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님의 8가지 명언] 말 말을 많이 하면 필요 없는 말이 나온다. 양 귀로 많이 들으며, 입은 세번 생각하고 열라. 책 수입의 1%를 책을 사는 데 투자하라. 옷이 헤어지면 입을 수 없어 버리지만 책은 시간이 지나도 위대한 진가를 품고 있다. 노점상 노점상에서 물건을 살 때 깍지 말라. 그냥 돈을 주면 나태함을 키우지만 부르는 대로 주고 사면 희망과 건강을 선물하는 것이다. 웃음 웃는 연습을 생활화 하라. 웃음은 만병의 예방약이며, 치료약이며 노인을 젊게 하고, 젋은이를 동자로 만든다. TV는 바보상자 텔레비전과 많은 시간 동거하지 말라. 술에 취하면 정신을 잃고, 마약에 취하면 이성을 잃지만 텔레비전에 취하면 모든 게 마비된 바보가 된다. 성냄 화내는 사람이 언제나 손해를 본다. 화내는 사람은 자기를 죽이고 남을 죽이며 아무도 가깝게 오지 않아서 늘 외롭고 쓸쓸하다. 기도 기도는 녹슨 쇳덩이도 녹이며 천년 암흑 동굴의 어둠을 없애는 한 줄기 빛이다. 주먹을 불끈 쥐기보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자가 더 강하다. 기도는 자성을 찾게 하며 만생을 요익하게 하는 묘약이다. 이웃 이웃과 절대로 등지지 말라. 이웃은 나의 모습을 비추어 보는 큰 거울 이다. 이웃이 나를 마주할 때, 외면하거나 미소를 보내지않으면,목욕하고 바르게 앉아 자신을 곰곰히 되돌아 봐야 한다. 사랑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다. 진정한 사랑은 이해, 관용,포용,동화,자기를 낮춤이 선행된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칠십년 걸렸다." -김수환 ‘바보가 바보들에게’ 중-
Board 추천글 2023.04.21 風文 R 4107
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그리스 신화와 영웅들) - 사진 자료 및 참고 자료는 제가 편집해 올린 것입니다. 제 2장 동방신화 1. 먼 옛날 옛적 원초 신 창세신화는 일반적으로 만물생성을 상징적으로 받아들인 이야기이다. 구약성경 창세기에는 혼돈(카오스) 속에서 신이 현현하여 우주만물을 창조하고 마지막에 생령을 지닌 사람을 만들어 에덴 동산에서 살게 하였다 한다. 이 창세신화는 다른 창세신화에서 매우 많은 부분을 도입한 히브리 신화로, 모세 5경의 첫머리에 기록되어 있다. 모세 5경은 기원전 400년경에 집대성되었고 사료로는 J전, E전, D전(신명기), P전 등이 뒤섞여 있다. 동방세계(고대 나일 강 유역과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유역의 여러 도시)에서는 기원전 6000년에 고도의 문명이 번영하였고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설형문자문서에는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와 동일한 창세신화가, 그것도 성서보다 수 천년 앞서 기록되어 있다. 이집트 헬리오폴리스 도시의 신화에는 아툼이 원초 신으로서 현현하여 아홉 주신이 탄생하고 천지를 창조하였다. 멤피스 도시에서는 이야기가 덧붙여져 프타가 최초로 현현하여 나우네트를 출현시키고, 그녀에서 아툼을 탄생시킨 다음 아홉 주신과 연결하였다. 따라서 첫 원초신은 프타이며 세상을 구축한 장인신으로서 창조신이다.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유역, 특히 바빌로니아-메소포타미아의 창세시편은 '에누마 엘리시'(먼 옛날에)로 시작하는데 아프수와 티아마트라는 원초신이 현현하여 여러 창조신들을 출생시키고 우주를 구축, 천지를 개벽한다. 그런데 신들의 수가 늘어나 통치에 갈등이 생기자 두파로 나위어 신권쟁탈의 격렬한 전쟁이 발발한다. 이 전쟁에서 마르두크는 원초여신 티아마트를 쓰러뜨리고 최고의 영웅신이 된다. 이제 신들은 그 생계를 위해 농부.노예가 필요하므로 적군이 총 지휘관인 괴물 큉구를 살해하고 그 피를 재료로 하여 인간이라는 꼭두각시를 만들어 종으로 삼았다. 그리스 신화도 첫 시작은 혼돈을 뜻하는 카오스(모신의 자궁 속을 상징)이며 우주창조에 관한 신화는 없이 곧 바로 대지여신 가이아와 성애의 신 에로스가 현현하고 천계의 신 우라노스를 출현시켜 그를 배우자로 하여 그를 배우자로 하여 티탄족을, 또한 바다의 신 폰토스를 상대로 하여 여러 해신들을 배출한다. 우라노스의 장기집권 계책은 막내아들 크로노스와 가이아의 제동으로 저지되고 신권은 찬탈된다. 이 때 낫으로 거세된 상처에서 떨어진 핏방울에서 거인족 기간테스가 태어난다. 그로노스의 장기집권 계획 역시 같은 방법으로 아들 제우스에 거세당하고 찬탈된다. 이렇게 해서 올림포스 신 세대가 도래된다. 2. 이집트인의 신화 고대 이집트의 원시신앙은 어느 부족에서나 마찬가지이지만 자연현상과 자연신에서 연유하였다. 나일 강의 섭리와 태양열이 신앙의 진수로 자리잡고, 위대한 나일 강의 자연법칙은 심리적으로 삶과 죽음, 또한 쾌락에 대한 내세관도 유발시켰다. 이집트 신화를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유역 메소포타미아에서 발생한 신화와 비교하면 비슷한 점보다는 차이점이 두드러지고 또한 더 중요하다. 자연과 역사 나일 강은 길이로 보아 세계에서 가장 긴 강으로, 빅토리아 호에서 발원하여 누비아 사막을 관통하는 흰 나일과 에티오피아 타나 호에서 발원하는 맑은 푸른 나일이 수단의 하르툼에서 합류하여 5~6개의 대폭포를 거쳐 북쪽으로 흐르는데 멤피스(현 카이로 남쪽 20km 지점)까지 다른 지류의 합류 없이 깊고 깊은 계곡을 구불구불 흐른다. 다만 아비도스 근방에서는 강이 두 줄기로 나뉘고 그중 동쪽 흐름이 주를 이루지만 두 강이라기보다는 마치 호수에 무수한 섬이 있는 양상으로 꼬불꼬불 흐르며 둑에는 수목이 무성하다. 