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전혜린편"(1934~1965) 수필가. 평남 순천 출생. 독일 뮌헨대 독문과 수료. 여러 대학의 강사를 거쳐 성균관대 교수 역임. 31세로 자살함. 자유로운 정신과 현실 세계와의 치열한 대결 속에 불꽃처럼 살다가 간 지식인이었다. 끈기와 탄력과 집중력을 갖고 생을 긍정했고 생의 완벽성을 구했다.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삶에 대한 그의 강렬한 사랑과 일종의 필수적인 비애의 기록으로서 수많은 젊은이들의 심금을 울린 바 있다. 사치의 바벨탑 - 여성의 가장 큰 본질적 약점은 사치의 광적 추구와 같은 생에 대한 비본연성인 것 같다. '여자는 전체로 보아서 아직도 하인의 신분에 있다. 그 결과 여성은 자기로서 살려고 하지 않고 남성으로부터 이렇다고 정해진 자기를 인식하고 자기를 선택하도록 된다. 남자의 손에 쥐어진 경제적 특권, 남자의 사회적 가치, 결혼의 명예, 남자에 의존하는 것에서 얻는 효과, 이러한 모든 것이 여자들로 하여금 남자의 마음에 들도록 애쓰고 있다.' 여성에 관해서 말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남성에 대한 여성의 관계에 있어서 언급되어야 한다. 우리 나라뿐 아니라 전세계의 어느 나라에서도 여성과 남성 간의 사회적 차이와 대립이 완전히 제거된 곳은 없으며 앞으로도 사회 구조의 전적인 변화가 없는 한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몹시 느린 속도로 향상되어 가는 과정에 있고 아직도 우리는 평균적으로 보아서 여자가 사회에 한 발을 디디고 서기가 마치 미국에서 한 흑인이 그렇게 하려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힘드는 처지에 있다. 그러한 남성과 여성 간의 커다란 차이를 미리 고려하면서만 우리는 여성의 제문제 또는 약점을 파고들어갈 수가 있을 것이다. 여성의 가장 본질적 약점으로 나는 생 전반에 대한 비본연적 태도를 들고 싶다. 자기 자신을 순간순간마다 의식하고 사회와 세계에 대해서 자기를 투기하고 초월하면서 사는 것이 본연적인 생활 태도라면 태반의 여성의 생활은 그와 반대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보다 큰, 보다 진실한 문제-유는-에 빠져 있고 그 곳에서 아무런 타격도 전율도 반응 없이 흘러가듯이 사는 생활 태도, 말하자면 비진정하고 불성실한 생활 태도가 대부분 여자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남녀를 막론하고 인간이라는 무서운 조건하에 있는 우리가 해야 할 유일의 일은 우리의 삶을 규명하는 것일 것이며 적어도 그러한 근본적인 생활 감정에 지배된 생활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유일의 진실하고 엄숙한 문제는 회피하고 자그마한 일들, 물진, 사치스런 생활, 남자에게 의존 또는 기계와 같은 나날의 틀 속에 안면하는 의식, 이러한 것들 속에 자기를 소외해 버리는 생활은 허위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생과 사에 자기를 똑바로 응시하고 산다는 것은 무서운 용기와 신경력을 요한다. 특히 이 사회의 구조와 한국적 풍토 속에서는 너무나 신경이 긴장되는 작업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 없이는 전생의 의의가 무로 화하는 것이니까 그것을 회피하는 것은 일회적으로 주어진 우리 삶에의 죄인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기를 좀더 응시할 수 있을 것, 자기를 견딜 수 있을 것이 결과적으로는 다 비극인 우리의 생의 소상을 긴박한, 팽팽하게 차 있는 참된 순간으로 지속시키는 방법일 것이다. 우리가 존재에서 외면하고 사실의 세계로만 눈을 향하는 데에 여성에 대한 사회의 비난의 근본 원인이 있다고 본다. 자기 과제를 느끼지 못하는 삶에는 필연적으로 공허가 따르고 따라서 오락의 필요가 생긴다. 최신 유행의 여성들에게 갖는 매력은 거기에 있다. 왜냐하면, 물건을 사는 것-특히 몸에 붙일-은 어느 나라 여성을 막론하고 남자들에게 있어서 바와 필적할 만한 상쾌한 오락인 까닭이다. 가장 유행이고 가장 비싼 물건을 입거나 신을 여자의 얼굴에는 반드시 어떤 빛나는 생기가 떠 있다. 그 순간은 그 여자는 살고 있는 까닭에 자기가 이룰 수 없는 사회 내의 일이나 지위나 가치의 인정을 완전히 보상해 주어서 하고 있다. 사치스러운 복장에 대한 여성의 판타직은 억눌려진 야심 사회 내에서 해당하고 싶은 본질적 욕망과, 자기는 다른 여자와 다르다고 어떤 여자든지 반드시 믿고 있는 오신, 또 누구나 다소 가지고 있는 나르시즘(자기 연애) 등의 혼합물인 것이다. 정말로 수많은 여인은 이 광신의 추구를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아끼지 않고 있다. 월급의 전액을 차지하는 값의 지갑을 태연히 들고 다니고 연봉에 해당되는 값의 외투도 서슴지 않고 해 입는다. 현실에서는 발견하거나 인정되지 않는 자아의 가치를 이러한 방법으로나마 가상적으로라도 만들어 보려는 것이다. 외투도 신도 곧 닳아 버리는 물건이고 유행도 바뀐다. 즉 가상적 자아의 '바벨탑'은 너무나 빨리 무너지는 것이다. 그러면 또 새로운 투쟁이 시작된다. 이렇게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여성의 물질에 대한 애착은 웃거나 비난하기에는 너무나 어둡고 심각한 근원이 여성의 내재 속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비본질적 존재로 여성을 만든 것은 여성의 지능 계수도 생리도 아니고, 다만 사회의 상황인 것으로 사회와 가정은 여성을 가능한 한 비본질적으로 교육하기에 전력을 다해 왔다. 