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친과 남사친 말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감정을 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처음엔 얌전히 화를 내던 사람이 자기 말에 취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걸 본 적이 있을 거다. “보고 싶다”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이 더 보고 싶어지는 경우도 많다. 말은 감정을 격동시킨다. 들쑤신다. 안 믿기겠지만, ‘사랑’이라는 말 속에는 ‘우정’의 요소가 들어 있다. 사랑의 감정 속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일이 잘되기를 바라고 그에게 더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애인은 친구이자 동지이다. 사랑 속에 우정이 들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남자친구, 여자친구’란 말이다. 맹랑하게도 이 말은 그냥 친구 사이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뜻한다. 사랑 속에 우정의 가능성이 없다면, ‘친구’라 쓰고 ‘애인’이라 읽을 수는 없다. 사랑 속에 있는 우정의 요소를 실마리 삼아 사랑을 대신 뜻하게 된다(환유). 한국 사회는 우정과 사랑을 대립시키고, 친구와 애인을 엄격히 구분해왔다. 이성애적 시각에서 남녀 간에는 우정이 성립될 수 없다고 믿어왔다(‘그게 본능이야. ‘결국’ 사랑하게 돼!’). ‘남사친’, ‘여사친’이란 말은 관계의 입체성을 상상하지 못하는 사회에 바치는 젊은이들의 항복 선언이다. 사랑의 본원적 의미 속에 있는 우정을 분리 독립시켰다. ‘남친’이 사랑을 먼저 차지했으니, 사랑 없는 우정의 자리는 ‘남사친’이 채웠다. ‘남친’과 ‘남사친’이라는 두개의 말을 갖춤으로써 사랑과 우정은 합법적으로 갈라섰다. 하나 어쩌랴. 여전히 ‘남친’ 속엔 우정이, ‘남사친’ 속엔 사랑이 숨어 있는 것을.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이어령편"(1934~2022) 평론가. 수필가. 충남 아산 출생. 서울대 문리대 및 대학원 졸업. 여러 신문의 논설 위원과 이화 여대 교수, 문화부 장관 역임. 사변 이후의 비평계에 이론적 기수로 등장하여 김동리와 '실존성의 논쟁'을, 조연현과 '전통론의 논쟁'을 벌여 크게 주목받았다. 그 후 칼럼니스트로 에세이스트로 맹렬히 활약하면서 신화, 전설, 풍속 기타 다방면의 재료를 토대로 한국인의 사고 방식을 해부하였다. 장편 에세이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30만부 매진의 기록을 세운 바 있다. 지게 지게는 우리 나라 고유의 것이다. 우리 겨레의 정이 배고 피가 도는 물건이다. 그것에는 운반 수단 이상의 의미가 깃들여 있다. 우선 지게의 모양을 보라. 그것을 져 온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들의 마음씨처럼 순박하기만 하다. 쇠못 하나 박은 흔적이 없다. 솜씨를 부린 데도 없다. 애초부터 지게 모양의 나뭇가지를 베어다가 대강 다듬고, 몇 군데 구멍을 뚫었을 뿐이다. 나는 이 순박을 사랑한다. 지게에는 노래가 있다. 지게꾼들은 작대기로 지겟다리를 치며 그 장단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외로운 숲길, 한적한 논두렁에서 그것은 다시 없는 위안이다. 악보를 보며 배운 노래가 아니다.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득한 할아버지 때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 온 노랫가락이다. 지게에는 평화로운 휴식이 있다. 나무 그늘에 지게를 뉘어 놓고 그 위에 잠든 농부의 얼굴들. 안락 의자에 잠든 어느 신사의 얼굴이 이보다 평화로우랴! 지게에는 또 고운 마음이 있다. 나무꾼의 지게에는, 봄이면 진달래가, 여름이면 산딸기가, 가을이면 들국화와 단풍이 꽂힌다. 무엇을 생각하며 꽃을, 열매를, 잎을 꽂을 것일까?...그것은 우리의 멋이요 시임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지게를 볼 때마다 기쁨을 느끼기보다는 먼저 한숨이 흘러나오게 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지게는 어깨에 멜빵을 걸어 지는 1인용 운반 수단이다. 