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셋 - 사랑으로 풀어내는 웃음보따리 부적은 사랑을 싣고 봄이라는 것만으로도 괜스레 즐거운 저는 올해 스물다섯 살의 봄 쳐녀랍니다. 제가 사는 대구에서는 봄가을이 없는 도시라고도 하죠. 그만큼 봄 가을이 짧답니다. 특히 봄은 더더욱 짧아서 다른 도시 사람들보다 봄에 대한 아쉬움이 많지요. 제가 왜 이렇게 봄타령만 하냐구요?. 봄만되면 바람난다는 봄처녀이기 때문만은 아니구요. 언제나 봄처럼, 처녀처럼 사는 저희 큰 이모님 이야기를 하려니 서두가 길었어요. 저희 큰 이모는 딸 부잣집 맏딸이시지만 하시는 행동은 부잣집 되동딸 같답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계신 이모는 자신의 일에도 열심이면서 인생을 즐기시는 모습이 참 보기에는 좋지만, 어떨 때 한 번씩 일으키는 푼수는 언제나 웃음을 부릅니다. 오늘은 그 푼수사건 몇 가지를 소개할까 해요. 지독한 공주병에 걸리신 이모는 탤런트 강부자씨 같은 외모에 몸매 또한 강부자씨 못지 않은데, 하루는 시장에 가셔서 굽이 10cm가 넘는 통굽구두를 사오신 거예요, 저는 제것인 줄 알고 말했지요. "아휴, 이모, 뭐 이런 걸 다 사주능교?" "아이다. 이거 내 신으면 이쁠 것 같사서 하나 샀다." 이모는 그러시는 거예요. 그리고 그날 그 구두를 신고 나가신 이모는 내리막길에서 엄청 고생하셨답니다. "아이고 야야 내 좀 잡아도. 어-어어. 아악! 내 죽는데이-" 그 다음부터는 그 구두가 제것이 되었답니다. 과부생활 어언 10년째지만 싱글은 언제나 화려해야 한다며 외모에도 관심이 많으신 우리 이모님. 그래서 언제나 제 화장대를 호시탐탐 노리시더니 저 없는 동안 일을 벌이셨더군요. 저희집에 놀러오신 이모는 엄마를 꼬셔서, "야이야! 이거 정이 화장대에 있던 것인데 한번 발라보자." 평소에 제 물건은 안 만지시던 저희 엄마께서 이러시더군요. "이기 뭔데?" "몰라. 그래도 젊은 아가 바르는 거니까 좋은 거겠지!" 그러면서 쓰다 남은 헤어용 스트레이트 크림을 팔다리에 골고루 바르셨대요. "이건 또 뭐꼬?" "희야(언니), 우리 정이 오면 내 혼난다. 자꾸 바르지 마라." "아이다. 이건 더 좋은 거지 싶다. 내 쪼매만 바를게." 그러면서 매니큐어 지우는 아세톤을 얼굴에 그것도 아낀다고 눈밑에 잔주름 있는 데만 바르신 거예요. 그날 저녁 팔다리가 당기고 눈 주위가 따갑다고 한바탕 난리가 났었죠. 하루는 밖에서 돌아와 보니 엄마랑 큰 이모가 하얗게 질려서 누워 계시는 거예요. "엄마, 와카는데예?" "아이고, 정아! 니 가가(가서) 고기 좀 사온나?" "고기는 와예?" "오늘 너거 이모랑 다이어트한다고 하루종일 굶고 채소만 묵었디만 힘없어 죽겠다." 방안에는 다 뜯어먹은 배추 두 포기가 뒹굴고 있었어요. 정말 엄청나더군요. 큰이모께 눈길 한번 안주는데도 이모는 늘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내가 버스를 타면 사람들이 내만 쳐다보는 것 같데이." 라든지, "우리 학교 교장이 아마 나를 좋아하는것 같데이." 등등. 