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원의 글쓰기 교실 제17교시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병 아닌 병 - 삶의 즐거움과 진실을 간직하는 기행문 1. 역마살, 그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병 아닌 병 "당신의 아들딸이 귀하고 예쁘고 아름답다고 생각되면, 낯선 곳을 혼자서 여행하게 하라." 이 말은 아들딸을 정말로 참되게 키우려면 여행을 보내라는 뜻이다. 즉 여행을 통해서 참다운 삶이 무엇인가를 알아 차리게 하고, 또 홀로서기를 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이다. 이를 테면 여행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교육 방법이라는 것이다. 나는 나의 형체를 이루는 몸뚱이와 가슴속에 담겨 있는 마음과 머릿속에 들어있는 정신(혼)과 함께 평생을 살아왔다. 그런 만큼 내 몸 내 마음 내 정신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하루 24시간 가운데서 언제쯤 화장실에 가야 건강에 좋은지, 무슨 음식이 입에 잘 맞는지, 친구들 중에서 누가 가장 다정스럽고 편안한지, 머리는 어느 이발소에서 어떤 모양으로 깎는 것이 가장 나답게 되는지, 잠결에 콧구멍을 후비는 버릇은 아직도 남아 있는지 등등...... 그런데도 이따금 까닭없이 몸을 앓게 되거나 감기에 걸려 고통받는 수가 있다. 그럴때면 괜히 슬퍼지고 외로워지고 화가 나고 심술이 난다. 나로서도 나의 몸속, 이 변덕스런 심사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30년 가까이 소설을 써오는 동안, 그저 남의 이야기를 이렇게 저렇게 꾸며서 지껄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새로이 창조해 낸 등장인물들을 통해 어떤 사건인가를 독자들에게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것이 나와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어찌보면 그것은 모두 나의 이야기인 셈이다. 그 모든 것이 곧 나에 대한 탐구라 할 수 있으니까. 삶에대한 공부를 하고 또 하여도 확실하게 알아낼 수 없는 나 자신 -내 몸과 마음과 정신 -을 더욱 확실하게 알기 위하여 나는 그런 이야기 들을 풀어내며 살아간다고나 할까. 여행을 하는 것도 그와 같다. 언뜻 봐서는 낯선 곳을 떠돌아 다니며 새로운 풍물들을 살피고 신선한 감동을 받는데 그치는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도 결국은 미처 알지 못했던 나 자신의 또 다른 면을 알아내는(발견하고 탐구하는) 방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품이 아무리 따뜻하고 포근하다 해도 자꾸만 우리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한다. 드높은 하늘을 날고 싶고, 끝없이 넓은 풀밭을 달려가고 싶고, 출렁이는 바다를 건너가고 싶고, 낮선 거리를 하염없이 걸아 다니고 싶다. 비행기 여행, 기차 여행, 버스 여행, 도보여행, 그 어떤 것이든지 배낭 하나를 짊어지고 혼자서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낮선 포구와 바다, 외로운 섬을 정처 없이 떠돌고 싶고, 다른 나라의 도시와 농촌을 여행하고도 싶다. 그렇게 머릿속으로만 여행을 꿈꾸다가, 어느날 갑자기 우리는 실제로 짐을 꾸려 그런 곳들을 찾아 길을 떠난다. 이처럼 어디론가 떠돌고 싶어 환장할 것 같은 마음, 정말로 그렇게 떠돌아다니지 않으면 안되는 운명을 지닌 사람을 가리켜 흔히 역마살이 끼였다고 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다 그렇게 운명적으로 떠돌고 싶어하고, 또 떠돌게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김동리의 <역마>라는 소설은 바로 그러한 점을 잘 파헤친 작품이다. 2. 낯선 곳에서의 신선한 감동 혹은 새로운 자기 찾기. 여행을 하다보면, 차를 타고 보내는 시간들이 심심하고 지루하다고 옆사람과 가위바위보 묵찌빠 놀이를 하거나, 배낭에 넣어 가지고 온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있다. 또 다른 사람들의 입장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채 왁자하게 떠들며 화투 놀이나 카드 놀이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이러한 행동들은 매우 미련 스런 것이다. 그것은 마치 신선하고 맛있는 음식(여행)을 먹는 도중에, 사탕(책이나 놀이)을 입에 넣어 우물거림으로써 그 좋은 음식의 맛을 몽땅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하고 같으니까. 여행을 할 때는 여행 그 자체만을 즐겨야 한다. 여행 자체만으로도 넉넉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여행은 그 어떤 훌륭하고 고귀한 책을 통한 깨달음, 그 어떤 진기한 놀이를 통한 즐거움, 그 어떤 명상이나 사색을 통한 지혜보다 더 많은 영양소를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여행을 하는 사람은 지나가는 산과 들판, 또 그 곳에서 일하는 농부와 흘러가는 구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반짝 거리는 강물, 쏟아지는 햇살, 장대처럼 내리치는 빗줄기, 나비처럼 팔랑거리는 함박꽃 닮은 눈송이, 풀을 뜯고 있는 염소 들을 모두 눈여겨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낯선 거리나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 부두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짐을 싣고 부리는 노동자들, 고기잡이를 하거나 그물을 기우는 어부들, 야수에게 잡아벅히는 작은 동물들, 먹을 것을 찾아 이리저리 떠돌며 구걸을 하는 거지들, 시장 바닥에서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장사꾼 어머니의 자애로운 눈길들을 속속들이 살펴야 한다. 물론 그러한 것들 중에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장면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 하지만 그것들이 내 눈길을 잡아 끄는 것은 언제나 되풀이 되는 일상 생활 속에서는 쉽사리 맛볼 수 없었던 새로운 느낌과 감동을 전해 주기 때문이다. 어느 사이엔가 우리는 그 곳만이 지니고 있는 이색적인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에서 새로운 삶의 진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 떄껏 알지 못했던 나의 새로운 얼굴을 맞딱뜨리게 되기도 하고 말이다. 이렇듯 새로운 것은 반드시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나와 대상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 진다. 바로 그러한 것들, 곧 여행을 하던 중에 보고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감동받은 것을 자유롭게 기록하는 글을 기행문이라 한다. 3. 기행문을 어떻게 쓰나 그렇다면 기행문은 아무렇게나 써도 되는 것일까? 딱히 정해진 형식은 없지만, 기행문이라면 마땅히 갖추어야 할 요소들은 몇 가지 있다. 즉 여행하는 사람이 언제, 어디를 거쳐서 여행했는지를 일러주는 여정과 무엇을 보고 들었는가 하는 견문, 그리고 어떠한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꼈는가 하는 감상이 그것이다. 