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 그림을 보면 느낌이 어떠한가? 이 그림은 반복적인 형태의 화면을 의도적으로 조작하여, 우리가 볼 때 시각적으로 어지럽고, 정신없고, 그림이 움직이는 듯한 착시가 일어나, 한 부분을 오래 바라볼 수 없게 된다. 이러한 그림을 우리는 ‘옵티컬 아트’ 줄여서 ‘옵아트’ 라고 부른다. 3년 남짓 지속된 ‘옵아트’는 단명했다. 전성기에도 대중의 사랑을 받는 데에는 실패했다. 착시를 이용한 시각의 놀이가 유치하게 여겨진 것일까? 하지만 탈근대를 지향하는 최근의 철학적 분위기와 컴퓨터가 주도하는 최근의 미디어 환경을 고려할 때, ‘옵아트’라는 현상을 최소한 지금보다는 더 진지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옵아트’ 하면 떠오른 이름 중의 하나가 브리짓 라일리다. 그녀의 작품 <물결>(1964)을 보자. 위에서 아래로 그려진 수많은 곡선들이 화면에 크고 작은 물결을 일으켜, 바라보는 이의 눈을 어지럽게 만든다. 분명히 정지된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관찰자의 눈은 그 안에서 수많은 운동을 보고, 그 속도감에 아찔한 현기증까지 느끼게 된다. 라일리에게 자연은 현상이라기보다는 사건이다. 그 사건은 시간이 정지된 곳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옵아트’가 내는 "공시적 운동"의 효과다. 바사레이에 따르면 작품이란 모름지기 언제든지 반복가능하고, 얼마든지 증식 가능해야 하며, 어떻게든 변경 가능해야 한다. 그는 기본 모티브를 반복하여 사방으로 증식시켜 나가는 가운데 조금씩 뉘앙스를 변화시키는 계열적 작업방식을 사용했다. 그렇게 만든 작품은 만화경을 연상케 한다. 만화경의 효과도 마주보는 거울을 이용해 하나의 모티브를 대칭구조로 무한히 복제하는 데에 있지 않은가! 수학적 디자인, 계열적 처리와 같은 ‘옵아트’의 작업방식은, 그것이 행해지던 60년대보다는 차라리 오늘날 컴퓨터가 주도하는 미디어 환경에 더 어울린다. 그뿐이 아니다. 그 동안 ‘옵아트’는 주로 '지각'의 심리학이라는 측면에서 현상학적으로 설명되어 왔다. 하지만 철학의 분위기가 6, 70년대와는 현저히 달라졌다. ‘옵아트’의 본질을 제대로 드러내려면 이보다는 좀 더 깊은 철학적 해석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옵아트’를 올려놓을 해석의 지평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옵아트’ 앞에서 인간은 모든 것을 잊고 놀이를 하는 천진난만한 아이가 된다. 놀이에 몰두한 아이에게 시간은 정지된다. 아니, 그는 다른 종류의 시간대에 살게 된다. ‘옵아트’의 체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물리적 움직임은 없는데도, 요란한 심리적 움직임이 있다. 여기서 운동은 통시성이 아니라 공시성의 축을 따른다. 시간은 멈추었는데, 사건은 무한히 반복하여 일어난다. 아무 시간도 아닌 것이 모든 시간을 포함한다. 정중동(靜中動), 혹시 이게 니체가 말한 ‘영겁 회귀’의 놀이가 아닐까? <작품 감상> 진중권 <현대예술의 철학> 중에서
Board 추천글 2007.08.15 바람의종 R 47859
요즘 학교나 교회 등의 단체에서 노숙 체험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노숙자들과 함께 하루 이상을 생활하는데, 그들이 자는 곳에서 함께 자고, 그들이 먹는 밥도 함께 먹는다. 체험자들은 그 동안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했던 내 가족, 내 집 등에 대한 감사를 느낀다. 저녁에 돌아가 편히 쉴 수 있는 집이 있고, 따뜻하게 맞아 줄 가족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 것인지 생각한다고 한다. 내 주변에 항상 있어서 소중히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힘들고 불행한 경험 혹은 상상만으로, 더없이 소중하고 행복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왜 이렇듯 항상 행복은 불행을 통해서만 보여지는 것일까? 불행과 고통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과연 행복의 참맛을 깨달을 수 있을까? 좋은 음식과 열매들이 아무리 많을지라도, 극한의 굶주림과 배고픔 상태에서 먹는, 보잘것없는 음식의 맛보다는 덜 할 것이다. 늘 행복한 사람은 그것이 행복인 것을 알지 못한다. 불행 후에 찾아오는 작은 행복! 그것이 진정한 행복으로 느껴질 것이다. 고통을 겪어 본 사람은 사소한 많은 것들을 이해하게 되며, 이해는 사랑으로 이어지고, 사랑은 평안과 행복을 키워준다. 불행 속에 행복이라는 천국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결국 행복이란 불행의 상대적인 가치일 수밖에 없고, 행복과 불행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행복의 객관적인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같은 맥락에서 불행이란, 사람에게 불가피한 가치일 수 있다. 행복과 불행은 늘 함께 온다. 진정한 행복이란, 불행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에게 행복과 불행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고 있는지 위인들의 명언을 보면서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언제까지고 계속되는 불행은 없다. 가만히 견디고 참든지 용기를 내쫓아 버리든지 이 둘 중의 한 가지 방법을 택해야 한다. - 로망 롤랑 - 사람이란 자기가 생각하는 만큼 결코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다. - 라 로시코프 - 매일 아침, 매일 밤 태어나 비참하게 되는 자 있고, 매일 아침, 매일 밤 태어나 즐거워지는 이 있다. - W.블레이크 - 행복과 불행은 그 크기가 정해져 있지 않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작은 것도 커지고 큰 것도 작아질 수 있다. 가장 현명한 사람은 큰 불행도 작게 처리해 버리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조그마한 불행을 현미경으로 확대해 큰 고민 속에 빠진다. - 라 로슈프코 - 서동은 <행복론의 철학적 탐구> 중에서
