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成蹊) 成:이룰 성. 蹊:지름길(샛길) 혜. [원말] 도리불언 하자성혜(桃李不言下自成蹊). [출전]《史記》〈李將軍列傳〉 샛길이 생긴다는 뜻. 곧 덕(德)이 높은 사람은 자기 선전을 하지 않아도 자연히 사람들이 흠모하여 모여듦의 비유. 전한 6대 황제인 경제(景帝:B.C. 157~141)때 이광(李廣)이라는 명장이 있었다. 당시는 북방 흉노족(匈奴簇)과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때인 만큼 이광의 무용담(武勇談)도 자연히 흉노족과의 전쟁과 결부된 이야기가 많은데 이 이야기도 그중 하나이다. 어느 날, 이광은 불과 100여 기(騎)를 이끌고 적 후방 깊숙이 쳐들어가 목적한 기습 공격에 성공했다. 그러나 곧 적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정면 돌파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이광은 부하 장병들에게 이렇게 명했다. “침착하라. 그리고 말에서 내려 안장을 풀어라.” 적은 깜짝 놀랐다. 그 행동이 너무나 대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표를 찔린 적은 필연 뭔가 계략이 숨겨져 있을 것으로 믿고 주춤했다. 이때 이광은 10여 기를 이끌고 질풍처럼 적진에 돌입하여 한칼에 적장을 베었다. 그러자 적은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달아났다. 이리하여 이광은 한 사람의 병사도 잃지 않고 개선했다. 그 후에도 많은 무공을 세운 이광을 칭송하여 사마천(司馬遷)은 그의 저서《사기(史記)》〈이장군 열전(李將軍列傳)〉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장군은 언변은 좋지 않았으나 그 덕과 성실함은 천하에 알려져 있었다. 복숭아와 오얏 꽃은 아무 말 하지 않아도[桃李不言:덕 있는 사람의 비유] 그 아름다움에 끌려 사람들이 모여들므로 ‘나무 밑에는 자연히 샛길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下自成蹊].’”
Board 고사성어 2023.04.19 風文 R 1209
내연녀와 동거인 가끔 연락하는 <한겨레> 기자가 있다. 말을 주제로 기자끼리 토론이 붙나 보더라. 말에 대한 감각이 천차만별이니 토론이 자못 뜨거워 보였다. ‘기자들이 말에 대한 고민이 많군’ 하며 즐거워한다. ‘내기’ 를 거는지는 모르지만, 급기야 생각 없이 사는 나한테까지 질문을 한다. 내 대답은 늘 ‘어정쩡’ 하다. ‘이렇게 볼 수도, 저렇게 볼 수도 있지 않겠소이까?’ 며칠 전엔 아트센터나비 관장 노소영씨가 티앤씨(T&C)재단 이사장 김희영씨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김씨를 에스케이(SK) 회장 최태원씨의 ‘내연녀’ 라 할지 ‘혼외 동거인’ 이라 할지로 논쟁이란다. 상식적(?) 으로 보면, ‘내연녀 / 내연남’은 개인의 사생활을 매도하고 편견을 조장하는 말이니 ‘혼외 동거인’ 이라 쓰는 게 맞다고 할 것이다. 흥미롭게도 연락해온 기자는 노소영씨 입장에 주목했다. 노씨가 소송을 한 데에는 두 사람의 내연 관계에서 받은 정신적 상처가 영향을 끼쳤을 텐데, 김씨에게 ‘혼외 동거인’(‘동거녀’ 도 아닌) 이란 중립적인 표현을 쓰는 게 온당한가? 은밀함, 비도덕성, 부적절함 같은 말맛이 풍기는 ‘내연녀’ 란 말을 써야 ‘본처’의 분노를 조금이나마 담을 수 있지 않겠냐는 마음일 듯. 이렇게 볼 수도, 저렇게 볼 수도 있겠다. 나는 다른 데에 눈길이 갔다. ‘내연녀’ 와 ‘혼외 동거인’ 사이에서 새삼 고민하게 된 계기가 뭘까 하는 것. 유사 이래로 혼외 연애 범죄는 끊임이 없었다. 그걸 다룬 기사는 한결같이 ‘내연녀 / 내연남 고소 / 협박 / 폭행 / 살해’ 였다. 그렇다면 혹시 고결한 재벌가의 연애사를 다루다 보니 비로소 번민이 시작된 건 아닐까.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Board 말글 2023.04.19 風文 R 2768
