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페미니즘 곁다리가 결정적일 때가 많다. ‘3개 천원’보다 ‘2개 천원인데 1개 더 줌’이 탐심을 더 자극한다. 차의 기본 성능보다 선팅, 블랙박스를 얼마나 좋은 걸로 끼워주느냐로 차를 살지 말지 정한다. 자주 가는 식당 주인장은 뭘 시켜도 서비스로 두부볶음을 내온다. 단골이 안 될 도리가 없다.수 수식어는 ‘서비스 상품’ 같은 존재다. 크게 중요하지 않아 허투루 넘기는데, 판단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다. 수식어의 의미는 수식 받는 말에 기대어 천방지축 뒤바뀐다. ‘좋은 아버지’, ‘좋은 차’, ‘좋은 책’을 생각해보라. 각각 무엇이 ‘좋은가?’에 대한 판단은 ‘아버지, 차, 책’이 갖는 특성이나 우리의 경험이 결부된다. 좋은 아버지는 좋은 차와 다르다. ‘쌩쌩 잘 달리고, 연비 좋고(?), 부딪쳐도 안전한(푹신푹신한?)’ 아버지가 좋은 아버지일 리 없다. 수식어가 무서운 건 말하는 사람이 대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규정하는지가 수식어에 담기기 때문이다. 수식어는 대상을 한정하고 분류한다. 수식어 때문에 본심과 밑바닥이 드러난다. ‘착한 소비’가 우리의 소비를 착한 것과 착하지 않은 것으로 나누듯, ‘건강한 페미니즘’도 페미니즘을 건강한 것과 건강하지 않은 것으로 나눈다. ‘건강한’ 페미니즘이란 ‘건전한(?), 온건한, 무해한, 전복적이지 않은, 불온하지 않은, 고분고분한’ 페미니즘이겠지. 수식어를 빼고 말하는 게 대인배의 풍모다. ‘페미니즘이 남녀 간의 건전한 교제를 막는다!’ 얼마나 많은 토론거리를 던져주는 주제인가. 아차차, 수식어를 더 빼야겠군. ‘페미니즘이 교제를 막는다.’ 몸짓의 언어학 말을 안 하면 사람 마음을 어떻게 아냐고? 하는 짓을 보면 알지.친한 친구를 10년 만에 만난다면 당신은 어떤 몸짓을 할까? 꼴도 보기 싫은 자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온다면? 우리는 마음속에 일렁이는 기분이나 상대방에 대한 태도를 몸으로 나타낸다. 몸짓은 기분의 표출이자 태도의 표명이다. 사람은 말보다 몸짓이 전하는 메시지를 훨씬 더 빠르고 정확히 알아차린다고 한다.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지만, 몸짓은 ‘척 보면 안다’. 200여개의 짤막한 영상을 보여주고 배우의 감정을 판단하는 실험을 했는데 사람들이 너무 쉽게 맞혔다고 한다. 노출 시간을 점점 줄여봤더니, 놀랍게도 24분의 1초(0.04초)만 보아도 3분의 2 이상을 맞혔다. 말처럼 몸짓도 대화적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몸짓에 대해선 의식을 못 한다. 상대의 몸짓이 나에 대한 반응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 사람의 특성이라고만 생각한다. 몸짓이 나와 너의 상호작용이라면, 거기에는 무언의 권력관계가 새겨져 있다. 따로 배우지 않았을 텐데도, 힘 있는 사람은 얼굴에 온갖 표정을 숨김없이 짓고, 상대방의 코앞까지 자신의 얼굴을 디밀고, 눈을 빤히 쳐다볼 수 있다. 손바닥으로 책상을 내리칠 수도, 뒷짐을 지거나 바지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을 수도, 다리를 쩍 벌리고 의자를 좌우로 돌릴 수도, 악수하자며 손을 내밀거나 팔이나 어깨를 툭 칠 수도 있다. 이걸 아랫사람이 한다고 상상해 보라. 그러니 몸짓을 개인의 습관이나 남녀의 생물학적 특성으로 돌려선 안 된다. 그가 속한 계급이 갖는 집단 무의식이다. 