그래서 한때 별명이 '착각의 여인','환상의 여인'이라 불리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야기는 다음에 나올 이야기의 맛보기구요. 푼수 공주 큰 이모께 정말 사건이 생긴 거예요. 언제나 이라크의 후세인 같은 애인을 사귀고 싶어하시는 큰 이모지만 60이 다 된 할머니에게 웬 후세인! 웬 애인! 교장선생님은 고사하고 버스 안의 할아버지조차 이모에게 눈길 한번 안 주자 이모는 최후의 방법으로 철학관을 찾아갔어요. "아저씨예, 제가 과부가 된 지 10년이 지나도 이때까지 애인이 없는 데 무슨 수가 없능교?" 라고 점쟁이에게 묻자, "마, 아줌마는 곧 애인이 생길 낀데, 부적 하나 하시면 애인이 더 빨리 생길 낍니데이." 이 말에 귀가 솔깃해지신 이모는 거금을 주고 애인 빨리 생기는 부적을 사셨답니다. 그런데 이 부적을 보관하는 방법이 참으로 요상한게 세상에 팬티 밑에 넣어서 다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밑에 부적을 넣으시고 콧노래르 부르며 우리집에 자랑하러 오신 우리 큰 이모. 마침 엄마를 비롯해 셋째 이모, 다섯째 이모께서 와 계셨는데, 다섯째 이모만 빼고 모두 과부랍니다. 큰 이모의 '애인 생기는 부적'을 둘러싸고 네 과부의 싸움이 시작 되었어요. "희야(언니), 나도 한번 해보자. 으잉?" "야는 봐레이. 내가 먼저다." "이 가스나들아, 부정탄다. 저리 가라 마." "희야, 나는 구경만 하고 주께. 함만(한번만) 보자." "안된다. 내가 효험 보면 니 주꾸마." 이러시면서 꿋꿋이 밑에 부적을 깔아 놓으셨어요. 그러시기를 4개월. 한달이 지나도 두달이 지나도 큰 이모에게 후세인 같은 멋진 애인이 생겼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한 여름이 지나고 가을로 접어들던 그 어느 날, 큰 이모께서는 평소와는 달리 풀이 죽어서 저희집으로 오셨어요. 저희 엄마께선 "희야, 어디 아프나? 와 그리 힘이 없노?" 하시며 안부를 묻자 큰 이모께서 말씀하시기를..."내 이놈의 점쟁이 만나기만 해봐라. 가만 안 둘끼라." 하시며 자초지종을 말씀해 주시는데.. 그 무더위에도 (대구는 특히 덥잖아요) 애인 생기는 부적을 비가오나 땀이나나 신주단지 모시듯이 깔고 다니셨는데, 자꾸 가려워서 산부인과를 갔더니 치료를 마친 의사선생님이 묻더래요. "아주머니는 여름에도 내복같은 속옷을 꼬박꼬박 챙겨 입습니까?" "아이지예. 여름에 내복은 무슨 내복예." "아주머니는예, 통풍이 잘 안돼서 곰팡이가 슬었습니데이. 앞으로 바람 좀 잘 들어가구로 통풍 좀 잘 시켜주이소." 그 말을 들은 우리들은 위로는 뒤로하고 웃느라고 다 뒤집어졌다는거 아닙니까? 이것은 네 명의 과부 이모들에게 획기적인 사건이었고, 큰 이모는 그 이후로 다시는 부적 얘기는 안 하셨지만, 과연 그 부적의 힘인지 올해 초, 봄에 우연히 들른 부동산 중개소에서 만난 아저씨와 지금 한창 핀 벚꽃처럼 열애에 빠져 계신답니다. 이모니까 그런 모습이 보기 좋고 응원도 하지만, 저는 요즘 저희 엄마 동정 살피기에 바쁘답니다. 또 사랑을 실은 부적을 사오시면 어쩌나 하구요. 봄은 아가씨들만의 계절은 아닌가봐요.
