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지다 연진아, 멋지다 루카셴코 “파이팅, 박연진. 브라보. 멋지다, 연진아.” 끔찍한 학교폭력의 피해자 동은(송혜교)은 ‘자랑스러운 동문상’을 받는 가해자에게 손뼉 치며 찬사를 보낸다. 그게 칭찬일 리 없지. 복수를 알리는 선언이다. 말을 포함해 모든 기호는 그 자체로는 아무 뜻도 갖지 못한다. 그걸 보고 듣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뭔가가 격발될 때 비로소 기호로서 의미를 갖는다. 상황과 맥락에 따라 열광과 환호,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도 조롱과 비꼼으로 읽힌다. 러시아 옆에 벨라루스라는 나라가 있다. ‘유럽의 마지막 독재자’로 불리는 대통령 루카셴코는 소련 해체 뒤 1994년부터 집권해 지금까지 무려 30년을 철권통치 중이다. 2011년에도 당국의 삼엄한 감시 때문에 반정부 구호를 외칠 수도, 시위대를 조직할 수도 없었다. 그때 누군가 기발한 생각을 한다. ‘박수치기’. 시민들은 광장을 서성거리다가 순식간에 모여 박수를 쳤다. ‘멋지다, 루카셴코!’ 그러곤 다시 침묵. 당국은 박수치는 걸 전면 금지했다. 사복경찰은 박수치는 사람이면 누구든 체포했다. 그중엔 팔이 하나밖에 없는 사람도 있었다. 독재자 루카셴코의 지지자들조차 그를 성원하기 위해 박수를 치려다가 움찔하며 못 치게 됐다는 소문도 들렸다. 모스크바 크렘린궁 부근에서 한 남성이 행인들에게 전단을 나눠줬다. 경찰이 그를 체포한 뒤 압수한 전단을 보니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백지였다. 뭐가 잘못됐는지 다 아는데 굳이 따로 뭘 적을 필요가 있겠냐는 거였다. 종잡을 수 없이 돋아나는 부지깽이를 봐서 그런지 저런 얘기들이 자꾸 떠오른다. 조롱하는 기호.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셋 - 사랑으로 풀어내는 웃음보따리 어머니, 왜 날 낳으셨나요? 95년 3월 4일, 제게 있어 이날은 여러 가지로 기억에 남는(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입니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 보름만에 결혼 약속을 한 후 바로 양가 부모님 상견례 자리를 친정집에서 마련했었답니다 그이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며느리 될 사람의 집안 분위기도 보시고 정성껏 차린 음식을 그의 부모님께 대접하고 싶은 저의 생각 때문이었죠. 양가 보모님이 만나시는 날, 축복이라도 하는 듯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고, 봄의 문턱에서 탐스러운 눈이라니 얼마나 반가운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집에서의 첫만남은 생각외로 좋은 시간이었지요. 술잔이 몇 순배 오가자 당사자들 보다도 어른들께서 더 흐믓해 하시며 서로가까이 지내자며 우리들의 화제는 오간데없이 사라져버렸지요. 마당에서 양가 어머님을 교차로 세우시고 기념촬영도 했지요. 시아버님 옆에 친정어머니, 시어머님 옆에 친정아버지, 외국 대통령들이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첫만남은 부드럽게 이어졌고, 기분이 최상인 저는 생낙지랑, 소고기 육회랑, 거북할 정도로 많이 먹었죠. 일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답니다. 서울로 올라오는 고속버스에서 우리는 두 손을 꼭 잡고 미래의 희망만을 떠올렸어요. 그는 저에게 정말 고맙다고 말을 아끼지 않았고, 양가 어르신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친구처럼 헤어졌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더없이 행복했죠. 이런 우리의 행복을 싣고 차는 계속 서울로 전진하고 있었죠. 그런데 대전을 지나자 눈이 녹아 미끄러워서인지 차가 많이 정체되었죠. 차가 정체되면 될수록 우리는 더욱 손을 꼬옥 잡고 미소를 주고 받으며 사랑을 확인했답니다. 그런데 죽암휴게소 부근에 왔을 때, 갑자기 배가 꼬이기 시작했어요. 부글부글 끓다가 우글우글 꼬이다가..., 정말이지 정신이 없었죠. 낙지랑 소고기랑 치고받고 싸우는지... 그이를 만난지 얼마되지 않은탓도 있었지만 항상 고상(때론 고고)하게 행동했던 저였기에 그이 앞에서 원초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죠. 하지만 생리적인 현상을 어찌하겠습니까. 드디어 서울 근처에서 야단이 나고 말았답니다. 참으려고 몸을 비틀어대고 힘을 주고 아랫배에 힘을 모아 놓고 하느님, 알라신이시여,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들이시여, 제발 이 위기에서 구해주소서! 발악에 가까운 기도를 계속했지만, 뱃속에서 천둥소리가 나더니 곧바로 줄줄 흘러나오려는 게 아닙니까. 저는 더 큰 망신 당하기 전에 용기를 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말했죠. "자기야, 자기야 좀 일어나봐. 