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목소리 지난 4일, 서울 시청 주변은 백남준의 비디오아트 전시장 같았다. 여러 모니터에 시시각각 다른 영상이 나오듯이, 집회와 맞불집회가 동시다발로 열렸다. 목소리는 뒤엉키고 시선은 흩어졌다. 그 사이를 헤집고 파고드는 말이 있었다. 10·29 이태원참사 100일 추모대회 참가자들을 향한 경찰의 선무방송. 유일하게 들은 국가기관의 말이니 그 일부를 기록해 둔다. “… 여러분은 해산 명령에도 불구하고 해산하고 있지 않습니다. … 여러분, 여러분은 신고한 집회의 장소와 방법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 계속하여 불법 집회 시위를 진행하고 있고, 이러한 질서 문란한 상태에 대해서 주최 측에서 질서 유지와 질서 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16조 4항에 따른 준수 사항을 위반한 행위입니다. 이로 인해 시민들의 불편이 야기되고 공공의 안녕 질서에 대한 위험이 초래되고 있으나, 여러분께서 더 이상 질서 유지를 자율적으로 할 수 없다고 판단됩니다. 이에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20조 1항 제5호 및 동법 시행령 17조에 따라 남대문 경찰서장의 위임을 받은 경비과장이 4차 해산명령을 발합니다. 모든 참가자는 즉시 해산하시기 바랍니다. 경찰의 해산 명령에 불응하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제24조 5호에 의거,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고 경찰력을 투입하여 직접 해산 조치할 수 있습니다. 즉시 해산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망연히 앉아 있었다. ‘전혀 복수하지 않는 것보다는 약간이라도 복수하는 것이 훨씬 인간적이다.’(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전혜린편"(1934~1965) 수필가. 평남 순천 출생. 독일 뮌헨대 독문과 수료. 여러 대학의 강사를 거쳐 성균관대 교수 역임. 31세로 자살함. 자유로운 정신과 현실 세계와의 치열한 대결 속에 불꽃처럼 살다가 간 지식인이었다. 끈기와 탄력과 집중력을 갖고 생을 긍정했고 생의 완벽성을 구했다.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삶에 대한 그의 강렬한 사랑과 일종의 필수적인 비애의 기록으로서 수많은 젊은이들의 심금을 울린 바 있다. 회색의 포도와 레몬빛 가스등 -영원한 물음 '당신은 어디서부터 왔는가?에서 도망하고 싶었다. 내가 독일의 땅을 처음 밟은 것은 가을도 깊은 10월이었다. 하늘은 회색이었고 불투명하게 두꺼웠다. 공기는 앞으로 몇 년 동안이나 나를 괴롭힐 물기에 가득 차 있었고 무겁고 척척했다. 스카프를 쓴 여인들과 가죽 외투의 남자들이 눈에 띄었다. 아무도 없는 비행장 뮌헨 교외 림에 내렸을 때 나는 울고 싶게 막막했고 무엇보다 춥고 어두운 날씨에 마음이 눌려 버렸었다. 뮌헨 하면 그 이후 내 머리에는 회색과 안개로 가득 차게 된 것도 그의 독특한 나쁜 날씨보다도 내가 에어 프랑스에서 내렸던 그 날 오후의 첫인상과 나의 걷잡을 수 없었던 외로움 때문이 아니나 생각된다. 트렁크를 들고 비행장 버스에 올라 운전사에게 돈을 다 내어 보이고 그 중에서 1마르크만 가져가게 한 일, 힘없이 혼자서 하숙을 찾아 갔던 일-나는 정말로 내가 파리에 있는 말테나 된 듯한 서글픈 마음이었다. 우선 고국에서부터 연락해 놓았던 아스타라는 학교 사무국에 가서 벽에 붙은 벽보를 찾아야 했다. '빈 방 있음'의 광고를 보기 위해서였다. 모두 값이 비쌌다(내 생각보다). 또 학교에서 멀었다. 그리고 뮌헨은 나에게 마치 라비린트 그 자체처럼 보였었고, 학교에서 5분 이상 더 가는 곳에 가서 살 자신은 나에게 없었다. 그 중에서 나는 겨우 '빈 방 있음, 전기 있음, 학교에서 도보로 5분, 월세 50마르크'라는 꼬불꼬불한 연필 글씨로 쓰인 광고 용지를 찾아 냈다. 그 집은 정말로 학교에서 5분쯤 가면 있는 영국 공원이라는 광대한 공원에 임해 있었다. 첫인상이 포의 어셔 가를 연상시켰고 유쾌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수가 어디 있으랴? 다른 빈 방들은 대개가 '미국인에게 한함'이거나 또 엄청나게 비쌌던 것을... 나는 다시 들어서는 발을 억지로 닫혀진 문 앞으로 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60세 가량 된 극단적으로 비만한 흰 단발 머리의 할머니가 나왔다. 키는 작았고 차림새는 누추했다. 나는 '방을 빌리고 싶습니다'라고 말했거나 '방을 빌릴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던 것 같다. 