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1부 산문을 어떻게 쓸까 서사문 쓰기 2 - 가치 있는 글은 어디서 오는가 (1/2) 먹는 이야기를 쓴 글 다음은 여중 3학년 학생이 쓴 밤을 먹은 이야기다. 여러분을 무엇을 먹은 이야기를 글로 쓴 적이 있는지, 이런 글을 어떻게 보는지 궁금하다. 밤 어제 엄마께서 경동시장에 가셔서 밤을 사 오셨다. 갈색의 윤기가 나는 알밤이었다. 동생들은 밤을 사 왔다며 좋아했지만 나는 그 밤이 싫었다. 옛날에는 밤을 무척 좋아했지만 작년부터 밤을 싫어한다. 이유인즉, 작년에 할머니께서 주셨다며 엄마께서 밤을 한 봉지 가져 오셨다. 우린 그 밤을 난로 위에 얹어놓고 밤이 익기를 기다렸다. 30분 정도 있으니까 밤 껍질이 갈라지면서 하얀 색의 밤살이 드러났다. 우린 서로 먹겠다며 서투른 솜씨로 밤을 까고 조그마한 밤알을 입속에 집어넣었다. 조금이라도 더 먹겠다는 경쟁 속에서 껍질도 다 까지 않고 그냥 입을 통과, 뱃속으로 들어갔다. 그때 입속에서 쫀든쪽든한 것이 톡 터지면서 단물이 흘렀다. 나는 그냥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계속 씹어대며 입속으로 밤을 연신 집어넣었다. 근데, 아무래도 이상해서 뱉어보니 까만색의 밤벌레가 몸이 어진 채로 내 입속에서 나왔다. 나는 너무 놀라서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동생들은 신이 나는지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엄마는 웃으시며 물을 가져다 주었다. 나는 그때 물을 무척이나 많이 마셨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종일 살다시피 했다. 나는 그후로 밤을 싫어한다. 그리고 밤만 보면 소름이 끼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밤을 먹고 있을 때는 무지무지 먹고 싶다. 그러나 나는 죽을 때까지 밤을 먹지 않겠다. 밤을 맛있게 먹다가 벌레를 씹고 놀란 이야기다. 이 글을 읽는 학생들은 어떤 느낌이 들까? 아마도 다음과 같은 몇가지 느낌을 가질 것이다. 1) 벌레를 씹어 먹었다니 얼마나 놀랐겠나. 끔찍한 일이다. 2) 나도 그런 일이 있었지만 그때 이처럼 놀라지는 않았다. 3) 이런 글이라면 나도 쓰겠다. 나도 이와 비슷한 일을 겪었으니까. 사람에 따라 온갖 의견이 나올 수 있겠지만, 대체로 이 세 가지 느낌이 가장 많으리라 생각한다. 밤을 먹다가 잘못하여 그만 밤 속에 들어 있던 벌레까지 먹게 되는 일은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겪을 수 있는 일이다. 더구나 밤을 먹는 것은 누구에게나 흔히 있는 평범한 일이다. 말하자면 이 글을 누구에게나 있는 일, 보통으로 겪는 일을 쓴 것이다. 이렇게 일상으로 겪는 일을 일상으로 하는 말로 쓴 글, 이런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뜻이 있는가? 우선 앞에서 든 것처럼 가장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다. 그리고 이런 글이라면 나도 쓸 수 있다 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곧 자기표현에 대한 의욕과 자신감을 가지게 한다. 또한, 쓴 사람에게나 읽는 사람에게 자기의 삶을 바로 보게 하고, 삶 속에서 자기를 바로 세워서 건강하게 살아가도록 하게도 한다. 참된 글쓰기는 이렇게 해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이런 글을 누구보다도 중고등학생들에게 읽히고 싶다. 중고등학생이 되면 대체로 자기가 나날이 겪는 일, 느낀 일을 솔직하게 쓰고 싶어하지 않는다. 근사해 보이는 것, 문인들이 쓴 글에서 흔히 나오는 것, 무슨 척하는 것을 쓰고 싶어한다. 더구나 우리 나라에서는 초등 학생 때부터 자기표현을 제대로 할 수 없게 하는 교육을 받아 왔기 때문에 중고등학생이 되면 더욱 이렇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와같이 자기가 겪은 조그만 일을 자기말로 쓰는 글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리어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고, 이 자리에서 좀더 많이 살펴볼 필요를 느낀다. 사람은 누구든지 하루도 빠짐없이 무엇을 먹는다. 그렇게 먹어야 목숨을 이어갈 수 있다. 그런데 먹는 것이 그처럼 중요하고 누구나 나날이 그것으로 살고 있는데, 어째서 먹는 이야기를 쓴 글이 드문가? 더구나 학생들의 글에서 그렇다. 먹는 것은 천하고 동물들이나 즐기는 것이고, 그래서 고상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덮어두어야 할 부끄러운 일인가? 그렇지 않다. 먹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목숨을 이어가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목숨을 이어가는 일이 어떻게 천하고 부끄러운 일이 될 수 있는가? 무엇을 먹는가, 어떻게 먹는가, 먹는 것을 어떻게 만들어 내는가 하는 일들을 걱정하고 연구하고, 그래서 그것이 잘 되도록 하는 것이 사람이 하는 정치고 경제고 역사고 학문이고 종교고 예술이고 문학이고 문화인 것이다. 아무리 근사해 보이는 예술이고 문학이고 철학이고 종교라 하더라도 그것이 사람의 목숨을 이어가는 먹는 것 을 대수롭잖게 여긴다면 그것은 필경 거짓밖에 안될 것이다. 따라서 학생들이 쓰는 글도 먹는 이야기가 많이 나와야 한다. 앞에서 든 글은 밤을 먹다가 생긴 일을 썼다. 밤이나 감같은 과일은 누구나 가끔 먹는다. 그런데 밥은 누구든지 날마다 먹는다. 밥을 먹는 이야기는 더 많이 글로 씌어져야 한다. 어떤 밥을 먹는가, 어떤 반찬을 먹는가. 어디서 누구하고 어떤 이야기를 하면서 먹었는가, 어떤 생각을 하면서 먹었는가. 요즘은 온갖 오염식품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런 오염식품을 먹은 이야기도 얼마든지 쓸 수 있다. 아무튼 중고등학생의 글은 시인이나 수필가나 소설가들이 쓰는 문학작품의 흉내를 글감과 제목에서부터 내려고 하다보니 솔직한 자기 이야기, 평범한 삶의 이야기가 잘 안 나온다. 그래서 대체로 뿌리가 없이 공중에 뜬 종이꽃처럼 되어 있기 예사다. 앞에서 보인 밤 이란 글은 이런 점에서 모두가 한번 읽어 볼 만한 글이라 생각한다. 자기가 겪은 일상의 일들을 자기가 하는 말로 정직하게 쓰는 것이 모든 글쓰기에서 가장 귀한 바탕이 되고 알맹이가 되는 것임은 초등 학생이나 중고등학생이나 육칠십 나이가 된 늙은이나 다 마찬가지이다. 뭔가 근사한 것, 보기 좋은 것을 찾고 말재주를 부리려고 하는 태도로 쓰게 되면 어른이고 아이고 아주 병든 글만 낳게 되어, 글을 쓰는 자신은 물론이고 그 글을 읽는 모든 사람을 해치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보기글 밤 이 읽는 이들에게 줄 좋은 면만을 말했다. 이제부터는 좀 문제가 되는 점, 좀더 잘 썼으면 하는 면에서 말해 보겠다. 자기가 보고 듣고 한 것을 정직하게 쓰는 것이 삶을 가구는 참된 공부가 되고 모든 글쓰기의 근본이 된다고 했다. 그러면 무엇이든지 겪은 것을 솔직하게 쓰기만 하면 되는가? 그렇지 않다. 체험을 쓴다는 것과 정직하게 쓴다는 것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그러면 무엇이 더 있어야 하나? 밤 이란 글을 다시 살펴보자. 