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혼자만의 시간 - 스테파노 선생님께
나뭇잎 하나가
벌레 먹어 혈관이 다 보이는 나뭇잎 하나가
물속이 얼마나 깊은지 들여다보이려고
저 혼자 물위에 내려앉는다
나뭇잎 하나를 이렇게 오도마니
혼자서 오래오래 바라볼 시간을 갖게 된 것이
도대체 얼마 만인가
<외롭고, 높고, 쓸쓸한> 이란 제목의 시집을 펴낸 바 있는 안도현 시인의 `나뭇잎 하나가` 란 이 시를 공감하며 읽어 보는 조용한 주일 오후입니다.
스테파노 선생님, 아네모네와 여러 고운 꽃우표가 붙어 있는 정성스런 편지는 반갑게 받았습니다. 베토벤의 `전원교향악` 을 좋아해 필라델피아 중심가에 개업하는 새 식당 이름도 `전원` 이라고 하셨다구요? 하루 종일 고전음악이 흐르는 그곳에서 손님들이 잠시나마 기쁘게 쉼의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만남의 인사도 으레 바쁘냐고 먼저 물어볼 만큼 늘 일 속에 파묻혀 사는 바쁜 시대의 우리들은 일부러 큰맘 먹고 선행하지 않으면 자기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기도하거나 조용한 명상 안에서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조금은 쓸쓸하지만 고즈넉한 기쁨이 고여 오는 시간을 갖기가 어려운 듯합니다. 신과 자연과 인간 그리고 모든 사물에 대해 좀더 깊이 생각하고 오래 바라볼 틈을 갖지 못하는 것이지요.
한 가지 일이 끝났다 싶으면 또 해야 할 일이 생기고, 거듭되는 만남의 약속을 위해 쉴새없이 계획표를 짜야 하는 일도 때로는 우리를 힘들고 피곤하게 만듭니다. 이번 달의 잡지를 아직 다 읽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또 다음달 잡지가 도착하는 것을 보면서 새삼 시간의 빠름을 절감하기도 합니다. 위의 시를 읽으면서, 저도 요즘은 그리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건만 맡은 일들과 사람들 사이에서 분명하게 보내느라 차분히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재충전하지 못한 저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저의 내면이 침묵과 고독의 전류로 충전되지 않으니 사소한 일에서도 실수가 뒤따르고, 다른 이들과의 관계도 원활하지 못하며 삐걱이고 있음을 감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처럼 이렇게 빈방에서 창문을 열어제친 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산을 바라보고,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음이 얼마나 흡족하고 소중한지요. 새 한마리가 나뭇가지 사이를 부지런히 오르내리다 어느 순간은 움직임을 멈추고 가만히 앉아서 쉬고 있는 모습을 오래오래 바라보는 것 또한 기쁜 일입니다.
다른 날은 몰라도 이제 주일만큼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만의 여유를 가져야겠다고 저도 새롭게 결심해 봅니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일도 피하고, 산책을 하든 음악을 듣든,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마음을 비우고 가볍게 만드는 연습을 꾸준히 함으로써 여럿이 모여 사는 공동체 생활도 더 잘해낼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최근에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 중의 하나인 말로 모건(Marlo Morgan)의 <무탄트>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평생을 사는 동안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의 영원한 본질은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데 우리가 실제로 소비하는 시간은 너무나 적다` 라는 이 말은 외적인 일들에 마음이 매여 정신없이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 모습을 되돌아보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촛불을 켜고 케이크를 자르며 즐기는 생일 파티에 대해 설명하는 이 책의 저자에게 반문하던 호주 원주민들의 말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나이를 먹는 게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된다는 말인가요? 나이를 먹는 데는 어떤 노력도 들지 않아요. 우리는 나아지는 걸 축하합니다. 지난해보다 올해 더 훌륭하고 현명한 사람이 되었으면, 그걸 축하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건 자신만이 알수 있으니까, 잔치를 열어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잔치의 주인공이지요.`
이 말을 저는 요즘 하루에도 몇 번씩 뇌어 보곤 합니다. 겉으로는 늘 비슷비슷하게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의 삶일지라도 끊임없는 노력으로 자신의 내면을 갈고 닦는 가운데 다른 이와의 관계를 진정한 사랑과 용서와 이해로 넓혀 나간다면 하루하루가 떳떳하고 자유로우며 새로운 기쁨과 보람으로 누가 옆에 없어도 스스로 충만함을 누릴 수 있을테지요. 아마도 `나이를 헛먹었다`는 자책감에 시달리기보다는 그야말로 작은 축제를 즐기는 느낌을 지닐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스테파노 선생님. 지난번에 제가 보내드린 시들을 여러 사람들과 나누어 가지셨다니 기쁩니다. 오늘도 최근에 발견한 몇 개의 좋은 시들을 보내니 가까운 이웃들과 돌려보시길 바랍니다. 제게 편지를 보내는 독자들 중에는 제 자신의 글보다도 제가 인용한 다른 이의 좋은 글들을 보고 그 감동을 표현하는 분들도 적지 않기에 저는 앞으로도 계속 제가 발견한 아름다운 글들을 이웃에게 실어 나르는 심부름꾼이 되려 합니다. 한지에 적힌 글은 액자에 넣어 선물용으로 쓰셔도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저희 수녀원의 솔 향기, 아카시아 향기 속에 고국의 늦봄을 담아 보내며 기도 안에 뵙겠습니다.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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