여성의 자주성을 찾으려는 가장 조그만 움직임이나 생각까지도 조소되고 비난받아 왔고 다만 두 사람의 합의에 의해서 공동하게 생활을 건설해 가고 둘이 다 자아의 생장을 지속시켜 가는 공동체라고 보아야 할 결혼을 사회는 여자의 궁극적인 숙명, 여자의 자아 발전의 무덤으로서 또 어떤 절대적인 영광스러운 예속으로서 가르쳐 주어 왔다. 말하자면 비진정하면 할수록 여자다운 여자일 수 있다. 그러한 전통에 닦인 여자도 자연히 그러한 사고 방식을 갖게 되었고 그것에서 이익을 끝내어 줄 것까지도 알게 되었다. 즉 자기의 삶 전부를 실존을 스스로 순간마다 결단하고 세계로 향해서 투기하는 생활 대신에 한 남성에게 자신을 꽉 맡겨 버리고 자기는 더 이상 사고할 필요 없이 사소하고 무상하게 흘러가는 일상성과 사실성의 세계에 파묻히는 편이 얼마나 편하고 또 사회에서 잘 받아들여진다는 것을의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어느 여자도 그것에 완전히 만족하거나 행복을 느끼지도 않을 것이다. 적어도 그런 생활에는 일순 일순의 팽팽한 충일감과 초월의 느낌이 없을 것이다. 어느 주부든지 어떤 순간에는 반드시 자기를 부조리하게 느낄 것이다. 쌀 씻고 빨래하고 옷 꿰매고, 나날의 무서우리만큼 단조한 반복 속에서 그 여자의 인식은 엷게나마 눈을 뜰 것이다. 이것이 나의 생활인가 하고, 그럴 때 우리는 그 의식의 각성을 소중히 포착해야 한다. 그리고 파고 들어가야 한다. 분명 그것은 나의 생활이 아닌 것이다. 누구냐의 생활에 불과한 것이지 자기를 사물이나 타자의 속에 소외 해 버린 일반적인 아무나의 삶이지 그것은 이 일회적인 나만이 가질 수 있는 삶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것을 의식할 때 우리는 생이 진정한 것이 아니었고 불성실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보다 한 발자국 나와 가까워진다. 자아에 대해서 비로소 눈을 뜬 느낌을 갖게 된다. 무엇보다도 자아에 자기의 감정과 이성과 신경에게 충실한 것, 그것 이외에 우리가 자아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없다. 그것만이 사치, 허위, 소극성, 아첨, 비굴, 수다 등등의 여성에 붙여진 비난의 제 레테르를 벗는 길로 한 걸음 나아가는 길이다. 이 모든 레테르는 남성들의 사회에서 남성에 의해서 붙여진 레테르이다. 그러나 사회 상황의 변화에 의해서 남녀가 정말로 동등한 입장이 되고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세계를 향해서 자신을 초월하는 행위 속에 자기를 찾을 수 있을 때까지 여성은 개인적으로라도 무서운 고독과 절망과 싸우면서 자아를 좇는 길을 걸어가지 않을 수 없으며 현재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이 숨은 곳에 많으리라고 확신한다. 지엽적인 여성의 결점은 모두 이러한 비실존적 생활 태도에서 나온 것이므로 우리는 여성의 결점을 열거하는 것보다도 우선 우리의 존재의 문제를 좀더 밝혀야 한다고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경제적으로 비의존적으로 투기가 가능해진다면, 아니 한 마디로 여성의 경제적 지위가 남성의 그것과 동등해진다면 여성의 근본 결함인 비진정, 불성실한 생활 태도는 자연 소멸하고 여성도 보다 높은, 보다 참된 과제를 자기의 생활 과제로 삼게 될 것이다.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둘 - 생활속에 피어나는 웃음안개 새댁, 니 봤나? - 문상자(여.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2동) 저는 지금으로부터 약 16, 7년 전에 있었던 얘기를 들려 드릴까 합니다. 저희는 결혼한 지 3년 만에 조그마한 가게 하나, 방 하나, 부엌 하나가 딸린 집을 세 얻어 장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가게를 어렵게 얻어서 들어가고 보니 한 건물 안에 저희처럼 생긴 가게가 여섯이나 되었어요. 닭집, 횟집, 칼국수집, 건재상, 그릇 가게, 건어물 가게, 그런 것 중에서도 네 집은 부인들이 전부 연령이 저와 같은 또래였어요. 한 지붕 여섯 가족에 아이들끼리 싸움도 잦았지만그런 아이들 때문에 생긴 일들은 그래도 서로 이해하며 잘 견뎠어요. 오히려 심각한 문제는 연탄창고 문제, 화장실 문제, 마당청소 문제, 쓰레기 문제, 전기세 문제 등등이었지요. 먼저 연탄창고 문제부터 말씀드릴게요. 50장씩 넣으면 6집이 다 넣을 수 있는 연탄창고에 어느 한 집이 100장이라고 넣으면 한집은 자리가 없게 되죠. 그것까지는 좋았어요. 어떨 땐 연탄이 없어졌다는 거예요. 그러면 전부 나와서 숫자 세어 가면 집집마다 연탄 숫자를 헤아려 각자 고유의 표시를 하는 거예요. 일자니 열 십자니 하며.... 한번은 연탄창고 제일 안쪽 좋은 자리에 있던 사람이 이사를 나가면서 서로 그 자리를 잡으려고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죠. 그리고 공동 화장실 문제. 청소는 늘 하는 사람만 해요. 아예 6개월, 1년 동안 이사 나갈 때까지 화장실 청소 한번 안하고 나가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 땐 6개월이나 1년이 계약기간이었어요.) 그 다음 전기세 문제. 지금은 건물 안에 여러 가구가 거주하면 집집마다 계량기를 부착하지만 그 땐 한 건물 안에 하나씩. 그러다 보니 대충 누구 집은 전구가 몇 개니 얼마, 늦게까지 장사하니 얼마, 다달이 말썽이었어요. 