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껍데기 콜라겐이 많아서 피부에 좋다는 소문이 나서인지 여자 연예인들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돼지껍질이 자주 꼽힌다. 마오쩌둥도 즐겨 먹었다는 돼지껍질. 고소하고 쫀득한 맛이 일품이다. 그런데 ‘돼지껍질’ 대신에 ‘돼지껍데기’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는 듯하다. ‘껍질’과 ‘껍데기’는 구별되어 쓰이기도 하고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해서 헷갈릴 때가 많다. 사과, 귤, 양파 같은 과일, 채소 등의 단단하지 않은 외피를 ‘껍질’이라고 한다. 껍질은 주로 까거나 벗기는 것이 많다. 그렇다면 수박은?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껍질은 ‘딱딱하지 않은 물체의 겉을 싸고 있는 질긴 물질의 켜’를 말한다. 따라서 수박은 껍질이 맞다. 새우도 껍질이다. ‘껍데기’는 껍질보다 단단하다. 달걀, 조개, 소라 등을 싸고 있는 것은 껍데기이다. 그렇다면 윤형주의 노래 ‘조개껍질 묶어’ 가사는 틀린 것일까? 조개껍데기와 조개껍질은 두 형태가 널리 쓰여 복수표준어로 인정되었다. 맥락에 따라 뜻이 달라지기도 한다. “수박을 먹고 나서 껍데기는 버려라”에서 ‘껍데기’는 ‘알맹이를 빼내고 겉에 남은 물건’이라는 뜻이다. 베개껍데기, 과자껍데기가 이와 같다. 달걀, 호두, 은행, 땅콩 등은 알맹이를 직접 싸고 있는 얇은 ‘껍질’과 이를 둘러싼 ‘껍데기’로 나눌 수 있다. “껍질 상치 않게 호랑이 잡을까”란 속담이 있다. 호랑이의 가죽을 상하지 않고서 호랑이를 잡을 수 없다는 뜻이다. 호랑이가 껍질이면 돼지도 껍질이 맞다. 문득 신동엽 시인의 시 ‘껍데기는 가라’가 떠오르는 건 너무 생뚱맞은가. 임수민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Board 말글 2023.04.28 風文 R 2878
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그리스 신화와 영웅들) - 사진 자료 및 참고 자료는 제가 편집해 올린 것입니다. 제 2장 동방신화 9. 수메르 수메르(Sumer)는 기원전 4000~3000년부터 기원전 2000년 초기경까지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 번영한 고대 문명 도시국가이다. 그 이전인 기원전 5000년 이전에는 얼리 씨족문화가 형성되어 있었고, 그 이후 수메르의 에리두, 우루크(에레크), 라가시, 라르사 및 우르 등이 도시국가로 번영을 누리며 상업이 성행하고 서로 경쟁과 침략으로 주변 영토를 통치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24세기, 셈족의 아키디아인이 북부 메소포타미아에서 침입하여 수메르를 정복하고 아카디아 나라에 예속시켰다. 이들 셈족(노아의 장자 셈이 선조라고 추측한다)에는 옛 아카디아, 아시리아, 아람인, 아스라엘 및 페니키아인이 포함되며, 현재의 아랍인과 유대인들이 여기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들 셈족의 거듭된 유혈전쟁에 종지부를 찍고 최초로 통일을 이룩한 인물이 바로 사르곤(기원전 2350~2300)대왕으로, 그는 수메르를 비롯한 주변 여러 나라를 정복하여 아카디아 대제국을 건국하였다. 여기에서 사르곤은 단순히 통치자(Sharrukin)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어쨌든 아카디아인은 설형문자를 포함하여 수메르 문화를 흡수하고 그들의 문명을 참가하여 이를 널리 퍼뜨렸다. 그러나 이 왕조도 그리 오래지 않아 막을 내리고 수메르는 일시 다시 소생하여 라가시와 특히 우르 도시를 통치하였다. 그러나 왕조의 내부갈등과 주변 부족의 침입으로 기원전 20세기에는 종말을 맞이하였다. 한참 국위를 떨쳤을 때 수메르는 설형문자를 발전시켜 처음으로 민법, 상법, 은행법을 기록하였으며 산업으로는 요업.주조업.농업을 크게 발전시키고 또한 군사기술을 향상시켰다. 수메르 문명이 쇠퇴된 다음 바빌로니아 세력이 일어났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의 과거 역사가 그렇듯이 제국의 운명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하였다. 바빌로니아는 히타이트족과 다른 종족에게 정복당하여 멸망하였다.