어깨에 걸어 지기 때문에 지게는 괴로운 것이다. 짐의 무게를 온통 몸으로 지탱해야 한다. 물보다 어렵다는 구절양장을, 짓누르는 짐을 지고 올라가 보라, 내려가 보라. 숨이 차다. 무릎 마디가 아프다. 뿐만 아니라 지게는 한 사람의 몸으로 지탱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짐을 운반할 수가 없다. 그래서 괴로운 걸음을 두 번, 세 번, 아니 열 번, 스무 번 반복해야 한다. 수레를 이용했던들 그런 괴로움은 쉽게 덜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어느 때, 그 어느 세상에서도 운반 수단은 필요했으리라. 그런데 우리 할아버지들은 하필 이 괴로운 지게를 만들었던 것일까? 하기는 수레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너무 적었다. 아니, 많았다 하더라도 쓸모가 없었을 것이다. 수레가 다닐 만큼 넓은 길이 없었으니까. 우리 할아버지들은 힘들여서 넓은 길을 닦지 않았다. 다니다 보니 저절로 생겨난 그 비탈길, 그 오솔길, 그 논두렁길... 그러나, 날라야 할 짐은 많았다. 지게는 어디나 갈 수 있다. 사람이 갈 만한 길이면 어디나 갈 수가 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지게이리라. 왜 수레가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넓히려 하지 않았을까? 외 굴이라도 뚫으려 하지 않았을까? 그랬더라면 지게의 괴로움을 맛보지 않아도 좋았을 것을, '나'를 위하여 환경을 개선하기보다는, 주어진 환경에 '나'를 맞추려 했던 데서 지게가 생겨난 것이리라. 이렇게 생각해 보면, 지게의 괴로움은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나는 지게를 사랑한다. 그러나, 지게를 벗어 던질 수 있는 넓고 곧은 길을 더욱 사랑한다. 시원스럽게 뚫린 길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 준다. 마을에서 마을로, 도시에서 도시로, 그리고 나라에서 나라로 길이 하나 생길 때마다 우리의 삶도 그만큼 넓어진다. 길을 닦아야 한다. 그래야 천 년 동안이나 져 온 그 괴로운 지게에서 벗어나, 새롭고 넓은 세계를 향해 우리는 마음껏 달려갈 수가 있는 것이다.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둘 - 생활속에 피어나는 웃음안개 우리 엄마 누가 좀 말려줘요 저는 빛고을 광주에 사는 김용석이라고 합니다. 8남매 중의 막내가 나이가 서른이 다 되어 대학에 입학하고 중간에 휴학을 한번. 그래서 결국 지난 2월 10일 서른 넷의 나이게 졸업을 한 노총각입니다. 그러다보니 본의 아니게 홀로 계신 어머니께 불효막심한 막내자식이 되었고 혼자 사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려 가끔 저에게 전화를 하곤 하십니다. 그런데 지난 가을 무렵의 일입니다. 그 무렵엔 졸업논문 준비로 자정을 넘겨서 들어오는 경우도 많고 해서 자동응답기를 설치해 놓았지요. 어느 날 저녁 늦게 우중충하고 총각냄새가 가득한 방 안에 들어오니 자동응답기에 누군가 메시지를 남겨 놓았더군요. 그래서 응답기의 메시지를 들어보던 저는 그만 까무러칠 뻔하고 말았습니다. 이유인즉, 저희 어머니는 제게 전화를 하셨는데 생전에 자동응답기를 사용해 보신 적이 없으셨으니 얼마나 답답하셨겠어요. 그날은 더욱이 마을 잔칫집에서 약주까지 한잔 하신 상태로 전화를 하셨던 모양인지, 온통 욕으로 도배를 해 놓으신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어머니가 하신 얘기는 이랬습니다. 신호가 몇 번 울리더니 전화받는 소리가 들리고, 제 목소리가 들리더랍니다. "(자동응답기 인사말에)예... 들꽃나라입니다. 저는 지금 외출 중이오니 남기실 말씀이 있으시면..." "용석아! 엄마다." 말씀을 하셨는데 저는 어머니 말씀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기 말만 계속하더라는 겁니다. "용석아 엄마당께... 왜 니 말만 혀...?" 그래도 제가 계속 제 말만 하더니 삐 소리가 나고 아무말도 없더랍니다. '이 녀석이 다른 일을 하던 중이었나보다...' 