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그리스 신화와 영웅들) - 사진 자료 및 참고 자료는 제가 편집해 올린 것입니다. 1. 그리스 나라의 개요 고대문명 문화와 문명이라는 말은 흔히 같은 뜻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두 낱말을 대비시켜 비교적 물질기술에 의존하는 인간사회의 편리를 위한 발전적 소산은 문명(Civilization)이라 하고, 이에 반하여 인간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활동으로 정신에 의존하는 바 큰 성과를 문화(Culture)라 하는 견해가 있다. 구체적으로 문화는 예술.도덕.종교.학문 등 인간의 내적 정서 활동의 소산을 가리키고, 주로 언어와 얽혀 있다. 문명은 문자 그대로 도시를 만들어 시민생활을 한다는 말이다. 19세기에서 20세기의 독일 문화철학에서는 문명에 대비하는 문화상위론을 주장하였다. 다시 말하여 인간의 독창적인 정신 소산을 문화라 하며, 현실적 인간 생활 영위에 요구되는 합리적 수단을 문명이라 본 것이다. 이와는 달리 인류발달사에 있어서는 야만, 미개에 이어지는 단계를 문명이라 일컫고 있다. 그리스에는 구석기시대에도 주민이 있어 문명을 지닌 흔적이 있고 신석기인은 어디서 왔는지 잘 모르나 기원전 3000년 청동기시대에 들어가 2000년간 융성한 에게 세계를 이루다가 쇠퇴하였다. 그리스의 초기 문화와 문명은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 후반까지 이뤄진 크레타를 중심으로 한 미노아 문명(기원전 2200~1400)이다. 그리스 본토 문명(기원전 1600~1200)과 구분되는 키클라데스 문명도 특징적이다. 이 문명은 기원전 3000년경의 빛나는 유물, 예컨대 옥제품이나 대리석 조각상, 항아리 등의 발굴로 입증되었으며 미노아 문명이나 헬라스(미케네) 문명과는 다른 특징과 개성을 가지고 있다. 미노아 문명의 절정기(기원전 1600~1400)에 이르러 상류사회는 매우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궁전과 정원, 대리석 층계로 이은 웅장한 고층건물, 발달된 위생시설을 갖춘 거실, 침실, 광 등을 미로형으로 배치하였다. 상쾌한 채색벽화는 이 시대 사람의 모습과 습관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발굴자 에반스는 멋들어진 한 여인의 프레스코 초상회에 '파리의 여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궁전, 가옥 및 무덤에서 출토된 수많은 귀중품, 생활용품, 상아조각상, 광택 있는 홍색 고급토기, 정교한 금동제 기물들, 석각인, 반지 등은 그들이 누린 문화가 얼마나 찬란하였는가를 뒷받침한다. 부유하고 쾌활한 심성을 가진 사람들은 오락으로서 장기나 황소 뛰어넘기 같은 운동경기를 즐겼으며 왕과 여러 신, 특히 뱀여신을 숭배하였다. 이들은 동방의 이집트, 아시리아 등과의 교역과 접촉으로 해외문명을 받아들이고 이를 다시 독자적인 문화로 발전시켰다. 이집트의 기념비적 문명과는 달리 식물과 동물 등 자연을 주제로 장식적 예술을 창안하였으며 그 문화는 인근의 섬들과 그리스 본토로 전파되었다. 테라(산토리니) 섬 유적, 특히 아크로티리 도시의 출토물은 크레타 유적과 맞물려 플라톤의 대화편(기원전 4세기)에 나오는 아틀란티스의 실체라고 추리하는 견해도 거듭 나오고 있다. 한편 청동기시대 초반, 크레타와 주변 섬에 관련이 있는 인종과 소아시아인들이 그리스 본토로 침투 혹은 침입하였다. 청동기시대 중반 기원전 2000년 직후에 그리스 본토는 두 차례의 침입을 받게 되는데, 현재 그리스인의 선조가 되었다고 생각되는 북방 코카서스의 아리안 인도족이 들어와 점차 융화되었다. 초기 그리스인은 에게인의 주류를 형성하고, 크노스스에 나라를 건설한 후 점차 섬을 넘어 그리스 본토, 소아시아, 시리아, 팔레스타인 및 이집트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고, 서방으로는 리파리 제도, 이스키아, 남부 이탈리아로 뻗어나가 기원전 8~7세기 그리스 식민도시를 크게 확산시켰다. 본토인은 크레타의 성숙한 미노아 문명의 영향을 받아 점차 개성적인 문화를 발전시키고 미로식 궁전은 성채로 변천하였다. 그러나 내부 장식벽화, 작은 조각품, 금속공예, 항아리 등은 크레타의 그것과 유사하며 흔히 미케네 문명으로 불린다. 시기적으로는 대략 기원전 1600~1100년 사이에 해당하는 이 문명의 후반기인 기원전 1400~1100년은 그리스의 영웅시대라 하며 아가멤논 왕의 세력권 아래 있던 미케네는 연합군을 편성하여 트로이 전쟁을 감행하였다. 트로이가 함락되고 얼마 되지 않은 청동기 말기에 미케네족은 멸망하고 많은 도시가 파괴 소각되었다. 멸망의 일부 원인은 먼 혈연의 도리스인이 일리리아인의 대이동에 밀려 침입하였기 때문인데, 결과적으로는 북방에서 새로운 그리스족이 내려오게 되었다. 이것을 헤라클레스 후예의 귀환이라 부르는데, 이들이 갑자기 토착문화를 덮치면서 문화 수준이 하락하고 건축, 항아리 모양등이 완연히 달라졌다. ****************************************************************************** 트로이아 전쟁(참고자료) [〈불타는 트로이〉, Johann Georg Trautmann의 18세기 유화 ] 그리스측 주장 이 전쟁의 유래는 ‘퀴프리아’에 상세하게 나와 있다. 제우스는 너무 증가한 인구를 조절하기 위해 질서의 여신 테미스와 머리를 맞대었고, 결국 큰 전쟁을 일으켜 인류의 거의 대부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결의를 다졌다. 올림푸스에서는 인간의 아들 펠레우스와 티탄 족의 딸 테티스의 혼담이 오가고 있었다. 그러나 불화의 여신 에리스 만이 잔치에 초대받지 못하자 화가 난 그녀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바치라는 헤스페리데스의 황금 사과(불화의 사과)를 신들의 자리에 보냈다. 이 제물을 놓고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세 여신이 격렬한 대립이 벌였고 제우스는 이 사과가 누구에 적합한 지를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게 맡겼다. (파리스의 심판) 세 여신은 모두 가장 아름다운 옷차림을 하고 파리스 앞에 섰다. 