기행문에 여행문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으면 생생한 여행의 기록이 될 수 없으며. 언제 어디에서 어디까지 갔다는 여정만이 보이고 견문이 나타나 있지 않으면 단순하고 건조한 글이 되기 쉽다. 그리고 글쓴이의 독특한 감상이 나타나지 않은 글은 그 기행문만이 가지는 특유의 개성을 지니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이 세 가지 요소를 어떻게 해야 잘 담아 낼 수 있는지 한번 살펴보도록 할까? 첫째, 기행문은 별다른 형식이 없는 글이므로, 글을 쓰는 사람이 자신의 느낌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방식을 택하면 된다. 가령 매일의 생활을 기록하는 일기 형힉을 띠어도 좋고,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에게 띄우는 편지 형식을 취해도 좋다. 둘쨰, 글의 첫머리에는 여행을 떠나는 목적이나 동기, 상황, 날씨 같은 것을 쓴다. 그리고 독자의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길을 떠나는 사람의 기대나 흥분 따위를 담아 내어도 좋다. 셋째, 여정에 따른 견문과 감상을 구체적으로 적는다. 독자가 글쓴이와 더불어 여행에 동참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부분이다. 그러므로 어디어디를 여행했는지 여정이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쓰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독자들은 하릴없이 기행문을 쓰는 사람의 혀행길을 졸졸 쫓아 다니게 되는 셈이다. 그렇다고 모든 과정을 너무 친절하게 늘어놓아서 마치 여행 안내서 같은 분위기를 풍기게 되면, 독자들에게 쉬이 지루함을 안겨 주므로 주의해야 한다. 되도록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나를 발견하게 할 만큼 신선한 충격이나 감동을 안겨준 대상)을 중심으로 그려내야 한다. 넷째, 그 지방만이 가지는 색다른 특색을 담아 내는 것이 좋다. 그 지방에 전하는 신화나 전설 시 들을 살짝 곁들이는 것은 괜찮지만, 국사책에 나오는 문화재들을 고증이라도 하듯이 전문적으로 파고 드는 것은 독자들에게 짜증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다. 기행문은 역사적인 사건이나 문화재에 대해 해설하는 글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다섯째, 집을 떠나는 사람들이 으레 느끼게 되는 외로움과 쓸쓸함을 실어도 괜찮다. 사람은 어느 정도의 외로움과 슬픔을 맛보아야 진실해 질 수 있고, 또 아름다워 질 수 있으니까. 여섯째, 여행이 끝난 뒤의 성과에 대해 반성을 하고 앞날에 대한 각오를 다진다. 얘기로만 듣거나 책에서만 읽었던 곳을 실제로 가본 감회를 서술하는 것도 좋다. 물론 그 사이에 생겨나는 차이점을 비교해 보는것도 괜찮다. 말하자면 여기는 여행을 마무리 하는 대목이므로, 총체적으로 정리를 해야 한다고 보면 되겠다. 같은 시각에 같은 곳을 다녀와도 사람에 따라 받는 느낌은 각각 다르다. 그점을 잘 살려서 자신만이 느낀 독특한 감상을 적어야 독자로부터 진한 감동을 자아낼 수 있다. 4. 좁은 골목길에서 느끼는 삶의 진실 일상생활 속에서 늘 오갔던 좁은 골목길에서 느끼는 삶의 지실이 유난히 눈부신 글이 한 편 있다. 읽어보도록 하자. 나의 일상에서 가장 자주 지나치는 거리가있다. 좁은 골목을 지나고 레코드 가게를 지나, 육교를 통과하여 학교에 다다르는 곳 하지만 항상 등,하교길의 바쁜 보행으로 나는 거의 아무 생각 없이 3년동안 그 길을 지나쳐 왔고, 내일도 물론 그 곳을 (그렇게) 지날 것임을 알고 있다. 이 디귿 자 모양의 길은 나의 똑같은 일상이 반복됨을 말해주는 아주 단순하고도(단순한), 출발점에 서서도 그 도착점이 보이는 아주 재미없는 미로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모든 문명의 보호막에 가려져 초자연적인 두려움과 접해보지 못한 내 마음에 작은 돌로(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키고 싶은 충동을 느낄때가 있다. 내가 항상 지나는(지나치는) 이 똑같은 길을 이탈해, 전혀 가보지 못한 새로운 거리로 접어들었을 때(의 느낌), 또는 깜깜한 아프리카 초원 한가운데에서 나를 주시하고 있는 노란 광채를 띤 야수의 두 눈과 마주쳤을 때의 느낌이란(느낌은), 결코 성적이 좋지 않아 부모님을 뵙기 민망할 때의 그것과는 다른, (어쩌면) 최초의 인류 또한 느낄 수 있를법한 그런 두려움의 한 종류라고 생각한다(최초의 인류가 느꼈을 듯한 그런 두려움들과 한 종류가 아닐까). 내가 거리를 지날 때 종종 느끼고 싶은(느끼곤 하는) 이런 감정은 획일화 된 나의 일상에서의 탈피하고픈 바람이 빚어 낸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렌지색 간판으로 인해 태양빛으로는 연출할 수 없는 또 다른 느낌을 내뿜는 밤의 거리를 좋아하낟. 그 곳은 낮보다는 공기가 더 차갑고 신선한 느낌을 주며, 검은색 바탕은 안정된 느낌과 이국적인 색감을 창조한다. 밤거리를 걷고 있는 빠른 사람들의 흐름 속에 가만히 서 있어도 그들과 함께 어디론가 가고있는 듯한 나를 발견한다. 그것은 혼자 서 있다는 외로움이나 어색함이 아닌, 내가 걷고 있을떄 보다 더 신선하고 재미 있는 경험을 느끼게(하게) 한다. 매일 똑같은 일상을 복사하고 있는 그 곳에 까맣게 번진 잉크 자국은 보이지 않는 이탈을 추구하는 밤의 모습이다. 이 글의 지은이는 글을 너무 어렵게 쓰려는 버릇이 있는 듯 하다. 그 바람에 더러 투명하게 와 닿지 않는 문장들이 눈에 띄어서 몇 군데 고쳐 보았다. 하지만 이 글의 지은이는 사물을 대하는 생각이 놀라우리 만큼 깊어서, 앞으로 꾸준히 노력한다면 정말로 훌륭한 글을 쓸 수 있는 짜질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다음에는 <미륵사지 탑을 견학하고 나서>라는 제목의 기행문을 감상해 보자. 탑을 아주 충실하게 보고 난 뒤, 자기 나름의 느낌을 차분하게 진술하고 있다.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범 소풍을 미륵산으로 갔다. 미륵산은 익산 시에서 가까운 금마에 위치해 있고 누구나 다 가 본 산이라서 그곳에 있는 유적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점심을 먹고 산책이나 할 겸 돌아다니다가 미륵사지 탑을 보게 되었다. 그냥 있는 탑이려니 생각했던 미륵사지 탑이 갑자기 아름답게 보였다. 나도 모를게 탑 근처로 발을 옮기게 되었다. 석공들이 온갖 정성을 쏟아 부었던 흔적이 탑의 곳곳에 남아 있었다. 원래는 미륵사라는 절도 있었고 탑도 중앙에 3개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미륵사지 탑 한 개가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다. 마지막 남은 한 개의 탑마저도 벼락을 맞아서 한쪽 부분이 무너져 내렸고 간신히 시멘트로 메워 놓은 것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유적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니...... 게다가 주위에는 돌 조각이 그대로 쌓여 있었고, 표지판은 낡아서 (다시는) 와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탑의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여서 안타까웠다.옆에는 요즈음 새로 지은 탑이 있었다. 난 그 탑을 보기 위해 뛰어가서 탑의 여기 저기를 자세히 살펴 보았다. 그 탑은 3개의 탑 중의 한 개였는데, 부서지고 나서 다시 똑같이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도 이런 탑을 만들어서 백제의 문화를 알게 해 준 것이 고맙기만 했다. 