그 말썽은 요금을 안 내려고 하는 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적게 내려고 하다보니 생긴 거라지만, 전기세 걷는 이층에 사는 주인은 아예 자기 집은 전기세를 내지 않더라구요. 그래도 세 들어 사는 죄로 모두들 말 못했어요. 그럭저럭 싸우며 이해하며 이사 온 뒤 한겨울을 지내고, 초여름 어느 저녁 무렵 바로 문제의 그 날을 말씀드릴게요. 문제 중의 문제, 그것은 수돗물이었어요. 물이 잘 안 나왔거든요. 부엌은 전부 재래식이었습니다. 수도꼭지는 한 개, 마당에 놓인 하나의 꼭지에 여섯 가구가 번갈아가며 순서대로 물을 받아 썼어요. 지금이야 수돗물이 안 나오면 며칠 전에 TV나 라디오 방송 혹은 신문에서 미리 알려주지만 정말 그 땐 예고 없이 물이 이틀 사흘씩 안 나오는 게 허다했어요. 그러니 집집마다 물을 받는 갈색 고무물통은 필수품이었죠. 사건의 그 날도 아침에 우리 차례가 되어서 받는데 물통에 절반쯤 받았을까, 물이 졸...졸...졸 조금씩 나오더군요. 그래서 한통 받을 수 있을까 걱정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물이 뚝 끊기더라구요. 그래서 대충 기저귀랑 빨래들을 물을 최대한 아껴서 한 후, 곧 나오겠지 한 것이 하루도 아니고 이틀째 물이 나오질 않는 거예요. 우리는 기저귀 때문에도 걱정이었지만 식당, 통닭집들은 물 없으면 난리 나잖아요. 모두 물 때문에 전전긍긍하며 아랫집에서 조금씩 얻어다 쓰며 이제나 저제나 수도꼭지만 바라보게 됐지요. 드디어 사흘째 되는 날. 그 날도 밤까지 물 걱정하면서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자니 어찌 그리 잠은 쏟아지는 지요. 앉아서 꾸벅꾸벅 하는데 앗! ‘쏴아- 주르르륵.’ 물소리가 콸콸 나는 겁니다. 그 소리에 저는 “물이다.” 하고 아기를 방바닥에 눕히고 “아줌마, 물 나와요. 수돗물.” 하면서 벽 하나 두고 살고 있는 옆집 아줌마를 부르니 그 아줌마도 “물이 나와?” 하면서 뒷마당으로 나왔고, 다른 집 아줌마들이 순식간에 우르르 나왔어요. 얼마나 반가웠는지.... 그런데 우르르 뛰어나왔던 여섯 아줌마들은 눈이 튀어날올 기막힌 상황에 직면한 겁니다. 이른 오후부터 통닭집에서 맥주 한잔 하고 닭 한마리 드시고 거나하게 취하신 손님 한분이 화장실을 물으니 뒤쪽 마당에 있다고 가게 아줌마가 가르쳐 줬는데, 이 양반 화장실은 못 찾고 꺼진 연탄에 얹혀 있던 구멍난 양은 양동이에 실례를 한 거예요. 양동이에 물 버리면 소리가 좀 큽니까? 그 소리가 '쏴아- 주르르륵!'하고 날 수밖에요. 그런데 아줌마들이 "물이다." 하고 여섯 명씩이나 막 뛰어나오니까, 실례를 하던 그 아저씨가 더 놀라셨습니다. 그리고 아저씨는 당황에서 돌아서다가 구석에 파놓은 조그마한 시궁창 맨홀에 한쪽 발을 빠뜨리고 말았어요. 소변은 멈출 줄 모르고 계속 흐르고(?) 한쪽 발은 시궁창에 빠지고.... 아저씨는 도망도 못 가고 그렇다고 옷도 못 추스르고 정말 황당해 하더라구요. 우리 역시, 그 아저씨를 붙잡아 드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안서고 눈을 어디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더라구요. 그렇다고 잡아드릴 수도 없었어요. 왜냐구요? 글쎄요.... 그날 저녁 가게 문을 닫을 무렵 연세 약간 드신 횟집 아줌마 왈, "새댁, 니 봤나?" "뭘요...?" "하하, 호호." 그날 이후 며칠 동안 우리들은 눈만 마주치면 웃었고 혼자서 밥하다가도 비실비실, 빨래하다가도 비실비실 웃었습니다. 지금은 모두들 뿔뿔이 헤어져 잘살고 있지만 가끔은 그때가 그립네요. 곤롯불에 시커멓게 그을린 냄비...등등 모두가 추억이네요.
Board 삶 속 글 2023.02.06 風文 R 696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之讐) 不:아니 불. 俱:함께 구. 戴:머리에 일 대. 天:하늘 천. 讐:원수 수. [준말] 대천지수(戴天之讐), 불공대천(不共戴天). [동의어] 불구대천지원수(不俱戴天之怨?),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 [출전]《禮記》〈曲禮篇〉,《孟子》〈盡心篇〉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란 뜻으로, 반드시 죽여야 할 원수를 일컫는 말. ①《예기(禮記)》〈곡례편(曲禮篇)〉에는 ‘불구대천지수’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아버지의 원수와는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고 [父之讐弗與共戴天(부지수불여공대천)] 형제의 원수를 보고 무기를 가지러 가면 늦으며[兄弟之讐不反兵(형제지수불반병)] 친구의 원수와는 나라를 같이해서는 안된다. [交遊之讐不同國(교유지수부동국)] 즉, 아버지의 원수와는 함께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으므로 반드시 죽여야 한다. 형제의 원수를 만났을 때 집으로 무기를 가지러 갔다가 놓쳐서는 안 되므로 항상 무기를 휴대하고 다니다가 그 자리에서 죽여야 한다. 친구의 원수와는 한 나라에서 같이 살 수 없으므로 나라 밖으로 쫓아내던가 아니면 역시 죽여야 한다. 오늘날 이 말은 아버지의 원수에 한하지 않고 ‘더불어 살 수 없을 정도로 미운 놈’이란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또 이 말은《맹자(孟子)》〈진심편(盡心篇)〉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맹자의 말과 비교가 되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내 이제야 남의 아비를 죽이는 것이 중한 줄을 알겠노라. 남의 아비를 죽이면 남이 또한 그 아비를 죽이고 남의 형을 죽이면 남이 또한 그 형을 죽일 것이다. 그러면 스스로 제 아비나 형을 죽이지는 않겠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이니라.”