Board 추천글 2007.08.09 바람의종 R 23301
어머니의 사재기 손택수 < 시인 > 서점에 시장조사를 나갔다 온 출판사 동료가 책을 한 권 사왔다. 우리 출판사의 신간이었다. 사재기를 했네? 요즘 사재기 감시단이 활동하고 있는 거 몰라? 농을 건네자 동료는 배시시 웃는 낯빛으로 급하게 선물할 데가 있어서요,하고 답한다. 사재기에 관해선 솔직히 나도 할 말이 없다. 첫 시집을 냈을 때의 일이었나 보다.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고 나서 몇 년을 기다리다 낸 시집이었으니 감격스럽기 짝이 없었다. 내 작품집이 미지(未知)의 독자들과 만난다는 기대만으로도 충분히 흥분이 됐다. 그러나 워낙 팔리지 않는 게 시집이다 보니 시집 판매에 대해선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냥,몇몇의 독자라도 내 시에 공감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위로가 될 것 같았다. 시란 본디 비밀결사 같은 소수자의 언어가 아니던가. 표준어가 아닌 방언처럼 나누는 게 시가 아니던가. 그런데 어느날 친구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어느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순위에 내 시집이 몇 주째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친구의 말이 믿어지지 않아 살갗을 살짝 꼬집어보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친구의 전화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그 서점엘 갔다. 분명 꿈이 아니었다. 베스트셀러 1위에 내 이름과 시집 제목이 당당히 올라 있었다.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꾸욱 눌러 참는 고통을 지그시 음미하며 여느 독자들처럼 다른 책들을 보기 시작했다. 글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베스트셀러 시인이 된 마당에 이 따위가 다 뭐란 말인가. 이제 머잖아 출판사에서 연락이 올 것이고 내 통장엔 인세(印稅)가 차곡차곡 쌓일 것이다. 그리고 출판사와 잡지사들의 구애가 경쟁적으로 잇따를 것이다. 이제는 이 모든 구애를 정중히 거절하는 방법을 익혀야 될지도 모른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행복감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 나는 시내의 다른 대형서점을 찾았다. 자신의 책을 구입하는 독자를 서점에서 만나면 '대박'이 난다는 속설이 있는데,기왕 나선 김에 그 미지의 독자까지 만나볼 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그 미지의 독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서점 베스트셀러 순위 어디에도 내 이름은 올라있지 않았다. 뭔가 이상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또 하나의 서점을 찾아보았다. 역시 내 시집을 보는 독자는 없었고,베스트셀러 순위에 이름도 없었다. 용기를 내어 직원에게 물어보니 한 달 내내 2권이 팔린 게 전부라고 했다. 끝없이 부풀어오르던 백일몽이 풀썩 주저앉는 순간이었다. 허탈을 곱씹고 나자 뭔가 짚이는 게 있었다. 내 시집이 베스트셀러를 장식했던 그 서점은 화장품 방문판매를 다니시는 어머니의 직장 부근이었던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어머니가 메고 다니시는 화장품 가방을 열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가방 속에서 시집이 쏟아져 나왔다. 내처 묵은 장부를 펼치자 고객들의 이름 옆에 적어놓은 '시집 외상값 오천원'이 또박또박 눈에 들어왔다. 시집 외상값이라니! 눈앞이 캄캄했다.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화장품 가방 속에 어머니는 못난 아들의 시집을 넣고 다니며 아무도 고용하지 않은 시집 외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바라던 시집이 어머니에게 짐만 되고 있었다니…. 어머니의 시집 사재기와 외판은 그 후로도 한동안 계속됐다. 만류도 해보고 협박도 해보았지만 막무가내였다. 언젠가부터 외판도 여의치 않고 수금하는 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던지 집안에 시집이 쌓이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한숨 소리가 더 깊어졌다. 나처럼 죄스런 사재기가 과연 어디 있을까. 이후로 시집을 낸다면 어머니 몰래 내리라. 어머니 짐이나 되는 시집 따윈 다시 내지 않으리라. 몇 년 뒤 두 번째 시집을 내고 나서 어머니의 전화가 왔다. 알았으면 나라도 나서서 좀 샀을 텐데 왜 말을 하지 않았냐는 것이었다. 그땐 미처 말하지 못했지만 어머니에게 들려주고 싶다. '어머니,어머니가 제겐 '대박'을 주는 그 미지의 독자였어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던 독자가 바로 어머니였다는 걸 이제 저도 알고 있어요. 그러니 사재기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돼요.'
