박아놓은 못처럼 의미를 고정시켜놓을 수 없다. 멋대로라는 뜻도, 그냥 놔두라는 뜻도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 지식, 신념, 취향, 계급,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말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래서 말은 이 모든 의미투쟁의 결과물이자 정치사회적 윤리의 문제와 닿아 있다. 의미는 팔랑귀지만 귀가 밝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가을엔 바람도 하늘빛 7 `용서하고 선을 베푸는 일을 결코 게을리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주님의 자비하심을 나는 더욱 열심히 따르고 싶다. 나와 천성이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섣부른 판단을 내리기보다는 그의 좋은 면을 보려고 애쓰는 편이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건 불신을 품는 일, 특히 보잘것 없는 사람들, 가난하고 권력없는 사람들에게 불신을 품는 일, 남을 깍아내리는 평가 등은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나를 고통스럽게 하며, 마음 깊숙한 곳에서 나를 아프게 한다.` 교황 요한 23세의 이 말씀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으며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그의 끝없는 애정에 감동했다. 나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십사 하고 기도했던 오늘, 용서한다고 쉽게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서로 용서하지 않는 일이 우리 사이엔 얼마나 많은지! 가끔은 하느님도 이 부분을 슬퍼하시리라는 생각이 든다. 8 이별은 아직도 쓰라리고 남북은 함께 슬프구나. 여섯 살 때 납북되신 아버지가 낡은 사진 속에서 걸어나와 가끔 내게 말은 건네신다. "얘야, 잘 있니? 너무 오랜 세월 우리는 헤어져 살았구나. 내가 왜 떠나게 되었는지 나도 모른단다. 이 땅에서 다시 만날 희망이 없어졌지만 나의 사랑은 식지 않았단다. 내 탓이 아니라도 나를 많이 원망하며 그리워했을 모든 가족에게도 안부 전해주렴." 9 오늘은 주일. 끝내기 위해서 숨이 찾던 일의 의무도, 아름답지만 조금은 고단했던 사랑의 의무도 오늘은 모두 쉬기로 하자. 끊임없는 계획으로 쉴 틈이 없었던 생각도 쉬게 해주자. 급히 따라오는 시간에도 쫓기지 말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여유를 지녀야지. 새소리, 바람소리를 들으며 그냥 조용히 웃어 보는 기쁨 또한 기도임을 믿는다
Board 삶 속 글 2022.08.30 風文 R 530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이은상편" 시조 시인, 사학자. 호는 노산. 경남 마산 출생. 연희 전문 졸업. 일본 와세다 대학 수학. 시조의 현대화에 기여했으며 대부분의 작품들이 작곡이 되어 가곡으로 불릴 만큼 시조 형식을 현대적 운율로 소화해 내었다. 뛰어난 문장가로 많은 수필집을 낸 바 있으며 교단은 물론 많은 학술 단체, 사회 단체에도 관여하였다. 한 눈 없는 어머니 김 군에게 김 군이 다녀간 어젯밤에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소. 김 군에게 보내는 이 편지는 쓰고 싶으면서도 실상은 쓰고 싶지 않는 글이오. 왜냐 하면 너무도 어리석은 일을 적어야 하기 때문에, 너무도 슬픈 사연을 담아야 하기 때문이오. 그러나, 나는 이 글을 꼭 써야만 한다는 무슨 의무감 같은 것을 느끼었소. 그래서 이 붓을 들었소. 어젯밤 우리가 만난 것은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르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소. 아, 거기서만 끝났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소. 그대는 품속에서 그대의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진 한 장을 꺼내어 내게 보여 주었소. 나는 그대의 어머니를 생전에 뵈온 일이 없었기로 반가이 받아들었소. 그런데, 그대의 가신 어머니는 한 눈을 상하신 분이었소. 그것을 본 순간, 내 머리에는 '불행'이란 말이 퍼뜩 지나쳤소. 그와 동시에 나는 그대가 더욱 정다워짐을 느끼었소. 그러나 뒤를 이어 주고받은 그대와 나와의 이야기, 김 군, 그대는 이 글을 통해서 어젯밤 우리가 나눈 대화를 한 번 되새겨 주오. 그대는 어느 화가의 이름을 말하면서 내가 그와 친하냐고 묻기에,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소. "그럼, 한 가지 청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요?" "이 사진을 가지고 내 어머니의 모습을 하나 그려 달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보수는 상당하게 드리겠습니다." "내 힘껏 청해 보지요." 