멤피스에 와서는 강물은 부채꼴 모양으로 여러 갈래로 퍼져 넓은 델타지대를 만들고 마지막에 지중해로 흘러 들어간다. 이러한 나일 강의 흐름 양상은 지정학적으로 이집트를 상.하 이집트로 나누고 정치정세애 따라 상.하 두 이집트와 통일이집트를 연출케 하면서 역사 변천에 반영되었다. 이집트에는 연중 비오는 날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일 강은 매년 정기적으로 또한 같은 시기에 범람하는데, 6월 초에 시작하여 12월 초에 끝난다. 이 기적은 멀리 중앙아프리카 대륙 적도지역의 열대성 계절 강우에 기인한다. 다른 나라의 경우 홍수는 범람으로 큰 재해를 가져오지만, 나일 강의 범람은 비옥한 검은 진흙물을 충적토 들판에 바르며 둑을 넘쳐 10~20km 너비의 옥토를 만들어 준다. 이 은총으로 산천초목이 생동하며 곡식, 목화, 과실이 생산되고 들짐승, 가축이 번식하며 신과 인간은 풍요의 즐거움을 구가하였다. 따라서 일찍이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이집트는 나일 강의 선물'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또한 나일 강은 상류에 급류와 대폭포가 가로막아 뱃길이 단절되고, 나일강 계곡을 넘어서면 황막한 사자색 사막이 한없이 펼쳐져 있어 외부인의 침입을 불허하였다. 이에 따라 이집트는 외부문명의 영향에서 격리.고립됨으로써 역사 형성기로부터 독특한 독자적 문화를 낳게 되었다. 기원전 3000년 이전 이집트 역사 초기에 나일 강 계곡을 통일한 세력이 하류 델타지역을 정복하여 강력한 통일국가를 달성하였다. 이 시기부터 이집트는 크게 초기와조기, 3왕국(고왕국.중왕국.신왕국)시대와 그 사이에 두 중간기를 넣어 구분하고, 그 후는 후기시대 또는 제 3중간기와 후왕조기로 분류한다. 또한 왕조로 셈하는 분류에서는 31왕조로 나눈다. 제 25왕조까지는 내분을 제외하면 큰 외침을 받지 않았으나 제 26왕조(기원전 664~525) 때 페르시아에게 정복당하였다. 무려 3000년간 세습군주인 파라오의 전제가 이어지고, 여기에서 왕은 종교적으로도 최고의 신관 혹은 심지어 신의 지위를 겸하는 신정체제하에서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유지하였다. 신관은 관료 역할도 겸하는 귀족이었다. 분봉된 지방영주의 세력이 켜져 강력한 권세를 갖게 되면 이집트는 상하로 나뉘어져 갈등과 혼란 속에 분권화되지만, 중간기 시대를 겪고 나면 다시 전제군주에 의해 중앙집권제를 회복하였다. 기원전의 이집트 문명은 3000년 이상을 기본 개념부터 정치체제, 종교 및 예술 형태까지 실질적 변화 없이 지속되었다. 3. 로제타 스톤 나일 강 삼각주 서쪽 지류의 기슭에서 15km 떨어진 곳에 인구 4만 정도의 로제타 시가 있는데, 1799년 이 근방에서 나폴레옹 군의 성채를 구축하던 포병사관 부샤르가 높이 114cm, 폭 62cm, 두께 28cm의 현무암 비석 하나를 발견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로제타 스톤(Rosetta Stone)이다. 비석 위쪽은 이집트의 상형문자, 중간 부위에는 흘림체의 통속문자, 그 아래는 그리스 문자로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영국의 이름난 의사로 물리학자이자 이집트학자인 영(1773~1829)은 1814년 비문의 통속문자를 해독하고, 프랑스의 이집트학자 샹폴리옹(1790~1832)은 1822년 비문의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데 성공하였다. 상부 양단과 하부 우측 구석이 깨진 이 비문은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공덕문으로 기원전 196년에 건립된 것으로 밝혀졌다. 옛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해명하는 단서로서 이집트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나일 강 해전에서 승리한 영국군의 손으로 넘어가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로제타석 탁본] 로제타석(영어: Rosetta Stone) 또는 로제타 돌은 기원전 196년에 고대 이집트에서 제작되어 멤피스에 세워진 화강섬록암 석비이다. 고대 이집트어로 된 법령이 위에서부터 신성문자, 민중문자, 고대 그리스어의 세가지 문자로 번역되어 쓰여 있는 화강암이다. 이 돌에 쓰여진 그리스어를 기반으로 1822년에 장프랑수아 샹폴리옹과 토머스 영이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하였다. 헬레니즘 시대에 조각되어 사이스 부근의 신전에 전시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다가 고대 말기나 맘루크 술탄국 시기에 옮겨져 나일강 삼각주의 로제타 마을 근처에 줄리엔 요새를 건설할 때 재료로 사용되었다. 1799년 7월, 이집트-시리아 원정 당시 프랑스군의 장교였던 피에르 프랑수아 부샤르에 의해 발견되었다. 로제타석은 고대 이집트어를 다른 언어와 병기한 기록 중 최초로 발견된 자료로, 미번역 문자이던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할 수 있을 지 모른다는 점에서 곧바로 큰 반향을 불러왔다. 로제타석의 탁본은 곧 유럽의 박물관과 학자들 사이에서 유통되기 시작했다. 1801년 영국이 오스만 제국과 함께 프랑스군을 알렉산드리아에서 물리쳤을 때 로제타석은 런던으로 운반되었다. 이후 1802년부터 대영박물관에 상설 전시되고 있다.