헤라는 세계를 지배할 힘을, 아테나는 어떠한 전쟁도 승리를 할 수 있는 힘을, 아프로디테는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각각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파리스는 젊었기 때문에 부와 권력을 제쳐두고, 사랑을 선택하였고 아프로디테의 권유에 의해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의 왕비 헬레네를 빼앗아 갔다. 파리스의 여동생이자 트로이의 공주 카산드라 만이 이 사건이 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라고 예언했으나 아폴론의 저주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메넬라오스는 형인 뮤케나이의 왕 아가멤논에 그 사건을 말하였고, 또한 오디세우스와 함께 트로이로 가서 헬레네를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파리스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기 때문에, 아가멤논, 메넬라오스, 오디세우스는 헬레네 반환과 트로이를 징벌하기 위해 원정군을 조직했다. 이 전쟁으로 신들도 편이 갈라져 헤라, 아테나, 포세이돈이 그리스를 편들었고, 아폴론, 아르테미스, 아레스, 아프로디테가 트로이를 편들게 되었다. 페르시아측 주장 페르시아측에서는 전혀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는데 헤로도토스가 기록한 페르시아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 신화에서 지중해를 건너간 여성들은 사실 납치혼의 피해자들이었고 신화속 파리스가 헬레나를 트로이로 데려간 것도 그 납치혼의 보복이었다는 주장이다. 전설속의 여신 이오는 사실 포이니케 사람들이 헬라스의 아르고스에서 이오를 납치한 것에서 시작되었고 헬라스측도 이에 보복해 포이니케의 영토인 튀로스에서 공주 에우로페를 납치했다고 한다. 그 뒤 그리스인들이 메데이아 공주를 납치하는등 보복 납치혼으로 신경전을 일삼다가, 일리온(트로이)의 왕자 알렉산드로스(파리스)가 보복 목적으로 라케다이몬(스파르타)에서 헬레나를 납치했고 이것이 악화되어 전쟁으로 확대되었다는 주장이다. ****************************************************************************** 이 시대에 특기해야 할 유물은 크레타와 그리스 본토에서 출토된 서판이다. 크레타에는 초기 청동기시대에 그림표기가 있었으며, 중기에는 드물지만 상형문자가 나타나는데 말기에는 2획문자로 선문자 A(기원전 2000~1500)와 선문자 B(기원전 1500~1100)가 등장하였다. 크노소스에서 출토된 선문자 B는 1952년 벤트리스가 해독하는 데 성공하였다. 선문자는 초기 형태의 그리스 문자이다. 서판의 기록은 영구적 문서가 아니고 그때 그때에 기록해 둔 비망록 정도에 불과한데, 기원전 1400년경의 화재로 점토서판이 구워지는 바람에 후대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 그밖에 기원전 1200년경 불에 탄 본토 도시 퓰로스의 서판은 유일하게 글씨가 쓰여진 점토판으로 대량 출토되었다. 기원전 11세기부터 역사시대에 들어가기까지의 기간은 단지의 무늬에 연유하여 기하학기로 부르며 초기 철기시대에 해당된다. 이 무늬단지는 500년간의 암흑시대에 드물게 남겨진 유물이다. 기원전 8세기경 역사시대로 들어오면서 암흑시대에서 탈피하기 시작하였다. 페니키아에서 들어온 알파벳 문자가 보급되어 다시 예술, 철학, 서사시(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듀세이아)가 정착하여 고전문화가 가꾸어졌다. 각 도시마다 독자적인 화폐가 주조되고 나아가 자체적으로 달력을 갖게 되었다. 일단 외침을 받으면 국가 간에 동맹을 맺어 공동으로 대처하였으며, 올림파아 축제기간이나 질병 등의 극한 상황에서는 싸움을 중지하는 슬기로움을 발휘하였다. 열정적이고 전투적인 분립주의는 폴리스의 정치활동의 중요한 특성으로 나타났고, 빈약한 영토에서 발전된 정치제도는 앞서 존재한 그 어떤 것보다도 개방적이고 시민 개개인의 광범위한 참여를 요구하였다. 단 이러한 모든 시민(여자.어린이.노예는 제외)의 참여는 오직 소규모 정치단위들 속에서만 가능하였다. 이러한 문화는 특히 아테네와 그 주변지역에서 크게 융성하였고 기원전 5세기에 절정에 달하였다.) 그리스는 서구문명의 발상지이며, 서구의 지성사는 바로 이 그리스인과 더불어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앤드루스는 그의 저서 '고대 그리스사'의 권말에서 "대다수 그리스인들이 그들 문명의 독특한 장점이 자유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그 생각에 동의하길 주저할 까닭은 없으며 또 그 자유의 현상을 그리스인들이 의도하였던 정치영역에만 국한시킬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스는 우리가 같은 공기를 호흡할 수 있는 세계이다. 그 세계의 걸작품을 바라볼 때는 물론이고 일상적 사항을 볼 때조차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만큼 우리 세계와는 판이한 것이면서도, 그들을 움직였던 문제들이 오늘날의 문제와 대체로 같은 범주에 속한 것이라고 느낄 정도로 두 세계는 서로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에 대한 연구는 그저 기원을 알고자 하는 호고성 탐구에만 그칠 일이 아니다. 호메로스와 헤로도토스, 유리피데스와 플라톤은 우리를 경탄하게 하고, 나아가 현 세계에 대한 우리의 통찰력을 보다 예리하게 다듬어 줄 수 있는 힘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맺음말은 서구인의 의향이며 우리에게는 별 것 아닌 것 같으나 서구문화를 받아들인 지 이제 100년이 넘고 더구나 지나치게 빨리 돌아가는 현대화 물결에 휩싸여 온 지난 반세기를 돌아볼 때 지금의 우리에게도 적절하고 의미있는 충언으로 생각된다.
