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적 도발 말을 올바르게 쓴다고 하면 대개는 문법이나 맞춤법을 틀리지 않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사실 맞춤법이나 발음이 틀려 오해를 빚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맥락에서 어떤 ‘의도’를 의심받을 때 사태는 심각해진다. 그래서 말실수를 했으면 ‘적대적 의도’가 없었음을 이해시켜야 한다. 만일 그런 노력을 안 하고 방치하면 그것은 ‘언어적인 도발’이다. 세월호 참사가 났을 때 일부 정치인들이 ‘교통사고’라든지 ‘세금도둑’이라는 말을 내뱉어 지탄을 받았다. 분명한 의도가 있는 도발이었다.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윤리적인 맥락을 비틀어버린 것이다. 만일 박정희 대통령 피살 사건도 ‘총기사고’라 한다면 어찌 될까? 총을 쏜 사람의 행동은 안 보이게 된다. 결국은 말하는 이의 ‘의도’에 다른 뜻이 있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일제 때 징용당했던 조선인들을 이제부터 ‘구 조선반도(한반도) 출신 노동자’라고 일컫기로 했다 한다. ‘징용’이라는 의미가 사라진 것이다. 곧 무엇을 ‘의도’하는지가 뻔히 보인다. ‘강제로’ 끌려갔다던 노동자들이 삽시간에 ‘피해자’가 아닌 보통의 ‘취업자’들이 된 것이다. 그들이 보통의 취업자들이었다면 이른바 ‘강점기’니 ‘식민지 시대’니 하는 말들 모두 일종의 착시 현상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럴 때 왜 그들이 그렇게 고통스럽게 일했는지 그리고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 끈질기게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자면 ‘위안부’ 할머니들 문제에서처럼 ‘피해자 중심의 접근’이 중요하다. 2차 대전 때 큰 피해를 입은 유대인들에 대한 유대감이 당시 연합국의 승리를 더욱 값지게 한 것과 같다. 유대인들도 무언가 잘못한 것이 있어서 죽은 것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야말로 전쟁 이후의 모든 보편적 윤리와 가치를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도발이 될 것이다. ………………………………………………………………………………………………… 겨레말큰사전 사전 편찬이라 하면 으레 학자들이나 출판사가 나서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우리 국어사전은 국가 기관인 문화부 산하의 국립국어(연구)원이 나서서 ‘표준국어대사전’을 만들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사전이 정부의 지원으로 편찬 중에 있다. 바로 통일부에서 지원하는 ‘겨레말큰사전’이라는 ‘작품’이다. ‘겨레말큰사전’은 남과 북이 공통 국어사전의 모습을 어떻게 만들어야 통일 이후에 유용할지를 미리 설계해보는 사업이다. 이 사전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오해가 있다. 무엇보다 남과 북의 언어를 한방에 통일하는 사전이라는 오해가 가장 크다. 실제 사용을 목표로 한 그러한 사전은 공통의 규범이 정해진 다음에야 가능하다. 아마 이번 사전은 ‘서로 수용 가능한’ 공통 규범과 그 현실성을 검토하는 사전이라 말하는 게 옳을 듯싶다. 통일사전은 그러한 단계 없이 툭 하고 하늘에서 떨어질 수 없다. 독일은 분단 이전에 이미 공통된 규범을 완비했기 때문에 이러한 단계가 필요 없었다. 혹자는 그게 무에 그리 중요하냐고 볼멘소리를 하기도 한다. 통일이 되면 남과 북의 사전을 그냥 합해버리면 되지 않느냐고 비꼬기도 한다. 그것은 남과 북의 철도를 마주 이어만 놓으면 되지 않느냐는 식의 단순 논리이다. 또 너무 많은 시간과 예산을 낭비하고 있지 않느냐는 의문에는 그간의 사전 편찬 진행을 힘들게 한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아보라고 넌지시 일러주고 싶다. 이 사전의 ‘편찬사업회’는 법정 사업 기관이기는 하나 시한이 정해져 있어 시간이 지나면 국회가 그때마다 기간을 연장해주어야 한다. 오랫동안 남과 북의 관계가 경직되어 있다가 이제야 기지개를 켜면서 다시 걸음을 내디디려 한다. 사업 기간도 국회에서 다소 여유를 주었다고 한다. 남은 기간에 그동안 밀렸던 행보를 힘차게 나가길 바란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한승원의 글쓰기 교실 제13교시 글 잘 쓰는 천재들의 거짓말은 믿지 마라 - 글은 다듬을수록 빛이난다. 1. 글을 잘쓰는 사람들도 거듭 고쳐쓴다. 한 신문의 신춘 문예에 소설이 당선된 어느 신인작가에게 기자가 물었다. "이번에 당선된 귀하의 소설을 읽어보니까, 문장이 아주 매끄럽고 아름드울 뿐 아니라 주제 또한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동아니 습작을 많이 해온 모양이지요?" 그런데 그 신인 작가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이번에 당선된 제 소설은 난생 처음 써 본 것입니다. 애초에 소설가가 되겠다고 작정했던데 아니라, 궁한 김에 상금이나 타 먹자는 생각이었거든요, 그래서 일 주일 만에 갈겨쓴 다음, 쉼표하나 고치지 않고 곧바로 응모했습니다." 