이 글을 요약하면, 밤을 구워서 서로 많이 먹으려고 하다가 그만 밤벌레가 입안에 들어간 줄도 모르고 씹어 먹었다. 나중에야 벌레를 씹었다는 것을 알고 놀라서 물을 자꾸 마시고 화장실에 가고 했다. 그 뒤로는 밤이 싫어졌다. 나는 죽을 때까지 밤은 안 먹겠다. - 이렇다. 한 마디로 말해서 자기 심정과 기분을 그대로 쏟아놓기만 했다. 이렇게, 이런 정도로 써서는 국민하교 3,4학년이 쓴 글과 다를 것이 없다. 제 동생, 동생의 동생이 쓴 글 정도밖에 될 것이 없고, 동생의 동생쯤 되는 나이가 갖는 생활과 생각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고해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서야 하나? 어떤 생각이, 어떤 삶의 몸가짐이 더 있어야 하나? 앞의 글을 또다시 살펴보면, 밤은 먹기 싫다, 죽을 때까지 나는 밤을 안 먹겠다고 했는데, 그런 얕은 기분방출만 했지, 자기가 한 일에 대한 반성이나 자기가 가지게 된 그런 심정에 대한 검토는 조금도 없다. 그래서 이 글이 국민하교 중간학년 아이가 쓴 글 정도밖에 안 되고 만 것이다. 이 학생이 벌레를 씹어먹게 된 것은 동생들하고 서로 다투어 많이 먹으려고 보늬도 잘 까지 않고 먹어서 그렇다. 보늬를 잘 벗기지 않으면 벌레가 먹은 밤도 겉으로 나타나지 않으니 그렇게 된다. 벌레를 씹어 먹었다고 놀라고, 다시는 밤을 안 먹겠다고 했다면 마땅히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 반성을 해야 할 것인데, 동생과 서로 다투어 많이 먹으려고 한 것이 잘못이었다는 말은 한 마디도 쓰지 않았다. 또 한 가지, 밤벌레를 한 번 씹었다고 해서 앞으로 평생 밤은 안 먹겠다고 한 태도는, 중학교 3학년 학생의 나이만큼 그 마음이 자라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하면 밤알 속에 들어가 밤만 먹는 벌레란 얼마나 깨끗한 것인가? 사람은 온갖 짐승과 별의별 벌레를 다 잡아먹는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사람의 몸을 차츰 병들어 죽게 하는 갖가지 무서운 독이 든 약들을 빵과 과자와 음료수들에 넣어 고운 색깔을 만들고 향기를 풍기게 하고 달콤한 맛을 들여서 먹게 하고 있는데, 이 글을 쓴 학생도 그런 가공 식품은 즐겨 사 먹을 것이다. 그런데 밤벌레 한 번 씹었다고 다시는 밤을 안 먹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물론 나는 밤 이란 글을 쓴 학생이나 이 학생과 별로 다름없는 태도로 살아가는 청소년들에게, 달콤한 가공식품을 사 먹는 것보다 차라리 벌레 먹은 밤을 벌레가 들어 있는 그대로 먹는 것이 천 배 만 배 건강에 좋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그렇게 말한다고 벌레 먹은 밤을 그대로 먹을 사람은 없을 것이고, 또 밤만 먹으면 됐지 벌레까지 먹을 것은 없다고 본다. 다만 벌레 먹은 밤을 그대로 먹었다고 해서 죽을때까지 밤을 먹지 않겠다는 그런 어리석고 좁은 마음의 울 안에서 마땅히 벗어나야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지금까지 말한 것을 다시 되새겨 말하면, 글은 자기가 겪은 일을 정직하게 쓰는 것이 기본이라 할 수 있지만, 그렇게 정직하게 쓰기만 하면 다 되는 것이 아니고, 다시 또 남들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글을 써야 한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가치가 있는 글을 쓰려면 가치가 있는 삶을 살아야 하고, 가치가 있는 생각을 해야 한다. 글쓰기가 어렵다면 바로 이것이 어려운 것이다. 이제 이 글에서 말을 어떻게 썼는가, 표현을 어떻게 하였는가를 보기로 하자. - 옛날에는 밤을 무척 좋아했지만 작년부터 밤을 싫어한다. 이유인즉, 작년에 할머니께서 주셨다면 엄마께서 밤 한 봉지를 가져 오셨다. 옛날에는 했는데, 작년 에 그런 일이 있었으니 옛날이란 말은 맞지 않다. 지지난해까지는 하든지 재작년까지는 이라고 써야 옳다. 이유인즉 이란 말은 이유도 까닭 이란 우리말이 좋고, -인즉 도 글말이니 입으로 하는 말 -는 이란 토를 쓰는 것이 좋겠다. 그러니까 까닭은 이 된다. 그런데 이 글월에서 까닭은... 해 놓고 그 까닭이 적혀 있지 않다. 그러니까 까닭은 이렇다. 고 해서 한 글월을 따로 만드는 것이 좋겠다. 할머니께서 주셨다면 어머니.. 이렇게 께서 가 거듭 나오는 것이 문제다. -께서 를 다 없애고 할머니가 주셨다며 어머니가.. 해도 되고 할머니께서 만 -께서 를 붙여도 된다. 초등 학생들이 글을 쓸 때 엄마께서 아빠께서 이렇게자꾸 께서 를 붙이는데, 실제 말에서는 안 쓰는 께서 를 자꾸 붙이는 것은 교과서의 글과 시험 문제가 이렇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엄마가 오셨다. 고 하면다 되는 것이지 엄마께서 오셨다. 고 할 필요가 없고, 그런 말을 없는 것이다. -께서 가 자꾸 들어가면 글이 어설퍼지고, 우리말의 아름다움이 사라진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30분 정도 있으니까 밤 껍질이 갈라지면서 하얀 색의 밤살이 드러났다. 난로 위에 얹어 놓은 밤이 익는데 30분이나 걸리는가? 그리고 밤살이 하얀 색인가? 이런 것을 자세하게 쓰지 않더라도 틀리게 써서는 안되는 것이다. - 조금이라도 더 먹겠다는 경쟁 속에서 껍질도 다 까지 않고 그냥 입을 통과, 뱃속으로 들어 갔다. 더 먹겠다는 경쟁 속에서 는 더 먹겠다고 서로 다투어 라고 쓰는 것이 더 알맞은 말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껍질도 다 까지 않고 했는데 이 껍질 은 두꺼운 겉껍질이 아니고 속껍질이니 보늬 라고 해야 한다. 그냥 입을 통과... 이렇게 쓴 것은, 밤을 씹지도 않고 그냥 꿀떡 넘긴 것 같다. 글은 천천히 알맞은 말을 골라서 공을 들여서 써야지 거칠게 아무렇게나 마구 써서는 안된다. - 까만 색의 밤벌레가... 밤벌레가 까맣던가? 밤 알맹이와 비슷한 색이라고 나는 알고 있는데.. - 화장실에서 종일 살다시피 했다. 어느정도 사실인지 의심스럽다. 사실이면 사실같이 써야지. - 그리고 밤만 보면 소름이 끼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밤을 먹고 있을 때에는 무지무지 먹고 싶다. 밤만 보면 소름이 끼치는데, 한편 또 그것을 무지무지 먹고 싶다니, 어찌된 것인가? 소름이 끼친다는 감정과 무지무지 먹고 싶다는 욕구는 한꺼번에 일어날 수 없다. 아마도 먹고 싶다고 한 말이 진정일 듯 싶은데, 그렇다면 소름이 끼친다는 말은 부풀린 말이거나, 그 앞까지 써온 말을 되풀이해서 강조하다 보니 거짓이 된 말인지 모르겠다. - 그러나, 나는 죽을 때까지 밤을 먹지 않겠다. 무지무지 먹고 싶다고 해 놓고는 이렇게 마지막을 맺었는데, 그러고 보니 이 말도 밤만 보면 소름이 끼친다는 말을 살리기 위해서 쓴 것같이 느껴진다. 무지무지 먹고 싶은 걸 뭐 때문에 죽을 때까지 먹지 않겠다고 다짐해야 하는가? 그래야만 밤벌레를 먹고 혼이 났다고 써 놓은 글이 살아나는가? 글을 살리기 위해 자기를 속여서는 안된다. 그래서는 절대로 글이 살아날 수 없다. 정직하게 쓴 글이라고 했는데, 자세하게 살피니 이런 문제가 또 드러난다. 글쓰기에서는 일부러 거짓을 쓰려고 할 때만 거짓이 되는 것이 아니다. 글의 어떤 모양을 내어 보이려고 한다던가, 자기가 한 말을 자꾸 강조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말이 부풀어져서 정확하지 않은 말이 되기도 한다. 