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ard 추천글 2007.01.09 호단 R 7938
http://www.changbi.com/weeklyreview/content.asp?pID=54&pPageID=&pPageCnt=&pBlockID=&pBlockCnt=&pDir=&pSearch=&pSearchStr= 136명에서 142명쯤 김중혁 | 소설가 소설을 한편 끝내고 나면 꼭 혼자서 술을 마시며 영화를 보게 된다. 이제는 일종의 공식 같은 게 돼버렸다.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고 방안에 혼자 앉아 하이네켄이나 호가든 같은 맥주를 홀짝거리면서 주성치나 빌 머레이가 등장하는 코미디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몇시간 전까지 끙끙대며 썼던 소설의 내용을 깡그리 잊어버릴 수 있어서 좋다. 첨예한 정치적 문제를 다루거나 전지구적 환경문제 같은 걸 소설로 쓰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소설을 쓴다는 것은 꽤 머리를 써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원고를 마칠 즈음이면 한꺼번에 피로가 몰려오게 마련이다. 그럴 때면 코미디영화만큼 좋은 게 없다. 얼마 전에는 소설 한편을 끝내고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게 됐는데 코미디영화보다 더 웃긴 장면을 만나는 행운을 잡았다.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No Direction Home〉이었고, 뮤지션 밥 딜런의 삶과 음악을 다룬 마틴 스콜씨지 감독의 작품이었다. 제목으로 보나 감독으로 보나 밥 딜런의 음악 스타일로 보나 우스운 장면이 전혀 등장하지 않을 영화처럼 보였지만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밥 딜런의 인터뷰 장면은 보는 내내 배꼽을 쥐어틀게 만들었다. 기자회견장에 모인 기자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질문을 하고, 밥 딜런은 시종일관 시큰둥하게 장난을 친다. 이런 식이다. 기자 : 당신의 노래에 나오는 오토바이는 뭘 의미하나요? 밥 딜런 : 오토바이를 좋아해요. 모든 사람들이 오토바이를 좋아하잖아요. 기자 : 당신이 분류되는 걸 싫어하는 건 알지만 30세가 넘은 사람들을 위한 당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밥 딜런 : 우선 전 30세 이하로 분류되고요. 제 역할은 가능한 여기서 오래 버티는 거죠. 밥 딜런은 농담을 좀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답변을 할 때마다 여기저기서 킥킥대는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압권인 대답이 있었다. 나는 이 장면을 보다가 뒤로 넘어갔다. 기자 : 당신이 걷고 있는 그런 음악 분야의 사람들은 얼마나 되며 저항가수, 즉 자신의 음악을 통해 사회를 비판하는 음악가는 몇명이나 됩니까? 밥 딜런 : 몇명이나 되냐고요? ……136명쯤 있어요. 기자 : 정확히 136명이라는 겁니까? 밥 딜런 : 한 136명에서 142명쯤? 이런 걸 두고 '우문농답(愚問弄答)'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진지하게 대답하는 밥 딜런의 표정이 볼 만했다. 하기야 그 기자의 고충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좀 멍청한 질문이긴 했지만 그 기자는 정말 그게 궁금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정확한 숫자가 나오면 기사 쓰기가 훨씬 쉬워질 테니까 말이다. 어쩌면 다음날 신문에 〈특종, 현재 미국의 저항가수는 총 136명에서 142명 사이, 밥 딜런의 충격 고백〉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을지도 모르겠다. 역시 코미디가 따로 없다. 숫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나는 지독하게 숫자에 약한 편이다. 무언가를 어림짐작했을 때 그 수를 맞혀본 경우가 거의 없다. 대학시절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오늘 손님 많았나? 몇명이나 왔어?"라고 사장이 물어보면 "글쎄요, 한 오십명?"이라고 대답을 했지만 실제 전표상의 손님은 2백명이 넘는 경우가 허다했고, 상암 축구경기장에 처음 갔을 때는 '축구장이 뭐가 이렇게 작아? 이래 가지곤 1만명도 못 들어오지 않겠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 수용 관중수는 6만명이 넘었다. 계속 이런 수모를 당하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어림짐작을 포기하게 됐다. 그리고 어떤 숫자를 듣게 돼도 귓등으로 반사시켜버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올해 명절의 총 귀성객 수는 1천7백만명이랍니다. 많네요. 올여름 해운대에는 50만명의 피서객이 모였답니다. 역시, 많네요. 중국의 명절 귀성객은 20억명이랍니다. 좀, 많네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이 개봉 21일 만에 1천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자꾸만 관객 동원 1천만이 넘는 영화들이 등장하다보니 1천만이라는 숫자에도 둔감해진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어마어마한 숫자다. 