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그리스 신화와 영웅들) - 사진 자료 및 참고 자료는 제가 편집해 올린 것입니다. 1. 그리스 나라의 개요 고대문명 문화와 문명이라는 말은 흔히 같은 뜻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두 낱말을 대비시켜 비교적 물질기술에 의존하는 인간사회의 편리를 위한 발전적 소산은 문명(Civilization)이라 하고, 이에 반하여 인간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활동으로 정신에 의존하는 바 큰 성과를 문화(Culture)라 하는 견해가 있다. 구체적으로 문화는 예술.도덕.종교.학문 등 인간의 내적 정서 활동의 소산을 가리키고, 주로 언어와 얽혀 있다. 문명은 문자 그대로 도시를 만들어 시민생활을 한다는 말이다. 19세기에서 20세기의 독일 문화철학에서는 문명에 대비하는 문화상위론을 주장하였다. 다시 말하여 인간의 독창적인 정신 소산을 문화라 하며, 현실적 인간 생활 영위에 요구되는 합리적 수단을 문명이라 본 것이다. 이와는 달리 인류발달사에 있어서는 야만, 미개에 이어지는 단계를 문명이라 일컫고 있다. 그리스에는 구석기시대에도 주민이 있어 문명을 지닌 흔적이 있고 신석기인은 어디서 왔는지 잘 모르나 기원전 3000년 청동기시대에 들어가 2000년간 융성한 에게 세계를 이루다가 쇠퇴하였다. 그리스의 초기 문화와 문명은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 후반까지 이뤄진 크레타를 중심으로 한 미노아 문명(기원전 2200~1400)이다. 그리스 본토 문명(기원전 1600~1200)과 구분되는 키클라데스 문명도 특징적이다. 이 문명은 기원전 3000년경의 빛나는 유물, 예컨대 옥제품이나 대리석 조각상, 항아리 등의 발굴로 입증되었으며 미노아 문명이나 헬라스(미케네) 문명과는 다른 특징과 개성을 가지고 있다. 미노아 문명의 절정기(기원전 1600~1400)에 이르러 상류사회는 매우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궁전과 정원, 대리석 층계로 이은 웅장한 고층건물, 발달된 위생시설을 갖춘 거실, 침실, 광 등을 미로형으로 배치하였다. 상쾌한 채색벽화는 이 시대 사람의 모습과 습관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발굴자 에반스는 멋들어진 한 여인의 프레스코 초상회에 '파리의 여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궁전, 가옥 및 무덤에서 출토된 수많은 귀중품, 생활용품, 상아조각상, 광택 있는 홍색 고급토기, 정교한 금동제 기물들, 석각인, 반지 등은 그들이 누린 문화가 얼마나 찬란하였는가를 뒷받침한다. 부유하고 쾌활한 심성을 가진 사람들은 오락으로서 장기나 황소 뛰어넘기 같은 운동경기를 즐겼으며 왕과 여러 신, 특히 뱀여신을 숭배하였다. 이들은 동방의 이집트, 아시리아 등과의 교역과 접촉으로 해외문명을 받아들이고 이를 다시 독자적인 문화로 발전시켰다. 이집트의 기념비적 문명과는 달리 식물과 동물 등 자연을 주제로 장식적 예술을 창안하였으며 그 문화는 인근의 섬들과 그리스 본토로 전파되었다. 테라(산토리니) 섬 유적, 특히 아크로티리 도시의 출토물은 크레타 유적과 맞물려 플라톤의 대화편(기원전 4세기)에 나오는 아틀란티스의 실체라고 추리하는 견해도 거듭 나오고 있다. 한편 청동기시대 초반, 크레타와 주변 섬에 관련이 있는 인종과 소아시아인들이 그리스 본토로 침투 혹은 침입하였다. 청동기시대 중반 기원전 2000년 직후에 그리스 본토는 두 차례의 침입을 받게 되는데, 현재 그리스인의 선조가 되었다고 생각되는 북방 코카서스의 아리안 인도족이 들어와 점차 융화되었다. 초기 그리스인은 에게인의 주류를 형성하고, 크노스스에 나라를 건설한 후 점차 섬을 넘어 그리스 본토, 소아시아, 시리아, 팔레스타인 및 이집트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고, 서방으로는 리파리 제도, 이스키아, 남부 이탈리아로 뻗어나가 기원전 8~7세기 그리스 식민도시를 크게 확산시켰다. 본토인은 크레타의 성숙한 미노아 문명의 영향을 받아 점차 개성적인 문화를 발전시키고 미로식 궁전은 성채로 변천하였다. 