Board 추천글 2023.04.20 風文 R 1623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셋 - 사랑으로 풀어내는 웃음보따리 매일 적시는 남자 - 김수현(여.서울 강동구 상일동) 안녕하세요? 이종환 오빠, 최유라 언니! 한해를 마무리 하면서 뭔가 뜻깊은 일을 해야 되지 않나 하는 신의 음성과 가까운 제 내면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절규를 들었어요. 늘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를 들으며 웃음 범벅으로 지내면서 저도 그들만큼 절절한 사연이 있었지만 이건 보나마나 누워서 침 뱉는 격일텐데.. 하는 망설임 때문에 여태까지 속 좁은 제가 참아야지 하면서 지내왔지만 이젠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괘씸함에 이르렀기에 지상천하에 터트리고자 합니다. 이종환 오빠, 최유라 언니... 제가 연말 선물로 대형 세탁기랑 건조기를 사달라고 남편에게 졸랐습니다. 도저히 7킬로 세탁기로 두 인간이 제조해내는 세탁물로 감당할 수가 없는 지경에 다다랐기 때문입니다. 요즘 전자제품들 그렇게 쉽게 고장나지도 않고 A/S도 잘 되는데 왜 그러냐 하시겠지만 다 이유가 있습니다. 남편은 멀쩡한 세탁기를 왜 바꾸냐며 정신나간 여자 취급을 했습니다. 허구헌날 이불빨래를 돌리니까 제아무리 인공지능 세탁기라도 뭐 별수 있겠습니까? 입이 씨꺼워 말하기가 싫었습니다. 남편 기 죽일까봐섭니다. 문제는 올 한해 바깥일이 바쁘고 술이 잦은 남편과 20개월이 지나면서부터 밤에 유독 기저귀를 차지 않고 자려는 아이가 번갈아 가면서 세계지도를 그리죠. 결혼할 때 해온 그 많은 원앙금침만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게 멀쩡해서가 아니라 차마 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격들도 가지가지여서 여름에는 솜이불, 양털이불을 덮어야 잠이 오는 인간들입니다. 제가 오줌에 쩔어 고생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곤히 자다가 이불에 지도를 그린다면 이해하시겠죠. 하지만 다 큰 남자, 멀쩡한 애 아빠가 좀 피곤하고 하루의 삶이 힘들었다고해서 이불에다 실례를 한다면 두 분 이해하시겠어요? 전 정말 피곤해 죽겠습니다.보통 아파트 가정집에서 수도요금이 2-3만원 나온다면 이건 문제가 간단한 게 아닙니다. 신혼초, 자다가 이부자리가 축축해서 잠에서 깨어보니 이부자리가 흥건히 젖어있는 게 아니겠어요? 전 예민한 편이라서 화들짝 놀라서 불을 환하게 켜보고 확인해보니 한강이 범람한 수준이더군요. 자다 봉창 두드린다는 표현이 딱 어울렸어요. 잠을 곤해 자는 남자의 어깨를 흔들어 깨워서는 다 큰 사람이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 한강을 만들어 놓을 수 있냐고 했더니 자기 팬티를 만져보고 이불을 들었다 놓았다 하더니 자기는 싸지 않았다는 겁니다. 얼마나 잡아떼던지요... 원래 남편은 말솜씨가 논리적이고 한 번 잡아떼면은 증거가 있어도 고개 흔드는 사람이라 좀 흥분을 잘하는 저는 늘 말싸움에서도 지곤 했습니다. 저도 인정이 있고 분별력 있는 여자이고 아내여서 사람이 그것도 공사다망한 남자이니까 살다보면 피곤해서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이해한다는 말을 했지만, 남자는 제가 실수해놓고는 창피해서 남편에게 뒤집어씌운다며 도리어 큰소리치며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시치미 떼는 소리를 들어보니 남편을 믿고 사랑하는 저로서는 제 속옷도 젖었으니까 남편만을 의심할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분명 저는 그럴 여자가 아니었어요. 그후 남편은 가끔 무단방뇨하는 일이 있었지만 차마 남들에게는 밝힐 수 없는 저만의 비밀이었고, 남의 약점을 빌미로 싸우는 일은 양심상 자꾸 할 수 없는 일이고 해서 늘 모른 척하고 넘어가 줬습니다. 아픈 구석도 감싸주는 게 부부인데.. 하면서 말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어머니의 반응은 어떨까 싶어 말씀드려봤더니 글쎄 오죽하면 남자가 오줌을 쌌겠냐며 피곤해서 야밤에 아무런 제어능력 없이 쉬-한 아들을 애처러워 쯧쯧거리시기만 했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피곤해서 싸는 거라면 밤마다 오줌 싸는 남자가 어디 한둘이겠는가 말입니다. 하-얀 솜이불의 겉커버를 벗겨내보면 눈 뜨고는 못 봐줍니다. 금가루를 뿌려 놔도 그 정도는 아닐 거예요. 냄새는 얼마나 야릇하고 오만가지 잡동사니 냄새가 나는지요. 일명 지린내-. 골통이 찌근찌근해지고 이가 갈릴 정도의 심한 악취. 두 분께서는 왜 더럽고 찝찝하게끔 냄새는 킁킁 맡고 그러느냐 하시겠지만 그게 제 특기거든요.