옛날에 시를 잘 짓는다고 소문 난 선비가 한 명 있었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벗이나 후배들에게 새로 쓴 시를 내 보이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거, 간밤에 영감이 떠올라서 잠깐 써 본건데, 한번 읽어 보네나." 그 시를 일고 난 그의 벗이나 후배들은 한결같이 감탄을 금치못했다. "이건 사람이 쓴게 아니야, 신선이나 귀신이 쓴 것이지." 그만큼 그 선비가 골라쓴 말(시어)이나, 사물을 바라보는 정교한 눈, 또 그 시에서 노래하고 있는 세계의 아름답고 고움은 남달랐던 것이다. 한 후배가 매우 궁금히 여기며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적절한 말들만 골라서 표현하기 위해 얼마나 심사숙소하셨습니까? 아주 많은 시간동안 명상을 하셨겠지요? 도대체 몇 번이나 고쳐쓰고 다듬고 하십니까?" 그 말에 선비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당당하고 거연하게 말했다. "천만해! 나는 시문을 지으면서 이미 쓴 것을 고쳐 쓰거나, 그 가운데서 어느 부분을 잘라 내는 등의 다듬는 이릉 ㄴ전혀 해 본 적이 없어. 나는 처음에 한번 휘갈겨 써 놓으면, 그것으로 끝이거든, 그리고는 깨끗이 잊어버리지." "네에! 아하!" 후배는 경솔한 질문을 던졌다는 생각이 들어 금세 얼굴이 빨개졌다. 얼마 후, 선비가 소변을 보기 위하여 잠시 자리를 떴다. 그 때 후배는 뜻밖에도 기막힌 것 하나를 발견하였다. 선비가 깔고 앉았던 방석의 한 귀퉁이에서 뾰조롬이 비어져 나온 희끗한 것...... 그것은 선비가 시를 쓸 때 사용하는 종이였다. 후배는 얼른 방석을 들춰 보았다. 순간 하늘의 해가 하나 더 떠오르는 것처럼 눈앞이 한층 밝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후배는 이번 에야 말로 진정 감동어린 목소리로 "아하!" 하고 탄성을 질렀다. 그 방석 밑에는 '간밤에 잠깐 썼다'고 하며 선비가 장랑스럽게 내 버였던 시의 초고와, 그것을세번 네 번 새까맣게 고쳐 쓴 종이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시를 잘 짓는다고 소문난 그 선비는 왜 그런 거짓말을 하곤 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천새정을 노골적으로 자랑하고 싶어하기 떄문이다. 2. 아들딸에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 나는 고향 마을에다 서재를 새로이 마련한 뒤, 책과 살림살이들을 그리로 옮길 때에 아들딸 셋을 앞에 불러 모았다. 그들은 모두 평생동안 글을 쓰기 위해 대학에서 현대 문학을 전공하고 있었다. "너희들에게 보여 줄 것이 있다." 아들딸들은 매우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이윽고 나는 책장의 맨 밑 서랍에 숨겨 놓았던 원고 뭉치와 대학 노트들을 꺼내 놓았다. 그것들은 내가 젊은 시절에 쓴 원고들이었다. 물론 대학노트들 또한 대학시절 강의 내용을 받아 적어 놓은 것들이 아니었다. 소설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무렵, 나는 그 첫 원고(초고)를 대학 노트에다 먼저 깨알같이 썼다. 그런다음 그것을 원고지(두 번째 원고)에 옮겨쓰고, 그 원고지의 것을 또 다른 새 원고지(세번째 원고)에 고쳐 정리하고, 그것을 또다시 새 원고지(네번째 원고)에 옮겨썼다. 그것도 시원치 않으면 새까맣게 뜯어 고친 다음, 또 한번 새 원고지(다섯번째 원고)에 옮겨 적었다. 그리하여 그 다섯 번째 것을 잡지사에 넘기곤 했다. 그러니까 책상 밑에 들어있는 그 원고 뭉치들은 그러한 나의 흔적들인 셈이었다. 지금은 이미 책으로 엮어져 나와 있는 것들이지만, 몇차례나 고쳐썼던 단편 소설의 원고들, 또 중편소설이나 장편 소설의 초고를 비롯하여 두 번째 세 번째 고친 원고들...... 내가 꺼내 놓은 원고 뭉치나 대학노트들은 눌눌하게 색이 바래 있는데다 검은 곰팡이까지 슬어 쿰쿰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난챙 처음으로 일 주일 만에 갈겨 쓴 것입니다"하고 자신의 천재성을 자랑하는 작가들이 우글거리는 이 세상에 비춰 본다면, 30년 동안 소설을 써 온 작가로서 그런 흔적들은 창피스럽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아들 딸들에게 그것을 한 장 한 장 넘겨 보이면서 말했다. "모아라, 나는 어떤 글이든지 이렇게 최소한 네댓 번씰은 고쳐 써서 발표했더니라. 이 곰팡내 나는 원고 뭉치들은, 그러니까 좋은 쪽으로 말한다면 너희 아버지가 매우 성실한 작가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고, 나쁜쪽으로 말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우둔한 작가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 아들 딸 들은 말을 잃고 있었다. "그 사이 내 작품들에게 아주 많은 상이 주어졌지, 나는 그것들이 모두 나의 소설들이 정말로 잘 쓰여졌기 떄문에 주어졌다기 보다는 꾸준히 노력하는 나의 작가적 태도를 가상히 여겨 주었으리라 생각한다." 아들딸들은 모두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런데 왜 내가 작가로서 창피할 수 도 있는 이 흔적들을 일찍이 없애 버리지 않고, 이렇게 너희들 앞에 내놓았는지 그 까닭을 아느냐?" 