어머니는 이렇게 생각하시고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제가 아무 소리가 없자 답답해지셨답니다. "용석아... 엄마여... 엄마당께. 왜 말을 허다 말어... (조금 소리를 높여서) 나여, 엄마여... 엄마당께... 아, 우리 막둥이 아녀? 문딩이... 썩을 놈... 어째서 말을 안혀... 아, 막둥아! 왜 말을 허다가 끊어부러.... '삐'가 머시여... 먼 소린지 알아듣도 못허것고 죽것구만... 얼렁 대답 안혀...? 망할 것... 인자 대답도 안허네... 냅둬부러. 문딩아, 인자 니한테는 전화도 안 할랑께." 하시면서 전화를 끊으신 것이었습니다. 동네 분들과 약주를 조금 하신 후에 막내아들이 생각나셨고, 여러 번의 시도 끝에 통화를 성공하셨는데 자동응답기가 받은 후 아무말도 없으니 화가 나실 만도 하지요. 그런데 또 이 여러 번의 시도란 무엇이냐? 저희 어머니는 연세가 드셔서 눈도 어두워지신 데다가 약주까지 한 잔 하셨기 때문에 큰 글자로 적어드린 전화번호를 보고 다이얼을 늦게 누르시기 일쑤였습니다. 전화번호를 잘 못 누르면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국번이오니...'하면서 안내말이 나오지요. 어머니는 분명히 한자 한자 확인하고 거신다고 거셨는데 그 소리가 나오니 어이가 없고 황당하셨겠지요. 첫 실수 때는 이랬습니다. "문딩이 가시네. 우리 막둥이 집 걸었는디, 무엇이 없는 번호여..." 두 번째 실수에는 이랬답니다. "아 우리 용석이 집에 전화혔는디, 어째 니가 나와서 그려... 처녀가 우리 막둥이 애인이여?" "뚜- 뚜- 뚜-." "여보쇼... 거그 우리 용식이 집 아니여?" "뚜- 뚜- 뚜-." "음마, 전화가 염병 허든갑네. 어쩌이려 전화가?" 어머니와 관련된 사건은 이 것 만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4년 전. 저는 이 곳 광주에 있는 극단에서 연극을 한 적이 있는데 제가 연극을 한다니까 둘째 형님께서 어머니를 모시고 연극관람을 오셨습니다. 어머니는 연극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시골에서 '굿'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오셨는데, 이 연극이라는 것이 조명은 괜히 켜졌다 꺼졌다 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으시거니와 당신이 낳으시고 키우신 제가 연기라는 것을 하고 있으니 도무지 시큰둥해져서 흥미가 일어나지 않으신거지요. 그래서 어서 집으로 돌아가 키우는 개 밥도 주고, TV 연속극이나 보는 쪽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어머니께서는 서울이나 어디 멀리 출타를 하시게 되면 그 개밥 때문에 어서 돌아가시지 못해 안달을 하신답니다. (이건 비밀인데, 어머니께서는 당신이 기르신 개이면서도 여름에는 멍멍탕을 무지 즐기시거든요...) 아무튼 공연 중 흥미를 높이기 위해 중간에 장터 장면에서는 배우들이 객석까지 드나들며 엿이며 전통과자를 팔기도 하고, 무대 위 주막에서는 나이 드신 분들에게 막걸리도 한 잔씩 팔기도 했는데, 평소에 막걸리하면 주무시다가도 일어나실 정도인 어머니께서는 '이게 왠 술이냐'하시며 막걸리를 맛있게 드신 것입니다. 장터 장면은 끝나고 다시 연극은 시작되고 무대의 조명은 어두워지고 모두 숨을 죽이고 집중하고 있는데 아니 이게 왠 일입니까? 갑자기 무대와 객석이 환해진 것입니다. 무대 뒤에 있던 나머지 배우와 스탭들은 화재가 났다며 온통 비상이 걸렸습니다. 조명실에 인터폰으로 연락을 하는가 하면 소화기를 가지러 가는 등 야단이 났습니다. 오! 그런데 이게 뭡니까?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입니까? 오, 하늘이시여! 다른 사람도 아닌 우리 엄마가 세상에 울 엄마가... 장터 장면에서 막걸리를 한잔 드신데다 지루하기도 해서 담배가 한 대 생각이 간절하시던 차에, 극중에 배우들이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나오자 당신께서도 '옳지... 담배를 태워도 돠는구나'하시며 한 대 태우실 양으로 담배를 물고 라이터를 켜신 거지요. 우째 이런 일이... 