할머니의 표정은 의외로 상냥했고 입가에는 구수하다고 형용할 수 있는 미소를 띄어 보였다. '학교 광고를 보셨습니까?' 할머니는 또 무엇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악의는 없는 말투였다. '방을 볼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네, 네, 어서 들어오세요.' 방, 내 방인 것이다. 나는 그 할머니를 따라서 긴 낭하를 지나갔다. 낭하는 어두웠고 방이 많았고 방마다 사람의 이름이 작게 써 붙여 있었다. 맨끝에서 할머니는 멎어서더니 주머니에서 열쇠 뭉치를 꺼냈다. "여기 살던 사람이 이틀 전에 자기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페르시아 사람이었지요." 열쇠가 돌려지고 문이 열렸다. 나는 주저하면서 할머니 뒤를 따라 들어갔다. 방도 마루처럼 어두웠으나 의외로 깨끗했다. 초록빛 도자기로 된 커다란 난로가 한편 구석에 서 있었고, 전기 곤로가 놓인 대와 흰 요와 이불이 덮인 침대가 하나, 그리고 경대와 찬장이 딸린 콤모데가 있었다. 창은 두개가 영국 공원과 반대 되는 포도로 나 있었고 이중창에 이중 커튼이 둘러져 있었다. '하시겠어요?' 할머니가 물었다. '네.' '방세는 한 달분 미리 내시기로 되어 있습니다.' 할머니가 나간 후 나는 덧문을 열고 유리창을 활짝 열었다. 돌로 포장된 좁은 골목은 완전히 잿빛 안개로 덮여 있었고 물기가 촉촉히 방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나는 어제까지나 창 밖을 보고 있었다. 사람이 별로 안 지나가고 여기는 뮌헨에서도 가장 오래 된 지역이고 폭격도 안 맞은 1920년대 그대로의 문명의 이기만을 쓰고 사는 마을인 것 같았다. 트렁크를 침대 밑에 넣고 나는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피로했음에도 불구하고 잠은 안 왔다. 열쇠로 방문을 잠그고 거리로 나갔다. 그 때 마침 가스등을 켜는 시간이어서(다섯 시경이었던 것 같다.) 제복 입은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좁은 돌길 양쪽에 서 있는 고풍 그대로의 가스등을 한 등 한 등 긴 막대기를 사용하여 켜 가고 있었다. 더욱 짙어진 안개와 어둑어둑한 모색 속에서 그 등이 하나씩 하나씩 켜지던 광경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짙은 잿빛 베일을 뚫고 엷게 비치던 레몬색 불빛은 언제까지나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다. 내가 유럽을 그리 원한다면 안개와 가스등 때문인 것이다. 다음날 아침에는 나는 근처의 생활 필수품점에 가서 빵 두개와 마가린 한 통을 샀다. 전기 곤로 주전자를 올려놓고 나는 빵을 먹었다. 학교의 개강은 아직 한 달이나 남아 있었다. 나는 원래 돌아다니거나 걷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었고 외국서는 더구나 무서웠다. 그러나 낮에 나는 큰 마음을 먹고(사실 도착 이래 식사다운 식사를 못 해서 배도 고팠다.) 바로 근처에 있는 제로제라는 음식점에 들어갔다. 메뉴를 보았으나 별로 눈에 익은 게 없었다. 단 왜지 커틀릿이라는건 나도 알 것 같아 그걸 시켰다. 그러나 프로일라인(하인)이 가져온 것은 우리 개념의 커틀릿이 아니고 돼지고기를 큰 덩어리째로 그냥 삶은 것 같았다(실제로 그렇게 요리하는 모양이다.). 나는 힘없이 먹기 싫은 음식을 앞에 놓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마실 것은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라는 물음의 뜻도 파악 못 하고 그냥 웃어 보였더니 작은 컵에 맥주를 따라서 갖다 주는 것이었다. 난 그냥 잠잠히 앉아 있었다. 말을 하면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을 안고..., 그 때 여러 명의 틴 에이저들이 들어오더니 주크 박스 앞으로 다가가서 판을 고르는 모양이었다. 그 중의 하나가 힐끗 나를 보더니 무슨 판을 눌렀다. 그에 이어서 뜻밖에도 일본말 노래가 새어나오는 데는 아연하여 보고 있었더니 일본의 이별의 노래라고 그 중의 하나가 나에게 알려 주듯 말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아마 나를 일본인으로 안 모양이었다. 그 때만 해도 뮌헨에 한국인이라고는 거의 없었고 더구나 여자는 구경하려 해도 없었을 때니까 아마 그렇게 짐작한 모양이었다. 나는 역시 웃어 보였을 뿐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러나 왜 그런지 서글퍼졌고 덜 혼자인 듯한 느낌이었다. 