운전수 아저씨한테 가서 차 좀 세워 달라고 해. 더는 못 참겠어. 빨리!" 잠들었던 그는 화들짝 놀라 일어나서 운전석으로 가더니 다시 돌아왔어요. "지금 차가 1차선에 있어서 세울 수가 없대. 서울 거의 다 왔으니까 조금난 참아." 그는 제 손을 꼭 쥐어주며 안타까워했어요. 그러나 제 온뭄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혔고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었어요. "차 좀 세워달라고 하란 말야, 빨리!" 저는 악을 써대기 시작했죠. 밤이라서 잠들었던 다른 손님들이 뒤척이며 눈을 뜨기 시작했어요. 초조해진 저는 오만상을 찌푸렸고, 그이는 운전석과 제 사이을 오가며 어쩔 줄을 몰라했어요. 그러다가 더는 이대로 의자에 앉아 있다가는 일낼 것 같아 바닥에 주저앉은 저를 보자, 그이는 신문지를 꺼내 주더군요. 아마 깔고 앉으라고 그런 모양이었어요. 그러나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저는 신문지를 딴 용도로 쓰고 말았죠. 그 신문지를 바닥에 깔고 전 그만... 전 그만... 저질러버리고 말았어요. 누군가의 표현대로 단숨에 예술의 경지에 오르고 만 것이었죠. 그런데 무슨 예술적 승화가 이리도 시원한지... 저의 의식은 오직 시원하게 제 볼일을 본 기쁨에만 빠져들었죠. 얼마나 시원하던지... '우주의 모든 신들이시여 감사하나이다. 이렇게도 후련할 수가...' 그러나 누가 또 그 말을 했던가.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고. 예술의 향기는 말없이 길고도 넓게 퍼져갔고, 사람들은 하나 둘 고개를 들기 시작했죠. 그제서야 오로지 창작에만 몰두했던 저는 제 인생을 저주하며 제 인생이 여기서 마감되기를 빌었답니다. 아니 시간이 영원히 정지하기를 빌고 또 빌었죠. 간절히...! 망연자실한 그이 앞에서 저의 고상하고 고고했던 자존심은 송두리째 뭉개지고 말았으니... '어머니! 왜 날 낳으셨나요...' 잠시후 버스는 터미널에 도착했고, 저는 고개 숙인 여자가 되어 신문지를 의자 아래에 숨긴 채 조용히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었죠. 신문지 뭉치를 들고 맨 나중에 내릴 땐 거의 전 청문회 입장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쪽팔림도 잠시, 전 또 다시 '예술의 전당'으로 달려가야 했습니다. 겨우 수습을 하고 거울 앞에 서니 제 모습이 가관이더군요. 밖에 나오니 그이가 세상에서 가정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는 제 손을 잡더니 괜찮냐고 몇 번이나 물었고, 그리고는 제 손에 뭔가를 쥐어주며, '예술의 전당'에 한 번 더 가라는 거예요. 어디서 구했는지 정말 자상하기도 하지. 엄청난 감동의 물결이 가슴에서 철렁였죠. 하지만 팬티는 아줌마들이 입는 대자에 웬 자석까지 달린 자석팬티였죠. 그러나 제가 이것저것 가릴 형편입니까. 일단은 갈아입고 나갔죠. 그가 씨익 웃더군요. 저도 따라 부끄럽게 웃었죠. 다음날 그가 전화로 심각하게 말하더군요. "많이 생각해 봤는데 아직까지 일을 가리지 못하는 여자를 어떻게 데리고 사냐? 결혼은 없었던 걸로 하고, 양가 부모님께는 내가 잘 말씀 드리겠다." "..." 저는 아무 말도 알 수 없었고, 남편은 다시 말을 이었어요. "꼭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야. 결혼 후 남편을 하늘처럼 받들고 말 잘 들으면 입을 꼭 다물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비빌을 지키기가 어려울 것이야." "네. 그렇게 할게요." 몇 번을 약속하고 그해 겨울 결혼식을 올렸지요. 그리고 그는 결혼 이후로 잊을만 하면 한 번씩 상기시켜 주더군요. "고속버스 생각나." 해놓고 킥킥댄답니다. 그러면 저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 소리만 해봐라. 그때는 이혼이야. 알았어." 하고 으름장을 놓지만 그는 연신 히죽히죽 웃으며 한술 더 떠서 말 한답니다. "장인 어른께 전화나 할까. 당신 딸 데려가라고." '내 인생이 우째 이리 됐나. 아들만 낳아봐라. 그때는 그렇게도 안될걸. 어디 두고 보자.' 이렇게 속으로 별렀지만, 결국 신도 남자였더라구요. 저는 저를 쏙 빼닮은 딸을 낳았답니다. 결국 남편의 앞날은 무궁무진하게도 딱 트여 있고, 저의 앞날에는 어두운 터널만이 가득하게 되었죠. 우째 이런 일이...! 신이시여! 이 어린양을 불쌍히 여기시고 튼든한 아들 한 놈 보내주시어 수렁에서 저를 구원해 주소서 아멘!