Board 삶 속 글 2023.05.31 風文 R 750
양상군자(梁上君子) 梁:들보 량. 上:위 상. 君:임금/군자 군. 子:아들/사람 자. [출전]《後漢書》〈陳寔專〉 대들보 위의 군자라는 뜻. 곧 ① 집안에 들어온 도둑의 비유. ② (전하여) 천장 위의 쥐를 달리 일컫는 말. 후한 말엽, 진식(陳寔)이란 사람이 태구현(太丘縣:하남성 내) 현령(縣令)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그는 늘 겸손한 자세로 현민(縣民)의 고충을 헤아리고 매사를 공정하게 처리함으로써 현민으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모았다. 그런데 어느 해 흉년이 들어 현민의 생계가 몹시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진식이 대청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웬 사나이가 몰래 들어와 대들보 위에 숨었다. 도둑이 분명했다. 진식은 모르는 척하고 독서를 계속하다가 아들과 손자들을 대청으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악인이라 해도 모두 본성이 악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습관이 어느덧 성품이 되어 악행을 하게 되느니라. 이를테면 지금 ‘대들보 위에 있는 군자[梁上君子]’도 그렇다.” 그러자 ‘쿵’하는 소리가 났다. 진식의 말에 감동한 도둑이 대들보에서 뛰어내린 것이다. 그는 마룻바닥에 조아리고 사죄했다. 진식이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네 얼굴을 보아하니 악인은 아닌 것 같다. 오죽이나 어려웠으면 이런 짓을 했겠나.” 진식은 그에게 비단 두 필을 주어 보냈다.
Board 고사성어 2023.05.31 風文 R 931
김 여사 지난 며칠 동안 인터넷에서 난데없이 ‘김 여사’가 화제였다. ‘김 여사’는 운전이 미숙한 중년 여성들을 비꼴 때 쓰는 신조어다. 의미가 확대되어 불특정 다수의 여성 운전자들을 비하하는 말로도 곧잘 쓰인다. ‘김 여사’가 다시 이목을 끈 까닭은 한 유명인이 오래 전 자신의 SNS에 올렸던 사진 때문이었다. 그는 잘못 주차된 자동차 사진에 ‘대한민국 김 여사님들 파이팅’이라는 제목을 달아 놓았었다. 누리꾼들은 운전자가 누군지 확인되지도 않았는데 ‘김 여사’라는 표현을 쓴 건 여성차별이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글을 올린 이가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이었다고 사과함으로써 사태는 일단락되었지만, 이 자그마한 소동은 우리 사회의 성차별적인 언어 사용을 돌아보게 만든다. 어떤 사람들은 웃자고 만든 ‘김 여사’ 같은 표현이 여성차별이라고 하는 건 지나친 게 아니냐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말들이 지속적으로 사용되다 보면 어느새 여성은 남성보다 무능력하고 부족하다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될 것이므로 경계해야 한다. 사실 남녀를 불문하고 능력이 부족하거나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어느 사회에나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부정적인 행동을 하는 무리들 중에 유독 여성을 비롯한 특정 계층에 초점을 맞춰 그 집단 전체를 비하하는 표현을 만들어 쓰는 것은 명백히 차별적이다. 남성들 중에도 운전 실력이 부족하거나 난폭 운전으로 민폐를 끼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그런 행동은 운전자 개개인의 탓으로 돌릴 뿐 남성들의 일반적인 특징으로 보아서 그런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을 따로 만들어 쓰지는 않는다. 이와 비교해 보면 왜 ‘김 여사’ 같은 말들이 여성 차별적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Board 말글 2023.05.31 風文 R 3033