그 후로 나는 오후나 저녁때 그 집을 자주 찾아갔다. 거리도 내 방에서 가까웠고 음식값도 다른 데보다 싼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프로일라인도 친절했다.늘 말없이 호의를 보여 주었고 주간지도 내 테이블에 갖다 주곤 했었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이 음식점이 보통 음식점이 아니라 예술가들의 합숙소인 것도 알게 되었다. 목요일에는 '시의 밤'이 있고 화요일에는 '화가의 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집의 한편 벽에 더덕더덕 붙어 있는 사진이며 편지며 분필 사인이 토마니 링겔나츠니 캐스트너니 좀마니... 하는 쟁쟁한 작가나 화가나 만화가들의 소행인 것도 점점 알게 되었고 이 집이 한때 반나치 운동의 중심이었던 것도 알게 되었다. 이 집에서 나는 처음으로 일제 아이힝가라는 여류 시인의 존재를 그 여자의 특이한 용모와 매력적인 긴 흑발과 함께 알았다. 가을은 깊어만 갔다. 강의가 끝나면 나는 학우들(오스트리아 여학생이나 프랑스 학생)과 같이 근처의 다방에 가서 크림 커피 한 잔으로 점심을 때우는 방법도 배웠다. 주립 도서관도 자기 집 내부처럼 환히 알게 되고 뮌헨 시내의 고서점이란 고서점은 다 환히 알게 되었다. 헌 책방 주인과도 친해지고 이미륵 씨 얘기도 듣게 되었다. 학교 정문 앞에서 파는 군밤 장수의 군밤을 50페니히쯤 사서 교실에서 먹는 일에도 익숙해졌다. 그러나 마음은 몹시 허전했다. 고국에까지 뛰거나 걸어서 갈 수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 무서운 심연을 내 마음 속에 열어 놓을 줄은 나도 몰랐었다. 짙은 안개를 들이마시면서 나는 새파란 하늘을 그리워했다. 감나무나 대추나무를 꿈에 그렸다. 사실로 내가 그리워한 것은 황색 그림자였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감상이나 미학적인 어떤 음탄이 아니었다. 그것은 색이 있는 민족의 환영--그들의 비극이 내 속에 담겨져 있고 그들의 대표자로 내가 여기에서 간주되고 있는 그러한 비전이었다. 걷잡을 수 없는 공포였다고 해도 좋다. 강의실 내의 교수의 방언과 노령에 의한 발음의 불명료에 그리고 '생활 필수품점' 속에 진열돼 있는 셀로판지로 담긴 이탈리아 쌀에... 어디서나 그 비전은 나를 따랐다. 뮌헨 대학에서 내 하숙에 이르는 레오폴드 통은 거대한 꼿꼿하게 높기만 한 포플러 가로수로 줄지어져 있었다. 그 길은 온갖 빛의 낙엽으로 두껍게 깔리기 시작할 무렵의 가을이 아름다웠다. 그 거리에는 작은 어항같이 생긴 '유리 동물원'이 있었다. 유리로 기막히게 정교하게 만든 온갖 작은 짐승들, 도자기 발레리나들...안데르센 동화 속의 나라 같았다. 나는 매일 그 앞을 지날 때마다 5분 이상이나 진열장을 들여다보곤 했었다. 갖고 싶고 애무하고 싶은 유리 동물들이었다. 그 가게 뒤에 쓰러져 가는 '노아 노아'라는 집이 있었다. 거기는 다다이스트의 집합소로서 늘 해괴하고도 기상천외인 그림들이 잔뜩 붙어 있었다. 화가들이 수염을 늘어뜨리고 떠들며 담론하는 살롱이기도 한 것 같았다. 때로는 에리카 만의 낭독회도 열리는 모양이었다. 그 무렵에 나는 제로제보다 더 싼 음식점을 발견했다. 서서 먹는 집이었다. 흰 소시지를 불에 구워서 겨자를 발라 먹는 소시지 집이었다. 거기다가 신 오이 한 개와 리모나데 한 컵을 먹어도 1마르크가 안 되니 싸기도 하려니와 냄새만으로 이끌려 들어가게 맛이 있었다. 먹는 것은 간단히 빨리...그리고 나는 걸어다녔다. 학교에서 내 집까지 사이의 골목 그리고 영국 공원 속...이러한 곳이 내 산보지였다. 어떤 날 나는 백조가 마지막으로 떠 있는 것을 저녁 늦도록 지켜 본 일이 있다. 어둑어둑한 박명 속을 흰 덩어리가 여기저기 모여 있었고 때때로 바스락 소리를 냈다. 몹시 외로워 보였다. 나 자신의 심경이 그대로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마음 속을 뒤흔들린 편지를 매장한 곳도 이 호수였고 내 꿈과 동경-몇 년이나 길게 지속되었던-을 던져 넣어 버린 곳도 이 호수 속이었다. 이 호숫가의 가스등 밑에서 나는 안개에 감싸이는 쾌감과 머리를 적시는 눈에 안 보이는 비를 맛보았다. 그리고 추위에 떨면서 귀로에 서곤 했었다. 도자기 난로 속에서 석탄이 붉게 타오르는 것을 지켜 보고 있으면 쓸쓸하지 않았다. 불이 타오르는 소리, 그리고 붉은 불의 혓바닥...이러한 것과 함께 있는 것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불길을 지켜 보면서 언제나 어떤 시의 구절을 생각했다. 휴식과 포도주에 넘친 어둠, 슬픈 기타 소리가 흐른다. 그리고 방 안의 부드러운 등불로 꿈 속처럼 너는 돌아간다. 