돌아오는 길에 백제인이 만들었던 아름다운 탑을 그동안 업신여겼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혼과 정성을 불어 넣어 섬세하고도 부드러운 탑을 만들어, 삼국시대에 문화의 꽃을 피웠던 백제인의 후손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뿌듯해 졌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다시 와서 좀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다. 생각해 봅시다. 1. 사람들은 대개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홀연히 떠나고 싶어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듯 여행을 꿈꾸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행을 떠난 그 곳에는 무엇이 있어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끄는지 각자의 생각을 말해 보자. 2. 여행을 하던중에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감동 받은 것을 기록하는 글을 기행문이라 한다. 이러한 기행문이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소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자.
삼천지교(三遷之敎) /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를 가르치기 위해 집을 세 번이나 옮긴 일. 《出典》'列女傳' / '母儀傳' 전국시대, 유학자(儒學者)의 중심 인물로서 성인(聖人) 공자에 버금가는 아성(亞聖) 맹자는 공자처럼 생이지지(生而知之)했다고 추앙되지도 않았고, 태어나자마자 걸음을 걸으며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存)이라고 했다는 신화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스승이 유명한 분도 아니어서 증자(曾子)의 문인(門人)에게서 사숙(私淑)했다는 것을 보면, 기초는 스승에게서 배웠으나 그의 독특한 이론인 성선설(性善說), 사단설(四端說), 호연지기설(浩 然之氣說)은 다 그의 독학에서 얻은 독창적인 것이다. 맹자는 독학자였기에 노력과 의지 못지 않게 교육 환경이 중요했고, 이 교육 환경 조성을 위해 그의 어머니는 가난한 형편 임에도 불구하고 자식의 교육을 위해 세 번씩이나 이사를 한 것이다. 孟子의 어머니는 처음 묘지 근처에 살았는데 어린 맹자는 묘지 파는 흉내만 내며 놀았다. 그래서 교육상 좋지 않다고 생각한 맹자 어머니는 시장 근처로 이사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물건을 팔고 사는 장사꾼 흉내만 내는 것이었다. 이곳 역시 안 되겠다고 생각한 맹자 어머니는 서당 근처로 이사했다. 그러자 맹자는 제구(제구)를 늘어놓고 제사 지내는 흉내를 내고 놀았다. 서당에서는 유교에서 가장 중히 여기는 예절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맹자 어머니는 '이런 곳이야말로 자식을 기르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하며 비로소 만족했다. 【원 말】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유사어】현모지교(賢母之敎), 맹모단기지교(孟母斷機之敎)
Board 고사성어 2022.07.05 風文 R 874
우방과 동맹 우리가 살아가면서 친구, 벗, 동무들을 중요하게 여기듯이 국가도 가까운 나라가 있고 먼 나라가 있으며, 그저 무심히 지내는 나라가 있는 것 같다. 가깝게 느끼는 나라를 ‘우방’이라고 일컫는 것 같은데, 우리 경우는 워낙에 고된 냉전을 겪어서 그런지 우방이라 하면 군사적 동맹국을 떠올리게 된다. 오래된 벗에게는 서로를 맺어주는 공감대가 있고 또 공감대를 오래 유지시켜주는 ‘정서적 매개물’이 있다. 공통된 경험이라든지 취향이라든지 하는 것 말이다. 이와 달리 동업자나 동료라고 하면 함께 일하면서 이익을 취하는 관계다. 동맹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친구보다도 현실적으로는 훨씬 더 가깝지만 이해관계가 엷어지면 남남이 되기도 하고 가차없이 경쟁자가 되기도 한다. 세계화가 이루어지면서 국가 간에도 이런 동맹이나 경쟁이 더 격화될 것이다. 최근 일본과 갈등이 벌어지면서 한-일 관계를 우호국, 우방 같은 말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어색하기 짝이 없다. 최근 한 세기 남짓 동안의 여러 사정이 그런 단어 사용을 불편하게 만든 것 같다. 한국과 일본의 군사적 관계를 냉정히 표현한다면 미국을 매개로 한 ‘안보협력국’ 정도가 아닌가 한다. 벗과 같은 우방이라면서 이런 식으로 툭 건드려놓고 신경전만 벌이고, 또 그러다가 시치미 떼고 안보 전략과 정보는 공유하자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역사적으로 국가의 문제에서 진정한 ‘벗’은 있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국가 자체가 이익 추구의 산물이었던 만큼 국가에는 벗으로서의 우방이 아닌 잠정적으로 이익을 공유하는 동맹국만 있는 것이 정상이다. 그리고 그 동맹도 일정한 기간만 유효한 것이 정상일 것이다. 국제관계를 냉엄하게 돌아보는 정상적인 시각을 위해서라도 우방이라는 말을 너무 속 편하게 사용하지는 말았으면 한다. ………………………………………………………………………………………………… 손주 요즘은 명절이 다가오면 먹는 것, 교통편 등의 화제 못지않게 ‘말’에 대한 이야깃거리도 심심찮게 오간다. 젊은 세대가 손윗세대로부터 결혼이나 취업 이야기 듣기를 몹시 싫어한다든지, 여성의 인권과 관련된 도련님 같은 호칭이 타당한지 등 말이다. 그만큼 언어에 대한 감수성이 점점 예민해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성인들의 언어적 인권이 중요하듯이 어린이들을 이르는 말도 언어 감수성을 가지고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7~8년 전엔가 ‘손자’라는 말 외에 ‘손주’라는 말도 표준어로 인정을 받았다. 원래 ‘손주’는 ‘손자’라는 말의 비표준형으로 생각되어서 표준어에 포함되지 않았으나 실제 언어생활에서 ‘손자’는 자녀의 아들만을 가리키는 데 반해 ‘손주’는 자녀의 아들딸 모두를 가리킨다는 지적을 수용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원래의 표준형 ‘손자’는 마치 가부장적인 단어처럼, 뒤늦게 인정받은 ‘손주’는 마치 성 평등을 암시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어떻든 앞으로는 되도록 ‘손주’라는 말을 써서 성별에 대한 여러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워졌으면 한다. 그러나 이렇게 단어 하나 정리한다고 해서 저절로 성 평등 사회에 다가서는 것은 아니다. 의식적인 실천이 필요할 것이다. 보통 첫 손주가 남자아이면 ‘우리 집 장손입니다’ 하며 자랑스러워한다. 앞으로는 여자아이가 맏이로 태어났을 때도 마찬가지로 표현을 하면 어떨까? 이제는 굳이 남자만 장손이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도 없다. 또 요즘의 ‘장손’이라는 표현은 일종의 추어주는 말일 뿐 이렇다 할 실익이 없는 예우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족 내부에서부터 남성과 여성을 평등하게 대하는 기풍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수사적으로 사용해봄직하다. 낡은 전통에서 해방되려면 분명한 ‘의식’과 ‘의지’를 천명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한승원의 글쓰기 교실 제16교시 - 눈 화장을 가장 예쁘게 하는 법 - 독후감은 책에 대한 느낌이나 생각을 잘 전달해야 한다. 1. 