나그네 이야기의 무대는 고대의 사막의 한 오아시스이다. 이 오아시는 사방 수천리가 모래로 둘려 쌓여 있어서 아무도 찾는 이가 없는 곳이다. 그러나 가끔은 수대에 걸처서 한 두번 정도는 사람들이 지나간다. 물건을 사고 파는 대상들이거나, 정복을 위해서 떠나는 병사들이 지나치곤 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도 평생에 몇번 보지 못하는 일이다. 이런 마을에 나그네가 살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밖에 대한 꿈을 꾸고 있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언제인가 한번은 밖으로 나가보리라 생각을 하고 산다. 그러나 막상 밖으로 나가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한 두명 정도는 밖으로 나가 보았지만 곧 머리를 설래 설래 흔들며 돌아온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사막은 너무 넓어서 그 끝이 보이지 않아. 나가지 않는 게 좋을 꺼야, 나도 간신히 살아서 돌아 왔어" 나그네는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매양 걱정을 하고는 했다. 자신도 나가 보고 싶었지만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바람결에 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꿈이었다고 생각이 든다. 한명의 노인이 어린 아이들을 모아 놓고 바다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었다. 이세상의 끝에는 이 사막보다도 넓은 곳이 있다. 그곳에는 물이 가득 차 있는데 그 물은 맛이 이상하단다. 어린아이 하나가 노인에게 물었다. "물이 맛이 이상하다니요. 물이 어떻게 맛이 이상할 수가 있어요" "허허허 그건 나도 잘 모른단다. 단지 언제 부터인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란다." 노인은 어린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네가 어른이 되면 한번 가보렴. 너는 갈 수 있을 꺼야" "너는 갈 수 있을 꺼야" 나그네가 눈을 뜬 것은 새벽의 미명이 밝아 올 때였다. 사람들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고, 마을은 고요했다. 나그네는 물주머니와 낙타를 데려다가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였다. 그가 낙타에 올랐을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 왔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들은 사막으로 떠나는 사람들을 말리러 오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불확실한 사막보다는 편안한 이곳의 삶을 저버리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그네의 결심이 확고한 것을 알자 사람들은 그를 보내 주었다. 몇몇의 젊은이들은 그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도 언제인가는 저렇게 한번 나가보리라 생각을 하는 듯이. 몇몇의 노인들은 나그네에게 사막에서의 생존을 일러 주었다. 나그네는 마을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낙타를 타고 사막으로 나갔다. 며칠을 갓을까. 나그네는 방향을 잡지 않고 낙타가 가는 곳으로 놔두었다. 낙타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의 샘물도 찾아내는 동물이었다. 몇번이나 낙타의 도움으로 샘물을 찾아서 먹을 수 있었다. 그곳의 사람들은 나그네를 경계했지만 나그네가 바다를 찾아 떠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먹을 것과 물을 기꺼이 내주었다. 그렇게 길을 떠난지 몇달이 지났다. 나그네는 떠도는 풍문을 따라서 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은 하늘의 지붕으로 일컬어 지는 곳이었다. 너무도 높은 산이 있어서 그곳에 올라가면 하늘 아래가 다 보인다는 것이었다. 나그네는 그 말을 믿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산이 보이는 곳까지 다달았을때 나그네는 벅차오르는 희열로 몸을 주체 할 수 없었다. 이제 바다를 찾을 수 있겠구나. 나그네는 낙타를 빨리 몰고 나갔다. 그러나 산은 점점 멀어져 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달을 산의 윤곽만 쫒아서 갔다. 그리고 드디어 산의 가장자리에 다달을 수 있었다. 그런데 낙타가 산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나그네는 낙타를 보면서 고민에 빠졌다. 이 산을 넘고나서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이 상황에서 낙타를 두고 갈 수 는 없었다. 그러나 데리고 갈 수 도 없었다. 산은 가파라서 낙타를 업고 갈 수도 없었다. 결국 나그네는 낙타를 풀어 놓았다. 다른 여행객이 있다면 그 낙타를 타고 사막을 건너리라 생각을 했다. 산 밑은 평평하고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러나 산 정상을 향해 갈 수 록 산은 가파라지고 몸이 얼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 왔다. 