공기에서는 서리와 안개와 낙엽 냄새가 섞여서 났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공원에 가는 일도 드물어졌다. 11월 중순-아직 한국에서는 가을이지만 여기서는 눈이 큰 송이로 내렸다. 눈이 내리는 소리, 그리고 난로의 석탄이 타오르는 소리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날이 계속되었다. 눈이 와도 무섭게 왔다. 세원 둔 자동차가 눈에 폭 파묻혀 안 보이게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는 한국서 가져온 얇은 천으로 된 학생용 검은 오버를 입고 오돌오돌 떨면서 학교에 다녔다. 점심은 커피 대신 그로크(펄펄 끓인 포도주)와 수프로 했다. 그래도 추웠다. 때로는 눈이 멎고 다시 영원한 뮌헨의 하늘빛인 회색 구름장이 덮이거나 안개비가 촉촉히 내렸다. 나는 두꺼운 색양말을 신고 두꺼운 머릿수건을 쓰고 다시 공원으로 갔다. 사람이라고는 없고 나뭇가지가 앙상한 해골을 노정시키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서 검은 나뭇가장이들 사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변함없는 회색일까? 하고... 아는 얼굴이나 목소리가 하나만 있어도 이 하늘이 이렇게까지 우울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한 물음 '당신이 어디서부터 왔는가?'에서 도망하고 싶었고 황색 비전을 나는 좇고 있었다. 낮이나 밤이나 우울한 회색과 안개비와 백일몽의 연속이었다. 악몽처럼 혼자라는 생각이 나를 따라다녔고 절망적인 '고국까지의 거리감'에 나는 앓고 있었다. 지금도 나는 뮌헨의 가을 하면 내가 처음 도착한 해의 가을이 생각나고 그 때의 심연 속을 헤매던 느낌과 모든 것이 회색이던 일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아무것에도 자신이 없었고 막막했고 완전히 고독했던 내가 겪은 뮌헨의 첫가을이 그런데도 가끔 생각이 나고 그리운 것은 그러나 웬일일까? 뮌헨이 그 때의 나에게는 미지의 것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인지, 또는 내가 뮌헨에 대해 신선한 호기심에 넘쳐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안개비와 유럽적 가스등과 함께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 때의 나의 젊은 호기심인지도 모른다. 나의 다시없이 절실했던 고독인지도 모른다.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둘 - 생활속에 피어나는 웃음안개 굳세어라 큰 바위 - 이민호(남.대구 달서구 성당동) 얼마 전, 이종환씨가 1등 못했다고 자살한 학생이 있고, 뚱뚱하다고 자살한 학생이 한둘이 아니라며 걱정스런 말씀을 방송에 하는 걸 듣고, '아니, 나도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데 이런 일들이....' 하는 생각에 제 얘기를 편지로 보내야겠다 결심했습니다. 저희 집은 대대로 아들이 귀한 집으로 제가 4대 독자가 될 뻔했는데, 제 어머니의 예상을 뒤집는 눈부신 활약으로 3형제를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어릴 적 저희 집에 손님이 오시면 꼭 빠뜨리지 않는 것이 머리이야기였습니다. 3형제의 머리가 특이하기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이 유별난 머리는 집안 내력입니다. 먼저 저희 아버지께서는 태어나자마자 동네사람들이 "드디어 이씨집안에 장군 났네. 장군 났어. 대갈 장군 났네." 할 정도로 동네를 떠들썩하게 하셨고, 저희 어머니 역시 아기 때 두돌 지나고부터는 뒤통수만 보고는 애인지 어른인지 분간을 못했답니다. 아! 이 두 분의 운명적 만남 끝에 짜잔! 저를 낳았으니 드디어 일은 벌어졌겠지요. 3대 독자가 낳은 아들, 이씨 문중에 4대 독자인 저를 할머니께서 처음 보셨을 때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그런데 통곡을 하시면서 첫마디가 "에이고... 뭐 저런 기 다 인노, 저거 인간 안된다." 그럴 만도 한 게 그때 저의 모습은 눈을 기준으로 위로는 머리, 아래로는 하체였다 나요. 산파가 놀라서 빨리 큰 병원으로 옮겨야 하다고 법석을 떨었던 그날 그렇게 세상을 놀래면서 저는 세상에 나왔습니다. 자라면서 별의별 소리를 다 들었습니다. 특히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수업시간마다 제 머리와 관련된 얘기들이 끝이 없었습니다. 