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박완서편" 여류 소설가. 경기도 출생. 서울대 문리대 중퇴. 1970년에 장편 소설 "나목"으로 문단에 나온 후 장편 "휘청거리는 오후" 등으로 일약 각광을 받아, 가장 설득력 있는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로 평판을 얻었다. 감각적인 묘사가 섬세하면서도 예리한 분석력으로 지목되고 있다. 40대의 비 오는 날 앉은뱅이 거지 비가 오는 날이었다. 요즈음은 꼭 장마철처럼 비가 잦다. 청계천 5가 그 악마구리 끓듯하는 상지대도 사람이 뜸했다. 버젓한 가게들은 다 문을 열고 있었지만 인도 위에서 옷이나 내복을 흔들어 파는 싸구려판, 그릇 닦는 약, 쥐잡는 약, 회충약 등을 고래고래 악을 써서 선전하는 약장수, 바나나나 엿을 파는 아줌마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인도가 텅 빈 게 딴 고장처럼 낯설어 보였다. 이 텅 빈 인도의 보도 블록을 빗물이 철철 흐르며 씻어내리고 있어 지저분한 노점상도 다 빗물에 떠내려간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딱 하나 떠내려가지 않는 게 있었다. 앉은뱅이 거지였다. 나는 한 달에 두어 번씩은 그 곳을 지나칠 일이 있었고, 그 때마다 그 거지가 그 곳 노점상들 사이에 앉아서 구걸하는 걸 봤기 때문에 그 거지를 알고 있었다. 그 날 그는 외톨이였고 빗물이 철철 흐르는 보도 블록 위에 철썩 앉아 있는 그의 허리부터 발끝까지의 하체가 물에 홈빡 젖어 있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한 손으론 비닐 우산을 펴들어 머리를 빗발로부터 가리고 한 손은 연방 행인을 향해 한 푼만 보태 달라고 휘젓고 있었다. 나는 전에 그를 봤을 때 각별하게 불쌍히 본 적도 없었고 그가 앉은뱅이라는 것조차 믿었던 것 같지가 않다. 앉아서 주춤주춤 자리를 옮기는 것도 봤고, 앉아서 다니기 편하게 손에다 슬리퍼를 꿰고 있는 것도 봤지만 그게 반드시 앉은뱅이란 증거가 될 순 없었다. 허름한 바지 속의 양다리는 실해 보였고 아마 아침엔 걸어나와 온종일 저렇게 흉물을 떨다가 밤이면 멀쩡하니 털고 일어나 걸어들어가겠거니 하는 추측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 만큼 나는 약아 빠졌달까, 닳아 빠졌달까 그렇게 되어 있었다. 그 날도 물론 그가 앉은뱅이란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앉은뱅이가 아니란 증거 또한 없었다. 그냥 빗속의 모습의 충격적으로 무참했다. 찬 빗물에 잠긴 누더기 속의 하체가 죽어 있는 물건처럼 보였고 그래서 행인을 향해 휘젓고 있는 한쪽 손이 비현실적이리만치 끔찍하게 느껴졌다. 나는 한순간 무참한 느낌으로 숨이 막히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리곤 잠시 어쩔 줄을 몰라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거리에서 거지에게 돈을 주어 본 일이 거의 없었다. 한 겨울에 벌거벗고 울부짖는다거나 끔찍한 불구라든가 너무 늙었거나 해서 도와 주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나게 가엾은 거지를 보고 주머니를 뒤적이다가도 문득 마음을 모질게 먹고 그냥 지나친다. 이렇게 마음을 모질게 먹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 건 아니다. 그 날도 나는 빗속의 거지 앞에서 핸드백을 열려다 말고 이 거지 뒤에 숨어 있을 번들번들 기름진 왕초 거지를 생각했고, 앉은뱅이도 트릭이란 생각을 했고, 빗물이 콸콸 흐르는 보도 위에 저렇게 질펀히 앉았는 것도 일종의 쇼란 생각을 했고, 그까짓 몇 푼 보태 주는 것으로 자기 위안을 삼는 것 외에, 도대체 무엇을 해결할 수 있나를 생각했다. 요컨대 나는 내 눈앞의 앉은뱅이 거지에 대해 아무것도 알고 있지를 못하면서 거지라는 것에 대한 일반적이고 피상적인 예비 지식을 갖출 만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예비 지식 때문에 나는 거지조차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내 눈으로 확인한 그의 비참조차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치 속아만 산 사람처럼, 정치가의 말을 믿지 않던 버릇으로, 세무쟁이를 믿지 않던 버릇으로, 외판원을 믿지 않던 버릇으로, 장사꾼을 믿지 않던 버릇으로 거지조차 못 믿었던 것이다. 