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nae.jpg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1862 - 1918, 오스트리아 ) 구스타프 클림트는 다혈질이었고, 살아 생전에 명성을 누렸고 주변 사람들로부터도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루마니아 여행에서 돌아온지 얼마 안되는 1월 11일 아침, 클림트는 자기 집에서 옷을 갈아 입으려 하다가 뇌일혈 발작으로 오른쪽 반신이 불수가 되고 말았다. 그의 부친도, 그의 동생도 뇌일혈로 사망하였으므로, 클림트는 늘 자신도 그같이 될까 두려워하였다. 그는 '60세까지는 살고 싶다'고 되풀이하여 말했다고 한다. 그의 증세는 잠시동안 꽤 호전되었으나, 스페인 독감이 폐렴에 이르러 결국 2월 6일 아침 6시에 숨을 거두고 만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처럼 오랜 세월 병마에 시달리지 않았고, 56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는 평생 자신을 죽게 만들 병으로 뇌일혈을 걱정했지만 그를 죽게 만든 것은 그런 뇌 출혈이 아니라 '스페인 독감'이었다. 에곤 실레는 클림트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비엔나종합병원의 해부병리학과 지하실에서 그의 사체를 화폭에 담았다. 클림트의 저주였을까? 실레 역시 스페인 독감에 걸려 죽고 만다. 황금색의 황홀하고, 몽환적인 그림으로 카페의 벽 어딘가 남녀가 부대끼는 장소에 걸려 있을 법한 그림 1순위에 오르는 화가가 바로 구스타프 클림트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아름다움은 때로 풍성함으로, 때로 앙상함으로 드러나지만 그것이 어떤 양감을 지녔던 클림트의 그림이 묘사하는 여인들은 아름답다. 그도 그럴 것이 클림트만큼 여성을 사랑(?)한 화가가 또 어디 있었을까? 오죽하면 그의 별명이 '빈의 카사노바'였겠는가. 생전의 구스타프 클림트는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끔찍이 아끼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였을 뿐이다. 그는 동료 화가인 에밀 쉰들러의 딸 '알마 쉰들러'(훗날 구스타프 말러, 발터 그로피우스의 아내, 오스카 코코슈카의 연인이었던 알마 말러)부터 에밀리 플뢰게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여인을 품었고, 그 결과 14명이나 되는 사생아들을 세상에 남겼다. 그 중 '미치 짐머만'은 클림트에게 두 명의 아들을 낳아 주었고, 마리아 우치키는 아들 하나를 낳앗다. 두 여인 모두 첫 아이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 '구스타프'라 지었다. 믿던 그렇지 않던 간에 자신의 모델이 된 여성과는 꼭 잠자리를 했다는 풍설이 있을 만큼 그를 둘러싼 여성 편력에 대한 이야기들은 풍성하다. 그의 작품 중 임신한 여인을 그린 세 개의 작품이 있는데 그중 <희망Hope I>의 작품에 등장하는 임신한 여성 모델이 바로 '미치 짐머만'이다. 제목은 희망이지만 마치 해골과 적의를 띤 남성들에 둘러싸인 채 창백하게 질려 있는 듯 하다. 2월 6일 클림트가 죽자 14명이나 되는 사생아들의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대신해 상속을 요구해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클림트를 만날 당시 18살이었던 에밀리 플뢰게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그녀에게는 생전의 클림트가 시시콜콜하게 적어 보낸 엽서들 (가령, "여기는 바르셀로나요. 이 곳의 아름다운 여자들을 보고 난 탓인지, 어제는 당신 꿈을 꾸었소." 같은 것) 만이 남겨졌다. 결국 에밀리 플뢰게가 죽은 클림트를 대신해서 그들에게 남겨진 유산을 분배해주어야만 했다. 생명의 활력과 죽음의 그림자 사이에서 1862년 7월 14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비엔나 근교였던 바움가르텐에서 태어난 구스타프 클림트. 그의 아버지 아버지 에른스트는 보헤미아 출신의 동판조각사이자 금세공사였고, 모친인 안나는 오페라 가수가 꿈이었다고 한다. 구스타프는 아들 셋, 딸 넷 중 장남이었는데, 그의 바로 아랫 동생인 에른스트는 28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형을 도와 미술계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구스타프의 아버지 에른스트는 8세 때 양친을 따라 비엔나로 이주하여 동판 조각사가 되었지만 벌이가 시원치 않은 탓인지 워낙 다혈질이었던 탓이었는지 평소에는 친절하고 다정했으나 종종 격노하여 폭력을 휘두르곤 했다. 클림트는 "어느 해인가는 크리스마스 때인데도 집에 빵 한 조각 없었다."