국어를 공부하면 '큰 바위 얼굴 소설'이 나와 웃음거리가 되고, 수학을 공부하면 '가분수'가 나와서 시선 집중을 시키고, 사회를 공부하면 무슨 무슨 사건이 '대두'되고 있다며 떠들어대니 공부가 제대로 됐겠습니까? 모두 잊고 TV를 보니 '모여라 꿈 동산'이 괴롭히고 특히 무엇보다도 성질나는 일은 제 머리 절반만한 연예인들이 나와서는 머리가 크다고 불평하고 웃고 떠드는 걸 보면 TV를 확 부숴버리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10여 년 애들에게 놀림 받더니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두발검사를 왜 그리 자주 하는지 박박 밀어도 머리가 커서 멀리서 보면 텁수룩하게 보였던 거지요. "너 머리 깎어. 머리 깎고 오란 말야, 알겠어!" 1주일이 멀다 하고 이발소를 들락거렸고, 친구들이랑 당구 치다가 학생 주임선생님께서 들이닥쳐 쪽문으로 도망 갈 때 맨 먼저 나가려다 벽 모퉁이에 부딪히며 나자빠지는 바람에 친구들까지 다 잡혔을 때는 정말 죽고 싶었습니다. 그 다음주 수업에 들어오신 그 학생주임선생님은, "니 머리 때문에 그 날은 수확이 컸다."고 하시며 놀리셨고, 어쩌다 수업시간에 조는 학생이 있으면, "야! 저기 봐. 민호도 저 큰 머리 쳐들고 공부하는데 조는 놈들은 뭐야?"하시며 조는 애들을 웃음으로 몰았었죠. 그러나 이런 저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야간 자습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면 어머니께선 제 얼굴을 만지시며 말하셨죠. "아이고, 우리 아들 공부한다꼬 얼굴이 고마 반쪽이 되삣네. 우짜꼬." 하시며 속을 확 뒤집어 놓으시기 일쑤였습니다. 걱정하시는 어머니 앞에서 대들 수는 없고 방에 들어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저는 속으로 고함을 질러댔습니다. '엄니, 내 얼굴이 아무리 반쪽이라캐도 다른 애들 두 배다 두배! 흑흑흑.' 대학에 와서는 병역의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의외로 저는 시력 때문에 방위병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 사실을 친구들에게 알리자 모두 의심을 하며 저의 머리만 보는 게 아니겠습니까? "니가 방위병 판정을 받은 건, 니 시력 때문이 아니고, 머리 때문아이가? 니가 전방에 배치되면 완벽한 적의 표적이 되기 때문에 국방부가 니를 살린 기다." 또 다른 녀석은 이렇게도 말하더군요. "그래. 맞다. 니 머리에 맞는 철모가 어디 있겠나. 푸하하." 아, 그러는 게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교양과목을 드으러 강의실에 들어가도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더군요. "저 학생은 머리가 커서 면제래." "입대했다가 철모가 안 맞아서 쫓겨났대." 그래도 남학생들은 농담으로 여겨 웃으며 넘기는데 정작 여학생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이며 어쩌다 저를 만나면 진짜인 줄 알고 저마다 위로를 하는데 정말 난감하더라 구요. "사실 머리가 아니고 시력 때문이야." 하며 몇 번이나 말하고 돌아다녔지만 결국 제가 맘속에 찍어두었던 저만의 연인, 귀여운 저의 천사의 귀에도 그 소리가 들어갔을 땐 그 날로 그 여학생을 포기했고 또 한번 죽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집에서 가족끼리 모여 머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더 가관입니다. 하지만 머리 큰 게 나쁜 것만도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제 바로 밑의 동생은 머리가 커서 덕 본 게 한두 번이 아니라나요. 무면허일 때 운전면허를 따러 시험장에 50cc오토바이를 타고 가는데 200m앞에서 의경들이 단속을 벌이고 있었답니다. 자동차 사이로 숨어가 봐야 큰머리 들킬 것 뻔하니 아예 1차선으로 달려보자, 어쩌면 자동차만 단속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밀어붙였는데 의경 하나가 1차선으로 뛰어들어 세우더라는 겁니다. "아저씨! 1차선으로 막 달리면 우짭니꺼. 면허증 좀 보입시더. 어 이 아저씨 헐멧도 안 썼네." 동생은 시험시간은 다가오는데 사정을 말할 수도 없고, 다소곳하게 말했답니다. "제가 보시다시피 머리가 좀 커서 헬멧 쓰기에는 많이 불편합니다. 