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 (그리스신과 영웅들) 1. 그리스 나라의 개요 그리스의 자연 현 그리스의 면적은 남한은 1.3배, 경작지는 20% 이내로 국토의 5분의 4가 산지이며 1000m를 넘는 높은 산이 흔하다. 이 나라 산중에서 최고봉은 2917m의 올림포스 산봉으로 신화시대에는 주신들의 상징적 주거지로서 외경하는 성역이다. 고지대에는 나무와 숲이 있으나 대부분의 높은 산은 석회질 절벽의 민둥산이며 중턱부터 완만한 고원 경사지로 이어지기도 한다. 옛 켄타우로스족이 살았던 테살리아 고원은 800평방km가 넘는 비옥한 목초지이며 말 사육지로 이름 높다. 고원의 계곡을 흐르는 이 나라 최장의 강 페네이오스는 2000km가 넘는 긴 강이지만 상류는 물살이 세고 하류는 완만하나 수심이 얕아서 항해에는 적합하지 않다. 대부분의 내륙 골짜기는 좁아서 겨울 우기에 계곡의 하천이 범람하며 겨울이 지나면 건조기로 들어가 하천은 계속 말라붙어 자연의 혜택이라곤 거의 없다. 원래는 산야에 나무가 많아 소나무를 비롯한 플라타너스, 느릅나무, 떡갈나무 등 거목이 무성하여 날짐승과 들짐승이 우글거렸으나 원시시대부터 가옥, 목선, 숯을 만든다고 나무를 마구 베어내고 말았다. 따라서 이미 기원전 5세기에 무성한 숲은 자취를 감추고 산지나 언덕은 지금과 같은 메마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자연의 섭리에 무지한 주민은 별 수 없이 땡볕과 바윗돌, 우기에는 광란하는 물결에 몸을 맞기는 신세가 되었다. 이러한 산지와는 달리 육지 둘레의 바다-지중해는 문자 그대로 대지 한가운데에 있는 풍광 명미한 고요한 내해로, 겨울철을 빼놓고는 천혜의 낙원이다. 해산물이 풍부하고 교통이 편리하며 거기에다 금상첨화로 쪽빛 바다의 뱃길은 그지없이 상쾌하고 삶의 즐거움을 솟게 한다. [리토코로에서 바라본 올림포스 산] 고대에는 지정학적으로 소아시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이 키프로스, 크레타, 키클라데스를 거쳐 점진적으로 북상하여 그리스 본토에 전파되고 미케네 문명으로 이어졌다. 그리스의 큰 땅덩이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지세로 보아 북쪽 본토의 짧은 줄기에 달린 큰 섬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현대에 와서 줄기 부위인 코린 토스 협부를 개척, 이오니아해와 에게해를 연결하는 운하를 개통시켜 섬으로 만들고 교량을 가설해서 육로를 소통시켰다. 이 나라 해안선은 굴곡이 심해서 도처에 만과 곶이 있고 해안선이 이오니아해, 에게해, 지중해로 매우 어지럽게 펼쳐져 있다. 이 때문에 일찍부터 사람의 왕래나 짐을 나르는 데는 언덕을 넘어야 하는 육로보다 배를 이용하는 바닷길을 선호하여 해운이 발달하였다. 남쪽 전설의 고장 크레타는 지중해섬들 중 시칠리아, 사르디니아, 키프로스, 코르시카에 이어 다섯 번째로 큰 섬으로, 높은 산들과 산맥이 군데군데 끊긴 대형 협곡이 산재하고 최고봉은 이다 산의 타원형 단일봉 티미오스 스트라브로스(2425m)이다. 섬의 해안선은 1000km가 넘고 기원전 2000년경 해안을 끼고 도시가 건설되었으며 그 중 크노소스의 미노스 궁전은 가장 유서가 깊고 이름나 있다. 에게해의 중앙 부위에는 델로스를 둘러싼 한 무리의 섬들이 점철하는데 이 군도를 키클라데스라 한다. 여기에는 기원전 3000년경 이미 독특한 문화가 존재하였으며 대부분 석회질 바위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옛 지각변동이라는 대역사는 아티카, 에우보이아 산맥의 동남쪽 연줄을 바다 속으로 내려 놓아 높은 산봉만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고 동쪽으로 가서는 다시 아시아의 산맥으로 이어진다. 