Board 추천글 2023.04.18 風文 R 1410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셋 - 사랑으로 풀어내는 웃음보따리 남자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오늘 이렇게 제가 틈틈이 기회를 엿보다가 쉬는 날 마음을 먹고 펜을 든 것은 도저히 저 혼자만의 비밀로 가슴에 간직하고 살기엔 너무도 가슴 시린 추억이 있어서 용기를 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의 일입니다. 당시 저는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유망한 중소기업에 잘 다니고 있던 성실한 청년이었습니다. 아무하고나 싸우지도 않고 누구와 섞여 있어도 눈에 띄거나 구별되진 않는 한마디로 말해서 몹시 내성적이지만 그래도 할일 다하는 착실한 직원이었지요. 이런 저의 취미는 바둑이었습니다. 집에 돌아가면 밤새도록 TV의 바둑해설을 보고 그것도 모자라서 비디오 바둑 테이프를 빌려다 보곤했습니다. 그런 저를 보고 주위사람들은 샌님이니 목사님이니 하고 놀렸지만 저는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걱정을 하시는 건 제 부모님들이셨습니다. 나이 30이 다 되도록 데이트는 커녕 집에 전화오는 여자 하나 없이 밤낮 바둑만 보고 어쩌다가 맞선을 보게 해도 나가서 퇴짜나 맞고 오질 않나 하니, 특히 어머니의 성화가 이만저만이 아니셨습니다. 그래 제 부모님들은 저 때문에 곧잘 다투기까지도 하셨답니다. "아이고, 재가 뭐가 되려고 저러는지. 내가 그래도 재를 가졌을 땐 태몽으로 용꿈을 꿨는데, 어찌 저리도 숫기가 없는 것이 꼭 미꾸라지 같냐." 하시는 어머니께 아버지께선 되레 어머니를 나무라시며 말하시는 겁니다. "꿈도 그리 못꾸나. 꿈을 꿀라카면 최소한 호랑이 꿈을 꿔야지. 우리 어머이가 나 볼 때 꾸신 꿈 말이다." 이렇듯 저를 사이에 두고 이유 아닌 이유로 속타하시던 부모님은 결국 제게 태권도를 강요하셨습니다. 저는 정말이지 내키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날 이때까지 체육시간에 결코 즐겨워서 공을 찬 적이 한번도 없었을 뿐더러 누구하고 싸우다가도 큰소리만 치면 움츠러드는 성격이기에 태권도는 꿈에도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두 분의 의지는 확고했습니다. "니는 태권도를 배워야 한다. 안 그라모 니 성격에 평생 여자 만나기는 틀렸다." 어머니는 마치 태권도만 배우면 여자를 만날 수 있다는 듯이 저를 도장으로 내몰았습니다. 다 큰 어른이 하얀띠를 매고(태권도는 흰띠부터 시작 노란띠 파랑띠 빨강띠 빨강반 검정반띠로 승격함) 태극 폼새를 배우자니 진땀 나고 창피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도장엔 정말로 무서운 사범님이 계셨는데, 그 분의 말 한마디에 저는 가끔씩 등골이 오싹해지곤 했습니다. "자, 뒷발차기 실시! 이야 압" 그 기합소리는 우렁차고도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여자 사범님이었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비극의 드라마는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제가 성격이 나약하고 숫기가 없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그녀는 저만 보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더 호되게 연습을 시키는 거였습니다. "앞차기가 그게 뭡니까? 자 앞차기 50회 실시!" 그러나 그녀는 그것도 모자라서 저를 앞으로 따로 불러내어서 앞차기를 해보라, 돌려차기를 해보라, 또 자세가 안 좋으니 토끼뜀을 뛴 다음에 해보라 하면서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이건 완전히 졸지에 군대에 다시 들어간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었고, 한 달쯤 지나자 드디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도장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녀는 우리집에 전화를 하기 시작하는 거였습니다. 왜 운동하러 안 나오냐? 언제 다시 할 거냐? 하고 묻더니, 저녁은 무얼 먹었느냐? 회사는 어디 근처냐? 하고 자기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까지 묻는 겁니다. 저는 또다른 공포에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녁에 바둑 좀 볼라치면 느닷없이 울리는 벨소리. "여보세요?" 그러면 바로 "예! 저예요, 왜 오늘도 안 나왔어요? 내일은 나올 거죠? 지금 뭐하세요? 오늘 석현씨 회사 근처 갔었어요. 다음에 다시 가면 전화할께요. 오늘은 제가 시간이 없었지 뭐예요." 하며 있는 수다 없는 수다를 다 떨었습니다. 저는 본래 시끄러운 것은 딱 질색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전화가 계속되자 견딜 수가 없어서 결단을 내고자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그녀가 "석현씨, 내일 시간 있죠? 제가 져녁때 회사 근처에서 전화할게요. 또 저번때처럼 싫다고 하시면 안돼요." 했을 때 저는 알았다고 하고 만나기로 결정했습니다. 다음날 저는 굳은 마음을 먹고 그녀 앞에 나갔습니다. 그녀는 먼저 나와 있었습니다. 제가 마음을 가다듬고 자리에 앉으려고 하자 그녀는 갑자기 제 손을 잡아 끌더니 어디 좀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저는 얼떨결에 그녀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왔습니다.그러더니 자신의 지프차에다 저를 태우고는 어디론가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어디 가느냐고 물었으나 아무런 대답도 없었습니다. 제가 다시 악을 쓰며 묻자 그녀는 무서운 눈초리로 저를 쳐다보더니 가보면 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때 정말 무서웠습니다. 이러다가 인신매매 당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왈칵 겁이 났고, 제가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실력을 가진 그녀가 귀신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한 40여 분 달려서 그녀가 차를 세운 것은 인천의 월미도였습니다. 저는 차에서 내려 그녀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때 무슨 결심을 한 듯 그녀는 저에게 물었습니다. "석현씨! 석현씨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니 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란 말입니까? 저는 놀라서 되물었죠. "아니 어떻게 생각하다니요?" "아니 참 저를 여자로서 어떻게 생각하냐니까요?" 저는 말을 못하고 머뭇거렸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물었습니다. "왜요? 제가 마음에 안 드시나요? 그렇다면 태권도장에서 제가 제 마음을 표현한 것도 모르셨어요?" 그러면서 또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저는 제 방식대로 마음을 표현해요." 