는 여동생의 회고처럼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장녀와 막내딸을 잃은 양친은 남은 다섯 아이를 어떻게 해서든 잘 길러보려 했지만 장남인 구스타프를 짐나지움(독일계 학제에서 짐나지움은 우리식으로 하자면 대학진학을 목적으로 하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시키지 못하고 공장 노동자나 장인의 삶이 예정된 고등공민학교인 '뷔르거'슐레(슐레는 실업계 직업교육학교)에 입학시킨다. 이토록 극심한 빈곤에 허덕이며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그의 데생 솜씨를 눈여겨 보았던 친척의 도움으로 1876년 '비엔나 장식미술학교'전문적인 미술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페르디난트 라우프베르거, 한스 마카르트와 같이 당대의 저명한 화가들의 주목을 받으며 화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뒤를 이어 진학한 동생 에른스트,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주목을 받던 프란츠 마츠와 함께 동인을 결성하여 예술적 이상을 교류하며 링 거리의 교회 창문 디자인, 체코슬로바키아의 칼스바트 온천장의 천장화, 라이헨헤브크 국립극장의 천장화 제작 같은 일들을 주문받아 학비를 조달하기도 했다. 그가 비엔나 장식미술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이미 화가로서 나름의 명성을 얻고 있었다. 이 무렵의 그는 관습적인 주제를 아카데믹한 양식으로 그리는 벽화가였다. 그는 동생 에른스트, 마츠와 함께 '쿤스틀러 콩파니'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이때 구스타프 클림트는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국립극장 장식, 피우메의 리예카 국립극장 장식,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의 대계단 장식 등을 함께 해나갔다. 1890년에는 비엔나 구(舊) 국립극장의 실내 장식 작업으로 그해 처음 제정된 "황제 대상'의 수상자가 되는 등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1892년 그에게 있어 둘도 없는 예술적 동반자이자 동지였던 동생 에른스크가 젊은 나이에 뇌일혈로 사망하고, 그 얼마 뒤 애증의 대상이었던 아버지 에른스트 마저 뇌일혈로 사망하고 만다. 아직 한창 젊음을 구가해야 할 동생과 아버지의 죽음은 그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고, 남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만든다. 그의 작품 속에서 삶과 죽음의 이미지가 늘 공존하는 까닭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몰락해가는 유럽의 불꽃, 클림트와 비엔나 분리파 동생 에른스트의 죽음은 그에게 적지 않은 충격과 두려움을 주었으나 구스타프 클림트는 아직 젊었고, 예술가로서의 성공에 대한 야심도 있었다. 당시 비엔나는 몰락해가는 구체제의 유럽, 그 압축된 모순으로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수도였다(좀더 자세한 내용은 에곤 실레편에). 당시 비엔나는 늙은 대륙 유럽에서도 가장 완고한 예술가들이 아카데미를 틀어쥐고, 현대 예술의 새로운 흐름에 대해서는 외면하는 형국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들은 때로 아카데미의 권위로, 때로 상업적인 배려로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비엔나의 숨막히는 분위기를 더욱 옴짝달삭할 수 없게 틀어지었다. 비엔나의 화단은 새로운 기운을 고취시킬 수 있는 운동이 필요했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비엔나의 보수적인 예술가 집단인 '쿤스틀러 하우스'를 탈퇴하고, 요셉 호프만, 콜로만 모저 등과 함께 '비엔나 분리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이 된다. 비엔나 분리파에게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 헤르만 바는 "우리는 삭막한 일상과 너절하고 하찮은 것에의 집착, 그리고 모든 형태의 악취미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련다."라고 외쳤고, "오스트리아를 아름다움으로 덮어 버리자!"고 촉구했다. "각 세기마다 고유한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란 슬로건을 내세운 그들의 야심은, 예술로부터 상업성의 비계를 걷어 내고, 외국의 탁월한 작품들을 소개하여 비엔나를 문화적 고립으로부터 구출하며, 위대한 예술과 부수적 예술 부자들의 예술과 빈자들의 예술을 가르는 구분을 철폐하고 도시 계획, 건축, 가구, 생활 필수품 등 생활의 모든 국면에서 예술을 창조하겠다는, 말하자면 '총체 예술'을 확립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그들은 기관지 <성스러운 봄>을 창간하고, 기금을 모금하여 '분리파 전당'을 건설하고, 이후 8년 간 '일본 미술전', '인상파 미술전' 등 스물 세 번의 분리파 전시회를 기획, 추진한다. 