프로듀사 드라마 ‘프로듀사’를 보는 것은 주말 저녁의 큰 기쁨이었다. 김수현의 매력에도 푹 빠졌지만 방송을 하는 사람으로서 내 생활의 일부가 드라마로 나오는 것이 무척 신기했다. 익숙한 장소, 누구인지 대충 짐작이 가는 극중 배역, 아찔했던 방송 현장의 사고들. 그런데 왜 ‘프로듀서’가 아니고 ‘프로듀사’였을까? 방송의 연출, 제작을 책임지는 사람을 ‘프로듀서’라고 한다. ‘생산하다’는 뜻을 가진 동사 ‘produce’에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 ‘-er’이 붙어서 만들어진 말이다. 그런데 ‘-er’대신에 직업을 나타내는 우리말 접미사 ‘-사(士)’를 붙여 ‘프로듀사’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것이다. 제목을 살짝 비튼 데에는 프로듀서의 깊은 고민이 있었으리라. 흔히 끝에 ‘선비 사(士)’가 붙으면 직업을 나타내는 말이 된다. 변호사(辯護士), 건축사(建築士), 세무사(稅務士) 등이 그러하다. 그런데 판사(判事), 검사(檢事)의 ‘사’는 ‘일 사(事)’이다. 교사(敎師), 의사(醫師)는 ‘스승 사(師)’를 쓴다. 명확하게 어떤 기준인지는 밝히기가 어렵다. 자격증이나 면허증이 나오는 전문적인 직업에는 ‘-사(士)’가 붙는 경향이 있다. ‘변호’라는 말 뒤에 접미사 ‘사(士)’가 붙어 ‘변호사’가 만들어진 것이다. ‘판사’ ‘검사’도 전문직임에 틀림없으나 변호사와 같은 파생어가 아니라 ‘판사’ ‘검사’가 원어로 하여 쓰여 온 말이다. ‘의사’ ‘교사’ 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아나운서들은 예전부터 스스로를 ‘언어운사(言語運士)’라 칭하며 말에 대한 책임을 강조해 왔다. ‘프로듀사’ 후속작 ‘아나운사’를 기대해 보며…. 임수민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Board 말글 2023.05.30 風文 R 3177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셋 - 사랑으로 풀어내는 웃음보따리 남편의 애국심 - 김연주(여, 서울시 서초구 방배동) 제 남편은 지독한 축구 팬입니다. 축구 경기하는 날, 특히나 국가대표가 축구 경기를 하는 날이면 그놈의 별난 징크스가 발동하기 시작한답니다. 축구가 있는 며칠 전부터는 그 좋아하는 술을 한 잔도 하지 않고, 당일날 아침에는 목욕재계를 합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경기 당일날 TV옆에 태극기까지 매달려고 하는 것을 제가 극구 말렸지 뭡니까. 그것까지는 좋습니다. 문제는 시합이 시작되면서부터입니다. 남편은 자기가 무슨 감독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2시간이나 되는 경기 시간 내내 서 구경을 합니다. 전반전이 끝나 진짜 감독과 코치, 선수들이 다 앉아서 쉬는데도, 남편은 무슨 통뼈라고 꼿꼿이 서서 "흠, 흠." 하면서 후반전 작전 구상을 하는 겁니다. 앉으면 안된대요. 그렇게 해야 이긴다나요? 그런데 제일 큰 문제는 화장실엔 가지 않는 겁니다. 남편은 원래 방광이 약해서 1시간이 멀다 하고 화장실엘 자주 가는데, 축구 경기 때문 이를 악물고 참는 겁니다. 자신이 소변을 보게 되면 한국이 진다는 겁니다. 안중근 의사같이 조국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정도를 못 참느냐는 식입니다. 조국을 향한 남편의 일편단심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어떨 때는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면 " 으-윽."하는 신음 소리를 내고, 바람난 수캐마냥 방안을 정신없이 왔다갔다 하고, 이마에는 왕방울만한 땀방울이 맺히고, 눈에는 실핏줄이 돋아나면서도 장렬하게 참는 겁니다. 조국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 모습은 마치 전쟁 영화에서 어느 병사가 조국을 위해 사우다가 총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하기 직전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경기가 막상막하일 경우 남편은 소변을 더욱 참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남편은 한 번도 조국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자신의 의지로서는 감당할 수 없어서 찔끔찔끔 소변이 나오면, 조국을 향한 자신의 연약함을 그리도 안타까워했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박빙이던 경기에서 한국이 한 골을 넣자, 저와 남편은 소리를 지르고 만세를 부르다가 그만 제가 남편의 배를 손으로 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갑자기 "으악!" 