나그네는 잠시 주저했다. 산의 정상은 운무에 가려 보이지도 않았고, 바람은 점점 더 차가워저 오고 있었다. 어쩌면 이곳에서 죽을 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내려 갈까 생각을 했지만, 내려가도 이제는 갈데가 없었다. 혼자서 드넓은 사막을 걸어서 돌아 갈수는 없는 것이었다. 나그네는 입술을 깨물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그네가 산고봉에 섯을때는 새벽의 별이 지고 있을 때였다. 어둠이 걷히면서, 안개가 걷히면서 산아래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주 멀리까지. 그곳에는 파아란 물결이 있었다. 아니 물과는 조금 달랐다. 나그네는 처음보는 풍경이어서 저곳에는 바다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산을 맨발로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피로도 고생도 모두 산 정상에 내버려두고 달리는 것이었다. 그는 한 곳만 바라보고 달렸기 때문에 주위에 양떼가 있는지도 몰랐다. 한달음에 산을 내려온 나그네는 숲의 가장자리에 이르렀다. 자신의 키보다 더 큰 나무들이 빼곡이 차 있었다. 두리번 거리던 나그네는 지나가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몇몇이 떼지어 다니고 있었다. 헌데 그들은 각기 공통적인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허리에 붉은 허리띠를 매고 있었다. 그들은 나그네를 이상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자기들끼리 쑥덕이더니 한 곳으로 총총히 달려갔다. 나그네는 길을 따라 앞으로 나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허리에 푸른 띠를 맨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도 나그네를 보자 신기한 듯이 바라보며 총총히 사라졌다. 나그네는 그중 한 사람을 불럿지만 아무도 뒤돌아 보지 않았다. 나그네가 성 문앞에 이르자 성문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나와서 나그네를 보고 있었다. 그들은 네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허리에 붉은 띠를 맨 사람들이 두패로 나뉘어 있었고, 허리에 푸를 띠를 맨 무리가 역시 두패로 나뉘어 있었다. 그들은 나그네가 다가가자 한 걸음씩 물러났다. 그리고 나그네가 한 걸음 물러나면 자신들이 한 걸음 다가 왔다. "나는 바다를 찾아 떠나는 여행자 입니다. 부디 그 길을 아는 분이 있으면 길을 일러 주십시요" 그러나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군중속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그대는 잠시 기다리시오. 곧 현인들께서 나오실 것이오. 그 분들은 바다로 가는 길을 알고 계시오." "정말입니까." "그렇소." 그러자 다른 세 부류에서 야유의 소리가 터저 나왔다. 그리고 잠시뒤에 네명의 화려한 복장을 한 노인들이 나왔다. 붉은 허리띠를 맨 두 노인과 푸른 허리띠를 맨 두 노인이었다. 그들은 서로 간격을 두고 앉았다. 그러자 뒤에 있던 군중들도 무리별로 간격을 두고 앉았다. 맨 좌측의 노인이 입을 열었다. "그대는 바다를 찾아서 떠나는 여행자라고 들었소. 사실이오" "그렇습니다. 바다로 가는 길을 아시면 일러 주십시요. 제가 사는 곳에는 바다가 무엇인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바다는 물이 아주 많이 모여 있는 곳이오. 그리고 그 맛은 이곳의 물과는 틀리오. 이곳에서 사는 사람들중에는 바다를 같다가 온 분들이 계시오. 우리는 그분들의 동상을 세우고 그분들의 뜻을 기리고 있소. 그리고 당신같은 여행자들을 위해서 그 분께서는 지도를 남기셨소" 노인은 품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갈대를 역어서 만든 책이었다. 너무 낡아서 만지면 곧 부스러질 것 같았다. 나그네는 반짝이는 눈으로 지도를 바라보았다. 지도에는 무수한 산과 강이 그려져 있었고 대충선이 그어져 있었다. 나그네는 그것을 보고 기가 질려 버렸다. "저렇게 먼 거리라면 지도가 있더라도 길을 잊어 먹기가 쉽겠군요" 그러자 같이 푸른 띠를 멘 노인이 품에서 지도를 꺼냈다. 이번것은 조금 덜 낡아 있었다. "이 지도를 보게 저것 보다는 쉽게 나와있네, 지도의 전문가가 저것을 보고 그린 것이지. 우리는 이것때문에 오래동안 싸워왔네. 우리도 바다를 찾아 떠나려는 여행자들이 많이 있지만, 어느 것이 확실한 지도인지 결론을 내리지 못했네. 그러나 나는 이것이 확실한 지도임을 믿네" 나그네는 두개의 지도를 번갈아 보았다. 두 지도는 별 차이가 없어보였다. 그러나 확실히 후자가 세세히 그려 놓고 있었다. 이번에는 붉은 띠를 두른 노인이 지도를 꺼냈다. "우리는 북쪽에서 온 여행자들이라네. 우리 마을에는 이 지도가 전해져 오고 있었지 그래서 언제가 바다를 찾아 여행하리라고 다짐을 하고 있었네. 그리고 마을 사람중 몇몇이 바다를 찾아 길을 떠나서 이곳까지 왔네. 그런데 여기에 있는 지도는 우리 마을의 지도와는 상반이 되네. 그래서 우리는 갈피를 잡지 못하였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진정으로 바다를 가리키는 지도라고 생각하네." 나그네는 그 지도를 바라보았다. 그 지도는 앞의 두 지도와는 아주 상반이 되었다. 