목소리를 지우고 보면 더 잘 보인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선물의 집 어쩌다 외출을 하게 되면 책방이나 꽃집과 마찬가지로 나의 시선을 끄는 것은 규모가 별로 크지 않고 아담하게 꾸며진 `선물의 집`입니다. 특별히 살 것이 없어도 마음에 드는 `선물의 집` 간판이 눈에 띄면 일단 들어가서 구경을 하고 가끔은 내 분수에 맞는 작은 선물을 사들고 나오기도 하는데. 하여튼 아기자기하고 예쁜 물건들이 많이 놓여 있는 방에서 선물을 고르는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여기선 우울과 불안으로 찡그린 얼굴보다는 밝고 환하게 웃음 띤 얼굴. 어떤 희망과 기대에 찬 고운 표정들을 많이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밖에 있는 선물의 집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오래 전부터 나는 경우에 따라 공부방도 되고, 기도방도 되고, 침방도 되어 종종 `다목적 방`이라 부르는 내 자그만 방에 둥근 바구니 한개를 준비해 두고 이웃에게 주어도 좋을 만한 카드. 그림엽서, 조가비, 돌맹이, 연필, 색종이 상자, 신문이나 잡지에서 오려낸 좋은 글귀나 그림 등을 모아 두었다가 필요할 때 선물 하곤 합니다. "수녀님, 친구에게 보낼 멋진 시 한 편 골라 주세요" "어린이에게 어울리는 카드 있으면 한 장 주세요" 등등의 부탁을 받을 때 즉시 들어 줄 수 있을때마다 나는 힘 안 들이고 기쁨을 파는 행복한 선물의 집 주인이 된 것 같아 흐뭇합니다. 가끔은 스스로 멋에 겨워 자아도취에 빠지거나 어떤 보답을 바라는 허영심이 스며들까 걱정도 되지만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이 일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극히 하찮은 물건이라도 사랑의 마음이 담기면 빛이 나지만 아무리 비싼 물건이라도 사랑이 묻어 있지 않으면 이내 빛을 잃고 싸늘해집니다. 우리가 누군가로부터 선물을 받을 때도 그것이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이에게 주기 위해 받는 것일 때 더 부담 없고 기쁜 것을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굳이 어떤 물건을 주고받지 않더라도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존재 자체가 걸어 다니는 선물의 집. 움직이는 기쁨의 집. 나눔의 집이 될 수가 있지 않을까요? 한 해를 마무리하며 몸도 마음도 바빠지는 12월.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를 준비하여 우리는 서로 물질로 주고받는 선물은 더욱 간소화하되, 마음으로 주고받는 선물은 더욱 늘여가면 좋겠습니다. 용서와 이해의 눈길. 따뜻한 미소, 친절한 말. 상대의 마음을 정성껏 들어 주기. 주변의 가난하고 힘든 이웃을 시간 내어 챙겨 주기 등등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선물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가장 완벽한 사랑의 모델이신 예수께서 만나는 모든 이에게 당신 존재 자체로 다른 이의 필요를 채워 주는 `선물의 집`이셨듯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또한 이웃에게 자신을 기꺼이 내어 주는 한 채의 아름답고 따스한 선물의 집이길 바라며 나는 다음과 같이 노래해 봅니다. 사랑할 때 우리 마음은 바닥이 나지 않는 선물의 집 무엇을 줄까 어렵게 궁리하지 않아도 서로를 기쁘게 할 묘안이 끝없이 떠오르네 다른 이의 눈엔 더러 어리석게 보여도 개의치 않고 언어로, 사물로 사랑을 표현하다 마침내는 존재 자체로 선물이 되네, 서로에게 사랑할 때 우리 마음은 괴로움도 달콤한 선물의 집 이 집을 잘 지키라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하느님은 우리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 준 것이겠지? - 나의 시 선물의 집