그 날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통증과 함께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누를 수 없다. 믿지 못하는 게 무식보다도 더 큰 죄악이 아닌가도 싶다. 거지에 대한 한두 푼의 적선이 거지를 구제하기는커녕 이런 적선이 있기 때문에 근본적인 구제책이 늦어져 거지가 마냥 거지일 뿐이라는 제법 똑똑한 생각을 요즈음은 어린이까지도 할 줄 안다. 사람들이 갈수록 더 똑똑해지고 있다. 그럴수록 불쌍한 이웃을 보면 이런 똑똑하고 지당한 이론 대신 반사 작용 겨울철의 뜨뜻한 구들장이 그립듯이 그리워진다. 나이를 먹고 세상 인심 따라 영악하게 살다 보니 이런 소박한 인간성은 말짱하게 닳아 없어진 지 오래다. 문득 생각하니 잃어버린 청춘보다 더 아깝고 서글프다. 자신이 무참하게 헐벗은 것처럼 느껴진다.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둘 - 생활속에 피어나는 웃음안개 앞과 뒤의 엄청난 차이. 전 30대 중반의 여성입니다. 아울러 안양시 여성의 건강을 책임지고 에어로빅 지도자의 길을 가고 있기도 합니다. 눈치 빠른 분은 벌써 헬스복 차림의 여자를 떠올릴지도 모르겠군요. 그렇습니다. 저희 체육관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들려 드리려 합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누구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저와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이라고도 밝히지 않겠습니다. 지난 겨울 어느 날, 저녁 수업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평소 잘 알고 지내던 그분이 문을 열고 들어오셨습니다. 그분은 마치 여자 마피아 의상이었어요. 검은 코트를 팔도 끼우지 않은 채 걸치고 있었고 코트 자락 밑으로는 헬스 스타킹과 하얀 운동화 차림이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저분도 미리 옷을 입고 오셨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집이 가까운 분들은 와서 옷을 갈아입지 않고 미리 입고 오시곤 했습니다. 어쨌든 그분은 우아하게 코트를 벗고 맨 뒤쪽에 섰고 저는 수업 중이었으므로 거울 속에 비친 그분에게 눈인사나 하려던 순간 저는 그만 입을 쩌억 벌리고 말았습니다. 왜인지 밝혀야 하는 제가 쑥스럽네요. 글쎄 푹 패인 헬스복 앞자락 사이로 두 젖가슴이 다 쏟아져 나와 있는 게 아니겠어요? 자세히 보니 헬스복의 앞과 뒤를 바꿔 입고 있었어요. 원래 헬스복이란 것이 수영복과 비슷해서 등이 많이 파여 있는 게 기본형인데 그것을 돌려 입은 거예요. 검정색 헬스복은 하얀 피부와 형광등 조명 아래 더욱 검게 돋보였습니다. 헬스복의 가장자리는 고무줄 처리가 되어 탄탄히 누르고 있어 처음에는 거의 가슴의 정상부분까지만 노출이 되었는데, 그 가장자리가 누르고 있는데다 마구 흔들어대는 바람에 조금씩 조금씩 밀려 급기야는 완전히 쏟아져나올 지경이었습니다. 거기에다 오늘 처음 오셨으니 잘 되지도 않는 동작을 단단히 각오라도 하고 오신 듯 상.하.좌.우로 열심히 흔드는 거예요. 상상이 되십니까? 다음 순간 저는 어찌해야 이 난관을 처음 나온 분에게 무안을 주지 않고 넘기나 하는 생각을 했지요. 그 동안에도 그분은 열심히 뛰고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이 사방이 거울로 둘러싸인 곳에서 오래 감춰질 수는 없었지요. 초보자들은 얼마간은 거울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거의 벗다시피한 모습으로 다른 사람과 공개된다는 게 쑥스러워서인가봐요. 그런 까닭에 그분은 자신의 가슴팍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 반란은 눈치도 못채고 열심히 제 동작을 쫓아 하고 있었습니다. '안되겠다. 가서 얘기해 줘야지.' 하고 제가 그분 쪽으로 걸어가는 것과 동시에 체육관 안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입술을 깨물며 참던 회원들이 풋!풋!