어떻게 사정 좀 봐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사정을 하고 빌어도 봤지만 의경의 마음은 좀처럼 돌아서지 않자 갑자기 머리 때문에 놀림당한 기억이 살아나서 헬멧을 던져주며 소릴 질렀답니다. "누가 쓰기 싫어 안 쓰는 교? 들어가나 안 들어가나 직접 씌워줘 보소?" 하며 소함을 질러대자 놀란 의경은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어떻게 할 지 몰라 당황하다가 헬멧을 들고 억지로 씌워 보려고 덤비자 또 엄포를 소리쳤대요. "씌우는 건 좋은데 다시 벗겨줘야 되구마! 알겠는교?" 더 분노에 찬 절교를 하자,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는지 슬슬 꼬리를 내리면서 조심해서 가라고 하더가는 말에 얼마나 웃었는지. 한창 외모에 관심이 가는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남들보다 조금 이상하다는 것이 정말 힘들었고 공부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스트레스였지만, 조금 더 성숙해진 지금은 행복은 머리 작은 순이 분명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진정 가치 있는 인생이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와의 비교조차 불가능한 어려운 신체조건과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그리고 훌륭히 살아가는 많은 분들이 계셔서 오늘의 제가 있듯이 이 부족한 편지가 외모와 성적 때문에 비관하는 청소년들에게 조금이 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Board 삶 속 글 2023.02.05 風文 R 499
분서갱유(焚書坑儒) 焚:불사를 분. 書:글 서. 坑:묻을 갱. 儒:선비 유. [출전]《史記》〈秦始皇紀〉,《十八史略》〈秦篇〉 책을 불사르고 선비를 산 채로 구덩이에 파묻어 죽인다는 뜻으로,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의 가혹한 법[苛法]과 혹독한 정치[酷政]을 이르는 말. 기원전 222년, 제(齊)나라를 끝으로 6국을 평정하고 전국 시대를 마감한 진나라 시황제 때의 일이다. 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하자 주(周)왕조 때의 봉건 제도를 폐지하고 사상 처음으로 중앙집권(中央執權)의 군현제도(郡縣制度)를 채택했다. 군현제를 실시한 지 8년이 되는 그 해(B.C. 213) 어느 날, 시황제가 베푼 함양궁(咸陽宮)의 잔치에서 박사(博士)인 순우월(淳于越)이 ‘현행 군현 제도하에서는 황실의 무궁한 안녕을 기하기가 어렵다’며 봉건제도로 개체할 것을 진언했다. 시황제가 신하들에게 순우월의 의견에 대해 가부를 묻자 군현제의 입안자(立案者)인 승상 이사(李斯)는 이렇게 대답했다. “봉건시대에는 제후들 간에 침략전이 끊이지 않아 천하가 어지러웠으나 이제는 통일되어 안정을 찾았사오며, 법령도 모두 한 곳에서 발령(發令)되고 있나이다. 하오나 옛 책을 배운 사람들 중에는 그것만을 옳게 여겨 새로운 법령이나 정책에 대해서는 비난하는 선비들이 있사옵니다. 하오니 차제에 그러한 선비들을 엄단하심과 아울러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의약(醫藥)/복서(卜筮)/종수(種樹:농업)에 관한 책과 진나라 역사서 외에는 모두 수거하여 불태워 없애 버리소서.” 시황제가 이사의 진언을 받아들임으로써 관청에 제출된 희귀한 책들이 속속 불태워졌는데 이 일을 가리켜 ‘분서’라고 한다. 당시는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이므로, 책은 모두 글자를 적은 댓조각을 엮어서 만든 죽간(竹簡)이었다. 그래서 한번 잃으면 복원할 수 없는 것도 많았다. 이듬해(B.C. 212) 아방궁(阿房宮)이 완성되자 시황제는 불로장수의 신선술법(神仙術法)을 닦는 방사(方士)들을 불러들여 후대했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노생(盧生)과 후생(侯生)을 신임했으나 두 방사는 많은 재물을 사취(詐取)한 뒤 시황제의 부덕(不德)을 비난하며 종적을 감춰 버렸다. 시황제는 진노했다. 그 진노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시중의 염탐꾼을 감독하는 관리로부터 ‘폐하를 비방하는 선비들을 잡아 가뒀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시황제의 노여움은 극에 달했다. 엄중히 심문한 결과 연루자는 460명이나 되었다. 시황제는 그들을 모두 산 채로 각각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는데 이 일을 가리켜 ‘갱유’라고 한다.