그러나 내부 장식벽화, 작은 조각품, 금속공예, 항아리 등은 크레타의 그것과 유사하며 흔히 미케네 문명으로 불린다. 시기적으로는 대략 기원전 1600~1100년 사이에 해당하는 이 문명의 후반기인 기원전 1400~1100년은 그리스의 영웅시대라 하며 아가멤논 왕의 세력권 아래 있던 미케네는 연합군을 편성하여 트로이 전쟁을 감행하였다. 트로이가 함락되고 얼마 되지 않은 청동기 말기에 미케네족은 멸망하고 많은 도시가 파괴 소각되었다. 멸망의 일부 원인은 먼 혈연의 도리스인이 일리리아인의 대이동에 밀려 침입하였기 때문인데, 결과적으로는 북방에서 새로운 그리스족이 내려오게 되었다. 이것을 헤라클레스 후예의 귀환이라 부르는데, 이들이 갑자기 토착문화를 덮치면서 문화 수준이 하락하고 건축, 항아리 모양등이 완연히 달라졌다. ****************************************************************************** 트로이아 전쟁(참고자료) [〈불타는 트로이〉, Johann Georg Trautmann의 18세기 유화 ] 그리스측 주장 이 전쟁의 유래는 ‘퀴프리아’에 상세하게 나와 있다. 제우스는 너무 증가한 인구를 조절하기 위해 질서의 여신 테미스와 머리를 맞대었고, 결국 큰 전쟁을 일으켜 인류의 거의 대부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결의를 다졌다. 올림푸스에서는 인간의 아들 펠레우스와 티탄 족의 딸 테티스의 혼담이 오가고 있었다. 그러나 불화의 여신 에리스 만이 잔치에 초대받지 못하자 화가 난 그녀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바치라는 헤스페리데스의 황금 사과(불화의 사과)를 신들의 자리에 보냈다. 이 제물을 놓고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세 여신이 격렬한 대립이 벌였고 제우스는 이 사과가 누구에 적합한 지를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게 맡겼다. (파리스의 심판) 세 여신은 모두 가장 아름다운 옷차림을 하고 파리스 앞에 섰다. 헤라는 세계를 지배할 힘을, 아테나는 어떠한 전쟁도 승리를 할 수 있는 힘을, 아프로디테는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각각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파리스는 젊었기 때문에 부와 권력을 제쳐두고, 사랑을 선택하였고 아프로디테의 권유에 의해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의 왕비 헬레네를 빼앗아 갔다. 파리스의 여동생이자 트로이의 공주 카산드라 만이 이 사건이 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라고 예언했으나 아폴론의 저주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메넬라오스는 형인 뮤케나이의 왕 아가멤논에 그 사건을 말하였고, 또한 오디세우스와 함께 트로이로 가서 헬레네를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파리스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기 때문에, 아가멤논, 메넬라오스, 오디세우스는 헬레네 반환과 트로이를 징벌하기 위해 원정군을 조직했다. 이 전쟁으로 신들도 편이 갈라져 헤라, 아테나, 포세이돈이 그리스를 편들었고, 아폴론, 아르테미스, 아레스, 아프로디테가 트로이를 편들게 되었다. 페르시아측 주장 페르시아측에서는 전혀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는데 헤로도토스가 기록한 페르시아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 신화에서 지중해를 건너간 여성들은 사실 납치혼의 피해자들이었고 신화속 파리스가 헬레나를 트로이로 데려간 것도 그 납치혼의 보복이었다는 주장이다. 전설속의 여신 이오는 사실 포이니케 사람들이 헬라스의 아르고스에서 이오를 납치한 것에서 시작되었고 헬라스측도 이에 보복해 포이니케의 영토인 튀로스에서 공주 에우로페를 납치했다고 한다. 