그런 것이 거짓으로 읽힐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사물을 정확하게 그려 보이는 것도 그렇지만 더구나 자기 감정이나 생각을 빈틈없이 성실하게 나타낸다는 것은 여간 힘드는 것이 아니고, 정직하게 쓴다는 그 자체가 하나의 높은 가치가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꽃씨와 도둑 - 금아 피천득 선생님께 마당에 꽃이 많이 피었구나 방에는 책들만 있구나 가을에 와서 꽃씨나 가져가야지 가끔 큰 욕심에 눈먼 이들을 보거나 특히 요즘처럼 엄청난 비자금 파문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할 때 다시 읽어 보는 피천득 선생님의 `꽃씨와 도둑`이란 짧은 시는 포근한 감동으로 우리를 미소짓게 합니다. 또한 선생님의 소박하고 단순한 삶의 모습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방금 저는 선생님의 시집 <생명>을 동네 책방에서 사들고 오는 길입니다. 지난번에 직접 사인해서 보내 주신 책은 다른 수녀님들도 읽게 하려고 도서실에 내어 놓았기에 다시 읽고 싶어 제 몫으로 하나 구한 것이지요. 이번 가을엔 큰 상 -인촌상-을 받으셔서 선생님을 아끼고 존경하는 이들로부터 정성스런 축하도 많이 받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처음에 그 소식이 신문에 보도되었을 때 저는 즉시 그 기사를 오려서 독일에 있는 선생님의 열렬한 애독자인 김효정 씨에게 보냈답니다. 거의 20년 전 봄, 제가 시인 홍윤숙 선생님과 함께 라일락 향기 가득한 망원동 댁으로 찾아뵈었을 때 청빈하고 겸허한 수사님같이 느껴졌던 선생님의 첫인상은 지금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지금은 아파트에 사시지만 가구 하나 없이 텅 빈 마루와, 서재라고 하기엔 너무도 자그만 선생님 방의 낡은 책상과 의자, 오래된 영문 시집들이 꽂혀 있는 작은 서가와 사랑하는 가족들과 시인들의 사진이 놓여진 선생님의 낯익은 방을 저는 자주 떠올려 보곤 합니다. 제자들이 선물했다는 녹음기로 음악도 즐겨 들으시고 시인들의 육성으로 된 시 낭송도 자주 들으시는 선생님은 가끔 저에게 시나 수필을 읽게 해 녹음하시기도 했습니다. 위스키 한 방울도 살짝 떨어뜨려 손수 타주시는 커피를 마시며 선생님의 옛 앨범이나 친필로 써놓으신 좋은 글모음 노트도 감상하는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건 내가 좋아서 뽑아 놓은 수녀님의 시 한 구절인데..." 뜻밖에도 저의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의 몇 구절을 보여 주시며 환희 웃으시던 선생님의 그 말씀은 얼마나 기쁘고 놀랍던지 저는 부끄러움도 잊고 선생님의 귀한 노트를 몇 번이나 다시 들여다보곤 했습니다. "슬프고 어두운 이야긴 신문에서만 읽어도 넉넉하니 수녀님은 제발 맑고 아름다운 글을 더 많이 써주세요"하고 저를 만날 때마다 당부하시던 선생님. 어쩌다 선생님 댁을 방문하고 늦은 시간에 수녀원으로 돌아올 때면 택시를 태워 집 앞까지 바래다 주곤 하셨던 선생님. 잠시 해외에 다녀온다고 제가 비행장에서 전화를 드리면 "아이구 어쩌나, 내가 비행장에 나갔어야 하는데..."하시며 안타까움을 표현하시던 선생님의 정겨운 음성을 저는 오래도록 기억할 것입니다. 오랜 세월 선생님을 가까이 뵈면서 저는 친절과 겸손이 어떤 것인가를 배웠습니다. 가끔 선생님과 함께 산책을 하거나 아름다운 연극, 영화, 음악을 감상하게 되면 선생님의 그 유명한 수필 `반사적 광영`에서처럼 저는 선생님 덕분에 더욱 기쁘고 행복해지는 시간들을 고마워했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뵈올 때 동반하고 간 손님이 프로스트, 셸리, 예이츠 등등 시인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후한 점수를 주시던 모습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해마다 부활절과 성탄절이면 극히 간결한 축원의 말과 이름만 써서 보내 주시는 카드들인데도 선생님의 육필이 소중하게 여겨져 버리지 않고 모아 두었습니다. 평소에 말씀이 적으시듯이 수필과 시도 적게 쓰시고, 쓰시더라도 워낙 절제된 표현을 쓰시니 선생님의 글씨 한 조각이 더욱 귀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은 묵은 달력에서 떼어낸 르느아르와 모네의 그림 중 한 장을 보여 주시며 선택하라고 하셔서 제가 두 장 다 갖고 싶다고 했더니 매우 아까워하시며 한 장을 주시던 그 모습도 즐거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늘 아름다운 그림카드나 엽서를 보며 행복해 하시는 소년 같은 모습은 여든이 훨씬 넘으신 지금도 여전하십니다. "산책을 즐기고 약간의 엽서를 모으며 살았다"는 선생님의 고백이 가슴 찡하게 울려올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그림 엽서나 카드를 보면 선생님을 기억하게 됩니다. 오늘은 영문학사에 나오는 시인들의 생가와 글귀가 들어 있는 엽서 몇 장을 저의 조그만 선물로 선생님께 보내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 고마운 사람들을 기억하며 우리 마음에 따스한 등불을 켜는 12월엔 선생님께서도 최소한 몇 장의 카드나 엽서를 쓰시겠지요? 몇 해 전 왕적과 예이츠의 시를 적어 주신 카드, 피사로의 `감자 줍는 이들`과 미국의 어느 현대화가의 `하얀 다리` 그리고 라파엘로의 성모상이 그려진 카드들은 선생님이 보내 주신 것들 중 제가 특별히 아끼는 것입니다. 전화 드릴 때마다 "네에..."하고 길게 빼는 음성으로 정성스럽게 대답하시는 선생님, 지난번 해외여행은 무사히 다녀 오셨는지요? 가장 사랑하시는 따님, 아드님, 손자, 손녀들과도 정겨운 시간을 가지셨을테지요. 유리 그림이 아름다운 성당에도 더러 가보셨는지요? "난 너무 이기적으로 살아와서 영세받을 자격이 없다"고 미루시다가 이제는 고인이 되신 예수회 김태관 신부님으로부터 교리와 영세를 받으셨을 때 저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자연과 인간을 사랑한 따뜻한 마음의 시인. 청빈한 삶의 모델인 성 프란치스코의 이름이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선생님께 보내 드릴 카드를 준비하다가 예전에 제게 보내 주신 편지 한 통을 다시 읽어 봅니다. `주신 편지 감사합니다. 글월 받는 것만도 영광이온데 분에 넘치는 말씀을 주셔서 송구합니다... 저는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직도 자기중심으로 살고 있습니다. 좋은 것, 아름다운 것만을 찾고 마음에 맞는 사람만을 대하려 듭니다.미운 것, 불결한 것은 피하려고만 들고 많은 불행한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살아갑니다. 자기중심에서 벗어나는 구원을 받아야겠습니다. 얼마 전 수녀님께서 편찮으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건강을 소중히 하시기 바랍니다. 모쪼록 문복이 가득하시기를...` 당신 스스로를 늘 이기적이라고 자책하시는 선생님의 겸허한 글은 이기적이면서도 깊이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저를 반성하게 합니다. 끝으로 선생님게서 근래에 쓰신 듯한 `고백`이란 시 한 편을 조용히 낭송하며 이 글을 맺습니다. 머지않아 서울이나 부산에서 만나 뵐 수 있길 기대하며 그동안은 기도 안에서 뵙겠습니다. 정열 투쟁 클라이맥스 그런 말들이 멀어져 가고 풍경화 아베 마리아 스피노자 이런 말들이 가까이 오다 해탈 기다려지는 어느 날 오후 걸어가는 젊은 몸매를 바라다본다 진정 한 폭의 수채화 같고, 아베 마리아의 선율처럼 잔잔한 선생님의 날들에 주님의 축복과 은총이 함게하시길 빕니다. (1995. 3)