Board 고사성어 2023.02.05 風文 R 892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박완서편" 여류 소설가. 경기도 출생. 서울대 문리대 중퇴. 1970년에 장편 소설 "나목"으로 문단에 나온 후 장편 "휘청거리는 오후" 등으로 일약 각광을 받아, 가장 설득력 있는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로 평판을 얻었다. 감각적인 묘사가 섬세하면서도 예리한 분석력으로 지목되고 있다. 소도구로 쓰인 결혼 사진 비가 올 것 같은 날이었다. 마침 그 날이 내 결혼 기념일날이라 나는 부부 동반한 2박 3일 정도의 짧은 여행을 계획하고 나선 길이었다. 실로 얼마만인지도 모르게 오래간만에 우리는 완행 3등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가 서울을 벗어나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시골에 내리는 비는 도시에 내리는 비와 그 풍취가 전연 다르다. 빗속에 바라보는 봄의 농촌은 싱그럽고 산뜻하고 흥겨워 보였다. 물을 흠뻑 먹은 땅이 검고 부드럽게 보이는 들판으로 도랑물이 흐르는 게 가을 들판 못지 않게 풍요로워 보였다. 문자 그대로 감우로구나 싶었다. 들과 풀과 나무와 내와 배꽃, 복숭아꽃이 달디 달게 목을 축이고 무럭무럭 자라는 게 보이는 듯했다. 얼마나 좋은 고장인가 이 땅은, 나는 제법 감동까지 했다. 그런데 문제는 기차 속이었다. 쉴새없이 장사꾼이 드나들며 연설을 해댄다. 백 원에 자그마치 빗이 다섯 개에 칫솔을 세 개나 껴 주겠다는 장수서부터 바늘장수, 책장수, 사이다, 콜라, 사과, 삶은 계란, 김밥, 호두과자 장수들이 서로 다투어 목청을 돋우고, 물건을 떠맡기고 했다. 나중에는 한푼 보태 달라는 사람까지 찻간에 들어서자마자 유창하게 일장의 연설을 했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골병이 들고 회사까지 해고 당해 제 입 한 입 굶는 건 문제도 아니지만 나섰으니 신사 숙녀 여러분의 동정을 바랄 따름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개별적으로 승객 한 사람 한사람에게 구걸 시작했다. 차마 거지라고 부를 수 없게 의젓하고 단정한 차림이었다. 그러나 구걸하는 경우 단정한 옷차림이란 눈에 거슬리면, 거슬렸지 보탬이 되지는 않는 법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좀 이상한 걸 갖고 다니고 있었다. 꾸벅 절을 하고는 무슨 증명서를 꺼내 보이듯이 그걸 꺼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걸 봐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 사람이나, 그 사람이 보이는 거나를 똑똑히 보면 구걸에 응하게 될 것 같아 겁이 나는 것처럼 누구나 그 사람 쪽은 거들떠도 안 보고 차창 밖만 열심히 내다봤다. 나는 그게 뭔가 몹시 궁금했다. 그래서 내 앞에 그가 오거든 그게 뭔가 똑똑히 봐 두리라 벼르고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뜻밖에도 그건 낡은 결혼사진이었다. 족두리 쓰고 연지 찍고 다소곳이 서 있는 신부 옆에 사모 관대의 사랑이 의젓하게 서 있는 촌스럽고 낡은 구식 결혼 사진이었다. 그리고 사진 속의 신랑은 지금 구걸을 하고 있는 그 사람 자신이었다.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걸 보여 주며 구걸을 하는 것일까, 나는 이상해하면서도 어느만큼은 감동 같은 걸 하고 있었다. 그도 꽃다운 시절이 있었고 결혼을 했다. 천지신명께 백 년 해로를 맹세했고 친척 친구들에게 앞날을 축복받으며 착한 여자의 지아비가 되었고, 지금 이 구걸도 그 무겁고 무서운 지아비 노릇이다 하는 생각이 뭉클하니 내 심장 언저리를 뜨겁게 했다. 웬일인지 이 결혼 사진도 구걸 행각의 소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약고 똑똑한 생각은 안 했다. 나는 구걸하는 사람에게 베풀기에는 좀 많은 돈을 꺼내서 얼른 그 사람의 주머니에 꾸겨 넣었다. 남편이 알까 봐, 또 딴 승객들이 눈치챌까 봐, 나쁜 짓이라도 하듯이 몰래 재빠르게 그 짓을 하고, 하고 나서도 얼굴을 붉혔다. 아마 그 날이 내 결혼 기념일이어서 내가 그럴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의문이 안 풀리는 건 그가 왜 하필 결혼 사진을 꺼내 보이며 구걸할 생각을 했을까 하는 거다. 내가 보기엔 그게 조금도 구걸에 도움을 주는 것 같지가 않았는데 말이다. 어쩌면 결혼의 의미를 남보다 더 잘, 더 많이 알고 있었음이 아닐까. 