Board 추천글 2023.04.26 風文 R 1473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셋 - 사랑으로 풀어내는 웃음보따리 책상을 지켜라 - 이현지(여.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 진입에 실패하고 외곽에서만 7년째 돌고 있는 30대 주부입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건만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합니다. 대단한 기업에서 10년째 근무하고 있는 남편의 엄청난 월급만으로는 서울 진입은 커녕 제 드레스비도 안나오는 것 같아 몇 푼이라도 보태볼 요량으로 조무래기들도 가르쳐보고, 조그만 사무실에서 잡일도 해봤는데, 점심값 내고, 파마하고, 스타킹 사신고, 가끔 보건복지부에 좀 내고, 교통부에 보태고 하고 나니 남는게 없더라구요. 이럴바엔 부족하지만 남편 월급만으로 알뜰살뜰 쪼개서 꾸려보는 게 현명하겠다는 생각읗 했습니다. 매달 25일이면 꼬박꼬박 월급봉투 가져다 주는 남편이 내심 든든했습니다. 사업하는 남편을 둔 친구들의 피를 말리는 궁핍을 지켜보면서 '내가 뽑긴 잘 뽑았지! 다달이 쥐꼬리만큼이라도 받아오는 게 어디야?' 고맙고 대견했죠.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 신문이나 드라마에서만 듣던 명퇴나 조퇴의 바람이 남편의 회사에도 불기 시작했다는 비보를 접한 건 작년말, 몹시도 춥고 바람이 사납게 불던 어느 날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7시면 '땡'하던 사람이 20분이 지나서야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내 기다리지 마라." "언제까지." "정년퇴직 때까지." "그렇게 오래?" "오늘 김차장 보따리 쌓다 아이가. 명퇴국 묵었다." 명퇴국! 순간! 바람을 등진 채 절벽 끝으로 내몰린 듯 명치끝이 시리고 다리가 떨려왔습니다. 아침에 골목 끝에 세워져 있던 버려진 군고구마통이랑 시장통 어귀에서 풀빵굽던 지치고 초라한 아낙네의 뒷모습이 퍼뜩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우짜노, 우짜노. 자기 회사는 괜찮다고 안했나?" "기습당했다. 이게 폭탄이라 카믄 내도 쓸리갔다 아이가. 김차장은 바로 내 뒷자린데... 아이구 무시라. 나쁜 놈들이 그새 책상까지 다 치웠다 아이가. 니 각오 단디 하그라. 내는 절대 못 나간다. 여기서 묵고 자고 해서러도 내 자리 지켜야 안되겠나." 언제는 자기가 차세대 주자며, 본부장의 오른팔이며, 팀 내의 아이디어 뱅크에 떠오르는 전설이라더니... 해서 여기저기서 스카우트, 제의가 물밀듯 들어와 본부장이 긴장한다는 둥, 자기 없으면 회사는 셔터 내린다는 둥, 여차하면 사표 던지고 나온다는 둥, 큰소리칠 때는 언제고 지금은 잘난 책상 하나 지키자고 저렇게 목숨거나 싶어 무지 실망스럽더라구요. '주변머리 없는 인간, 그래도 회사에서는 인정받는구나 싶어 든든했는데... 믿었던 내가 나쁘지... "그래 자기야, 집은 걱정말그라. 무슨 일이 있어도 틈을 보이면 안된데이." 잘난 남편이 직장에서 떨려 나왔을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저는 몹시 불안했습니다. 그리 똑똑하지도 못하고, 물려받은, 혹은 물려받을 재산도 없고, 벌어논 돈도 없고, 누구처럼 처가가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건강하기나 해? 위장병에, 편도선염에, 축농증에, 꽃가루 알레르게에 치질까지... 밝혀낸 것만 해도 종합병원 수준인데. 성격이나 좋아? 7남매 막내라 독선적이고 이기적인데다 고집은 얼마나 쎄? '아부'절대 못하잖아? 아무리 생각 해도 그이의 퇴직은 곧 저의 불행이자 재난이었습니다. 건강하고 성격좋은 제가 바로 군고구마통 끌고 나가거나 모래등짐이라도 날라야 할 판이라구요? 7년이나 살았으니 물릴 수 도 없고. 