그림으로나마 어머니를 모시려는 그대의 착한 뜻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소. 그래서, 나는 쾌히 약속을 했던 것이오. 그러나, 그 다음에 나온 그대의 말, 그대는 가장 부자연스런 웃음과 어색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였소. "그런데 그림을 그릴 적에 두 눈을 다 완전하게 그려 달라고 해 주십시오." 김 군, 순간 내 눈앞은 캄캄해지고 내 가슴은 떨리었소. 나는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소. 두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소. 겨우 입을 열어 내가 한 말은 돌아가 달라는 한 마디뿐이었소. 나는 그대를 보내고, 괘씸하고 분한 생각에 가슴을 진정할 수가 없었소. 그대가 평소에 어머니의 눈 때문에 얼마나 한스러웠기에 그림에서라도 온전히 그려 보려 했을까? 이렇게 생각하려고도 해 보았소. 그러나 그대의 품속에 들어 있는, 그대의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진, 한 눈 상하신 그 어머니의 얼굴이 눈앞에 나타나 원망의 눈물을 흘리시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소. 김 군, 그 즉석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그러나 그대는 나의 열리지 않던 입에서 분명히 듣고 간 것이 있었을 것이오. 말없던 나의 입에서 듣고 간 것이 없소? 만일 없다면, 이제라도 한 마디 들어 주오. 그러나, 내 말을 듣기 전에, 그대는 먼저 그대의 품속에서 그대 어머니의 사진을 꺼내 자세히 들여다보오. 상하신 한쪽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자세히 보오. 눈물 가진 눈으로 보오. 김 군, 한 눈을 상하신 까닭으로 평생을 학대 속에 사셨는지도 모를 그 어머니... 애닯소. 한 눈 없이 그대를 낳고 기르고, 그대를 위하여 애태우시다 이제는 저 차가운 땅 속에 드셨거늘, 자식인 그대마저 어찌 차마 그대 어머니의 상하신 한 눈을 업신여겨 저버린단 말이오? 그대에게 한 눈 가지신 어머니는 계셨어도 두 눈 가지신 어머니는 없었소. 온 세상이 다 불구라 비웃는대도 그대에겐 그 분보다 더 고우신 분이 또 누구이겠소? 한 눈이 아니라 두 눈이 다 없을지라도 내 어머닌 내 어머니요, 내가 다른 이의 아들이 될 수는 없는 법이오. 김 군, 그림으로 그려 어머니를 모시려 한 착한 김 군, 그런 김 군이 어떻게 두 눈 가진 여인을 그려 걸고 어머니로 섬기려 했단 말이오? 그대는 곧 한 눈 없는 어머니의 영원한 사람의 품속으로 돌아가오. 그리하여 평생 눈물 괴었던 그 상하신 눈에 다시는 더 눈물이 괴지 않도록 하오. 이만 줄이오.
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1. 소원성취는 마음먹기 나름 정열적으로 요청한 부부 - 젝키 밀러 막바지에 이르러 우리는 브라질 리오데자네이로에서 개회되는 제1차 환경 정상회의에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교통비와 숙식비, 그리고 우리가 회의 참석자들에게 배포하려는 자신감에 대한 소책자를 인쇄하는데 드는 비용이 총 8천 달러인데 반하여, 모금할 시간은 겨우 2주일이 고작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여권 및 비자 수속에 호텔 예약도 해야 했다. 우리는 인간이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인간의 생존에 필요 불가결한 환경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리란 사실을 마음 속 깊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환경 회의에 참석하여 환경 위기가 곧 우리가 현재 영혼과 가슴속에서 경험하는 위기와 직결되어 있음을 세상에 알릴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우리는 이 중요한 메시지를 세상에 전하려는 정열에 불타올라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첫날 통화했던 어떤 이가 500달러를 기부했다. 그 다음 전화는 한 여성과 연결되었다. 그녀는 막 공항으로 떠나려던 참이므로 2분밖에 시간을 낼 수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단 2분 간의 짧은 통화 끝에 천 달러를 기부했다. 그녀는 우리를 알지도 못했지만, 우리가 품은 목적에 대한 정열에 큰 감동을 받아 우리를 돕고 싶어했다. 사실 그녀는 격한 감동으로 통화중에 울먹이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이 그토록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사실에 놀라고, 우리를 돕게 되어서 매우 기쁘다고 했다. 여러분이 어떤 목적을 품고, 그 일이 중요할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음을 알 때, 다른 이를 쉽게 설득할 수 있다. 2주일에 8천달러를 모금하다니! 그 대부분은 우리가 전에 알지 못했던 이들에게 받았다.