Board 삶 속 글 2022.10.08 風文 R 581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이무영편" 이무영(1908~1960) 소설가. 충북 음성 출생. 일본에서 중학을 나와 작가 가토다케오의 문하에서 4년간 작가 수업을 함. 이무영은 초기에 무정부주의적인 경향을 보였으나 1939년부터 6.25사변 때까지 농촌에 파묻혀 주로 농촌 소설을 썼다. 그는 농촌을 먼 데서 바라다보며 쓴 작가가 아니었고 직접 농촌 생활에 젖었던 본격적인 농민 작가였다. 6.25사변 후에는 잠시 시정 문학에 손을 대기도 하였다. 낙엽과 문학 귀뚜라미, 달, 낙엽, 단풍..., 우리는 이런 낱말들만 보고서도 흔히 시정을 느낀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가 지금까지 읽어 온 시 속에는 가을을 소재로 한 것이 제일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가을을 소재로 한 대부분의 문학 작품이 감상에 깊이 빠지고 있음도 사실이 아닐까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문학하는 태도를 한 번쯤 반성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낙엽이니 단풍이니 하는 것이 다 문학의 좋은 소재가 되는 것임엔 틀림이 없지만, 이를 보고 다만 감상에 빠지는 데서 끝나고 만다면, 이것은 결국 우리 문학을 나약하게 만들 위험성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을을 조락의 계절로만 파악하여 애수에 사로 잡힐 것이 아니라 이를 극복하는 문학의 길을 개척해야겠다. 애수니 감상이니 하는 것도 물론 때로는 필요한 것이겠지만, 남들이 달나라를 여행하는 오늘, 우리만이 안이한 데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사실, 가을이 되어 나무가 그 잎을 떨어뜨리는 것을 그 나무의 신진 대사지 생병이 다 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 가을 봄을 위한 준비요, 새 생활을 위한 생명력의 보강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문학도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다만 피상적으로만 보고서 영탄조에 머물리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좀더 젊어져야겠다. 우리의 문학도 좀더 젊어져야겠다. 지는 잎을 바라보며 애수에 잠기는 감상 문학에서 벗어나, 새봄을 준비하는 낙엽의 내적 생명력을 파악하여 그것으로 충일한 문학을 이룩해야겠다. 문학은 넋두리가 아니다. 푸념일 수도 없다. 그것은 생명감이 약동하는 젊음이어야 하고, 신비를 극복하는 과학이라야 한다. 우리는 이 이상 은일을 미덕으로 삼을 수도 없고, 후퇴를 달관시할 수도 없다. 나아가야 한다. 극복해야 한다. 태산보다 더한 장해물이 있다 할지라도 이와 대결하여 새로운 국면을 개척해야 한다. 서재에 가만히 앉아 창 밖에 지는 잎을 바라보며 한숨이나 지을 것이 아니라, 대지 위에 버티어 서서 대자연의 추이를 관찰하고 과학하고, 그럼으로써 생명력으로 충일한 문학을 이룩해야겠다. 남들이 달나라에 기를 꽂았다는 사실에 우리는 좀더 경이를 느껴야겠다. 우리가 달을 바라보며 애수에 젖어 있을 때, 그들은 달을 과학했고, 마침내 달을 정복하고 말았다. 우리는 이 사실 앞에 좀더 놀라야 하고, 이 사실로써 우리 자신을 반성하는 계기를 삼아야겠다. 그들은 멀지 않아 대우주를 과학한 새로운 문학을 창조할 것이다. 무기력과 겸허의 미덕이 혼동되던 시대는 벌써 지났다. 애수나 감상으로써 심금을 울리던 시대도 이미 아니다. 정원에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애수에 잠기던 창가에서 떠나야겠다. 단풍도 좋고 낙엽도 좋다. 우리는 감상을 극복하고 거기서 대자연의 섭리를 발견해야 하며, 그것을 문학화해야 하겠다. 지금 말하거니와, 낙엽은 생명의 종식이 아니라 생명력의 보강을 의미한다. 우리는 낙엽에 대한 일체의 기성 관념을 버리고 생명력으로 충일한 새로운 낙엽부를 창조해야겠다.
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평정을 잃지 말고 요청하라 나는 강인하고 야심만만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래서 나를 화낭년이라 한들 상관없다. - 마돈나 제이 아브라함 우리 아버지는 크리스마스와 새해 전야 사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US 항공에 전화를 걸어 '친족 사별' 특별 적용을 받아 여덟 장의 항공권을 구했다. 우리는 공항에 도착해서 탑승권을 받기 위해 세 시간이나 줄을 서야 했다. 그렇게 힘들게 우리 차례가 돌아왔을 때, 카운터 직원은 항공사 측에서 비행기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행편이 취소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나는 좌석 확인 항공권을 갖고 있으면, 예약 항공사의 비행 스케줄에 차질이 생겨도 다른 항공사를 이용할 수 있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났다. 하지만 예약 당사자가 요구할 경우에만 항공사에게 그렇게 해준다는 것이었다. 다음 편은 TWA 항공사의 비행기였고, 출발 시간이 이제 세 시간도 남지 않았다. 게다가 출발 탑승구가 이곳과 정반대 쪽에 있었다. 혹시 모르는 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말씀드리건대, 로스앤젤레스 공항은 매우 넓어서 극과 극의 터미널을 가려면 셔틀 버스를 타고 반 마일이나 이동해야 한다. 특히, 걸을 수도 없는 먼 거리의 터미널까지 여덟 명의 사람이 12개의 가방을 들고 가는 경우에는 아예 셔틀 버스를 한 대 임대해야 한다. 정규 셔틀 버스로는 어림도 없다. 그래서 나는 그곳까지 가는데 셔틀 버스를 임대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줄에 서서 기다리는 형편이었다. 나는 말했다. "이렇게 비행 편이 취소되었으니, 당신네들은 어떻게 할 겁니까?" 우리는 냉정하고 침착했다. 직원이 말했다. " 다른 비행기를 예약하는 것은 당신 책임입니다." "왜요?" "비행 편이 취소되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좋습니다! 나는 비행 좌석을 예약하고 확인했는데, 당신네 항공사가 비행 스케줄을 이행할 수 없다는 내용의 '사유서'를 써 주십시오. 그리고 당신은 나에게 다른 회사의 항공권을 사줄 권리나 의무가 없다고 했으니까, 당신 상관에게 그 '사유서'에 서명을 받아 주시오." 나는 기다렸다.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다른 분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잖아요." "그게 무슨 대수입니까? 어차피 다음 세 시간 동안 다른 이착륙 비행 편도 없잖소. 다른 사람들이 뭘 할 수 있겠소?" 우리는 냉담한 태도를 유지했다. 간단히 말해서, US 항공사는 우리에게 겨우 TWA 항공권을 구해줬다. 