그 뒤 그리스인들이 메데이아 공주를 납치하는등 보복 납치혼으로 신경전을 일삼다가, 일리온(트로이)의 왕자 알렉산드로스(파리스)가 보복 목적으로 라케다이몬(스파르타)에서 헬레나를 납치했고 이것이 악화되어 전쟁으로 확대되었다는 주장이다. ****************************************************************************** 이 시대에 특기해야 할 유물은 크레타와 그리스 본토에서 출토된 서판이다. 크레타에는 초기 청동기시대에 그림표기가 있었으며, 중기에는 드물지만 상형문자가 나타나는데 말기에는 2획문자로 선문자 A(기원전 2000~1500)와 선문자 B(기원전 1500~1100)가 등장하였다. 크노소스에서 출토된 선문자 B는 1952년 벤트리스가 해독하는 데 성공하였다. 선문자는 초기 형태의 그리스 문자이다. 서판의 기록은 영구적 문서가 아니고 그때 그때에 기록해 둔 비망록 정도에 불과한데, 기원전 1400년경의 화재로 점토서판이 구워지는 바람에 후대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 그밖에 기원전 1200년경 불에 탄 본토 도시 퓰로스의 서판은 유일하게 글씨가 쓰여진 점토판으로 대량 출토되었다. 기원전 11세기부터 역사시대에 들어가기까지의 기간은 단지의 무늬에 연유하여 기하학기로 부르며 초기 철기시대에 해당된다. 이 무늬단지는 500년간의 암흑시대에 드물게 남겨진 유물이다. 기원전 8세기경 역사시대로 들어오면서 암흑시대에서 탈피하기 시작하였다. 페니키아에서 들어온 알파벳 문자가 보급되어 다시 예술, 철학, 서사시(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듀세이아)가 정착하여 고전문화가 가꾸어졌다. 각 도시마다 독자적인 화폐가 주조되고 나아가 자체적으로 달력을 갖게 되었다. 일단 외침을 받으면 국가 간에 동맹을 맺어 공동으로 대처하였으며, 올림파아 축제기간이나 질병 등의 극한 상황에서는 싸움을 중지하는 슬기로움을 발휘하였다. 열정적이고 전투적인 분립주의는 폴리스의 정치활동의 중요한 특성으로 나타났고, 빈약한 영토에서 발전된 정치제도는 앞서 존재한 그 어떤 것보다도 개방적이고 시민 개개인의 광범위한 참여를 요구하였다. 단 이러한 모든 시민(여자.어린이.노예는 제외)의 참여는 오직 소규모 정치단위들 속에서만 가능하였다. 이러한 문화는 특히 아테네와 그 주변지역에서 크게 융성하였고 기원전 5세기에 절정에 달하였다.) 그리스는 서구문명의 발상지이며, 서구의 지성사는 바로 이 그리스인과 더불어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앤드루스는 그의 저서 '고대 그리스사'의 권말에서 "대다수 그리스인들이 그들 문명의 독특한 장점이 자유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그 생각에 동의하길 주저할 까닭은 없으며 또 그 자유의 현상을 그리스인들이 의도하였던 정치영역에만 국한시킬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스는 우리가 같은 공기를 호흡할 수 있는 세계이다. 그 세계의 걸작품을 바라볼 때는 물론이고 일상적 사항을 볼 때조차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만큼 우리 세계와는 판이한 것이면서도, 그들을 움직였던 문제들이 오늘날의 문제와 대체로 같은 범주에 속한 것이라고 느낄 정도로 두 세계는 서로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에 대한 연구는 그저 기원을 알고자 하는 호고성 탐구에만 그칠 일이 아니다. 호메로스와 헤로도토스, 유리피데스와 플라톤은 우리를 경탄하게 하고, 나아가 현 세계에 대한 우리의 통찰력을 보다 예리하게 다듬어 줄 수 있는 힘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맺음말은 서구인의 의향이며 우리에게는 별 것 아닌 것 같으나 서구문화를 받아들인 지 이제 100년이 넘고 더구나 지나치게 빨리 돌아가는 현대화 물결에 휩싸여 온 지난 반세기를 돌아볼 때 지금의 우리에게도 적절하고 의미있는 충언으로 생각된다.