대한민국의 총인구가 4천8백만 정도니까 그중에서 실제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사람을 추려내고, 영화를 두번 본 사람을 빼고, 영화를 보다가 뛰쳐나온 사람을 빼면, 실제 〈괴물〉을 본 사람은…… 내가 계산해낼 리가 없다. 어쨌거나 어마어마한 숫자일 것이다. 어째서 그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영화를 봐야 하는지, 꼭 봐야 하는 건지, 왜 보고 싶어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조금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관을 독점했다든지, 다른 영화들의 가능성을 막고 있다든지, 그런 말을 할 생각도 없고 입장도 아니지만 가끔씩 그 1천만이라는 숫자가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그건 이미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닌 것이다. 그건 이미 숫자가 아닌 것이다. 그런 상상도 해본다. 내 소설을 1천만명이 읽는다면? 아마도 너무 부끄럽고 송구스러울 것 같다. 그런 숫자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혹은 장르는, 따로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이태원의 재즈클럽 '올댓재즈'에 놀러갔다 왔다. 정말 오랜만에 가보는 재즈클럽이었다. 금요일 저녁이어서 퓨전재즈 밴드 '웨이브'의 공연이 있었는데 2시간 30분 동안 지루할 틈이 없었다. 좁은 클럽에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서 있는 사람도 많았다. 관객의 숫자는 아마도 136명에서 142명쯤 됐던 것 같고, 모두들 신나게 재즈를 즐겼다. 정말 연주를 잘하는 밴드였다. 그중에서도 기타리스트 한현창의 연주와 표정이 인상깊었다. 기타리스트의 표정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다. 그는 관객을 보지 않고, 기타도 보지 않고, 자신의 손가락도 보지 않고, 먼 곳을 바라보면서 기타를 연주했다. 자신의 기타 소리를 느끼는 그의 표정이 재미있어서 나는 공연 내내 기타리스트의 얼굴을 보았다. 공연 도중 기타줄 하나가 끊어지는 사고가 있었지만 기타리스트와 밴드 모두 재미있어했다. 관객들도 재미있어했다. 공연이 모두 끝났지만 관객들은 앙코르를 외쳤다. 앙코르를 외치는 136명에서 142명쯤 되는 그 사람들과 함께 나도 앙코르를 외쳤다. 뭔가 함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그건 관객의 수가 136명에서 142명쯤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느낀 짜릿함이었다. 다음부터는 소설을 끝내고 나면 공연장을 찾아가볼 생각이다. 집에서 먹는 것보다 맥주값은 좀더 들겠지만 세상에는 코미디영화보다 더 재미있는 것들도 많으니까 말이다. 필자 소개 김중혁 소설가. 소설집으로 《펭귄뉴스》가 있음.
Board 추천글 2006.09.02 윤영환 R 19415
http://www.changbi.com/weeklyreview/content.asp?pID=52&pPageID=&pPageCnt=&pBlockID=&pBlockCnt=&pDir=&pSearch=&pSearchStr= 동시상영관에서의 한때 황병승 | 시인 80년대초, 가장 기억에 남는 호러무비와 에로무비를 각각 한편씩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헬나이트〉와 〈애마부인〉을 꼽을 것이다. 덧붙여, 나는 그 두편의 영화를 동시상영관에서 한꺼번에, 그리고 반복해서 여러번 봤다고, 우쭐해하며 말할지도 모른다. 열두살,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잊혀지지도 않는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호주머니에 오백원을 달랑 넣고, 동네 형들을 따라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가서 보았던 〈헬나이트〉와 〈애마부인〉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접했던 극장판 영화들이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도시개발 전의 상계동시장 한구석에 'OO극장'이라는 동시상영관이 있었다. 늘 사람들로 붐비고, 영화 상영 내내 잡담이 끊이질 않고, 담배연기와 골 때리는 냄새로 가득했던……. 그날(처음 영화를 보던 날)도 100석 안팎의 극장은 사람들로 꽉 들어찼고, 우리는 스크린 바로 앞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경이로운 첫경험을 했다. 코앞에서 펼쳐지는 살육과 에로의 전율 속에서 새로운 세계와 정면으로 맞부딪친, 그러니까 얼얼해진 열두살들이었다. 그뒤로 오락실, 안 갔다. 콩알만한 비행기들과 싸우는 일에 우리는 더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동시상영관 순례에 나섰다. 그때는 '연소자 관람불가'라는 말은 그저 폼으로 극장 앞에 붙어 있을 뿐, 표만 내밀면 늙은 검표원들은 무조건 오케이, 무사통과였다. 당시 영세한 동시상영관들의 현실이었고, 늙은 검표원들은 어쩌면, '언제가 다 알게 될 것들을 미리 본다고 해서 너희들이 더 나빠지겠니?' 