나는 아들딸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느라고 한참 뜸을 들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들 눈 앞에 드러나 있는 것들은 모두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걸 말하려는 것이다. 즉 눈부시게 번쩍거리는 것들의 뒤쪽에는 은밀하게 숨겨진 피와 땀들이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다는 거지. 그리고 어떤 이이든 한 번 해 봤을 때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서 쉬이 절망하지 말라는 것, 이 세상의 모든 천재는 반드시 성실과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려 주려는 것이다." 3. 절망하여 글을 쓴 뒤, 희망을 가지고 고친다. 아들 딸들의 눈에 얼핏 물이 고이고 있었다. "나는 문장 하나하나를 절망하여 쓴다. 작가는 어떤 사상(관찰할 수 있는 형체로 나타나는 사물이나 현상)을 표현하든지 가장 알맞는 낱말들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이 탁월해야 하는데, 내가 끌어올 수 있는 낱말들은 겨우 이정도 뿐이로구나, 내가 표현해 낼 수 있는 주제라는 것도 기껏 이정도 뿐이던가. 고작 이만큼이 감동밖에는 줄 수가 없는 것인가. 글을 정말로 재미있고 진지하고 아름답고 신비하고 지적으로 쓸 수는 없는 걸까. 글을 끝맺고 나서도 나는 이렇게 절망한다. '아아, 내가 삶의 원리나 우주의 뜻에 대해 깨달았다고 믿었던 것도 한낱 이 정도에 불과했구나' 하고, 만년필과 원고지를 내던진 채 몇 날 며칠을 방황한다. 그러다 문득, '한번 작정하고 나선 자가 이렇게 물러서다니!'하고는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와 앉는다. 선배들의 좋은 작품들을 구해서 일거보고, 동양과 서양의 고전들을 훑고 그것들을 내 삶 내 작품에 비춰 보고 내 갊의 의미들을 찾는다. 도를 닦듯이 말이다. 그러면서 나의 어떤 점을 어떻게 교정해야 할 것인지 골똘하게 생각한다." 나는 의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는 다시 고쳐 쓰기를 시작한다. 써 두었던 것을 성난 얼굴로 냉정하게 들여다보며, 전혀 새로운 작품을 쓰듯이 밤을 새워 과감하게 고쳐 쓰는 것이다. 기왕에 한번 시작해 놓은 나의 작품이 저렇게 완성되는 모습을 그려보면서 한 문장 한 문장씩을 고쳐 나가는 것이다. 기껏 써 놓은 어떤 대목은 과감하게 잘라내 버리고. 부족하다 싶은 이야기는 덧븥이고......" 아들딸들은 냄새 나는 원고 뭉치들을 만지작거리고만 있었다. 나는 이렇게 결론을 지었다. "너희들이 내 뜻을 알아들었다면, 이것들은 이제 필요없이니 불에 태워 버려라: 그러자 크아들이 고개를 힘껏 내젓더니 결연하게 말했다. "아버지 태우지 않겠어요. 이것들은 앞으로 제가 소중하게 보관하겠습니다." 그러자 딸이 눈시울을 붉히며 맞장구 쳤다. "그래요, 이것들은 정말 귀한 것들이에요." 4. 도둑질하듯이 공부하기, 도둑질하듯이 글 다듬기 학창 시절, 나에게는 언제나 함께 다니는 친한 친구가 한 명 있었다. 그 친구는 공부를 얼마나 잘하는지 사람들이 모두 천재라 일컬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나하고 늘 붙어 다니며 놀 것 다 놀았는데도, 시험만 치면 1등을 한다는 것이었다. 쉬는 시간에라도 잠시 공부를 하기는커녕 "시험, 그것 조금 잘 보면 뭐하냐?" 하면서 짖궃게 장난만 치기가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그 친구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그 친구와 나느 저녁 내내 즐겁게 놀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새벽 두 시쯤이었을까? 부시럭부시럭하는 소리가 나서 눈을 떠 보니, 그 친구가 책상 앞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제야 나는 그 친구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친구는 도둑처럼 남몰래 공부를 해 왔던 것이다. 이윽고 날이 밝았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난 뒤에도 그 친구는 쿨쿨 자고 있었다. 학교에 가자고 흔들어 깨우자, "야, 나 30분만 더 잘테니까 깨우지 말아라"하고 드르렁드르렁 코 까지 곯아 대었다. 글을 고치고 다듬는 일도 마찬가지다. 주제를 염두에 둔 채 구성을 하고, 또 좋은 표현들을 동원하여 썼다 해도 그 글을 처름 그대로 제출하지는 말라, 한 번 고치고 또 한번 고치고 또다시 고치고...... 도둑질을 하듯이 은밀하고 세심하게 글을 다듬어야 한다. 의미가 불문명하거나 적절하지 않은 낱말을 쓰지는 않았는지, 각 문장의 호응 관계ㄹ는 올바른지, 시간은 맞게 표현되어 있는지, 글 전체가 하나의 주제로 통일되어 있는지...... 그러고는 시치미를 뚝 뗀 채, "나는 이 글을 대번에 쓴 거야, 난 한 번 쓴것ㅇ르 절대로 다시 들여다 보지 않거든. 한 번 쓰기도 지긋지긋한데 왜 두 번 세 번 들여다 보니?"하고 당당하고 거연하게 말하라. 