Board 추천글 2023.04.18 風文 R 1635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셋 - 사랑으로 풀어내는 웃음보따리 남자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오늘 이렇게 제가 틈틈이 기회를 엿보다가 쉬는 날 마음을 먹고 펜을 든 것은 도저히 저 혼자만의 비밀로 가슴에 간직하고 살기엔 너무도 가슴 시린 추억이 있어서 용기를 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의 일입니다. 당시 저는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유망한 중소기업에 잘 다니고 있던 성실한 청년이었습니다. 아무하고나 싸우지도 않고 누구와 섞여 있어도 눈에 띄거나 구별되진 않는 한마디로 말해서 몹시 내성적이지만 그래도 할일 다하는 착실한 직원이었지요. 이런 저의 취미는 바둑이었습니다. 집에 돌아가면 밤새도록 TV의 바둑해설을 보고 그것도 모자라서 비디오 바둑 테이프를 빌려다 보곤했습니다. 그런 저를 보고 주위사람들은 샌님이니 목사님이니 하고 놀렸지만 저는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걱정을 하시는 건 제 부모님들이셨습니다. 나이 30이 다 되도록 데이트는 커녕 집에 전화오는 여자 하나 없이 밤낮 바둑만 보고 어쩌다가 맞선을 보게 해도 나가서 퇴짜나 맞고 오질 않나 하니, 특히 어머니의 성화가 이만저만이 아니셨습니다. 그래 제 부모님들은 저 때문에 곧잘 다투기까지도 하셨답니다. "아이고, 재가 뭐가 되려고 저러는지. 내가 그래도 재를 가졌을 땐 태몽으로 용꿈을 꿨는데, 어찌 저리도 숫기가 없는 것이 꼭 미꾸라지 같냐." 하시는 어머니께 아버지께선 되레 어머니를 나무라시며 말하시는 겁니다. "꿈도 그리 못꾸나. 꿈을 꿀라카면 최소한 호랑이 꿈을 꿔야지. 우리 어머이가 나 볼 때 꾸신 꿈 말이다." 이렇듯 저를 사이에 두고 이유 아닌 이유로 속타하시던 부모님은 결국 제게 태권도를 강요하셨습니다. 저는 정말이지 내키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날 이때까지 체육시간에 결코 즐겨워서 공을 찬 적이 한번도 없었을 뿐더러 누구하고 싸우다가도 큰소리만 치면 움츠러드는 성격이기에 태권도는 꿈에도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두 분의 의지는 확고했습니다. "니는 태권도를 배워야 한다. 안 그라모 니 성격에 평생 여자 만나기는 틀렸다." 어머니는 마치 태권도만 배우면 여자를 만날 수 있다는 듯이 저를 도장으로 내몰았습니다. 다 큰 어른이 하얀띠를 매고(태권도는 흰띠부터 시작 노란띠 파랑띠 빨강띠 빨강반 검정반띠로 승격함) 태극 폼새를 배우자니 진땀 나고 창피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도장엔 정말로 무서운 사범님이 계셨는데, 그 분의 말 한마디에 저는 가끔씩 등골이 오싹해지곤 했습니다. "자, 뒷발차기 실시! 이야 압" 그 기합소리는 우렁차고도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여자 사범님이었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비극의 드라마는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제가 성격이 나약하고 숫기가 없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그녀는 저만 보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더 호되게 연습을 시키는 거였습니다. "앞차기가 그게 뭡니까? 자 앞차기 50회 실시!" 그러나 그녀는 그것도 모자라서 저를 앞으로 따로 불러내어서 앞차기를 해보라, 돌려차기를 해보라, 또 자세가 안 좋으니 토끼뜀을 뛴 다음에 해보라 하면서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이건 완전히 졸지에 군대에 다시 들어간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었고, 한 달쯤 지나자 드디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도장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녀는 우리집에 전화를 하기 시작하는 거였습니다. 