같은 열린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중학생이 되어, OO극장의 헬나이트와 애마부인 체험생들은 다시 만났고, 업그레이드된 동시상영관을 찾아나섰다. 지금도 기억나는 곳은, 학교에서 버스를 타고 삼십분 거리에 있는 XX극장이었다. OO극장 보다 세배 정도 큰 규모에 2층 객석도 있었는데, 손님이 거의 없는 평일의 2층에는 주로 노는 형 누나들의 아지트였고, 영화가 시작되면 쩝쩝거리며 스킨십하는 소리를 내거나 본드 냄새를 풍겼다. 그리고 1층에는 수상해 보이는 아줌마 아저씨들(?)과 화장실 앞에서 서성거리던, 독특한 옷차림의 동성애자들이 주관객층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당하게 밝은 곳으로 나가지 못하거나 혹은 나가기 싫은 사람들이 그곳의 구성원인, 평일의 동시상영관은 그것대로 하나의 작은 사회, 언더그라운드를 형성한 셈이다. 어른도 아이도 아니었던 우리는 그때 막 성에 눈을 뜨는 시기였고, 동시상영관에서 그 폭발할 듯한 에너지들을 발산하며 작은 사회를, 언더정신을 배웠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OO극장과 XX극장 그리고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몇몇 변두리 극장들을 오가며 참 많은 영화들을 봤다. 대부분이 에로영화였지만, 그중에서도 기억나는 것은 〈만추〉와 〈그로잉업〉이다. 〈만추〉는 탤런트 김혜자의 격렬한 정사씬 때문에, 〈그로잉업〉은 당시의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청소년들의 성과 사랑에 대한 얘기를 다루고 있었고, 첫 쎅스,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하게 만들어준 영화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좋아하는 여자에게 결국 배신당하는, 한 못생긴 녀석에 관한 슬픈 영화……라는 생각이 압도적이지만. 아무려나, 우리는 주말이 되면 극장에 죽치고 앉아, 또래의 여자애들이 어둠속으로 등장하기를 기다리며, 봤던 영화를 보고 또 봤다. 그리고 어느날, 중학교 졸업을 앞둔 주말 오후, 세명의 여자들과 합석을 하게 되었다. 친구인 K와 한동네에 사는 여자애들이었다. 우리는 각자 마음에 드는 여자애와 나란히 앉아 영화를 봤는데, 어떤 영화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영화가 눈에 들어올 턱이 없었다. 온통, 곁에 앉은 여자애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으니까. 굳이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아마도 대만배우 홍금보 주연의 영화였거나, 호화 출연진들이 대거 출연했던 카레이스 영화 〈캐논볼〉이었거나, 그랬을 것이다. 한편의 영화가 끝나고, 두번째 영화가 시작되는 내내, 나와 친구 S는 순진하게도 식은땀을 흘리며 잔뜩 긴장해 있었는데, K는 달랐다. 옆자리에 앉은 여자애의 가슴을 용감하게 만지고 있었던 것이다. 와아…… 우리는 K가 미치도록 부러웠고, 마지막 영화가 끝나는 긴긴 시간 동안, 구멍 속의 생쥐들처럼 오락가락 들락날락, 속으로 자학하고 또 자학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우리는 극장이 문을 닫는 시간까지 지긋지긋한 홍금보인지, 캐논볼인지를 보다가 나왔다. 그리고 마땅히 갈 곳이 없었던 우리, 대책없는 중딩들은 한참동안 노상토론을 벌인 끝에 극장 근처의 예배당에서 밤을 지새우기로 합의했다. 오, 지저스! 결국 예배당이라니…… 지금 생각해도 찔끔 눈물이 난다. 요즘 같으면, 밤새 영업하는 비디오방이며 PC방, 노래방에라도 갈 수 있겠지만, 그때는 정말 예배당밖에는 갈 곳이 없었던 걸까?! 아마도 우리가 좀 모자란 녀석들이었겠지. 그러나 밤을 지새운다고 해서 저절로 사건이 터지는 건 아니었다. 나와 S는 극장에서처럼 예배당 나무 의자에 얌전히 앉아, K의 화려한 리싸이틀을 밤새 지켜봐야만 했다. 어느새 날이 밝았고, 나의 파트너였던 여자애는, "오빤 참 좋은 사람 같아……" 남의 속도 모르고, 그애는 나를 순식간에 '베리 젠틀 굿맨'으로 만들어버리고, 지금까지도 씻지 못할 상처의 말이 되어버린 마지막 멘트를 남긴 채, 새벽의 예배당을 총총히 떠나갔다. 그렇게 동시상영관에서의 마지막 에피소드를 끝으로, 우리는 각자 뿔뿔이 흩어져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용돈을 모아 비디오를 장만했고, 여자친구도 생겼다. 그러나 그때나(고교시절), 지금이나 동시상영관에 대한 향수는 여전하다. 골 때리는 냄새와 텁텁한 실내공기, 비 내리는 스크린, 툭하면 끊어지는 화면과 늙은 검표원들. 동시상영관이 주는 으스스한 뉘앙스를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시절, 아마도 우리에게 있어 동시상영관은 좋게든 혹은 나쁘게든 어른으로 데뷔하는 하나의 방식 혹은 입구 역할을 했는지도 모른다. K는 일찍 결혼해서 애아빠가 되었고, 잡지사에 다니고 있다. 그리고 S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아버지가 운영하는 작은 사업체를 물려받았다. 그렇게 지금은 다들 저마다의 길을 가고 있지만 가족들과 혹은 애인, 동료들과 영화를 보며 한번쯤 환한 미소와 함께 동시상영관에서의 그리운 한때를 떠올릴 것이다. 필자 소개 황병승 시인.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가 있음.
Board 추천글 2006.09.02 윤영환 R 16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