연말 연시에 항공권 구하기란 하늘에 별 따기만큼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RWA 카운터로 갔다. 그곳은 생지옥이었다. 항공사 직원들은 작은 727기종에 이미 비행이 취소된 승객들을 억지로 쑤셔 넣으라고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을 동반했기 때문에 직원들에게 요청했다. "우리가 함께 앉아서 갈 수 있도록 해주시겠습니까?" 그들은 노력하겠노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탑승권을 받아 보니, 기가 막혔다. 우리 여덟 명 중에서 나란히 앉아 가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어쨌든 우리는 마침내 비행기에 탑승했다. 우리의 첫 번째 좌석은 칸막이 옆이었다. 우리는 승무원에게 바깥쪽 통로에 앉은 승객에게 좌석을 바꿔 달라는 부탁을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노발대발하며 우리에게 말했다. "절대로 안돼요! 나는 6주일 전에 예약했단 말이오. 나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소. 나는 여행을 오래 했기 때문에 휴식이 필요하오" 나는 성질이 났다. 하지만 아내가 웃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뭐가 웃기지? 그녀는 내가 보지 못한 뭔가를 봤구나.' 그녀는 가방에서 자동차를 베이비 시트를 꺼내서 그 남자의 옆자리에 그것을 묶은 다음에 우리의 생후 여섯달된 아이를 앉혔다. 그리고 그 남자에게 우유병을 건네며 말했다. "아이가 조금 울면 이것을 주고, 더 크게 울면 저것을 주세요." 그녀는 남자에게 아이를 닦아줄 냅킨을 주고 자리를 떠났다. 그 순간, 나는 이것이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인생을 보는 방법임을 깨달았다. 우리가 문제가 없음을 깨닫는다면, 다른 사람이 문제를 가진다는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Board 추천글 2022.10.08 風文 R 1704
괄목상대(刮目相對) 刮:비빌 괄. 目:눈 목. 相:서로 상. 對:마주 볼?대할 대. [출전]《三國志》〈吳志 呂蒙傳注〉 눈을 비비고 본다는 뜻. 곧 남의 학식이나 재주가 전에 비하여 딴 사람으로 볼 만큼 부쩍 는 것을 일컫는 말. 삼국시대(三國時代) 초엽, 오왕(吳王) 손권(孫權:182~252)의 신하 장수에 여몽(呂蒙)이 있었다. 그는 무식한 사람이었으나 전공을 쌓아 장군이 되었다. 어느 날 여몽은 손권으로부터 공부하라는 충고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전지(戰地)에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手不釋卷(수불석권)]’ 학문에 정진했다. 그 후 중신(重臣) 가운데 가장 유식한 재상 노숙(魯肅)이 전지 시찰 길에 오랜 친구인 여몽을 만났다. 그런데 노숙은 대화를 나누다가 여몽이 너무나 박식해진 데 그만 놀라고 말았다. “아니, 여보게. 언제 그렇게 공부했나? 자네는 이제 ‘오나라에 있을 때의 여몽이 아닐세[非吳下阿蒙]’그려.” 그러자 여몽은 이렇게 대꾸했다. “무릇 선비란 헤어진지 사흘이 지나서 다시 만났을 땐 ‘눈을 비비고 대면할[刮目相對]’ 정도로 달라져야 하는 법이라네.” [주] 여몽 : 재상 노숙이 병사(病死)하자 여몽은 그 뒤를 이어 오왕 손권을 보필, 국세(國勢)를 신장하는데 힘썼음. 여몽은 촉(蜀) 땅을 차지하면 형주[荊州:호남성(湖南省)]를 오나라에 돌려주겠다던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유비(劉備)의 촉군(蜀軍)을 치기 위해 손권에게 은밀히 위(魏)나라의 조조(曺操)와 화해, 제휴할 것을 진언, 성사시키고 기회를 노렸음. 그러던 중 형주를 관장하고 있던 촉나라의 명장 관우(關羽)가 중원(中原)으로 출병하자 여몽은 이 때를 놓이지 않고 출격하여 관우의 여러 성(城)을 하나하나 공략(攻略)한 끝에 마침내 관우까지 사로잡는 큰 공을 세움으로써 오나라의 백성들로부터 명장으로 추앙을 받았음.
Board 고사성어 2022.10.08 風文 R 806
오촌 아재 옛 시골에선 겨울에 산문이 열린다. 이웃들이 함께 산에 올라 땔감을 한다. 하지만 어찌 한날한시에 다 모일 수 있으랴. 노가다판에 가 있기도 하고 낫질하다 손가락이 상해 못 나오기도 하지. 으스름 저녁 이고지고 온 나무를 마당에 부리고 나면, 분배가 문제. 식구 수에 따라 나누자니 저 집은 한 사람밖에 안 나왔다고 투덜. 똑같이 나누자니 저 집 나무는 짱짱한데, 내 건 다 썩어 호로록 타버리겠다고 씨부렁. 거기에 오촌 아재 등장. ‘오촌’은 ‘적당한 거리감’의 상징. 막걸리잔 부딪치며 ‘행님 나무가 짱짱하니 고 정도로 참으쇼.’ ‘저 동상네 아부지가 션찮으니 몸이라도 지지게 좀 더 줍시다.’ 한다. 다툼은 쪼잔한 데서 시작된다. 우리 동네에서도 마을정원 일을 해야 했다. 방역조치 때문에 화요일과 금요일 반으로 나눠 일을 했다. 마치고 점심을 먹자니 화요일 반에선 밥 먹는 데 돈 쓰지 말라며 사양, 금요일 반은 일 마치고 차 타고 퇴비 사러 갔다 오다 늦은 점심을 먹은 게 탈이었다. 누군 사주고 누군 안 사주었네, 친한 사람들끼리 먹었네 하며 마을 여론이 두 갈래로 쩍 갈라졌다. 자율적 공동체가 역동성을 갖추려면 적어도 네 가지 유형의 인물이 필요하다(가타리, <미시정치>). 어린이(미래), 국가(외부 자원), 이웃 주민(동료), 그리고 대안적 인물(상상). 그는 자유의 공간을 창조하는 인물이자 당면한 사태 너머를 보는 사람이다. 험담이 퍼져나가지 않게 움직이며 활로를 찾아낸다. 그의 가장 큰 역할은 ‘말’을 건사하는 일이다. 어디든 오촌 아재 같은 사람이 있으면 흥하고, 없으면 졸한다. 풀어쓰기 영어처럼 한국어도 옆으로 풀어쓰면 어떨까. 낯설겠지만 아래 시를 읽어보자. ㅈㅜㄱㄴㅡㄴ ㄴㅏㄹㄲㅏㅈㅣ ㅎㅏㄴㅡㄹㅇㅡㄹ ㅇㅜㄹㅓㄹㅓ ㅎㅏㄴ ㅈㅓㅁ ㅂㅜㄲㅡㄹㅓㅁㅇㅣ ㅇㅓㅄㄱㅣㄹㅡㄹ (윤동주, ‘서시’). 나는 지금도 지인들한테 보내는 이메일에 ‘ㄱㅣㅁㅈㅣㄴㅎㅐ’라 쓰곤 한다. 재미있기도 하지만 음소문자인 한글의 또 다른 표기 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풀어쓰면 좋은 점이 있다. 영어 필기체처럼 글씨를 더 빨리 쓸 수 있고, 컴퓨터 글자체(폰트) 개발에도 시간을 ‘엄청’ 줄일 수 있다. ‘걎, 걞, 겏’이나 ‘뷁’처럼, 한글로 만들 수 있는 음절수는 무려 1만1172자이다.(한자에 이어 세계 2위!) 이 중에서 흔히 쓰는 음절 2350자는 반드시 디자인을 해야 한다. ‘ㅇ아안않우울오올의궁굉’에 쓰인 ‘ㅇ’이 다 다르게 생겼으니 말이다. 풀어쓰기를 하면 ‘ㅇ’을 하나만 디자인하면 된다. 폰트 디자이너도 저녁 있는 삶이 가능해진다. 주시경을 시작으로 그의 제자 최현배(남), 김두봉(북)이 풀어쓰기를 주도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의 꿈이기도 했다. 이들에게 문자 개혁의 종착지는 풀어쓰기였다. 문익환 목사도 감옥에 있으면서 풀어쓰기 연구에 몰두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쓰지 않는다. 익숙한 모아쓰기에 정통성을 부여한다. 현실이 궁극의 합리성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을 결여나 불합리로 보지 않는다. 못 미치면 못 미치는 대로 그 속에서 이치를 찾고 습관을 들인다. 문화는 논리보다는 습관에 가깝다. 사람의 발자국이 쌓여 길이 만들어지면 꼬부랑길일지라도 그게 가장 편하고 자연스럽다.