앞의 지도가 남쪽을 가리키고 있다면 그 지도는 북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그네는 혼란 스러웠다. 그리고 마지막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빙긋이 웃으며 지도를 건네 주었다. "이걸 가지고 가게. 나는 이제 이 지도를 따라 여행하기에는 너무 늙엇네. 그러니 이 지도를 가지고 자네가 가게." "노인장께서는 누구에게나 이 지도를 주십니까" "그렇네. 저렇게 소중히 간직할것이 무엇이 있나. 나는 내가 얻은 지도를 다시 많은 종이에 옮겨 그렸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지도를 하나씩 가지고 있네." "그럼 왜 저들은 길을 떠나지 않지요" "저들은 지금 혹시나 하고 있네. 이 지도가 아니면 어떻게 하는가. 그들은 우리의 논쟁이 끝난다면 마지막 남는 지도를 가지고 길을 떠날걸세" 나그네는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럼 언제쯤 논쟁이 끝이 날것 같습니까" "그건 우리도 모르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 논쟁은 있어왔네. 그리고 자네가 원한다면 우리중 한 곳에 들어가서 논쟁이 끝이 날때까지 지켜볼 수 있네" 나그네는 한참이나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고향으로 돌아가렵니다. 여기서 논쟁이 끝날때까지 기다리기 보다는 차라리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자네는 바다에 갈 수 있네. 조금만 기다려 보게. 우리의 논쟁이 곧 끝날 테니까" 나그네는 고개를 저었다. "말씀은 고맙지만 저는 돌아가렵니다." 나그네는 축처진 어깨를 뒤로하고 다시 산으로 향했다. 아주 천천히 산을 올라갔다. 급할 것이 없었다. 산들바람이 머리를 시원하게 해주었다. 산중턱에 다다르자 목이 마르는 것이 느껴왔다. 그러고 보니 하룻동안 물한모금 마시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그네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주위에는 양떼가 있었고, 그 양떼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양치기 노인이 졸고 있었다. 나그네는 그 노인에게 다가갔다. "노인장께서는 언제 부터 이곳에 계셨읍니까" "나는 줄곳 이곳에 있었네" 나그네는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어제 아침에 이곳에 왔었는데 아무것도 없었는데요" "하하하 나는 자네를 보았다네, 자네는 너무도 빨리 산을 내려가더군, 나는 혹시나 자네가 다칠까봐 걱정이 됬는데 이렇게 무사한 것을 보니 기쁘네" 나그네는 고개를 끄떡였다. "물을 좀 얻어 먹을 수 있을까요" "양젖이 있네. 괞챦겠나" "예" 나그네는 양젖을 먹고나서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었다. 양치기 노인이 물었다. "자네는 무슨 이유로 그리도 급히 산 아래로 뛰어 갔는가" "바다를 찾아 여행을 떠났었습니다. 그래서 사막을 건너고 이 산을 넘어 왔습니다. 그래서 저 숲과 도시를 보게 되었지요. 저곳에 가면 바다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 있을 꺼라는 생각에 급히 달려갔습니다." "그곳에는 바다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 있던가" "모르겠습니다. 바다를 같다고 온 사람들이 남겼다는 지도를 보니 모두 제각각이었습니다." "바다는 어떤 곧인가" "저도 잘 모릅니다. 듣기로는 물이 아주 많이 모여 있는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맛이 아주 이상하다고 합니다." 노인은 고개를 끄떡였다. "흠 물이 많이 모인 곳이라" 노인은 가죽주머니에든 양젓을 쏱아 부었다. 그러자 나그네가 휘둥그레 놀라며 노인을 제지했다. "노인장, 양젖이 다 흐릅니다." "허허허. 양젖이 흐르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네. 보게" 양젖은 산 아래로 흐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곧 멈추어 버렸다. 나그네는 고개를 갸웃했다. "물은 이와 같이 아래로 흐르네. 이 산에 있다보니 그것 하나는 알게 되더군. 바다라는 곳이 물이 아주 많이 모인 곳이라면 아마도 많은 물을 필요로 할걸세. 저 샘물을 보게" 노인이 가리킨 곳은 양떼의 가운데에 솟아 오르는 샘물이었다. 그곳에서는 조금씩 물이 아래로 넘쳐 흐르고 있었다. "저물도 언제가는 바다로 흘러가겠지. 저물을 따라가다 보면 바다가 나올거라는 생각이 드네. 바다가 그토록 크다면 저 작은 물이 들어가는 것을 막지는 않을 걸세" 나그네는 무언가 느끼는 바가 있어서 노인에게 총총히 작별을 고하고 샘물을 따라 갔다. 그뒤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흐르는 물을 따라가게. 먹을 수 있는 물을 따라가게. 고인 물은 먹을 수 없으니. 먹을 수 없는 물은 흐르는 물이 아니네" 나그네는 시냇물을 따라 여행하면서 많은 도시를 지나쳤다. 그곳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각기 지도를 들고 그를 맞이 했다. 나그네의 얼굴에는 확신이 가득차 있었고, 낡고 산발한 머리가 지저분해 보였지만 그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그걸 본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가 바다에 도달하면 자신들의 마을에도 들러달라고 하면서 양식들을 건네주었다. 