Board 삶 속 글 2022.09.23 風文 R 393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김소운편" 김소운(1907~1981) 수필가, 시인. 일본 문학가. 호는 소운. 경남 부산 출생. 일본에서 중학 중퇴. 초기에는 시로 출발하여 관념시 계통의 시작품을 발표했으나 일본인들의 근거 없는 우월감과 한국 문화에 대한 인식 부족을 통감하고서 한국의 민요, 동요, 시 등을 일본에 소개하는 작업을 벌여 크게 주목받았다. 문학의 사회자로 문화 수출의 상인으로 자처했던 그는 후기에는 인생에의 통찰이 담긴 격조 높은 수필을 많이 발표하여 많은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연잎에 괸 이슬 아쉬움이라니 바로 며칠 전에 본 영화의 장면 하나가 생각난다. 극영화는 아니고, 어느 먼 나라의 생활의 실경을 찍은 것이다. 비가 오지 않는 지방이라 물이 몹시 귀하다. 흘러가는 시내도 없고, 우물을 판다고 해서 물이 솟아나지도 않는다. 여인들은 첫새벽에 먼 길을 떠나서 연 잎사귀에 괸 이슬을 찾아 다닌다. 하얀 구슬처럼 연잎 위를 구르는 이슬 방울-그것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그릇이 옮긴다. 생명에 바로 직결되는 의미로는 어떤 보석, 어떤 구슬보다도 더 귀하고 소중한 이슬 방울을-그것이 하나하나 모여서, 나중에는 제법 물 소리를 내면서 쏴 하고 커다란 물독에 부어진다. 아쉬움을 두고 또 하나 연상되는 것은, 30여 년 전 일본서 본 "아랑"이란 스웨덴 영화이다. 흙이라고는 한 줌이 없는-바윗돌뿐인 절해 고도-거기 젊은 어부 내외가 산다(십수 년 전에 두 번 가 본 독도가 꼭 이런 섬이었다.). 거기서도 씨를 뿌리고, 곡식이 자란다. 흙 없이 어떻게 씨가 뿌려지나? 사람의 팔 하나가 겨우 들어가는 바위 틈-그 밑바닥에 풍화 작용으로 깎여진 바윗돌의 부스러기가 깔려 있다. 한쪽 손을 뻗을 대로 뻗어서 바위 틈에서 수백 년, 수천 년 쌓였던 그 돌 부스러기를 손으로 긁어 올린다-연 잎사귀에 괸 이슬 방울을 모으는-바로 그 정성, 그 노력이다. 해초를 평범한 바위 위에 깔고, 그 위에다 긁어 올린 돌 부스러기를 덮는다. 이것이 그들의 '밭'이다. 이 '밭'에 해가 쬐고 비가 내려서, 뿌린 씨에 싹이 트고 나중에는 곡식이 맺는다. 시간의 경과를 압축한 화면만으로는, 마치 무슨 마술의 무리를 보는 것만 같다. 그러나 마술도 기적도 아닌, 이것은 인간 생활의 냉엄한 현실의 단면이다. 조상이 마련해 준 이 땅, 여기는 물도 흙도 풍성하다. '풍성'이란 말이 우스울 정도로 우리는 그런 구애를 모르고 살아 왔다. 풍화암 부스러기를 긁어 올릴 필요도 없고 연잎에 괸 아침 이슬을 모을 필요도 없다. 하물며 편편옥토, 하물며 옥수 같은 물맛, 문화, 예술의 메카라는 프랑스에도 이런 물은 없다. 그러나 '물'이니 '흙'이니를 예찬하려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주림, 메마르고 거친 생활 감정으로 따진다면, 오늘날의 우리처럼 가난한 백성도 아마 드물리라. 연 잎사귀의 이슬을 모으는-바위 틈에서 돌 부스러기를 긁어 올리는 그런 생활을 내려다보고 동정할 주제가 과연 우리에게 있다고 할 것인가? 다만 그들과 다른 것은, 우리의 아쉬움이, '흙'이 아니요, '물'이 아니라는 그것뿐이다.