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1부 산문을 어떻게 쓸까 서사문 쓰기1 (2/2) 가까운 사람의 이야기부터 우리가 쓰는 글에서 가장 많은 글이 누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여, 어찌 되었다는 이야기를 쓰는 서사문 이다. 소설도 서사문이다. 어린이고 어른이고 많은 사람들이 날마다 쓰는 일기도 거의 모두 서사문이다. 기행문도 서사문이라 할 수 있고, 감상문도 서사문이 그 안에 들어 있기가 예사다. 수필이나 조사 보고문에서도 서사문이 끼어드는 수가 많다. 이 서사문은, 그 글 안에서 동물이나 식물이 임자 노릇을 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대개는 사람이 임자가 되어 있는, 사람의 이야기다. 그리고 이 사람의 이야기를 쓴 글은 나 곧 자기가 무엇을 한 이야기를 쓰는 글과, 자기가 아닌 남의 이야기를 쓰는 글,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남의 이야기를 쓰는 경우, 초등 학생이라면 제 동생의 이야기를 많이 쓰겠지만, 중고등학생이라면 부모님 이야기나 이웃 사람들의 이야기를 흔히 쓰게 된다. 여기서 부모님 이야기를 쓰는 글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부모님 이야기를 쓸 수가 없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누구든지 한 차례는 부모님이 살아오신 이야기를 써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 까닭은 무엇보다도 부모님은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사람이기에 자기만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잘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가 살아오신 이야기를 쓰는 것은 가족의 역사를 적은 일이다. 가족의 역사를 찾는 일은 자신의 뿌리를 찾는 일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뿌리를 알아야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붙잡을 수 있고, 자기를 올바르게 지키고 키워갈 수 있다. 셋째, 아버지 어머니가 세상을 살아오신 이야기를 쓰게 되면 저절로 깨끗한 우리말로 쓰게 된다. 적어도 다른 글보다는 덜 오염된 글을 쓰게 된다. 그 까닭은, 책에 씌어 있는 글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니고, 지식이나 교훈은 귀로 들었던 말로 쓰는 이야기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세상을 몸으로 살아온 이야기를 쓰기 때문이다. 앞에서 부모님 이야기를 나 가 아닌 남 의 이야기라고 했지만, 그것은 나 와 나 아닌 사람을 구별했기에 그렇게 말한 것이지, 사실 어머니 아버지는 남이 아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옛날부터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 라고 말했고 지금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부모님의 이야기를 쓸 때는, 자기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보고 듣고 함께 살아온 동안의 일들은 바로 겪었던 일이기에 잘 생각해 내기만 하면 쓸 수 있지만, 자기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나 나서도 너무 어려서 기억할 수 없었던 때의 일은 부모님이나 그 밖의 가족들한테 들어서 쓰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렇게 듣고 또, 더러 필요할 때는 조사도 해서 쓰게 되는 이야기가 더 많은 것이 예사다. 어느 정도로 길게 쓰나 하는 것도 미리 작정해서 얼거리를 잘 잡아야 한다. 2백자 원고지로 백 장 쓸 수도 있고, 열 장이나 스무 장쯤 쓸 수도 있다. 길이에 따라 쓸 내용도 정한다. 물론 문체도 합니다 로 할지 한다 로 할지 미리 작정해 두어야 되겠지. 다음에 드는 글은 어느 중학교 졸업반 학생들이 만든 문집에 들어 있는 글이다. 이 글을 읽고 어머니 아버지가 살아오신 길을 저마다 찾아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여기 씌어 있는 말도 눈여겨보기 바란다. 어머니가 살아오신 길 - 이연자 1931년 6월 14일 새벽, 사람들이 고요히 잠들어 있는 사이에 평일도의 풀 냄새 나는 골짜기에서 우리 어머니는 태어나셨다. 차근차근 나이를 먹어서 학교 갈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 집은 너무나 가난해서 학교는커녕 밥 한 끼도 제대로 배불리 먹어 볼 때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는 남의 집에서 남의 아이를 봐 주면서 자랐다. 해가 동산에서 뜨기도 전에 일어나 험한 삼으로 나무를 하러 가곤 하셨다. 촌구석에서 이렇게 저렇게 사시다가 어느 아주머니의 소개를 받고 18살 한찬 꽃다운 나이에 월송리라는 아주 큰 동네로 시집을 왔다. 그러나 시어머니, 시아버지 아래서 생활하면서 아주 어렵게 살았다. 몇 년이 흘러서 시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시어머니만 남으셨다. 맨 처음 시집 왔을 때는 시아버지께 사랑을 받았으나 이제는 시어머니 눈치를 보며 지옥 같은 생활을 했다. 날이면 날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남의 마을 산까지 올라가서 나무를 한 짐씩 해와서 아침밥을 지으셨다. 또 집안 일을 조금 하다가 점심이 되면 산을 향해 달렸다. 깊은 산속에 들어가 나무를 하다가 다쳐서 멍들기도 했지만 꾹 참고 살아오셨다. 23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는 우리 큰언니를 낳으셨다. 힘들게 낳은 아이가 딸이었기 때문에 월송리에서 무섭다고 소문난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께 밥 한 깨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는 계속 일만 하셨다. 몇 년이 흘러 우리 둘째 언니가 태어났다. 이제는 시어머니뿐만 아니라 시누이한테까지도 아들을 못 낳는다고 구박을 받았다. 그후 우리 어머니는 더욱더 실망과 좌절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시어머니는 딸만 낳는다고 허구헌날 아이를 등에 업도 일을 하게 했다. 그후 몇 년이 흐르고 또 흘러 어머니는 아이를 또 낳으셨다. 그런데 이게 또 무슨 난리인가? 또 딸이었다. 시어머니와 아버지는 쓸모 없는 딸만 낳는다고 하시면서 재혼까지 하려고 하셨다. 어머니는 날마다 눈물과 괴로움 속에서 사셨다. 또 몇 년이 흘렀다. 아이를 낳았다. 딸이었다. 이젠 동네 사람들조차도 손가락질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일을 하러 나갈 때마다 고개를 못들고 다니셨다. 날마다 마음만 아플 뿐이었다. 몇 년이 흘렀다. 어머니는 또 아이를 낳으셨다. 듬직한 아들이었다. 어머니는 동네 잔치를 벌일 만큼 기분이 좋으셨다. 시어머니는 손자를 보고 몇 달 더 사시다가 세상을 뜨셨다. 어머니는 이제 안심이 되었다. 아들을 낳으셨으니까 말이다. 어머니는 아들을 업고 춤을 추면서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하러 다니셨다. 동네 사람들은 우리 어머니께 고생했다고 등도 두드려 주고 하면서 잘 대해 주었다. 