북쪽 산악지대는 겨울철에 몹시 춥고 눈이 많은 대륙성 기후로 옛적에는 인구가 희박하였다. 이에 비하여 남쪽 해안지대와 에게해 섬은 아열대의 전형적인 지중해 기후로 사철 내내 밖에서 지내도 큰 지장이 없다. 겨울철 우기에는 서해안 쪽에 비가 많고, 동해안 쪽에는 비오는 날보다 맑은 날이 많다. 봄.여름.가을철은 대체로 많은 날이 이어지고, 초여름에서 늦가을까지 햇볕이 따가워 개울물이 줄어들고 초목이 시들며 말라 버린다. 해변은 해풍으로 견딜만 하고, 햇볕이 그리워 찾아오는 인파가 비취색 지중해 해안으로 모여든다. 태양열로 흐르는 땀을 식히느라 시원한 그늘진 곳을 찾는 모습은 일찍이 기원전 5~4세기의 희극시인 아리스토파네스도 희극시 '말벌'에서 "나귀 그늘을 차지 하느라 다툰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평지에는 곡물을 심기도 하나 뿌리를 잘 내리지 못하므로 가뭄을 타지 않는 올리브, 포도 또는 더위에 강한 실과나무를 심으며, 생산되는 올리브유와 포도주는 예로부터 이 나라의 주요 산물이 되었다. 언덕은 목축지로 이용하여 양이나 산양을 기르고 있으나 소를 키우는 데는 적당하지 않다. 따라서 경작지의 부족으로 식량을 자급자족하는 것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외국에서 조달해야 했다. 도시국가 아테네에서는 기원전 7세기 솔론 시태부터 올리브유, 포도주, 도자기 등을 수출하고 곡물, 특히 소맥의 수입을 무엇보다 중요한 시책으로 삼았다. 그런데 곡물은 주로 흑해 연안의 여라 나라와 이집트에서 들여왔고, 따라서 흑해로 가는 길목인 헬레스폰트 해협을 지키는 것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였다. 기원전 1240년 미케네가 유괴당한 헬레나를 되찾는다는 명목으로 트로이 성을 공략하여 헬레스폰트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자 장장 10년에 걸쳐(기원전 1240~1230) 전쟁을 벌인 것은 유명하다. 다르다넬스 해협은 에게해와 마르마라해를 잇는 터키의 해협이다. 고대 고전에서는 헬레스폰트 또는 그리스어로 헬레스폰토스(고대 그리스어, Hellespontos, ‘헬레의 바다’라는 뜻)로도 잘 알려져 있다. 길이는 61킬로미터이지만 폭은 1~6킬로미터 밖에 되지 않는다. 평균 깊이는 55미터이고, 가장 깊은 곳은 81미터이다. 보스포루스 해협과 함께 터키를 아시아와 유럽 양쪽으로 나눈다. 아테네는 북위 38도선에 위치한 그리스 수도로 인구 1100만 명중 400만 명이 시내와 근교에 거주한다(1995년 현재). 고대에 신전과 성채들로 들어찼던 아크로폴리스는 156m의 언덕으로 페르시아 전쟁 중에 완전히 파괴된 것을 승전 후 아테네의 전성기를 구가한 페리클레스 시대에 파르테논 등 우아하고 찬란한 구조물과 조각상을 재건립한 성역이다. 지금은 폐허가 되고 신전의 돌기둥, 부조된 박공, 대들보 등의 조각만이 옛 영광의 그림자를 보여주고 있는데 여전히 옛 아테네인의 창의성과 예술성을 접하고 느낄 수 있는 감동적 유적이다. 자연은 거기에 자리한 생물, 인간의 생활과 얼들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 나라 사람들은 빈곤을 극복하는 강인성과 자립심이 유달리 돋보이며 쾌청한 기후 조건을 배경으로 쾌활한 심성을 지니게 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용감성에는 각별히 찬사를 보내고 신체단련을 게을리한 적이 없으며 연극 경연에 열정을 The아 도시마다 또한 신전이 있는 곳마다 우아한 원형극장과 경기장을 설치하여 축제를 올렸다. 