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그리스 신화와 영웅들) - 사진 자료 및 참고 자료는 제가 편집해 올린 것입니다. 제 2장 동방신화 4. 신성과 종교 이집트의 산과 신앙은 물론 그 고대문명은 어떠한 세계 문명보다도 선행한다. 아득한 옛날 기원전 2500년에 건립한 쿠푸의 피라미드는 오늘날의 기술로도 능가할 수 없는 위용을 자랑하는 고도의 과학문명이다. 세월이 흐르자 신과 신성의 변천이 일어나고 신의 계보는 매우 혼란해지게 되었다. 초기 기록은 망실되어 남은 자료는 충분하지 않으나 후세에 발굴을 통해 옛 신전이 밝혀지고 피라미드(세계 7대 불가사의 중 가장 오래 되고 또한 현존하는 유일한 구조물이다)에 보존된 왕조 기록, 묘비명, 파피루스 문서, 많은 석상과 조각에서 이끌어 낸 사료와 그리스인들(역사가 헤로도트스 등)이 남긴 기록이 주요 재료이다. 유구한 문화를 가진 이집트인은 독특한 신앙과 종교를 창출해 냈으며 신의 수효 또한 엄청나 발굴 초에만도 기록상 800 이상이 산정되었다. 시초에는 여러 부족집단이 각각의 지역신을 갖고 있었으나 부족들의 정치적 통합으로 각 부족신 사이에 합동이 일어났으며, 기원전 3100년경에는 최종 통합이 달성되어 나일 계곡신들과 남부신들이 손을 맞잡고 만신전에 자리잡았다. 시대가 지나자 일부 지역신은 권위와 세력이 커지고 한 주 전체, 혹은 나이가 나라 전체의 주신으로 존경되기도 하였다. 우주신은 외부에서 이집트로 유입되어 공존하였는데 지역신과는 달리 동물이나 물신 형태는 없고 또한 인간 생활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로 경외되었다. 나라의 위대한 신이 된 천공신, 대지신, 태양신, 달신, 위대한 강신은 외경하지만 제의는 올리지 않았다. 후기에는 많은 신들을 숭배하고 신들의 이름과 신성도 적지 않게 융합되면서 혼란스러워졌지만, 개개의 숭배자는 습관상 지역신과 지역신에 동반하는 신들 및 물신에만 친근하게 되었다. 신화상으로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는 혼돈이 있을 뿐 물(바다)이 대지를 덮고 암흑이 우세하며, 신은 전혀 없었다. 그러다가 물에서 만물의 생성요소와 정이 태동하고 최초의 모신이 출현하였다. 구왕구시대에 이미 세 도시(헤리오폴리스, 멤피스, 헤르모폴리스)에 종교 중심지가 조성 발전되고, 각 지역신을 숭배의 대상으로 하는 사제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자신들의 신과 동반 신들이 우주 창조를 어떻게 시작하였는지 과시하려고 노력하였다. 창세 과정은 모두 비슷하게 전진적.진화적인 창조적을 제시하였지만 단 한 군데 '첫 시작'에 차이가 있으며 창조 역할을 연출한 시점에 대해서는 확실히 의견을 달리하였다. 여신 마예트는 황금시대가 되자 모든 법전과 윤리 및 제도를 인류에게 만들어 주었다. 천지창조설은 헬리오폴리스 사람들의 것이 가장 중요하며 또한 널리 받아들여진다. 창조신은 모두 아홉 주신 엔네아드로 아툼이 원초신이다. 그는 원초섬의 물 위에서 현현하여 공기신 슈를 내뿜고 증기의 여신 테프누트를 토해 냈다. 이 두 신은 결합하여 대지의 신 게브와 천공여신 누트를 낳았다. 다시 이 두 신이 결혼하여 낳은 신들이 바로 천지신이 아닌 오시리스, 이시스, 세트와 및 네프티스 형제자매들이다. - 창조의 신 Atum(아툼) 멤피스에서는 도시의 최고신 프타가 현현하여 나우네트를 출현시키고 그녀에게서 아들 아툼을 낳았다고 한다. 아툼에게서는 헬리오폴리스의 아홉 주신이 출현하였다. 이와 같이 멤피스에서는 그들의 신이 처음으로 창조를 시작하였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프타는 솜씨 좋은 장인신이며 세상을 구축한 창조신으로 숭앙되었다. 프타의 한 아들 임호테프는 제3왕조 조세로 왕의 묘를 사카라에서 계단식 피라미드로 건립한 최초의 인물이며, 또한 의료의 신(그리스의 아스클레피오스)으로 존중되었다. 헤르모폴리스에서는 여덟 주신 오그도아드가 세상을 창조하였다고 한다. 원초의 바다신 눈, 내세의 신 후, 암흑의 신 쿠크와 대기신 아문과 그 각각이 낳은 나우네트, 하우헤트, 카우케트 및 아마우네트가 그들이다. 다른 설에서는 세상은 껍질 없는 우주알 혹은 연꽃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태양숭배는 일찍이 다른 곳에서 들어온 것 같다. 고왕국시대(기원전 2686~2181)에는 온(헬리오폴리스)에서 태양신이 왕의 비호신으로서 공적으로 숭배를 받았다. 태양신 레는 지역 창조신 아룸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거대한 신전에 모셔지고 특히 제5대왕조 때는 그 숭배가 절정에 달하였다. 레 신앙은 왕실과 접목되어 왕실종교로 발전하고 이집트 왕은 공식적으로 레의 아들로 불리게 되었다. 레를 모시는 신관 사제들의 세력도 커졌으며 종교신학도 정립되었다. 제4왕조 때부터는 모시는 으레 왕은 하늘나라의 태양에 오른다는 내세관이 발전하고 이에 연유한 구조물인 피라미드에 매장되었다. 고왕국 말기에는 왕실세력이 쇠퇴하면서 태양신앙은 주춤하게 되는데, 왕실이 약화되는 반면 레 사제의 세력은 계속 커져 감으로써 결과적으로 사회분란을 초래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 와중에 서민적으며 민주적인 오시리스 신앙이 두드러지면서 숭배대상의 교체가 일어났다. 그러나 여전히 장례의식과 부활은 태양신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신왕국시대(기원전 1552~1069)가 되자 제18대 왕조 때 그 전까지는 지역신이던 아문을 '신중의 신'으로 올리고 레 숭배와 통합하여 나라의 위대한 신 아멘 레를 창출하였다. 여기에서 염두에 둘 것은 이집트 신들의 경우 합체는 하지만 원 모습과 특성을 포기하고 융합하는 일은 없다는 점이다. 