그렇게 샘물을 따라가기를 몇년여. 샘물은 냇물이 되고, 냇물은 강물이 되었다. 그리고 나그네는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까지 다다랐다. 그곳은 사막보다도 더 넓은 곳이었다. 그 넓은 곳에 가득히 물이 차 있었고, 하늘의 태양마저도 바다속에서 나오고 있었다. 나그네는 바닷물로 첨벙첨벙들어갔다. 맛이 이상했다. 먹을 수 없는 물이었다. 그러나 그 물은 흐르고 있었다. 그 안에는 물고기들이 가득차 있었다. 나그네는 참을 수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물이 목구멍으로 마구 마구 들어갔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나그네가 눈을 떳을때 자신이 딱딱하고 뜨거운 곳 위에 있다는 것을 느꼈다. 우욱 입에서 무언가 마구 쏱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이걸 먹게나" 나그네는 까칠한 손이 건네주는 걸 먹었다. 무슨 풀 같았는데 처음 먹어보는 것이었다. 그것을 우물우물먹자 속이 좀 괞챦아 지는 것 같았다. 노인은 무슨 실로 된 것을 손질하고 있었다. "노인장 그건 뭡니까." "물고기를 잡는 걸세. 그물이라고 하지. 헌데 사람이 잡힐 줄은 누가 알았겠나. 허허허 자네도 바다를 찾아 온 사람인가" "그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늙은 어부들에게는 전해저 내려오는 전설이 있네. 가끔 가다가 바다에 빠진 사람들을 건지곤 한 어부들이 있지. 그들은 대부분 바다를 찾아 온 여행자들이라네. 내가 그 여행자를 낚는 행운을 잡을 줄이야. 허허허 이제 손주녀석에게 해 줄 이야기가 생겼네." 나그네는 고개를 끄떡였다. "이제는 어떻게 할 건가. 이곳에 남는 사람들도 있고, 다시 떠나는 사람들도 있네" "돌아갈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 바다물을 가지고 갈 방법이 없습니까" "어디다 담아 갈 생각인가. 아마도 먼 길을 왔을텐데. 물은 곧 증발해 버리네. 바다가 큰 이유는 강물들이 다 모여드는 곳이기도 하지만 저렇게 들어 온 물들이 곧 하늘로 올라가기 때문에 큰 것이네" "방법이 없겠습니까" "한가지 있기는 있네" 노인은 나그네를 데리고 한 곳으로 같다. 그곳에는 사각형으로된 곳에 바닷물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바닥에는 하얀 가루가 깔려 있었다. 노인은 그곳에서 하얀 가루를 푸대에 담아 주었다. "이걸 물에다 타면 바다 맛이 날걸세. 이곳에서는 이걸로 음식을 해먹지. 많이 너서 먹으면 못먹네만 조금만 넣으면 아주 맛이 좋다네" 나그네는 그곳에서 며칠 머무르면서 소금이라는 것을 가지고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도시 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그가 가지고 온 소금의 맛을 보기 위해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렇게 그는 처음 도착한 도시까지 왔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소문이 먼저 이 도시에 온 것이었다. 나그네는 이제 한 웅큼 남은 소금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사람들은 그의 주변에 모여들어 그가 들려주는 바다에 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소금물의 맛을 보았다. 군중들을 헤치고 네명의 노인이 다가왔다. 그리고 네 노인은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서 바다게 가게 되었소" 나그네는 자신이 냇물을 따라 간것과 바다까기 가면서 보았던 풍경들과 도시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노인들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면전에서 물러나와 자신들끼리 쑥덕거렸다. "그는 바다에 가는 길을 모르오" "그렇소. 그가 말한 것은 우리들의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는 길이오." "그러나 그는 어느 이상한 곳에는 간 것같소" "기다립시다. 그는 곧 떠날 것이오. 사람들은 다시 우리들의 지도를 필요로 할 것이오. 그때까지만 기다립시다." 네 노인은 서로 마주 보면서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 지도를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서 산으로 갔다. 각기 자신의 스승들이 물려준 지도를 소중히 간직하고서. 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中