당당하고 거연한 이 말은 여러분들의 천재성을 한 껏 뽐내줄 것이다. 그것은 여러분들 자신뿐 아니라 여러분들이 쓴 글을 위해서도 매우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글을 쓴 사람의 천재성은 그 사람의 글을 훨씬 신비롭고 지성적이고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니까. 5. 보이는 계단과 보이지 않는 계단 그러면 이쯤에서 독자의 글 한 편을 감상해 보는게 어떨까? '이크!' 아픈 것은 둘쨰치고 얼굴이 달아 올랐다. 층층의 모서리들이 예리한 계단에서 뛰다가 오늘도 여지없이 창피한 모습을 보이고 만 것이다. 성미가 급한 탓일까. 나는 계단을 오르내리다가 이렇게 발으 헛디디는 경우가 많다. 교복 치마를 입고서 학교 계단을 두세칸씩 오르다가 넘어진 기억도 난다. 다리가 길지 않으면서 매번 무리를 하는 것이다. 쯧쯧 하고 혀를 차는 청소부 아주머니의 시선을 뒤로 한 채 얼른 내려와 버렷다. 다친곳은 벌겋게 부어 올랐다. 오래지 않아 퍼렇게 피멍이 들 터이다. 벌써 몇 번째인가, 난 매사에 욕심이 많고, 자꾸 무리를 하는 편이다. 항상 숨이 차도록 계단을 여러 칸씩 오르는 것도 그렇지만, 무슨 계획이나 목표를 거창하게 세우는 것도 그러하다. 성적을 올리겠다.고 마음먹어도 1점 2점씩 꾸준히 올리겠다는 것이 아니가, 더 큰 점수에 욕심을 냈다가 실패하고, 그러한 나에 대하여 실망한 적도 많다. 다이어트를 한다고 무리한 목표 체중을 설정해 놓고 영양 실조가 되도록 먹지 않아 보기도 하였으며, 만일 그 방학 계획표를 잘만 지켰다면 정말 완벽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사실은 다 지키지 못하고 말 것이 뻔한 거창한 계획을 세웠다가 낱패를 당하곤 했었다. 매번 욕심이 과하게 작용하곤 한 것이었다. 좀더 빨리 계단을 여러칸씩 오르다가 넘어진 것처럼 무리한 욕심들은 결국 나를 원점으로 되돌려 놓곤 했다. 우리의 이런 생활이 다 계단이 아닐까. 한 계단씩을 천천히 착실하게 올라가는 과정보다는 재빨리 다 오른 후의 모습에만 신경을 쓰게 되면 오히려 남는 것이 없게 된다고 가르쳐 주는 계단. 차근차근 해대는 모든 과정은 참으로 소중하다. 모두들 다 해낸 다음에 느껴지는 뿌듯함 또한 계단 오르기와 같은 것이다. 복권 당첨으로 번 돈은 마구 쓰게 되지만, 열심히 한 푼 한 푼 번 돈은 더 소중하게 느껴져 절약하는 것처럼. 에스컬레이터를 놔 두고 계단을 뛰어오르는 나를 보며 친구가 웃긴다고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왜 편리한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지 않느냐고, 그렇지만 계단을 하나씩 밟으며 차근차근 오르는 것은 그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여 힘들이지 않고 오르는 것과는 비교도 안되는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다리를 무력화 시키지 않게 되고, 심장과 허파를 강하게 하고, 해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하고 우리 집 위층에 사는 꼬마가 '하낫, 둘, 셋, 넷......"하고 헤아리며 오르곤 하는 것 처럼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채 계단을 하나씩 밟아본다. 내 인생도 이렇게 차근차근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다짐을 하면서. 이 글의 지은이는 실제로 우리가 밟고 다니는 계단과 우리 삶속에 숨어 있는 또 다른 계단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아주 조리있게 풀어내고 있다. 다만 몇 가지 아쉬운 점은 군데군데 보이는 어색한 표현들과, 문자의 앞뒤가 맞지 않는 대목이 더러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글을 다 쓴 다음 신중하게 훑어보며 여러 차례 고치고 다듬지 않은 까닭이다. 그러므로 글쓴이는 글을 쓸 때 한 번 끈 글을 몇차례 되풀이 읽어 가며 고치고 또 고친 다음 새 원고지에 깨끗이 옮겨 쓰는 습성을 들이는 것이 좋겠다. 이번에는 아주 고급한 말들을 구사하고 있는 글 한 편을 살펴보도록 하자. 고급한 말들은 글을 지성적으로 보이게 하는 장점이 있지만, 나타내려는 대상이나 주제가 명확하게 잡히지 않는다는 단점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의 지은이는 글 짜는 솜씨와 감수성이 뛰어나서 문장에 힘이 넘쳐나며, 표현 방법 또한 매우 우수해 보인다. 힘차게 걸었다. 천천히 걸었다. 그러나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심히 걸었다. 이 끝없는 암흑과 등골이 오싹해 지는 묘한 불안감에 점차 다리에 힘이 빠지고 만다. 이리 모섭고 캄캄한 것은 블랙 홀...... 그것인가? 아니다. 발 밑에 짚이는 이 차갑고 딱딱한 것은, 두려움에 신경이 무뎌진 내 발바닥을 자꾸만 때리고 있다. 이건 계단인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에 절망, 두려움, 혼란 이라는 푯말을 달고 무겁게 내딛는다. 언제쯤 이것을 떼어 낼 것인가. 이 검은 무한대에서 조그만 빛이 새어 나오고 있다. 아주 조그마하고 동그란 것이 계속 내 눈을 괴롭힌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 빛은 내 몸으 내려와 발 밑의 계단을 지나쳤다. 