제18대 왕조 말 아케나텐 왕은 태양신을 유일신으로 삼아 태양신 아텐 숭배에 집중하였으나 유일신앙의 성립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아케나텐의 아텐 숭배는 초기의 태양숭배와는 여러 모로 다르면서도 초기의 이집트 통치자처럼 왕실과 태양신 간의 일체성을 시도하여 공통점이 엿보인다. 전체적으로 보아 태양숭배는 어는 때나 일반인들과는 거리가 있었고 관련성이 적어 원칙적으로 왕실과 나라의 신앙으로 존속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테베의 사제들은 신왕국시대 후기에 와서 그들의 신 아문에 전지전능성을 부여하고 아문 신이 비밀리에 자기 자신과 모든 다른 신을 창출하였으며 또한 천지창조를 이룩하였다고 선언하였다. 또 다른 설에서는 나일 강의 작은 섬 엘레판티네의 염소머리 신 크눔이 아문의 모습으로 현현하여 그 고장 흙을 재료로 녹로를 돌려 인간을 만들었다고도 주자하였다. 이집트 사람은 신들을 세상에 실존하는 성스러운 동물의 형태로 표출시켰다. 호루스는 매, 바스트(그리스의 아르테미스)는 고양이, 사랑의 신 하토르(그리스의 아프로디테)는 암소로 나타났다. 또한 몸은 사람이고 머리만 동물현상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는데 예컨대 아누비스는 개 또는 재칼, 토트(신의 대변인, 그리스의 헤르메스)는 따오기다. 원시시대 토템 신앙의 유풍일 것이며, 기이하고 신비성이 풍겨 이집트 신성의 독특한 특징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물 신들은 신성시되는 짐승이 아니다. 인간의 궁극적 관심이 다양한 형태의 동물적 생명력으로 상징화되어 나타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로 전파된 이집트 신 중 중요한 신으로는 헤리오폴리스의 이시스와 오시리스, 멤피스의 세라피스를 꼽을 수 있다. [Serapis(세라피스 두상)] - 세라피스에 관한 최초의 기술로서, 기원전 323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의문이 남는 임종의 한 장면이 있다. 바로 바빌론의 '세라피스 신전에 중태에 빠진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신사의 경내로 옮겨야할 것인가를 신탁을 통해 물었다'라는 기술이 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세라피스가 바빌론에서 모셔지고 있었다고 한다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기원으로 한다는 설과 모순되기 때문에, 아리아누스(Lucius Flavius Arrianus)의 시대 착오라는 설도 있다. 그런데 바빌론에는 엔키(에아)라고 하는 신이 있는데, 그것을 세라프시(Serapsi, 심연의 왕)라고도 부르고 있었다. 따라서 아리아누스가 세라프시와 세라피스를 혼동했다는 설, 혹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과 관련된 세라프시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 세라피스와의 습합에 관련하고 있다는 설도 있다. 이시스 이집트의 여신 이시스(Isis)는 파라오 만신전의 주신으로 이 여신에 대한 숭배와 신화는 그리스와 로마 세계로 널리 퍼졌다. 대지의 신 게브와 천상의 여신 누트는 두 아들 오시리스와 세트와 쌍둥이 딸 이시스와 네프티스를 두었다. 이시스는 오시리스의 아내가 되고 네프티스는 세트(그리스 사람은 튜폰이라 한다)와 결혼하였다. 오시리스는 왕권으로 통치하고 이시스는 왕비가 되어 다들 호루스를 낳았다. 원래 이시스의 뜻은 '왕좌'로서, 오시리스의 왕권이 의인시으로 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시리스는 후에 동생 세트의 반란으로 죽음을 당하는데 그 내력을 보면 이렇다. 왕이 출타했다가 돌아와 세트의 환영 만찬회에 참석하였는데 세트는 왕에게 딱 맞는 우아한 장식상자를 내놓고 누구든 상자 안에 누워서 맞으면 선물로 주겠다고 여흥 삼아 말하였따. 여러 내빈들이 시험해 보았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세트는 오시리스에게 은근히 권하였다. 이에 오시리스가 장난 삼아 들어갔더니 세트를 추종하는 반역자들이 바로 상자의 뚜껑을 닫고 못질을 한 후 상자에 무거운 돌을 달아 나일 강에 던져 버렸다. 이 소문을 듣고 상자를 찾아나선 이시스는 오랜 세월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마침내 상자를 찾아내 오시리스의 시신을 챙겨 부토 근방의 델타 풀밭에 숨겨 두었다. 그리고 세트의 눈길을 피해 살면서 유복자의 출산을 기다렸다. 그러나 달밤에 사냥 나온 세트에 발각되어 오시리스의 시신은 발기발기 14토막으로 해체되어 다시 나일 강 속에 던져지고 이집트 땅 널리 흩어져 떠내려갔다. 이시스는 또다시 오시리스를 찾아나섰고 그 슬픔에 찬 통곡 때문에 유복자 호루스는 어미의 원수를 갚게 된다. 오시리스는 하이집트의 영주로 신격화한 왕이고, 세트는 원래 상이집트의 영주로 마찬가지로 신격화된 왕이니 이는 나일 강 상부지역과 하부지역 간의 세력갈등을 표현한 신화이다. 모든 실들의 어미로 세트의 세력을 꺾어 승리를 거둔 이시스에 대한 신앙은 급속도로 널리 전파되었다. 그리스 종교의 많은 여신들이 이시스와 동격신성을 나타내는데, 이오의 이야기나 지하계의 왕 하데스에게 납치된 자신의 딸을 찾아나선 곡물의 증식을 가져오는 지모신 데메테르의 유명한 설화가 모두 이시스 신화와 융합된 것들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이집트 통치시대에는 그리스와 이집트 종교 간에 병합이 일어나면서 이시스 여신의 모습은 헬레니즘 요소를 지니게 되어, 머리에만 옛 파라오의 상징인 왕관을 썼을 뿐 그리스식 의상을 걸친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집트 성전의 첫장은 "오래 된 것 중에서 가장 오랜 신에 이시스가 있고, 이시스는 생명과 변화하는 모든 것을 탄생시킨 여신이다"라고 적혀있다. 