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윤영환 님, 친애란 무엇일까요? 누구나 편지를 쓸 때 친애하는 누구누구에게 라는 말을 써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친애라는 말은 ‘친밀히 사랑함’이라는 뜻으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만 맺어질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는 친애 관계를 맺기 위해 몇 가지 조건을 들고 있는데, 사랑 그 자체의 순수함, 일방적으로 주는 관계가 아닌 쌍방적 선의,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모르지 않아야 한다고 하는 인지성이 그것이다. 어떠한 목적과 계기가 있는 친애는 진정한 친애가 아니고, 주인과 노예의 관계처럼 일방적 선의 사이에는 친애가 존재할 수 없으며,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친애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진정한 친애는 무엇인지 친애의 세 가지 종류를 통해 알아보도록 하자. “유익을 이유로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상대로부터 자신들에게 어떤 좋음이 생겨나는 한 사랑하는 것이다. 유익을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어떤 좋음을 이유로 상대에게 애착을 가지는 것이며, 그들은 사람 자체가 아닌 그가 유익을 주는 한 사랑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은 우연적인 의미에 따른 친애이다. 이러한 친애는 계속 이전 같지는 않을 때 쉽게 해체되고 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첫 번째로 ‘유익함을 이유로 하는 친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친애는 순수해야 하는데 유익을 이유로 한 친애는 나에게 유익함을 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므로 본질적인 친애가 아니다. 어떤 것을 목적으로 해서 친애가 이뤄져서는 안 되고, 이런 우연한 친애는 지속성이라는 측면이 깨지므로 쉽게 해체된다. “젊은이들의 친애는 즐거움을 이유로 성립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즐거운 것들도 달라지게 된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그들은 쉽게 친구가 되고, 또 쉽게 헤어진다. 그들은 또 순식간에 사랑에 빠졌다가 순식간에 헤어지기도 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변하기도 한다. 이들에게 친애라는 것은 이런 식으로 생겨난다.” 두 번째로 ‘즐거움을 이유로 하는 친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유익함을 이유로 한 친애와 마찬가지로 상대가 나에게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이런 계기 또한 순수하지 않기 때문에 본질적인 친애라고 볼 수 없다. “가장 완전한 친애는 좋은 사람들, 또 탁월성에 있어서 유사한 사람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친애이다. 이들은 그들이 좋은 사람인 한 서로가 잘 되기를 똑같이 바란다. 이들이 이러한 태도를 가지는 것은 우연한 것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을 이유로 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들의 친애는 그들이 좋은 사람인 한 유지된다.” 마지막으로 ‘가장 완전한 친애’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이러한 친애가 지속적인 것은 당연하고 유사성에 따라 성립한다고 말하고 있다. 친애란 사람들과의 관계가 순수성, 상호성, 인지성을 모두 갖출 때 가장 완전할 수 있다. 친애는 동고동락하는 시간과 사귐을 요구한다. 친애의 마음은 빨리 생겨나지만 정말로 친애하기는 쉽지 않다. 친애의 대상이 되려면 즐거운 것이든지 유익한 것이어야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왜냐하면 즐겁거나 유익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친애가 깨지고, 지속성을 위반하게 되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의 친애는 유익하고 즐거운 것을 넘어서 그 자체로 좋은 것이고, 그것에는 조건이 없다. 우리는 주변에 친애하는 많은 이들과 함께하고 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친애 관계는 얼마나 될까? 한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볼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김재홍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읽기와 해석>중에서
Board 추천글 2007.10.24 바람의종 R 12773