하는가 싶더니 급기야는 털썩 주저앉는 사람, 거울에 기대어 몸부림치는 사람, 마루를 내려치는 사람, 모두 눈물을 닦아내며 웃어댔습니다. 사정을 뒤늦게 눈치 챈 뒤 그분은 이러더군요. "집에서 입고 거울을 보면서 헬스복이 야하다는 말만 들었는데 야하긴 진짜 야하네. 이게 무슨 망신이야." 그날 이후로 저녁반 회원들은 그분만 나타나면 웃음을 참아내며 그분의 옷차림을 몰래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그러던 며칠 후 어느날, 그날도 그분은 검은 코트를 걸치고 들어왔고 밤무대 댄서처럼 벗어던지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더욱 빨리 뒤집혔습니다. 또 다시 체육관 안이 숨이 넘어갈 듯한 웃음과 몸부림으로 들끓었습니다. 이번에는 아랫도리에서 일이 벌어졌습니다. 헬스복 중에는 외국 모델들이 많이 입는 아슬아슬한 비키니 수영복 같은 것이 있습니다. TV에서 세계 에어로빅 대회 같은 데서 선수들이 즐겨 입기도 합니다. 엉덩이 쪽은 1.5cm 쯤 되는 하얀색 가느다란 띠로 처리된 헬스복이지요. 오늘은 그 팬티의 앞뒤를 바꿔 입은 것입니다. 회원들은 이번이 두 번째인데다 이젠 안면도 생겼고 해서 이번에는 아예 처음부터 까놓고 웃어댔습니다. 장미꽃 한송이가 가슴에 활짝 핀 흰 탑을 받쳐입고 아랫도리는 1.5cm 가량의 가느다란 흰 끝이 묘하게 중앙을 가로지르고 있었습니다. 그러했으니 양옆으로 어지럽게 흩어진 검은 무엇인가를 고탄력 스타킹만으로는 가릴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지난번 모습까지 떠올리다 보니 저조차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분은 지난번 일을 만회해보고자 헬스복 매장에 가서 예쁘면서 야한 옷으로 달라고 졸라 몸매에 무리인 줄 알면서도 초보자들은 감히 입을 수 없는 문제의 그 원라인을 사다가 앞뒤 바꿔입은 것입니다. 에어로빅은 다들 잘 아시다시피 90% 이상이 다리를 벌리고 하는 동작입니다. 오랫동안 상상하지는 마세요. 사실 이 내용이 방송불가가 될까봐 걱정했는데 며칠전 치질로 고초를 겪게 된 동네 아저씨 얘기를 해주신 어느 분 편지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사실 제 편지의 내용은 위치상으로 볼 때 항문보다는 덜 은밀한 곳에 있지 않습니까? 다시 얘기로 돌아갑니다. 그 상황이 더욱 우습게 된 것은 그분이 이번에는 당당하게 맞섰다는 겁니다. 뭐가 잘못이냐는 거지요. 다 알고 있는 이유를 혼자만 몰라 하더니 결국 나중에야 하시는 말씀이 더 걸작이었습니다. "앞 동네가 좀 쑥스럽기는 했지만 팬티란 무조건 앞쪽이 좁고 뒤쪽이 넓은 것 아니야?" 이겁니다. 그러나 사실을 아시고 난 후 울상을 지으시며 말하더군요. " 왜 헬스복과 수영복만이 예외여서 내게 이런 수난을 겪게 하느냐!" 그리고 그분은 그날 이후로 날마다 맨 먼저 와서 제게 복장 검사를 마친후 운동을 하게 됐답니다. 덕택에 지각하는 습관을 고치게 됐지요. 이 방송을 들으시는 분들 중에 에어로빅을 시작하시려는 분이 계신다면 제가 감히 충고 한마디 하지요. "헬스복 예쁘다 방심말고 입은 옷도 다시 보자." 그럼 계속해서 즐겁고 유익한 방송 부탁드립니다.
Board 삶 속 글 2023.02.02 風文 R 418
Board 고사성어 2023.02.02 風文 R 896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송건호 편"(1927~2001) 평론가. 충북 옥천 출생. 서울대 법대 졸업. 한국 일보, 경향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논설위원과 경향신문. 동아일보의 편집국장을 역임. 저서에 "민족 지성의 탐구" "한국 민족주의의 탐구" 등이 있다. 역사적 안목의 비판이 실린 많은 평론. 에세이를 발표했으며 한국 지성의 현실과 문제를 일깨우는 인물로 지목되고 있다. 고향을 향한 마음 젊어서는 고향을 등지는 것이 그들의 당연한 생활처럼 생각되고 있다. 학교를 나온 뒤 서울이나 지방 도시에서 하다못해 몇만 원 월급쟁이라도 해야만 고향 사람들의 칭찬의 대상이 되지 집에서 농사를 짓거나 마을 일을 돕는 것으로 그친다면 이러한 청년은 사회에서 낙오된 젊은이로 업신여김을 받기 일쑤다. 남자가 듯을 세워 고향을 나온 이상 성공을 못 하고는 죽어도 귀향하지 않는다는 결심이 훌륭한 젊은이로 칭찬을 받는다. 그래서 많은 청년들이 장성하면 고향을 등지고 이른바 '성공'을 위해 노력한다. 물론 젊은이들의 이러한 '성공'에의 야망을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고 이러한 야심에 찬 젊은이가 많으면 많을수록 나라의 앞날이 양양해진다는 것도 긴 설명을 필요치 않는다. 