Board 추천글 2022.08.30 風文 R 1454
한우충동(汗牛充棟) - 수레에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릴 정도이고 방 안에 쌓으면 들보에 닿을 정도란 뜻으로, 장서(藏書)가 매우 많음의 비유. 《出典》柳宗元 '陸文通先生墓表' 唐나라 중엽의 문장가 유종원(유종원)의 '육문통선생묘표(陸文通先生墓表)'라는 글이 있는데, 그 첫머리 부분에 이렇게 실려 있다. 孔子께서《春秋》를 짓고서 1500년이 지났다. 이름이 전해지는 사람이 다섯 있는데, 지금 그 셋을 쓴다. 죽간(竹簡)을 잡고 생각을 초조하게 하여 써 읽고 주석(註釋)을 지은 자가 백천(百千)이나 되는 학자가 있다. 그들은 성품이 뒤틀리고 굽은 사람들로, 말로써 서로 공격하고 숨은 일을 들추어 내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지은 책들은 집에 두면 '창고에 가득 차고', 옆으로 옮기려면 '소와 말이 땀을 흘릴' 정도였다. 孔子의 뜻에 맞는 책이 숨겨지고, 혹은 어긋나는 책이 세상에 드러나기도 했다. 후세의 학자들은 늙은을 다하고 기운을 다하여 왼쪽을 보고 오른쪽을 돌아보아도 그 근본을 얻지 못한다. 그 배우는 것에 전념하여, 서로 다른 바를 비방하고, 마른 대나무의 무리가 되며, 썩은 뼈를 지키어 부자 (父子)가 서로 상대를 상처내고, 임금과 신하가 배반하기에 이르는 자가 전 세상에는 많이 있었다. 심하도다. 성인(聖人) 孔子의 뜻을 알기가 어렵도다. 孔子作春秋 千五百年 以名爲傳者五家 今用其三焉 乘?牘 焦思慮以爲讀注疏說者 百千人矣 攻??怒 以辭氣相擊排冒沒者 其爲書 處則充棟宇 出則汗牛馬 或合而 隱 或乖而顯 後之學者 窮老盡氣 左視右顧 莫得其本 則專其所學 以?其所異 黨 枯竹 護朽骨 以至於父子傷夷 君臣?悖者 前世多有之 甚矣 聖人之難知也.
Board 고사성어 2022.08.30 風文 R 1141
잃어버린 말 찾기 단어가 잘 안 떠오른다고 고백한 적이 있는데 요즘엔 더 잦아졌다. 뇌 기능이 조금씩 뒷걸음질친다. 수업 때 수십 종의 개 이름을 다다닥 읊어주고 그걸 그저 ‘개’라고만 하는 말의 폭력성을 보여줌으로써 학생들의 환심을 사려 했다. 그 순간 떠오른 말은 ‘발바리’밖에 없었다. ‘풍산개, 삽살개, 셰퍼드, 불도그, 푸들, 닥스훈트’, 하다못해 ‘진돗개’는 어디로 갔나. 그래도 말에 장애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되면 좋은 점이 있다. 허공에 빈손 휘젓듯 머릿속을 뒤적거리다 보면 상실된 것 주변에 아직 상실되지 않은 나머지들이 날파리처럼 몰려드는 걸 보게 된다. 머릿속 낱말들이 어떻게 짜여 있는지 짐작할 수도 있다. 흔히 단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딴 말로 풀어 말한다. 일종의 번역인데 ‘칼’이란 낱말이 떠오르지 않아 ‘뾰족하게 생겨 뭘 자르는 거!’라는 식이다. 비스름한 말만 맴돌기도 한다. ‘강박’이란 말이 안 떠올라 ‘신경질, 편집증, 집착’이, ‘환멸’ 대신에 ‘혐오, 넌덜머리, 염증’이란 말만 서성거린다. 비슷한 소리의 단어가 어른거리기도 한다. ‘속물’이란 단어가 안 떠올라 첫 글자가 ‘ㅅ’인 ‘사람, 선물, 사탄, 사기’란 말이 움찔거리다가 이내 사라진다. 혼자 하는 말잇기놀이 같다. 부부의 대화 중 잃어버린 말을 찾으려 스무고개를 하는 경우가 심심찮다. 상실된 말 주변에 더 이상 아무 말도 모이지 않으면, ‘그때 걔, 있잖아 걔’, ‘아, 거 그거, 뭐시기냐 그거’ 이렇게 될 거다. 침묵으로 빠져들기 전, 마지막까지 내 혀에 살아남을 말이 뭘지 궁금하다. 부디 욕이 아니길. ‘영끌’과 ‘갈아넣다’ 말에는 허풍이 가득하고 인간은 누구나 허풍쟁이이다. 보고 들은 걸 몇 곱절 뻥튀기하고 자기 일은 더 부풀린다. ‘아주 좋다, 엄청 많다’고 하면 평소보다 더한 정도를 표현한다. 하지만 ‘아주, 엄청, 매우, 무척, 너무’ 같은 말은 밋밋하고 재미가 없다. 