그녀의 말에 저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제 기억엔 그녀에게 기합받고 맞고 벌 선 것밖에 없었습니다. 이어 그녀는 또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저는 석현씨가 마음에 들어요. 석현씨처럼 순수하고 착한 사람은 처음 봤어요. 이제부터 저랑 데이트하지 않으실래요?" 그녀는 약간은 수줍은 얼굴로 그렇게 말을 했지만 제겐 마른 하늘의 날벼락도 그런 날벼락이 없었습니다. 저는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웃으며 말했지요. "에이 농담하지 마세요. 제가 어떻게 지영씨랑 사귀어요. 참 내." 그러나 바로 그때 엄청나고도 가공할 만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뭐욧!"하고 째지는 음성과 함께 "방금 제 말을 무시한다는 뜻인가요? 저는 자존심 상하고는 못살아요." 하며 그녀는 갑자기 태권도 대련 자세를 취하는 겁니다. "자, 어서 저에게 사과하세요. 그리고 앞으로 사귈 거예요, 말 거예요. 석현씨가 만일 저를 이긴다면 제가 다시는 전화 안할게요. 하지만 석현씨가 진다면 제 뜻대로 할 거예요." 그러며 그녀는 준비도 안된 제 앞에서 몸을 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주위에는 놀러나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챈 그들은 슬슬 우리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아 왜 이러세요? 사람들이 보잖아요. 이제 그만 갑시..." 아니 그런데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갑자기 그녀의 앞차기가 저의 턱에 정면으로 일격을 가했습니다. 저는 "억!" 하면서 턱을 잡았습니다. 그 다음 그녀는 옆차기로 저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강타했습니다. 이종환, 최유라씨! 여자에게 맞는 남자의 심정을 아십니까? 그때 저는 맞은 데가 아프고 쑤셔서 눈물이 핑 돌았고, 이런 저의 모습을 보고 하늘의 갈매기도 끼룩끼룩 울었습니다. 저는 그만 하자고 손짓하면서 차 있는 데로 어기적어기적 가려는데, 이번에는 그녀가 돌려차기로 무자비하게 저의 여린 가슴을 짓이겼습니다. 저는 월미도 앞바다를 보면서 큰 대자로 길게 누워버렸고, 제 귀에는 이런 말들이 들려오더군요. "어머, 여기 영화찍는다." "와! 정말 실감나네." "그런데 카메라는 어디 있어?" "야, 요즘에는 몰래 카메라 있잖아" "뭐? 그럼 우리도 나오는 거야?" "그래 그러니까 웃어" 그때 그녀가 저에게 와서 손을 뻗어 일으켜 주었습니다. "자, 차로 가요. 이 길 좀 터주세요." 그녀는 저를 차로 데리고 갔습니다. 저는 턱이 아프고 옆구리가 결리고 가슴이 뻐근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저를 그녀는 집까지 태워다주면서 "사과 받은 것으로 할게요. 그럼 내일 만나요." 하고는 사라졌습니다. 방으로 들어온 저를 보고 집에선 난리가 났지만 저는 차마 곧이곧대로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모님께 어떻게 사실을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다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인천 앞바다에서 여자에게 개 맞듯이 맞았다고. 저는 분노와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잡자리에 들었고, 그날 사나이 가슴엔 비가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종환,최유라씨! 사람의 마음은 왜 그렇게 간사한 걸까요? 만나면 만날수록 그녀가 조금씩 좋아지는 겁니다. 한 번 만나니 좋아지고, 두 번 만나니 정이 들어서 지금은 이렇게 같은 베개를 베고 잠을 잔답니다.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2년 전의 그 일만은 지금도 가끔 꿈에 나타나서 저를 괴롭힙니다. 그래서 이렇게 '지금은 라디오 시대'에 툭 털어놓고 싶어 못쓰는 글이나마 적어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남자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이것이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할말 다하고 나니 마음이 후련합니다.
Board 삶 속 글 2023.04.18 風文 R 669
선즉제인(先則制人) 先:먼저 선. 則:곧 즉(…그러면), 법 칙. 制:억제할 제. 人:사람 인. [대응어]~후즉위인소제(後則爲人所制). [유사어] 진승오광(陳勝吳廣). [출전]《史記》〈項羽本記〉,《漢書》〈項籍專〉 선손을 쓰면(선수를 치면) 남을 제압할 수 있다는 뜻. 진(秦)나라 2세 황제 원년(元年:B.C. 209)의 일이다. 진시황(秦始皇) 이래 계속되는 폭정에 항거하여 대택향[大澤鄕:안휘성 기현(安徽省)]에서 900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궐기한 날품팔이꾼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은 단숨에 기현을 석권하고 진[秦:하남성 회양(河南省淮陽)]에 입성했다. 이어 이곳에 장초(張楚)라는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오른 진승은 옛 6개국의 귀족들과 그 밖의 반진(反秦) 세력을 규합하여 진나라의 도읍 함양(咸陽)을 향해 진격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강동(江東)의 회계군수(會稽君守) 은통(殷通)은 군도(郡都) 오중[吳中:강소성 오현(江蘇省吳縣)]의 유력자인 항량(項梁)을 불러 거병을 의논했다. 항량은 진나라 군사에게 패사(敗死)한 옛 초(楚)나라 명장이었던 항연(項燕)의 아들인데, 고향에서 살인을 하고 조카인 적[籍:항우(項羽)의 이름]과 함께 오중으로 도망온 뒤 타고난 통솔력을 십분 발휘하여 곧 오중의 실력자가 된 젊은이다. “지금 강서(江西:안휘성.하남성) 지방에서는 모두들 진나라에 반기를 들었는데, 이는 하늘이 진나라를 멸망코자 하는 시운(時運)이 되었기 때문이오, 내가 듣건대 ‘선손을 쓰면 남을 제압할 수 있고[先則制人]’ 뒤지면 남에게 제압당한다고[後則人制] 했소. 그래서 나는 그대와 환초를 장군으로 삼아 군사를 일으킬까 하오.” 은통은 오중의 실력자일 뿐 아니라 병법에도 조예가 깊은 항량을 이용, 출세의 실마리를 잡아볼 속셈이었으나 항량은 그보다 한 수 위였다. “거병하려면 우선 환초부터 찾아야 하는데, 그의 행방을 알고 있는 자는 오직 제 조카인 적뿐입니다. 그러니 지금 밖에 와 있는 그에게 환초를 불러오라고 하명하시지요.” “그럽시다. 그럼, 그를 들라 하시오.” 항량은 뜰 아래에 대기하고 있는 항우에게 다가가 귀엣말로 이렇게 일렀다. “내가 눈짓을 하거든 지체 없이 은통의 목을 치도록 하라.” 항우를 데리고 방에 들어온 항량은 항우가 은통에게 인사를 마치고 자기를 쳐다보는 순간 눈짓을 했다. 항우는 칼을 빼자마자 비호같이 달려들어 은통의 목을 쳤다. 항량과 항우가 은통에 앞서 ‘선즉제인’을 몸소 실행한 것이다. 항량은 곧바로 관아를 점거한 뒤 스스로 회계 군수가 되어 8000여 군사를 이끌고 함양으로 진격하던 중 전사하고 말앆다. 뒤이어 회계군의 총수가 된 항우는 훗날 한왕조(漢王朝)를 이룩한 유방(劉邦)과 더불어 진니라를 멸망시켰다(B.C. 206). 그러나 그후 유방과 5년간에 걸쳐 천하의 패권을 다투다가 패하여 자결하고 말았다(B.C. 202).