강박신경증은 강박관념과 강박행위를 반복하고 지속하는 신경증이다. 불유쾌한 감정이나 상념에 대해 떨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정상적인 이성판단과 병적 의식의 갈등으로 빠져 들어간다. 환자는 이 갈등에서 벗어나기 위해 강박적으로 어떤 행동을 되풀이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손가락에 병원균이 묻어 있지 않을까 하는 관념 때문에 온종일 손만 씻는다거나, 자신이 그런 짓을 할 리는 없다는 것을 알지만, 흉기를 들면 발작적으로 남을 해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 등이다. 이 밖에도 전기나 텔레비전의 스위치 끄는 것이 마음에 걸려, 몇 번이고 확인하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경우도 있다. 강박신경증은 대소변 훈련기에 부모와의 관계에서 자립과 의존의 문제에서 생긴 공격충동 또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관련된 성적충동에 대한 방어로 생겨난다. ‘쥐인간’은 프로이트에게 4년간 극심한 강박증을 앓고 있다고 고백하였는데, 아버지와 그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고, 자살의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고 했다. 프로이트의 쥐인간 사례를 보면서 강박신경증이 발생하는 과정과 심리 기제에 대하여 알아보자. 그는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자, 사랑하는 여자와 아버지가 권해주는 명망 있는 가문의 딸 사이에서 고민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사랑과 아버지의 영향력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고, 그는 이 상황을 병에 걸림으로써 회피한다. 그의 병과 성생활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 자위를 하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그가 여섯 살이 되기 전, 자위와 관계되는 비행을 저질렀고, 그것 때문에 아버지에게 혼이 났었다고 추측하는데, 이러한 사건 즉 자신의 성충동과 욕망을 억제하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그의 강박증을 낳았던 것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죽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어릴 적 좋아하던 여자로부터 관심을 끌기 위해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던 적이 있고,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생겼지만 돈이 없어서 결혼이 어려웠을 때 아버지가 죽기를 바랐다. 두려움은 결국은 궁극적으로 억압되어 있던 소망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가지고 있는 아버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아버지의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죄책감 등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소망의 다른 모습이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그가 느끼는 슬픔 역시 자신의 욕망에 대한 죄책감의 일환으로 보통사람들에 비해 애도가 더욱 오래 걸릴 수 있다. 강박신경증은 환자 본인의 생각, 느낌, 소망이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강박증 환자들이 자신들의 힘을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다소라도 이해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김석 <라깡의 정신분석학 입문: 욕망이론과 주체 개념> 중에서
Board 추천글 2007.10.10 바람의종 R 26077
정말 당신의 짐이 크고 무겁습니까? 자기의 짐을 지고 가던 어느 사람이 신에게 불만을 터트렸습니다. ˝다른 사람의 짐은 다 작고 가벼워 보이는데 제 짐은 왜 이리 크고 무겁습니까?˝ 그러자 신은 빙그레 웃으며 그 사람을 데리고 짐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서 ˝네 짐이 크고 무겁다니 다른 짐으로 바꾸어 줄 테니 이 중에서 네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골라봐라!˝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짐이 산더미 같이 쌓인 창고에서 가장 작고 가벼운 짐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작고 가벼워 보여서 들어보면 무겁고 불편해서 쉽게 마음에 드는 짐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자기의 마음에 맞는 짐을 고르다가 저녁때가 다 되어서야 마음에 드는 짐을 고를 수 있었습니다. 