입안에 돋아나는 가시 우리가 잘 아는 안중근 의사는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어느 날인가 나는 택시를 타고 볼일을 보러 가다가, 입안에 정말로 가시가 돋혀 있는 사람을 하나 보았다. 교통이 복잡한 네거리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던 자동차들이 멈칫 거리면서 거북이처럼 느리게 나아가고 있었다. 그 때, 한 승용차가 내가 탄 택시 앞으로 끼여 들었다. 그러자 내가 탄 택시의 운전 기사는 그 승용차 운전자를 향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퍼 부어 댔다. 증오와 저주가 어려있는 그런 험악한 말을 가리켜 사람들은 혹시 '가시가 돋혀 있는 말'이라 하지 않을까? 그러한 말을 거침없이 지껄여 대는 사람들의 입 안에 가시가 돋혀 있다 하고...... 또 언젠가는 친지의 집을 방문하러 가다가, 그 집으로 접어드는 골목길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장면을 하나 목격했다. 반바지에 운동 모자를 쓰고 테니스 라켓을 어깨에 걸어맨 젊은 어머니가 어린 딸을 꾸짖고 있는 것이었다. "울긴 왜 울어! 뚝! 잠자다가 깨어나면 먹으라고 요구르트랑 과자랑 과일이랑 식탁 위에 놔 두었 잖아? 심심하면 읽으라고 그림동화 책도 펼쳐 놓구...... 그런데 왜 땅바닥에 주저앉아 이렇게 울고 있는 거야, 응?" 아마도 어린딸이 낮잠을 자다 깨어나 보니,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린딸은 매우 놀라, 울면서 어머니를 찾아 밖으로 나왔던 것 같다. 하지만 어머니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두려움에 빠진 어린 딸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서럽게 울며 발길질을 해 댔을 터였다. 젊은 어머니는 그런 딸의 심정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어린 딸의 흙 묻은 엉덩이를 보고는, 짜증기 어린 목소리로 욕설까지 마구 퍼 부었으니까. 대관절 누구를 닮았기에 이러느냐고 숫제 악다구니까지 썼다. 그 젊은 어머니의 입 안에도 가시가 돋혀 있는 게 틀림 없는 듯 하다. 입안에 가시가 돋혀 있는 사람들은 비단 그들뿐만이 아니다. 기차나 비행기를 타고 먼 곳으로 여행을 하거나, 신선한 공기를 들이 마시기 위해 산에 올랐을때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들들 종종 만나곤 하니까. 가령 끼리끼리 모여 앉아 화투놀이를 하는 경우 말이다. 산에 오른 부부가 아기를 잠재워 놓은 뒤, 함께 온 사람들과 어울려 화투를 치는데만 여념이 없는 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참으로 가관이라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해외 여행을 하기 위해 탑승한 비행기 안에서 화투판을 벌이기도 한다. 음식점이나 공원 또 해수욕장 근처의 텐트 안 같은데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사람들의 입 안에도 가시가 돋혀 있지 않을까? 책을 많이 읽고 사색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저속한 언어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책에는 인격이 살아 숨쉬기 때문에, 그들의 입 안에는 가시가 돋히지 않는다는 뜻이다. 책을 읽는 사람에게는 그 인격이 저절로 흡수되므로. 책을 통해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책을 가리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들을 모아놓은 창고라고들 한다. 우리는 가끔 보물을 얻기 위해 평생동안 보물섬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하지만 보물은 저 멀리 외딴 섬에 있는 게 아니다. 바로 내 가까이의 책 속에 가득히 숨어 있다. 2. 가장 지성적이고 아름다운 눈 화장을 위하여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기를 돋보이게 하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값비싼 옷을 입으려 하고, 머리 모양을 예쁘게 만들려 하고, 근사한 신발을 신으려 하고, 귀와 목과 손에 보석 장식을 하려고 한다. 어디 그뿐인가? 멀쩡한 이를 뽑아내고 새 이를 해 넣기도 하고, 얼굴빛을 알아보기 어렵도록 두텁게 화장을 하기도 하고, 짧은 눈썹위에 기다란 가짜 눈썹을 갖다 붙이기도 한다. 납작한코를 드높이 세우기도 하고, 밖으로 휘어진 주걱턱을 부르럽게 다듬기도 하고, 눈 밑의 주름살을 당겨서 팽팽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렇듯 사람의 외모는 어느정도 마음대로 치장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딱 하나 치장이 불가능한 곳이 있다. 그것은 바로 까만 눈동자 이다. 초롱초롱한 눈빛 지성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눈동자는 아무리 욕심을 내 보고 애를 써 보아도 마음대로 치장을 할 수가 없다. 그 사람의 눈동자는 그 사람의 마음과 지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즉 무식한 사람의 눈빛에서는 무식함이 그대로 나타나고, 지적인 사람의 눈빛에는 그 지식과 지혜가 드러난다는 말이다. 제아무리 눈썹을 길고 아름답게, 또 눈 가장자리의 주름살을 매끄럽게 펴 보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렇다고 지혜가 넘쳐나는 지성적인 눈동자를 갖기 위해, 안과에서 안구 수술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눈동자에 지혜의 빛이 나게 하기 위해서는 꼭 한가지 방법밖에는 없다. 책을 읽는 것이다. 책속에는 선인들의 지혜가 있고 아름다운 마음씨와 착한 삶들이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 그 모든 것들을 눈동자가 함빡 빨아들이게 된다. 3. 독후감은 어떻게 쓰나. 누구나 책을 읽고 나면, 그 책에 대한 느낌과 생각이 있게 마련이다. 독후감은 바로 그 느낌과 생각을 적은 글이다. 독후감에는 특별한 형식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자기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적으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보다 알찬 독후감을 쓰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순서를 따를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첫째, 책의 제목과 지은이의 이름을 밝힌다. 그러고 나서, 지은이의 생애나 사상을 간단히 덧붙이는 것이 좋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지은이가 그 책을 쓰게 된 배경이나 의도 따위를 적어도 괜찮다. 둘째, 그 책을 선택하게 된 동기나 읽게 된 배경을 적는다.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집어들었다든가, 아버지나 친구로부터 선물을 받았다든가, 아니면 누구의 소개로 읽게 되었다는가...... 셋째, 그 책이 담고 있는 줄거리를 쓴다. 줄거리가 너무 길면 지루한 느낌을 주므로, 간결하면서도 친절하게 적는 것이 좋다. 넷째, 그 책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적는다. 이것은 독후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므로, 전체 내용 중에서 제일 많은 분량을 차지하게 된다. 우선 그 책이 풍기는 이미지나 전체적인 분위기를 말한 다음, 그 책이 가지고 있는 특징들을 하나하나 짚어 나간다. 