더 감각적인 표현들이 있다. 이를테면 ‘뼈 빠지게 일하다, 등골이 휘도록 일하다, 목이 빠지게 기다리다, 목이 터져라 외치다, 죽어라 하고 도와주다, 쎄(혀) 빠지게 고생한다’고 하면 느낌이 팍 온다. 화가 나면 피가 거꾸로 솟고, 엎어지면 코 닿을 데에 살고, 눈 깜짝할 사이에 일이 벌어진다. 상다리가 부러지게 음식을 차리고 문지방이 닳도록 사람이 드나든다. 사진을 보듯 생생하지만 과장이 심하다. 모든 것을 다 쏟아붓는다는 뜻으로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으다)이나 ‘갈아 넣다’라는 말을 곧잘 듣는다. 장롱 밑에 굴러 들어간 동전까지 탈탈 털어 집을 사거나 투자를 할 수는 있지만, 영혼까지 끌어모으고 갈아 넣어서 뭘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혼을 담은 시공’이라는 건설 광고판을 보며 들었던 두려움과 죽음의 정서와 겹친다. 과장된 말처럼 현실을 견디고 살아내야 하는 사람이 많다. 탈진할 때까지 힘을 써야 하고 등골이 휘어져도 참아야 하고 영혼마저 일에 갈아 넣어야 하는 사람들. 매순간 모든 걸 걸어야 하는 사회. 있는 힘을 다해야 할 건 부동산도 일도 아니다. 뼈도 힘도 영혼도 어디다 빼앗기거나 갈아 넣지 말고 고이 모시고 집에 들어가자. 세상이 허풍 떠는 말을 닮아간다. 허풍이 현실에서 벌어지면 십중팔구 비극이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가을엔 바람도 하늘빛 4 바람 부는 소리가 하루 종일 내 마음을 흔들던 날. 코스모스와 국화가 없으면 가을은 얼마나 쓸쓸할까. 이 가을에 나는 누구보다 나 자신을 길들여야지. 아름다운 음악을 듣거나 좋은 책을 읽는 즐거움도 행복한 것이지만 홀로 듣는 음악. 홀로 읽는 책을 좋아하는 것 못지않게 함께 일하는 이들의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이며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어야겠다. 때로는 나늘 힘들게 하고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한 사람들의 눈빛과 표정에서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실수나 잘못을.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세심하게 읽어낼 수 있는 지혜를 지녀야겠다. 나이 들수록 온유와 겸손이 어렵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창 밖의 나무들을 바라본다. 5 `나무에선 돌이나 쇠붙이에서 느낄 수 없는 생명과 정서를 느낀다. 나무향기를 맡고 싶다. 나무향기를 내는 벗을 갖고 싶다. 나무향기로 남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정목일님의 <나무향기>라는 수필을 읽은 날. 나는 뜻밖에도 언니가 보내 준 향나무 원목 한 토막을 선물로 받았다. `이건 향나무 조각인데 책상에 두고 상본이나 십자고상 같은 것을 올려 놓으면 어떨까? 시상이 떠오를지도 모르지` 하는 메모와 함께. 그러고 보니 내 방 안에는 향나무 묵주, 향나무 필통, 향나무 연필들로 이미 향기가 가득하다. 6 어린아이가 아프다고 칭얼대는 모습은 밉지 않은데 어른이 되어 자기의 아픔을 이리저리 어떤 모양으로든지 보채는 모습은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아픔은 숨기고 오히려 남을 걱정하는 이들의 순한 모습이 오래 기억에 남고 감동이 되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너무 자기 걱정만 앞세우고 자기 아픔에만 빠져 남을 돌보는 넓고 큰 마음을 잊고 살기 때문이다.