마음에 드는 짐을 고른 그 사람은 자기가 고른 짐을 들고 흡족한 마음으로 신에게 나아갔습니다. 그리고는 크고 무거운 짐을 작고 가벼운 짐으로 바꾸어준 신에게 감사를 했습니다. ˝드디어 마음에 꼭 드는 짐을 찾았습니다. 이렇게 작고 가벼운 짐으로 바꿀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자 그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신이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그 짐을 자세히 보아라! 그 짐은 본래 네가 지고 가던 짐이란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자기의 짐이 크고 무겁다며 다른 사람들의 짐은 작고 가벼워 보이는데 내 짐은 왜 이렇게 크고 무거우냐며 늘 불평과 불만을 쉬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보기에 작고 가벼워 보이는 짐을 지고 가는 사람 역시 당신과 같은 생각에 불평과 불만을 쉬지 않고 살아간다면 믿기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생각하기에 지금 당신이 지고 있는짐이 크고 무거워 가볍고 작은 다른 짐으로 바꾸어 지고 싶겠지만 그러나 자신이 지고 가는 짐이 자기에게는 가장 작고 가볍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늘 자기의 짐이 크고 무겁다며 늘 불평과 불만 속에 살아가는 것 아닐까요? 자기의 짐이 크고 무거운가 아니면 작고 가벼운가는 짐의 크기와 무게에 있지 않고 자기 마음의 어떠함에 있다는 사실을 몰각한 채 사람들은 짐의 크기와 무게만 보고 불평과 불만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살아갑니다. 그러니 삶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겠습니까? - 좋은글 에서 -
Board 추천글 2007.10.10 바람의종 R 19491
우리처럼 인터넷에 목매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유럽인들은 필요한 정보를 찾을 때를 빼면 사이버 공간에 들어가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반면 우리는 하루의 상당 시간을 인터넷에 들어가 산다. 메신저로 타인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다른 이의 블로그, 기관이나 단체 홈페이지로 마실 다니기를 즐긴다. 서구의 인터넷 이용이 '정보적'이라면, 우리의 인터넷 문화는 이렇게 '친교적'이다. 소통에서 친교성이 중시되고, 논쟁에 감정이 실리는 것은 구술문화의 특징이다. 해방 직후 우리나라의 문맹률은 90%. 그때만 해도 인구 대부분이 구술문화에 속해 있었다는 얘기다. 그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맹률은 거의 0%에 가깝다. 서구에서 몇 백 년이 걸린 과정을 우리는 몇 십 년 만에 뚝딱 해치워버렸다. 구술문화의 특성을 완전히 지우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 아닌가. 우리 의식에 아직 구술적 특성이 강하게 남은 것은 이 때문이다. 구술문화의 특징은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고, 그 인격이 개성적이기보다 집단적이며, 혹은 그 의식이 반성적이기보다 의타적이다. 어떠한 사물을 ‘정의’하려는 시도도, 삼단논법의 형식 논리도 구술문화에서는 굳이 필요하지 않은 일이다. 인터넷에서 툭하면 벌어지는 집단 따돌림, 악플이 난무한 현상은 논증과 증거를 중심으로 하는 근대적 사법체계 이전, 즉 그 옛날 촌락공동체에서 행해지던 멍석말이의 디지털 버전이다. 구술문화의 사유와 정서를 가진 우리들에게 인터넷은 적어도 사이버 공간에서나마 잃어버린 촌락공동체를 다시 돌려주었다. 우리의 인터넷 글쓰기를 보면 논리나 추론은 없고 찬양이나 비난만 있다. 차가운 비판은 없고, 넘치는 것이 뜨거운 욕설이다. 자신의 인격을 책임진 개인은 사라지고, ID 뒤에 숨은 익명의 집단들이 떼를 이뤄 사냥감을 찾아 다닌다. 그러다가 공격 대상을 발견하면, 디지털 멍석말이에 들어가 마음껏 원시적 감정을 분출한다. 우리의 인터넷에서 너무나 자주 보는 이런 현상은 분명히 문자문화 이전의 습성, 일종의 문화 지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보화 시대를 맞아 이 정신적 낙후성이 외려 기술적 선진성의 토대가 되고 있다. 인터넷 자체가 새로운 구술성의 매체이기 때문이다. 인터넷 글쓰기는 입을 통해 나오는 말을 글로 타이핑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는 구술문화와 문자문화가 묘하게 뒤섞인다. 우리가 그토록 인터넷에 열광하는 이유는, 여전히 강한 구술성이 남은 우리의 의식이 거기에 적합한 첨단매체를 찾았기 때문이 아닐까? 진중권 <미디어 미학> 중에서
Board 추천글 2007.10.05 바람의종 R 10557
