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두구육(羊頭狗肉) 羊:양 양. 頭:머리 두. 狗:개 구. 肉:고기 육. [원말] 현양두 매구육(懸羊頭賣拘肉). [동의어]현양수매마육(懸羊首賣馬肉), 현우수(매)마육[懸牛首(賣)馬肉]. [유사어] 양질호피(羊質虎皮), 현옥매석(衒玉賣石). [출전]《晏子春秋》,《無門關》,《揚子法言》 밖에는 양 머리를 걸어 놓고 안에서는 개고기를 판다는 뜻. 곧 ① 거짓 간판을 내검. ②좋은 물건을 내걸고 나쁜 물건을 함. ③ 겉과 속이 일치하지 않음의 비유. ④ 겉으로는 훌륭하나 속은 전혀 다른 속임수의 비유. 춘추시대, 제(齊)나라 영공(靈公)때의 일이다. 영공의 궁중의 여인들에게 남장(男裝)을 시켜 놓고 완상(玩賞)하는 별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취미는 곧 백성들 사이에도 유행되어 남장한 여인이 날로 늘어났다. 그러자 영공은 재상인 안영(晏子)에게 ‘궁 밖에서 남장하는 여인들을 처벌하라’는 금령을 내리게 했다. 그러나 유행을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영공이 안영에게 그 까닭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전하께서는 궁중의 여인들에게는 남장을 허용하시면서 궁 밖의 여인들에게는 금령을 내렸사옵니다. 하오면 이는 ‘밖에는 양 머리를 걸어 놓고 안에서는 개고기를 파는 것[羊頭狗肉]’과 같사옵니다. 이제라도 궁중의 여인들에게 남장을 금하시오소서. 그러면 궁 밖의 여인들도 감히 남장을 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영공의 안영의 진언에 따라 즉시 궁중의 여인들에게 남장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자 그 이튿날부터 제나라에서는 남장한 여인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Board 고사성어 2023.05.29 風文 R 934
예민한 ‘분’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믿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갑절은 예의 바르다. 몸에는 온통 보수적이고 체제 순응적인 습이 배어 있어 예의범절에 어긋난 언행은 어지간해서는 하지 않는다. 어른이 먼저 수저를 들지 않으면 결단코 음식을 먼저 먹지 않는다. 이 ‘예의범절’이란 녀석은 또렷하기보다는 막걸리처럼 뿌옇고 흐릿하다. 법보다는 관행에 가깝고 경험에서 비롯된 게 많아 사람마다 기준도 들쑥날쑥하다. 감각에 가까운지라,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몸과 마음이 곧바로 익숙한 쪽으로 쏠린다. 말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 그런데 가끔 무엇이 예의 있는 언행일지 멈칫하는 순간이 있다. 이를테면 이런 장면이다. 어른 두분을 모시고 식당에 갔다고 치자. 식당 직원이 “몇분이세요?”라 묻는다면 당신은 뭐라 답을 하는가? 나는 이때 참 난처하더라. “세분요”라고 하면 나도 높여 말하는 거라 민망하고, “세명요”라거나 “세 사람요”라고 하면 어른 두분을 싸잡아 낮추는 것 같아 머뭇거려진다. 그렇다고 “두분과 한명요”라고 하면, 말도 구차해 보이고 바쁜 직원에게 복에 없던 덧셈을 하게 만드는 일이 된다. 그래서 속으로 ‘역시 난 비겁한 길만 택하는군’ 하면서 “셋이요!”라고 한다.(모래야,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쪼잔하냐?) 인간은 당연한 듯이 이 세계를 나와 남, 자신과 타인으로 분별한다. 게다가 한국어는 상대를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겸양의 질서를 촘촘히 갖추고 있다. 높여야 할 상대와 낮춰야 할 자신이 한 덩어리 말에 뭉쳐 들어갈 때 허점을 보인다. 반갑다, 무질서한 질서.