Board 고사성어 2023.04.18 風文 R 1021
1.25배속 듣기에 사라진 것들 나는 말이 하염없이 느리다. 사이버대학에 올린 내 강의 동영상을 보다가 곧장 게시판에 항복 문서를 올렸다. ‘가만히 듣다 보면 어느새 졸음이 밀려옵디다. 재생 속도를 1.25배로 하니, 졸음이 조금 늦게 오시더군요.’ ‘보통’ 속도로 보는 건 손해다. 1.25배속으로 봐도 ‘줄거리 파악’에 아무 어려움이 없다. 출연자의 목소리가 가늘어지고 신경질적으로 들리긴 하지만, 바쁜 시간을 알뜰하게 아껴 쓴다는 실용주의자의 자부심을 심어준다. 여기에 맛을 들이면서 영상예술에 대한 감각이 변질되더군. 내용과 형식이 분리될 수 있으며, 형식보다는 내용이 더 중요하다는 착각 말이다. 속도를 높일수록 우리 귀는 내용(메시지)만을 쫓는다. 조각난 작품을 읽고 재빨리 주제를 파악하는 걸로 국어 실력을 가늠하는 것처럼, 줄거리만 간추리면 영상을 다 본 것. 목소리나 말의 속도, 음색 같은 건 선물을 싼 포장지일 뿐. 우리는 줄거리, 핵심 내용, 주제를 뽑기 위해 영상을 보는 게 아니다. 작품 자체가 갖는 고유한 물질성, 질감, 현장성 같은 것에 녹아 들려고 본다. 우리가 예술에 다가가는 이유는 그 속에 낱낱의 고유한 삶의 형식들이 제시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느리고 어눌하고, 어떤 생각이 다른 생각을 간섭하고 뒤엉키는 그 머뭇거림의 형식 자체에 마음이 격동되기를 바라며. 형식에 대한 무시는 예술을 메마르게 한다. 말은 단어와 단어 사이에 있는 허공과도 같은 빈틈과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속도를 늘릴수록 우리는 말해지지 않은 것, 표현되지 않은 것이야말로 예술의 본질에 더 근접해 있다는 걸 망각하게 된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Board 말글 2023.04.18 風文 R 3156
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 (그리스신과 영웅들) 1. 그리스 나라의 개요 그리스의 자연 현 그리스의 면적은 남한은 1.3배, 경작지는 20% 이내로 국토의 5분의 4가 산지이며 1000m를 넘는 높은 산이 흔하다. 이 나라 산중에서 최고봉은 2917m의 올림포스 산봉으로 신화시대에는 주신들의 상징적 주거지로서 외경하는 성역이다. 고지대에는 나무와 숲이 있으나 대부분의 높은 산은 석회질 절벽의 민둥산이며 중턱부터 완만한 고원 경사지로 이어지기도 한다. 옛 켄타우로스족이 살았던 테살리아 고원은 800평방km가 넘는 비옥한 목초지이며 말 사육지로 이름 높다. 고원의 계곡을 흐르는 이 나라 최장의 강 페네이오스는 2000km가 넘는 긴 강이지만 상류는 물살이 세고 하류는 완만하나 수심이 얕아서 항해에는 적합하지 않다. 대부분의 내륙 골짜기는 좁아서 겨울 우기에 계곡의 하천이 범람하며 겨울이 지나면 건조기로 들어가 하천은 계속 말라붙어 자연의 혜택이라곤 거의 없다. 원래는 산야에 나무가 많아 소나무를 비롯한 플라타너스, 느릅나무, 떡갈나무 등 거목이 무성하여 날짐승과 들짐승이 우글거렸으나 원시시대부터 가옥, 목선, 숯을 만든다고 나무를 마구 베어내고 말았다. 따라서 이미 기원전 5세기에 무성한 숲은 자취를 감추고 산지나 언덕은 지금과 같은 메마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자연의 섭리에 무지한 주민은 별 수 없이 땡볕과 바윗돌, 우기에는 광란하는 물결에 몸을 맞기는 신세가 되었다. 이러한 산지와는 달리 육지 둘레의 바다-지중해는 문자 그대로 대지 한가운데에 있는 풍광 명미한 고요한 내해로, 겨울철을 빼놓고는 천혜의 낙원이다. 해산물이 풍부하고 교통이 편리하며 거기에다 금상첨화로 쪽빛 바다의 뱃길은 그지없이 상쾌하고 삶의 즐거움을 솟게 한다. [리토코로에서 바라본 올림포스 산] 고대에는 지정학적으로 소아시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이 키프로스, 크레타, 키클라데스를 거쳐 점진적으로 북상하여 그리스 본토에 전파되고 미케네 문명으로 이어졌다. 그리스의 큰 땅덩이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지세로 보아 북쪽 본토의 짧은 줄기에 달린 큰 섬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현대에 와서 줄기 부위인 코린 토스 협부를 개척, 이오니아해와 에게해를 연결하는 운하를 개통시켜 섬으로 만들고 교량을 가설해서 육로를 소통시켰다. 이 나라 해안선은 굴곡이 심해서 도처에 만과 곶이 있고 해안선이 이오니아해, 에게해, 지중해로 매우 어지럽게 펼쳐져 있다. 이 때문에 일찍부터 사람의 왕래나 짐을 나르는 데는 언덕을 넘어야 하는 육로보다 배를 이용하는 바닷길을 선호하여 해운이 발달하였다. 남쪽 전설의 고장 크레타는 지중해섬들 중 시칠리아, 사르디니아, 키프로스, 코르시카에 이어 다섯 번째로 큰 섬으로, 높은 산들과 산맥이 군데군데 끊긴 대형 협곡이 산재하고 최고봉은 이다 산의 타원형 단일봉 티미오스 스트라브로스(2425m)이다. 섬의 해안선은 1000km가 넘고 기원전 2000년경 해안을 끼고 도시가 건설되었으며 그 중 크노소스의 미노스 궁전은 가장 유서가 깊고 이름나 있다. 에게해의 중앙 부위에는 델로스를 둘러싼 한 무리의 섬들이 점철하는데 이 군도를 키클라데스라 한다. 