Board 삶 속 글 2022.08.29 風文 R 433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김진섭편" : 김진섭(1930~?) 수필가, 독문 학자. 호는 청천. 전남 목포 출생. 일본 호세이 대학 졸업. 서울대 교수. 6.25사변 때 납북됨. 저서로 "인생예찬" "생활인의 철학" 등이 있다. 한국 수필 문학의 개척자. 생활의 예지와 감흥을 가지 넘치는 생활 철학의 발견으로까지 발전시켰다. 우송 이제로부터서는 차차로 겨울에는 보기 드물던 비가 내리기 시작할 때다. 꽃을 재촉하는 봄비로부터 우울한 가을비에 이르기까지 혹은 비비하게, 혹은 방타하게, 혹은 포르티시모로, 혹은 피아니시모로, 불의에 내리는 비가 극도로 절약된 자연 속에 사는 도회인의 가슴에까지도 문득 강렬한 자연감을 일으키면서 건조한 대지를 남김없이 적실 시기는 이제 시작된 것이다. 참으로 비는 눈과 한가지로 도회인에게 남은 오직 하나의 변함없는 태고 시대를 의미하며, 오직 하나의 지묘한 원시적 자연에 속한다. 겨울에 변연히 내리는 편편백설이 멀고 먼 동경의 성국을 우리가 사는 곳에까지 고요히 고요히 싣고 와 우리에게 여러 가지의 아름다운 시취를 일으킬 수 있음에 못지않게 또한 비는 우리에게 경쾌하고 청신한 정감을 다양 다모하게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본지가 수필 일 편을 청함에 맡겨 우송을 택한 것은 지난 겨울에 백설을 바라다가 드디어 얻지 못하고 따뜻한 봄을 맞이하게 되니 그 대상을 비의 자연에 구한다느니보다는 철이 되면 철따라 요사이 어쩐지 비 자체가 한없이 그립기 때문이다. 대체 비라는 것은 물론 누구의 의견을 두드려 보아도 그렇겠지만 왔다가는 개고 개었다가는 오는, 말하자면 갈망의 결과로서 내려 세갈의 의하면 써 그치는 바 물이라야 하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이리 하여야만 모든 것이 그 자신의 질서 속에 더욱 명랑한 정신을 획득할 수가 있다. 노아의 대홍수는 광휘 있는 40일 동안의 장림의 결과였다고 한다. 그 결과가 반드시 홍수에는 이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밤낮으로 비만 오고 햇볕이 조금씩 나타나려다가 또다시 내리는 비에 숨기어지고 마는 지루한 장마가 계속되면 모든 사람의 마음은 침울하게 되고 성급하게 되어 나중에는 세상을 저주하고, 하늘을 저주하고, 특히 무엇보다도 비라는 놈을 욕하고 주먹질한다. 한발도 견디기 어렵지만 장림은 더욱 견디기 어려운 듯 보인다. 사실에 있어 비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까닭이다. 오직 그들의 소중한 금전옥답에 천연의 관개를 필요로 하는 농부들만이 다른 사람이 얼마나 많이 이 '궂은' 일기에 대하여 저주할 때라도 도저히 동감의 의를 표치 않을 따름이다. 참으로 농부들은 너무도 직접적으로 이 하늘이 주는 기적, 이 하늘이 내리우는 축복을 체험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들은 우후의 놀라운 성장을 백곡천채에 있어서 관찰하고 하늘의 섭리에 감사하여 마지않는 것이다. 그들에 있어서는 오늘과 같은 과학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모든 자연 현상은 오히려 하나의 경이에 멈춘다. 그러나 반대로 도회인으로 말하면 피해를 입으면 입었지 그 은택을 느낄 기회를 전연 갖지 아니하므로, 우연히 우중봉사를 직무로 택한 자동차 운전수와 우산 제조업자의 일군을 제외하고 보면 이들은 모든 종류의 비에 불의의 모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리하여 도회인은 흔히 지루한 비가 인간의 정신에 작용하는 바 영향을 통론하여 그 때문에 유래한, 퇴치할 수 없는 침울 속에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른다. 좀 생각하여 보라. 사실 비가 오면 예삿일이 아닌 것이다. 첫째로 불쾌한 것은 젖은 발이다. 화사를 사랑하는 도회지의 신사 숙녀로서 분노의 정을 일으킬 뿐이 아니라 감기까지 모시고 오는 것이 실로 비 때문에 젖은 양말이며, 비 때문에 물이 된 구두인데야 어찌 이 괴악한 그의 소행을 용사할 수 있으랴! 비를 예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붓을 든 나도 비에 젖은 신발의 불쾌감을 생각하면 비에 대한 일말의 증오심이 일어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다. 