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대중화란 - 안도현 해마다 여름이면 산 좋고 물 좋은전국 곳곳에서 시인학교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이 모인다. 시를 사랑하고 아끼는 독자들과 시인들이 만나 그 둘 사이 낯선 거리를 좁히고 시의 향기로 더위도 좀 쫓아 보자는 뜻일게다. 대부분의 시인학교는 문학대중화를 그 목표로 삼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한 사람이 읽던 시를 열 사람이 읽는다고 해서, 인쇄 매체럼 시를 음향이나 영상으로 만난다고 해서, 또 시인이 독자와 직접 대면한다고 해서 시가 대중화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노력도 때로 필요하지만, 나는 시 혹은 시인에 대한 신비감을 깨뜨리는 일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시인학교 같은 행사는 아름다운 시를 쓰는 시인도 게걸스럽게 밥을 먹고 화장실을 들락거린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줬을 지 모른다. 문학을 포함한 예술은 절대로 신비한 게 아니다. 예술가는 타고난 재질보다 열정과 투자로 만들어진다고 나는 믿는 편이다. 더러 어떤 예술가의 선천성을 강조하는 것은 그에 대한 지나친 찬미이거나 예술 창조 종사자들의 선민의식이나 우월의식 때문이다. 진정으로 훌륭한 예술은 오래도록 스스로를 갈고 닦은 결과일 뿐이다. 책을 읽거든 저자를 존경하지 말 일이며, 음악을 듣거든 작곡가나 가수를 흠모하지 말 일이다. 힘있는 정치가를 지지하는 것보다는 힘없는 조국을 믿고 따라야 하는 것처럼.
대학생의 독서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소설을 가르치다보면 느끼는 게 많다. 세대간의 차이 라기보다 차라리 거대한 벽이 가로막고 있다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일 듯 싶 다. 때로는 당혹감을 넘어 절망감마저 느낀다. 문화권이 다른 외국작품도 아니고, 우리 소설을 이 정도로 제대로 읽어내지 못할 수 있는 것일까,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가령 식민지 시대나 카프 계열의 소설들, 혹은 농촌을 무대로 한 소설들에 대해 전혀 엉뚱한 해석을 내리는 것은 그나마 이해할 수 있겠다. 어차피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어두워 그 배경이나 맥락을 읽어내기도 어려울 테고, 또 도시에서만 살아온 신세대로서는 농촌 생활 자체에 대해 전혀 무지한 까닭에 애당초 흥미도, 이해력도 부족할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과 십여 년 안팎의 80년대 혹은 70년대의 이른바 고전이라고 할 만한 소설들에 대해서조차 제대로 올바르게 읽어낼 줄 모르는 학생이 의외로 많아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입시만능의 교육풍토에서 책 한 권 제대로 읽어보지 못하고 대학생이 된 탓이기도 하려니와 최근 우리 사회가 겪어온 변화의 진폭이 그만큼 엄청난 것이어서 신세대의 아직 미숙한 인식의 틀로서는 그 간극을 감당해내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꼭 그래서만일까. 한 예로 최인훈의 '광장'에서는 절박한 분단문제 를 희화화 된 상황쯤으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특수한 개인사 혹은 가족사 정도로 읽어내고, 심지어 5.18을 다룬 소설들에서는 애초에 왜 그런 '믿기 어려운'사건이 일어났는가 라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 조차 전혀 모르는 학생이 의외로 많다. 어쩌다 이런 현상이 생겨났을까. 물론 제도나 관습, 풍속, 문화, 정치적 입장 따위에 있어서 어느 사회에서 나 세대간 차이는 존재하고 때로 그 차이는 생산적인 추동력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 그러나 '광장''난장이가...'이 보여주는 분단문제, 정치, 경제적 모순들의 문제, 혹은 5.18의 문제들은 결코 과거의 허상이 아니라 눈앞에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의 문제다. 행여 그에 대한 신세대의 냉소나 비판이 바로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기성세대는, 우리 사회는 지금 그 무지를 오히려 조장하고, 강요하고 있는 건 아닌가. <임철우의 책읽기 -대학생의 독서, 국민일보 7월9일 목요일자>
사람들은 대부분 스탈린을 사회주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회주의’에 대한 사전적 정의에 근거한다면 스탈린은 결코 ‘사회주의자’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스탈린 지도부는 국가에 의한 사회의 무력화와 공포 분위기 조성하였다. 러시아의 1937-1938년까지 정치 관련 범죄로 체포, 수감된 인구는 1.344.923명, 그 중에서는 총살된 인구는 681.692명이었다. 대체로 총살되는 이들은 거의 다수의 “구 공산당원” 등 잠재적으로 반체제 활동을 할 가능성이 있었던 자러 잠재적인 적에 대한 “선제공격”이었다. 그 결과 원자화, 순치된 사회로 “사회적 운동” 가능성의 봉쇄했다. 경제적 폭력은 특히 “농민들의 협동화”, 1929년 이후 사실상 농민들의 자율성을 말살시키고, 농촌으로부터 잉여를 수취하여 공업부문에 투자시키기 위한 매우 가혹한 “농업 희생 정책”을 했다. 또한 스탈린 지도부는 “생존 경쟁” 사회의 탄생을 시도했는데, 하류층 출신의 소련 시민에게는 최대의 과제란 “굶어죽지 않기”, “가족 살리기” 정도였다. 정권이 안정된 상황에서는 “생존”의 주된 방법은 정권에 대한 충성으로 소련 국민의 “가시적인 충성심”은 상당부분 내면화된 생존의 전략이었다. 폭력적인 “농촌 말살”을 기반으로 하여, 공업 경제는 1930년대에 기적적인 압축 성장을 이루어 도시 주민에 대한 포섭 정책을 가능케 했다. 그 대가로 실질 임금의 동결 내지 소폭 하락했고, 구조화된 과로 (하루 15시간씩 노동), 매우 높은 산재사망률을 보였다. 그런데 교육, 의료 분야에서의 국가의 포섭 정책이 민중의 희생에 대한 일종의 “대가”를 지불하는 셈이었다. 결국, 박정희 정권보다는 오히려 스탈린주의는 기본적인 위로부터의 압축 성장 패턴은 비슷하다고 해도, “대중 독재”의 형태에 다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박노자 <레닌과 트로츠키, 볼셰비즘 다시 보기> 제3강 스탈린주의의 실체는 무엇인가