天(하늘 천) 地(땅 지) 玄(검을 현) 黃(누를 황) 宇(집 우) 宙(집 주) 洪(넓을 홍) 荒(거칠 황) 하늘은 머리 위에 있어 온갖 빛을 머금고 있고, 땅은 아래 있어서 그 빛이 누르다.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며, 우주는 넓고 거칠다. 閏(윤달 윤) 餘(남을 여) 成(이룰 성) 歲(해 세) 律(가락 률) 呂(음률 려) 調(고를 조) 陽(볕 양) 일 년 이십사절기 나머지 시각을 모아 윤달로 하여 해를 이루었다. 천지간의 양기를 고르게 하니 즉 율은 양이요 여는 음이다. 천자문은 본래 4언(四言) 250구로 이루어진 한 편의 시이다. 위진남북조 시대 양(梁)나라 무제(武帝) 때, 주흥사(周興嗣)가 지어 황제에게 바쳤다고 하는데, 내용은 천지자연으로부터 역사와 인물, 교육과 선비의 수양에 이르는 중국인의 자연관, 역사관, 문화에 대하여 아주 간명하게 집약해내었다. 자연스런 조탁 솜씨는 중국 문자가 갖는 특징을 유감 없이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올해는 한중수교 15주년이 되는 해다. 한문과 중국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수많은 한문 교재들이 나오고 있지만, 중화와 한문의 세계에 대한 기본 이해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 외우기 식의 기능적 한자교육으로 일관하다 보니, 어릴 때부터 한자란 ‘어려운 것, 재미없는 것’이란 인상을 깊게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면에서 한문은 모르고 중국어는 말하는 기이한 현상이 만연하기에 이르렀고, 중국과 우리나라의 관계상을 비롯한 동아시아 세계에 대해 기본적인 이해조차 어렵게 만들고 있다. 천자문 (千字文)은 단지 외우기 위한 교본으로써의 의미가 아니라, 상상과 현실의 세계를 집약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한 글자 한 글자 자기 임무를 충실하고 자유분방하게 수행하고 있다.따라서 천 개의 글자, 그것이 이루어낸 시의 세계로 나간다면 천자문내 글자의 관계성은 물론, 중국인이 우주 자연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거기에 어떻게 자신의삶터를 만들고 일구어나갔는지 여실히 눈여겨볼 좋은 기제가 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천자문을 통해 중국과 동아시아 세계 사유 구조의 특징과 문화적 특성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백원담 <천자문의 세계> 중에서
Board 추천글 2007.09.26 바람의종 R 15744
1845년 북극 탐험 시 사망한 영국선원이 153년 후, 과학자들에 의해 부활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이 사건은 전 세계 네티즌 사이에 검색어 1위로 떠올랐던 충격적 미스터리로, 냉동인간 부활사건의 사실여부에 대한 궁금증이 높아지고 있는 상태다. 또, 캐나다에서 13개월 된 아기가, 영하 20도의 날씨에 기저귀만 입은 채 밖에 나갔다가 10시간 만에 발견된 일도 있었다. 구조대와 모든 사람들은 아기가 살 거라고는 예상조차 하지 않았지만, 의료진이 언 몸을 녹여주자 손과 발에 동상을 입은 것 외에 아무 이상 없이 활발하게 움직였다고 한다. 심장이 정지한 채로 냉동된 인간은 과연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일까? 현재 법적으로는 심장이 정지하면 ‘사망’으로 분류하지만, 냉동인간이 등장하게 되면서 죽음의 개념에 새로운 관점들이 나오고 있다. 죽음을 심장정지, 뇌사, 그리고 해체(부패)의 3가지 시점으로 나누어, 심장정지가 아닌 해체의 시점을 진정한 사망이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장정지는 ‘기능정지’일 뿐이고, 움직임이 없는 상태라고 이야기하며, 죽음의 의미 자체를 다시 정의해야 한다는 주장도 일고 있다. ‘포스트데스’, 즉 지금의 우리가 알고 있는 죽음과는 다른 차원의 죽음을 접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진정한 죽음이라고 주장하는 해체의 시점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이 아닌, ‘돌이킬 수 있는 죽음’ 즉, ‘기능정지’의 상태로 분류된 냉동인간, 과연 살아있는 걸까, 죽어있는 걸까? 미국 애리조나에 위치한 인체 냉동보존 서비스 회사, ‘알코어(Alcor) 생명연장 재단’의 냉동보존 과정은, 법적 사망선고가 내려진 다음에 이뤄지는데, 먼저 변질을 최소화하기 위해 신체를 냉각시킨다. 체내에 특수 용액을 흘려 보내 몸의 수분 60%를 빼고, 부동액을 넣어 급 저온으로 유지시키는 것이다. 냉동된 인체는 이런 과정을 거친 후 부활될 때까지 ‘듀어’라고 불리는 탱크에 보존된다. 알코어 자문 과학자인 오브리 드 그레이씨는 “법적으로는 죽었지만 생물학적으로 죽지 않았을 수 있다”라며 “먼 미래는 이 사람들을 해동시켜 질병을 고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현재 100여명의 냉동인간을 보유하고 있는 알코어사에는 약 800명의 대기자가 있으며, 직업, 인종, 나이 등은 천차만별이지만, 그들은 한정된 수명을 연장하고 싶은 꿈에 부풀어 있다. 온몸에 암 종양이 퍼져 지난해 냉동 보존된 한 중년 여성은 냉동 전 찍은 비디오에서 “살아나면 미트볼 스파게티를 먹고 싶다”고 말했다. 먼 미래에는 그녀의 소망이 이뤄질 수 있을까? 냉동인간의 부활 시기는 장담할 수 없다. 미래에 냉동인간들을 다시 살려낼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무엇보다 냉동과정에서 손상된 장기를 치료하고, 기억을 재생시킬 수 있는 발달된 기술이 필요하다는 게 관계자들의 견해다.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는 것 또한 과제로 남아 있다. 냉동인간을 다시 살려낼 수 있는 새로운 기술만 개발된다면 영원히 살고 싶은 인간의 소망 ‘생명연장의 꿈’이 먼 미래의 일은 아니지 않을까? 황희선 <인간, 기계가 되다> 중에서