소리를 지르며 화장실로 뛰어가더니 '쏴아!' 그 바람에 홍수가 나버렸습니다. 저는 깔깔대고 웃으면서 말했죠. "여보, 빨리 아랫 런닝구(팬티) 갈아입어요. 다 큰 어른이 소금 얻어 올 수는 없잖아요?" 그러자 남편은 심각한 얼굴이 되었습니다. "뭔소리고, 빤스가 문제가 아이다. 이제 두 꼴은 먹게 생깃다 아이가." 그런데 정말 신기했습니다. 그 후 한국은 순식간에 두 골을 먹어버린 겁니다. 또다시 남편의 애국심을 시험하는 날이 다가왔습니다. 저는 콧소리를 섞어가며 남편을 꼬드겼습니다. "여보, 축구 볼 때 당신은 징크스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미신의 수준이에요. 미신! 며칠 전부터 술도 안 먹고 목욕하고 태극기 달아 놓는 것까지는 좋아요. 그런데 제발 내내 서서 구경하지 말고 또 소변만큼은 제발 참지 마세요. 화장실도 자주 가고 편안히 앉아서 과일도 드시면서 시청하세요. 당신이 그렇게 안해도 한국은 충분히 이겨요!" 저는 억지로 눈물까지 보이며 남편을 설득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오야! 그래 한 번 해보자" 하면서 화장실도 자주 가고 편히 앉아서 과일도 먹어가면서 축구 경기를 시청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이후 저는 완전히 죄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육 대 일(6:1), 이란 축구가 한국 축구를 개패듯이 패버린 것이었습니다. 그게 아시아 선수권 경기였던가요? 한 골, 두 골, 세 골... 골이 들어갈 때마다 남편의 눈은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풀린 눈으로 원망을 가득 담아서 저를 째려보기 시작했습니다. "테레비(TV) 껍삐라! 사과 깍아 놓은 거 이거 빨리 안 가지고 가나?" 경기 이후 남편은 넋나간 사람처럼 밤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아마 조국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 때문이었나 봅니다. 탕수육, 잡채, 만두... 그날 저녁 저는 밤새도록 술 안주를 만들어 내면서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너무 억울하잖아요? 저는 또 한 번 그것이 단순한 징크스인 것을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이번엔 저도 비장했습니다. 더 이상 남편의 그 변태적인 징크스를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가정을 지키자!' 저는 남편 못지 않게 비장했습니다. "여보, 이번에도 제 말을 듣고 한국이 지면은 당신이 하라는 대로 다 할게요." 남편은 극구 반대했지만 결국 이브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오이야 좋다! 니 이거 잘 알아라. 이제 마지막이다. 알겄나?" 남편은 화장실을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그 경기가 무슨 경기였는 줄 아십니까? 세계 청소년 축구선수권, 한국과 브라질의 경기였습니다. 그 결과 잘 아시죠? 십 대 삼(10:3). 저는 그래도 한국이 세 골이나 넣지 않았냐며 선처를 호소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날 저녁 저는 또다시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마련해 놓고 한 숨도 못 잔채 남편의 설교를 들어야 했습니다. "니(너) 내보고 미신이라했째? 이게 미신이가? 한국축구가 져도 이리 진 거는 내 몬봤다. 내가 얼굴을 들고 살 수가 없다. 니 또 한 번 축구할때는 잔소리해싸몬 니캉 내캉 딴사람 되는기라. 알겄나?" 이종환, 최유라씨! 이땅에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숨어서 애국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잘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남편의 애국심을 절반도 따라가지 못하는 못난 아내인가 봅니다. 흐흑...,
Board 삶 속 글 2023.05.29 風文 R 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