몇 년이 흘러 어머니는 또 아들을 낳으셨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풍이 많이 걸려서 고생을 하셨다. 몇 년이 흘러 아이를 또 낳으셨다. 또 아들인 줄 알았는데 쓸모 없는 딸이었다. 나이를 많이 먹도록 아이를 낳으셨기 때문에 어머니는 병을 얻으셨다. 그래서 아버지는 탕약을 사서 어머니를 보해 주셨다. 그 탕약을 먹고 나서 몸이 점점 좋아지셨다. 세월이 흘렀다. 막내딸이 5학년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신장을 앓으셨다. 몸이 부었다. 그래서 가난한 살림에도 병원에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집에는 돈도 없었고 또 수술을 한다 해도 어머니 몸이 너무 약해서 수술을 할 수 없었다. 병원에서 그냥 약만 먹고 몸 부은 것만 빼고 집에 돌아오셨다. 1년이 흘러 막내딸이 6학년이 되었다. 갑자기 아버님이 편찮으셔서 돌아가시고 말았다. 어머니는 힘이 더 빠지셨다. 막내딸이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또 병이 악화되어서 병원에 가셨다. 병원에서 치료를 하고 오면 또 악화되고 그랬다. 막내딸이 바로 나, 이연자다. 딸들은 막내만 빼고 다 시집을 갔다. 어머니는 더 많이 늙으셨지만 즐겁게 살고 계신다. - 금일 중학교 3학년 5반 졸업문집 보리처럼 꿋꿋하게 에서 참으로 엄청난 고난의 길을 걸어오신 어머니다. 그러나 지난날 우리 나라어머니들은 이렇게 어렵게 살아온 사람이 어쩌다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거의 모든 어머니들이 이 어머니처럼 험악한 삶을 이어왔던 것이다. 어머니가 딸을 낳았다고 해서 시부모나 남편한테 학대를 받는 것은 사람의 권리를 짓밟히는 일이지만, 지난날에는 이런 인권유린을 당연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은 옛날의 왕조시대에만 있었던 일이 아니라얼마전까지도 있었다. 다음은 1985년 4월 경북 울진군 온정국민학교 3학년 김은정이란 어린이가 아기 라는 제목으로 쓴 시다. 아기가 남자가 아니라고 집안 식구들은 매일 욕을 한다. 그때마다 어머니께서 수건을 들고 우는 모습을 본다. 어머니, 왜 우세요? 하고 물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할머니께서는 아기 얼굴마저도 돌아보시지 않는다. 여자 놓든 남자 놓든 엄마 마음대로 놔, 나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차라리 태어나지나 말지, 설움만 받고 크는 아기. 어째서라도 나는 아기를 키우고 말겠다. 나는 지금까지, 초등 학생은 말할 것도 없고 중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이 쓴 시에도 이만한 작품을 읽은 적이 없다. 시인이라는 어른들이 쓴 요즘의 시에서도 이만큼 감동을 받은 시를 읽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국민하교 3학년 아이가 과연 이렇게 썼을까, 하고 놀라고 의심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른들이 잘못 가르쳐서 그 마음이 병들고 재능이 시들어 버리지 않았다면, 그래서 착한 마음과 올바른 생각을 조금도 다치지 않고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면, 아이들은 가끔 이런 훌룡한 시를 쓰게 된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온갖 험한 고난의 길을 이겨내면서 살아가는 어머니가 정성을 들여 기르는 아이한테서는 이런 감동이 넘치는 시가 나오게 되어 있다고 본다. 아무튼 딸아이를 천대하는 이 어리석고 야만스런 풍습이 요즘은 많이 없어졌지만 아직도 그 뿌리가 뽑혀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이와 같이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고, 그런 것들 가운데 어떤 것은 옛날에 견주어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것을 우리 스스로 바로잡지 않고 민주 사회를 세울 수는 절대로 없을 것이다. 이제 글에 나타난 말의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 글은 아주 깨끗한 말로 썼다. 이중과거형 었었다 가 한 군데도 없고, 일본말법이 없고, 어려운 중국글자말도 안 썼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어머니가 살아온 이야기를 쓰게 되니까 말도 저절로 쉬운 우리말이 된 것이다. 더구나 가난해서 학교에도 못 가고 남의 집에서 아이를 봐 주면서 밥 한끼 배부르게 먹지 못하고 자라난 어머니가, 시집을 가서는 또 시어머니의 구박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적는데 어찌 우리말이 안되겠는가. 우선 제목부터 어머니의 살아오신 길 이라 하지 않고 어머니가 살아오신 길 이라 한 것이 잘 되었다. -우리 어머니는.. 요즘은 초등 학생들이 쓴 글에도 나의 어머니 란 말을 가끔 볼 수 있는데, 이렇게 우리말을 쓴 것이 반갑다. 우리말로 쓴 글에 우리말이 나왔다고 칭찬을 해야 하는 것이 기가 막힌 우리 나라 사람들의 글쓰기 사정이다. - 또 몇 년이 흘렀다. 아이를 낳았다. 딸이었다. 때에 다라서 이렇게 글월을 짧게 쓴 것도 읽기가 좋다. 긴 사연을 줄여서 쓰자니 이렇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으로 쓰는 말이라도 좀더 깨끗한 우리말이 있으면우리말을 살려서 쓰도록 하는 것이 좋다. 가령 생활 이란 말도 때에 따라서 쓸수도 있지만 살아간다 고 해도 될 자리에 생활한다 고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 그러나 시어머니 시아버지 아래서 생활을 하면서 아주 어렵게 살았다. 이 대문에 나온 생활을 하면서 는 살아가면서 라고 쓰는 것이 좋다. - 지옥 같은 생활을 했다. 이것은 그대로 두어도 되겠지. 만약에 고친다면 지옥 같은 시집살이를 했다고 하면 될 것이다. 다음은 1년 이란 말인데, 10년, 20년, 100년 할 때는 년 이라야 되겠지만 1년 2년은 한 해 두 해 가 낫겠다. 이것은 한 해가 지나 로 쓰는 것이 좋지 않겠나 싶다. 몇 년 도 마찬가지다. - 몇 년이 흘러 - 또 몇 년이 흘렀다. 이 글에는 이렇게 몇 년 이 많이 나온다. 모두 몇 해가 지나 라든지 몇 해가 흘렀다 고 쓰면 좋겠다. - 산을 향해 달렸다. 이것은 산으로 올라갔다 고 쓰는 것이 낫다. 흔히 학교로 갔다 든지 집으로 갔다 고 쓸 말을 학교로 향해 갔다 집으로 향해 갔다 고 쓰는데, 좋지 못한 글버릇이다. 학교로 향했다 도 쓰지 않는 것이 좋다. - 그후 이것도 그 뒤 라고 쓰는 것이 낫지 않겠나 싶다. - 더욱더 실망과 좌절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이 부분이 좀 마음에 안든다. 좌절 속으로 빠져 와 같은 유식한 말을 쓰지말고, 정말 어머니가 들려줄 것 같은 말로 쓰는 것이 좋겠다. - 병이 악화되어서 - 또 악화되고 이렇게 나오는 이 악화란 말도 따지고 보면 글에서나 쓰던 유식한 말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입으로 하는 말에서는 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병이 나빠져서 또 병이 나빠지고 이렇게 말하니 글도 말 그대로 쓰는 것이 옳다. 또 우리말에는 저친다는 말이 있고 도진다는 말도 있다. 병이 더쳐서 또 더쳐서 라든가 병이 도져서도 도져서 이렇게 말한다. 이런 우리말을 살려서 쓰는 일이 아주 급하고 중요하다.