Board 추천글 2007.09.19 바람의종 R 47928
지난 9월 2일은 안중근 선생이 태어난 날이다. 안중근 의사(義士)는 독립투사로 우리들 마음 깊이 영웅으로 자리잡고 있다. 1909년 10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상과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사살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일본인으로 가장, 하얼빈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곧 일본 관헌에게 넘겨져 뤼순의 일본 감옥에 수감되었고 이듬해 2월,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어, 3월 26일 형이 집행되었다. 안중근은 대한민국 사람들에게는 정의로운 일을 한 의사(義士)다. 하지만 관점을 달리해서 본다면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테러리스트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런던대 앤더슨 칼슨 교수는 고려대 국제하계학교 한국현대사 강의 중 김구, 이봉창, 윤봉길, 안중근 등을 테러리스트라고 하여 일부 학생들의 이의제기가 있었다. 이는 곧 인터넷게시판을 뜨겁게 달구었다.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청년 안중근은 지금의 한국인들에게도 여전히 의사(義士)이고, 안중근의 거사는 정의롭다. 안중근의 행동이 정의로울 수 있는 기반은, 우리 대한민국 국민이 봤을 때 옳은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즉,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그 시간을 공유하는, 한반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안중근의 행위는 옳은 것이었다. 그 이유는, 한국인들이 공유하는 역사 지평 및 그 행위가, ‘한국식 인류애’ 실현에 기여한다는 역사 인식에 있다. 이것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실존적인 시선’이다. 그러나 반대로 대다수 일본인에게 안중근은 기본적으로 ‘살인 사건’을 저지른 살인자일 뿐 아니라, 서양 제국주의에 맞서서 동양인들의 복리에 기여하고자 하는 일본에 맞선, 이른바 대동아 공영권에 해가 되는, 즉 일본인들의 역사 인식으로는 ‘일본식 인류애’ 실현의 장애물이다. 이것은 일본 국민으로서 ‘실존적인 시선’이다. 보통은 세상을 볼 때 이방인의 시선이나 제삼자의 시선에서 보는 데 익숙하다. 한국인의 역사 지평에 있지도 않고, 일본인의 역사 지평에 있지도 않은 제3자가 안중근 사건을 하나의 역사 사건으로 탐구하여 ‘참된 파악’이라도 제시하고자 할 경우 문제는 어떻게 될까? 누군가 안중근의 의도는 좋았지만 테러행위는 옳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때 작동하는 것은 ‘관찰하는 시선’이 된다. 또한,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속에 나라를 빼앗긴 안중근이라는 청년이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것은 정당하다고 한다면, 그때 작동하는 것도 역시 ‘관찰하는 시선’이 된다. 관찰하는 시선과 실존적으로 보는 시선은 다르다. 며칠간의 병영체험은 실제 군 복무와 엄연히 다르고, 축구에서 선수의 플레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관객인 내가 참여할 수 없는 것처럼, 병영체험자와 군인, 놀이하는 사람과 구경꾼은 서로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없다. 안중근의 행위도 이러한 시점에서 다른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관찰자 관점은 대부분의 문제에서 당사자보다 훨씬 광범위한 층을 형성하기 마련이고, 이들의 관점은 안중근 사건에 대하여 뻔한 평가를 내리기 쉽다. “아무리 정당한 주장이더라도 폭력은 안 된다”는 일반화되기 쉬운 견해가 등장하고, 이러한 주장은 식민지 나라의 어느 청년이 ‘테러리스트’가 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사실과 별 관계가 없다. 제3자 입장으로 볼 때 더 객관적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더 깊이 생각해 본다면 그러한 판단은, 객관적 진리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또 다른 테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반성택 <해석학: 그 철학적 문제의식의 심화 과정> 중에서