Board 말글 2023.05.29 風文 R 2891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셋 - 사랑으로 풀어내는 웃음보따리 그이가 그립습니다 - 이문희(여, 경남 김해시 구산동) 그 날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습니다. 저는 두 짝도 아닌 한 짝의 나무에 분홍 솜사탕을 감아 얼굴이 없는 낯선 사람과 먹는 꿈을 꾸었지요. 왜, 꿈속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미래에 신랑감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평소와 다른 꿈을 꾼 저는 늦잠으로 인해 아침을 굶은 원인도 있겠지만 달콤한 꿈 덕분에 발걸음은 너무 가벼웠지요. 중2학년 시절 키는 작지만(중1학년부터 고3학년까지 1번을 누구에게도 빼앗긴 적이 없음. 그래서 별명은 모나미였음) 얼굴은 이쁜 편인 저는 미팅에서 한 번의 낙오도 없었고 많게는 세 명의 남자가 저를 선택해 친구들로 하여금 미팅 0순위라는 얘기를 들어야 했지요. 오전 10시쯤 1교시를 마치고 우리의 여군단은 어제 보았던 연속극 얘기가 한창 흥미롭게 진행될 때쯤 쇼킹한 일이 터졌지요. 저희 학교는 여학교로서 학교가 생긴 이후로 남자 교생은 단 한번도 다녀간 일이 없는, 그런 면에서는 역사와 전통을 가진 그런 여학교였지요. 그런데 드디어 왔어요. 단 한명의 남자 교생, 그것도 2학년 10반 우리 반 임시담임으로 말이에요. 그때의 기분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good"이었어요. 그 당시 전 제기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자존심상 허락하지 않았고, 남이 나를 좋아하는 건 당연한 이치라는 자기도취 병이 중중이었지요. 그런데 그런 저에게 교생 선생님은 신이자 태양이었고, 사하라 사막에 작은 오아시스였지요. 문을 열고 들어오는 교생 선생님의 얼굴이 어젯잠 꿈에 솜사탕을 나란히 먹던 남자로 합성이 되더니 급기야는 정신까지 몽롱해지는 것이 아니겠어요. '아! 이건 신이 나에게 내린 계시야. 매일 허구한날 쫓기는 꿈과 떨어지는 꿈을 반복해서 꾸더니, 키 크라고 그런 게 아니라 마음이 크라고, 아, 아! 신의 깊은 뜻을 모르고 일이 안 풀리면 꿈탓을 하다니 이 못난 여인을 용서하소서.' 저는 1번인 관계로 교생 선생님, 아니(이제 그이라고 부르리라) 그이의 귀밑에 점과 얼굴에 솜털, 그리고 중요한 숨소리와 수업중에 간간이 저를 행해 튀는 액체와도 접할 수 있었지요. 뒷자리에 키 큰 애들은 앞자리에 작은 우리를 부러워했고, 그 부러움은 자리를 바꿔 앉자는 말도 안되는, 아니 전혀 결코 들어줄 수 없는 얘기들을 해 우리의 자리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기 시작했지요. 처음에는 바꿔주는 대가로 매점에서 제일 인기있는 고로케가 오고 가곤 했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콜라에서 햄버거로 햄버거에서 일주일 화장실 청소까지 흥정이 오고 갔지요. 저는 평소 작은 키를 원망했지만 이때처럼 저를 작게 낳아준 아빠, 엄마에게 특히 엄마에게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신들께 특히 삼신할머니께 감사하게 느낀 적은 없을 거예요. 그이의 출현으로 우리 교실에는 점심시간에만 간간이 이용되던 이 사이로 들어간 고춧가루 제거 작업용 거울이 만원사태였고 급기야는 우리의 피 같은 돈을 걷어 대형 거울로 교체되기까지도 했지요. 그이는 교내 인기투표 1위였고, 그이의 책상에는 항상 달콤한 사탕과 시원한 음료가 제공되는 특혜까지 받았지요. 