Board 고사성어 2023.02.06 風文 R 948
국가의 목소리 지난 4일, 서울 시청 주변은 백남준의 비디오아트 전시장 같았다. 여러 모니터에 시시각각 다른 영상이 나오듯이, 집회와 맞불집회가 동시다발로 열렸다. 목소리는 뒤엉키고 시선은 흩어졌다. 그 사이를 헤집고 파고드는 말이 있었다. 10·29 이태원참사 100일 추모대회 참가자들을 향한 경찰의 선무방송. 유일하게 들은 국가기관의 말이니 그 일부를 기록해 둔다. “… 여러분은 해산 명령에도 불구하고 해산하고 있지 않습니다. … 여러분, 여러분은 신고한 집회의 장소와 방법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 계속하여 불법 집회 시위를 진행하고 있고, 이러한 질서 문란한 상태에 대해서 주최 측에서 질서 유지와 질서 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16조 4항에 따른 준수 사항을 위반한 행위입니다. 이로 인해 시민들의 불편이 야기되고 공공의 안녕 질서에 대한 위험이 초래되고 있으나, 여러분께서 더 이상 질서 유지를 자율적으로 할 수 없다고 판단됩니다. 이에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20조 1항 제5호 및 동법 시행령 17조에 따라 남대문 경찰서장의 위임을 받은 경비과장이 4차 해산명령을 발합니다. 모든 참가자는 즉시 해산하시기 바랍니다. 경찰의 해산 명령에 불응하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제24조 5호에 의거,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고 경찰력을 투입하여 직접 해산 조치할 수 있습니다. 즉시 해산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망연히 앉아 있었다. ‘전혀 복수하지 않는 것보다는 약간이라도 복수하는 것이 훨씬 인간적이다.’(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전혜린편"(1934~1965) 수필가. 평남 순천 출생. 독일 뮌헨대 독문과 수료. 여러 대학의 강사를 거쳐 성균관대 교수 역임. 31세로 자살함. 자유로운 정신과 현실 세계와의 치열한 대결 속에 불꽃처럼 살다가 간 지식인이었다. 끈기와 탄력과 집중력을 갖고 생을 긍정했고 생의 완벽성을 구했다.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삶에 대한 그의 강렬한 사랑과 일종의 필수적인 비애의 기록으로서 수많은 젊은이들의 심금을 울린 바 있다. 회색의 포도와 레몬빛 가스등 -영원한 물음 '당신은 어디서부터 왔는가?에서 도망하고 싶었다. 내가 독일의 땅을 처음 밟은 것은 가을도 깊은 10월이었다. 하늘은 회색이었고 불투명하게 두꺼웠다. 공기는 앞으로 몇 년 동안이나 나를 괴롭힐 물기에 가득 차 있었고 무겁고 척척했다. 스카프를 쓴 여인들과 가죽 외투의 남자들이 눈에 띄었다. 아무도 없는 비행장 뮌헨 교외 림에 내렸을 때 나는 울고 싶게 막막했고 무엇보다 춥고 어두운 날씨에 마음이 눌려 버렸었다. 뮌헨 하면 그 이후 내 머리에는 회색과 안개로 가득 차게 된 것도 그의 독특한 나쁜 날씨보다도 내가 에어 프랑스에서 내렸던 그 날 오후의 첫인상과 나의 걷잡을 수 없었던 외로움 때문이 아니나 생각된다. 트렁크를 들고 비행장 버스에 올라 운전사에게 돈을 다 내어 보이고 그 중에서 1마르크만 가져가게 한 일, 힘없이 혼자서 하숙을 찾아 갔던 일-나는 정말로 내가 파리에 있는 말테나 된 듯한 서글픈 마음이었다. 우선 고국에서부터 연락해 놓았던 아스타라는 학교 사무국에 가서 벽에 붙은 벽보를 찾아야 했다. '빈 방 있음'의 광고를 보기 위해서였다. 모두 값이 비쌌다(내 생각보다). 또 학교에서 멀었다. 그리고 뮌헨은 나에게 마치 라비린트 그 자체처럼 보였었고, 학교에서 5분 이상 더 가는 곳에 가서 살 자신은 나에게 없었다. 그 중에서 나는 겨우 '빈 방 있음, 전기 있음, 학교에서 도보로 5분, 월세 50마르크'라는 꼬불꼬불한 연필 글씨로 쓰인 광고 용지를 찾아 냈다. 그 집은 정말로 학교에서 5분쯤 가면 있는 영국 공원이라는 광대한 공원에 임해 있었다. 첫인상이 포의 어셔 가를 연상시켰고 유쾌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수가 어디 있으랴? 다른 빈 방들은 대개가 '미국인에게 한함'이거나 또 엄청나게 비쌌던 것을... 나는 다시 들어서는 발을 억지로 닫혀진 문 앞으로 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60세 가량 된 극단적으로 비만한 흰 단발 머리의 할머니가 나왔다. 키는 작았고 차림새는 누추했다. 나는 '방을 빌리고 싶습니다'라고 말했거나 '방을 빌릴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던 것 같다. 할머니의 표정은 의외로 상냥했고 입가에는 구수하다고 형용할 수 있는 미소를 띄어 보였다. '학교 광고를 보셨습니까?' 할머니는 또 무엇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악의는 없는 말투였다. '방을 볼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네, 네, 어서 들어오세요.' 방, 내 방인 것이다. 나는 그 할머니를 따라서 긴 낭하를 지나갔다. 낭하는 어두웠고 방이 많았고 방마다 사람의 이름이 작게 써 붙여 있었다. 맨끝에서 할머니는 멎어서더니 주머니에서 열쇠 뭉치를 꺼냈다. "여기 살던 사람이 이틀 전에 자기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페르시아 사람이었지요." 