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송건호 편"(1927~2001) 평론가. 충북 옥천 출생. 서울대 법대 졸업. 한국 일보, 경향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논설위원과 경향신문. 동아일보의 편집국장을 역임. 저서에 "민족 지성의 탐구" "한국 민족주의의 탐구" 등이 있다. 역사적 안목의 비판이 실린 많은 평론. 에세이를 발표했으며 한국 지성의 현실과 문제를 일깨우는 인물로 지목되고 있다. 선비 정신 기사도, 무사도 선비 예찬론이 심심찮게 저널리즘의 화제가 되고 있다. 아다시피 선비는 이조 5백년간 양반들의 이상적 지식인상으로서 중세 유럽의 기사도나 일본의 무사도처럼 지난날의 이상상이지 지금 우리가 모범으로 삼을 인간상은 못 된다. 원래 이상적 인간상이란 나라나 시대마다 그 사회의 역사적 조건에 따라 다르며 선비가 우리 사회의 이상이 된 것은 그 때 양반 신분이라는 사회적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고, 유럽에 기사도가 있고 일본의 무사도가 생긴 것도 제각기 중세의 봉건제가 그 체제를 유지하는 데 있어 필요로 한 인간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 시민 사회에서 이런 인간상이 필요 없게 된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한데 근래 '선비론'이 새삼스럽게 대두되고 심지어 예찬론마저 들리게 된 것은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한말로 '선비'는 이조의 신분 사회에서 지배층, 즉 양반들의 도의적 규범이라는 점을 들어야 하겠다. '선비'는 원한다고 아무나 모범으로 삼을 수 있는 인간상이 아니었다. 선비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양반이라는 신분에 국한되었으며 상민은 아무리 인격과 학식을 겸비해도 선비가 될 수 없었다. 따라서 선비는 철저하게 비민중적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훌륭한 선비는 민중 앞에 초연해야 했으며 민중이란 '따르게 하고 알려서는 안 될 중우'에 지나지 않았다. 선비는 또 철저하게 비세속적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손에 돈을 쥐는 법이 없고 쌀값을 물어 보는 법이 없다'는 것이 선비 생활의 이상이라고 했다. 세속적인 문제는 일체 알려고도 않고 알지도 못하며 오로지 대의를 논하는 것이 선비의 마땅히 취해야 할 태도라고 했다. 선비의 생활은 한말로 관념적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18세기 말엽 이 땅을 찾아온 유럽의 선교사와 여행자들이 코리아의 양반 생활의 너무나 가난하면서도 빈궁 속에 태연한 태도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 사례가 많았다. 이런 형이 선비의 이상이라면 오늘의 우리에게 선비형 인간이 바람직한 사람이 못 된다는 것은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한데 이처럼 전시대적 인간상인 선비가 오늘날 왜 새삼스럽게, 심지어 예찬까지 받게 되었는가. 4.19를 계기로 한때 구세대가 지탄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다. '구세대는 썩었다' '나라를 못쓰게 망쳐 놓았다'해서 마치 부정 부패의 상징처럼 공격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다. 사실 구세대는 이런 공격을 받을 만한 이유가 없지 않았다. 8.15 후의 정치, 경제 생활이 줄곧 상궤를 벗어나 혼란을 거듭한 것을 볼 때 비난의 적이 된 것도 무리라고만 할 수 없었다. 선비 대망론 그러나 지금 시대는 어떤가. 오히려 그 전 시대만도 못하다는 소리가 들린다. 일신의 출세와 안락을 찾아 변절을 해도 전처럼 수치는 고사하고 오히려 선망하는 풍조조차 생겼고, 부정 부패의 형태도 더욱 지능화되어, 도대체 도의적 처신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분간하기 어렵게 됐다는 평이다. '부조리 일소'란 구호 아래 당국의 정화 노력이 성과를 거두고 있다 하나 이른바 '윤리 도덕'의 타락은 상은 물론 사회 저변에까지 만연돼 일소 용이찮다는 말이 들린다. 