Board 삶 속 글 2023.04.14 風文 R 734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사람들이 묻더라. 지금 하는 일을 어떻게 하게 되었냐고. 뭔가 필연적이고 운명적인 이유를 기대하면서. 이를테면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다거나(풉), 공부에 필요한 끈기를 타고났다거나(우웩) 하는 거 말이다.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식으로 미래를 쫀쫀하게 설계하며 사는 건 거짓말이거나 자기애가 강하거나 겁이 많은 게 아닐까. 중3 때 금오공고를 가려고 했다. 박정희의 전폭적 지원으로 세운 학교라 학비와 기숙사비가 전액 면제였다. 거길 갔다면 노숙한 기능공으로 살고 있겠지(그것도 괜찮았겠다). 담임이 피식 웃으며 일반고를 가랬다. 갔다. 대학도 그랬다. 적당히 국어 선생이나 하며 살려고(미안, 국어 선생님들) 국문과에 가고 싶다고 하니 담임은 무심히 허락을 해줬다(상담 없이!). 어쩌다 보니 대학원에 갔다. 졸업하자마자 몇년을 직장생활을 했다. 어찌저찌하여 다시 선생을 했다. 나도 배운 적 없는 글쓰기를 허덕대며 가르치고 있다(미안, 학생들). 매주 이 칼럼을 쓰는 것도 어쩌다 보니 하게 된 일. 이 모든 것의 출발은 그게 아주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싫지만은 않아서였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자기 힘으로 돌파해왔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이 삶의 우연성과 복잡성을 깨닫기란 발가락으로 귀를 파는 일보다 어렵다. 운명은 타인들과의 우연한 만남과 조응으로 이루어지나니, 지금 내 모습이 어찌 나의 것이겠는가. ‘현실’을 받아들이되 얽매이지 않으려면, 순간순간 만났던 타인의 음성을 다시 듣고 싶다면, ‘어쩌다 보니’라는 말을 내뱉어보시라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셋 - 사랑으로 풀어내는 웃음보따리 내 인생 책임져 이종환, 최유라씨 안녕하십니까? 저는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며 이 한몸 불살라 국민의 안녕과 행복을 제 손으로 지켜 나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불철주야 학업에 열중하고 있는 복학 2학년의 영남대 학생입니다. 제가 오늘 이렇게 편지를 쓰는 것은 제게는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지만, 이 한몸 희생하면 이종환, 최유라씨는 물론 전국의 수많은 애청자들이 잠시라도 더위를 잊고 마음껏 웃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펜을 들었습니다. 얘기를 시작하면 이렇습니다. 며칠 전이었죠. 6월말에 기말고사가 끝남과 동시에 방학을 맞이한 저는 이번 대학은 절대로 헛되이 보낼수 없다는 굳은 결심 하나로 학업에 열중하기 위해 도서관행을 결정했습니다. 남들은 피서다 뭐다 난리겠지만 요즘 대학교는 취업난 때문에 공부를 하느라 정신이 없거든요. 저도 그래서 도서관에서 여름을 나기로 했던 겁니다. 날씨가 더운지라 저의 옷차림은 헐렁한 반바지에 T셔츠 그리고 공부할 책 몇 권을 넣은 가방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만원버스에 시달리지 않으려고 일부러 출근시간이 지난 느지막한 시간에 집을 나선 저는 학교로 가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버스안에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앉을 자리가 하나도 없더군요. 그런데 버스 중간쯤에 웬 낯익은 얼굴 하나가 눈에 들어오길래 자세히 보니 우와 아니나 다를까. 평소 흠모해 마지않던 그 아가씨가 앉아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아가씨는 한 학기 동안 같은 강의를 들었던 같은 학교 여학생인데 얼굴 이쁘죠, 성격 명랑하죠, 게다가 목소리까지 최유라씨 뺨칠 정도로 간드러지는 바로 꿈에 그리던 저의 이상형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소심함 때문인지 몇 번이고 고백해야지 하는 마음만 먹었을 뿐 한 학기가 지나도록 같이 강의를 들으면서도 말 한마디 못 붙여 봤습니다. 그런데 바로 오늘 하늘이 저에게 기회를 준것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저는 결심했습니다. 오늘이야말로 사생결단을 내고야 말겠다구요. 저는 천천히 걸어가 그녀 앞에 섰습니다. 마음씨도 착하지 저의 가방을 받아주더라구요. “이거 여기서 당장 뭐라고 말을 걸어? 아냐 여긴 너무 시끄러우니까 버스에서 내린 다음 얘길 해야지, 근데 무슨 말부터 하지?” 저 커피나 한 잔? 아냐, 아냐, 이건 너무 촌스럽고 좀더 세련되고 근사한 말 없을까? 이런 저런 생각에 저의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져갈 무럽 그녀의 뒷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내리더군요. “그래, 아직 몇 정거장 남았으니까 앉아서 천천히 생각해 보자.” 하며 아가씨의 바로 뒷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순간 저의 눈에 한 아주머니가 들어오더군요. 그때 버스 안에 서 있던 사람을 그 아주머니와 저 둘뿐이었거든요. 