그리하여 문제는 물론 이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더욱 나아가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것을 타기를 사랑하나 다른 사람이 타고 달리는 것을 싫어하는 도회지의 자동차가 특히 비 오는 날에 우리의 아껴야 할 의복에 사정없이 펄을 한 주먹 뿌리고 도망간 아직도 괘씸한 기억을 찾아 낼 수 있으며, 또는 모처럼 벼르던 일요일의 원대한 이상이 예기치 않았던 비 때문에 애인을 위하여 특별한 마음으로 장만하여 둔, 혹은 한 송이의 비단꽃이, 혹은 한 권의 책이 불길한 징조를 예시하는 듯이 탐욕스러운 소낙비에 의하여 속속들이 젖고야 말았던 애달픈 기억 등, 기타의 많은 불쾌한 기억을 우리의 생활 속에서 찾아 낼 수가 있다. 이러한 가지가지의 회상을 더듬으면 어떠한 의미에 있어서도 우리가 적어도 도회에 사는 이상 비를 예찬할 기분이 안 될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성급한 마음을 잠깐 억제하고 조금쯤 이에 대하여 반성할 여유를 갖는다면 이 따위 구구한 추억은 가히 문제될 거리가 아니다. 비의 폐해를 구태여 이런 추억 속에 찾는다면 우리는 그 반면에는 또한 항상 비의 이익이 병행하고 있는 사실을 예증치 않을 수 없다. 가령 비가 오니까 떠나가려는 애인이 좀더 우리 곁에 앉아 있을 수도 있는 것이며 비가 오니까 틀림없이 찾아올 터인 채귀의 언제나 같은 힐난의 액을 면할 수도 있는 것이며, 또 여기서 우리는 생략하여도 좋은 많은 용무, 많은 회합이 불의의 강우로 인하여 결연히 단념될 수 있는 데서 유래하는 방, 저 명랑한 쾌감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대체 떨어진 구두를 신고 흙물에 들어간다고 해서 비가 싫다는 것은 무어라 하여도 좀 창피한 감상이다. 두 다리를 조종하여 길을 다니는 이상엔 청우를 불문하고 무엇보다도 신발 단속이 급선무일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참으로 악화가 소위 인간 삼환의 일자로서 지적되는 것도 이유 없지 않다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폐리를 끌고 다니지 않는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비에 대하여 안전한 신발을 신고 있을 뿐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사람마다 장차 오는 휴일에 잔뜩 처담은 단꿈이 비 때문에 깨어진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며, 또 노상에서 우연히 대우를 만나 암만 속력을 내어 달음질을 했어도, 물에 빠진 새앙쥐 신세를 짓고야 말았다는 수도 있을 수 없는 터에야, 소수인이 드물게 겪은 바 불운한 예를 가지고 구태여 비를 원망할 수도 가만히 생각하여 보면 없는 일이 아니냐? 이리하여 우리는 도회의 비를 한없이 찬미하려는 자이지만, 우리가 비를 찬미하려기 때문에는 우리는 먼저 비에 약한 무리를 물리치고 비에 강한 무리 속으로 몸을 집어 넣지 않으면 아니 된다. 비에 강한 무리란 두말할 것도 없이 바닥창이 두꺼운 구두를 신은 사람을 의미하며, 밀회를 갖지 않는 건전한 사람을 의미하며, 여름이 되어 다른 사람들이 휴가를 이용하여 피서갈 때에도 오히려 항상 변함없이 초열의 도회지를 사수하고 있는 사람들을 그것은 의미한다. 풍우한설에 대하여 우리가 이를 피할 수 있는, 집이라는 안전지대를 갖는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이 안전 지대인 우리들의 집 창문에 우리가 서로 기대어 거리의 모든 생활이 비비히 내리는 세우에 가벼이 덮이어 거대한 몸을 침면시키고 있는 정경을 볼 때 누가 과연 그 마음이 기쁘지 않다 할 수 있으랴! 이 집은 물론 우리 자신에 속한 집이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서 빌린 집이며, 이 집은 또 혹은 좁아서 걱정이며 혹은 더러워서 곧 이사가려는 경우에 처하고 있는 때라도 우리는 이 때만은 부슬부슬 내리는 이슬비의 불역의 귀결을 감상함으로 인하여 이 집은 벌써 좁지 아니하며, 이 집은 벌써 더럽지 않을 뿐 아니라, 주소간 속 깊이 잠재하여 떠나지 않던 전택의 욕망도 전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비는 한 개의 시가로서 우리 앞에 군림하여 이 한없이 큰 매력은 불안하기 그지없는 세가를 그리운 자저로 화하게 하고 피할 수 없는 번민을 존재의 희열로 변하게 한다. 