국민 전체가 도의 의식이 타락됐다는 개탄의 소리가 들린다. '선비'의 예찬, 선비형 인간의 대망론이 대두하게 된 것도 아마 이 같은 시대적 배경에서 연유된 것이 아닌가 모르겠다. 선비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전시대적 성격이 짙기는 했으나 한편 오늘의 시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미점이 없지도 않다. 비민중적이며 세속에 어둡고 공리 공론을 일삼는 관념적 인간이라고는 하지만 때로 그들은 지금의 사람들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용기를 대의를 위해 발휘하기도 했다. 직언을 하면 왕의 노여움을 사 목이 달아나는 것이 뻔한데도 죽음을 무릅쓰고 태연히 간언을 서슴지 않기도 했고, 나라가 위태로우면 관군이 무색하게 의병을 일으켜 외적과 싸우는 등 충의를 위해서 생명을 아끼지 않기도 했다. 옳은 일을 위해선 서거정의 말대로 '벼락이 떨어지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서슴지 않는' 대쪽 같은 절개를 보이기도 했다. '사색당쟁'이란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옛 선비에 변절이란 도시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아들 손자대에까지 그들은 일편단심 변할 줄을 몰랐다. 매천같이 초야의 일개 무명 선비조차 망국을 보다못해 순국을 했다. 선비로서 의병 대장 또는 순국 열사로 길이 청사에 빛날 인물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오늘날 선비 예찬론이 나오게 된 것은 그들의 그 굳은 지조, 순국의 애국 사상, 안빈 도락하는 생활 태도 때문이 아닐까 한다. 긍정적 면에서 선비의 좋은 점을 오늘의 시대에 되살려 보았으면 하는 생각에서일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지금 우리에게는 '선비'의 전통이 거의 남은 것이 없다. 일본의 무사도, 유럽의 기사도는 근대에까지 무엇인가 전통을 남겼고 현대 사회에 긍정적으로 일부 계승된 족적이 남아 있으나 우리에게는 '선비'의 전통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여기에는 우리 나라의 특수한 역사적 조건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선 그들의 전근대적 성격을 지적치 않을 수 없다. 선비에게는 세속적인 면, 가령 경제 활동에 너무나도 무능했다. 경제 활동을 극도로 천시했으므로 더욱이 일제의 식민지 치하에서 살아 남을 능력이 없어 의를 지킨 '선비'일수록 경제적 낙오자가 되었다. 또 하나는 그들의 비민중성을 지적치 않을 수 없다. 식민지 치하의 우리 민족의 항일 투쟁엔 민중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됐는데 '선비'는 그들의 생리로 보아 3.1운동 이후의 민중적 차원의 항일 운동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김창숙 등 일부 유생에 대쪽같이 곧은 절개는 남아 있었으나 거의가 개인적 숭절에 불과했고 역사적 항일 조류에서는 사실상 소외되었다. 경계할 복고풍 그 자체 내에 이 같은 취약점이 있은데다 일제의 적극적인 회유 정책을 빼놓을 수 없다. 1910년 나라가 일제에 강제 병합당했을 때 그들은 특히 유림의 포섭에 주력했다. 즉 합방에 직접 간접으로 관여한 정부 요인들에게 작위를 주어 '은사공채'를 발행, 막대한 액수인 이자로 편안한 여생을 보장해 주었고, 이 밖에 정부 관리를 지낸 자 3천 5백 59명, 양반, 유생 9천 8백 11명에게 각각 후한 이른바 '은사금'을 뿌렸다. 구한국 정부의 관리란 으레 양반 유생 출신이며 과거 의병을 일으킨 '선비'들도 말하자면 유생이므로 그들은 특히 유생의 회유에 주력한 것이다. 이리하여 대부분의 유생은 일제에 포섭되고 나머지 수절한 유생들은 사회적으로 영락하고 게다가 항일 운동에서조차 소외되어 이조 5백 년간에 걸친 자랑스러운 선비의 전통은 이렇게 허무하게도 붕괴되고 말았다. 