가령 감동적이거나 인상적이었던 부분, 또는 그 책이 독자들에게 주려고 한 진리나 가치관 등...... 만일 책의 주제가 자기의 생각과 많은 차이가 있을 때에는, 그 주제와 자신의 생각을 비교하여 그 차이점을 명확하게 기술하는 것도 좋다. 타당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면 지은이의 생각에 비판을 가하는 것도 무방하다.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정독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속독은 절대로 금물이다. 속독을 하게 되면 그 책을 읽었다는 지적 허영심만을 가슴속에 심어 놓을 뿐, 그 책이 우리에게 전해줄 수 있는 삶의 양분들은 하나도 건져 낼 수가 없다. 오히려 겉멋만 들게 하는 해독만 남긴다. 그러므로 책은 처음부터 찬찬히 읽어 나가는 것이 좋다. 어떤 부분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을 땐 다시 차근차근 읽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하여 그 책이 독자들에게 전하려고 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 내용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정리 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그 책에 대한 자기 느낌과 생각을 정리하는 데 형식에 구애 될 필요는 없다. 메모나 일기, 편지 등 어느 것이든 자기의 생각과 느낌을 가장 잘 전할 수 있는 형식이면 된다. (1)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슬픈 삶을 살아가는 것은 연어가 아닐 듯 싶다. 연어의 삶에는 죽음과 탄생이 함께 있으니까 말이다. 연어가 알을 낳을때가 되면,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되돌아가려는 성질을 가지고있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알을 낳고나면 목숨을 잃고 만다는 것도...... 그러고 보면, 연어의 자식 사랑만큼 지극한 것도 찾아보기 힘들 것 같다. 결국은 자신의 목숨과 새끼의 생명을 맞바꾸는 셈이니까. 이러한 연어의 이야기를 그림처럼 곱게 그려 낸 책이 한 권 있다. 바로 시인 안도현이 지은 <연어> 이다. 이 책에는 '연어'의 삶이 들어 있다. '연어'가 풍겨내는 이미지처럼 맑고 투명한 이야기 들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연어들이 그렇듯이, 이 책의 주인공 은빛얀어도 알을 낳기 위해 북태평양 베링 해에서 자신이 태어난 초록강을 찾아 긴 여행을 한다. 말하자면 이 책은 은빛연어가 초록강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는 셈이다. 자신을 대신해서 목숨을 잃은 누나 연어, 연어를 낚아채는 무서운 물수리, 마음의 눈을 읽을 줄 아는 맑은눈연어, 자기 아닌 다른 것들의 배경만으로도 만족하는 초록강, 사나운 물줄기를 후려치는 폭포, 깨끗한 마음을 가진 어린 인간...... 즉 은빛연어가 이들을 만나면서 어른으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날씨가 후끈해서인지 자꾸만 게을러지는 이즈음, 알을 낳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들의 삶을 한 번쯤 엿보는 건 어떨까? 내가 무심히 흘려 보냈던 하루하루들이 새삼 소중하게 와 닿는 것을 느낄 수 있으리라. -박창희의 <연어를 읽고>에서 (2) 전후의 목표없이 방황하는 불안한 상황을 그릐 실존적 수법으로 가장 명확하게 진단하여, 부조리의 세계라는 하나의 방향을 현대인에게 제시 하였다는 공로를 인정 받아 1957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프랑스의 현대작가 카뮈는 <시지프의 신화>에서 전후 세계의 정신적 분위기를 부조리와 자살이라는 말로 훌륭하게 요약하였다. 언덕위로 커다란 바위를 밀어 올리는 고된 작업을 성실하게 계속하고자 하는 '시지프'의 모습을 보여주눈 이책이야 말로 고민하는 우리 현대인 들에게 새로운 인생의 지혜를 주고, 신도 예언자도 없는 세기의 후반기에 지표없이 헤매는 이방인들을 위하여 새로운 신화를 창조해 놓았다. 부조리란 단적으로 말하면 일상의 모든 행위의 메커니즘과 뭇 관습의 노예 상태를 벗어나 자기의 의식을 다시 찾는 인간의 이 세계에 대한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조리성은 무엇보다도 먼저 절연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것은 통일을 향한 인간의 갈망과 정신 및 자연의 어쩔 수 없는 이원론 사이의 절연이며, 영원을 지향하는 인간의 비약과 인간 생존의 유한적 성격 사이의 절연인 것이다. (......) 시지프는 험준한 산봉우리로 커다란 바위를 밀어 올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산봉우리에 이르면 그 바위는 다시 산 밑으로 굴러 떨어진다. 이 무한한 고통의 길을 반복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지프, 그러나 절망하지 않고 이 험준한 길을 고통을 무릅쓰고 반복하는 시지프, 카뮈는 이러한 시지프의 험로를 신을 잃은 세기의 인간에게 새로운 하나의 신화로서 제창하는 것이다. -문영인의 <현대의 이방인을 위한 새 신화>중에서 4. 책을 읽는다는 것은 지은이와 직접 만나는 것. 길을 가다가 이슬 맺힌 풀잎하나 꽃 한 송이를 보는 것,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파랑새 한 마리를 보는 것,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 한 장을 보는 것은, 그 사람이 그것들 하나하나의 세계와 만나는 것이다. 만난다는 것은 나와 대상, 그 두 세계가 어우러 진다는 것이고, 어우러 진다는 것은 두 세계가 서로에게서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뜻이다. 이처럼 사람은 주위의 모든 사물들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하면서 성장해 나간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책의지은이가 가꾸고 있는 심오한 세계와 만난다는 것이다. 소설 한 편을 읽을 때, 우리는 기껏 줄거리나 주제를 파악하고는 소설 읽기를 끝낸 것으로 여길 때가 많다. 그러고 나선 그 소설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하는 아는 체를 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올바른 책 읽기라고 할 수가 없다. 우리는 소설을 읽으며, 그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을 만난다. 그리하여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그 등장 인물들의 슬프고 절막한 심정을 속속들이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그들의 행동이 단지 책속에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사이엔가 내 속으로까지 번져 오는 것이 느껴진다. 그래서 그들이 펼치고 있는 행동이나 세계가 긍정적인 것인지 부정적인 것인지, 정당한 것인지 부당한 것인지 하는 것까지도 우리 자신의 일처럼 절실히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절실한 마음으로 책을 다 읽은 다음에는 눈을 감고 고요히 명상에 잠겨 보라. 바야흐로 그 소설의 지은이와 속 깊이 만나 보라는 것이다. 