Board 삶 속 글 2023.04.20 風文 R 820
막냇동생 얼마 전 ‘99.9%가 틀리는 맞춤법’이란 온라인 게시물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막내동생’이 아니라 ‘막냇동생’이 맞는 표기라는 내용이었다. 놀랍다는 댓글이 여럿 달리면서 ‘막냇동생’은 순식간에 인기 검색어가 되었다. 왜 ‘막내동생’으로 쓰지 않고 ‘막냇동생’으로 적는 걸까? 누리꾼들이 궁금하게 여긴 이 말에 우리말의 달인도 어려워한다는 사이시옷 규칙이 들어있다. 사이시옷은 두 낱말이 합쳐져 새말을 이룰 때 뒷말의 첫 소리가 된소리로 발음되는 경우에 적는다. ‘나루’와 ‘배’가 합쳐진 말이 ‘나루빼’로 소리 나서 ‘나룻배’로 적는 것처럼 ‘막내’와 ‘동생’이 합쳐진 말은 표준발음이 ‘망내똥생’이라서 ‘막냇동생’으로 적는 것이다. 그런데 ‘막냇동생’ 표기가 선뜻 이해되지 않는 것은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이 ‘막내동생’으로 발음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표준발음과 표기를 바꿔야 하는 게 아닐까? 국립국어원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된소리(똥생) 발음이 35%로 예사소리(동생) 발음보다 적게 나타났다. 그러나 세대별로 차이가 있어서 20대는 16%만이 된소리 발음을 하지만 60대 이상은 63%로 아직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된소리 발음을 하고 있었다. 이에 ‘막냇동생’ 표기를 유지하기로 하였다. 수십 년 세월이 흘러 대부분의 사람들이 된소리 발음을 하지 않게 되면 그때는 ‘막내동생’으로 표기가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수십 년 후에는 이 말의 표기를 고민할 필요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막냇동생’은 형제가 여럿인 경우에 쓸 수 있는 말인데, 그때 여러 형제를 가진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톺아보기’는 ‘샅샅이 훑어 살펴보기’라는 뜻의 우리말입니다.
Board 말글 2023.04.20 風文 R 2795
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그리스 신화와 영웅들) - 사진 자료 및 참고 자료는 제가 편집해 올린 것입니다. 2.그리스의 조소미술과 도자기 조소미술 그리스인은 일반적으로 조각의 목적을 신과 신화적 광경을 묘사하는 데 두었고 각각의 조각에서 순수한 미적 쾌감도 역시 종교적 체험을 위한 수단으로 인식하였다. 프로클로스에 따르면 그리스 조각에서는 오직 오성에 새겨진 상에 따라 만들어진 자연의 이상적인 미를 발견하게 된다고 한다. 그리스인은 대리석과 청동을 사용하여 참으로 열정적으로 수많은 조상을 만들어 내었다. 이것들은 오늘날 서구를 위시한 온 세계 대형 박물관의 경쟁적인 수집 대상이 되고 있으며 때에 따라서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나는 풍부한 그리스 조상 더미에 당혹감을 느낄 정도이다. 그러나 진품은 이미 옛적에 사라져 버리고 독창적 작품을 조금이나마 보여주는 유품은 없다. 그 엄청난 수집품 속에는 반복하여 모방하는 과정에서 너무나 변형되어 딴 물건이 되어 버린 것, 반쯤 생명이 없어진 모조품, 또한 후대 헬레니즘 복제 등만이 존재할 뿐 진정 설득력있는 품목은 하나도 없다. 다만 상고기(기원전 500년 이전)의 조각과 부조는 페르시아 전쟁으로 파괴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신전을 재건할 때 성책의 기초로 묻혔다가 근래 발굴되어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남아 있어 그 면모를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고전기(기원전 5~4세기) 조각은 박공과 소벽의 부조 일부가 존재할 뿐 거장의 손으로 된 작품은 없다. 거장의 작품으로는 파락시텔레스의 '어린 디오뉴소스를 안은 젊은 헤르메스상' 정도가 고작인데, 그나마도 그의 대표작으로 치는 작품이 아니며 또한 일부 설에는 기원전 340년경의 헬레니즘 모작이라는 견해도 있다. 고전기 예술을 마무리하는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에 남아 있는 페이디아스의 박공과 소벽의 부조 조각은 대부분 반출되어 런던 박물관의 어두운 광 속에 쌓여 광채를 잃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스 조각에 대한 진수와 원천은 이처럼 믿음직하지 못하고 개탄스러운 상태다. 더구나 대부분의 고대 예술가들은 돌을 쪼는 것을 주로 한 것이 아니라 청동으로 주조하였다. 