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캘커타의 아침 해처럼 - 마더 데레사께 `나는 목마르다`는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의 말씀을 새기며 우리를 사랑의 길로 초대하시는 수녀님 "마리아를 통해 예수께로 가자" "우리가 먼저 기쁘게 살고 그 기쁨을 이웃에게 전하자"고 항상 외치시는 수녀님 캘커타의 어느 감옥의 벽에 마하트마 간디와 나란히 큰 얼굴로 그려져 있던 당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두 사람을 완전하게 사랑할 순 없어도 모든 이를 완전하게 사랑할 순 있다" 고 의미있는 말씀을 하셨지요? 예수 안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당신은 세상 곳곳 벽을 넘어 날개도 없이 날아다니는 사랑의 천사이며 희망의 어머니임을 사람들은 압니다 인도에서 만난 많은 이들도 당신을 위대한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살아 있는 성녀로 칭송의 표현을 했지만 그 어떤 칭호에도 관심없다는 듯 당신은 오직 예수안에만 깊이 잠겨 계시고 예수가 그토록 사랑했던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기 위해 하루 24시간이 모자라십니다 오후 네 시가 넘으면 해가 지기 시작하던 캘커타의 그 길고 긴 강처럼 가슴엔 긴 사랑이 넘쳐 세계로 흘러가는 어머니 우리가 편히 쉬고 즐기며 각자의 취미생활에 빠져 있는 순간에도 당신은 발이 부르트도록 가난한 이들을 찾아 나서시느라 자신의 안락한 삶은 잊은 지 오래입니다. 그러한 당신을 생각하면 찡한 감동으로 눈물이 나면서도 당신을 닮지 못하고 여전히 이기적으로 살고 있는 부끄러운 제 모습을 봅니다. 이제 당신은 멀리 계셔도 저는 가까이 듣습니다. "우리가 깊이 기도할 땐 영원을 만난다"는 그 말씀을 깊이 새기며 캘커다의 아침 해처럼 가난한 이의 마음에 떠오르는 당신의 모습을 그려 봅니다. (1995)
Board 삶 속 글 2022.10.07 風文 R 500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윤오영편" 윤오영(1907~1976) 수필가. 서울 출생. 양정 고보 졸업. 장기간 교편 생활. 한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으며 시선에 잡히는 모든 사물을 고전의 세계에 접합시켜 독특한 아취를 자아내곤 하였다. 정묘한 문장을 추구하였고 역대 문장가들의 글을 깊이 연구하여 "연암의 문장" "노계 가사의 재평가" 등의 논저를 남겼다. "한국의 창 연구"는 특히 주목을 끈 논문이다. 백사장의 하루 눈이 떠지자 창을 여니 아청빛 푸른 하늘이 문득 가을이다. 어제까지의 분망과 노고가 씻은 듯 걷히고 맑고 서늘한 기운이 흉금으로 스며든다. 소제를 마치고 나도 모르게 길에 나서니 오늘은 일요일이다. 등산객들과 소풍가는 남녀들로 근교행 버스는 바쁘다. 복잡을 피하여 사잇길로 빠지니 곧 경춘선로의 교차점이 아닌가. 예정 없이 버스에 올라, 가는 대로 맡기니 버스는 군말없이 달린다. 이윽고 강안을 지난다. 강이 아름다워 차를 스톱시키고 내리니 인적이 고요한 소양강 하류의 이름 모를 백사장, 하루의 유정을 풀기에 가장 좋을 곳인상 싶다. 백사장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 청한을 읊조린다. 단풍은 아직 일러 산봉우리는 푸르고 거울같이 맑은 물 위에 떠가는 구름이 가끔 짙은 시름을 던진다. 그러나, 끝없이만 보이는 백사장에는 갈매기 그림자 하나 없고, 10년에 한 번인 듯 느껴지는, 가물거리는 포범이 아쉽게 반갑다. 나는 누워서 문득 생각한다. 천추 일심이요 만리 일정이라고. 고왕금래 수년 만에 크고 작은 사건들이 우리를 흥분시키고 우리의 혈관을 끓어오르게 한다. 사책을 헤치거나, 전설을 뒤지거나 혹은 저기를 보고 혹은 소설을 읽다가도 옳은 것을 위하여 의분을 느끼고 악한 것을 위하여 증오하고 타기하며 사리에 그릇됨을 개탄하고 인생의 과오를 슬퍼함은 너나가 없건만, 매양 같이 슬퍼하고 같이 분개하던 그들이 한 번 현실에 발을 들여놓자 드디어 스스로 증오와 타기의 인간 비극을 되풀이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인간이 사는 곳에 비환이 있고, 비환이 있는 곳에 정회가 있다. 그러므로 비록 알지 못하는 고도의 이족과도 정은 통할지니 어찌 서로의 애정이 없으며, 저 가물거리는 포범과 같은 반가움이 없으랴마는 어찌하여 서로 적대하고, 시의해야 하며, 심하면 동족도 구수같이 상잔해야 하며, 이웃도 헤치고, 가족도 등지며 배반하고, 모해와 살육이 사상에 그칠 날이 없어야 하는가. 서로가 하루살이 같은 목숨이요, 창해에 뜬 좁쌀 같은 존재가 아닌가. 진부한 옛 말을 굳이 되씹어 본다. 와우각상에 쟁하사요, 석화광중에 기차신이란 감상적 애수가 스며드는 것은 최근 나의 과로로 인한 신경의 쇠약에서 오는 것일까. 천추의 느끼는 그 마음은 하나요, 만리에 느끼는 그 정은 하나다. 불가에서 생사를 허무에 돌려, 생야에 일편부운기요, 사야에 일편부운멸이라 했다. 그러나, 한 조각 구름은 떠난 뒤에 남는 것이 없지만 사람은 간 뒤에도 정이 남지 않는가. 고래로 뜬 구름같이 사라진 사람들이야 이제 그 잔해인들 남아 있으랴마는 인류가 존속하는 날까지 면면이 지속해 오는 것은 이 정이다. 불가의 만유귀심이란 그 법심이 무엇인지 모르거니와 심심심이 곧 정이다. 정근을 버리고 미망에서 벗어나 대오귀심을 외치는 대덕에게 심심심이 정이라면 속성의 완미함을 연민해할지 모르나, 나는 원래 그런 묘망한 진리와는 연이 없는 듯하다. 나에게 철학이 있다면 정의 철학이요, 나에게 생활이 있다면 정을 떠나서 따로 없다. 혹 나의 깨닫지 못하는 완미를, 혹 나의 지성 부족한 우둔을 비웃는 이도 있을지 모르나, 이것이 아니고는 인생을 맛보며 살 길이 없다. 인간이란 신과 짐승의 사생아라고 한 이가 있다. 그렇다면 정이란 사생아의 개성이다. 신은 이미 정을 초월해 있을 것이요, 짐승을 아직 이 정에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지성이니 오성이니 하는 말은 영리한 사생아들의 엉뚱한 어휘다. 성리학자들은 성이니 정이니 하는 말을 여러 가지로 분석해서 설명한다. 심은 일신의 주재니 성과 정을 통솔하고, 성은 천부의 이니 칠정을 낳는다. 희노애구 애오욕은 기질의 청탁에 따라 때로 선이 되고 때로 악이 되지만 그 본원은 천명의 성이다. 그러므로 그 본질이 선일진대 중화의 덕을 길러 삼재의 하나로서 천지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합리적이요 오묘한 철리엔 둔하다. 또 굳이 형이상학적으로 그 본질을 캐고 체계를 세워 논리를 정리하는 수고를 청부받을 생각도 없다. 무릇 곡소비환이 생활의 표현일진대 이것이 진정이요 인생이 아닌가. 인생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심정의 세계를 나는 지금 체감하고 있다. 심이라 해도 좋고 성이라 해도 좋고 정이라 해도 좋다. 나는 적절한 용어를 모른다. 오직 천추일심만리일정, 심즉정이다. 심은 추상적인 존재요, 정은 구체적인 존재일 뿐이다. 이것이 실로 영속적인 생의 실체요 영속적인 인간의 내용이 아닌가. 흰 구름장이 바람에 불려 강상으로 떠가더니 산봉우리에서 사라진다. 강 속의 그림자도 사라진다. 문득 채근담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풍래소죽에 풍과우 죽불유성이요, 응도한담에 응법우 택불유경' 그렇다. 바람 간 뒤에 소리는 대밭에 남아 있지 않고, 기러기 날아간 뒤에 그림자는 담심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러나 이것을 보고 느끼는 것은 오직 사람뿐이다. 나는 채근담 저자의 낯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눈 위에 기러기 발자취는 흔적 없이 사라진다. 그러나 떨어지는 꽃잎에서 또 그것을 느껴야 한다. 이 곧 천추일심이요, 만리일정이다. 강안 길로 되돌아 허튼 걸음으로 한식경을 걸었다. 버스가 이삼 차 지나갔을 뿐 고요한 강안의 길이다. 길가에 한 주점이 있다. 막걸리 안주로 도토리묵이 있다. 요기하기에 족했다. 숭굴숭굴하고 부드러운 주모의 씩 웃는 인사가 제법 구수하다. 친절, 불친절 없이 늘 보는 이웃에 대하듯 태연한 인사, 영접을 위해서 마음을 쓸 필요조차 없는 한적한 주점인 까닭이다. 이해의 득실이 없으면 스스로 담연할 수가 있다. 그래서 오가는 말이 구수하다. 버스가 왔다. 손을 들어 차를 세우고 몸을 실었다. 녹색의 산봉우리들은 석양에 물들어 빛이 더욱 곱고, 강물은 그늘이 져서 검푸르게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