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소희’에 숨은 문법 특성화고 3학년 소희는 콜센터로 현장실습을 나가 인터넷 해지를 원하는 고객을 ‘방어(방해? 저지?)’하는 부서에서 일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영화는 청소년 노동자의 죽음이 누구의 책임인지 탐색해 올라간다. 하지만 모든 걸 숫자로 치환하는 세상에서는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숫자가 책임자다. 사회를 ‘돌아가게 하고’ 사람을 ‘작동’시키는 스위치는 숫자다. 이제 우리는 사랑에 가슴 두근거리지 않는다. 성과지표 합격률 취업률 가입률 지지율 인상률 연봉 같은 것들에 가슴이 뛴다. 영화의 매력은 제목에서 나온다. 피해자를 내세우고 ‘그다음 피해자는 누구냐?’며 다그치는 제목이라면 ‘소희 다음’ 정도면 될 텐데. 이상하다, ‘다음 소희’라니. 흔히 ‘다음’ 뒤에 오는 명사는 ‘다음 기회, 다음 정류장, 다음 사람, 다음 생’처럼 일반명사들이다. ‘다음 기회’는 지금과 다른 계기를 맞이할 듯하고, ‘다음 정류장’에서는 다른 풍경이 펼쳐지겠지. ‘다음 피해자’라면 다른 인물이 다른 사건을 비극적으로 만날 것이다. 그런데 ‘다음’ 뒤에 ‘소희’라는 고유명사를 박아 넣었다. 이렇게 되니 빈틈이 생기지 않는다. 개별성이 사라졌다. 회로 변경의 가능성을 끊고 마개를 닫아버렸다. ‘당신 = 다음 소희’. ‘소희 다음’은 당신이 아닐 수도 있지만, ‘다음 소희’는 반드시 당신이라고 들린다. 당신이나 나나 모두 소희다. 버둥거려봤자 소용없다. 다음도 소희, 그다음도 다시 소희. 무한 반복하고 무한 회귀하는 소희. 구제불능 사회의 절망감을 이렇게 간단하면서도 새로운 문법으로 표현하다니.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게으른 사람에겐 돈이 따르지 않고 변명하는 사람에겐 발전이 따르지 않고 거짓말하는 사람에겐 희망이 따르지 않고 간사한 사람에겐 친구가 따르지 않는다,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에겐 사랑이 따르지 않고 비교하는 사람에겐 만족이 따르지 않는다, 먹을 것이 없어 굶는 사람도 딱하지만 먹을 것을 앞에 두고도 이가 없어 못 먹는 사람은 더 딱하다. 짝 없이 혼자 사는 사람도 딱하지만, 짝을 두고도 정 없이 사는 사람은 더 딱하다. 땅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채송화씨를 뿌리면 채송화를 피우고 나팔꽃 씨를 뿌리면 나팔꽃을 피운다, 정성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나쁜 일에 정성을 들이면 나쁜 결과가 나타나고, 좋은 일에 정성을 들이면 좋은 결과가 나타난다. 잘 자라지 않는 나무는 뿌리가 약하기 때문이고 잘 날지 못하는 새는 날개가 약하기 때문이다. 행동이 거친 사람은 마음이 삐툴어졌기 때문이고 불평이 많은 사람은 마음이 좁기 때문이다, 더하기와 빼기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된다는 건 세상 사람들이 다 알지만, 좋은 생각에 좋은 생각을 더 하면 복이 된다는 건 몇 사람이나 알까? 둘에서 하는를 빼면 하나가 된다는 건 세상 사람들이 다 알지만, 사랑에서 희망을 빼면 이기가 된다는 건 몇 사람이나 알까? 세월이 더하기를 할수록 삶은 자꾸 빼기를 하고 욕심이 더하기를 할수록 행복은 자꾸 빼기를 한다, 똑똑한 사람은 더하기만 잘 하는 것이 아니고 빼기도 잘 하는 사람이다. 훌륭한 사람은 벌기만 잘 하는 것이 아니고 나누어 주기도 한다. ㅡ 좋은글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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