순간 나는 놀랐다. 그 조금만 빛을 내비친 것은 실로 엄청나게 많은 계단인 것이다. 그 빛이 힘을 다하지 못해 보여주지 못한 곳에는 내가 그렇게도 두려워 하던 '암흑'이 존재하고 있었다. 저절로 힘이 솟는다. 그 암흑에서 멀어지기 위해, 그리고 점점 커져만 가는 빛을 따라 숨가쁘게 계단을 올랐다. 조그맣게 들렸던 숨소리가 뭉치고 뭉쳐져 아주 거칠어졌다. 끝은 어딜까? 작은 희망의 빛에 너무 큰 기대를 해 버린 나는, 앞서 걸어왔던 암흑의 십분의 일도 안되어 지치고 싫증을 내고 있었다. 홧김에 커다란 굉음을 내며 발바닥을 힘차게 내리쳤다. 그 소리가 울려가고 또 울려가 아주 들리지 않을 때, 전면이 하얀 그곳을 마주쳤다. 하얗기만 했던 그곳에 점점 파랗고 붉고 노란 것이 보인다. 빛에 익숙해 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까맣고 하얀 것이 몇번 더 지나가더니 파랗고 붉고 노란 그것이 더 선명하게 내 앞에 있었다. 이 곳은 옥상인 것이다. 천천히 걸었다 힘차게 걸었다 배까지 오는 보호막에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떨군다. 11자를 엇갈리는 방향으로 그래는 차들이 요란한 소리를 낸다. 점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다양한 색채로 돌아 다닌다. 그리고 체크 무늬의 빌딩들이 서 있다. 사방에...... 내 밑에는 그런 것들이 있다. 내 앞에는 멀찍이 우두커니 서서 나를 응시하는 고령의 산과 하늘의 반, 내 위에는 눈을 뜨지 못할 찬란함을 발하는 황색의 태양과 그 빛에 반사된 꺠끗한 구름, 그리고 코발트 빛의 높고 푸른 무한대인 하.늘.이 있다. 신선한 바람이 나부끼는 고층 빌딩의 옥상에서 나는 절망에서 희망, 씨앗에서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맛본다. 계단이라는 너무도 이중적인 냄새를 풍기는 중매쟁이를 통해서....... 생각해 봅시다 1. 이 세상에는 천재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다. 글을 쓰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들은 무수히 만날 수 있지만, 사실 훌륭한 글을 단박에 써 낼 수 있는 순도 100%의 천재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왜 그런지 그 이유를 밝혀보자.
Board 고사성어 2022.06.27 風文 R 744
뒷담화 보도 외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몹시 예민한 문제를 다루는 사람들이 바로 남과 북의 대화 실무자들이다. 특히 그들의 언어는 품격도 갖추고 민족의 미래도 살피는 사려 깊은 언어였으면 한다. 또한 그들의 언어를 보도하는 매체들 역시 이들의 대화를 선정적으로만 다루지 말고 격조 있게 보도했으면 좋겠다. 돌이켜보면 지난날 북의 대화 실무자가 역정을 내며 ‘불바다’라는 험한 말을 꺼낸 것을 그리 요란하게 보도했어야 하나 하는 뒤늦은 아쉬움도 든다. 또 우리 외교관들이 국외에서 북측 외교관에게 천안함 사건을 거론하면서 “남쪽에서 보면 사과 같기도 하고 북측의 입장에서는 사과가 아닌 정도의 표현을 해달라”고 했다고 양측에서 요란하게 보도했다. 더듬어 생각해보니 당시에는 반신반의하면서 격분하긴 했지만 과연 그렇게 자극적으로 보도한 것이 옳았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하나의 상상이지만 당시에 그런 보도들을 삼가거나 순화했더라면 지금의 남과 북의 관계는 더욱더 진척되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한 회한을 가지고 보니 최근에 물의를 빚은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냐”던 한마디가 또 가슴을 찌른다. 대화 실무자들도 지루한 공방을 벌이다 보면 역정도 나고 울컥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속속들이 보도하는 것이 국민의 진정한 알 권리 충족일까? 남과 북은 전쟁으로 엄청난 희생자가 생겼고, 복잡한 국제관계가 끝끝내 우리의 행보를 좌절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면 말 한마디, 기침 소리 하나에도 마음이 조마조마해진다. 그런 뒷이야기들을 우리는 ‘뒷담화’라고도 한다. 그리 생산적이 못 되는 이야기들이다. 숨이 멎을 듯한 긴장과 인내심이 필요한 순간이다. 자잘한 상처를 내기 쉬운 뒷담화보다는 일을 성취한 후에 느긋하게 나누는 후일담이 우리에게 더욱 절실하지 않은가. ………………………………………………………………………………………………… 교각살우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 유학생 수가 많이 늘었다. 호사다마라고 이들의 수가 급하게 늘면서 불법으로 머무는 외국인의 수도 함께 늘어났다. 당연히 법도 잘 지키고 문화 교류도 사그라들지 않도록 묘수를 찾아야겠다. 사법 당국이 칼을 빼기에 앞서 자연스럽게 스스로 조절되고 정상화될 수 있는 길이면 더 좋겠다. 한국어가 과거보다 인기가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국제 수준에서 돌아본다면 그 성과는 아직 여린 떡잎에 지나지 않는다. 