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꼼꼼하게 요청하라 - <이 이야기, 저 이야기> 중에서 두명의 목사가 죽어서 천당에 갔다. 성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했다. "두 사람이 묵을 곳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소. 그러므로 준비를 끝낼 때까지 당신들은 원하는 형상으로 지상에 돌아갈 수 있소." 첫 번째 목사가 요청했다. "저는 그랜드 캐년 위를 나르는 독수리가 되고 싶었습니다." 두 번째 목사가 말했다. "그리고 저는 진짜 단단한 못이 되고 싶습니다." 팡! 그들의 소원이 이루어졌다. 마침내 그들의 거처가 마련되자, 성 베드로가 조수에게 두 목사를 데리고 오라고 했다. "제가 그들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한 사람은 그랜드 캐년을 날아다니고 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찾기 힘들 게다. 그는 디트로이트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스노우 타이어의 부품으로." 사전 조사를 하고 요청하라 우리는 종종 사람들에게 그들이 최근에 갖지 못한 것 중 원하는 것을 적으라고 요청한다. 그러면 이런 목록을 적는 사람이 반드시 있다. "더 많은 돈을 원한다." 그러면 우리는 주머니에서 15센트 동전을 꺼내 그들에게 준다. "이제 당신은 돈을 더 많이 가졌습니다. 만족하십니까?" "아니오. 나는 이보다 더 많은 돈을 원합니다." "하지만 내가 그것을 무슨 수로 알겠습니까? 이 세상 누가 그것을 무슨 수로 알겠습니까? 당신의 뇌가 그것을 무슨 수로 알겠습니까? 그리고 주님이 그것을 어떻게 아시겠습니까? 당신은 더 꼼꼼하게 자세하게 요구해야 합니다. 그래, 얼마나 더 많은 돈을 원하십니까?" "아, 모르겠어요. 한 이만 달러 정도." "지금, 그 '모르겠어요'라는 첫 문장을 삭제하세요. 진짜 문제는 당신이 모르겠다는 겁니다. 당신은 한 번도 자리에 앉아서 당신이 원한다고 생각하는 삶에 필요한 돈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얼마든지 산타 바바라 해안가의 집을 한채 갖고 싶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집값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셨습니까? 연간 종합 부동산 세금과 연간 보험료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그것을 모두 조사하면, 당신은 당신의 꿈에 필요한 금액을 정확하게 알게 될 겁니다."
Board 추천글 2022.09.23 風文 R 1732
울타리 표현 ‘개인적으로 그 결정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똑 부러지게 말하는 게 멋져 보이지만, 항상 그럴 수 없다. 누구에게든 직설화법은 부담이 간다. 시원하게 ‘그 결정은 옳지 않소!’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안 된다. 말도 전쟁보다는 평화를 좋아한다. 내 주장이 지나치게 직설적이지 않고 한계가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대결보다는 공존과 협력적 말하기를 꾀한다. 그러한 장치를 ‘울타리 표현’이라고 부른다. 스스로 자기 발언에 확신 없음을 표현함으로써 자신을 방어하고 상대에게 신뢰를 얻는 역설적 책략이다. ‘개인적으로는’, ‘제 생각에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더 살펴보긴 해야겠지만’, ‘잘은 모릅니다마는’ 같은 군더더기 말을 씀으로써 발언 내용이 자신에게 국한되거나 불확실하기 때문에 상대에게 강요할 의도가 없음을 내비친다. ‘듯싶다, ~일 수도 있다, ~일지도 모른다’ 같은 표현도 직접성의 날카로움을 무디게 만든다. ‘맛있다’를 ‘맛있는 거 같다’고 하는 것도 주장을 추측으로 강등시킴으로써 상대에게 다른 판단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른바 ‘원전마피아들’은”, “속된 말로 ‘삥뜯기’는”과 같이 특정 개념 앞에 ‘이른바, 속된 말로, 시쳇말로’를 씀으로써 해당 개념과 그 말을 쓰는 자신 사이에 빠져나갈 공간을 만든다. 자기 견해를 ‘별것 아닌 것’처럼 만들어 상대방에게는 생각의 여지를, 나에게는 안전을 보장하는 비책인데 적당히 써야 좋다. 