조각예술의 장인은 자연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그리스인은 아름다움이 곧 선이라는 사유를 지니게 되었다. 교역의 길로서 일찍이 해운이 발달한 바다는 그리스인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바다는 신화의 세계가 펼쳐지는 무대였으며, 또한 이 바다를 통해 건너온 해외 문물에 접하여 독특한 헬레네스 문화를 꽃피워 낼 수 있었다. 그리스 사람은 어느 민족에 못지 않은 강렬한 조국 사랑의 혼을 가지고 있다. 종교 이상의 정서가 지배하는 이 혼은 오랜 역사의 오랜 역사의 흐름속에서 그리스(그리스어로 말한다면 바로 헬레네스)를 강고하게 지켜 오는 힘이 되었다. 오랜 오토만의 지배에서 벗어나 나라를 되찾고자 1821년 총궐기하여 항쟁하는 헬레네스의 용사를 위해 솔로모스는 다음과 같은 해방의 송시를 발표하였다. 당신의 날카로운 공포의 칼날은 해방을 이루게 할 줄 아나이다. 당신의 빛나는 광채는 국토를 비추어 줌을 잘 아나이다. 거룩한 폐허에서 되살아나는 헬레네스의 위대성과 자유 지난 날처럼 용감하여라! 만세 만세 오! 우리의 해방! 이 송시 158연 중에서 첫 7연이 1865년 그리스의 국가로 채택되었다.
Board 추천글 2023.04.17 風文 R 1706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셋 - 사랑으로 풀어내는 웃음보따리 '원샷'에 울었다 저는 스물 다섯된 미혼인 직장여성입니다. 이종환 아저씨도 술 좋아하시죠? 저희 집안은 예로부터 술 때문에 되는 일이 없었던 집안입니다.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큰아버지, 아버지, 작은아버지, 또 그 대를 이은 아들들, 그에 버금가는 사위들... 이렇게 남자들은 모두 술 하면 한 가닥씩 합니다. 집안의 남자들만이 술을 과하게 마시는데 그 사이에 몇 번째 유전자가 반항을 했는지 돌연변이가 하나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돌연변이가 바로 접니다. 딸 셋 중에 둘째 딸인 제가 그 대를 이어 열심히 마시고 있으니까요. 친구들도 역시 끼리끼리 모인다고 제 주변에서 술 못하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힘들었지요. 그 절친한 친구들의 혼삿길이 막힐까봐서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몇 명의 친구들 얘기를 잠깐 하겠습니다. 레몬소주는 약하다며 "아저씨, 여기 글라스 아나 주세요."하며 맥주컵으로 레몬소주를 마시는 서XX양. 유성에서 나이트, 단란주점을 거치며 한참을 놀다보니 너무 늦은것 같아 집에 가려고 택시를 잡으려고 보니까 날이 훤한 것 같은데 버스가 불을 켜고 다니더라는 송XX양. 벌써 새벽이었던 거지요. "술을 마시면 술이 나고 그래서 내가 곧 술인기라."하는 임XX양. 이 친구들이 저와 술로는 쌍벽을 이룬답니다. 우리는 늘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를 합창했고, 남자보다 술을 좋아해서 회식때는 물론이고 가끔은 점심때도 반주로 소주 몇 병을 합니다. 당연히 저에게도 기회는 오지요. 어른들이 권하는 거라서 예의상 다 받아서 마십니다. 이렇게 음주근무를 해도 일 잘하고 은행 볼일 다봅니다. 두 분이 믿으실지 모르지만 이 모두가 실화입니다. 졸업후 몇 년을 술과 더불어 살아왔다고 해도 뭐 별로 문제가 없었습니다. 취해서 집 못 찾아온 적도 없구요. 술주정을 하거나 추태를 보인 적도 없습니다. 술은 역시 술맛을 아는 사람이 마셔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중에 한 명입니다. 