비의 위대한 정화력은 그 영역 속에 모든 사람에게서 그들의 괴로운 현실을 빼앗고 그것에 대치하되 보다 심원한 초현실로써 하는 것이다. 거리거리의 모든 구조물을 세척할 뿐이 아니라 그것은 실로 인간의 영혼까지를 세탁하는 것이다. 비가 노래하는 혹은 들리고 혹은 들리지 않는 단순한 절주는 가장 고상한 음악에 속할 자이다. 그것은 하나의 음악일뿐이 아니라 또한 그것은 변화무쌍한 일폭의 활화이기도 하다. 우리가 꺽다점에나 카페에 앉아서, 때마침 장대같이 내리는 빗줄기가 분간없이 유리창을 때리며, 바람은 거리와 거리를 휩쓸어 신사의 모자를 날리고 부인네들의 우산을 뒤집는 소란한 정경을 객관적으로 완미 할 수 있을 때 누가 과연 이에 쾌재를 부르짖지 않을 자이랴! 내 아직 경험이 적으므로 인생의 생활이 얼마나 한 행복을 우리에게 약속할는지는 감히 추단키 어려우나 적어도 현재의 내 생각 같아서는 이만한 행복감을 줄 수 있는 시추에이션도 이 인간 생활 속에서는 그다지 많이 찾을 수는 없는 것같이 보인다. 이 때에 우리가 마시고 있는 한 잔의 차, 한 잔의 맥주는 이중으로 삼중으로 맛이 늘어가는 것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다. 더욱이나 우리가 재채기를 하고 욕설을 하며 젖을 옷을 툭툭 털고 들어오는 무고한 피해민을 안락 의자에 팔을 괴고 보게 되면 그것은 참으로 얻기 어려운 일복의 청량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때 피로를 잊을 뿐 아니라 잠시 동안 근심을 잊고, 걱정을 잊고, 실로 흔히는 자기 자신까지를 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뜻하지 아니한 천래의 일장 연극에 입장료도 지불함이 없이 여기서 완전히 도취할 수 있으니, 이와 같은 우신의 신묘한 희롱에 어찌 우리는 법열을 느끼지 아니할 수 있으랴! 비란 원래 사람의 예단을 반발하고, 측후소의 존재 의미까지 의심케 하도록 졸지에 내리고 또 그치는데, 떠도떠도 다 하지 않는 교치한 맛이 있는 것이지만, 여름의 더운 날 같은 때에 난데없는 일진광풍이 돌연히 소낙비를 데리고 오면, 참으로 이 곳에서 우러나는 재미야말로 진지하다 할 수 있다. 천하의 행인은 뚝뚝 던지는 비의 기습에 크게 놀래어 잠시는 이 불온한 형세에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문제는 극히 간단하므로, 곧 동분서주, 서로 머리를 부딪쳐 가면서 피할 장소를 구하여 배회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중에 혹은 물둠벙에 빠지는 신사를, 혹은 땅바닥에 미끄러지는 노인을, 혹은 치맛자락을 높이 껍어들고 달음질하는 숙녀를--이 하늘의 불의의 발작, 이 하늘의 기교한 즉흥시에 박수와 갈채를 아끼지 아니하고, 작약흔무하는 아해의 무리무리 속에 발견하기란 너무도 용이한 노력에 속한다. 이리하여 지극히도 황당한 수순이 경과한 뒤에 모든 불운한 행인이 그들의 불운한 몸을 집집의 벽과 벽에 꼭 붙임을 겨우 얻어서 천하는 오로지 한 곡조의 요란한 우성 속에 갇혀 고요히 움직이지 않을 때, 우리가 만일 자동차에 편히 앉아 곳곳에 불안과 불평을 숨기고 있는 평화한 거리거리를 지나게 되면--이거 또한 한없이 기껍지 아니한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간혹 집 문을 들어서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만 해도 감동하여 희열의 저을 금할 수 없지는 아니한가? 아까 우리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일대의 젊은 남녀가 어딘지 산보 가는 것을 보고 확실히 흥분을 깨달았을 뿐 아니라, 그렇잖아도 우울한 마음이 더욱 우울해짐을 어찌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이제 비가 돌연히 쾌청한 공기를 교란하고 있음을 보게 되니 벌써 우리는 그들에게 선망의 염을 일으킬 필요는 전연 없다. 그의 좋은 양복과 그의 고운 애인은 가련하게도 이 비에 쪽딱 젖고 말았을 것이 아니냐? 