바야흐로 낡은 세기는 가고, 그들에게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식민지로 쌓아올린 부와 무너져가는 도덕 클림트가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 유럽의 부르주아지들은 식민지 쟁탈과 착취를 통해 쌓아올린 부를 통해 유럽 대륙이 세계 제일의 문명이자 인류의 미래가 진보해갈 것이라 확신했다. 새로운 세기인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클림트는 비엔나 대학으로부터 대회랑 천장 벽화 작업을 의뢰받게 된다. 그는 법학, 철학, 의학을 주제로 그린 3부작을 통해 인간의 삶 속에 투영되는 고통과 두려움, 인간의 정신적 방황에 대해 추상적 패턴을 도입해 복합적이고 왜곡된 양식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비엔나의 대중들과 심지어는 비엔나 대학의 교수들조차 발끈해서 들고 일어났다. 그들은 평소 여인들의 자위행위 장면이나, 남녀간의 성교 장면을 거침없이 그렸던, 풍문이 좋지 않았던 클림트의 작품을 참아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클림트는 이런 비판에 대해 자신의 예술에는 조금의 문제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 돈, 더 이상 필요없으니 어서 가져가시오!" 클림트는 천장벽화작업을 스스로 포기하고, 작품 제작비 일체를 돌려주었다. 부르주아 사회의 퇴폐와 창녀, 팜므 파탈 '퇴폐적인 에로티시즘'.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들은 당대에도 이미 퇴폐적인 에로티시즘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는 그의 작품보다 더 퇴폐적이었다. 부르주아의 청교도적인 도덕률은 제국주의와 함께 오간데없이 사라졌고, 매독은 창궐했다. 클림트의 작품을 보며 퇴폐적이란 비난을 서슴없이 가한 사람들은 잠시후 뒷골목 매음굴에서 지갑을 잃어 버렸다. 그의 작품에는 어째서 그토록 많은 여인들이 등장하며 이전의 예술가들이 그리듯 그렇게 다소곳한 표정의 수줍게 고개 숙인 누드가 아니라 그토록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가? 어째서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역사 속의 정숙한 여인, 혹은 유대 민족을 구원한 유디트는 금방 정사를 끝낸 여인의 몽롱한 눈빛을 하고 있는가? 그들은 과연 팜므 파탈인가. 현대예술이 이렇듯 요부상이나 창부상 등을 통해 현실을 드러낸 것과 관련해 예술사회학자 아놀드 하우저(Arnold Hauser)는 다음과 같은 언급을 했다. "창부는 격정의 와중에서도 냉정하고, 언제나 자기가 도발한 쾌락의 초연한 관객이며, 남들이 황홀에 도취에 빠질 때에도 고독과 냉담을 느낀다. 요컨대 창부는 예술가의 쌍둥이 짝이다." 왜 한 시대의 여성 이미지가 바로 그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창부의 상으로 압도돼야 했는지를 매우 잘 설명해주는 지적이다. 역사 이래 가장 치열한 '성(性)간의 전투'가 시작되면서 그들은 냉정해져야 했고 그로 인한 고독을 회피하지 말아야 했다. 이는 현대의 예술가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 황금률이었다. 부르주아와 같이 혁명을 일으켰으마 혁명 뒤 그들로부터 버림받은 근대의 예술가들은 (예술가들은 부르주아 혁명의 가치를 담아 작품을 제작했으나, 주지하듯 권력을 장악한 부르주이지는 그런 예술을 멀리하고 오히려 고전적 작품을 선호하는 등 급속히 복고적이 돠어갔다) 스스로를 창부와 동일시함으로써, 또는 창부를 동경함으로써 스스로 창부가 되고, 그럼으로써 세상을 향해 특히 부르주아 사회를 향해 "네가 오히려 진짜 창부다"하고 절규할 수 있었다. 『미술로 보는 20세기』/ 이주헌 지음/ 학고재/ 2001년 중에서 ***** 윤영환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5-23 05:51)
Board 추천글 2008.03.27 바람의종 R 14937