그런데 어는 날 제가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우린 서로 한눈에 삐리릭 했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웬 운명의 장난이란 말입니까? 이 사람은 술을 거의 못하는 거예요. 거기다가 처음 만났을 때 제가 물었지요. "어떤 여자가 싫으세요?" 그랬더니 청천벽력 같은 대답을 하는데... "저는 술을 안 좋아해서 그런지 술을 마시는 여자가 제일 싫더라구요. 특히 남자보다 더 잘 마시는 여자 있지요. 그런 여자는 웬지 여가로 안 보여요. 선화씨는 제가 싫어하는 타입은 아닌 것 같군요." 이를 어쩌면 좋담... 그 자리에서 '저는 소주 두 병이 기본이에요. 호호호.' 그 얘기는 차마 못하겠더라구요. 그때부터 저의 고난은 시작되었습니다. 그 사람 친구들과 술자리가 생겨도 술은 생전 처음 대하는 양 고개를 돌려야 했고, "술 한 잔 하세요?"하고 친구들이 권해도 한 잔 받아만 놓고 아무리 군침이 고여도 마시지 못하고 잔을 들었다놨다 하기를 여러 번... 그러다가 운좋게도 "요즘에 술 못하는 여자가 어딨어요? 반잔만 해봐요."하고 권하면 못 이기는 척하며 일단 인상을 쓰고 반잔만을 홀짝 마시고 그렇게 달디단 술을 "아이 써!"하면서 술잔을 내려놓곤 합니다. 그런 모습을 애처로운 듯 쳐다보는 그 눈빛도 싫지는 않더군요. 한번은 저도 모르게 습관대로 '원샷'하다 놀라서 잔을 내려놓은 적도 있습니다. 개버릇 남 주겠습니까... 이러다 보니 절 술 한 잔도 못하는 여자로 알더라구요. 제 심정이 어땠겠어요? 안주 좋겠다, 술도 공짜로 마음껏 제공되겠다... 그 좋은 자리에서 안주만 집어먹어야 하는 이 술꾼의 심정은 그야말로 술 마시고 난 다음날보다도 더 속이 쓰렸습니다. 우린 매일 만나다시피 했어요. 그러면서도 알코올이 그리워지더군요. 어쩌다가 그 사람이 약속이 생겨 못 만나는 날에는 친구들을 불러내서 술을 마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지방으로 며칠 출장을 가시게 되었는데 이 철없는 딸이 이 좋은 기회를 어찌 그냥 넘기랴... 그 사람에게 전화를 먼저 걸었습니다. "저 오늘은 아파서 못 만나겠어요. 으실으실 추운 게 집에 가서 좀 쉬면 나으려나 어떡하지요?" 물론 그 사람은 당연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집에서 쉬라고 했고,전 속으로 쾌재를 불렀죠. '아흐!!! 술이 나를 부른다.'그리고 집엔 전화를 해서 동생에게 당부를 했지요. "만약에 그 사람한테 전화 오면 나 아파서 잔다고 그래 알았지?" '이 정도면 뭐 완벽하지' 속으로 자만하면서 제 술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나 "아 마셔,마셔.부어라 마셔라, 원샷! 원샷!"이러면서 알코올에 흠뻑 취해 집에 돌아와서는 화장도 지우지 못한 채 옷도 그냥 입고 쓰러져 잤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엄마는 저를 아주 섬뜩할 정도로 흘겨보시는 거예요. 어제 술을 많이 마시고 들어와서 화가 나셨나보다 했는데 동생이 그러더군요. 그 사람이 집에 전화를 했었다구요. 동생은 시키는 대로 아파서 잔다고 했는데, 늦은 밤에 도저히 걱정이 된다며 과일을 사가지고 집으로 찾아왔다는 거예요. 사색이 된 엄마는 아파서 자는데 그냥 과일이나 먹고 가라는 만류에도 "아니, 얼마나 아프기에 그럽니까. 병원에 가봐야 하지 않을까요?" 하면서 방에 들어섰답니다. 그 방안에는 지우지도 않아 번져 있는 화장에 대자로 뻗어 있는 무방비상태의 몸, 입을 있는 대로 벌리고 숨을 헉헉거리며 자고 있는 그 모습을 보고는 그래도 믿어지지 않는 듯 다가와 냄새를 킁킁 맡더니 잠깐 긴장하는 듯 움찔 하더래요. 그러더니 늦었으니 간다면서 획 가버렸답니다. 