그러나 내가 여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아무리 야심 많은 사람이라도 고향에 대한 '향수'만은 결코 버리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큰 뜻을 품고 고향을 떠난 사람일수록 가슴 속에는 고향에 대한 끝없는 사랑이 불타오르고 있다. 수만 리 떨어진 먼 외국에 사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고향에 대한 절절한 향수에 사로잡혀 있다. 이것이 '마음의 고향'이라고 할까. 살인 강도와 같은 흉악범도 죄를 범하고 난 후에는 많은 경우 그가 어려서 자란 고향에서 잡히는 일이 많다. 일단 죄를 범하고 난 뒤에는 순간적인 격정에서 저지른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마음이 약해져 자기도 모르게 어릴 적에 자란 고향 마을에 찾아갔다가 잡힌다는 것이다. 범인의 이러한 심리적 약점을 알고 있는 수사관들이 미리 그의 고향에 잠복했다가 잡는 것이다. 사람은 평소에는 별로 생각도 느끼지도 못하지만 누구나 고향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다. 어릴 적에 늘 만지작거리던 어머니의 젖꼭지와 자랄 때 아침 저녁 대하던 고향 산천은 다 같이 '마음의 고향'으로서 우리의 가슴 속 깊이 숨어 있다. 내가 오늘 있는 것은 고향 산천의 힘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치 않는다. 고향 산천을 대해도 할 말이 없다 - 고향 산천은 고맙기만 하여라. 어느 시인이 부른 시 한 구절이다. 젊어서 고향을 뛰쳐나온 젊은이도 나이가 들면 으레 고향을 그리게 된다. 외국으로 왔다갔다하며 우리 풍습을 거의 잊은 사람도 50이 넘고 60이 되고 하면 점점 고향을 그리게 되고 입는 옷은 물론 취미도 한국적인 것에 심취한다. 일본에 사는 어느 우리 동포가 20대에 고향을 떠나 일본에서 자수 성가, 그 곳에서 뼈를 묻게 됐으나, 생전에 틈만 있으면 "춘향전"의 레코드를 틀어 놓고 고향 생각을 하며, 눈물지었다는 이야기를 그의 아들에게서 들은 일이 있다. 아들은 서울에 온 길에 "춘향전"에 관한 레코드를 모조리 구해다가 돌아간 선친의 영전에 바쳤다고 한다. 나는 지방색을 의식적으로 배척하고 반대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자기를 낳고 길러 준 고향 마을에 대해서는 좀더 관심을 보여야 옳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지방색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이가 들수록 고향 마을에 대한 생각이 간절해지는 것이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경향이다. 누구나 성장한 뒤에는, 특히 고향을 떠나 사회나 나라의 지도적 위치에 선 사람이면, 고향에 무엇인가 뜻있는 일을 했으면 한다. 큰일이 아니라도 좋다. 크게 귀를 했거나 축재한 사람이라면 고향 마을을 위해 좀더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크게 보람 있는 일이 아니어도 좋다. 오히려 작은 일이라도 정성에 더 뜻이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자라고 한글과 산수를 깨우쳐 준 고향 모교인 국민 학교에 몇 권의 책을 기증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것이다. 한국 위인전, 동화집, 또는 학습에 도움이 되는 이것저것 책을 사서 고향의 모교에 보낼 수도 있다. 자라나는 고향의 후배들이 얼마나 좋아하고, 도움이 될 것인가. 사람은 누구나 연로하여지면 자기 반성을 하게 된다. 또 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출세'를 위해 또는 '축재'를 위해 편안한 날이 없었다. 그러나 연로할수록 사람들은 자기의 지난날을 회고하게 된다. 조그마한 일이나마 무엇인가 뜻있는 일을 하고자 생각한다. 뜻있는 일은 물론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 고향에 대한 무엇인가의 기여도 마지막 인생을 장식하는 좋은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