한 가톨릭 신부가 있었다. 그는 신에 대한 헌신이 깊었으며 아름다운 기도를 하기로 이름이 났다. 어느날 밤 그가 책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기도를 드리는데 바깥에서 개구리들이 시끄럽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여름날 논과 습지에서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는 마치 합창 경연대회를 하는 것 같았다. 개구리들 때문에 정신이 산란해져서 기도를 드릴 수 없게 된 신부는 화가 나서 창밖을 향해 소리쳤다. "조용히 해, 개구리들아! 내가 지금 신에게 기도를 드리고 있단말야!" 신부는 오랫동안 수행을 쌓았고 영적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그 명령을 듣자 개구리들이 당장에 울음을 그쳤다. 또한 다른 벌레들도 겁을 먹고 소리를 죽였다. 주위가 고요해지고 신부는 다시금 한껏 경건한 마음으로 신에게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때 그의 마음안에 어떤 눈부신 빛이 나타났다. 그 빛은 바로 신이었다. 신부는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여 신이 자기에게 나타난 것에 대해 황홀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때 신이 신부에게 말했다. "불쌍한 신부여, 나는 조금전까지 편안한 마음으로 자연이 나에게 드리는 기도를 듣고 있었다. 모처럼 개구리들의 순수한 기도에 귀를 즐겁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너는 너의 욕망과 바람을 나열하는 그 순수하지 못한 주문으로 내 귀를 어지럽히기 위해서 개구리들을 침묵하게 했다." 신부는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눈을 뜨고 창밖을 향해 나지막히 말했다. "개구리들아, 다시 울어라." 그러자 개구리들은 다시금 한여름밤의 별빛 아래서 목청껏 '신에의 기도'를 노래부르기 시작했다. 신부는 그 개구리들의 울음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하여 그의 마음이 우주의 알 수 없는 조화를 느끼게 되고 생애 최초로 그는 기도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류시화의 "삶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 中
Board 추천글 2008.03.11 바람의종 R 10555
나는 내가 삶을 영위하려는 이유와 내 인생의 방향이 설정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역사가 그러하듯이 우리가 모두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가지는 않는다. 내가 무엇인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은 과거의 내 행동을 정당화시키려는 충동과 미래를 설계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불러 일으킨다. 나는 내 인생에서 끊임없이 계속되는 이 불안감이 '되어야 할 내 모습'과 '있는 그대로의 진솔한 내 모습'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에서 연유한다고 믿고 있다. 내 불안감은 미래에 대한 깊은 생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관리하려는 욕구에서 생기는 것이다. 내 마음속에 '나는 무엇이 되고 싶다' 라는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불안감이 몰려오는 듯 싶다. 그러한 불안감은 미래의 자기 모습을 관리하고 싶어하는 욕구와 관리의 불가능을 깨닫는 인식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미래의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다.' 라는 생각을 가진다면 어떻게 불안감이 싹틀 수 있겠는가?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올라서야겠다고 계획을 세우지만 혹시 목표에 도달하지나 못할까 염려하는 것, 이것이 바로 불안감이다. 내가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는 때는 다른 사람들이 내게 기대하던 것을 막 이루려 하는 순간이다. 성취의 순간에 죽음을 생각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좀 우스운 얘기일지 모른다. 하지만 거기에는 참으로 개인적인 이유가 개입되어 있다. 다른 사람들이 지워준 의무감 때문에 그들의 기대에 맞춰 버둥거리다 보면 진실한 자기 모습을 상실하게 된다. 미처 진실된 자신을 발견하기도 전에 죽음이 엄습해 오지나 않을까하는 것이다. 죽음은 나를 진정한 나 자신으로부터 분리시켜 놓기 때문이다. 휴 프레이더의 '나에게 쓰는 편지'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