한류의 영향이라는 것이 오래전 팝송과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영어를 조금씩 깨치기 시작했던 그 시절의 상황과 비슷한 정도이다. 한국어 학습자의 대부분은 아직 초급 단계이지 중급 수준을 넘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한국어 학습을 장려하려고 불법체류자들을 모른 척할 수도 없고, 반대로 불법체류를 단속하기 위해 아예 입국 단계부터 단호한 단속을 시행하는 것도 그리 현명한 방법은 아닌 것 같다. 공생하는 두길보기 정책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한번 생각해보자. 외국인 학생을 불법으로 유치해 사익을 꾀하는 ‘시장 요인’은 무엇일까? 비합법적 인력 공급 체계, 그리고 각종 어학연수기관들의 무분별한 학생 유치가 아닌가? 한편으로는 시장도 건강을 유지하면서 모처럼 뻗어 나가는 문화 교류의 추동력도 초반에 꺾이지 않게 해야겠다.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체계적으로 가르쳐온 역사는 대략 60년가량 되어 간다. 그 대부분 기간 동안 세상이 알아주지도 않는 상황에서 ‘저비용의 민간 외교’ 구실을 해왔던 분야이기도 하다. 약 20년 전 당시 ‘국민의 정부’의 뉴밀레니엄 사업으로 성장하기 시작했었는데 이제 와 뿔을 바로잡으려다 소를 죽이는 ‘교각살우’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법도 살리고 문화도 살리는 ‘탄력적인 행정 조치’가 필요하다. +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붕정만리(鵬程萬里) // 앞길이 매우 멀고도 큼. 《出典》'莊子' 逍遙遊篇 이 말은《莊子》'逍遙遊篇' 첫머리에 나오는 에피소드에서 나온 것『북쪽 바다에 고기가 있으니, 그 이름을 곤(鯤)이라 한다. 곤의 큰 것은 그 길이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지 못한다. 화(化)하여 새가 되니, 그 이름을 붕(鵬)이라 한다. 붕새의 등은 그 길이가 몇 천리인지 알지 못한다. 성내어 날면 그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다의 기운으로 장차 남쪽 바다로 옮기는데, 남쪽 바다는 하늘의 연못이다. 제해(齊諧)라는 사람이 있어 다음과 같은 괴이한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있다. <붕새가 남쪽 바다로 옮김에, 물을 치기를 3천 리나 하고, 거기서 일어나는 선풍(旋風)을 타고 위로 올라가기를 9만 리나 하며, 6개월이나 걸려서 남쪽 바다에 가서 쉰다.> 아지랑이와 티끌과 먼지를 생물들이 뿜어내건만, 하늘은 푸르고 푸르르니, 그 올바른 색깔인가? 그 멀어서 끝간 데가 없는 까닭인가? 그 내려다봄에 또한 이와같을 뿐이다. 또한 대저 물의 쌓임이 두텁지 않으면, 큰 배를 띄움에 힘이 없고, 술잔의 물을 뜰의 파인 곳에 부으면, 지푸라기는 배가 되어 뜨지만, 잔을 놓으면 엎어진다. 물은 얕은데 배는 크기 때문이다. 바람의 쌓임이 두텁지 못하면, 그 큰 날개를 띄움에 힘이 없다. 그러므로 9만 리면 바람이 그 아래에 있다. 그리하여 뒤에 곧 바람을 타고 푸른 하늘을 등지고서, 아무 것도 걸리는 것이 없다. 이리하여 지금 비로소 붕새는 남쪽으로 날아가려는 것이다.』 <붕정만리(鵬程萬里)>는 이 이야기에서 나왔다.
Board 고사성어 2022.06.26 風文 R 884
가족 호칭 혁신 가족 호칭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특히 여성과 관련된 몇 가지 호칭은 건강한 사회통합을 위해서라도 비판적으로 되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살펴보면 여성 호칭도 문제이지만, 여성이 사용하는 호칭도 문제이다. 왜 시동생을 ‘도련님’이라 해야 하느냐 하는 여성들의 불만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호칭 체계는 독립적 범주가 아니다. 남성 중심의 사회구조와 연동됐다. 가부장제도의 철폐 내지 약화 없이는 해결 난망이다. 가부장 사회에서 외가는 한 세대가 지나면 사라진다. 어린 시절에는 이모, 외삼촌과 가까이 지냈지만 그다음 세대에겐 또 새로운 외가가 생기게 되니 어느 자녀가 할머니 쪽 친정에 관심을 가지겠는가? 호칭조차 마땅치 않다. 또 한 세대 지나면 아마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관계가 될 것이다. 세상은 달라지고 있다. 요즘은 처가, 즉 아이들 외가의 도움이 없으면 육아 전쟁을 견디지 못한다. 아이들도 과거보다 더 외가에 친숙하다. 자연스레 친정의 발언권도 점점 강해질 것이다. ‘도련님, 아주버님’ 같은 일부 호칭만 문제 삼지 말고 우리의 친족 호칭 전체를 재구성할 용기가 필요하다. 아버지 항렬은 모두 ‘큰아버지/작은아버지’로, 어머니 항렬은 모두 ‘큰어머니/작은어머니’로 간단히 하고, 같은 항렬에서는 이름에 붙여서 ‘아무개씨’ 정도로 과감하게 낡은 제도와 작별을 고할 준비를 해야 한다. 가부장적 친족 제도는 더 이상 미풍양속도 아니고 민법과 잘 어울리지도 않는다. 이제는 단출한 핵가족을 중심으로, 나머지는 ‘혈연을 나누었으나 독립적인 개인’의 합리적 관계로 만족해야 한다. 친족 내부의 ‘상부상조’와 ‘품앗이’는 사회보장과 복지 제도를 통해 해결하는 게 옳다. 그것이 미래의 우리 사회를 제대로 ‘통합’할 수 있는 문화 혁신의 지름길이다. ………………………………………………………………………………………………… 일본식 외래어 외래어 자체를 문제 삼기는 어렵다. 