고전기의 세 거장인 기원전 5세기의 뮤론과 폴류클레이토스, 또한 기원전 4세기의 류시포스도 마찬가지지만 그들이 손수 만든 청동상은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각처의 대형 박물관에 청동상의 수가 매우 적은 이유도 고대 말기 이후 청동제의 원작이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거장들의 작품을 알아보고 탐구하는 데는 후세의 복제, 그것도 원작의 재질과는 다른 소재로 만들어진 모작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청동 걸작을 녹여서 종, 화폐, 심지어 대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작을 접할 수 있는 경우는 전혀 없으며 언제나 모작, 그것도 두 번째 아니면 네 번째, 다섯 번째 모작일 뿐이라고 보나르는 통절히 개탄한다. 도자기 고대 그리스에서 도자기 생산은 매우 중요한 산업으로, 가마에서 구워 낸 단지는 식수, 올리브유, 포도주 같은 액체 음식의 저장에 불가결하였다. 아테네 및 아티카와 코린토스를 비롯한 모든 도시국가에서는 요업이 성행하여 그리스의 주 농작물인 올리브유와 포도주를 단지나 항아리에 담아 수출하고 대신 곡물 특히 소맥을 수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밖에 제기와 생활 도자기도 없어서는 안 될 그릇이었으므로 그리스 세계의 요업은 크게 번창하였다. 신석기시대에는 단순한 둥근 무늬없는 토기였고 제조 수법도 간단하였으나 문명기(미노스 및 미케네 문명)에 들어서 기술이 향상, 모양과 장식이 다양해지고, 그림 새기는 기법도 도입되어 채문도기가 나타났다. 그러나 미케네의 멸망과 함께 도자기 숙련 기술은 사라졌고, 그 후 멀리 키프로스로 피난간 그리스인이 만든 미케네 기형의 단지가 본토에 역수입되었는데 장식은 간단한 원형, 삼각형, 사각형 무늬 정도에 그쳤다. 다시 아티카에서 도자기 요업이 재개되어 기원전 1100~660년 사이에는 단지의 표면 무늬가 단순성을 벗어나 다양한 기하학 무늬로 지그재그, 음영삼각형, 체크무늬, 그물 세공, 탄젠트 및 동심원, 반원, 웨이브 줄무늬, 장미꽃, 수레바퀴 장식, 만자, 구불구불한 무늬가 나타났다. 이처럼 단지 무늬가 두드러지는 때를 시대구분상 기하학기로 부른다. 한편 암흑기(기원전 1125~900)를 벗어나면서 기존의 단일 문양에서 탈피하여 인물과 동물 그림이 나타나고 자유로운 활동상과 표정까지 담아내게 되었다. 상고기의 동물 그림이 나타나고 자유로운 활동상과 표정까지 담아내게 되었다. 상고기의 화공들은 신화, 전설, 일상생활을 표현하였는데, 특히 영웅의 무용담 서사시 음송과 더불어 신화에 나오는 개개의 인물과 신의 속성을 그림으로 묘사해 냈다. 기원전 7세기부터는 가정의 단지와 식기에까지 빠짐없이 신화장면이 등장하고 그 외 향수와 기름을 담은 화장용기나 약병도 마찬가지였다. 그림 내용은 기품 있고 자비에 찬 신과 인간의 탁월성, 싸우고 죽이는 냉혹한 전쟁장면, 신들의 불화, 납치, 유혹상, 인간사회의 이면상으로 도둑과 노상강도, 유곽에서의 성행위 장면도 거침없이 담고 있다. 신과 인간사회의 희로애락을 소재로 삼은 이러한 작품들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인의 신관, 개인관 또한 예술관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그림도자기는 그리스 본토, 크레타, 키클라데스 군도, 시칠리아, 키프로스로 퍼져나가 각 도시국가의 도예 단지에서 생산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그리스의 그림도자기 수는 수십만 점에 달하며 그것도 전에는 모사품이 없었고 근래까지(1960년대) 위조품도 나돌지 않아 그리스 미술을 탐구하는 사람들은 이 도기 그림에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옛 벽화나 판화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마당에 풍부한 도자기 그림은 고고학적 가치 이상으로 매우 중요하다. 옛 기록에는 미술 작품에 관한 언급이 거의 없어 아쉬움을 지울 수 없지만 도자기 그림으로 시대 측정은 어려움이 없다. 시대구분상 고고학에서는 원시기하학(기원전 1050~900)와 기하학기로 나누고 있으나, 역사학에서는 초기 철기시대로 총칭하고 이를 대략 기원전 750년까지로 잡는다. 다음은 상고기라 부르며 시기는 그리스가 페르시아의 침공을 물리친 기원전 480년까지로 한다. 다음 시대는 고전기로 구분하고,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사망한 후부터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기까지는 헬레니즘기라고 칭한다. 그러나 공예, 미술 및 건축상으로는 시대구분이 분명하지 않다. 그리스의 도기 화공은 원 고장의 연구기관의 집계에 따르면 1000명을 훨씬 웃돌며 그 중에는 화풍이 훌륭하며 뛰어난 화가로 인정받는 자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도기에 명이 있는 예도 수백 종류가 넘는데 대부분 기원전 6~5세기 아티카 도자기에 서명한 것이다. 예컨대 '아무개가 만들었다'라든가 '아무개가 그렸다'라는 식의 명기이다. 고대에는 도기 형태를 만드는 기술이 그림장식 기술보다 더 높게 평가되어 화공이 도공의 이름을 적어 놓는 등, 도공의 명이 화공보다 더 많다. 