세상에 어찌 이런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 동안 그 좋은 술 다 마다하고 그렇게 공들여 탑을 쌓았건만 한번의 실수로 저는 이쯤 되니 이판 사판 공사판의 뻔뻔함으로 밀어 붙이기로 하고 전화를 했습니다. "어제 왔었다면서요?" "선화씨, 이럴 수가 있습니까? 술은 입에도 못댄다고 하더니 술에 곯아떨어져요? 게다가 나를 속이고 술을 마셔요?" 어쩌구저쩌구 일장연설을 하더라구요. 하지만 다행히도 헤어지자는 말은 안했습니다. 그저 술 마시는 거 좀 자제하고 이제부터는 모든걸 솔직히 얘기하기로 약속을 했지요. 하지만 그 후부터는 친구들과 모임중에는 꼭 호출기가 몇번은 울려댑니다. 첫 번째 통화에는 "저 한잔도 안 마셨어요." 두 번째 통화에는 "딱 한 잔 마셨어요. 일찍 갈 거예요." 세 번째 통화에는 "딱 두 잔 마셨어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네네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호출이 와도 전 전화를 못합니다. 너무 즐겁거든요. "야야 마셔 마셔, 내가 뭐 무서워서 못마시냐 마시자 마셔. 아줌마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이놈의 술 때문에 참 많이도 싸웠습니다. 정말 술과의 전쟁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술 마신 다음날 해장국을 사주며 걱정해 주고 조금씩 이해해 줍니다. 그리고 저 또한 술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구요. 소주 한 병만 마시기로요. 우리의 사랑은 술로도 깨어질 수가 없었거든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겠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술만큼 친하게 엮어주는 게 또 어딨겠습니까? 그 대신에 가족과 주변에 결코 피해는 주지 말야야겠지요. 폭주가 여러분! 술은 마시되 다른 애주가가 욕먹지 않도록 조심해서 마십시다. 술과의 전쟁이란 얘기가 요즘 많이 들리는데 그 얘길 듣고 기세등등하게 웃고 있을 한 남자 얼굴이 그려집니다.
Board 삶 속 글 2023.04.17 風文 R 805
선시어외(先始於嵬) 先:먼저 선. 始:비로소 시. 於:어조사 어(…에,…에서,…보다). ?:높을 외. [출전]《戰國策》〈燕策 昭王〉 ‘먼저 외(?)부터 시작하라’는 뜻으로, 가까이 있는 나(너)부터 또는 말한 사람(제안자)부터 시작하라는 말. 전국 시대, 연(燕)나라가 영토의 태반을 제(齊)나라에 빼앗기고 있을 때의 일이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즉위한 소왕(昭王)은 어느 날, 재상 곽외에게 실지(失地) 회복에 필요한 인재를 모으는 방법을 물었다. 곽외는 이렇게 대답했다. “신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사옵니다. 옛날에 어느 왕이 천금(千金)을 가지고 천리마를 구하려 했으나 3년이 지나도 얻지 못했나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잡일을 맡아보는 신하가 천리마를 구해 오겠다고 자청하므로 왕은 그에게 천금을 주고 그 일을 맡겼나이다. 그는 석 달 뒤에 천리마가 있는 곳을 알고 달려갔으나 애석하게도 그 말은 그가 도착하기 몇 일 전에 죽었다고 하옵니다. 그런데 그가 그 ‘죽은 말의 뼈를 오백 금(五百金)이나 주고 사 오자[賈死馬骨]’ 왕은 진노하여 ‘과인이 원하는 것은 산 천리마야. 누가 죽은 말뼈에 오백 금을 버리라고 했느냐’며 크게 꾸짖었나이다. 그러자 그는 ‘이제 세상 사람들이 천리마라면 그 뼈조차 거금으로 산다는 것을 안 만큼 머지 않아 반드시 천리마를 끌고 올 것’이라고 말했나이다. 