왜 운동하러 안 나오냐? 언제 다시 할 거냐? 하고 묻더니, 저녁은 무얼 먹었느냐? 회사는 어디 근처냐? 하고 자기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까지 묻는 겁니다. 저는 또다른 공포에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녁에 바둑 좀 볼라치면 느닷없이 울리는 벨소리. "여보세요?" 그러면 바로 "예! 저예요, 왜 오늘도 안 나왔어요? 내일은 나올 거죠? 지금 뭐하세요? 오늘 석현씨 회사 근처 갔었어요. 다음에 다시 가면 전화할께요. 오늘은 제가 시간이 없었지 뭐예요." 하며 있는 수다 없는 수다를 다 떨었습니다. 저는 본래 시끄러운 것은 딱 질색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전화가 계속되자 견딜 수가 없어서 결단을 내고자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그녀가 "석현씨, 내일 시간 있죠? 제가 져녁때 회사 근처에서 전화할게요. 또 저번때처럼 싫다고 하시면 안돼요." 했을 때 저는 알았다고 하고 만나기로 결정했습니다. 다음날 저는 굳은 마음을 먹고 그녀 앞에 나갔습니다. 그녀는 먼저 나와 있었습니다. 제가 마음을 가다듬고 자리에 앉으려고 하자 그녀는 갑자기 제 손을 잡아 끌더니 어디 좀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저는 얼떨결에 그녀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왔습니다.그러더니 자신의 지프차에다 저를 태우고는 어디론가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어디 가느냐고 물었으나 아무런 대답도 없었습니다. 제가 다시 악을 쓰며 묻자 그녀는 무서운 눈초리로 저를 쳐다보더니 가보면 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때 정말 무서웠습니다. 이러다가 인신매매 당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왈칵 겁이 났고, 제가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실력을 가진 그녀가 귀신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한 40여 분 달려서 그녀가 차를 세운 것은 인천의 월미도였습니다. 저는 차에서 내려 그녀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때 무슨 결심을 한 듯 그녀는 저에게 물었습니다. "석현씨! 석현씨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니 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란 말입니까? 저는 놀라서 되물었죠. "아니 어떻게 생각하다니요?" "아니 참 저를 여자로서 어떻게 생각하냐니까요?" 저는 말을 못하고 머뭇거렸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물었습니다. "왜요? 제가 마음에 안 드시나요? 그렇다면 태권도장에서 제가 제 마음을 표현한 것도 모르셨어요?" 그러면서 또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저는 제 방식대로 마음을 표현해요." 그녀의 말에 저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제 기억엔 그녀에게 기합받고 맞고 벌 선 것밖에 없었습니다. 이어 그녀는 또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저는 석현씨가 마음에 들어요. 석현씨처럼 순수하고 착한 사람은 처음 봤어요. 이제부터 저랑 데이트하지 않으실래요?" 그녀는 약간은 수줍은 얼굴로 그렇게 말을 했지만 제겐 마른 하늘의 날벼락도 그런 날벼락이 없었습니다. 저는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웃으며 말했지요. "에이 농담하지 마세요. 제가 어떻게 지영씨랑 사귀어요. 참 내." 그러나 바로 그때 엄청나고도 가공할 만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뭐욧!"하고 째지는 음성과 함께 "방금 제 말을 무시한다는 뜻인가요? 