Board 추천글 2007.09.06 바람의종 R 16025
오는 12월 19일은 대통령 선거일이다. 후보들이 민심을 잡기 위해 연설하러 다니고, 시민들과 만나 악수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당선이 된 후에도 국민들의 마음을 진심으로 어루만지는 대통령이 될지는 같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왕도정치를 이야기한 맹자를 통해 성선설과 왕도정치와의 관계, 우리가 필요로 하는 대통령은 어떤 모습인지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자. 민본(民本)이란, 국민의 이익과 행복의 증진을 근본이념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 맹자는 백성들이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민본을 굉장히 중시하였다. 이전에는 백성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지만, 백성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제후들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여러 나라가 경쟁하다 보니, 백성들이 세금을 적게 걷는 나라로 이주하거나, 도둑이 되어 노는 땅이 생겨서인데, 철저한 농본국가에서 백성의 숫자는 곧 세금과 연결되기 때문이었다. 맹자는 치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은 근본적인 심성이 착하다는 전제에서 왕도정치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왕은 백성의 뜻으로 정치를 하고, 백성으로부터 어버이와 같은 호칭을 듣는다는 것이다. 맹자가 말하는 왕도정치란 “백성을 사랑하는 정치요, 고통받는 것을 차마 못 보는 정치이다. 백성을 굶겨 죽이고 왕이 자신의 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찔러 죽여 놓고, 내가 아니고 칼이 죽인 것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맹자의 왕도정치 첫 번째는 백성을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것으로,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것을 들고, 맨 마지막에 교육을 통해 도덕을 실천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왕은 바뀔 수 있다. 민심은 천심이다. 백성의 소리가 곧 하늘의 소리이다. 천명이란 백성의 뜻 마음을 얻음으로써 하늘로부터 왕이 될 명을 얻는다.” 고 하였다. 무언가를 이루려면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 즉, 가능성의 영역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본성이 어떠하냐, 선하냐 악하냐에 따라 정치도 달라진다. 악하다 - 강하게 통제하고 억제하는 법가적 모델을 들고, 선하다 - 교화가 우선시 되고, 모범을 보이면 학습을 통해 이끌 수 있다. 맹자는 사람의 본성을 선하다고 보고 도덕적으로 향상할 수 있어 이상적인 사회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왕에게는 “선한 성질을 가지고 있으니 왕이 될 만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 라고 말하고 백성에게는 “교화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역할을 다하라”고 말했다. 물에 빠진 어린 아이를 보면 구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측은한 마음이 들어 구하는 것인데, 혈족도 아니고 보상금을 바라서도 아니고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해서도 아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본심에 의해 불끈 나오는 마음! 이것이 선한 마음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이런 선한 마음이 있다. 맹자는 이런 사람의 선한 마음을 본성이라 믿고 그에 따라 정치도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물론 지금은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시대는 아니다. 국민들이 대통령을 뽑고,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 나라를 다스린다. 이제 곧 새로운 대통령을 뽑아야 하는데, 선출되기 전에만 민심을 살피러 다니는 대통령이 아닌, 맹자가 이야기하는 성선설을 바탕으로, 민심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참된 대통령이 선출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성태용 <동양사상 입문: 고대 인도철학과 중국철학을 중심으로> 중에서
Board 추천글 2007.08.30 바람의종 R 14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