지캉 살다보면 드레스 입고 파티에 참석할 날도 있을 거라며, 봄이면 필드에서, 여름이면 해변에서, 가을이면 별장에서, 겨울이면 스키장에서 벽난로에 장작불 '따닥따닥' 치워가며 인생 즐길 날 있을 거라더니 벽난로에 장작불은 커녕 장작불 때서 군고구마 굽게 되었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어요. 10시가 넘어서야 기진맥진해서 돌아온 남편은 힘 없이 제 품에 쓰러지며 "자기야, 내는 자기만 믿는데이..." 이러는 겁니다. 머리에서 김나데요. 뭐시라, 내만 믿는다고? 자기만 믿으라고 큰소리칠 때는 언제고, 자기만 믿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고 그럴 땐 언제고. 먹을 거 안 먹고, 입을 거 안 입고, 3년이나 부은 내 적금! 내 피 같은 700만원 해양해서 가져가더니 그게 우째 됐노? 떡은 커녕 고물도 없더라. 내 말대로 튼튼건설이나 양심상사에 넣었으면 이자돈은 벌었지. '한보'는 와 사노? 와 사? 자기만 믿고 떡 700만원어치 잘 묵었다. 뭐? 내만 믿는다꼬? 툭하면 '니가 뭐 아노?' '니가 뭘 안다고 나서노?' '니 그래 잘 아나? 그라믄 니가 남편 하거라.' 요러더니 바등에 불 떨어지니까 내만 믿는다꼬? 어림없다. 당장 나가서 돈 벌어 오거라 마!' 하고 등 떼밀어 내 쫓고 싶은 마은 굴뚝 같은 걸 수양한다 생각하고 침 한번 '꿀꺽' 삼킨 후 말했습니다. "그래. 자기야 내만 믿어라." 그리고 등 두들겨 재웠습니다. 그날따라 다리도 못 뻗고 옆으로 잔뜩 오그린 채 새우잠을 자는 남편을 보며 측은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코도 구슬픈 가락으로 힘없이 골더군요. 드디어 아침이 어김없이 밝아오고 저희는 머리를 맞대고 작전에 들어갔습니다. 첫째, 절대 책상은 고수한다. 둘째,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한다. 셋째, 되도록 윗사람 눈에 뜨이지 말되 사적인 자리에서는 손이 발이 되도록 아부한다. ... 등등. 일단 마음을 정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담담하고 당당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책상 뺏어가도 문제없어. 내 뒤에 소파 있어." 엊그재까지만 해도 꽁지 내리고 제 품에 쓰러지더니 하룻새 용기백배한 남편은 보무도 당당하게 새벽길을 달려나갔습니다. '불쌍한 인간, 빽도 줄도 없이 몸으로 막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는구나.' 이런 남편이라 생각하니 사슴 시리게 측은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다면 한다는 거 아닙니까. 힘으로 버티겠다는데 누가 건드리겠습니까? 그날부터 남편은 누구보다 일찍 출근해서 책상 앞에 앉았으며, 본부장, 전무, 이사, 팀장까지 다 퇴근하고 야근하는 직원들까지도 다 나가야 비로소 안심하고 책상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점심시간엔 도시락 시켜먹구요. 틈을 보이면 안되니까요. 위에서 보기에도 열심히 일하는 것 같잖아요. 어쩌다 외출할 일이 생기면 차마 발길이 안 떨어져서 저만치 가다 돌아보고 또 저만치 가다 돌아보고... 거래처 가서도 10분마다 전화를 한대요. "나 금방 들어갈 거다." "나 지금 출발한다." "나 거의 다 왔다." 하루는 예기치 않은 접촉사고로 출근시간에 10분 늦게 도착하게 됐더래요. 현관에서 3층 사무실까지 뛰어 올라가는데 불과 2분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머리끝이 서고 등에서 땀이 나더래요. 사무실 문을 벌컥 여는 순간 햇살 한점 들어오지 않는 구석진 자리에서 초라하게 웅크리고 있는 남편의 책상이 눈에 들어오더래요. 그 감격이란! 잃었던 자식을 찾은 양 책상에 볼을 비비며 가슴으로 울었대요. 