이명박 후보와 한나라당, 그리고 그들을 지지했던 많은 국민 여러분들 당선을 축하 드립니다 제가 원치 않는 사람이 당선 되었지만, 이게 우리의 민심인것을 겸허이 인정합니다. 향후 5년 정말 화합하고 발전되는 국정 운영을 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정직하고 선량하게 자라길 바랍니다 배금주의에 물들지 않는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국가와 국민 모두 잘 살 수 있는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비리와 부정부패가 없는 투명한 사회가 되길를 바랍니다 희망이 넘치는 대한민국이 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세계가 가져온 진보의 각 단계는 일보일보 건설된 것이다. - 벤델 필립스(미국의 평론가) - 민주주의의 병폐 중의 하나는 당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당신이 선출한 그 사람을 참고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 W.로저스 - 인간 최고의 의무는 타인을 기억하는 데 있다. - V.위고 -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민심을 얻는 일보다 더 큰 것이 없고, 나라를 다스리는 길이 많지만 민심을 따르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동고집- 민주주의에 두 가지 갈채를 보낸다. 하나는 다양성을 용인하기 때문이요, 또 하나는 비판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 E.M.포스터 /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 "나는 당신의 의견을 반대한다. 하지만 당신이 의견을 말할 권리를 내 목숨을 걸고 지키겠다." - 볼테르(佛 사상가 :1694~1778) / 우리들의 부싯돌을 부딪쳐야 빛이 난다 -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잘한다고 하는데 그는 내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 "나는 겸손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나를 교만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 "나는 사랑하고 있는데 그는 나의 사랑을 까마득히 모를 수도 있겠구나.! " "나는 떠나기 위해 일을 마무리 하고 있는데 그는 더 머물기 위해 애쓴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 "나는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저것이 옳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 "내 이름과 그의 이름이 다르듯 내 하루와 그의 하루가 다르듯 서로의 생각이 다를 수도 있겠구나.! " 정용철 / 어느날 문득 우리는 승자냐 패자냐로 성공을 결정하고, 승리의 이면에는 반드시 패배가 있다고 믿는 살벌한 경쟁사회에 살고 있다. 그래서 어떠한 사람이 승리하면 다른 누군가가 패배해야 꼭 논리가 성립될 것만같다. 그러나 사실 정말 의미 있는 경쟁은 자신과의 경쟁이다. 당신의 기준이 당신이 될 수 있는 최고의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당신은 결코 패배할 수 없다. 따라서 때때로 자신의 성과를 객관적으로 검토하는 시간을 가져라. 만일 기준에 미달되었다면 그 상황에 대해 평가하면서 자신에게 "다른 방법을 썼거나 내가 더 노력했더라면 이와 다른 결과가 나왔을까?"라고 물어보아라. 이때 대답이 "아니다" 이고, 자기 스스로 최선을 다했다고 만족한다면 과거에 연연하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배우고 다음 행동으로 넘어가라. 당신이 한결같이 최선을 다한다면 일시적인 실패들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 성공을 위한 365일 명상 / 나폴레옹 힐 - 하늘과 땅 사이에 바람 한 점 없고 답답하여라 숨이 막히고 가슴이 미어지던 날 친구와 난 제방을 걸으며 돌멩이 하나 되고자 했다 강물 위에 파문 하나 자그맣게 내고 이내 가라앉고 말 그런 돌멩이 하나 날 저물어 캄캄한 밤 친구와 난 밤길을 걸으며 불씨 하나 되고자 했다 풀밭에서 개똥벌레쯤으로나 깜빡이다가 새날이 오면 금세 사라지고 말 그런 불씨 하나 그때 나 묻지 않았다 친구에게 돌에 실린 역사의 무게 그 얼마일 거냐고 그때 나 묻지 않았다 친구에게 불이 밀어낼 어둠의 영역 그 얼마일 거냐고 죽음 하나 같이할 벗 하나 있음에 나 그것으로 자랑스러웠다 그대여 절망이라 말하지 말자 그대 마음의눈 녹지 않는 그늘 한쪽을 나도 함께 아파하며 바라보고 있지만 그대여 우리가 아직도 아픔속에만 있을 수는 없다 슬픔만을 말하지 말자 돌아서면 혼자 우는 그대 눈물을 우리도 알지만 머나먼 길 홀로 가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지 않은가 눈물로 가는 길, 피 흘리며 가야 하는 길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밤도 가고 있는지 그대도 알고 있지 않은가 벗이여 어서 고개를 들자 머리를 흔들고 우리 서로 언 손을 잡고 다시 일어서 가자 그대여 아직도 절망이라고만 말하지 말자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보다 노래를 잘 할 수 있다는 꿈을 가진 이가 더 아름답습니다. 지금 공부를 잘하는 사람보다 공부를 더 잘 할 수 있다는 꿈을 간직한 이가 더 아름답습니다. 숱한 역경속에서 아름다운 삶을 꽃피우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원대한 꿈을 가졌습니다. 