초야에 묻혀 살던 무명의 선비 황현이 스스로 자결의 길을 택한 것도, 5백 년간에 걸친 선비의 전통은 너무나도 무력하게 무너지고 나라는 망했는데 명색 선비란 사람들이 너나없이 일신의 안락을 위해 일제의 은사금을 타먹기에 급급하는 것을 보다못해 아편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황현과 전후해 자결한 20여 명을 마지막으로 이조의 선비 정신은 사실상 전통이 끊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선비 예찬론이 대두된 것은 이미 사라진 이 같은 선비 정신을 그리워하는 심리라고 보겠는데, 이는 그만큼 오늘의 세대가 혼탁한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막연한 선비 예찬은 오늘의 시대에 긍정적 구실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선비 예찬이 복고풍을 일으켜서는 안 되겠다. 선비란 중세 신분 사회의 양반층의 이상상이므로 선비 정신은 반민중적이 되기 쉽고 현실 의식의 결여, 생활 능력의 부정 등 어떻게 보면 현실에서 초연한 생활인을 그렇게 부르는 경향이 없지 않다. 선비를 이렇게 보고, 이런 뜻에서 선비 대망을 한다면 현대 사회에 있어 선비는 긍정적 구실을 하기 어려울 것이다. 현대가 요구하는 선비는 대중을 무시하는 고고형이 아니라 대중 속에서 같이 호흡하는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의 선비는 공리 공론을 일삼는 관념형 인간이 아니라 현실 의식에 투철하고 그러면서도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현실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지향하려는 이념형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유럽 사회가 기사 정신을, 일본이 무사도를 근대 속에서 새롭게 그 정신을 계승했듯이 우리도 선비 정신을 오늘의 시민 사회 속에서 새롭게 되살리는 자각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둘 - 생활속에 피어나는 웃음안개 초보는 역시 초보야 운전면허증을 따고 운전이 하고 싶어 미칠 것만 같은 중독증에 걸려 신랑에게 애원하고 사정해도 위험하다는 이유로 차에는 손도 못대게 하고 운전수 옆 조수석 자리에만 앉혀놓기를 3개월째. 무지무지 속이 상했습니다. 그 인간은 운전하고 싶어하는 저의 간절한 열망을 무시한 채 지 혼자 잘도 하데요. 그 차는 제가 돈을 더 내서 산 건데.... 운전대도 못 잡아보게 하고, 추접더럽게 운전석에 앉아 운전대만 만져도 천원을 받는 그런 비열한 인간이 바로 저의 신랑이랍니다. 한번은 운전을 가르쳐 준다기에 콧노래까지 부르며 꿈을 잘 꾸었다고 몇 번이나 생각하며 운전을 했지요. 잘 간 것 같더구만 이놈의 웬수는 저보고 멍청이라 하지를 않나, 칭찬은 못해줄망정 "너는 안되겠다. 너무 못한다. 나는 내릴랑께 니 혼자 하고 가라."면서 무시하지를 않나, 좌측 깜빡이를 넣어야 하는데 안 넣고, 좌측으로 끼어들 때면 대번 깡통 깨지는 소리가 난답니다. "너 죽을라고 환장을 했냐?" 너무나 비열하게 저의 자존심마저 깡그리 밟아버리지 뭡니까. 속으로 더러워서 못 배우겠다를 연신 외치며, 그래도 참자, 참아야 한다를 수도 없이 외치면서 참았습니다. 그치만 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랑한테는 더러워서 못 배우겠더라구요. 혼자 몰고 다니면 다녔지 신랑에게 배울 건 못 된다 생각했지요. 전 다시는 신랑에게 안 배운다 결심을 했고, 신랑이 없는 날 무조건 몰고 나갈 계획을 밥만 먹으면 세우곤 했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요. 신랑 직원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술을 마시고 새벽에야 들어올지 모른다며 일찍 들어와 차를 두고 갔지 뭡니까. 오늘이 하늘이 내려주신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며 시장에 김칫거리랑 반찬거리를 사러 가기로 결심했고, 어째 맨정신으로 운전대를 잡는 게 겁이나 소주 2잔을 연거푸 마셨습니다. 역시 소주의 위력은 대단했습니다. 소주를 마시니까 너무너무 좋았어요. 기분은 죽여주고 뭐든지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요. 