곁에 앉아 있던 형님께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하시고 황급히 담배를 빼앗아 껐지만, 장내는 온통 웃음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공연분위기는 어수선해지고 전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운명의 여신이 하는 장난은 그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겨우 분위기가 수습되고 공연이 다시 무르익을 무렵이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있던 다섯 살 조카녀석이 갑지기 오줌이 마려워진 것입니다. "할머니, 오줌 마려워요..." "곧, 끝난께 조깨만 참그라..." "할머니 오줌이 막 나오려고 그래 못 참겠어요." "그럼 오줌 나오지 말라고 꼬추 끝터리를 꼭 잡고 있어부러라." 하셨으니 어찌 되었겠습니까? 곁에 있던 관객들이 일제히 폭소를 터뜨리고 만 것입니다. 물론 공연이 끝나갈 무렵이기는 했지만 이제 분위기는 완전히 산만해지고 말았습니다. 연극은 제가 맡은 역할이 죽음으로써 끝나는데 제가 연기가 제대로 될 리가 있었겠어요? 어떻게 연기를 했는지도 모르고 그냥 빨리 시간이 자나기만을 바랄 수 밖에요. 마지막 죽는 연기도 평소에 누워서 죽다가 그 날은 엎드려서 죽어야 했다는 거 아닙니까? 저희 어머니 정말 별난 분이시지요.
Board 삶 속 글 2023.02.11 風文 R 464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전혜린편"(1934~1965) 수필가. 평남 순천 출생. 독일 뮌헨대 독문과 수료. 여러 대학의 강사를 거쳐 성균관대 교수 역임. 31세로 자살함. 자유로운 정신과 현실 세계와의 치열한 대결 속에 불꽃처럼 살다가 간 지식인이었다. 끈기와 탄력과 집중력을 갖고 생을 긍정했고 생의 완벽성을 구했다.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삶에 대한 그의 강렬한 사랑과 일종의 필수적인 비애의 기록으로서 수많은 젊은이들의 심금을 울린 바 있다. 몽환적 시월 - 10월이 되면 레스토랑이나 다방에서 '데운 맥주'를 요구한다. 뮌헨의 10월이 그립다. 거기에 있을 때는 언제나 이렇게 추운 가을은 처음 보았느니 한국의 가을 하늘을 못 본 사람이 가엾느니 하면서 새파란 하늘,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 석류, 추석 보름달, 독서의 계절 천고마비 등의 이미지와 불가분인 한국의 가을을 그리워했었다. 끔찍한 김장 시즌조차가 못 견디는 향수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지 2년째 되는 요즘 웬일인지 자꾸 뮌헨의 가을이 생각난다. 뮌헨의 10월은 벌써 본격적인 털외투가 필요해지는 계절이다. 한달 중 20일은 비가 오는 계절이기도 하다. 언제나 하늘을 뒤덮고 있는 짙은 회색 구름과 언제나 공기를 무겁게 적시고 있는 두꺼운 안개, 안개비, 보슬비 등과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이 뮌헨의 10월이다. 벽이 두껍고 방 안에서 이중창에 세 겹 커튼을 두르고 난로를 때고 앉으면 독서의 계절이라는 슬로건이 없어도 누구나가 마치 회색 안개에 눌린 듯이 생각과 책읽기에 잠기게 되는 것이다. 내가 살던 슈바빙이라는 뮌헨의 한 구는 일부러 옛날 것을 그대로 놔 두는 파리식인 예술가 촌이었다. 거기서만은 형광등 대신 여전히 가스등이 가로등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저녁때의 짙은 안개 속에 가물가물 어렴풋이 보이는 가스등의 아름다움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자전거를 탄 할아버지가 긴 막대기로 유유히 한 등 한 등 켜 가는 박모의 광경은 이런 계절에는 더욱 몽환적으로 동요적으로 보였던 것 같다. 10월이 되면 레스토랑이나 다방에서 손님들이 '데운 맥주'를 요구하는 수가 늘게 된다. 그러나 추위를 덜기 위해서 그보다 흔히들 마시는 것은 물과 설탕을 끓이고 럼주를 섞은 그로크라는 음료와 또 붉은 포도주에 계피, 사향, 레몬, 설탕 등을 넣고 끓인 '굴류와인'이라는 음료다. 둘 다 북극다운 침침하고 검소한, 음악도 없는 뮌헨의 학생 다방에서 마실 때 무척 맛있게, 또 추위에 대해서 유효하게 생각된 음료지만 한국에서 마시면 어떨는지? 아직 한 번도 시험해 보지 못했다. 아마 그 우울한 안개비의 포장과 뜨거운 사기 난로, 구운 소시지 냄새,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을 날라다 주는 금발의 프로일라인의 친절한 미소 없이는 맛없는 음료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