그 광경을 보고 실장님이 그러셨더래요. "은행나무 침대가 따로 없구마!" 그러던 중 또 한명의 조퇴자가 발생했습니다. 사장으로부터 '친전' 이라고 뻘건 도장이 찍힌 편지가 조부장 앞으로 날아들었던 겁니다. 속칭 그네들끼리 통하는 '폭탄' 이었습니다. 생각없이 봉투를 연 조부장은 '찍' 외마디 비명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이틀 후였어요. 나른한 오후를 가르고 전화벨이 짜증스레 울렸습니다. 왠지 불길한 예감에 손이 떨렸습니다. "여보세..." 전화를 받고 제가 미처 '요!' 도 끝나기 전에 "자, 자, 자, 자기야, 와, 와, 와 왔다..." 울음섞인 남편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오긴 뭐가 왔다고?" "치, 치, 친전... 내만 받은 거 아이다. 김과장, 오과장, 정차장도 받았다." "그 사람들도 뜯어봤대?" "정차장만! 쫙 찢어서 쓰레기통에 내삐리고 담배 한 대 빼서 밖에 나갔다. 마음 정리하고 있지 싶다."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싶어 막막하다면서도 후련한 감도 없잖아 있었습니다. "자기야, 낙심 말거라. 이게 제 2의 기회가 될지 누가 아노? 오히려 잘됐다. 자기도 확 찢어서 내버리고 온나. 소주 한 잔 하자." 대답도 없이 수화기 저쪽에선 '니가 뜯어라, 내가 뜯는다.' 웅성웅성 소란한 소리가 나더니 남편은 전화를 끊어버렸습니다. 충격받고 쓰러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1시간 후 제가 전화를 걸었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남편의 목소리는 침착했습니다. "자기 괜찮아?" "괜찮지 그럼 뭐..." "뜯어 봤어?" "별거 아니다." "뭐라고 쓰여 있는데?" "뭐. 별로..." "뭔데?" "아! 그냥 뭐... 보... 보름달싸롱에서... 내부수리 끝났다고..." 저! 그냥 뚜껑 열렸습니다. 남편은 소파를 점거당하는 줄 알고 불안해 했지만 그는 오히려 웃으며 떠났습니다. 모두의 가슴에 비수를 꽂은채. "지는 벌써 맘 묵고 있었더라. 사업을 할랑께요. 마누라가 미장원 하믄서 좀 모아논 게 있었더라." 그날부터 저에게도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저랑 눈만 마주치면 한숨을 들익쉬고 내쉬고... 바늘 방석이 따로 없었어요. 분위기 좀 역전시켜보려고 "자기 말대로 괜히 여자가 몇 푼 벌어볼려고 나서면 집안 꼴이 어수선해지고, 이 불경기가 쪽박차기 딱이지뭐. 남편 기만 죽이고 그지?" 그러자 남편은 저를 빤히 보더니 말했습니다. "남편 기 안죽더라. 이대리 봐. 기고만장하던데 뭐. 보따리 싸서 집에 들어가자마자 마누라가 통장 두 개를 '척' 내놓으면서 '당신 하고 싶은 거 하이소.' 하더래잖아. 되는 집안이지. 영업부 임과장 알지? 마누라 보험회사 다니잖아. 1년 좀 넘었는데 보수가 임과장보다 훨씬 많대지 아마. 그자식은 요즘 배짱이잖아. 오늘 전무실에 고개 바짝 들고 들어가더라니까. 뭘 믿고 그러는지..." “당신은 그게 그리 부럽나?” “부럽기는 나 그런 놈 아니야, 마누라 덕보고 살 놈으로 보여? 나 절대 그런 놈 아냐!” “그래 자기야, 돈 한 푼 안 벌어와도 살림 잘하고 건강하면 그게 버는 버는 거야. 아직 젊은데 뭐.“ 그러나 남편은 제 말을 듣는지 마는지 신문만 신경질적으로 뒤적거리더니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봐라! 여기 구민회관에서 실비로 도배기술 가르쳐 준단다. 아이구! 취업 알선까지. 부업으로 하면 짭짤하겠다. 이런! 남자면 내가 가겠구만 주부대상이라네, 의욕있고 건강한 주부들만 모신단다.” 치사하고 더러워서 구민회관도 찾아갔지요. 영세민 우선이라 자격 미달이었어요. 남편의 노이로제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동문선배라고 호형호제하며 따르던 박차장마저 회사를 떠나자 의지할 데 없는 남편은 개발부 김차장처럼 6년 전 창립기념일에 받은 우수사원 표창장을 복사해서 책상 밑에 끼워두겠다고 우겼습니다. “사장 표창장 붙은 책상을 어느 놈이 치우겠어?” 