여기에는 기원전 3000년경 이미 독특한 문화가 존재하였으며 대부분 석회질 바위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옛 지각변동이라는 대역사는 아티카, 에우보이아 산맥의 동남쪽 연줄을 바다 속으로 내려 놓아 높은 산봉만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고 동쪽으로 가서는 다시 아시아의 산맥으로 이어진다. 북쪽 산악지대는 겨울철에 몹시 춥고 눈이 많은 대륙성 기후로 옛적에는 인구가 희박하였다. 이에 비하여 남쪽 해안지대와 에게해 섬은 아열대의 전형적인 지중해 기후로 사철 내내 밖에서 지내도 큰 지장이 없다. 겨울철 우기에는 서해안 쪽에 비가 많고, 동해안 쪽에는 비오는 날보다 맑은 날이 많다. 봄.여름.가을철은 대체로 많은 날이 이어지고, 초여름에서 늦가을까지 햇볕이 따가워 개울물이 줄어들고 초목이 시들며 말라 버린다. 해변은 해풍으로 견딜만 하고, 햇볕이 그리워 찾아오는 인파가 비취색 지중해 해안으로 모여든다. 태양열로 흐르는 땀을 식히느라 시원한 그늘진 곳을 찾는 모습은 일찍이 기원전 5~4세기의 희극시인 아리스토파네스도 희극시 '말벌'에서 "나귀 그늘을 차지 하느라 다툰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평지에는 곡물을 심기도 하나 뿌리를 잘 내리지 못하므로 가뭄을 타지 않는 올리브, 포도 또는 더위에 강한 실과나무를 심으며, 생산되는 올리브유와 포도주는 예로부터 이 나라의 주요 산물이 되었다. 언덕은 목축지로 이용하여 양이나 산양을 기르고 있으나 소를 키우는 데는 적당하지 않다. 따라서 경작지의 부족으로 식량을 자급자족하는 것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외국에서 조달해야 했다. 도시국가 아테네에서는 기원전 7세기 솔론 시태부터 올리브유, 포도주, 도자기 등을 수출하고 곡물, 특히 소맥의 수입을 무엇보다 중요한 시책으로 삼았다. 그런데 곡물은 주로 흑해 연안의 여라 나라와 이집트에서 들여왔고, 따라서 흑해로 가는 길목인 헬레스폰트 해협을 지키는 것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였다. 기원전 1240년 미케네가 유괴당한 헬레나를 되찾는다는 명목으로 트로이 성을 공략하여 헬레스폰트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자 장장 10년에 걸쳐(기원전 1240~1230) 전쟁을 벌인 것은 유명하다. 다르다넬스 해협은 에게해와 마르마라해를 잇는 터키의 해협이다. 고대 고전에서는 헬레스폰트 또는 그리스어로 헬레스폰토스(고대 그리스어, Hellespontos, ‘헬레의 바다’라는 뜻)로도 잘 알려져 있다. 길이는 61킬로미터이지만 폭은 1~6킬로미터 밖에 되지 않는다. 평균 깊이는 55미터이고, 가장 깊은 곳은 81미터이다. 보스포루스 해협과 함께 터키를 아시아와 유럽 양쪽으로 나눈다. 아테네는 북위 38도선에 위치한 그리스 수도로 인구 1100만 명중 400만 명이 시내와 근교에 거주한다(1995년 현재). 고대에 신전과 성채들로 들어찼던 아크로폴리스는 156m의 언덕으로 페르시아 전쟁 중에 완전히 파괴된 것을 승전 후 아테네의 전성기를 구가한 페리클레스 시대에 파르테논 등 우아하고 찬란한 구조물과 조각상을 재건립한 성역이다. 지금은 폐허가 되고 신전의 돌기둥, 부조된 박공, 대들보 등의 조각만이 옛 영광의 그림자를 보여주고 있는데 여전히 옛 아테네인의 창의성과 예술성을 접하고 느낄 수 있는 감동적 유적이다. 자연은 거기에 자리한 생물, 인간의 생활과 얼들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 나라 사람들은 빈곤을 극복하는 강인성과 자립심이 유달리 돋보이며 쾌청한 기후 조건을 배경으로 쾌활한 심성을 지니게 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용감성에는 각별히 찬사를 보내고 신체단련을 게을리한 적이 없으며 연극 경연에 열정을 The아 도시마다 또한 신전이 있는 곳마다 우아한 원형극장과 경기장을 설치하여 축제를 올렸다. 조각예술의 장인은 자연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그리스인은 아름다움이 곧 선이라는 사유를 지니게 되었다. 교역의 길로서 일찍이 해운이 발달한 바다는 그리스인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바다는 신화의 세계가 펼쳐지는 무대였으며, 또한 이 바다를 통해 건너온 해외 문물에 접하여 독특한 헬레네스 문화를 꽃피워 낼 수 있었다. 그리스 사람은 어느 민족에 못지 않은 강렬한 조국 사랑의 혼을 가지고 있다. 종교 이상의 정서가 지배하는 이 혼은 오랜 역사의 오랜 역사의 흐름속에서 그리스(그리스어로 말한다면 바로 헬레네스)를 강고하게 지켜 오는 힘이 되었다. 오랜 오토만의 지배에서 벗어나 나라를 되찾고자 1821년 총궐기하여 항쟁하는 헬레네스의 용사를 위해 솔로모스는 다음과 같은 해방의 송시를 발표하였다. 당신의 날카로운 공포의 칼날은 해방을 이루게 할 줄 아나이다. 당신의 빛나는 광채는 국토를 비추어 줌을 잘 아나이다. 거룩한 폐허에서 되살아나는 헬레네스의 위대성과 자유 지난 날처럼 용감하여라! 만세 만세 오! 우리의 해방! 이 송시 158연 중에서 첫 7연이 1865년 그리스의 국가로 채택되었다.