순진한 구이는 그런 먹을 것에 대한 우리에 음모를 모르고 맛있게 아주 맛있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먹어 치웠지요. 그 당시 우리가 사탕과 음료를 선택한 이유는 아주 간단했어요. 우선 사탕은 우리의 입에 잠시 머물게 한 후 정확히 말하자면 사탕에 새겨져 있는 무늬나 모양이 변하기 전 다시 종이에 예쁘게 넣었고, 음료수는 스트롱 혹은 빨대라고도 하는 것을 이용해 살짝 빨은 뒤, 입 속에 있는 무언 가와 같이 도로 병 속으로 넣는. 그런 작업이 쉬었지요. 즉 자세히 말하자면 간접키스를 하기에는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지요. 그이가 사탕과 음료를 먹을 때면 우리는 합창으로 고함에 가까운 함성을 질러댔고 그이는 우리의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너희도 하나씩줄까? 먹고 싶은 사람 나와서 가져가. 맛있다 야!" 하지만 세상에 그걸 먹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또 혹 그이가 당직이라도 하는 날이면 평소 보충수업 땡땡이 군단은 언제 그랬냐는 둥 열심히 남는 일에 충실했고, 당직, 숙직실은 평소 질문이 없던 얘들까지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한 손엔 자판기 커피를 들고 일명 교과서 데이트를 했지요. 하지만 우리에 이런 짓궂은 애정+사랑 표시가 신의 노여움을 받았는지 일주일 전, 정확히 8일전, 우리의 보스인 진짜 담임이 맹장수술을 끝내고 실밥까지 모조리 풀어버리고 우리 앞에 선 것입니다. 왜 맹장 수술은 빨리 낫는지. 왜 실밥은 20일 아닌 7일 만에 풀러야 하는지.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신들을 원망했고, 또 학교로 돌아온 보스(별명 : 날으는 돈까스)를 너무나도 미워했습니다. 다시 한번 이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사탕에 침을 절대로 바르지 않으리라는 맹세도 했지만 벌써 한번 터진 맹장은 다시 터질 리가 없고 그렇다고 꿰맨 자리에 부작용은 더더욱 없을 테고. 아! 정말 그 8일은 행복했노라를 외치며 우리는 영원한 보스 날으는 돈까스를 쓴 웃음으로 반겨야 했습니다. 이런 우리의 심정을 알았는지 우리의 하늘 같은 보스는 그이를 종례와 조회용(?) 담임으로 임명하셨고, 보스의 교과인 영어를 직접 우리에게 가르치라는 자비로운 명을 내리셨지요. 이렇게 우리는 한달 동안 교생실습인 그이와 같이 할 수 있었지요. 비록 한 달 간의 우리의 일방적인 사랑이었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저-어 끝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듯한 감정을 느낍니다. 또 우리의 담임인 날으는 돈까스 보스님의 문병 때 안개꽃이 비싼 이유로 하얀 국화를 한아름 들고 가 욕을 바가지로 먹고 퇴장한 일이 생각나는군요. 사실 저희는 그때서야 흰 국화의 용도를 자세히 알 수 있었지요. 완전이 무식이 보초서고, 유식이 휴가 떠났냐는 보스의 말씀에 사모님께 매 맞지 않고 그곳을 떠나온 것에 감사할 따름이지요. 이렇게 15년이 흐른 지금 우리의 보스는 교직을 떠나 서점을 하신다는데 잘 되시는지. 그리고 저에게 땅콩이란 별명을 없애고 예쁜 모나미라 지어주신 그이는 지금 한 여자의 사랑을 받는 한 왕국의 가장이 되어 있겠지요. 왜 저의 별명이 모나미인 줄 아시는지? 100원짜리 모나미 볼펜 옆에는 153이란 숫자가 써 있다나요. 저의 키가 153이거든요. 그때는 작은 키가 너무도 자랑스럽고 좋았지만 지금은 조금만 더 더. 키가 크면 얼마나 좋을까 싶네요.