그런데 옆자리의 오과장은 책상보다 명패에 신경을 더 많이 쓰는 모양이었습니다. 각자의 책상위엔 부서명과 직함 그리고 이름이 새겨진 명패가 올려져 있는데, 부서와 직함은 고정돼 있지만 이름은 카드처럼 끼웠다 뺐다 할 수 있게 돼 있대요. 사장과 사돈의 팔촌의 이웃사촌인 오과장도 내심 불안했던지 퇴근할 때면 명패를 캐비닛 위 저 높은 곳에 까치발로 올려놓고 가면서 말한답니다. “명패만 있으면, 내는 소파에 앉아도 떳떳해!” 덩치 큰 책상보다 관리하기 쉬운 명패를 지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죠. 그러나 히트는 엉뚱하고 순진하기로 유명한 김대리였습니다. 명패에다 아예 이름카드를 절대 못 빼게 종이를 꾸겨서 열심히 끼워 넣고 있었대요. 옆에서 실장님이 지켜보는 줄도 모르고서. “봐라, 김대리! 니는 평생 대리로 있을끼가? 과장 시키줄라 했더니 안되겠구마.” “실장님, 지는 진급 안 해도 되는구만요. 만년 대리라도 월급만 매달 주면 되지라. 어제 20년 만기적금 넣었응게 적금 탈 때까지 버텨야지라.” 그럭저럭 한달이 지나 고맙게도 월급을 타게 되었습니다. 봉투를 내밀면서 남편은 말했습니다. “내 피와 땀이다. 한 푼 쓸때마다 내 살 뜯어간다 생각하고 애끼쓰거라.” 지난달과 달리 봉투가 좀더 두툼해진 것 같아 세어보니, 야근수당이 꽤 붙어 있었습니다. “자기야, 이러면 안되지, 화를 자초하는 거다.” “왜?” “안그래도 회사에거 경비절감한다고 책상들 빼가는데, 자기는 거기다 수당까지 받아가니 위에서 알아봐라. 감원대상 0순위다.” 준비상사태였습니다. 해서 그 다음날부터는 나의 야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마라. 일명 이순신 작전으로 들어갔습니다. 성공적이었습니다. 평소 나는 야근이 싫어요. 라고 외치고 다녀 이승복으로 통하던 남편이 매일같이 야근을 하는데다 수당을 신청하지 않으니 주위에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쯧쯧...! 사람 하나 버렸어.” “돈도 싫고 인간도 싫대.” “집에서 쫓겨났잖아.” 등등 별의별 루머가 돌았지만 남편은 끄떡 없었습니다. 대쪽같고 무뚝뚝하던 남편은 명퇴의 위기 앞에서 얼굴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부장님에게 결재판으로 뒤통수를 얻어맞아도 눈 한 번 꼴시는 일이 없이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더욱 분발하겠습니다. 남편은 이런 마음으로 읏으며 물러나와 영광스럽게도 전무님과 식사라고 함께 할라치면 옆에 앉아서 젓가락까지 숟가락 옆에 놓아주고, 물수건은 오른쪽에, 생선토막은 밥그릇 앞에 당겨드리고, 고기는 타지 않게 잘 뒤적여 앞에다 쌓아드리고..등등 그러나 결정적인 아부의 극치는 여기 또 있습니다. 며칠 전부터 100% 미국산 면행주를 들었다 놨다 눈독을 들이기 시작하길래 연유를 물어보니, 전무님이 난을 애지중지하시는데, 잎이라도 닦아드리는게 도리 아니겠냐고... 집안의 유일한 녹색식물인 행운목 수반에 담배꽁초 끄는 사람이 그렇게 얘기하더군요. 아부도 이쯤되면 질환의 경지에 온 게 아닌가 해서 요즘은 잠이 오지 않습니다. 차라리 군고구마통 끄는 게 마음 편할 거 같기도 하고... 혹시 MBC앞에 목 좋은 자리라도 있으면 연락 주세요. 지루한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Board 삶 속 글 2023.04.26 風文 R 767