국제 교류를 정상적으로 하는 사회치고 외래어가 없는 곳을 찾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어떤 외래어를 선호하는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기도 하다. 관심 있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인기 높은 외래어인 영어는 새로운 분야, 새로운 상품이나 문물, 혹은 풍조를 표현하는 데 많이 쓰인다. 곧 세속에서 영어는 늘 새로운 것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종종 ‘사이비 새로움’도 있기는 하다. 이와 달리 일본어나 일본식 발음 외래어의 느낌은 또 다르다. 오랫동안 일본어를 꺼려온 탓인지 일본어 단어를 들으면 비공식적인 것, 곧 질서를 벗어난 표현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일본식 외래어에는 ‘후리타, 오타쿠, 무데뽀, 노가다, 야마, 곤조’같이 공식 세계에서 벗어난 변두리 세계의 의미 영역을 가리키는 어휘가 분명히 더 많다. 이는 일본어에 큰 문제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 한국 사회가 일본어를 거부하면서 덧씌워진 부작용일 가능성이 더 크다. 그렇다 보니 일본어에서 온 외래어나 일본식 발음으로 표현되는 외래어는 무언가 통속화된 것, 비공식적인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더 나아가 의식적인 비속화 기능도 적지 않게 드러낸다. 스스로를 거칠고, 공공 영역 바깥의 ‘저렴한 분위기’를 만드는 기능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몇몇 유명인사가 거르지 않고 내뱉은 ‘야지’라든지 ‘겐세이’ 같은 외래어 사용에 대한 비판은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일본어만을 탓하는 우리 사회의 시각도 물론 문제이지만 굳이 일본식 외래어를 불필요한 곳에서 사용하여 스스로 여차하면 대화의 격을 비공식적 판으로 떨어뜨리겠다는 여운을 남기는 것은 그들에 대한 대중의 태도를 마찬가지로 거칠게 할 수도 있다고 본다. 말의 문제가 아니라 대화의 장을 거칠게 한다는 점에서 주의가 필요하다.
현대소설용어사전 <라> ● 로망스(romance) 애초에 로망스는 라틴어에 대한 방언이었던 '노만스'어로 쓰여진 이야기를 말이었는데, 그 내용이 대체로 기사들의 황당 무계한 무용담이나 연애담을 다룬 기이하고도 가공적이며 모험적인 성격을 강하게 지닌 것이었다. 문학의 발달사에서 로망스는 서사시 이후에 나타난 문학 양식으로, 근대적 개념의 소설과는 사뭇 다른 양식을 지칭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멜빌의 '백경' 등이 있다. <마> ● 말하기(telling)와 보여주기(showing) 엄밀하게 말해서 문자를 통한 전달 매체인 소설에서는 말을 하거나 보여 주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글을 읽는 독자의 상상을 매개로 하면, 말하기와 보여주기의 방법이 가능해진다. 말하기는 화자가 어떤 사건을 자신이 말을 하는 것처럼 독자에게 전달함으로써 독자를 작품의 현장에서 소외시키는 것으로 소설가의 직접적인 전달 방법을 의미하며, 보여주기는 화자가 자신의 견해나 감정은 전혀 개입함이 없이 사건의 상황을 보고 들은 바대로 객관적으로 전달해 줌으로써 독자가 그 상황을 나름대로 재현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방법이다. 현대에 오면서 보여주기의 방법이 많이 사용되고는 있으나, 사실상 둘 사이의 차이는 극히 미미하여 작자들은 두 가지를 교차시키면서 사용하고 있다. ● 메타 소설 '메타(meta-)'란 말은 대체로 'after, with, change' 따위의 의미를 지닌다. 이로 미루어 메타 소설은 기존의 소설 양식에 '반(反)하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20세기 소설에 나타나는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즉, 소설 속에 소설 제작의 과정 자체를 노출시키는 것인데, 메타 소설은 이처럼 소설 창작의 실제를 통하여 소설의 이론을 탐구하는 자의식적 경향의 소설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이는 소설이 허구적 산물임을 명백히 함으로써 낡은 관습을 파괴하고 새로운 창조적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일상적 현실을 넘어선 '가능한 세계'를 찾고자 하는 상상적 모험의 문학이다. 로렌스 스턴의 '트리스트램 샌디의 생애와 의견'이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등은 그 대표작들이다. ● 멜로 드라마(melodrama) 연애를 주제로 하며, 변화가 많고 호화스러운 무대로 그 내용이 감상적이고 통속적인 대극을 말한다. ● 명명법(命名法, naming) 등장 인물의 '이름짓기'를 이른다. ① 인상적 명명법 : '학'의 혹부리 할아버지, 꼬맹이 ② 반어적 명명법 : '감자'의 복녀, '화수분'의 화수분 ③ 의성어에 의한 명명법 : '백치 아다다'의 아다다 ④ 사실주의 소설의 명명법 : '김 강사와 T교수'의 김 강사, T, '레디 메이드 인생'의 P ⑤ 성격 암시를 위한 명명법 : '무정'의 선형, 영채 ● 모델 소설 현실에 실재하는 특정한 인물이나 사건들을 허구적 기술 속에서 재현, 구성해 내는 소설의 종류를 가리킨다. 