Board 추천글 2023.04.17 風文 R 1512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셋 - 사랑으로 풀어내는 웃음보따리 '원샷'에 울었다 저는 스물 다섯된 미혼인 직장여성입니다. 이종환 아저씨도 술 좋아하시죠? 저희 집안은 예로부터 술 때문에 되는 일이 없었던 집안입니다.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큰아버지, 아버지, 작은아버지, 또 그 대를 이은 아들들, 그에 버금가는 사위들... 이렇게 남자들은 모두 술 하면 한 가닥씩 합니다. 집안의 남자들만이 술을 과하게 마시는데 그 사이에 몇 번째 유전자가 반항을 했는지 돌연변이가 하나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돌연변이가 바로 접니다. 딸 셋 중에 둘째 딸인 제가 그 대를 이어 열심히 마시고 있으니까요. 친구들도 역시 끼리끼리 모인다고 제 주변에서 술 못하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힘들었지요. 그 절친한 친구들의 혼삿길이 막힐까봐서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몇 명의 친구들 얘기를 잠깐 하겠습니다. 레몬소주는 약하다며 "아저씨, 여기 글라스 아나 주세요."하며 맥주컵으로 레몬소주를 마시는 서XX양. 유성에서 나이트, 단란주점을 거치며 한참을 놀다보니 너무 늦은것 같아 집에 가려고 택시를 잡으려고 보니까 날이 훤한 것 같은데 버스가 불을 켜고 다니더라는 송XX양. 벌써 새벽이었던 거지요. "술을 마시면 술이 나고 그래서 내가 곧 술인기라."하는 임XX양. 이 친구들이 저와 술로는 쌍벽을 이룬답니다. 우리는 늘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를 합창했고, 남자보다 술을 좋아해서 회식때는 물론이고 가끔은 점심때도 반주로 소주 몇 병을 합니다. 당연히 저에게도 기회는 오지요. 어른들이 권하는 거라서 예의상 다 받아서 마십니다. 이렇게 음주근무를 해도 일 잘하고 은행 볼일 다봅니다. 두 분이 믿으실지 모르지만 이 모두가 실화입니다. 졸업후 몇 년을 술과 더불어 살아왔다고 해도 뭐 별로 문제가 없었습니다. 취해서 집 못 찾아온 적도 없구요. 술주정을 하거나 추태를 보인 적도 없습니다. 술은 역시 술맛을 아는 사람이 마셔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중에 한 명입니다. 그런데 어는 날 제가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우린 서로 한눈에 삐리릭 했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웬 운명의 장난이란 말입니까? 이 사람은 술을 거의 못하는 거예요. 거기다가 처음 만났을 때 제가 물었지요. "어떤 여자가 싫으세요?" 그랬더니 청천벽력 같은 대답을 하는데... "저는 술을 안 좋아해서 그런지 술을 마시는 여자가 제일 싫더라구요. 특히 남자보다 더 잘 마시는 여자 있지요. 그런 여자는 웬지 여가로 안 보여요. 선화씨는 제가 싫어하는 타입은 아닌 것 같군요." 이를 어쩌면 좋담... 그 자리에서 '저는 소주 두 병이 기본이에요. 호호호.' 그 얘기는 차마 못하겠더라구요. 그때부터 저의 고난은 시작되었습니다. 그 사람 친구들과 술자리가 생겨도 술은 생전 처음 대하는 양 고개를 돌려야 했고, "술 한 잔 하세요?"하고 친구들이 권해도 한 잔 받아만 놓고 아무리 군침이 고여도 마시지 못하고 잔을 들었다놨다 하기를 여러 번... 그러다가 운좋게도 "요즘에 술 못하는 여자가 어딨어요? 반잔만 해봐요."하고 권하면 못 이기는 척하며 일단 인상을 쓰고 반잔만을 홀짝 마시고 그렇게 달디단 술을 "아이 써!"하면서 술잔을 내려놓곤 합니다. 그런 모습을 애처로운 듯 쳐다보는 그 눈빛도 싫지는 않더군요. 한번은 저도 모르게 습관대로 '원샷'하다 놀라서 잔을 내려놓은 적도 있습니다. 개버릇 남 주겠습니까... 이러다 보니 절 술 한 잔도 못하는 여자로 알더라구요. 제 심정이 어땠겠어요? 안주 좋겠다, 술도 공짜로 마음껏 제공되겠다... 그 좋은 자리에서 안주만 집어먹어야 하는 이 술꾼의 심정은 그야말로 술 마시고 난 다음날보다도 더 속이 쓰렸습니다. 우린 매일 만나다시피 했어요. 그러면서도 알코올이 그리워지더군요. 어쩌다가 그 사람이 약속이 생겨 못 만나는 날에는 친구들을 불러내서 술을 마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지방으로 며칠 출장을 가시게 되었는데 이 철없는 딸이 이 좋은 기회를 어찌 그냥 넘기랴... 그 사람에게 전화를 먼저 걸었습니다. "저 오늘은 아파서 못 만나겠어요. 으실으실 추운 게 집에 가서 좀 쉬면 나으려나 어떡하지요?" 물론 그 사람은 당연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집에서 쉬라고 했고,전 속으로 쾌재를 불렀죠. '아흐!!! 술이 나를 부른다.'그리고 집엔 전화를 해서 동생에게 당부를 했지요. "만약에 그 사람한테 전화 오면 나 아파서 잔다고 그래 알았지?" '이 정도면 뭐 완벽하지' 속으로 자만하면서 제 술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나 "아 마셔,마셔.부어라 마셔라, 원샷! 원샷!"이러면서 알코올에 흠뻑 취해 집에 돌아와서는 화장도 지우지 못한 채 옷도 그냥 입고 쓰러져 잤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엄마는 저를 아주 섬뜩할 정도로 흘겨보시는 거예요. 어제 술을 많이 마시고 들어와서 화가 나셨나보다 했는데 동생이 그러더군요. 그 사람이 집에 전화를 했었다구요. 