비 오는 날 있었던, 사건이랄 것도 없는 몇 가지 얘기를 적어 놓고 보니 문득 서글프다. 빗속에서 같이 받은 우산이 인연으로 싹튼 로맨스가 한 컷쯤 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게 없는 걸 어찌하랴. 이래 저래 40대의 비 오는 날의 사건은 재미없을 수밖에 없나 보다. 떳떳한 가난뱅이 뭐는 몇십 %가 올랐고, 뭐는 몇십%가 장차 오를 거라는 소식을 거의 매일 들으면서 산다. 몇 %가 아니라 꼭 몇십% 씩이나 말이다 이제 정말 못 살겠다는 상투적인 비명을 지르기도 이젠 정말 싫다. 듣는 쪽에서도 엄살 좀 작작 떨라고, 밤낮 못 살겠다며 여지껏 잘만 살았지 않느냐고 시큰둥하게 비웃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네 백성들의 생활력이 질기다는 게 모멸에 해당하는 일인지 찬탄에 해당하는 일인지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질기다는 것만 믿고 너무 가혹하게 당하고만 있는 것 같아 뭉클 억울해진다. 더 억울한 건 물가가 오를 때마다 상대적으로 사람값의 하락을 느끼게 되는 일이다. 가난이 비참한 건 가는 그 자체의 물질적인 궁색을 견디기 어려워서라기보다는 부의 지나친 편재로 배고파 죽겠는 처지에서 배불러 죽겠다는 이웃을 봐야 하는 괴로움 때문인 경우가 더 많다. 게다가 소유하고 있는 물질과 금전의 다과를 인간을 재는 척도로 삼는 풍조 때문에 가난뱅이는 어디 가나 기죽을 못 펴고 위축돼서 사람이 지닐 최소한의 긍지도 못 지키고 비굴하게 한구석으로 비켜서 살아야 한다. 우리의 현재 봉급 수준과 물가 수준으로 볼 때 우리의 생활이 궁색하다는 건 지극히 정당하고, 잘 산다면 그게 오히려 부당한 거다. 그런데 왜 정당하게 사는 사람이 위축되고 부당하게 사는 사람이 당당한가? 이거 엄청난 비리다. 어차피 비리가 판을 치는 세상인걸 무력한 백성이 새삼 뭘 어쩔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죽은 듯이 비리에 굴종만 할 것이 아니라 한번 과감히 도전해 봄직도 하지 않을까. 우리 스스로의 사람값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무능이나 게으름에서 오는 가난이 아닌, 우리가 속한 사회가 가난한 것만큼의 정당한 가난은 고개를 들고 정면으로 당당하게 받아들여 한점 부끄러움도 없어야겠다. 의연하고 기품 있는 가난뱅이가 돼야겠다. 뿐만 아니라 부당하게 치부한 사람, 우리가 속한 사회의 일반적인 생활 수준에서 동떨어지게, 엄청나게 잘 사는 사람을 준엄한 질책의 시선으로 지켜 보고, 경멸까지도 사양치 않음으로써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요즈음 많이 쓰이는 말로 상류층이란 말처럼 듣기에 민망한 말이 없다. 거액의 밀수 보석을 사들인 사람도 상류층, 위장 이민도 상류층--. 이 타락할 대고 타락한 정신이 어째서 우리의 상류층일 수 있단 말인가. 나라의 대들보건 기둥뿌리건 가리지 않고 갉아서 치부를 하고, 그 부를 보다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환물 투기를 일삼아 경제 질서를 어지럽히고, 일신의 안일에만 급급한 나머지 위기 의식만 예민해져, 보다 전쟁의 위험이 없는 나라로 도피할 궁리나 하는 게 이들이다. 그래서 해외에서 열심히 떳떳하게 사는 교포들의 정신 생활까지 해치는 게 이들이다. 쥐는 영감이 발달돼 난파할 배를 미리 알고 떠나 버린다는 말이 있다. 이들은 쥐새끼만한 영감도 없는 채 처신은 꼭 쥐처럼 약게 하다가 조국을 떠나는 것도 쥐새끼가 난파선 버리듯한다. 그러나 가난하나마 정신이 건강한 백성들은 조국을 난파선의 운명에 처한다 할지라도 결코 그 고난의 현장에서 피신하지 않고 끝내는 목숨을 걸고 난의 운명을 극복하고야 말 최후의 용기가 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가난뱅이는 얼마든지 당당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정신적인 상류층'을 자처할 수도 있지 않을까. 경제 부흥에 안간힘을 쓰면서 우리는 '잘 살아 보자'를 외쳤었다. 이 '잘 살아 보자'가 차츰 '어떡하든 잘 살아 보자'가 되고 종당에는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잘 살아 보자'로 돼 버렸다. 물질적인 가치가 정신적인 가치 위에 군림하고 인간은 이제 완전히 물질의 노예로 타락하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이 인간의 타락을 구할 새로운 싹이 틀 고장이 있다면, 아직까지는 양심을 물욕에 팔지 않고 살아 온 떳떳한 가난뱅이들의 고장밖에 더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