지은이는 왜 이 소설을 썼는지, 이 소설을 통해서 독자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어 했는지, 지은이는 어떠한 인생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지, 지은이는 이 세상을 왜 살고 있으며, 또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진실된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이렇게 지은이와 만난다음에는 다시 나 자신에게로 돌아오라 이제는 나 자신과 맞닥뜨릴 차례이다. 이 소설의 내용에 비추어 볼 떄, 혹은 이 소설을 쓴 사람의 생각에 대입해 볼 때, 나는 어떠한 사람인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에대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5. 희망을 주는 사람 자, 그러면 독자가 보내온 독후감 한 편을 함께 읽어 보도록 하자. 나는 단편 소설에 관심이 많다. 한 달에 두편 이상은 꼭 읽는다. 일요일 오후면 나는 저녁을 먹고 반드시 단편 소설 한 편씩을 읽곤 한다. 내가 읽은 <운수좋은날>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줄거리는 대충 이러하다. 인력거꾼인 김 첨지는 아주 가난한데다가 부인까지 앓고 있다. 어느날 인력거 탈 손님이 아주 많아 돈을 꽤 많이 벌게 되었다. 김첨지는 모처럼 부인이 먹고 싶다고 말한 설렁탕 한 그릇을 사 들고 집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부인은 죽고 어린아이만 울고 있다. 내가 읽은 다른 단편 소설들도 이렇듯 좋지 않게 끝이 난 것들이 있어 기분이 언짢은 적이 많았다. 김 첨지 부인이 약을 제대로 먹고 치료를 받았어도 죽어 갔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리고 김 첨지가 한 이런 말이 생각난다. "병이란 놈은 약을 줘 보내면 재미가 들려서 또 온다." 이런 말에서 김 첨지를 비롯한 옛날 사람들의 무식함을 알 수 있다. 김 첨지는 불쌍하다. 부인없이 어린아이를 데리고 생활할 생각을 하면 앞이 깜깜할 것이다. 앞으로 단편 소설을 더 많이 읽고 배워서 언젠가는 나도 멋있는 단편 소설을 써 보겠다. 웬일인지 이 독후감을 다 읽고 나니까, 무언가 덜 채워진 듯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느낌이 든다. 무엇이 빠져 있어서 그럴까? 아마도 이 글의 지은이는 <운수 좋은 날>을 읽으면서, 현진건이란 작가가 왜 이 작품을 썼을까 하는 점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 같다. 한 인력거 꾼의 운수 좋은 하루가 비극적인 결말로 맺어지는 구성을 통해, 작가가 독자들에게 하고 싶어했던 말을 제대로 캐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지은이는 이 작품을 읽은 자신의 느낌을 매우 착실하게 진술했기 때문에 그 점에서 높이 살 만 하다. 앞으로 많은 책들을 읽고, 그 작품이 전하려는 것에 대해 좀더 깊이 생각해 본다면, 반드시 좋은 독후감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 이젠 책을 가까이 하도록 하자 스스로의 인격 수양을 위하여, 지적이고 예쁜 눈 화장을 위하여. 생각해 봅시다. 1. 책을 읽고 나면 누구나 그 책에 대한 느낌과 생각이 있게 마련이다. 이것을 글로 옮겨 놓은 것을 독후감이라 하는데, 독후감을 잘 쓰기 위해서는 어떤 순서를 따르는 것이 좋은지 적어 보자. 2. 책을 읽는다는 것은 지은이와 직접 만난다는 것이다. 그로 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말해 보자.
삼고초려(三顧草廬) / 중국 삼국시대에 유비가 제갈량의 초려(草廬)를 세 번이나 찾아서 마침내 그를 군사(軍師)로 삼은 일. 《出典》'三國志' 蜀志 諸葛亮傳 후한(후한) 말엽, 유비(劉備)는 관우(關羽), 장비(張飛)와 의형제를 맺고 한실(漢室) 부흥을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군기를 잡고 계책을 세워 전군(全軍)을 통솔할 군사(軍 師)가 없어 늘 조조군(曹操軍)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다. 어느날 유비가 은사(隱士)인 사마휘(司馬徽)에게 군사(軍師)를 천거해 달라고 청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복룡(伏龍)이나 봉추(鳳雛) 중 한 사람만 얻으시오." "대체 복룡은 누구고 봉추는 누구입니까?" 그러자 사마휘는 말을 흐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 후 제갈량(諸葛亮 : 字는 孔明, 181-234)이 복룡인 것을 안 유비는 즉시 수레에 예물을 싣고 양양(襄陽) 땅에 있는 제갈량의 초가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제갈량은 집에 없었다. 며칠 후 또 찾아갔으나 역시 출타하고 없었다. "전번에 다시 오겠다고 했는데…, 이거 너무 무례하지 않습니까? 듣자니 그 자는 아직 나이도 젊은 새파란 애숭이라던데…." "그까짓 제갈공명이 뭔데. 형님, 이젠 다시 찾아오지 마십시다." 마침내 수행했던 관우와 장비의 불평이 터지고 말았다. "다음엔 너희들은 따라오지 말아라." 관우와 장비가 극구 만류하는데도 유비는 단념하지 않고 세 번째 방문길에 나섰다. 그 열의에 감동한 제갈량은 마침내 유비의 군사(軍師)가 되어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조조의 100만 대군을 격파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유비는 그 후 제갈량의 헌책에 따라 위(魏)나라의 조조, 오(吳)나라의 손권(孫權)과 더불어 천하를 삼분(三分)하고 한실(漢室)의 맥을 잇는 촉한(蜀漢)을 세워 皇帝를 일컬었으며, 지략과 식견이 뛰어나고 충의심이 강한 제갈량은 재상이 되어 후주(後主) 유선 때까지 2조(二朝)를 섬겨 후세 충신의 표상이 되었다. 【동의어】초려삼고(草廬三顧), 삼고지례(三顧之禮) 【유사어】삼고지우(三顧知遇)
Board 고사성어 2022.07.01 風文 R 779
쌤 낡은 사회를 개혁해서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일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취지는 좋으나 방법이 서툰 탓일 수도 있고, 주도세력이 너무 성급하게 군 탓일 수도 있다. 서울시교육청이 ‘조직문화 혁신방안’을 마련했는데 언어와 연관되는 것이 ‘수평적 호칭제’라는 것이다. 서열이나 차별이 없는 평등한 호칭을 사용해보자는 좋은 취지로 보인다. 처음에는 교사와 학생 간에 같이 별명도 사용하며 수평적 호칭을 쓰자는 제안으로 알려져 비판이 쏟아졌다. 그러나 이것이 교사들 사이 혹은 교사들과 행정부처 사이의 호칭을 수평화하자는 것이라면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리의 호칭 체계가 사회 구석구석 권위의식과 차별의식을 뻗어나가게 하는 넝쿨 손이 되어버린 만큼 교육계가 시범을 보이자는 뜻은 획기적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무척 서툴렀다. 교사들 사이에서는 이미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범용화되어 있는 것 같다. 거기에다 권위적으로 보이는 ‘장학관님’이라든지 선생님이란 말 앞에 ‘직위’를 붙이는 호칭을 삼가도록 하는 ‘공공용어 개선’을 추진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을 것 같다. 여기에다가 일종의 통속어인 ‘쌤’ 같은 말을 예로 든 것은 어처구니없는 패착이었다. 통속어는 규범적 언어도 아니지만 금기어도 아니다. 서로 마음이 통하면 쓸 수도 있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말을 ‘공문서’에 문서화했다는 것은 감성적 언어를 참 무신경하게 다룬 것이다. 종종 졸업생들이 스승의 날에 다정한 편지를 쓰면서 사용하기도 하는 이 단어를 이제는 함부로 입 밖에 꺼내기도 어렵게 만들었다. 교육감의 말처럼 교사들을 중심으로 수평적 호칭을 사용하도록 노력하고 교사와 학생 사이는 다정한 호칭을 쓸 수 있는 기본 환경부터 조성해야 한다. 