운전대를 잡기 위해 떨어야 하는 것도 소주 때문에 차분하게 잡을 수 있었고, 1단 기어를 넣고 출발할 때도 술 안 먹고 할 때보다 더 스무스하게 잘 빠져 나가고, 이건 어찌된 건지 두려움이란 손톱만큼도 없고, 되레 자신만만해지기까지 하더라구요. "운전 흥, 뭐 아무것도 아니구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렵더니 며칠 사이에 금방 느는구만. 뭐 운전처럼 쉬운 것도 없네. 애게애게 아무것도 아닌데 유세하기는. 아이고 더럽다, 더러워. 흥 그래 너 두고 보자. 여자가 운전하기만 하면 차분하게 남자보다 몇 배 더 잘한다더라. 조금만 기다려라. 비열한 인간, 너를 태우고 드라이브시켜주마." 저녁이라 주위가 어두웠는데도 운전을 잘하는 제가 스스로 기특했습니다. 몇 분만 가면 시장이 나올 건데 사고가 났는지, 신호 못 가서 차들이 빠져 나가지를 않고 밀리는 겁니다.이상하다 싶어 고개를 빼꼼이 내고 앞쪽을 보니 이건 웬일인지 경찰 아저씨는 분명한데 빨간 몽둥이를 들고 차를 일일이 세우는 거였습니다. 저는 그게 음주측정하는 건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근데 지나가는 아저씨가 음주측정한다고 일러주지 뭡니까. 웬 음주측정? 소주 2잔 마신 덕분에 차분했던 저의 가슴은 음주측정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두근두근을 넘어 아예 벌렁벌렁, 얼굴은 창백해지기 시작했고 얼굴과 손에 식은 땀은 줄줄줄 흐르고 이건 정말 환장하겠더라구요. 음주측정한다는 걸 몰랐을 때는 차가 더럽게 빠져 나가지 않더니만, 음주측정한다는 말을 듣고 나니 잘도 빠져 나가데요. 저는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지요. 소주 2잔 마셨으면 음주측정에 제대로 나올 건데.... 이건 큰일났지 뭡니까. 평소 술을 즐겨마시는 것도 아니고, 용기있게 운전하려고 딱 2잔 했는데. '이거 한 번 죽어라 사정해봐, 아님 안 마셨다고 처음부터 잡아떼.' 이런저런 생각에 고민이었습니다. 어제만 해도 박하사탕이 굴러다니드만. 아무리 찾아봐도 없는 겁니다. 껌을 찾아봐도 마찬가지구요. 정말 미치겠데요. 자꾸만 앞차가 안 보이고 긴장을 하다보니 제 몸의 보일러는 물을 빼주라고 난리죠, 금방 나오려는 걸 참기 위해 아랫배에 힘을 막 주려는 순간 급기야 올 것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제 앞에 경찰아저씨가 빨간 몽둥이를 들고 흔들어대는 게 보였습니다. 전 완전히 죽었다 생각했죠. '그래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 그래 딱 한 번만 죽자.' 제가 이렇게 결심을 했을 때 경찰 아저씨는 저에게 음주측정기는 대지 않고 "실례가 많았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하며 거수 경례를 하지 뭡니까. 즉, 그냥 통과하라는 거였습니다. 제가 여자였기에 당연히 술을 안마셨다고 생각했는지 그냥 보내준 겁니다. 여자로 태어나길 정말 다행이라고 생전 믿어보지도 않았던 부처님, 하느님을 찾으며 고맙다고 인사를 했어요. 전 그곳에서 구사일생으로 빠져 나왔지만 벌렁벌렁한 저의 가슴은 쉽게 가라앉지를 않았답니다. 여전히 콩콩콩 숨가쁘게 단박질을 하는 겁니다. 시장에 무사히 도착해 차도 있겠다 몽땅 사고 나왔는데 좁은 일방통로 시장통에 갑자기 차들이 많이 주차해 있는 겁니다. 제가 아까 주차할 때까지만 해도 별로 없었는데 빠져 나가기가 힘들 정도로 빽빽이 주차해 놓았지 뭐예요.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어요. 시장 나오기전 마셨던 소주 2잔의 알코올이 다 빠져 나갔나 운전대를 잡으려고 하니 다시 벌렁대고 쾅쾅 단박질을 하고, 손까지 부들부들 떨리는 게 아닙니까. 더구나 아까부터 제 몸의 보일러 물은 빼주라고 난리구요. 시동을 걸고 1단 기어를 넣고 출발하려는데 클러치를 너무 빨리 떼서 그런지 눈깜작할 사이에 일이 터진 겁니다. 대체로 여자의 직감은 예민하데요. 바로 앞에 있는 트럭을 박고 말았답니다. 심장이 멈춰버릴 것만 같았지만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길래, 후진 기어를 넣고 후진하는데 이건 또 웬일입니까? 뒤에 있는 승용차를 쿵하고 박은 겁니다. 앞이 깜깜했습니다. '그래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니 얼른 이곳만 빠져 나가야지 생각하며 1단 기어를 넣고 우측으로 빠져 나갈려고 했지만 하필이면 우측에 있는 봉고차의 옆구리를 다시 한 번 박고 말았습니다. 