창조의 여신으로서 이시스는 이 세상에 처음으로 태양을 탄생시켰다. 로마시대에 이시스를 숭배하는 비교에서는 여신을 '만물의 여신'으로 호칭하였고, 철학자이자 시인인 파트라이의 루키우스는 이시스 여신을 '신성하고 영원한 인류의 구세주'로 극진히 찬양하는 시문을 남겼으며, 경건한 이시스 숭배자 아풀레이우스는 수많은 여신이름을 부르면서 이시스의 응답으로 찬양하였다. 이처럼 이시스는 가장 고귀하며 자비로운 만물의 모신으로서 높은 신성을 획득하고 특히 증식을 가져오는 여신으로서 자애와 환희를 주는 영험이 있어 화류계 여인들에게 널리 보급되었으며 이는 애가로 남아 있다. [isis(이시스)] 이집트 사람은 이시스를 모든 신의 여왕이며 지상에서 명계에까지 신비한 능력을 지닌 지고의 신으로 찬양하였다. 바다에 길을 냈다는 모세의 기적이나 태양을 정지시켰다는 그 후계자 여호수아의 기적도 그 원형은 이시스에서 나온 것이었다. 기원전 80년경 로마에 도래한 이시스 숭배는 서기 4세기 그리스 도교에 밀려날 때까지 대단히 성행하였다. 그리스도교에서도 이시스 여신은 배척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성모 마리아와 동일시 내지 융합되어 성모 숭배를 촉진하였다. 호루스의 어미 이시스 및 사이스(기원전 7세기경 이집트의 수도)의 여신 네이트의 속성은 그리스도의 어미 마리아의 속성과 동일하다. 로마의 초기 그리스도교 교도 중에는 자신들을 '양치기'로서 '이시스의 시종'의 호칭인 파리토포리라고 자칭한 자도 있었으며 목사라는 뜻의 파스터(Pastor)라는 낱말은 여기에서 연유하여 생겨난 것이다. 오시리스 오시리스(Osiris)는 그를 시기하는 형제 세트에 의해 죽임을 당한 후 그 신체는 조각내어 나일 강에 던져졌다. 정숙한 부인 이시스는 쌍둥이로 태어난 자매 네티프스(세트의 부인)와 아누비스의 협력을 받아 신체 조각들을 모았다. 이시스는 그의 생명을 다시 되찾아 부부로 결합하고 그 결합으로 태어난 호루스는 아비의 원수를 갚는다. 그런데 이 오시리스는 헬레니즘에서는 이시스계의 신이 아니었다. 즉 이집트의 일부 지역에서 사자의 세계를 다스리며 장례신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나일 강 유역 밖으로는 그 숭배가 퍼지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세라피스가 이시스의 옆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로마시대에는 명확히 이시스 종교과 그 '비의'가 성행하고 사후 세계의 삶을 약속받기 위해 오시리스에 대한 관심이 재현되었다. 이에 따라 오시리스는 나일 강의 성스러운 물과 풍요의 상징이자 생에 상응하는 존재로서 로마제국의 이시스 신전 의식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신전에는 성수를 담은 저수지와 수조가 있었고 제기로는 휴드리아와 시툴라이가 사용되었다. 오시리스 카노푸스신 의 조각상 중에는 그러한 그릇을 머리에 올려 놓은 모습을 묘사한 것도 있다. 11월의 중요한 이시스 축제는 로마 수도에서도 올려졌고, 신의 수난 및 죽음과 부활을 되새겼다. 폼페이의 이시스 신전에는 여러 장식 외에 두 점의 오시리스 수난을 묘사한 그림이 있다. 증식의 신으로 계속 다시 태어나므로 때로는 디오뉴소스와도 결부되었다. 로마에 오시리스 '비의'가 존재했음은 익히 아는 바이나 오시리스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그 대신 수많은 동으로 만든 조상이 로마제국 전역과 무덤에서 발견된다. 여기에서의 오시리스는 고대 이집트의 미이라형으로 휜 홀과 도리깨를 지니고 측면에 깃털 장식이 달린 높은 관을 쓰고 있다. 그리스인은 오시리스의 어미를 세멜레와 동일시 하였다. 세라피스 알렉산드리아에서 이시스 숭배가 퍼진 초기에 이시스 여신에 동반하는 신은 오시리스가 아니라 바로 이 세라피스(Serapis)이다. 오시리스와 아피스(성스러운 소)의 합일신으로(멤피스에 장엄한 세라피스 신전이 있다) 그리스.이집트의 신이지만 그 출현을 둘러싸고는 의견 차이가 있다. 즉 고전 작가는 세라피스 숭배를 기원전 3세기 초의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 연유한다 하고, 다른 설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스스로 세라피스 숭배를 창출시켰다 하는데 이 견해가 유력하다. 세라피스 신전으로는 프톨레마이오스 3세 때 알렉산드리아에 세워진 것이 유명한데, 라코티스 언덕에서 나온 여러 유물들을 살펴보건데 프톨레마이오스 2세 치세 때부터 알렉산드리아에서 공식 신으로서 숭배되었음이 확실하다. 알렉산드리아의 세라피스 신전의 이름난 신상과 초상의 기원에 관해서는 확실치 않다. 세라피스는 오시리스에서 기원하여 죽음과 번식과 재산의 신으로서 지하의 신과 풍요의 신이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지만, 헬레니즘에서는 심각한 표정에 풍부한 머리 및 수염, 가운과 겉옷 매무새가 완전히 그리스 명계의 신 하데스를 상기시킨다. 이 지하의 신이 거느리는 괴물도 명계를 지키는 머리 셋 달린 케르베로스로, 시간(영겁)의 신인 아이온의 상장인 개의 머리, 늑대머리 및 사자머리를 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세라피스는 시간과 영원의 주인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쓰고 있는 두관은 농사의 풍요를 표시하는 것으로 세라피스가 풍요를 나누어 주는 신이기도 함을 알 수 있다. 원래 이시스와는 달래 프톨레마이오스 치세에는 환영받지 못하였던 세라피스는 헬레니즘 시대에 전파되어 이시스 신전에 봉안되었으나 이시스 여신의 배우자 역에서 좌천되었다. 콤모두스, 카라칼라 및 셉티무스와 세베루스 황제시대에는 풍요의 신, 치료의 신으로 존숭되었고, 점차 태양신 헬리오스와 동일시되어 신의 머리에서 관선이 비치는 조상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기 전에 이미 그의 위신은 실추되었고, 391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명에 따라 알렉산드리아의 세라피스 신전은 파괴되었다.