과연 그 말대로 1년이 안 되어 천리마가 세 필이나 모였다고 하옵니다. 하오니 전하께오서 진정으로 현재(賢才)를 구하신다면 ‘먼저 신 외부터[先始於?]’ 스승의 예를 받도록 하오소서. 그러면 외 같은 자도 저렇듯 후대를 받는다며 신보다 어진 이가 천리 길도 멀다 않고 스스로 모여들 것이옵니다.” 소왕은 곽외의 말을 옳게 여겨 그를 위해 황금대(黃金臺)라는 궁전을 짓고 스승으로 예우했다. 이 일이 제국(諸國)에 알려지자 천하의 현재가 다투어 연나라로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는 조(趙)나라의 명장 악의(樂毅)를 비롯하여 음양설(陰陽說)의 비조(鼻祖)인 추연(鄒衍), 대정치가인 극신(劇辛)과 같은 큰 인물도 있었다. 이들의 보필을 받은 소왕은 드디어 제국(諸國)의 군사와 함께 제나라를 쳐부수고 숙원을 풀었다. [주] 매사마골 : 쓸데없는 것을 사서 요긴한 것이 오기를 기다린다. 쓸데없는 것이라도 소중히 다루면 현인은 그에 끌려 자연히 모여든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
Board 고사성어 2023.04.17 風文 R 750
멋지다 연진아, 멋지다 루카셴코 “파이팅, 박연진. 브라보. 멋지다, 연진아.” 끔찍한 학교폭력의 피해자 동은(송혜교)은 ‘자랑스러운 동문상’을 받는 가해자에게 손뼉 치며 찬사를 보낸다. 그게 칭찬일 리 없지. 복수를 알리는 선언이다. 말을 포함해 모든 기호는 그 자체로는 아무 뜻도 갖지 못한다. 그걸 보고 듣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뭔가가 격발될 때 비로소 기호로서 의미를 갖는다. 상황과 맥락에 따라 열광과 환호,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도 조롱과 비꼼으로 읽힌다. 러시아 옆에 벨라루스라는 나라가 있다. ‘유럽의 마지막 독재자’로 불리는 대통령 루카셴코는 소련 해체 뒤 1994년부터 집권해 지금까지 무려 30년을 철권통치 중이다. 2011년에도 당국의 삼엄한 감시 때문에 반정부 구호를 외칠 수도, 시위대를 조직할 수도 없었다. 그때 누군가 기발한 생각을 한다. ‘박수치기’. 시민들은 광장을 서성거리다가 순식간에 모여 박수를 쳤다. ‘멋지다, 루카셴코!’ 그러곤 다시 침묵. 당국은 박수치는 걸 전면 금지했다. 사복경찰은 박수치는 사람이면 누구든 체포했다. 그중엔 팔이 하나밖에 없는 사람도 있었다. 독재자 루카셴코의 지지자들조차 그를 성원하기 위해 박수를 치려다가 움찔하며 못 치게 됐다는 소문도 들렸다. 모스크바 크렘린궁 부근에서 한 남성이 행인들에게 전단을 나눠줬다. 경찰이 그를 체포한 뒤 압수한 전단을 보니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백지였다. 뭐가 잘못됐는지 다 아는데 굳이 따로 뭘 적을 필요가 있겠냐는 거였다. 종잡을 수 없이 돋아나는 부지깽이를 봐서 그런지 저런 얘기들이 자꾸 떠오른다. 조롱하는 기호.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셋 - 사랑으로 풀어내는 웃음보따리 어머니, 왜 날 낳으셨나요? 95년 3월 4일, 제게 있어 이날은 여러 가지로 기억에 남는(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입니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 보름만에 결혼 약속을 한 후 바로 양가 부모님 상견례 자리를 친정집에서 마련했었답니다 그이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며느리 될 사람의 집안 분위기도 보시고 정성껏 차린 음식을 그의 부모님께 대접하고 싶은 저의 생각 때문이었죠. 