전 그때 처음 알았어요. 차가 그렇게 약하다는 걸요. 손이 부르르 떨려 도저히 차를 뺄 수가 없었습니다. 운전 뭐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던 걸 후회하고 또 후회했답니다. 죽는 건 돈뿐이지만 전 나머지까지 다 죽여버렸어요. 살인 운전면허증을 죽여버렸고, 보해 소주 25도를 죽였습니다. 결국 5년이 지난 지금도 소주 한 잔 못 마시고, 운전대 잡으려고 천원 주지도 않을 뿐더러 신랑은 운전대 잡으면 이젠 만원 준다고 다시 한번 잡아보라고 그러지만, 그까짓것 십만원을 준다 해도 안하고 말겁니다. 그날의 김칫거리랑 반찬거리는 몽땅 쓰레기통으로 직행하고, 운전에 운자만 나와도 5년 전 저의 충격은 치를 떨게끔 도사리고 있지 뭡니까. 청취자 여러분! 우리 모두 음주 운전은 절대 하지 맙시다. 고맙습니다. 아참, 그때 보일러 물은 어떻게 됐냐구요? 3번째 봉고를 박을 때 자연스럽게 저도 모르게 빼고 말았답니다.
Board 삶 속 글 2023.01.29 風文 R 415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송건호 편"(1927~2001) 평론가. 충북 옥천 출생. 서울대 법대 졸업. 한국 일보, 경향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논설위원과 경향신문. 동아일보의 편집국장을 역임. 저서에 "민족 지성의 탐구" "한국 민족주의의 탐구" 등이 있다. 역사적 안목의 비판이 실린 많은 평론. 에세이를 발표했으며 한국 지성의 현실과 문제를 일깨우는 인물로 지목되고 있다. 한국 지성의 어제와 오늘 1 한국의 지식 사회에서 그들의 지성을 사적으로 고찰하면 크게 보아 두 단계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잇다. 전 단계는 방향지,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이념형 지성의 단계이고, 후단계는 사실지, 바꾸어 말하면 기능형지성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지성은 넓은 의미에서 감정이나 의지 같은 인식의 활동에 대해 지각의 작용을 의미하며 이런 경우에는 사물을 지각하는 최초의 출발점이 되는 감각도 포함되나, 일반적으로 지성이라 할 때에는 감각으로 얻은 사물을 재료로 사고하고 추상적인 개념으로서 지식을 정리하는 사고 작용을 하는 의식 활동을 뜻한다. 이런 경우에는 대체로 감각과 구별되는 오성이나 이성 같은 작용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좀더 소상히 한국의 지성사를 분석하면 더 많은 몇 개 단계로 구분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제목도 '어제와 오늘'로 되어 있으므로 우선 두 단계로 나누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지성의 소유자들, 환언하면 지식인은 그때 그때의 주어진 사회, 즉 시대적 여건에 따라 그 존재가 여러 가지 의미로 등장한다. 이런 관점에서 8.15까지의 한국 지식인을 볼 때 당시의 지식인은 자타가 공인하는 엘리트였다. 사회적으로 우선 그들은 식민지 사회에서 선발된 계층, 즉 지식인이라는 점을 들어야겠고 따라서 민족 해방이라는 민족적 꿈을 위해 무엇인가 선각적 활동을 해야만 하는 과제를 메고 있었다. 일제 시대에 대학생 내지 대학 출신 지식인에 대한 사회의 기대가 얼마나 컸었는가를 지금 세대는 상상조차 못 할 것이다. 한편 일제 시대의 대학은 철저한 엘리트 양성 기관이었고 학문도 영미 계통 아닌 독일 학문의 영향을 받아 강한 이념 지향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학문이 이념성을 띠고 있다는 것은 학문이 강한 사상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8.15 전까지의 지식인은 이같이 사회적으로는 존경받는 엘리트였고 학문은 이념 지향적인 성향이 강해 대학 출신 지식인들은 너나없이 사회적 민족적 지도자로서의 긍지가 남달리 강했고 그만큼 자존심과 지조가 강했다는 것이 당시의 지식인이 가진 일반적 이미지 였다. 2 엘리트로서의 지식인이 가진 이러한 이미지는 8.15 후까지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해방 당시의 이데올로기 과잉 시대에 지식인의 현실 참여는 공과는 별문제로 치고 하여튼 그 시대를 좌우하다시피 했다. 