Board 추천글 2023.04.21 風文 R 1657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셋 - 사랑으로 풀어내는 웃음보따리 뒷집의 빠른 놈(?) - 윤일형(남. 광주광역시 서구 광천동) '천사의 말이라도 사랑이 없으면 한낱 꽹가리 소리에 지나지 않고, 그다지 향기롭지 못한 덩(?) 이야기라도 예술적으로 승화되면 함박꽃보다 더 환한 웃음꽃으로 핀다.' 물론 덩(?)이 예술적으로 승화될지는 미지수지만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직원이 고작 스무 명 남짓한 조그마한 회사에 디니고 있을 때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일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아주머니들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총각이 하나 있었으니 봉고차 기사인 바로 나. 또한 거기엔 아가씨까지 하나 있었으니 경리 일을 보는 문제의 그녀. 그녀는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춘향이와 잘 아는 사이이거나 아니면 양귀비를 하녀로 부리는 사람인 줄로 알았으니까요. 저 또한 미남 그 자체였구요. 물론 남들은 한사코 인정하지 않지만. 아가씨 하나에 총각 하나. 무언가 역사가 이루어질 것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녀의 콧대는 그 미모만큼이나 도도하고 높았습니다. 그녀에게 제 마음을 전하려 할 때면 그녀는 여지없이 콧방귀로 저의 자존심을 어두운 구석으로 날려 버렸습니다. 그리고 전 이렇듯 매번 구겨지는 자존심을 추스르다 보니 차츰 제 마음도 그녀에게서 멀어지고 오히려 미운 감정만 쌓여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그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기회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우습고 창피하고 또 엉뚱한... 그러나 알고 보니 그 것이 기회였습니다. 이야기에 앞서 저의 두 가지 특이한 버릇이랄까 습성에 대해 소개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못말리는 건망증과 또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뒷집(?)에서 빠른 놈(?)을 만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뒷집은 다 아시리라 믿고 빠른 놈에 대해 잠시 설명드리겠습니다. 본디 '덩'이라는 것이 성질이 제각각이라 무겁고 신중하게 내리 누르는 놈들이 있는 반면, 칼루이스처럼 빠른 속도로 내리 꽂히려는 놈들이 있습니다. 술 마시고 탈 날 때 내려오는 놈들이 바로 빠른 놈들입니다. 운명의 그날 저는 거래처에 다녀오는 길이었습니다. 뱃속에서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간간이 들리더니 갑자기 엉덩이 쪽에서 빠른 놈이 출발 준비를 끝냈다는 신호가 왔습니다.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구야, 이러면 안 되는데. 회사에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는데. 이걸 어째. 회사까지 그냥 가? 아니야 이 놈은 보통 놈이 아닌 것 같아. 중간에 적당한 데 들러서 해결하는게 좋겠어. 이건 인간으로서 참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야. 어디 보자. 저 건물에는 화장실이 있겠다. 옳지, 여기다 주차해 놓고 으으- 차에서 내리는 것은 일단 성공. 이거 걷는 것도 어렵네. 그렇다면 팽귄같이 살살 걸어가 볼까. 혹시 문이라도 잠겨 있으면 안되는데. 어디 보자. 어라 잠겼네. 우리나라 이거 문제 있어. 살다보면 나처럼 급한 일이 있을 수도 있는데 이렇게 잠가 놓으면 어떻게 하란 말이야. 다른 데로 가 보자. 저 건물은 왠지 안 잠겨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옳지, 여기는 안 잠겼군. 화장실 같아 보이지? 계단! 계단은 한 손으로 난간을 꽉 붙잡고 하체 쪽은 힘을 빼고 이러-케. 한 칸 성공. 또오 한 칸. 또오오 한 칸. 또오오오... 휴-. 땀이 비오듯 쏟아지누만. 세상에 계단에서 사우나 한다는 건 보다 듣다 처음이네. 이제 마지막 계단이지! 화장실이 바로 저긴데 예서 멈출 수 있나, 마지마악- 한 칸. 다 올라왔어. 삐그덕 문을 열고... '아이쿠 이런 하느님 맙소사. 창고잖아.' 아아!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미칠 것 같아. 이 일을 어쩐다. 기왕 들어왔으니 한층 더 올라가? 아니야. 계단은 빠른 놈에게 아주 치명적이야. 내려가는 게 좋겠어. 후- 후- 후- 이제 내려가는 것도 만만치가 않네. 오- 빠른 놈이여. 아니 빠른 님이여, 빠른 분이시여, 세상 구경이 그렇게도 하고 싶으시나이까? 