열쇠가 돌려지고 문이 열렸다. 나는 주저하면서 할머니 뒤를 따라 들어갔다. 방도 마루처럼 어두웠으나 의외로 깨끗했다. 초록빛 도자기로 된 커다란 난로가 한편 구석에 서 있었고, 전기 곤로가 놓인 대와 흰 요와 이불이 덮인 침대가 하나, 그리고 경대와 찬장이 딸린 콤모데가 있었다. 창은 두개가 영국 공원과 반대 되는 포도로 나 있었고 이중창에 이중 커튼이 둘러져 있었다. '하시겠어요?' 할머니가 물었다. '네.' '방세는 한 달분 미리 내시기로 되어 있습니다.' 할머니가 나간 후 나는 덧문을 열고 유리창을 활짝 열었다. 돌로 포장된 좁은 골목은 완전히 잿빛 안개로 덮여 있었고 물기가 촉촉히 방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나는 어제까지나 창 밖을 보고 있었다. 사람이 별로 안 지나가고 여기는 뮌헨에서도 가장 오래 된 지역이고 폭격도 안 맞은 1920년대 그대로의 문명의 이기만을 쓰고 사는 마을인 것 같았다. 트렁크를 침대 밑에 넣고 나는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피로했음에도 불구하고 잠은 안 왔다. 열쇠로 방문을 잠그고 거리로 나갔다. 그 때 마침 가스등을 켜는 시간이어서(다섯 시경이었던 것 같다.) 제복 입은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좁은 돌길 양쪽에 서 있는 고풍 그대로의 가스등을 한 등 한 등 긴 막대기를 사용하여 켜 가고 있었다. 더욱 짙어진 안개와 어둑어둑한 모색 속에서 그 등이 하나씩 하나씩 켜지던 광경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짙은 잿빛 베일을 뚫고 엷게 비치던 레몬색 불빛은 언제까지나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다. 내가 유럽을 그리 원한다면 안개와 가스등 때문인 것이다. 다음날 아침에는 나는 근처의 생활 필수품점에 가서 빵 두개와 마가린 한 통을 샀다. 전기 곤로 주전자를 올려놓고 나는 빵을 먹었다. 학교의 개강은 아직 한 달이나 남아 있었다. 나는 원래 돌아다니거나 걷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었고 외국서는 더구나 무서웠다. 그러나 낮에 나는 큰 마음을 먹고(사실 도착 이래 식사다운 식사를 못 해서 배도 고팠다.) 바로 근처에 있는 제로제라는 음식점에 들어갔다. 메뉴를 보았으나 별로 눈에 익은 게 없었다. 단 왜지 커틀릿이라는건 나도 알 것 같아 그걸 시켰다. 그러나 프로일라인(하인)이 가져온 것은 우리 개념의 커틀릿이 아니고 돼지고기를 큰 덩어리째로 그냥 삶은 것 같았다(실제로 그렇게 요리하는 모양이다.). 나는 힘없이 먹기 싫은 음식을 앞에 놓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마실 것은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라는 물음의 뜻도 파악 못 하고 그냥 웃어 보였더니 작은 컵에 맥주를 따라서 갖다 주는 것이었다. 난 그냥 잠잠히 앉아 있었다. 말을 하면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을 안고..., 그 때 여러 명의 틴 에이저들이 들어오더니 주크 박스 앞으로 다가가서 판을 고르는 모양이었다. 그 중의 하나가 힐끗 나를 보더니 무슨 판을 눌렀다. 그에 이어서 뜻밖에도 일본말 노래가 새어나오는 데는 아연하여 보고 있었더니 일본의 이별의 노래라고 그 중의 하나가 나에게 알려 주듯 말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아마 나를 일본인으로 안 모양이었다. 그 때만 해도 뮌헨에 한국인이라고는 거의 없었고 더구나 여자는 구경하려 해도 없었을 때니까 아마 그렇게 짐작한 모양이었다. 나는 역시 웃어 보였을 뿐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러나 왜 그런지 서글퍼졌고 덜 혼자인 듯한 느낌이었다. 그 후로 나는 오후나 저녁때 그 집을 자주 찾아갔다. 거리도 내 방에서 가까웠고 음식값도 다른 데보다 싼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프로일라인도 친절했다.늘 말없이 호의를 보여 주었고 주간지도 내 테이블에 갖다 주곤 했었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이 음식점이 보통 음식점이 아니라 예술가들의 합숙소인 것도 알게 되었다. 목요일에는 '시의 밤'이 있고 화요일에는 '화가의 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집의 한편 벽에 더덕더덕 붙어 있는 사진이며 편지며 분필 사인이 토마니 링겔나츠니 캐스트너니 좀마니... 하는 쟁쟁한 작가나 화가나 만화가들의 소행인 것도 점점 알게 되었고 이 집이 한때 반나치 운동의 중심이었던 것도 알게 되었다. 이 집에서 나는 처음으로 일제 아이힝가라는 여류 시인의 존재를 그 여자의 특이한 용모와 매력적인 긴 흑발과 함께 알았다. 가을은 깊어만 갔다. 강의가 끝나면 나는 학우들(오스트리아 여학생이나 프랑스 학생)과 같이 근처의 다방에 가서 크림 커피 한 잔으로 점심을 때우는 방법도 배웠다. 주립 도서관도 자기 집 내부처럼 환히 알게 되고 뮌헨 시내의 고서점이란 고서점은 다 환히 알게 되었다. 헌 책방 주인과도 친해지고 이미륵 씨 얘기도 듣게 되었다. 학교 정문 앞에서 파는 군밤 장수의 군밤을 50페니히쯤 사서 교실에서 먹는 일에도 익숙해졌다. 그러나 마음은 몹시 허전했다. 고국에까지 뛰거나 걸어서 갈 수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 무서운 심연을 내 마음 속에 열어 놓을 줄은 나도 몰랐었다. 짙은 안개를 들이마시면서 나는 새파란 하늘을 그리워했다. 감나무나 대추나무를 꿈에 그렸다. 