동생은 시키는 대로 아파서 잔다고 했는데, 늦은 밤에 도저히 걱정이 된다며 과일을 사가지고 집으로 찾아왔다는 거예요. 사색이 된 엄마는 아파서 자는데 그냥 과일이나 먹고 가라는 만류에도 "아니, 얼마나 아프기에 그럽니까. 병원에 가봐야 하지 않을까요?" 하면서 방에 들어섰답니다. 그 방안에는 지우지도 않아 번져 있는 화장에 대자로 뻗어 있는 무방비상태의 몸, 입을 있는 대로 벌리고 숨을 헉헉거리며 자고 있는 그 모습을 보고는 그래도 믿어지지 않는 듯 다가와 냄새를 킁킁 맡더니 잠깐 긴장하는 듯 움찔 하더래요. 그러더니 늦었으니 간다면서 획 가버렸답니다. 세상에 어찌 이런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 동안 그 좋은 술 다 마다하고 그렇게 공들여 탑을 쌓았건만 한번의 실수로 저는 이쯤 되니 이판 사판 공사판의 뻔뻔함으로 밀어 붙이기로 하고 전화를 했습니다. "어제 왔었다면서요?" "선화씨, 이럴 수가 있습니까? 술은 입에도 못댄다고 하더니 술에 곯아떨어져요? 게다가 나를 속이고 술을 마셔요?" 어쩌구저쩌구 일장연설을 하더라구요. 하지만 다행히도 헤어지자는 말은 안했습니다. 그저 술 마시는 거 좀 자제하고 이제부터는 모든걸 솔직히 얘기하기로 약속을 했지요. 하지만 그 후부터는 친구들과 모임중에는 꼭 호출기가 몇번은 울려댑니다. 첫 번째 통화에는 "저 한잔도 안 마셨어요." 두 번째 통화에는 "딱 한 잔 마셨어요. 일찍 갈 거예요." 세 번째 통화에는 "딱 두 잔 마셨어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네네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호출이 와도 전 전화를 못합니다. 너무 즐겁거든요. "야야 마셔 마셔, 내가 뭐 무서워서 못마시냐 마시자 마셔. 아줌마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이놈의 술 때문에 참 많이도 싸웠습니다. 정말 술과의 전쟁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술 마신 다음날 해장국을 사주며 걱정해 주고 조금씩 이해해 줍니다. 그리고 저 또한 술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구요. 소주 한 병만 마시기로요. 우리의 사랑은 술로도 깨어질 수가 없었거든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겠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술만큼 친하게 엮어주는 게 또 어딨겠습니까? 그 대신에 가족과 주변에 결코 피해는 주지 말야야겠지요. 폭주가 여러분! 술은 마시되 다른 애주가가 욕먹지 않도록 조심해서 마십시다. 술과의 전쟁이란 얘기가 요즘 많이 들리는데 그 얘길 듣고 기세등등하게 웃고 있을 한 남자 얼굴이 그려집니다.
Board 삶 속 글 2023.04.17 風文 R 782
선시어외(先始於嵬) 先:먼저 선. 始:비로소 시. 於:어조사 어(…에,…에서,…보다). ?:높을 외. [출전]《戰國策》〈燕策 昭王〉 ‘먼저 외(?)부터 시작하라’는 뜻으로, 가까이 있는 나(너)부터 또는 말한 사람(제안자)부터 시작하라는 말. 전국 시대, 연(燕)나라가 영토의 태반을 제(齊)나라에 빼앗기고 있을 때의 일이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즉위한 소왕(昭王)은 어느 날, 재상 곽외에게 실지(失地) 회복에 필요한 인재를 모으는 방법을 물었다. 곽외는 이렇게 대답했다. “신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사옵니다. 옛날에 어느 왕이 천금(千金)을 가지고 천리마를 구하려 했으나 3년이 지나도 얻지 못했나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잡일을 맡아보는 신하가 천리마를 구해 오겠다고 자청하므로 왕은 그에게 천금을 주고 그 일을 맡겼나이다. 그는 석 달 뒤에 천리마가 있는 곳을 알고 달려갔으나 애석하게도 그 말은 그가 도착하기 몇 일 전에 죽었다고 하옵니다. 그런데 그가 그 ‘죽은 말의 뼈를 오백 금(五百金)이나 주고 사 오자[賈死馬骨]’ 왕은 진노하여 ‘과인이 원하는 것은 산 천리마야. 누가 죽은 말뼈에 오백 금을 버리라고 했느냐’며 크게 꾸짖었나이다. 그러자 그는 ‘이제 세상 사람들이 천리마라면 그 뼈조차 거금으로 산다는 것을 안 만큼 머지 않아 반드시 천리마를 끌고 올 것’이라고 말했나이다. 과연 그 말대로 1년이 안 되어 천리마가 세 필이나 모였다고 하옵니다. 하오니 전하께오서 진정으로 현재(賢才)를 구하신다면 ‘먼저 신 외부터[先始於?]’ 스승의 예를 받도록 하오소서. 그러면 외 같은 자도 저렇듯 후대를 받는다며 신보다 어진 이가 천리 길도 멀다 않고 스스로 모여들 것이옵니다.” 소왕은 곽외의 말을 옳게 여겨 그를 위해 황금대(黃金臺)라는 궁전을 짓고 스승으로 예우했다. 이 일이 제국(諸國)에 알려지자 천하의 현재가 다투어 연나라로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는 조(趙)나라의 명장 악의(樂毅)를 비롯하여 음양설(陰陽說)의 비조(鼻祖)인 추연(鄒衍), 대정치가인 극신(劇辛)과 같은 큰 인물도 있었다. 이들의 보필을 받은 소왕은 드디어 제국(諸國)의 군사와 함께 제나라를 쳐부수고 숙원을 풀었다. [주] 매사마골 : 쓸데없는 것을 사서 요긴한 것이 오기를 기다린다. 쓸데없는 것이라도 소중히 다루면 현인은 그에 끌려 자연히 모여든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
Board 고사성어 2023.04.17 風文 R 7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