기록 소설이나 사소설과도 비슷하나, 기록 소설이 사건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있고, 사소설이 '개인적 생활'을 다루고 있는 것과는 달리 모델 소설은 실재 인물이나 사건을 차용해 오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되어 있으며 시대의 사회상을 주관적 시각에서 반영하는 형태를 지니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염상섭의 '해바라기'와 이상의 '지주회시'를 꼽을 수 있다. ● 모티프(motif(프), motive(영)) 어원상으로는 '운동의 근원적인 원인', 예술상으로는 '창작이나 표현의 기본적인 동기'를 의미하는 말인데, 일반적으로는 '작품 속에서 자주 나타나는 특정한 요소'를 가리키고 있다. 모티프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으로 규정된 사물이나 사건의 성격을 가지는 소재와는 구별되는 것으로서 애증, 복수, 한탄, 연민, 민족애 등과 같이 추상적인 성격을 가진다. 부친 살해, 근친 상간, 변신 모티프 등이 그것인데, 이러한 모티프는 작품 속에서는 구체적인 물증(物證) 속에 나타나게 된다. 한편, 주제를 형성하는 데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모티프를 '중심 모티프(leitmotive)'라 한다. ● 모험 소설 위험과 난관을 무릅쓰는 행동과 사건들이 이야기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 소설 일반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대부분의 모험 소설에서 모험을 주도하는 인물들이 미성년으로 설정되며, 이는 경이와 신비, 동경과 공포 등의 감정이 아직 낭만적 경험이 미숙한 청소년들에게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스티븐슨의 '보물섬', 트웨인의 '통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 등과 멜빌의 '백경',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등의 작품을 들 수 있다. ● 목적 소설 교훈의 제시를 목적으로 쓰여진 소설 전반에 적용되는 용어로서, 작가에게 교사이기를 강조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이광수의 '흙' 등의 계몽류 소설과 카프의 의식 변환을 촉구하는 교훈 소설들이 그 대표적 예이다. ● 몽타주(montage) 따로따로 촬영된 화면을 효과적으로 떼어 붙여 화면 전체를 유기적으로 구성하는 영화의 편집 기법이다. 문학 쪽으로 말하면, 독립될 수 있는 심상들을 결합하여 전체적으로 하나의 통일된 주제를 이루도록 하는 기법이라 할 수 있다. ● 문제적 주인공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에서 주요한 개념으로 쓰여진 용어로서, 대개 근대 사회 이후에 나타난 소설의 새로운 주인공 유형을 일컫는다. 근대 사회의 소설 주인공들은 자신이 처한 세계가 행복하고 아늑한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 반항하거나 갈등을 겪는다. 그 결과 대개의 경우 광인이나 범죄자 등의 악마적인 성격을 지니거나, 사회의 보편적 가치 질서에 맞서는 이질적이고 소외된 인물로 나타나게 된다. 골드만은 루카치의 개념을 적용하여 소설을 "문제적 인물이 타락한 사회에서 타락한 방식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서사 양식"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 주인공의 대표적 유형으로 나타나는 인물은 '동 키호테'의 돈 키호테나 '적과 흑'의 줄리앙 소렐, '안나 카레리나'의 안나 카레리나,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 '이방인'의 뫼르소, '구토'의 로깡땡 등이 있고 우리 나라 소설에서는 '광장'의 이명준, '나무들 비탈에 서다'의 동호 같은 인물이 있다. ● 문체(style) 문체는 개인이나 학파 혹은 특정한 집단의 표현 양태로서 내용이 아니라 내용을 담는 방식, 즉 형식과 관련되는 문학적 작문의 면모를 의미하며, 소설적으로는 담론에 취해진 태도, 어조라고 할 수 있다. 문체는 작가의 개인적 역량이기도 하지만 사회적으로 보편화된 세계관의 문제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시대에 따라 문체도 변모되어 왔다. 문학에서 수사적 기능을 중시하는 입장은 문체를 내용이라고 보는 반면, 경험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입장에서는 문체를 단순한 형식이라고 한다. [작가들의 문체] 이광수 : 대중적이고 쉬운 교육적인 문체 김동인 : 짝막하고 박력 있는 문체 염상섭 : 지루한 묘사적 문체 이효석 : 시적 서정성을 띤 문체 김유정 : 아이러니에 찬 개성적인 문체 이 상 : 부정과 절규에 찬 개성적인 문체 채만식 : 판소리 사설의 문체 심 훈 : 평이하고 감성적이며 호소력이 강한 문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