지나치면 비굴해 보일 수 있고, 인색하면 소위 ‘완고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지나치면 비굴하고, 인색하면 완고하다!). 끝없는 말 ‘생각이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생각나는 것이 생각이므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수학여행 때 숙소 벽에 적혀 있던 낙서였는데, 저렇게 긴 문장이 수십년 후에도 기억나는 걸 보면 퍽이나 감명을 받았었나 보다. 이론상 문장의 길이와 종류는 끝이 없다. 명사에 ‘~와’만 붙여도 계속 늘릴 수 있다(‘우리집엔 나무숟가락과 모자와 도끼와 우쿨렐레와 꽃과 나무가 있다’). 동사 끝에 ‘~고’만 붙여도 한 문장으로 날밤을 새울 수 있다(‘나는 눈을 떴고 씻었고 방청소를 했고 밥을 먹었고…’). 형광등 갈아끼우듯, 같은 틀에 단어만 바꾸면 새 문장을 무한히 만들 수 있다. 주어 자리에 100개, 목적어 자리에 100개, 서술어 자리에 100개의 단어가 있다면 만들 수 있는 문장은 100×100×100=100만개나 된다. 여기에 ‘나는 냉면과 국수를 먹었다’처럼 목적어 자리에 ‘~와’ 하나만 넣어도 1억개의 문장을 만들 수 있다. 더 정교하게는 문장 안에 작은 문장을 집어넣는 것이다. ‘목수일을 하는 형을 좋아하는 친구가 만든 연극을 본 우리들이 만난 배우들이 찍은 사진이 예뻤다.’처럼 명사를 꾸미는 말을 계속 덧댈 수 있다. 말은 무한하다. 무한히 바꾸고 이어붙이는 장치가 내장되어 있다. 세계는 시시때때로 변하고, 세계를 마주한 개인의 감각도 속절없이 변한다. 말은 세계를 담고 이해하는 데 최적의 형식이다. 우리의 문장이 진부하고 식상한 이유는 몇개 되지 않는 기성의 문장을 반복하는 게 안전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용기 없고 게으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성서>읽는 기쁨 지난 1977년 부활절, 우리말로 된 <신.구약성서>합본을 수녀원에서 처음으로 선물받았을 때의 그 기쁨과 설레임을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요? 지금도 가끔 그때의 감격을 되살리며 <성서>를 읽노라면 새로운 힘이 생깁니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특히 피정이나 묵상 기도를 할 때 고즈넉한 빈방에 촛불을 켜고 앉아 <성서>를 읽고 맛들이는 즐거움은 참으로 은혜로운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릇 그리스도인의 삶은 일상생활이든 대인관계이든 모두 성서적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적어도 그날그날의 복음과 독서 내용을 되새김하며 일상의 삶 안에서 그 가르침을 실천하려 애쓴다면 우리가 주고받는 대화 역시 속되고 피상적인 것에서 좀더 거룩하고 깊이 있는 것으로 순화되어 가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매일의 소임 장소에서 그날의 복음 한 구절을 옆의 수녀님과 함께 읽고 일을 시작하는데, 그 말씀들은 어느새 고운 보석으로 가슴에 박혀 시간을 낭비하거나 이웃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하고, 진지하고 조심스런 태도를 갖도록 도와 줍니다. 어쩌다 신앙의 갈등이나 삶의 회의에 빠져 괴로울 때도 어떤 스승에게서보다 큰 힘과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생명의 원천이 곧 <성서>임을 우리는 자주 체험하게 됩니다. 가정이나 본당, 수도원의 어떤 모임에서건 각자 <성서>를 읽고 느낀 점을 서로 나누다 보면 무척 다양하고, 새롭고, 창의적인 다른 이의 묵상법에 놀라게 되고, <성서>가 불후의 명작이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최고로 거룩한 책이라는 것을 더욱 실감하게 됩니다. 좋아하는 <성서> 구절마다 색연필로 밑줄을 긋는 것. 편지, 엽서, 카드의 인사말을 모두 <성서> 구절을 인용해서 쓰는 것, 잠시 여행을 떠날 때도 꼭 작은 <성서>를 갖고 다니며 남이 볼 때도 거리낌없이 읽는 것 등은 내가 즐겨 하고 이웃에게도 권하고 싶은 조그만 실천사랑들입니다. 며칠 전엔, 중학교 시절부터 내게 편지를 보내 오곤 하다가 결혼 후 입교를 하고, 지금은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재준 엄마가 보낸 편지의 몇 구절이 나를 기쁘게 했습니다. `...