초기에는 요업주 자신이 도공이자 화공이었을 것이다. 오듀세우스가 외눈박이 폴류페모스를 눈 멀게 하는 장면이나 페르세우스와 고르곤의 그림은 기원전 650년 이전 것으로 추정되는데 필치가 거칠다. 그후 단지 그림(기원전 650~600)은 더 착실하고 온건한 화풍을 나타내 사람과 동물의 모습이 훨씬 정상적이고 일부 기명 도기에 의하면 엑세키아스, 두리스, 프시악스 같은 화풍이 뛰어난 화가가 묘사한 것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도기에는 도공이나 화공의 서명 표지가 없어 장인들은 명성이나 실리에 구애받지 않은 직인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형태와 균형이 제대로 잡혀 있지 않고 대강 마무리한 것이 대부분인데 채식그림 단지는 일반 생활그릇으로서 염가품이라 공들여 만들 의욕이 적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편의상 옛 화공의 명칭을 별칭으로 불러 구분하고(예:아킬레스 화공, 아우로라 화공 등), 또한 도공과 화공의 서명이 있는 도자기 작품이라고 발굴자의 이름을 붙인 경우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인 프랑수와 꽃병은 불치(티베르 강 서북부 에트루리아 도시)의 에트루리아인 묘에서 발굴된 대형 크라테르(높이 66cm)로 기원전 570년경에 제작된 것이다. 신화를 소재로 한 찬란한 그림으로 가득 덮여 있고 인물과 동물 등이 270, 명이 121개, 도공은 에르고티모스, 화공은 클레이티아스라고 적혀 있다. 기원전 6세기 중엽 이후 자신의 그림에 이렇듯 서명을 남겼다는 사실은 장인의 작품에 대한 자부심과 개성을 엿보게 한다. 같은 화가의 손으로 그린 수십 내지 수백 점(200점 이상)의 그림단지도 있다. 상고기 그림은 대체로 농담없이 단조로운 색채에 거친 선으로 그려져 있으며 또한 화가의 서명은 페르시아 전쟁 이전(기원전 475년까지) 날짜에 한한다. 도자기 그림은 흑색그림과 적색그림으로 구분하며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흑색그림 : 기원전 7세기 말경부터 약 100년간 아티가(아테네 포함) 도기 화공은 녹로에서 붉은 빛이 도는 진흙으로 단지를 빚어 말린 다음 철화합물이 섞인 흙물로 검정 실루엣 그림을 그려 가마에 구워 냄으로써 그림자 그림이 나타나게 하였다. 코린토스에서는 더 오랫동안 이 기법이 지속되었다. 그림안의 세밀한 부분은 바늘로 긁어서 새기고 어떤 부분은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검정 바탕 위에 백색과 자색 도료를 덧칠하였다. 엑세키아스의 큘리스 술잔 그림(기원전 540년경) '디오뉴소스의 해상 귀로'에 잘 나타나 있다. 적색그림 : 기원전 530년경 아테네에서 발전한 도기 그림으로, 흑색그림과는 반대되는 기법을 사용하여 그림 묘사의 제한성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이는 철분흙물 페인트를 묻힌 붓으로 그림 윤곽을 그려 불에 구우면 흑색으로 변하고 그림 내용은 붉은 진흙색으로 남게 되는 기법을 이용한 것이다. 정밀한 세부묘사로 얼굴 표정을 세밀하고 또한 돋보이게 표현하였다. 그러나 재현 실험을 근거로 한 추정설에 따르면, 흑.적색의 채색은 산화철의 환원.산화 작용 기법에 의한 것으로 철분도료로 그림을 그리고 가마의 온도를 조절하여 공기 차단으로 흑색을, 자유로운 통풍으로 적색을 표출케 한 것이라 한다. 그렇더라도 어떻게 옛 도공이 온도 조절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문득 우리 나라의 한 도공이 읊은 시 한 수가 떠오른다. 도자단상 - 한익환 도자기에다 내 영혼을 넣는다고 그 많은 세월을 부셔 깼지만 언제부터인가 흙의 참 맛을 알게 되면서 침묵의 스승 자연을 알게 되었고 자연을 알게 되면서 인간의 길 깨닫게 되었다. 한잎 잎새와도 같은 도공의 꿈 도자기에다 내 하찮은 영혼을 넣는다는 것이 어느덧 흙의 영혼이 내 속에 들어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도자기(단지, 항아리, 생활용기) 명칭 피토스 : 독 혹은 큰 항아리, 족자리(손잡이) 또는 위아래 및 몸체에 밧줄고리가 달려있다. 암포라 : 두 개의 손잡이가 달린 타원형 단지. 구형 단지는 펠리케라 한다. 크라테르 : 혼주 단지로 아가리가 넓다. 손잡이 장식의 모양에 딸 볼루테(나선), 칼륙스(꽃받침), 콜룸(기둥) 크라테르라 한다. 그밖에 벨(종) 크라테르가 있고, 식탁용으로는 스탐노스, 손잡이가 없는 들통 모양의 칼라토스도 있다. 프슉테르 : 포도주 냉각용 단지로 대야의 찬물 속에 담근다. 휴드리아 : 작은 물항아리로 두 손잡이 외에 물을 쏟는 데 필요한 손잡이가 하나 더 길게 붙어 있으며 칼피스라고도 한다. 소녀가 모리에 똬리를 얹고 이고 다녔다. 오이노코이 : 한 개의 손잡이가 길게 붙어 있는 포도주 조끼로 받침대가 없는 것을 올페라 한다. 칸타로스 : 두 손잡이와 긴 축 받침대가 있는 포도주 잔으로, 주신의 잔이다. 큘릭스 : 운두가 낮은 사발 술잔. 