사실로 내가 그리워한 것은 황색 그림자였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감상이나 미학적인 어떤 음탄이 아니었다. 그것은 색이 있는 민족의 환영--그들의 비극이 내 속에 담겨져 있고 그들의 대표자로 내가 여기에서 간주되고 있는 그러한 비전이었다. 걷잡을 수 없는 공포였다고 해도 좋다. 강의실 내의 교수의 방언과 노령에 의한 발음의 불명료에 그리고 '생활 필수품점' 속에 진열돼 있는 셀로판지로 담긴 이탈리아 쌀에... 어디서나 그 비전은 나를 따랐다. 뮌헨 대학에서 내 하숙에 이르는 레오폴드 통은 거대한 꼿꼿하게 높기만 한 포플러 가로수로 줄지어져 있었다. 그 길은 온갖 빛의 낙엽으로 두껍게 깔리기 시작할 무렵의 가을이 아름다웠다. 그 거리에는 작은 어항같이 생긴 '유리 동물원'이 있었다. 유리로 기막히게 정교하게 만든 온갖 작은 짐승들, 도자기 발레리나들...안데르센 동화 속의 나라 같았다. 나는 매일 그 앞을 지날 때마다 5분 이상이나 진열장을 들여다보곤 했었다. 갖고 싶고 애무하고 싶은 유리 동물들이었다. 그 가게 뒤에 쓰러져 가는 '노아 노아'라는 집이 있었다. 거기는 다다이스트의 집합소로서 늘 해괴하고도 기상천외인 그림들이 잔뜩 붙어 있었다. 화가들이 수염을 늘어뜨리고 떠들며 담론하는 살롱이기도 한 것 같았다. 때로는 에리카 만의 낭독회도 열리는 모양이었다. 그 무렵에 나는 제로제보다 더 싼 음식점을 발견했다. 서서 먹는 집이었다. 흰 소시지를 불에 구워서 겨자를 발라 먹는 소시지 집이었다. 거기다가 신 오이 한 개와 리모나데 한 컵을 먹어도 1마르크가 안 되니 싸기도 하려니와 냄새만으로 이끌려 들어가게 맛이 있었다. 먹는 것은 간단히 빨리...그리고 나는 걸어다녔다. 학교에서 내 집까지 사이의 골목 그리고 영국 공원 속...이러한 곳이 내 산보지였다. 어떤 날 나는 백조가 마지막으로 떠 있는 것을 저녁 늦도록 지켜 본 일이 있다. 어둑어둑한 박명 속을 흰 덩어리가 여기저기 모여 있었고 때때로 바스락 소리를 냈다. 몹시 외로워 보였다. 나 자신의 심경이 그대로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마음 속을 뒤흔들린 편지를 매장한 곳도 이 호수였고 내 꿈과 동경-몇 년이나 길게 지속되었던-을 던져 넣어 버린 곳도 이 호수 속이었다. 이 호숫가의 가스등 밑에서 나는 안개에 감싸이는 쾌감과 머리를 적시는 눈에 안 보이는 비를 맛보았다. 그리고 추위에 떨면서 귀로에 서곤 했었다. 도자기 난로 속에서 석탄이 붉게 타오르는 것을 지켜 보고 있으면 쓸쓸하지 않았다. 불이 타오르는 소리, 그리고 붉은 불의 혓바닥...이러한 것과 함께 있는 것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불길을 지켜 보면서 언제나 어떤 시의 구절을 생각했다. 휴식과 포도주에 넘친 어둠, 슬픈 기타 소리가 흐른다. 그리고 방 안의 부드러운 등불로 꿈 속처럼 너는 돌아간다. 공기에서는 서리와 안개와 낙엽 냄새가 섞여서 났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공원에 가는 일도 드물어졌다. 11월 중순-아직 한국에서는 가을이지만 여기서는 눈이 큰 송이로 내렸다. 눈이 내리는 소리, 그리고 난로의 석탄이 타오르는 소리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날이 계속되었다. 눈이 와도 무섭게 왔다. 세원 둔 자동차가 눈에 폭 파묻혀 안 보이게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는 한국서 가져온 얇은 천으로 된 학생용 검은 오버를 입고 오돌오돌 떨면서 학교에 다녔다. 점심은 커피 대신 그로크(펄펄 끓인 포도주)와 수프로 했다. 그래도 추웠다. 때로는 눈이 멎고 다시 영원한 뮌헨의 하늘빛인 회색 구름장이 덮이거나 안개비가 촉촉히 내렸다. 나는 두꺼운 색양말을 신고 두꺼운 머릿수건을 쓰고 다시 공원으로 갔다. 사람이라고는 없고 나뭇가지가 앙상한 해골을 노정시키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서 검은 나뭇가장이들 사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변함없는 회색일까? 하고... 아는 얼굴이나 목소리가 하나만 있어도 이 하늘이 이렇게까지 우울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한 물음 '당신이 어디서부터 왔는가?'에서 도망하고 싶었고 황색 비전을 나는 좇고 있었다. 낮이나 밤이나 우울한 회색과 안개비와 백일몽의 연속이었다. 악몽처럼 혼자라는 생각이 나를 따라다녔고 절망적인 '고국까지의 거리감'에 나는 앓고 있었다. 지금도 나는 뮌헨의 가을 하면 내가 처음 도착한 해의 가을이 생각나고 그 때의 심연 속을 헤매던 느낌과 모든 것이 회색이던 일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아무것에도 자신이 없었고 막막했고 완전히 고독했던 내가 겪은 뮌헨의 첫가을이 그런데도 가끔 생각이 나고 그리운 것은 그러나 웬일일까? 뮌헨이 그 때의 나에게는 미지의 것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인지, 또는 내가 뮌헨에 대해 신선한 호기심에 넘쳐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안개비와 유럽적 가스등과 함께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 때의 나의 젊은 호기심인지도 모른다. 나의 다시없이 절실했던 고독인지도 모른다.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둘 - 생활속에 피어나는 웃음안개 굳세어라 큰 바위 - 이민호(남.