저는 요즘 <성서> 읽는 기쁨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책, 비할 바 없이 좋은 책, 성스러운 책을 왜 진작 접하지 못했는지 후회스럽기조차 합니다. <성서> 읽는 기쁨을 수시로 느끼다 보니 자연히 책도 일반 서점보다는 가톨릭 서점에 가서 고르게 되고, 그러다 보니 제 신앙도 더 견고해지는 느낍입니다.` 이렇듯 <성서>를 읽는 기쁨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맛들여야할 참 기쁨, 끝없이 확산시켜야 할 그리스도인의 기쁨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과 이웃과 자신을 들여다보는 은총의 거울 <성서>와 함께 기뻐하는 마음으로 매일을 사노라면 기쁨은 또 기쁨을 낳아 우리의 삶을 축제이게 합니다. - 나의 시`<성서>와 함께`
Board 삶 속 글 2022.09.22 風文 R 454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김소운편" 김소운(1907~1981) 수필가, 시인. 일본 문학가. 호는 소운. 경남 부산 출생. 일본에서 중학 중퇴. 초기에는 시로 출발하여 관념시 계통의 시작품을 발표했으나 일본인들의 근거 없는 우월감과 한국 문화에 대한 인식 부족을 통감하고서 한국의 민요, 동요, 시 등을 일본에 소개하는 작업을 벌여 크게 주목받았다. 문학의 사회자로 문화 수출의 상인으로 자처했던 그는 후기에는 인생에의 통찰이 담긴 격조 높은 수필을 많이 발표하여 많은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선의의 불씨 또 하나의 눈 어제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동대문 시장에 들렀지요. 이것 저것 사다 보니 자질구레한 종이 뭉치가 대여섯 개나 됐나 봐요. 그걸 양쪽 손에 다 들고 오느라니까, 시장 안에서 신문을 차는 앉은뱅이 청년이 있잖아요. 스무남은 살이나 됐을까요. 팔에다 무슨 보급원인가 그런 완장을 둘렀어요. 그런데도 불구자 같은 궁기가 없고 퍽이나 명랑해요, 얼굴 표정이-. 밖에서 별로 신문 같은 것 산 일은 없었지만 그냥 지나가기가 무엇해서 10원을 꺼내서 신문을 샀지요. 두 장인지 석 장인지 주는 대로 받아서 그걸 또 짐 가진 손에다 구겨 쥐고 그리고 몇 걸음 가자, 뒤에서 '아주머니!' 하고 누가 불러요. 딴 사람을 불렀거니 하면서도 짐짓 돌아다 보았지요. 그랬더니 가게 앞에 웬 중년 남자가 서서 그 가게 주인인가 봐요, 아주 심상한 얼굴로 '그거 이리 내세요.'하고 손을 내밀잖아요. 돈을 다 치렀는데 어째서 달래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내라니까 무심결에 내주었지요, 그 가게에서 산 건 아니지만... 그걸 받더니 남자는 손잡이가 달린 커다란 봉지에다 그 작은 종이 뭉치들을 하나하나 넣어 주지 않겠어요. 그런 호의를 모르고 하도 무뚝뚝하게 내놓으라기에 물건 산 걸 보자는 줄로만 알았지요... "미안해서 어떡하나..." 제가 그러니까 남자는 딴 말은 없고, "아주머니, 저 애한테서 신문 사셨지요?" 신문 사는 걸 아마 보고 있었던가 봐요. 그게 무슨 고맙다는 인사같이 들리더구먼요... 별 대단한 일도 아닌데 돌아오는 발걸음이 왜 그렇게 가벼운지...무슨 좋은 수나 난 것 같아 괜히 가슴이 부듯하더구먼요... 아는 이를 만나 거리에서 차 한 잔을 같이하는 자리에서 일행 중 부인네 한 분이 이런 얘기를 들려 주었다.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데도 곁에서 듣는 나까지 무언지 마음이 흐뭇했다. 거추장스런 종이 뭉치들을 한데다 넣어 주었다는 그런 단순한 얘기는 아니다. 그만한 친절도 요즘 우리네 생활에서는 보기 힘드는 일이지마는 이 얘기에는 또 하나 울려 오는 다른 여운이 있다. 육체의 불행을 짊어지고도 제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를 쓰는 불구의 청년-그 청년에게서 신문을 샀다는 그야말로 겨자씨 한 알만한 작은 선의를 고마운 일로 알고 치사하는 또 하나 다른 '선의'의 눈-, 가게 주인의 그 무뚝뚝한 친절은 그 치사의 소박한 표현이라고 할 것이다. 동상이 세워질 커다란 공로도 아니요, 무슨 상이나 표창을 받도록 의젓한 미담도 아니다. 그러나 생각하고 보면, 이 작은 '불씨'--평범하고도 소박한 '인간의 선의', 이것이 지금 우리들의 생활에서 제일 아쉬운 주림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