불을 끄고 누웠다가 잊어지지 않는 것이 있어 다시 일어났다 암만해도 잊어버리지 못할 것이 있어 다시 불을 켜고 앉았을 때는 이미 내가 찾던 것은 없어졌을 때 반드시 찾으려고 불을 켠 것도 아니지만 없어지는 自體를 보기 위하여서만 불을 켠 것도 아닌데 잊어버려서 아까운지 아까웁지 않은지 헤아릴 사이도 없이 불은 켜지고 나는 잠시 아름다운 統覺과 조화와 영원과 귀결을 찾지 않으려 한다 어둠 속에 본 것은 청춘이었는지 대지의 진동이었는지 나는 자꾸 땅만 만지고 싶었는데 땅과 몸이 일체가 되기를 원하며 그것만을 힘삼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러한 불굴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인가 어둠 속에서 일순간을 다투며 없어져버린 애처롭고 아름답고 화려하고 부박한 꿈을 찾으려 하는 것은 생활이여 생활이여 잊어버린 생활이여 (김수영 「구슬픈 肉體」 중에서) 불을 끄고 누웠다가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어 다시 일어나 본 적이 있으신지요. 사람에게는 누구나 꿈이 있습니다. 그 꿈이 현실화되지 못할 때 좌절감이 생기고 사무침이 생깁니다. 고달픈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들면 그 사무침은 더욱 절실해집니다. 어둠 속에서 천장 모서리를 물끄러미 보고 있노라면 좌절한 자아, 사무침이 일상화된 자아가 보이지요. 아름답고 화려한 나의 꿈, 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꿈. 잠이 들락 말락 할 때 불현듯 떠오르는 게 이런 생각들이지요. 그리하여 벌떡 일어나 불을 켜면 상상한 것들, 어른거린 것들은 찰나에 없어져 버립니다. 불을 켠 순간은 허상을 벗어나 이성을 되찾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불이 켜지는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 존재이며 쉴 새 없이 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이 시에는 이렇게 꿈과 현실 사이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괴리감, 현실을 살아야만 하는 비애감이 묻어있습니다. 매 순간 현실을 살아 내야 하는 긴장감과 비장함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는 화자 뿐 아니라 누구든 마주쳐야만 하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비록 어둠 속에서 없어져 버린 부박하고 허황된 꿈일지라도 그런 ‘꿈’이 있기에 현실을 살아가는 힘이 생기는 것이라고. 이상이 없이 살아가는 현실은 의지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세계를 향해 끝없이 나아가려 발버둥치는 것이 현실이며, 이 현실이 고통스러운 것은 좀 더 꿈에 가깝게 다가가기 위한 끝없는 인내와 노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오봉옥 『김수영을 읽는다』중에서
Board 추천글 2007.03.09 바람의종 R 12048
“나는 누구든 안락한 환경에 있었던 사람이 갑자기 그 반대의 생활로 떨어져 버렸다면, 그 떨어지는 과정에서 세상 사람들의 참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자서』) ‘중국 현대 문학의 아버지’, ‘중국의 기상나팔’로 불리는 루쉰은 1881년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 부유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고 아버지가 병환을 얻으면서 집안이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루쉰은 아버지의 약을 구하기 위해 약방으로, 돈을 구하기 위해 전당포로 뛰어다니게 되었는데 약방 계산대와 전당포의 계산대는 어린 루쉰이 느끼는 세상의 벽만큼이나 높은 것이었다. “약방 계산대는 내 키만큼 높았고, 전당포의 계산대는 내 키의 갑절이나 되었다” (『자서』) 약방 계산대는 어린 루쉰에게도 익숙했던 현학적인 전통의 세계였기에 루쉰의 눈높이를 뛰어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전당포의 계산대는 어린 루쉰에게 화폐의 소중함, 그리고 더러움을 동시에 알게 해준 곳이므로 심리적으로 훨씬 높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것이 루쉰이 느꼈던 세상의 두 가지 벽이다. 또한 이것은 전통적인 낡은 시대의 유물(약방), 그리고 자본주의적 질서인 서구의 문명(전당포) 사이의 긴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루쉰은 성인이 되어 이 두 가지 것에 맞서 처절하게 싸우게 된다. 성장한 루쉰은 양학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떠나게 된다. 의학을 통해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의 아픔을 덜어주겠다는 결심으로, ‘센다이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한 그는 이곳에서 인생의 길을 바꿔놓은 결정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바로 ‘환등기 사건’이었다. 수업시간에 환등기로 뉴스필름을 보여주었는데 어떤 중국인이 군사재판을 받고 있고 그 주위에 다른 중국인들이 둘러서 있는 장면이었다. 그 중국인은 곧 일본인에 의해 총살되었고 학생들은 박수를 치며 중국인들을 욕하고 있었다. 루쉰은 큰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자 수련하는 이들이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보고 환호할 수 있는가?’ 라는 분노와 함께 자기 동족이 죽는 것을 둘러서서 가만히 보고 있는 중국의 무지몽매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것을 지켜봐야만 하는 자신도 무지한 중국인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의술을 통해 몸의 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인의 낙후된 정신을 각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의사의 길을 포기한 채 비로소 문학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리하여 허구를 비판하고 진실을 추구하는 작품들로 10억 중국인을 깨어나게 한 ‘중국의 기상나팔’ 루쉰이 탄생한 것이다. 권용선 <루쉰을 읽는다> 중에서