감성적 언어를 공문서를 통해 하명하려고 했다는 그 발상 자체가 너무 답답하다. ………………………………………………………………………………………………… 일부러 틀린 말 대개 잘못된 말이 눈에 띄면 샅샅이 잡아내서 고쳐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들 한다. 마치 교문에 서서 등교하는 학생들 옷차림을 바로잡아주던 ‘규율부’나 ‘학생지도교사’ 같은 기분으로 규찰하려는 것이다. 국어를 반드시 바르게 사용해야 한다는 의식의 산물이다. 국어를 그렇게 긴장된 마음으로 볼 수도 있지만 언어란 본래 장난, 유희, 희롱의 기능도 있다. 또 더 나아가 비판과 조롱, 풍자까지도 가능하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면 맞춤법이니 표준어니 하는 것이 오히려 불편하거나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국해우원’이나 ‘국개의원’이라는 표기는 단순히 ‘틀린 맞춤법’이 아니다. 의도적으로 비튼 것이다. 그리고 조롱하려는 의도도 보인다. ‘궁민’도 마치 ‘궁색한 국민’이라는 자조가 느껴진다. 의미의 확장보다는 거친 의미를 장난처럼 가볍게 만드는 경우도 눈에 띈다. 원래는 불쾌한 욕인데도 ‘넘’과 ‘뇬’으로 비틀면서 본래 의미를 살짝 스쳐 지나간다. 비슷한 방식으로 맥락을 가볍게 만드는 ‘감솨’도 자주 쓰인다. ‘했지?’라는 모범생 같은 질문을 ‘했쥐?’ 하며 친근감을 장난스레 표하기도 한다. 그런 감각을 가져야 ‘말아톤’이나 ‘반창꼬’ 같은 영화 제목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컴퓨터 탓이기도 하고 그 덕이기도 하다. 지난날에 가까운 사람들끼리 낄낄거리며 소곤대던 말이 실시간으로 공유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언어는 목적만을 위해서 변화하지는 않는다. 그 수단과 도구의 질감 때문에 변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실수로 저지른 오류는 바로잡아야겠지만 의도적인 오류는 해석을 잘해야 한다. 오류도 그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그 해석의 옳고 그름을 논하기는 어렵다. 그저 느낌, 그리고 더 나아가 공감일 뿐이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현대소설용어사전 ● 미메시스(mimesis)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문학의 본질을 설명하는 핵심적인 개념으로 사용된 이 말은 흔히 재현(representation), 또는 모방(imitation)이라는 뜻으로 번역되는데, 이는 문학은 결국 흉내내기의 결과라는 생각을 담고 있다. 그런데 양자의 견해는 달라서, 플라톤은 문학이 사물의 본질을 규명하려 하지 않고 헛되게 모방만 하는 것이라 하여 이상적인 사회 건설을 위해서는 시인을 몰아내야 한다고 보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이 모방하는 것은 보여지는 사물 자체가 아니라 그 사물의 배후에 숨겨진 보편적인 원리라고 주장한다. 즉, 문학은 '가치 있는 것'에 대한 모방 행위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강조한다. 이후의 서양 문학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동조했으나, 개성과 상상력을 중시하는 낭만주의 시대에 와서는 설득력을 잃고 만다. 그러나 개성과 상상력도 사회적 경험에 뿌리를 두지 않으면 무의미하다는 사실주의 문학관이 대두하면서 미메시스-모방 이론은 다시 영향력을 회복한다. <바> ● 반(反) 소설(anti-roman) 소설의 전통적인 규범에서 벗어나 있는 소설들로, 독자들이 소설에서 기대하는 사실주의나 자연주의의 효과, 즉 소설이 현실을 충실히 재현함으로써 독자에게 논리적이며 정돈된 대리적 체험을 제공한다는 환상을 심어 주려 하지 않는 작품들을 말한다. 주요 특징으로는 플롯의 부재, 산만한 에피소드, 최소한의 성격적 전개, 대상의 표면에 대한 세부적 분석, 많은 반복, 어휘나 구두법, 문장의 다양한 변주 등을 꼽을 수 있으며, 이 밖에도 무수한 실험성이 포함된다. 대표적으로는 나탈리 싸로트나 로브그리예 등의 누보 로망 계열과 우리 나라의 경우, 이인성의 '한없이 낮은 숨결로' 등이 있다. ● 반어(irony) 겉으로 나타난 말과 실질적인 의미 사이에 상반(相反) 관계가 있는 말을 뜻한다. 기교로서는 어떤 말의 뜻과 반대되는 뜻으로 문장의 의미를 강하게 전달하는 것을 이른다. ● 반전(反轉) 사건의 흐름이 전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급전 직하하여 독자를 놀라게 하며, 아울러 주제를 강조하는 기법이다. ● 발견으로서의 기법 '발견으로서의 기법'은 1948년 마크 쇼러에 의해 발표되었던 비평문의 제목으로, 신비평의 요체라고 할 수 있는 형식과 내용의 불가분리성을 언급한 것이다. 그는 성취된 내용 혹은 예술과 작품화되지 않은 내용 혹은 경험 사이의 차이는 명확한 것이라고 하며, 문학에 있어서 진정 중요한 것은 작품 속에 '형상화된 경험'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이러한 형상화된 경험과 형상화되지 않은 경험의 차이를 근본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기법이며, 기법은 소재와 주제를 한정하고 발견하는 근본 요인이라고 생각했다. 마크 쇼러의 '발견으로서의 기법'은 결국 기법만이 예술을 객관화할 수 있다는 하나의 명제로 축약될 수 있다. ● 발단 발단은 소서의 구성 단계 중 처음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여기에서는 보통 등장 인물이 소개되거나 배경 및 기본 상황이 설정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발단에서는 인물들의 기본적인 성격과 사건의 전개가 암시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계속 작품을 읽어 가게 하는 흥미를 유발시킨다. 발단 부분은 대개 배경 묘사로 시작되는 것, 인물의 성격 제시로 시작되는 것, 인물의 행동 제시로 시작되는 것 등으로 유형화할 수 있는데, 선우휘의 '불꽃', 정한숙의 '고가' 등은 첫 번째 유형에 해당하며, 김유정의 '봄.봄'이나 김동인의 '감자' 등은 두 번째 유형에 속하고, 현대 소설에 올수록 직접적으로 인물의 행동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현대 소설에서는 전통적 개념의 발단을 무시하고 소설의 절정이나 갈등의 단계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경우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 배경(setting) 한 편의 서사물에서 이야기의 성분을 구성하는 공간적, 시간적 상황을 가리킨다. 배경은 이야기를 구성하는 필수적인 자질일뿐더러 이야기의 심미적 양상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건이라고 할 수 있다. 배경은 가시적인 상상의 공간을 독자에게 제시함으로써 작품의 의미를 확대하거나 심화시키기도 한다. 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눈'이나 '노인과 바다'는 배경이 소설 자체이다시피 하며, 김승옥의 '무진 기행', 황순원의 '소나기' 등에서 배경은 작품의 미적 기능을 담당한다. 그 외에도 이상의 '날개'에서의 방의 구조나 이외수의 '장수하늘소'에서의 산의 의미 등은 소설의 진행에 밀접하게 연결된 배경으로 드러나고 있고, 포우의 '검은 고양이'에서의 지하실, '어셔가의 몰락'에서의 붕괴 직전의 성채와 실내 등은 작품을 더욱 심미적으로 이끌면서 적극적으로 작품의 내용과 관련을 맺고 있다. 