제발 조금만 참아 주소서. 아이고 하느님 저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저는 천천히 운전해야 했습니다. 차가 갑자기 덜컹거리면 빠른 놈이 주인도 모르는 사이에 난감한 사건을 터트릴지 모르거든요. 가까스로 회사에 도착한 저는 화장실 앞에까지 차를 몰고 갔습니다. 뒷집 들어가 앉자마자 시동도 걸지 않았는데 오토바이가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조금만 힘을 줘도 오토바이는 쌩쌩 달렸고 기분은 날아갈 것처럼 좋았습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오토바이를 다 타고 나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화장지를 들고 오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우째 이런 일이. 뭘로 해결한다. 그래 재활용이라는 게 있지. 어디 쓸만한 것이... 짜식들 좀 여유있게 쓰지 이게 뭐야. 순간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침에 옆칸에 들렀을 때 프로 야구 해태 타이거즈의 김 아무개 선수가 방망이를 들고 환하게 웃는 사진이 실린 스포츠 신문이 생각났던겁니다. '그래 바로 그거야!' 사방은 조용했습니다. 일이 아직은 완전히 끝난 상태가 아니었으므로 엉거주춤한 자세로 옆 칸으로 갔습니다. 김 아무개 선수는 여전히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음, 그런대로 쓸만 하겠어.' 신문을 집어들고 다시 처음에 일보던 칸으로 돌아서는 순간! 아뿔사, 이게 웬일인가! 그녀가 정면으로 들이닥친 것이었습니다. 순간 그녀는 이게 무슨 일인가 멍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더니 이윽고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습니다. "으아악-." 으이구. 이게 뭣 놈의 댄스(Dance)여. 엉거주춤도 무슨 춤이라고 추고 있는 것이여, 시방. 그때 제가 왜 처음 일보던 칸으로 돌아가려 했을까요? 까닭모를 일종의 동물적 회귀 본능이거나 아니면 제 것에 대한 본능적 애착일까요? 한마디로 정신없는 놈의 정신없는 짓이었습니다. 그후 그녀는 저를 보면 피식피식 웃거나, 무언가 못 볼 것까지 보았다는 듯 얼굴을 붉히거나, 혹은 손가락을 머리 근처에서 빙빙 돌려가며 미친놈 아니냐는 시늉을 하기도 했습니다. 일이 이것으로 끝났으면 저만 창피당하고 끝났을 일이지만 또 한번의 엉뚱한 사건이 저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신은 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날도 역시 거래처에 다녀오는 길이었습니다. 다시는 그런 수모를 당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저였기에 전날 회식자리에서 조금은 술을 자제했습니다. 그래도 주거니 받거니 했던 술이 과했던 탓인지 자꾸 엉덩이 쪽으로 신호가 왔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무지막지한 놈은 아니었습니다. 차가 덜컹거리지 않도록 조심하는 정도에서 회사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으니까요. 화장지도 잘 챙겼구요. 예전 같지 않게 정신도 말짱했죠. 전 천천히 화장실로 걸어 들어가 노크를 했습니다. "똑, 똑." "네, 들어오세요." 그녀의 목소리였습니다. 저는 아주 당당히 문을 열었습니다. 또 정신이 나간 겁니다. 그녀는 예전보다 눈이 더 둥그래지더군요. 그래도 저는 아무 생각없이 그녀 앞에 아주 태연히 서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그녀가 발딱 일어서 문을 쾅 닫았죠. 쾅 소리를 듣고 나서야 실성한 사람처럼 비실비실 웃음을 흘리며 옆칸으로 갔습니다. '오! 주여 감사합니다.' 저는 그 문을 열어보기 전까지는 여자 엉덩이가 조그만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다르게 엄청 뚱뚱했습니다. 옆칸으로 들어간 저는 실실 웃어가며 오토바이를 사정없이 몰았습니다. 오토바이의 요란한 폭발음을 내며 예전보다 더 신나게 달렸습니다. 그런데-! 옆칸에서 그녀가 저보다 더 크고 요란한 속도로 오토바이를 모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고상하고 도도하고 콧대 높은 여자가 오토바이를 저렇게 인정사정 없이 몰다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푸하하하하하하." 저의 웃음은 그칠 줄 몰랐습니다. "푸하하하하하하-." 한참 웃고 있는데 옆칸에서 그녀가 빽하니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만 해요" "그만 하라니까요." "자꾸 웃음이 나오는 걸 어떡해요." "창피하게시리 그만 해요." "좋아, 그만 하는 대신 나하고 커피 한 잔 마실 수 있지요?" "알았어요." "영화도 같이 볼 수 있지요?" "야! 이 야만인아." "내 입은 그렇게 무거운 편이 못 되는데요?" "좋아, 알았어요." "드라이브는?" "알았다니까요." 우리는 뒷집에서 서로에게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제가 화장지 챙기는 걸 잊어버리듯, 그녀도 급하면 문고리 잠그는 걸 잊어버리는 건 물론이거니와 아무데서나 사무실로 착각해서 '네, 들어오세요.'라고 말하는 건망증이 닮았고, 또 과음한 다음날이면 둘 다 오토바이를 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후 우리는 아주 좋은(?)사이가 되었습니다.