저는 자존심 상하고는 못살아요." 하며 그녀는 갑자기 태권도 대련 자세를 취하는 겁니다. "자, 어서 저에게 사과하세요. 그리고 앞으로 사귈 거예요, 말 거예요. 석현씨가 만일 저를 이긴다면 제가 다시는 전화 안할게요. 하지만 석현씨가 진다면 제 뜻대로 할 거예요." 그러며 그녀는 준비도 안된 제 앞에서 몸을 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주위에는 놀러나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챈 그들은 슬슬 우리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아 왜 이러세요? 사람들이 보잖아요. 이제 그만 갑시..." 아니 그런데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갑자기 그녀의 앞차기가 저의 턱에 정면으로 일격을 가했습니다. 저는 "억!" 하면서 턱을 잡았습니다. 그 다음 그녀는 옆차기로 저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강타했습니다. 이종환, 최유라씨! 여자에게 맞는 남자의 심정을 아십니까? 그때 저는 맞은 데가 아프고 쑤셔서 눈물이 핑 돌았고, 이런 저의 모습을 보고 하늘의 갈매기도 끼룩끼룩 울었습니다. 저는 그만 하자고 손짓하면서 차 있는 데로 어기적어기적 가려는데, 이번에는 그녀가 돌려차기로 무자비하게 저의 여린 가슴을 짓이겼습니다. 저는 월미도 앞바다를 보면서 큰 대자로 길게 누워버렸고, 제 귀에는 이런 말들이 들려오더군요. "어머, 여기 영화찍는다." "와! 정말 실감나네." "그런데 카메라는 어디 있어?" "야, 요즘에는 몰래 카메라 있잖아" "뭐? 그럼 우리도 나오는 거야?" "그래 그러니까 웃어" 그때 그녀가 저에게 와서 손을 뻗어 일으켜 주었습니다. "자, 차로 가요. 이 길 좀 터주세요." 그녀는 저를 차로 데리고 갔습니다. 저는 턱이 아프고 옆구리가 결리고 가슴이 뻐근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저를 그녀는 집까지 태워다주면서 "사과 받은 것으로 할게요. 그럼 내일 만나요." 하고는 사라졌습니다. 방으로 들어온 저를 보고 집에선 난리가 났지만 저는 차마 곧이곧대로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모님께 어떻게 사실을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다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인천 앞바다에서 여자에게 개 맞듯이 맞았다고. 저는 분노와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잡자리에 들었고, 그날 사나이 가슴엔 비가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종환,최유라씨! 사람의 마음은 왜 그렇게 간사한 걸까요? 만나면 만날수록 그녀가 조금씩 좋아지는 겁니다. 한 번 만나니 좋아지고, 두 번 만나니 정이 들어서 지금은 이렇게 같은 베개를 베고 잠을 잔답니다.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2년 전의 그 일만은 지금도 가끔 꿈에 나타나서 저를 괴롭힙니다. 그래서 이렇게 '지금은 라디오 시대'에 툭 털어놓고 싶어 못쓰는 글이나마 적어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남자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이것이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할말 다하고 나니 마음이 후련합니다.
Board 삶 속 글 2023.04.18 風文 R 687