브룩스와 워런의 '소설의 이해'에서는 배경이 인물과 행동의 신빙성을 높이고, 인물의 심리적 동향과 이야기의 의미를 암시하고, 분위기의 조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 병리 소설 현대 소설에는 신체나 정신이 건강하지 못한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의 삶에 내재되어 있는 비정상성 내지는 불합리성에 대한 증폭된 관심의 결과인데 병리 현상에 대한 관심은 정상과 이성의 원칙에서 벗어나 있는 인간의 성격과 행동을 투시함으로써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이상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일제 시대에 박태원과 이상이 병든 일상의 세계에 주목하였으며, 60년대 이후에는 정치적.사회적 삶의 황폐함으로부터 소설의 소재를 얻게 된다. 강용준의 '광인 일기', 서정인의 '후송', 이청준의 '활홀한 실종' 등이 대표적이다. ● 복선(伏線, foreshadowing) 앞으로 다가올 상황에 대한 암시를 뜻하는 것으로서 다가옥 사건들이 미리 그 전조(前兆)를 드리우는 방식으로, 서사적 흐름이 진행되는 이야기적 장치를 말한다. 복선은 보통 예시적인 주변 사건들을 활용함으로써 이루어지며 인물이나 배경 등에 의해 유추된 추론의 형태, 즉 그러한 요소들이 계속되는 사건의 진행을 투사하는 형태를 취한다. ● 본격 소설 이 용어는 장르 개념이 아니며, 다만 소설을 가치에 의해 평가하고자 하는 의도가 반영된 가치론적 의미이다. 본격 소설은 오락 소설이나 목적 우선적인 프로파간다 소설이나 통속 소설과는 다른 '순수 소설'을 의미하는 말로 정착되어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김동리가 주로 이 용어를 사용해 프로파간다 소설을 비판했다. ● 부조리 문학 인간은 근본적으로, 그리고 근원적으로 부조리하다는 인식을 표현하고 있는 문학들을 말하는데, 이는 전통적 문화 및 문학의 신념과 가치 체계에 대한 하나의 반항으로 2차 대전 이후에 나타났고,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 등 전위적 예술 유파의 형식 실험에서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이 용어를 최초로 문학에 도입하고 유행시킨 사람은 알베르 카뮈이다.그는 '시지프스의 신화'를 통해서 인간이 태어나는 것 자체가 그의 선택에서 기인하지 않은 모순된 것이므로 존재와 삶 자체도 부조리하다는 인식, 즉 하나의 개인은 이유 없이 낯선 우주에 던져진 존재이며, 우주는 아무런 내재적인 진리나 가치와 의미를 지니지 않고 인간의 삶은 무(無)에서 왔다가 무(無)로 돌아가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중점적으로 강조했다. 부조리 문학이 다루는 중심 주제는 삶과 죽음, 고립과 소외 의식, 의사 전달의 문제 등 비교적 좁은 범위에 한정되어 있다. 대표적 작품으로는 카뮈의 '이방인', '칼리굴라', '오해'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 등이 대표적이다. ● 분단 소설 남북 분단에 대한 역사적 인식을 바탕으로 해서 씌어진 소설이나 혹은 분단의 상황이 잘 드러나 있는 소설, 즉 남북 분단의 원인과 고착화 과정, 그리고 이것이 오늘의 삶에 미치는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다룬 소설을 가리킨다. 80년대 이전까지는 '6.25 소설' 혹은 '전쟁 소설'이라는 용어가 많이 쓰였으나, 그러한 용어가 단지 전쟁이라는 현상에만 시선이 고정되는 것일 뿐, 포괄적이지 못하다는 이유에서 분단 소설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분단 소설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바라볼 수 있는데, 그 하나는 분단을 소재로 한 작품이나 혹은 분단 상황이 잘 드러나 있는 소설로 보는 태도와 분단 상황에 대한 역사적 인식을 가지고 접근하여 그것의 극복을 위해 씌어진 소설로 보는 입장이 그것이다. 80년대에는 이데올로기적인 접근과 분단의 외재적.내재적 원인 등에 대한 접근이 시도되었다. 분단에 대한 인식은 우리 소설사에서 가장 폭 넓은 작품을 산출하고 있는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대표작으로 채만식의 '소년은 자란다', 선우휘의 '불꽃', 조정래의 '태백산맥', 임철우의 '아버지의 땅', 김하기의 '노역장 이야기' 등을 들 수 있다. ● 분위기 한 작품을 일관하는 특징적인 인상 혹은 그 작품을 전체적으로 압도하는 지배적인 정서를 가리키는 말로 일반적으로 기저에 깔리는 배경적 자질이다. 고즈넉하고 전원적인 분위기는 그러한 분위기에 맞는 공간적 배경에 의해서, 분망(奔忙)하고 숨막히는 도회지적 분위기는 그러한 도회지적 공간의 묘사에 의해 환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작가의 수사적인 노력으로, 똑같은 지리적 배경을 묘사하더라도 작가의 의도에 따라 전혀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작가의 시각과 일치하는 것으로 결국 분위기는 사물을 보는 작가의 관점이 좌우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비극적 플롯(tragic plot)과 희극적 플롯(comic plot) 아리스토텔레스가 설정했던 플롯의 두 가지 근본적 유형이다. 비극적 플롯이란 주인공의 운명이 플롯의 최종 단계에서 앞의 단계에 비해 하강하는 구조이며, 희극적 플롯이란 반대로 주인공의 운명이 상승하는 구조를 말한다. 운명의 상승과 하강의 조건으로 제시될 수 있는 기준들은 삶과 죽음, 사랑의 성취와 실패, 심리적으로 느끼는 행복감과 불행감, 신분과 지위의 상승 및 하락 등 인간의 구체적 삶과 관련된 거의 모든 요소들이다. 왕의 신분에서 미치광이가 되는 '리어 왕'이나 자신의 두 눈을 스스로 뽑고 떠돌이가 된 '오이디프스 왕'은 전형적인 비극적 플롯의 인물이다. 봉사의 딸에서 왕후가 되는 '심청'이나 '춘향전'의 성춘향 등은 희극적 플롯의 인물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처럼 주인공의 운명이 교차하는 경우는 '희비극' 또는 '비희극' 등의 용어가 사용된다. ● 비판적 리얼리즘 막심 고리키에 의해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로서, 흔히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이전의 사실주의 창작 방법을 일컫는다. 비판적 리얼리즘은 19세기의 봉건 제도와 자본주의 사회가 지녔던 부정적 측면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그 생활 형태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적 형상화를 보여 주는 작품들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어 왔다. 그 대표적 작가로는 발자크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세계관에서는 왕당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학은 당대의 사회를 고발하고 명백하게 묘사하고 있다. ● 빈궁 소설 주로 궁핍한 삶의 경제적 현실에 서술의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는 소설 일반을 가리킨다. 삶의 가혹한 현실을 야기하는 결정적인 원인 중의 하나가 경제적 결핍이라는 점에서 사실주의적 양태를 나타내며 경험적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하고 있다. 우리 소설사에서는 1920년대 일제하의 현실이 궁핍하였으므로 당대에 많이 산출되었는데, 김동인의 '감자', 현진건의 '빈처', '운수 좋은 날', 최서해의 '탈출기', '박돌의 죽음' 등의 작품을 들 수 있다. 이후 빈궁의 문체는 1970년대 이후 산업 사회 속에서의 노동자와 빈민 문제로 옮아 가게 되는데, 이문구의 '장한몽', 박태순의 '외촌동 사람들',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등이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