Board 추천글 2007.02.28 바람의종 R 12074
'소 닭 보듯 한다'는 말이 있듯, 우리는 눈에 익숙한 사물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무의식중에 지나쳐버리고 마는 '죽은' 사물들. 예술에서는 이렇게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는 죽은 사물을 부활시키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낯설게 하기’ 방식이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낯설게 하기’는 주위의 사물을 기괴한 형상으로 재창조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하지만 또 다른 초현실주의 화가 마그리트는 이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죽은’사물을 살려내려 시도했다. 마그리트는 ‘낯설게 하기’의 소재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 사물들을 사용했다. 난로, 나무, 사과, 유리잔 등 우리가 흔히 보는 일상적 사물들을 낯설게 함으로써 그는 특유의 초현실주의적 효과를 얻어낸다. 옆의 그림은 마그리트의 ‘낯설게 하기’를 표현하는 ‘고립’의 방법이다. ‘고립’이란 어떠한 사물을 원래 있던 환경에서 떼어내 엉뚱한 곳에 갖다놓는 걸 말한다. 그림을 보라. 평범한 하늘이 보이는 방과 물고기 한 마리. 따로 떼어놓고 보면 어느 것 하나 낯선 사물이 없지만 천장을 향해 서있는 물고기 한 마리에서 오묘하고 신기한 분위기가 풍겨 나온다. 원목재가 깔려있고 빛이 잘 드는 방 한 칸과 커다란 풋사과가 있다. 역시 눈에 익지 않은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빛을 잘 받은 푸릇한 사과가 묘한 위압감을 풍긴다. 이 방법은 ‘크기의 변화’다. 이처럼 사물의 크기만 바꾸어 놓아도 이렇게 놀라운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마그리트는 유사의 방식을 취하지만 유사를 거부하면서 상사를 지향한다. 그의 작품에 ‘닮음’이 있다면 시뮬라크르들 사이의 닮음일 뿐이다. 마그리트의 작품은 시뮬라크르 놀이를 통해 우리에게 친숙한 사물이 은폐하고 있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여준다. 진중권 <현대미학-숭고와 시뮬라크르> 중에서
Board 추천글 2007.02.08 바람의종 R 16310
옛날에 세 명의 도적이 있었다. 어느 날 이들은 힘을 합쳐 한 무덤을 파헤쳤다. 그런데, 그 무덤 안에서 큰 금덩이가 나왔다. “오늘은 정말 고달프구나. 금을 얻었으니 술과 음식을 먹어야 하지 않겠느냐?” 한 사람이 기뻐하며 술을 사러 나갔다. 술을 사러 나간 그 자는 길 위에서 하늘이 주신 기회라면서 자축을 하였다. ‘셋이 나누느니 오히려 혼자 독차지 하는 것이 좋겠구나.’ 하고는 음식을 사서 독을 풀었다. 그런데 나머지 두 도적이 갑자기 술을 사온 도적을 때려죽이는 것이 아닌가. 남은 도적들은 먼저 음식을 먹은 후 금을 양분하기로 하고 술과 음식을 먹는데, 먹은 후에는 무덤 옆에서 두 도적이 다 죽었다. 참으로 애석하구나. 이 금이라는 것은 반드시 길옆에서 돌다가 누군가에게 습득되는데, 습득한 자는 반드시 하늘에 감사할 것이나 다만 금이라는 것이 무덤 사이에서 나온 것이면서 독의 유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또한 앞뒤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독살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천하의 사람 중에는 금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은 왜일까? 나는 원하건대 천하의 사람들이 금이 있다고 기뻐할 것도 없다고 해서 슬퍼할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갑자기 눈앞에 황금이 이르면 놀라기를 천둥을 맞은 것처럼 하고 귀신을 만난 것처럼 하고 풀숲의 뱀을 만난 것처럼 해서 머리털이 빠짝 서서 뒷걸음질을 치지 않을 수 없다. 연암 박지원의 황금에 대한 생각이다. 황금이라는 것이 매우 위험한 물건으로 취급된 이유는 황금의 속성이 다양한 가치들을 잠식시켜 자신의 유일한 가치로 모든 기타의 것들을 재단하려 하기 때문이다. 물신숭배란, 하나의 가치가 다양하던 가치들의 관계들을 굴복시켜 무덤으로 보내고, 그 무덤 속에서 태어난 자신의 유일한 가치로 모든 사물들과 관계 맺도록 강요하는 관계의 형식을 의미하며, 바로 이점이 황금의 가장 위험한 속성이라 할 수 있다. 고미숙 <『열하일기』, 숨어있는 보석을 찾아라> 중에서 이 시대에 연암이 가졌던 황금에 대한 생각은 현대의 물질만능주의에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좋은 교훈인 것 같습니다. 황금의 가치,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