한 쌍의 손잡이와 홀쭉한 축과 굽이 있으며, 굽이 없는 잔은 스템리스 큘릭스라 한다. 스큐포스 : 두 귀가 달린 작은 술잔. 더 깊고 수평 손잡이가 달린 코듈레도 있다. 레큐토스 : 향료 단지. 낮고 폭이 넓은 스쿠아트 레큐토스도 있다. 아류발로스 : 화장 기름병, 램프 기름병은 아스코스라 하며 아가리가 좁다. 알라바스트론 : 향수, 기름 또는 약을 담는 병. 뚜껑 있는 약병은 퓩시스라 한다. 레베스 : 고기 삶는 솥. 두 귀 달린 후기의 솥은 데이노스, 결혼 선물용 솥은 레베스 가미코스라 한다. 루트로포로스 : 정수를 긷는 단지, 또는 제의에 쓰이는 꽃병이다. 류톤 : 짐승머리 모양의 잔 혹은 뿔잔으로, 유방형 잔은 마스토스라 한다. 피알레 : 운두가 낮은 헌주 사발로, 손으로 잡기 위해 한가운데가 돌출된 것은 피알레 메콤팔레스라 한다. 레카니스 : 두 개의 손잡이가 달린 대야(수반)로, 뚜껑과 기대가 달린 수반도 있다. 아미스 : 휴대용 요강. - 오트리콜리에서 발견된 제우스 흉상(바티칸, 피오-클레멘티노 미술관, 원형 전시관)
Board 추천글 2023.04.19 風文 R 2035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셋 - 사랑으로 풀어내는 웃음보따리 강변가요제여 영원하라! 지금부터 10년 전, MBC 강변가요제가 열리던 여름이었습니다. 우짜든지 그녀와 단둘만의 여행을 호시탐탐 꿈꾸어 오던 저는 대학 가요제와는 달리 서울에서 직접 예선이 열리는 강변가요제를 의도적으로 노렸습니다. 이리저리 짜집기한 노래를 한 곡 만든 다음, 그녀한테 명가수로서의 포부까지 큰소리 뻥뻥 쳤습니다. 악보까지 본 그녀는 '강변가요제'라는 미명에 훌러덩 속아 서울행에 순순히 응했습니다. 예심이 있던 날, 저는 그녀의 묘한 기대를 십분 악용해 장닭이 암탉 꼬시듯 한껏 목청을 돋우어 불러제끼긴 했지만, 사실 저에게 있어 가요제는 물건너 보낸 지 오래고, 오로지 그녀와의 추억만들기에만 눈탱이 벌겋게 현안이었습니다. 저는 그야말로 '폼생폼사' 있는 폼 없는 폼 혼자 다 잡아가며 홀가분하게 한 곡조 뽑고는 기타 들쳐메고 예심장을 물러났습니다. 정동 라디오 극장을 나온 우리는 한쌍의 장닭, 암탉처럼 덕수궁 돌담길을 거닐었습니다. 그런데 암탉의 불길한 한마디! "덕수궁 돌담길을 애인끼리 걸으마, 그 사랑이 깨진다카던데 들어봤으예?" "그기 무신 쓸데없는 소리고! 그거이 다 애인없는 놈들이 만들어낸 헛소리잉기라. 만약에 진짜로 그렇다카마, 지금까지 이 돌담이 이래 성하겠나? 벌써 뚜껑이 열린 놈들한테 박살나고도 남았지. 안 그렇나?" 그녀의 난데없는 위협에 큰소리로 입막음은 우선 했지만, 속으로 뜨끔했던 저로서는 그녀의 흔들리는 사랑에다 쐐기 말뚝 아니 그 무엇이라도 박아두어야겠다는 의지를 굳히기에 이르렀습니다. 덕수궁을 둘러본 우리는 뭔가 사랑의 흔적을 남기기로 합의했고, 유치한 줄도 모르고 영혼 합체의 의미랍시고 각자 머리카락 세 올씩을 뽑았습니다. 그리고는 보다 완전한 합체를 위해 머리카락의 주인을 확실히 밝혀 두고자 했고, 그래서 무식하고도 과감하게 주민등록증에서 사진을 떼냈습니다. 위대한 대한민국의 국적마저도 사랑에 쓸개빠진 저를 말리지는 못했습니다. 각하께 송구스러울 뿐이었습니다. 한낱 사랑을 위해 나라를 배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넋나간 저는 그렇다 쳐도 그 여자! 여인의 몸으로 주민등록증을 찢어내는 그녀야말로 영심이도 애심이도 아닌, 바로 흑심 품은 연필 부인이었습니다. 여하튼 이 보물단지의 영구 보관을 위해 저는 타임캡슐을 본떠 알루미늄으로 된 담배 속종이로 주민등록증의 사진과 머리카락을 단단히 싸서는 덕수궁 어느 문설주 사이에다 꼭 끼워두었습니다. 말초신경의 감각과 소뇌(잔머리)의 직감으로 무르익은 분위기를 탐지한 저는 춘천을 거쳐서 집으로 돌아가자고 꼬셨고, 그녀도 좋다고 했습니다. 하늘도 귀신도 이미 제 편이었습니다. 소양강 땜에 도착한 저는 이제 2단계로 뱃놀이를 제안했고, 마침내 양구행 배를 타는 데 성공했습니다. 본디 한 마리 슬픈 늑대였던 저로서는 우짜든지 깊숙한 골짜기로 그녀를 유인해야만 했으니까요. 하기사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녀가 쳐둔 그물에 오히려 제가 걸려든것 같은 느낌도 들지만, 어쨌든 기분은 입을 째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뱃전에 부딪히는 파도, 물보라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쾌속선, 그림같은 주변의 풍광, 우리는 분위기에 흠뻑 취해 서로 손을 꼬옥 잡고 끈끈한 눈빛을 주고 받았습니다. 마치 소양강 강바닥을 자유로이 노니는 한쌍의 빠가사리 같은 느낌이었다고나 할까요? 어느덧 배는 양구 선착장에 닿았습니다. 우리는 내리자마자 경찰의 검문을 받았는데, 군사지역이라 외지인에 대한 의례적인 검문 같았습니다. 태어나 지금까지 부모님께 책값 삥땅친 것 말고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저는 당당하게 신분증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신분증을 받아든 경찰 아저씨의 인상이 완전히 썩은 배추벌레 씹은 표정이 되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 사진! 