이때의 지식인은 따라서 강한 이념 지향성을 띠고 있었으며 시대 상황이 절박했으니만큼 어느 의미에서 보면 8.15전 이상으로 그러한 성향이 강했다고도 볼 수 있다. 지식인의 이러한 성향은 자유당 치하에서도 큰 변화가 없었다. 이 시기는 엄격히 따져 일종의 과도기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때까지는 아직도 일제 시대의 지적 풍토가 우세했으므로 지성에 어떤 본질적 변화란 없었다. 후진국의 지식인은 일반적으로 선진국의 학문을 받아들이는 속에서 지식인으로서 활동하게 된다. 따라서, 후진국의 지성을 분석할 땐 그들이 어떤 선진국의 학문 내지는 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는가, 바꾸어 말해 어떤 선진국의 문화권에 속하느냐가 문제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전 단계의 한국은 일본을 중계로 한 독일 문화권에 속해 있었고 후 단계인 지금은, 압도적으로 미국 문화권에 속한다. 우리 나라 지식인은 미국 문화권에 들어가면서 지성의 성격이나 사회적 실이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를 측면에서 재촉한 것이 대학의 사회적 기능이 달라지게 되었다는 점도 지적해야겠다. 즉, 전에는 대학이 엘리트 양성 기관이라는 성격이 강했으나 지금은 양적으로 대학이 일제 시대와 비교가 안 될 만큼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즉 양적 팽창의 필연적 한 결과로 대학이 이미 엘리트 양성 기관으로서가 아니라 지식인의 대량 양성 기관으로 변한 것이다. 지금은 대학 졸업자가 일제 시대의 중학 졸업자보다도 양적으로 더욱 흔하게 되었다. 그만큼 대학과 대학인이 대중화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해야겠다. 대학의 기능에서 지적할 또 하나의 점은 학문이 미국의 일부 영향 아래 전적으로 기능화되었다는 점이다. 대학의 '대중화'와 학문의 '기능화'라는 두 가지 변화는 지식인의 지성에도 결정적 영향을 주어 전단계에 있어서의 지성의 강한 이념 지향성이 기능형 지성으로 질적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지성이라는 동일한 어휘 밑에 전 단계와 현 단계 사이에는 이미 개념상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3 지성의 기능화는 여러 가지 경향에서 발견된다. 지난날 지식인이라고 하면 철학. 문학. 역사. 사상 등 다분히, 문화적, 정신적, 사상적인 즉 추상적 지성의 소유자를 의미했다. 옛날 대학생이 즐겨 철학, 종교, 예술 같은 형이상학적 분야에 관심이 많고 그 방면의 독서를 많이 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 대학생은 이러한 관념적 지성에는 거의 흥미를 기울이지 않는다. 대학생의 공부방을 들여다보면 얼마나 지금 대학생이 순수 교양을 위한 독서의 빈약한가를 발견하게 된다. 이제 학문은 점차 기능화의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보다 더 실무적이 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지식은 사회에 나가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먼저 문제된다. 문학이니 철학이니 하는 순수 문학 또는 인문 과목의 전공은 사회에 나가 가난하게 살기 알맞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학생들의 생각이 이렇게 변한 데에는 오늘의 대학 교육이 기능인의 양성을 주목적으로 삼고 있는 사실하고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대학의 교과 과정을 보면 오늘의 학문이 기능적이며, 따라서 지성이 기능형 지성으로 변하게 된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지성의 기능화는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시대적 과제라고 해야 할는지 모른다. 한 세대 전처럼 지식이 한낱 관념적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면 해마다 템포가 빨라지는 오늘의 과학 기술 시대를 따라가기 어려울 것이며 국제생존 경쟁에 낙후되기 마련일 것이다. 