대구 달서구 성당동) 얼마 전, 이종환씨가 1등 못했다고 자살한 학생이 있고, 뚱뚱하다고 자살한 학생이 한둘이 아니라며 걱정스런 말씀을 방송에 하는 걸 듣고, '아니, 나도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데 이런 일들이....' 하는 생각에 제 얘기를 편지로 보내야겠다 결심했습니다. 저희 집은 대대로 아들이 귀한 집으로 제가 4대 독자가 될 뻔했는데, 제 어머니의 예상을 뒤집는 눈부신 활약으로 3형제를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어릴 적 저희 집에 손님이 오시면 꼭 빠뜨리지 않는 것이 머리이야기였습니다. 3형제의 머리가 특이하기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이 유별난 머리는 집안 내력입니다. 먼저 저희 아버지께서는 태어나자마자 동네사람들이 "드디어 이씨집안에 장군 났네. 장군 났어. 대갈 장군 났네." 할 정도로 동네를 떠들썩하게 하셨고, 저희 어머니 역시 아기 때 두돌 지나고부터는 뒤통수만 보고는 애인지 어른인지 분간을 못했답니다. 아! 이 두 분의 운명적 만남 끝에 짜잔! 저를 낳았으니 드디어 일은 벌어졌겠지요. 3대 독자가 낳은 아들, 이씨 문중에 4대 독자인 저를 할머니께서 처음 보셨을 때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그런데 통곡을 하시면서 첫마디가 "에이고... 뭐 저런 기 다 인노, 저거 인간 안된다." 그럴 만도 한 게 그때 저의 모습은 눈을 기준으로 위로는 머리, 아래로는 하체였다 나요. 산파가 놀라서 빨리 큰 병원으로 옮겨야 하다고 법석을 떨었던 그날 그렇게 세상을 놀래면서 저는 세상에 나왔습니다. 자라면서 별의별 소리를 다 들었습니다. 특히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수업시간마다 제 머리와 관련된 얘기들이 끝이 없었습니다. 국어를 공부하면 '큰 바위 얼굴 소설'이 나와 웃음거리가 되고, 수학을 공부하면 '가분수'가 나와서 시선 집중을 시키고, 사회를 공부하면 무슨 무슨 사건이 '대두'되고 있다며 떠들어대니 공부가 제대로 됐겠습니까? 모두 잊고 TV를 보니 '모여라 꿈 동산'이 괴롭히고 특히 무엇보다도 성질나는 일은 제 머리 절반만한 연예인들이 나와서는 머리가 크다고 불평하고 웃고 떠드는 걸 보면 TV를 확 부숴버리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10여 년 애들에게 놀림 받더니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두발검사를 왜 그리 자주 하는지 박박 밀어도 머리가 커서 멀리서 보면 텁수룩하게 보였던 거지요. "너 머리 깎어. 머리 깎고 오란 말야, 알겠어!" 1주일이 멀다 하고 이발소를 들락거렸고, 친구들이랑 당구 치다가 학생 주임선생님께서 들이닥쳐 쪽문으로 도망 갈 때 맨 먼저 나가려다 벽 모퉁이에 부딪히며 나자빠지는 바람에 친구들까지 다 잡혔을 때는 정말 죽고 싶었습니다. 그 다음주 수업에 들어오신 그 학생주임선생님은, "니 머리 때문에 그 날은 수확이 컸다."고 하시며 놀리셨고, 어쩌다 수업시간에 조는 학생이 있으면, "야! 저기 봐. 민호도 저 큰 머리 쳐들고 공부하는데 조는 놈들은 뭐야?"하시며 조는 애들을 웃음으로 몰았었죠. 그러나 이런 저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야간 자습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면 어머니께선 제 얼굴을 만지시며 말하셨죠. "아이고, 우리 아들 공부한다꼬 얼굴이 고마 반쪽이 되삣네. 우짜꼬." 하시며 속을 확 뒤집어 놓으시기 일쑤였습니다. 걱정하시는 어머니 앞에서 대들 수는 없고 방에 들어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저는 속으로 고함을 질러댔습니다. '엄니, 내 얼굴이 아무리 반쪽이라캐도 다른 애들 두 배다 두배! 흑흑흑.' 대학에 와서는 병역의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의외로 저는 시력 때문에 방위병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 사실을 친구들에게 알리자 모두 의심을 하며 저의 머리만 보는 게 아니겠습니까? "니가 방위병 판정을 받은 건, 니 시력 때문이 아니고, 머리 때문아이가? 니가 전방에 배치되면 완벽한 적의 표적이 되기 때문에 국방부가 니를 살린 기다." 또 다른 녀석은 이렇게도 말하더군요. "그래. 맞다. 니 머리에 맞는 철모가 어디 있겠나. 푸하하." 아, 그러는 게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교양과목을 드으러 강의실에 들어가도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더군요. "저 학생은 머리가 커서 면제래." "입대했다가 철모가 안 맞아서 쫓겨났대." 그래도 남학생들은 농담으로 여겨 웃으며 넘기는데 정작 여학생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이며 어쩌다 저를 만나면 진짜인 줄 알고 저마다 위로를 하는데 정말 난감하더라 구요. "사실 머리가 아니고 시력 때문이야." 하며 몇 번이나 말하고 돌아다녔지만 결국 제가 맘속에 찍어두었던 저만의 연인, 귀여운 저의 천사의 귀에도 그 소리가 들어갔을 땐 그 날로 그 여학생을 포기했고 또 한번 죽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집에서 가족끼리 모여 머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더 가관입니다. 하지만 머리 큰 게 나쁜 것만도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제 바로 밑의 동생은 머리가 커서 덕 본 게 한두 번이 아니라나요. 