그 아주머니도 그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자리를 쟁취하기 위해 벌써 스타트를 한 상태였죠. 저는 이 아주머니께 자리를 양보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대사를 앞두고 있는 제가 이런 사소한 일로 그르쳐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하늘도 무심하시지 사건은 거기서 시작되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마치 맹수가 먹이감을 사냥하듯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고 때맞춰 급출발을 해버린 버스 덕에 더욱더 스피드를 얻은 아주머니는 그만 중심을 잃어버렸습니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아주머니는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식으로 엉겹결에 움켜쥔 것이 하필이면 저의 반바지였습니다. 반바지 고무줄이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고무줄 반바지는 저의 무릎 아래로 내려가 있었습니다.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지요. 그러나 저는 침착했습니다. 오늘 아침 나올 때 팬티를 갈아입고 나오길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나오기 전에 입고 있던 삼각팬티를 벗어버리고 사각팬티로 갈아입 었었거든요. 하긴 반바지나 사각팬티나 망신스럽기는 거기서 거기지 뭐 별차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바지를 올리려던 저의 눈에 그제서야 파악이 된 사건현장. 정말 경악을 금치 못하겠더군요. 저는 더 이상 침착할 수가 없었습니다. 믿고 있던 팬티마져 있어야 할 위치에서 벗어나 허벅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제서야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더군요. 버스 안에 있던 수십 개의 눈들이 모두 제쪽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시선들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그녀의 시선. 저의 바로 앞에 앉아 있던 그녀는 정면에서 그것도 바로 그녀의 코앞에서 일어난 사건을 그 누구보다도 더 생생하게 보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아주머니는 제게 계속해서 미안하다고 말씀을 하셨지만 그게 어디 제 귀에 들어오기나 하겠습니까. 달리는 버스 안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당황했었는지 이해가 안되시는 분은 버스안에서 반바지를 한번 무릎까지 내려 보세요. 죽고 싶으실 겁니다. 마침 버스가 정차하길래 그냥 내려버렸죠. 그곳에서 내려 학교까지 걸어간 저는 그녀와 마주칠까봐 도서관에도 가지 못하고 학교 앞을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삐삐가 한 통 들어와서 확인해보니 그녀가 제 가방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다며 찾으러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 가방을 그냥 맡겨둔 채 내려버렸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고 잠시 망설임 끝에 가방을 찾으러 갔습니다. 보여줄 거 못 보여줄 거 다 보여줬는데 더 이상 창피할 게 뭐 잇겠느냐고 생각을 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며 이것이 기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만나기로 결심했습니다. 도서관 앞 벤치에서 저를 기다리던 그녀에게서 가방을 건네 받고는 다짜고짜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책임지십시요." 그녀는 놀란 눈을 치켜뜨며 묻더군요. "예? 뭘 책임져요?" "볼 거 다 봤으니까 책임지시라구요." "연락처를 몰라서 가방 안에 수첩 본 거밖에 없어요. 다른 건 아무것도 안 봤어요." "그게 아니라 아까 버스 안에서 본 거 말이에요. 제가 24년간 고이 간직해온 순결을 아가씨한테 송두리째 뺏긴 거라구요. 그러니까 책임져요." 그제서야 그녀는 무슨 얘기인지 알겠다는 듯 웃으면서, 그것도 마치 최유라씨처럼 웃으면서 어떻게 책임지면 되냐고 하더군요. "그건 중요한 문제니까 지금 결정할 수 없고 앞으로 자주 만나면서 서로간의 협의를 거쳐서 결정하도록 하죠." 그렇게 되어 저는 그녀와 지금도 매일 만나고 있으며 저의 인생을 그녀가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습니다.
Board 삶 속 글 2023.04.13 風文 R 5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