암울의 시대에 문지기를 자청했던 김구 선생도 대한민국의 독립을 꿈꾸었습니다. 젊고 나약하기만 했던 간디도 인도 독립의 꿈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두 귀가 먼 절망의 늪에서도 베토벤은 위대한 교향곡을 꿈꾸었습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돈을 많이 가진 사람보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꿈을 가진 이가 더 행복합니다. 글을 잘 쓰는 작가보다도 글을 잘 쓸 수 있다는 꿈을 안고 사는 이가 더 아름답습니다. 꿈은 인간의 생각을 평범한 것들 위로 끌어올려 주는 날개입니다. 내일에 대한 꿈이 있으면 오늘의 좌절과 절망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꿈을 가진 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비극은 꿈을 실현하지 못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현하고자 하는 꿈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절망과 고독이 자신을 에워쌀지라도 원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꿈은 막연한 바람이 아니라 자신의 무한한 노력을 담은 그릇입니다. 노력은 자신의 원대한 꿈을 현실에서 열매 맺게 하는 자양분입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자신의 삶을 원대한 꿈과 희망으로 넘쳐나게 하십시오. 그리고 그 꿈을 밀고 나가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꿈을 먼저 차지할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세상은 원대한 꿈을 가진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친구도, 가족도, 사랑하는 이도 원대 한 꿈을 가진 사람을 원합니다. 자신의 소중하고 아름다운 꿈을 잘 가꾸고 사랑하십시오. 언젠가는 그 꿈이 현실로 나타납니다. 당신은 꿈이 있어 나타납니다. 당신은 꿈이 있어 늘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 태극기 휘날리며 OST & 김장훈 - 애국가 ***** 윤영환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5-23 05:51)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 정말 갖고 싶은 물건이 있다면 수전노처럼 모으고 개처럼 벌어서라도 살수도 손에 넣을수도 있겠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게 갖고 싶다는 욕심만으로 가질수 있는건가요. 상대의 마음이 어떤 모양인지 안다면, 그림조각 맞추듯 이마음과 그마음을 빈자리에 꼭 끼워 맞출텐데, 각각의 모습만큼이나 다양한 각양각색의 마음 순간에도 수만 수천가지의 생각이 떠오르는 그 바람같은 마음이 머물게 한다는건 정말 쉬운듯 어려운일인것 같아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있다면 아마도 사람의 마음을 얻는일이 아닐까? 수많은 사람중에 친구로 동료로 다가서서 신뢰를 얻는것도 오랜시간동안 정성을 들여야 하는 법일진데 이미 누군가의 마음을 얻었다는것은 삶의 많은 이유중에서 가장 큰 의미를 찾았다는 것이겠지요. 사람의 마음을 얻는것이 머리로 계산해서 얕은 꾀로 얻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요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그 사람 의식 그 하부가 흔들렸을 때나 가능한 일이지요. 이 상태가 되면 조건없이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고 가진 것들을 댓가없이 공유하고 싶어지는것이 사람의 마음 아닐까요. 좋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 내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것, 나를 알아주고 좋아해주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 나와 코드가 맞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며 행운인가. 행운은 사실 자주 찾아오지 않지요.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가장 어렵지만 삶의 길에 제일 좋은 방법이 된답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의 소중함을 생각하는 매일매일이 되시길 바래요 ***** 윤영환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5-23 05: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