수적천석(水滴穿石) 水:물 수. 滴:물방울 적. 穿:뚫을(통할) 천. 石:돌 석. [동의어] 점적천석(點滴穿石). [유사어] 우공이산(愚公移山), 적토성산(積土成山), 적수성연(積水成淵), 산류천석(山溜穿石). [출전]《鶴林玉露》 물방울이 돌을 뚫는다는 뜻. 곧 ① 물방울이라도 끊임없이 떨어지면 종내엔 돌에 구멍을 뚫듯이, 작은 노력이라도 끈기 있게 계속하면 큰 일을 이룰 수 있음의 비유. ② 작은 것이라도 모이고 쌓이면 큰 것이 됨의 비유. 큰 힘을 발휘함의 비유. 북송(北宋:960~1127)때 숭양 현령(崇陽縣令)에 장괴애(張乖崖)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관아를 돌아보다가 창고에서 황급히 튀어나오는 한 구실 아치를 발견했다. 당장 잡아서 조사해 보니 상투 속에서 한 푼 짜리 엽전 한 닢이 나왔다. 엄히 추궁하자 창고에서 훔친 것이라고 한다. 즉시 형리(刑吏)에게 명하여 곤장을 치라고 했다. 그러자 그 구실 아치는 장괴애를 노려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건 너무 하지 않습니까? 사또, 그까짓 엽전 한 푼 훔친 게 뭐 그리 큰 죄라고.” 이 말을 듣자 장괴애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네 이놈! 티끌 모아 태산[塵合泰山]이란 말도 못 들었느냐? 하루 한 푼[一文]이라도 천 날이면 천 푼이요, ‘물방울도 끊임없이 떨어지면 돌에 구멍을 뚫는다[水滴穿石]’고 했다.” 장괴애는 말을 마치자마자 층계 아래 있는 죄인 곁으로 다가가 칼을 빼어 목을 치고 말았다. 이 같은 일은 당시 상관을 무시하는 구실 아치의 잘못된 풍조를 고치려는 행위였다고《옥림학로(玉林鶴露)》는 쓰고 있다. [주] ‘수적천석’은 우리 나라의 속담(俗談) ‘낙숫물이 댓돌[臺石]을 뚫는다’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고사 성어임. 구실 아치 : 각 관아(官衙)에서 벼슬아치(官員) 밑에서 일을 보던 사람. 아전(衙前). 이속(吏屬). 서리(胥吏). 소리(小吏). 하전(下典).
Board 고사성어 2023.04.26 風文 R 1161
용찬 샘, 용찬 씨 우리 과 학생들 가운데 몇몇은 나를 부르거나 가리켜 이를 때 ‘용찬 샘’이라 한다. 그런데 이 말은 아무리 봐도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용찬 샘’을 ‘용찬 선생님’으로 고쳐 부르거나 가리켜 이른다 해도 마찬가지이다. 아랫사람인 학생이 윗사람인 나를 부르거나 가리켜 이를 때에는 그냥 ‘선생님’이라 하거나, 성명 뒤에 ‘선생님’을 붙여 ‘박용찬 선생님’이라 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예의에 맞는다. 간혹 이름을 뺀 성 뒤에 ‘선생님’을 붙여 ‘박 선생님’이라 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박용찬 선생님’이라 하는 것이 더 예의에 맞는다. 이는 외국 사람을 부르거나 가리켜 이를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버락 오바마 대통령’ 또는 ‘오마바 대통령’이라 하지 ‘버락 대통령’이라 하지 않는다. 한편 우리말에는 그 사람을 높여 이르거나 부르는 말로 쓰이는 ‘씨’가 있다. 그런데 ‘씨’는 더 이상 ‘높임’의 의미를 갖는 말로 인식되지 않고 있다. 윗사람이 아닌, 동료나 아랫사람에게 ‘박용찬 씨’ ‘용찬 씨’라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데서 얼마간 알 수 있다. ‘씨’가 ‘높임’의 의미를 잃게 됨에 따라 20세기 중반부터 그 사람을 높여 이르거나 부르는 말로 ‘씨’대신 ‘님’이 쓰여 왔다. 비격식적인 자리에서는 친근함을 드러내기 위해 ‘용찬 님’을 쓰기도 한다. 격식을 갖춰야 하는 자리에서는 예의에 맞는 부름말과 가리킴말을 골라 써야 한다. 비격식적인 자리에서는 친근함을 드러내기 위해, 덜 예의를 차린 부름말과 가리킴말을 쓸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친근함을 넘어서서 결례가 되는 말이라면 그 사용을 삼가야 한다. 박용찬 대구대 국어교육과 조교수
Board 말글 2023.04.26 風文 R 28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