Board 삶 속 글 2023.04.21 風文 R 863
송양지인(宋襄之仁) 宋:송나라 송. 襄:도울 양. 之:갈 지(…의). 仁:어질 인. [출전]《十八史略》〈卷一〉 송나라 양공(襄公)의 인정이란 뜻. 곧 ① 쓸데없는 인정을 베푸는 것의 비유. ② 무익한 동정이나 배려. 춘추 시대인 주(周)나라 양왕(襄王) 2년(B.C.650), 송(宋)나라 환공(桓公)이 세상을 떠났다. 환공이 병석에 있을 때 태자인 자부(玆父)는 인덕(仁德)이 있는 서형(庶兄) 목이(目夷)에게 태자의 자리를 양보하려 했으나 목이는 굳이 사양했다. 그래서 자부가 위(位)에 올라 양공이라 일컫고 목이를 재상에 임명했다. 그로부터 7년 후(B.C.643), 춘추의 첫 패자(覇者)인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죽고, 송나라에는 운석(隕石)이 떨어졌다. 이는 패자가 될 징조라며 양공은 야망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여섯 공자간에 후계 다툼이 치열한 제나라로 쳐들어가 공자 소(昭:孝公)를 세워 추종 세력을 만들었다. 이어 4년 후에는 송/제/초(楚) 세 나라의 맹주(盟主)가 되었다. 목이는 ‘작은 나라가 패권을 다투는 것은 화근’이라며 걱정했다. 이듬해 여름, 양공은 자기를 무시하고 초나라와 통교(通交)한 정(鄭)나라를 쳤다. 그러자 그 해 가을, 초나라는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대군을 파병했다. 양공은 초나라 군사를 홍수(泓水:하남성 내)에서 맞아 싸우기로 했으나 전군이 강을 다 건너왔는데도 공격을 하지 않았다. 목이가 참다못해 진언했다. “적은 많고 아군은 적사오니 적이 전열(戰列)을 가다듬기 전에 쳐야 하옵니다.” 그러나 양공은 듣지 않았다. “군자는 어떤 경우든 남의 약점을 노리는 비겁한 짓은 하지 않는 법이오.” 양공은 초나라 군사가 전열을 가다듬은 다음에야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열세(劣勢)한 송나라 군사는 참패했다. 그리고 양공 자신도 허벅다리에 부상을 입은 것이 악화하는 바람에 결국 이듬해 죽고 말았다.
Board 고사성어 2023.04.21 風文 R 909
댄싱 나인 시즌 스리 얼마 전 한 방송의 ‘댄싱9 시즌3’이 인기리에 막을 내렸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프로그램 제목을 ‘댄싱 나인 시즌 스리’로 읽는다. 숫자 ‘9’와 ‘3’을 ‘아홉’, ‘셋’이나 ‘구’ ‘삼’으로 읽지 않고 영어인 ‘나인’ ‘스리’로 읽는 것이다. 우리말에서는 아라비아 숫자 ‘1, 2, 3, 4’ 등이나 로마 숫자 ‘Ⅰ, Ⅱ, Ⅲ, Ⅳ’ 등은 고유어 수사로 읽거나 한자어 수사로 읽는다. 일반적으로 일상생활에서 물건의 수효를 셀 때에는 ‘하나, 둘, 셋, 넷’ 등처럼 고유어 수사로 읽고, 그냥 숫자를 셀 때에는 고유어 수사로 읽거나 ‘일, 이, 삼, 사’ 등처럼 한자어 수사로 읽는다. 그런데 최근 들어 아라비아 숫자나 로마 숫자를 영어식으로 읽는 것이 일반화되고 있다. ‘넘버1, 넘버2, 넘버3’ ‘슈퍼스타K1, 슈퍼스타K2, 슈퍼스타K3’ 등의 ‘1, 2, 3’ 등이 일반적으로 ‘원, 투, 스리’ 등으로 읽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숫자를 영어식으로 읽는 건 우리말의 자연스러운 숫자 읽기가 아니다. 혹, ‘넘버’ ‘슈퍼스타K’ 등이 영어 또는 영어에서 유래한 외래어라서 그 뒤 숫자를 영어식으로 읽는 게 더 자연스럽지 않냐 하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식샤를 합시다1, ‘식샤를 합시다2’의 ‘1, 2’도, ‘수학Ⅰ, 수학Ⅱ’ ‘물리Ⅰ, 물리Ⅱ’ 등의 ‘Ⅰ, Ⅱ’도 영어 ‘원, 투’로 읽고 있는 것을 고려할 때 그렇게 볼 수 없다. 영어식 숫자 읽기의 남용에 불과하다. 수사는 한 언어에서 기본적인 의사소통에 꼭 필요한 기초 어휘이다. 그런데 숫자 읽기에서 우리말의 기초 어휘인 수사가 영어에 밀려 홀대 받고 있다. ‘엠피스리(MP3)’ ‘스리디(3-D)’ 등은 별개의 단어라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그냥 숫자를 차례대로 셀 때에는 그 숫자를 우리말 수사로 읽는 것이 좋겠다. 박용찬 대구대 국어교육과 조교수
Board 말글 2023.04.21 風文 R 2805
[김수환 추기경님의 8가지 명언] 말 말을 많이 하면 필요 없는 말이 나온다. 양 귀로 많이 들으며, 입은 세번 생각하고 열라. 책 수입의 1%를 책을 사는 데 투자하라. 옷이 헤어지면 입을 수 없어 버리지만 책은 시간이 지나도 위대한 진가를 품고 있다. 노점상 노점상에서 물건을 살 때 깍지 말라. 그냥 돈을 주면 나태함을 키우지만 부르는 대로 주고 사면 희망과 건강을 선물하는 것이다. 웃음 웃는 연습을 생활화 하라. 웃음은 만병의 예방약이며, 치료약이며 노인을 젊게 하고, 젋은이를 동자로 만든다. TV는 바보상자 텔레비전과 많은 시간 동거하지 말라. 술에 취하면 정신을 잃고, 마약에 취하면 이성을 잃지만 텔레비전에 취하면 모든 게 마비된 바보가 된다. 성냄 화내는 사람이 언제나 손해를 본다. 화내는 사람은 자기를 죽이고 남을 죽이며 아무도 가깝게 오지 않아서 늘 외롭고 쓸쓸하다. 기도 기도는 녹슨 쇳덩이도 녹이며 천년 암흑 동굴의 어둠을 없애는 한 줄기 빛이다. 주먹을 불끈 쥐기보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자가 더 강하다. 기도는 자성을 찾게 하며 만생을 요익하게 하는 묘약이다. 이웃 이웃과 절대로 등지지 말라. 이웃은 나의 모습을 비추어 보는 큰 거울 이다. 이웃이 나를 마주할 때, 외면하거나 미소를 보내지않으면,목욕하고 바르게 앉아 자신을 곰곰히 되돌아 봐야 한다. 사랑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다. 진정한 사랑은 이해, 관용,포용,동화,자기를 낮춤이 선행된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칠십년 걸렸다." -김수환 ‘바보가 바보들에게’ 중-