무면허일 때 운전면허를 따러 시험장에 50cc오토바이를 타고 가는데 200m앞에서 의경들이 단속을 벌이고 있었답니다. 자동차 사이로 숨어가 봐야 큰머리 들킬 것 뻔하니 아예 1차선으로 달려보자, 어쩌면 자동차만 단속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밀어붙였는데 의경 하나가 1차선으로 뛰어들어 세우더라는 겁니다. "아저씨! 1차선으로 막 달리면 우짭니꺼. 면허증 좀 보입시더. 어 이 아저씨 헐멧도 안 썼네." 동생은 시험시간은 다가오는데 사정을 말할 수도 없고, 다소곳하게 말했답니다. "제가 보시다시피 머리가 좀 커서 헬멧 쓰기에는 많이 불편합니다. 어떻게 사정 좀 봐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사정을 하고 빌어도 봤지만 의경의 마음은 좀처럼 돌아서지 않자 갑자기 머리 때문에 놀림당한 기억이 살아나서 헬멧을 던져주며 소릴 질렀답니다. "누가 쓰기 싫어 안 쓰는 교? 들어가나 안 들어가나 직접 씌워줘 보소?" 하며 소함을 질러대자 놀란 의경은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어떻게 할 지 몰라 당황하다가 헬멧을 들고 억지로 씌워 보려고 덤비자 또 엄포를 소리쳤대요. "씌우는 건 좋은데 다시 벗겨줘야 되구마! 알겠는교?" 더 분노에 찬 절교를 하자,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는지 슬슬 꼬리를 내리면서 조심해서 가라고 하더가는 말에 얼마나 웃었는지. 한창 외모에 관심이 가는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남들보다 조금 이상하다는 것이 정말 힘들었고 공부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스트레스였지만, 조금 더 성숙해진 지금은 행복은 머리 작은 순이 분명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진정 가치 있는 인생이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와의 비교조차 불가능한 어려운 신체조건과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그리고 훌륭히 살아가는 많은 분들이 계셔서 오늘의 제가 있듯이 이 부족한 편지가 외모와 성적 때문에 비관하는 청소년들에게 조금이 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Board 삶 속 글 2023.02.05 風文 R 508
분서갱유(焚書坑儒) 焚:불사를 분. 書:글 서. 坑:묻을 갱. 儒:선비 유. [출전]《史記》〈秦始皇紀〉,《十八史略》〈秦篇〉 책을 불사르고 선비를 산 채로 구덩이에 파묻어 죽인다는 뜻으로,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의 가혹한 법[苛法]과 혹독한 정치[酷政]을 이르는 말. 기원전 222년, 제(齊)나라를 끝으로 6국을 평정하고 전국 시대를 마감한 진나라 시황제 때의 일이다. 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하자 주(周)왕조 때의 봉건 제도를 폐지하고 사상 처음으로 중앙집권(中央執權)의 군현제도(郡縣制度)를 채택했다. 군현제를 실시한 지 8년이 되는 그 해(B.C. 213) 어느 날, 시황제가 베푼 함양궁(咸陽宮)의 잔치에서 박사(博士)인 순우월(淳于越)이 ‘현행 군현 제도하에서는 황실의 무궁한 안녕을 기하기가 어렵다’며 봉건제도로 개체할 것을 진언했다. 시황제가 신하들에게 순우월의 의견에 대해 가부를 묻자 군현제의 입안자(立案者)인 승상 이사(李斯)는 이렇게 대답했다. “봉건시대에는 제후들 간에 침략전이 끊이지 않아 천하가 어지러웠으나 이제는 통일되어 안정을 찾았사오며, 법령도 모두 한 곳에서 발령(發令)되고 있나이다. 하오나 옛 책을 배운 사람들 중에는 그것만을 옳게 여겨 새로운 법령이나 정책에 대해서는 비난하는 선비들이 있사옵니다. 하오니 차제에 그러한 선비들을 엄단하심과 아울러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의약(醫藥)/복서(卜筮)/종수(種樹:농업)에 관한 책과 진나라 역사서 외에는 모두 수거하여 불태워 없애 버리소서.” 시황제가 이사의 진언을 받아들임으로써 관청에 제출된 희귀한 책들이 속속 불태워졌는데 이 일을 가리켜 ‘분서’라고 한다. 당시는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이므로, 책은 모두 글자를 적은 댓조각을 엮어서 만든 죽간(竹簡)이었다. 그래서 한번 잃으면 복원할 수 없는 것도 많았다. 이듬해(B.C. 212) 아방궁(阿房宮)이 완성되자 시황제는 불로장수의 신선술법(神仙術法)을 닦는 방사(方士)들을 불러들여 후대했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노생(盧生)과 후생(侯生)을 신임했으나 두 방사는 많은 재물을 사취(詐取)한 뒤 시황제의 부덕(不德)을 비난하며 종적을 감춰 버렸다. 시황제는 진노했다. 그 진노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시중의 염탐꾼을 감독하는 관리로부터 ‘폐하를 비방하는 선비들을 잡아 가뒀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시황제의 노여움은 극에 달했다. 엄중히 심문한 결과 연루자는 460명이나 되었다. 시황제는 그들을 모두 산 채로 각각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는데 이 일을 가리켜 ‘갱유’라고 한다.
Board 고사성어 2023.02.05 風文 R 8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