선즉제인(先則制人) 先:먼저 선. 則:곧 즉(…그러면), 법 칙. 制:억제할 제. 人:사람 인. [대응어]~후즉위인소제(後則爲人所制). [유사어] 진승오광(陳勝吳廣). [출전]《史記》〈項羽本記〉,《漢書》〈項籍專〉 선손을 쓰면(선수를 치면) 남을 제압할 수 있다는 뜻. 진(秦)나라 2세 황제 원년(元年:B.C. 209)의 일이다. 진시황(秦始皇) 이래 계속되는 폭정에 항거하여 대택향[大澤鄕:안휘성 기현(安徽省)]에서 900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궐기한 날품팔이꾼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은 단숨에 기현을 석권하고 진[秦:하남성 회양(河南省淮陽)]에 입성했다. 이어 이곳에 장초(張楚)라는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오른 진승은 옛 6개국의 귀족들과 그 밖의 반진(反秦) 세력을 규합하여 진나라의 도읍 함양(咸陽)을 향해 진격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강동(江東)의 회계군수(會稽君守) 은통(殷通)은 군도(郡都) 오중[吳中:강소성 오현(江蘇省吳縣)]의 유력자인 항량(項梁)을 불러 거병을 의논했다. 항량은 진나라 군사에게 패사(敗死)한 옛 초(楚)나라 명장이었던 항연(項燕)의 아들인데, 고향에서 살인을 하고 조카인 적[籍:항우(項羽)의 이름]과 함께 오중으로 도망온 뒤 타고난 통솔력을 십분 발휘하여 곧 오중의 실력자가 된 젊은이다. “지금 강서(江西:안휘성.하남성) 지방에서는 모두들 진나라에 반기를 들었는데, 이는 하늘이 진나라를 멸망코자 하는 시운(時運)이 되었기 때문이오, 내가 듣건대 ‘선손을 쓰면 남을 제압할 수 있고[先則制人]’ 뒤지면 남에게 제압당한다고[後則人制] 했소. 그래서 나는 그대와 환초를 장군으로 삼아 군사를 일으킬까 하오.” 은통은 오중의 실력자일 뿐 아니라 병법에도 조예가 깊은 항량을 이용, 출세의 실마리를 잡아볼 속셈이었으나 항량은 그보다 한 수 위였다. “거병하려면 우선 환초부터 찾아야 하는데, 그의 행방을 알고 있는 자는 오직 제 조카인 적뿐입니다. 그러니 지금 밖에 와 있는 그에게 환초를 불러오라고 하명하시지요.” “그럽시다. 그럼, 그를 들라 하시오.” 항량은 뜰 아래에 대기하고 있는 항우에게 다가가 귀엣말로 이렇게 일렀다. “내가 눈짓을 하거든 지체 없이 은통의 목을 치도록 하라.” 항우를 데리고 방에 들어온 항량은 항우가 은통에게 인사를 마치고 자기를 쳐다보는 순간 눈짓을 했다. 항우는 칼을 빼자마자 비호같이 달려들어 은통의 목을 쳤다. 항량과 항우가 은통에 앞서 ‘선즉제인’을 몸소 실행한 것이다. 항량은 곧바로 관아를 점거한 뒤 스스로 회계 군수가 되어 8000여 군사를 이끌고 함양으로 진격하던 중 전사하고 말앆다. 뒤이어 회계군의 총수가 된 항우는 훗날 한왕조(漢王朝)를 이룩한 유방(劉邦)과 더불어 진니라를 멸망시켰다(B.C. 206). 그러나 그후 유방과 5년간에 걸쳐 천하의 패권을 다투다가 패하여 자결하고 말았다(B.C. 202).
Board 고사성어 2023.04.18 風文 R 1021
1.25배속 듣기에 사라진 것들 나는 말이 하염없이 느리다. 사이버대학에 올린 내 강의 동영상을 보다가 곧장 게시판에 항복 문서를 올렸다. ‘가만히 듣다 보면 어느새 졸음이 밀려옵디다. 재생 속도를 1.25배로 하니, 졸음이 조금 늦게 오시더군요.’ ‘보통’ 속도로 보는 건 손해다. 1.25배속으로 봐도 ‘줄거리 파악’에 아무 어려움이 없다. 출연자의 목소리가 가늘어지고 신경질적으로 들리긴 하지만, 바쁜 시간을 알뜰하게 아껴 쓴다는 실용주의자의 자부심을 심어준다. 여기에 맛을 들이면서 영상예술에 대한 감각이 변질되더군. 내용과 형식이 분리될 수 있으며, 형식보다는 내용이 더 중요하다는 착각 말이다. 속도를 높일수록 우리 귀는 내용(메시지)만을 쫓는다. 조각난 작품을 읽고 재빨리 주제를 파악하는 걸로 국어 실력을 가늠하는 것처럼, 줄거리만 간추리면 영상을 다 본 것. 목소리나 말의 속도, 음색 같은 건 선물을 싼 포장지일 뿐. 우리는 줄거리, 핵심 내용, 주제를 뽑기 위해 영상을 보는 게 아니다. 작품 자체가 갖는 고유한 물질성, 질감, 현장성 같은 것에 녹아 들려고 본다. 우리가 예술에 다가가는 이유는 그 속에 낱낱의 고유한 삶의 형식들이 제시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느리고 어눌하고, 어떤 생각이 다른 생각을 간섭하고 뒤엉키는 그 머뭇거림의 형식 자체에 마음이 격동되기를 바라며. 형식에 대한 무시는 예술을 메마르게 한다. 말은 단어와 단어 사이에 있는 허공과도 같은 빈틈과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속도를 늘릴수록 우리는 말해지지 않은 것, 표현되지 않은 것이야말로 예술의 본질에 더 근접해 있다는 걸 망각하게 된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Board 말글 2023.04.18 風文 R 3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