Board 추천글 2023.04.21 風文 R 3879
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그리스 신화와 영웅들) - 사진 자료 및 참고 자료는 제가 편집해 올린 것입니다. 제 2장 동방신화 1. 먼 옛날 옛적 원초 신 창세신화는 일반적으로 만물생성을 상징적으로 받아들인 이야기이다. 구약성경 창세기에는 혼돈(카오스) 속에서 신이 현현하여 우주만물을 창조하고 마지막에 생령을 지닌 사람을 만들어 에덴 동산에서 살게 하였다 한다. 이 창세신화는 다른 창세신화에서 매우 많은 부분을 도입한 히브리 신화로, 모세 5경의 첫머리에 기록되어 있다. 모세 5경은 기원전 400년경에 집대성되었고 사료로는 J전, E전, D전(신명기), P전 등이 뒤섞여 있다. 동방세계(고대 나일 강 유역과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유역의 여러 도시)에서는 기원전 6000년에 고도의 문명이 번영하였고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설형문자문서에는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와 동일한 창세신화가, 그것도 성서보다 수 천년 앞서 기록되어 있다. 이집트 헬리오폴리스 도시의 신화에는 아툼이 원초 신으로서 현현하여 아홉 주신이 탄생하고 천지를 창조하였다. 멤피스 도시에서는 이야기가 덧붙여져 프타가 최초로 현현하여 나우네트를 출현시키고, 그녀에서 아툼을 탄생시킨 다음 아홉 주신과 연결하였다. 따라서 첫 원초신은 프타이며 세상을 구축한 장인신으로서 창조신이다.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유역, 특히 바빌로니아-메소포타미아의 창세시편은 '에누마 엘리시'(먼 옛날에)로 시작하는데 아프수와 티아마트라는 원초신이 현현하여 여러 창조신들을 출생시키고 우주를 구축, 천지를 개벽한다. 그런데 신들의 수가 늘어나 통치에 갈등이 생기자 두파로 나위어 신권쟁탈의 격렬한 전쟁이 발발한다. 이 전쟁에서 마르두크는 원초여신 티아마트를 쓰러뜨리고 최고의 영웅신이 된다. 이제 신들은 그 생계를 위해 농부.노예가 필요하므로 적군이 총 지휘관인 괴물 큉구를 살해하고 그 피를 재료로 하여 인간이라는 꼭두각시를 만들어 종으로 삼았다. 그리스 신화도 첫 시작은 혼돈을 뜻하는 카오스(모신의 자궁 속을 상징)이며 우주창조에 관한 신화는 없이 곧 바로 대지여신 가이아와 성애의 신 에로스가 현현하고 천계의 신 우라노스를 출현시켜 그를 배우자로 하여 그를 배우자로 하여 티탄족을, 또한 바다의 신 폰토스를 상대로 하여 여러 해신들을 배출한다. 우라노스의 장기집권 계책은 막내아들 크로노스와 가이아의 제동으로 저지되고 신권은 찬탈된다. 이 때 낫으로 거세된 상처에서 떨어진 핏방울에서 거인족 기간테스가 태어난다. 그로노스의 장기집권 계획 역시 같은 방법으로 아들 제우스에 거세당하고 찬탈된다. 이렇게 해서 올림포스 신 세대가 도래된다. 2. 이집트인의 신화 고대 이집트의 원시신앙은 어느 부족에서나 마찬가지이지만 자연현상과 자연신에서 연유하였다. 나일 강의 섭리와 태양열이 신앙의 진수로 자리잡고, 위대한 나일 강의 자연법칙은 심리적으로 삶과 죽음, 또한 쾌락에 대한 내세관도 유발시켰다. 이집트 신화를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유역 메소포타미아에서 발생한 신화와 비교하면 비슷한 점보다는 차이점이 두드러지고 또한 더 중요하다. 자연과 역사 나일 강은 길이로 보아 세계에서 가장 긴 강으로, 빅토리아 호에서 발원하여 누비아 사막을 관통하는 흰 나일과 에티오피아 타나 호에서 발원하는 맑은 푸른 나일이 수단의 하르툼에서 합류하여 5~6개의 대폭포를 거쳐 북쪽으로 흐르는데 멤피스(현 카이로 남쪽 20km 지점)까지 다른 지류의 합류 없이 깊고 깊은 계곡을 구불구불 흐른다. 다만 아비도스 근방에서는 강이 두 줄기로 나뉘고 그중 동쪽 흐름이 주를 이루지만 두 강이라기보다는 마치 호수에 무수한 섬이 있는 양상으로 꼬불꼬불 흐르며 둑에는 수목이 무성하다. 멤피스에 와서는 강물은 부채꼴 모양으로 여러 갈래로 퍼져 넓은 델타지대를 만들고 마지막에 지중해로 흘러 들어간다. 이러한 나일 강의 흐름 양상은 지정학적으로 이집트를 상.하 이집트로 나누고 정치정세애 따라 상.하 두 이집트와 통일이집트를 연출케 하면서 역사 변천에 반영되었다. 이집트에는 연중 비오는 날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일 강은 매년 정기적으로 또한 같은 시기에 범람하는데, 6월 초에 시작하여 12월 초에 끝난다. 