Board 삶 속 글 2023.05.28 風文 R 714
약롱중물(藥籠中物) 藥:약 약. 籠:농 롱. 中:가운데 중. 物:만물 물. [동의어] 약롱지물(藥籠之物). [참조] 양약고구(良藥苦口). [출전]《唐書》〈狄仁傑專〉 약농 속의 약품이란 뜻으로, 항상 곁에 없어서는 안 될 긴요한 인물(심복)을 이르는 말. 당나라 3대 황제인 고종(高宗:628~683)의 황후였던 즉천무후(則天武后)때의 이야기이다. 14세 때 2대 황제인 태종(太宗)의 후궁이 된 그녀(무후)는 26세 때 태종이 죽자 여승이 되었으나 재색(才色)을 탐낸 고종의 명예 따라 환속(還俗), 그의 후궁으로 있다가 고종 6년(655)에 황후가 되었다. 그 후 고종이 중풍에 걸리자 무후는 스스로 천후(天后)라 일컫고 수많은 명신(名臣)을 죽이거나 귀양 보내고 전 황후의 소생인 태자를 폐하는 등 포악한 정치를 했다. 고종이 죽은 뒤 무후의 친아들인 중종(中宗:4대)?예종(叡宗:5대)을 세웠으나 곧 폐하고 67세 때(690년) 스스로 제위에 올라 국호를 주(周:690~705)라고 했다.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제(女帝)가 출현한 이 정변을 무주 혁명(武周革命)이라고 한다. 그 무렵, 적인걸(狄仁傑:630~700)이라는 청렴 강직하고 식견이 높은 명재상이 있었다. 그는 더없이 잔인하고 명석한 무후를 직간(直諫), 보필하여 어지러웠던 정치를 바로잡고, 민생을 안정시켰을 뿐 아니라 유능한 선비를 추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게 했다. 그래서 그는 조야(朝野)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따라서 적인걸의 문하에는 많은 인재가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는 원행충(元行沖)과 같은 박학다재(博學多才)한 인물도 있었다. 그 원행충이 어느 날, 적인걸에게 이렇게 말했다. “상공(相公) 댁에는 ‘맛있는 것(훌륭한 인재)’이 많습니다. 혹 과식하시어 배탈이 나는 일이 없도록 저 같은 쓴 약도 곁에 놔두십시오.” ‘좋은 약은 입에 쓰지만 병에 이롭고[良藥苦於口而利於病], 충언을 귀에 거슬리지만 행실에 이롭다[忠言逆於耳而利於行]’는 공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그러자 적인걸은 웃으며 말했다. “‘자네야말로 바로 내 얄롱중물일세[君正吾藥籠中物].’ 임, 하루라도 곁에 없어서는 안 되고 말고[不可一日無也].” [주] 적인걸 : 산서성(山西省) 사람. 당나라 고종(高宗) 때 강남 순무사(江南巡撫使)가 되어 치적을 쌓은 뒤 위주 자사(魏州刺史)로 있을 때 거란의 침략군을 물리쳐 공을 세움. 재상으로 있을 때 즉천무후(則天武后)에게 직간하여 그녀의 친조카인 무삼사(武三思)로 하여금 황통(皇統)을 잇게 하려는 대역(大逆)을 막고 당황실을 회복, 수호하는 데 힘씀. 이후 국로(國老)로 예우 받음. 예종(睿宗) 때 양국공(梁國公)에 추봉됨.(630~700).
Board 고사성어 2023.05.28 風文 R 1217
아이 위시 아파트 이런저런 일로 누군가 내 주소를 물어볼 때는 곤혹스럽다.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 이름이 ‘아이 위시(I-Wish)’인데, 내 대답에도 불구하고 열에 여덟 아홉은 그 이름을 되물어 보기 때문이다. 자주 겪는 일이라서 내 영어 발음이 시원찮아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대개의 예상과 달리 아파트 이름에 영어 단어도 아닌, 영어 문장이 들어가 있어서다. 오래 전부터 아파트 건설사들은 아파트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아파트 이름을 영어식으로 지어 왔다. 우리말보다 영어 및 외국어가 더 고급스러워 보인다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우리의 언어 의식을 반영하여 그런 것이니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우리 아파트는 편의시설 대부분도 영어로 안내하고 있다. 주차장은 ‘파킹(Parking)’으로,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방향을 각각 ‘인(in)’과 ‘아웃(out)’으로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급하게 휘어진 통로에는 들어가고 나오는 차량의 안전을 위해 ‘슬로(slow)’로 서행 안내를 하고 있다. 비상구 표시는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엑시트(Exit)’이다. 게다가 이 모든 영어는 알파벳만 적혀 있다. 우리 아파트는 외국인 전용 아파트가 절대 아니다. 그럼에도 아파트 이름뿐만 아니라 아파트 내 편의 시설 표시가 영어로 적혀 있다. 대외적 성격을 갖는 아파트 이름이야 그럴 수 있다 쳐도 아파트 내 편의 시설은 거주자의 편익을 우선으로 안내해야 하지 않을까? 유치원 때부터 영어를 배우는 시대가 되긴 했지만 모든 사람들이 영어에 친숙한 건 아니다. 우리의 영어 사랑은 도를 넘었다. 박용찬 대구대 국어교육과 조교수
Board 말글 2023.05.28 風文 R 3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