양가 보모님이 만나시는 날, 축복이라도 하는 듯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고, 봄의 문턱에서 탐스러운 눈이라니 얼마나 반가운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집에서의 첫만남은 생각외로 좋은 시간이었지요. 술잔이 몇 순배 오가자 당사자들 보다도 어른들께서 더 흐믓해 하시며 서로가까이 지내자며 우리들의 화제는 오간데없이 사라져버렸지요. 마당에서 양가 어머님을 교차로 세우시고 기념촬영도 했지요. 시아버님 옆에 친정어머니, 시어머님 옆에 친정아버지, 외국 대통령들이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첫만남은 부드럽게 이어졌고, 기분이 최상인 저는 생낙지랑, 소고기 육회랑, 거북할 정도로 많이 먹었죠. 일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답니다. 서울로 올라오는 고속버스에서 우리는 두 손을 꼭 잡고 미래의 희망만을 떠올렸어요. 그는 저에게 정말 고맙다고 말을 아끼지 않았고, 양가 어르신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친구처럼 헤어졌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더없이 행복했죠. 이런 우리의 행복을 싣고 차는 계속 서울로 전진하고 있었죠. 그런데 대전을 지나자 눈이 녹아 미끄러워서인지 차가 많이 정체되었죠. 차가 정체되면 될수록 우리는 더욱 손을 꼬옥 잡고 미소를 주고 받으며 사랑을 확인했답니다. 그런데 죽암휴게소 부근에 왔을 때, 갑자기 배가 꼬이기 시작했어요. 부글부글 끓다가 우글우글 꼬이다가..., 정말이지 정신이 없었죠. 낙지랑 소고기랑 치고받고 싸우는지... 그이를 만난지 얼마되지 않은탓도 있었지만 항상 고상(때론 고고)하게 행동했던 저였기에 그이 앞에서 원초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죠. 하지만 생리적인 현상을 어찌하겠습니까. 드디어 서울 근처에서 야단이 나고 말았답니다. 참으려고 몸을 비틀어대고 힘을 주고 아랫배에 힘을 모아 놓고 하느님, 알라신이시여,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들이시여, 제발 이 위기에서 구해주소서! 발악에 가까운 기도를 계속했지만, 뱃속에서 천둥소리가 나더니 곧바로 줄줄 흘러나오려는 게 아닙니까. 저는 더 큰 망신 당하기 전에 용기를 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말했죠. "자기야, 자기야 좀 일어나봐. 운전수 아저씨한테 가서 차 좀 세워 달라고 해. 더는 못 참겠어. 빨리!" 잠들었던 그는 화들짝 놀라 일어나서 운전석으로 가더니 다시 돌아왔어요. "지금 차가 1차선에 있어서 세울 수가 없대. 서울 거의 다 왔으니까 조금난 참아." 그는 제 손을 꼭 쥐어주며 안타까워했어요. 그러나 제 온뭄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혔고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었어요. "차 좀 세워달라고 하란 말야, 빨리!" 저는 악을 써대기 시작했죠. 밤이라서 잠들었던 다른 손님들이 뒤척이며 눈을 뜨기 시작했어요. 초조해진 저는 오만상을 찌푸렸고, 그이는 운전석과 제 사이을 오가며 어쩔 줄을 몰라했어요. 그러다가 더는 이대로 의자에 앉아 있다가는 일낼 것 같아 바닥에 주저앉은 저를 보자, 그이는 신문지를 꺼내 주더군요. 아마 깔고 앉으라고 그런 모양이었어요. 그러나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저는 신문지를 딴 용도로 쓰고 말았죠. 