덕수궁에다 가출 신고하고 온 놈이 붙어 있을 리 만무였고, 앙꼬없는 찐빵이야 미운 놈 준다지만, 사진 없는 주민등록증을 엇다 쓰겠습니까? 아저씨는 그녀한테도 신분증을 보자고 했고, 역시 주인공이 도망가고 없는 그녀의 주민등록증을 본 아저씨의 얼굴빛이 하얗게 질리면서 별안간 외치면서 다짜고짜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뽑아들었습니다. "너거들 혹시 간첩 아니가?"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까딱하다간 총각 딱지도 못 떼고 염라대왕 맏사위 될 형편이었습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반사적으로 두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이어 아저씨는 제 어깨에 멘 기타를 낚어채더니 기타 통속을 샅샅이 훑었고, 찔찔 짜고 있는 그녀가 처년지 아줌만지는 안중에도 없는듯 그녀의 소지품까지 하나하나 검사를 했습니다. 기대와는 달리 난수표나 독침이 나오질 않자, 아저씨는 월척 놓친 표정으로 경찰서로 가 신분을 확인해야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졸지에 간첩으로 몰려 한쌍의 도살장 끌려가는 암수소처럼 끌려갔습니다. 결국 자초지종을 다 듣고 신분까지 확인하고서야 아저씨는 인상을 폈습니다. 하지만 아저씨는 "장난칠 게 없어서 하필 주민등록증으로 장난이가 응? 국가 공문서 훼손에다 위조 미수까지 죄가 얼마나 큰 줄알기는 아나? 자슥들아." 우리를 나무랐고, 반공 정신교육을 철저히 받고서야 우리는 겨우 간첩에서 다시 선량한 민간인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밖은 이미 캄캄했고 억수 같은 비마저 내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솔 담배 5갑을 사서 귀찮게 해서 죄송했다며 아저씨께 드렸습니다. 그러자 소금 먹은 놈이 물쓴다고 아저씨는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양구는 군사지역이라 신분증 없이는 숙박하기가 어려울 거라며, 뜻밖에도 직접 여관까지 순찰차로 데려다 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그녀와 첫차도 막차도 아닌 순찰차를 타고 둘만의 공간으로 달려가는 기분, 두 분께야 고비사막 낙타 방귀 소리쯤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제게 있어서는 호강에 빠져 요강에 헤엄치는, 바로 그 기분이었습니다. 우리 시대 마지막 철부지 간첩에 대한 융숭한 대접이었다고나 할까요? 순찰차 안에서 저는 내심 아저씨께 뽀뽀라도 해 드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심각한 표정으로 내내 한숨만 푹푹 내쉬며 위장전술을 폈고, 간첩으로까지 몰렸던 그녀 또한 권총 찬 아저씨 앞에서는 차마 찍 소리 못하고 도살장으로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그 아저씨는 저로 봐서는 눈물이 쏙 빠지도록 고맙게도 방까지 잡아주고서야 돌아갔습니다. 실랑이 하나없이 정체(늑대)마저 숨긴 채 합법적으로 그녀를 납치하는 혁혁한 전과였습니다. 그야말로 공권력의 힘은 위대했습니다. 두고 온 덕수궁과 주인 없는 주민등록증이 저를 감격케 했습니다. '아, MBC 강변가요제여 영원하라!' 그렇게 낯선 곳 양구, 경남장 여관의 여름밤은 깊어만 갔습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저의 4반세기 짧은 인생은 기쁨과 환희의 새 장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칼날처럼 도도하던 그녀는 온데간데없고, 저의 의관을 말끔히 정제해 놓고, 박카스까지 대령한 자세로 그녀는 서방님의 기침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두 분께서야 수박 껍데기 핥는 맛이겠지만, 강변가요제와 공권력의 승리가 가져다 준 한 여름밤의 깊은 사연을 아쉽지만 여기까지만 밝혀둡니다. 원주 역전에서 저는 강변가요제 탈락의 비보를 접했지만 결코 슬프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는 아득한 심원의 뿌리로부터 뭔지모를 뿌듯함이 용솟음침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이미 제 곁에는 강변가요제가 가져다 준 평생의 선물이 찰싹 달라붙어 있었으니까요. 추신: 5년뒤, 우린 한쌍의 토끼가 되어 결혼했고, 지금은 토끼 같은 딸래미 하나 두고서 그런대로 잘살고 있습니다. 덕수궁에 끼워 둔 머리카락과 사진이 잘 있는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Board 삶 속 글 2023.04.19 風文 R 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