이 기적은 멀리 중앙아프리카 대륙 적도지역의 열대성 계절 강우에 기인한다. 다른 나라의 경우 홍수는 범람으로 큰 재해를 가져오지만, 나일 강의 범람은 비옥한 검은 진흙물을 충적토 들판에 바르며 둑을 넘쳐 10~20km 너비의 옥토를 만들어 준다. 이 은총으로 산천초목이 생동하며 곡식, 목화, 과실이 생산되고 들짐승, 가축이 번식하며 신과 인간은 풍요의 즐거움을 구가하였다. 따라서 일찍이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이집트는 나일 강의 선물'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또한 나일 강은 상류에 급류와 대폭포가 가로막아 뱃길이 단절되고, 나일강 계곡을 넘어서면 황막한 사자색 사막이 한없이 펼쳐져 있어 외부인의 침입을 불허하였다. 이에 따라 이집트는 외부문명의 영향에서 격리.고립됨으로써 역사 형성기로부터 독특한 독자적 문화를 낳게 되었다. 기원전 3000년 이전 이집트 역사 초기에 나일 강 계곡을 통일한 세력이 하류 델타지역을 정복하여 강력한 통일국가를 달성하였다. 이 시기부터 이집트는 크게 초기와조기, 3왕국(고왕국.중왕국.신왕국)시대와 그 사이에 두 중간기를 넣어 구분하고, 그 후는 후기시대 또는 제 3중간기와 후왕조기로 분류한다. 또한 왕조로 셈하는 분류에서는 31왕조로 나눈다. 제 25왕조까지는 내분을 제외하면 큰 외침을 받지 않았으나 제 26왕조(기원전 664~525) 때 페르시아에게 정복당하였다. 무려 3000년간 세습군주인 파라오의 전제가 이어지고, 여기에서 왕은 종교적으로도 최고의 신관 혹은 심지어 신의 지위를 겸하는 신정체제하에서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유지하였다. 신관은 관료 역할도 겸하는 귀족이었다. 분봉된 지방영주의 세력이 켜져 강력한 권세를 갖게 되면 이집트는 상하로 나뉘어져 갈등과 혼란 속에 분권화되지만, 중간기 시대를 겪고 나면 다시 전제군주에 의해 중앙집권제를 회복하였다. 기원전의 이집트 문명은 3000년 이상을 기본 개념부터 정치체제, 종교 및 예술 형태까지 실질적 변화 없이 지속되었다. 3. 로제타 스톤 나일 강 삼각주 서쪽 지류의 기슭에서 15km 떨어진 곳에 인구 4만 정도의 로제타 시가 있는데, 1799년 이 근방에서 나폴레옹 군의 성채를 구축하던 포병사관 부샤르가 높이 114cm, 폭 62cm, 두께 28cm의 현무암 비석 하나를 발견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로제타 스톤(Rosetta Stone)이다. 비석 위쪽은 이집트의 상형문자, 중간 부위에는 흘림체의 통속문자, 그 아래는 그리스 문자로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영국의 이름난 의사로 물리학자이자 이집트학자인 영(1773~1829)은 1814년 비문의 통속문자를 해독하고, 프랑스의 이집트학자 샹폴리옹(1790~1832)은 1822년 비문의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데 성공하였다. 상부 양단과 하부 우측 구석이 깨진 이 비문은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공덕문으로 기원전 196년에 건립된 것으로 밝혀졌다. 옛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해명하는 단서로서 이집트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나일 강 해전에서 승리한 영국군의 손으로 넘어가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로제타석 탁본] 로제타석(영어: Rosetta Stone) 또는 로제타 돌은 기원전 196년에 고대 이집트에서 제작되어 멤피스에 세워진 화강섬록암 석비이다. 고대 이집트어로 된 법령이 위에서부터 신성문자, 민중문자, 고대 그리스어의 세가지 문자로 번역되어 쓰여 있는 화강암이다. 이 돌에 쓰여진 그리스어를 기반으로 1822년에 장프랑수아 샹폴리옹과 토머스 영이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하였다. 헬레니즘 시대에 조각되어 사이스 부근의 신전에 전시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다가 고대 말기나 맘루크 술탄국 시기에 옮겨져 나일강 삼각주의 로제타 마을 근처에 줄리엔 요새를 건설할 때 재료로 사용되었다. 1799년 7월, 이집트-시리아 원정 당시 프랑스군의 장교였던 피에르 프랑수아 부샤르에 의해 발견되었다. 로제타석은 고대 이집트어를 다른 언어와 병기한 기록 중 최초로 발견된 자료로, 미번역 문자이던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할 수 있을 지 모른다는 점에서 곧바로 큰 반향을 불러왔다. 로제타석의 탁본은 곧 유럽의 박물관과 학자들 사이에서 유통되기 시작했다. 1801년 영국이 오스만 제국과 함께 프랑스군을 알렉산드리아에서 물리쳤을 때 로제타석은 런던으로 운반되었다. 이후 1802년부터 대영박물관에 상설 전시되고 있다.
Board 추천글 2023.04.20 風文 R 1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