그 신문지를 바닥에 깔고 전 그만... 전 그만... 저질러버리고 말았어요. 누군가의 표현대로 단숨에 예술의 경지에 오르고 만 것이었죠. 그런데 무슨 예술적 승화가 이리도 시원한지... 저의 의식은 오직 시원하게 제 볼일을 본 기쁨에만 빠져들었죠. 얼마나 시원하던지... '우주의 모든 신들이시여 감사하나이다. 이렇게도 후련할 수가...' 그러나 누가 또 그 말을 했던가.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고. 예술의 향기는 말없이 길고도 넓게 퍼져갔고, 사람들은 하나 둘 고개를 들기 시작했죠. 그제서야 오로지 창작에만 몰두했던 저는 제 인생을 저주하며 제 인생이 여기서 마감되기를 빌었답니다. 아니 시간이 영원히 정지하기를 빌고 또 빌었죠. 간절히...! 망연자실한 그이 앞에서 저의 고상하고 고고했던 자존심은 송두리째 뭉개지고 말았으니... '어머니! 왜 날 낳으셨나요...' 잠시후 버스는 터미널에 도착했고, 저는 고개 숙인 여자가 되어 신문지를 의자 아래에 숨긴 채 조용히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었죠. 신문지 뭉치를 들고 맨 나중에 내릴 땐 거의 전 청문회 입장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쪽팔림도 잠시, 전 또 다시 '예술의 전당'으로 달려가야 했습니다. 겨우 수습을 하고 거울 앞에 서니 제 모습이 가관이더군요. 밖에 나오니 그이가 세상에서 가정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는 제 손을 잡더니 괜찮냐고 몇 번이나 물었고, 그리고는 제 손에 뭔가를 쥐어주며, '예술의 전당'에 한 번 더 가라는 거예요. 어디서 구했는지 정말 자상하기도 하지. 엄청난 감동의 물결이 가슴에서 철렁였죠. 하지만 팬티는 아줌마들이 입는 대자에 웬 자석까지 달린 자석팬티였죠. 그러나 제가 이것저것 가릴 형편입니까. 일단은 갈아입고 나갔죠. 그가 씨익 웃더군요. 저도 따라 부끄럽게 웃었죠. 다음날 그가 전화로 심각하게 말하더군요. "많이 생각해 봤는데 아직까지 일을 가리지 못하는 여자를 어떻게 데리고 사냐? 결혼은 없었던 걸로 하고, 양가 부모님께는 내가 잘 말씀 드리겠다." "..." 저는 아무 말도 알 수 없었고, 남편은 다시 말을 이었어요. "꼭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야. 결혼 후 남편을 하늘처럼 받들고 말 잘 들으면 입을 꼭 다물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비빌을 지키기가 어려울 것이야." "네. 그렇게 할게요." 몇 번을 약속하고 그해 겨울 결혼식을 올렸지요. 그리고 그는 결혼 이후로 잊을만 하면 한 번씩 상기시켜 주더군요. "고속버스 생각나." 해놓고 킥킥댄답니다. 그러면 저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 소리만 해봐라. 그때는 이혼이야. 알았어." 하고 으름장을 놓지만 그는 연신 히죽히죽 웃으며 한술 더 떠서 말 한답니다. "장인 어른께 전화나 할까. 당신 딸 데려가라고." '내 인생이 우째 이리 됐나. 아들만 낳아봐라. 그때는 그렇게도 안될걸. 어디 두고 보자.' 이렇게 속으로 별렀지만, 결국 신도 남자였더라구요. 저는 저를 쏙 빼닮은 딸을 낳았답니다. 결국 남편의 앞날은 무궁무진하게도 딱 트여 있고, 저의 앞날에는 어두운 터널만이 가득하게 되었죠. 우째 이런 일이...! 신이시여! 이 어린양을 불쌍히 여기시고 튼든한 아들 한 놈 보내주시어 수렁에서 저를 구원해 주소서 아멘!
Board 삶 속 글 2023.04.14 風文 R 7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