이것은 특히 신생국의 경우 중대 문제이며 신생국일수록 지식의 기능화는 절실한 과제라고 해야 할는지 모른다. 지성의 기능화, 따라서 지성의 효율화가 오늘날처럼 요구되는 시대는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지성의 기능화는 이러한 긍정적 구실만 하지 않는다. 기능화란 바꾸어 말해 기술화를 뜻한다. 주어진 문제, 일들을 효율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일종의 테크닉학에 불과하다. 주어진 문제, 주어진 일이 과연 옳으냐 그르냐의 가치 판단에는 소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능형 지성의 소유자는 자기의 배운 자 지식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살릴 것이냐에 보다 더 관심을 쏟는다. 그들은 자기의 지식이 옳게 사용되느냐 악용되느냐에 대해서는 그렇게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즉 효용을 보다 생각하며 그 지식의 사용이 사회적으로, 민족적으로, 국가적으로 어떠한 의미가 있으며 과연 바람직한 사용이냐 아니냐에는 그다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지식의 기능화가 빚는 일종의 불가피한 경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짓기의 가치를 기능적-즉 효능적 위주로만 생각하다 보면 그러한 지식인은 사회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모순된 행동을 하면서도 태연자약 아무런 부조리도 느끼지 않으며 따라서 고민도 수치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가령 오늘은 A를 위해 활약하다가도, 기회가 허용만 되면 A와 견해를 달리하는, 심한 경우 적대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B를 위해서라도 가진 바 지식을 동원, 봉사를 하는 예를 볼 수 있다. 지성이 이념성을 겸하지 못하고 기능화가 지나치다 보면 효용성이 문제이지 지성의 일관성, 바꾸어 말해 지식인의 지조 같은 것은 그다지 문제되지 않는다. 기능적 지성의 소유자 중에는 일반적으로 그의 사회 생활에 일관성이 부족하고 효율성만을 찾아 해바라기와 같은 생활을 하는 사례를 흔히 볼 수 있다. 일찍 '근대화' 과정을 거쳐 휴머니즘이나 개인주의가 발달하고 따라서 자의식, 주체 의식이 강한 서구 사회에서는 지성이 기능화되어도 뚜렷한 자아 의식으로 '해바라기'식 처세를 보기 힘드나, 자아 의식이 아직 약한 후진 사회에서는 지서의 지나친 기능화가 서구 사회에서 보기 어려운 여러 가지 부작용을 일으키기 쉽다. 한때 존경의 대상이 된 바 있는 지식인이, 일부이기는 하나, 오늘날 멸시와 조소의 대상이 되고 있음은 개탄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최근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높아지고 새삼스러우리만큼 민족의 주체성이 주로 사학계를 중심으로 의식되고 제창되어 지석의 지나친 서구적 기능화에 대해서도 반성의 경향이 일부 나타나고 있음은 경하할 일이다.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이라고 무조건 바람직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만 문화나 지성을 한낱 기능적 의식 활동으로만 받아들이는 서구의 일부 지적 풍토에 도전, 이념 성향을 강하게 띠고 나타났음은 주목할 만하다 하겠다. 본래 가장 바람직한 지성이란 물론 기능주의에 치우쳐서도 또 이념주의에만 치우쳐서도 안 된다는 것은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오늘의 한국 사회의 지성은 이와 같이 지나친 기능화와 이것에 도전한 새로운 이념형 지성 간의 일종의 갈등 현상의 축도라고 보아 틀림없을 것이다. 따라서 지식인들은 이 같은 한국 지성의 현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민족적 자각을 더욱 높여 신생국의 바람직한 지성이란 진정 무엇인가를 탐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