비는 참으로 비가 와야 해될 것이 없는 모든 사람에게 대하여 하나의 큰 위안을 제공하는 바 비근한 일례에 불과하지만-또는 세우가 비비하게 내려 도회의 포도를 걸레질하는 정도로 먼지를 닦아 낸 때 같은 햇빛보다도 포근하고, 부드럽고, 또 시원한 비를 차라리 맞고 다님이 특히 정서 깊음을 과연 누가 느끼지 아니하랴? 이런 때엔 빈 자동차가 승객을 찾음이겠지, 열을 지어 힘없이 거리 위를 완보함을 봄도 확실히 통쾌하다. 도회에 비가 내리는 기쁨은대강 이러한 것들로 요약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럼으로써 비에 대한 찬미는 한 개의 자명한 사실로서 당연히 승인되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임이 또한 틀림없다. 그러니 여기서 사람은 도덕과 윤리의 이름에 있어서 나의 '우송'에 단연 반의를 표명할지도 모른다. 즉 이를 도덕가류의 의견에 의하면 우리가 비를 기뻐하는 것은 비 자체에 대한 순수 무잡한 희열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비에 의하여 피해를 입는 것을 즐기는 악의 속에 그 근본 동기를 둔다는 것이다. 엄격할 뿐인 윤리적 견지에서 보면 과연 그렇게 단순히 말하여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특히 이 경우에 한해서는 도덕은 결국 무생명한 한 개의 이론에 불과한 감이 없지 않다. 무어라 하여도 인생의 엄연한 사실은 다른 사람이 길에서 삐적하고 미끄러지는 것을 보면, 또는 잘못하여 손에든 찻잔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면, 우리와의 이해 관계를 떠나서 어쩐지 그것은 까닭 없이 우습고도 즐거운 것을 항상 예증하여 주는 까닭이다. 우리가 마음이 나쁜 까닭으로써 웃는 것이 결코 아닌, 말하자면 인간 통유의 이러한 자연스러운 기쁨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인성 선악의 선천적 문제에까지 파고들어가야 비로소 해결될 수 있을 것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암만 도덕이 여기서 그렇지 않기를 명령하여도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이 비에 젖는 것을 보게 되면 어쩐지 자연히 유쾌하여지는 마음을 도저히 물리칠 수 없음을 어찌하랴! 비에 젖지 않을 수도 있는 경우에 비에 젖는 것이 실수인 것을 한번 긍정하여 보면, 이 실수를 실수로써 책하되 웃음으로써 임함은 차라리 더욱 아름다운 도덕이라 말할 수 있다. 비맞은 사람을 보고 일일이 슬퍼하는 것이 참된 윤리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것은 원래 처음부터 도덕이 감히 용훼할 수 없는 초도덕적 문제로서 인간의 예술감에 그 좋은 판단을 맡김이 더욱 온당치나 않을까 한다. 도덕이 어찌 되었든 여하간에 우리는 비를 찬미치 않을 수 없는 자이지만, 물론 또 우리는 다른 사람이 비의 피해를 입은 것을 보고 그것이 즐거운 오직 한 개의 이유로서만 비를 찬미하는 것은 아니다. 비는 비 자체로서도 항상 아름다운 것인 까닭이다. 춘우를 몸에 무릅쓰며 거리를 거니는 쾌감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말하였거니와, 사실 홍진만장인 건조한 대지가 신선한 비를 가질 때 지상의 어떠한 것이 과연 기쁨을 느끼지 않을 자이랴! 정직하게 말하면 비를 미워한다는 도회인도 비가 내리면 이 신선하기 짝이 없는 자연에 흔히 숙였던 우울한 얼굴을 드는 것이다. 윤습한 광휘 속에 그들의 안색이 쾌활해질 뿐이 아니라, 도회의 먼지 낀 가로수와 흔히 책상 위에 놓인 우리의 목마른 화원도 이 진귀한 하느님의 물을 떨며 마시며, 공원에서만 볼 수 있는 말라붙은 초원도 건조무미한 점에서 문득 눈을 뜨는 것이다. 참으로 모든 사람이 비를 자모의 천애한 손같이 여기는 것은 너무나 떳떳한 일이다. 다른 모든 것을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기 특히 염염한 하일에 경험하는 취우의 은택을 망각하여 버릴 수는 없다. 천하가 일시에 얼음 먹는 듯한 양미-이는 참으로 우리들 가난한 자에 허락될 유일한 피서적 기회이다. 이러한 기쁨이 만일에 평범한 것이라면, 우리는 비의 위대한 낭만주의를 얼마든지 사상에 구하여 흥취 깊은 예를 들어 말할 수가 있으나, 그것은 이 곳에서는 약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