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슬픔의 봄 / 도종환 강진에 있는 김영랑 시인 생가 마당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자주색 모란꽃도 다 다 졌겠지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말았겠지요. 김영랑시인의 그 가없는 기다림은 또 시작되었을까요?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마음속으로 울고 있을까요? 삼백 예순 닷새 중에 꽃 피어 있는 날은 채 닷새 남짓한 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왜 김영랑시인은 나머지 날들은 늘 섭섭해 하면서 살았을까요? 김영랑시인에게 모란은 그냥 모란이 아니었을 겁니다. 남도의 봄은 삼월이면 오기 시작하고 사월이면 온갖 꽃이 다투어 피는데 오월이 가까워져도 아직도 봄이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나의 봄"을 기다린다고 말한 데는 다른 뜻이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고 기다리는 나만의 봄, 모란꽃으로 빗대어 상징적으로 말한 그런 특별한 봄, 그것 자체가 "뻗쳐오르던 내 보람"인 봄, 그런 봄이 나의 봄입니다. 그런 봄이 잠깐 내게 왔다가 가고 나머지 날들은 슬픔 속에서 보내지만 그 슬픔이 언젠가는 "찬란한 슬픔"으로 완성될 것임을 믿으며 어두운 역사의 시간을 견디며 기다렸던 것입니다. "찬란한 슬픔"이란 말은 모순된 말입니다. 슬픔이 어떻게 찬란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런 시적역설 속에 역설의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슬픈 날들을 견디는 것도 언젠가는 이 슬픔의 날들 끝에 찬란한 시간이 오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의 슬픔도 찬란한 슬픔이 되는 것이지요?
어머니 / 도종환 어머니 살아 계실 적에는 차마 말하지 못했습니다. 푹푹 찌는 더운 여름날, 당신이 막노동판에서 벽돌을 등에 지고 비지땀을 흘리며 나르실 때, 함께 지나가던 동무들이 말했습니다. "정홍아, 네 어머니 저기 일하시네." "잘못 봤어, 우리 어머니 아니야, 우리 어머니는 저런 일 안 해." 다 떨어진 옷을 입고, 길고 힘든 노동에 지쳐 뼈만 남은 얼굴로 일하시는 어머니를, 나는 보고도 못 본 척했습니다. 그날부터 사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어머니 일하시던 공사장, 그 길 가까이 지나갈 수 없습니다. 내 어린 시절의 부끄러움이 그 길에 배어 비바람 불고 눈보라 몰아쳐도, 아무리 씻고 또 씻고 지워도 그대로 남아서, 시퍼렇게 멍든 상처로 남아서.... 서정홍 시인이 쓴「지금까지」라는 시입니다. "길고 힘든 노동에 지쳐 뼈만 남은 얼굴로 일하시"던 어머니. 우리 어머니들 중에는 이런 어머니 많았습니다. 가난한 살림 꾸려가느라, 자식 키우느라 평생 고생만 하신 어머니들 참 많습니다. 그런 어머니 학교에 오시면 부끄러워 숨던 자식들 있었습니다. 길에서 어머니 아버지를 보고 못 본 척 피하던 자식들 있었습니다. 사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때 그 어린 시절의 부끄러움 때문에 "아무리 씻고 또 씻고 지워도 그대로 남아" 있는 부끄러운 상처 때문에 눈물 흘리는 자식들 있습니다. 시퍼렇게 멍든 상처 때문에 어머니가 일하시던 그 길 가까이 지나갈 수 없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우리 어머니가 나환자일지라도 클레오파트라와 바꾸지 않겠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는데.
어린이라는 패러다임 / 도종환 낡고 묵은 것으로 새것을 누르지 말자! 어른이 어린이를 내리누르지 말자.(.....)부모는 뿌리라 하고 거기서 나온 자녀는 싹이라고 조선 사람도 말해 왔다.(.....) 그러나 조선의 모든 뿌리란 뿌리가 그 사명을 잊어버리고 뿌리가 근본이니까 상좌에 앉혀야 한다고 싹 위에 올라앉았다. 뿌리가 위로 가고 싹이 밑으로 가고 이렇게 거꾸로 서서 뿌리와 싹이 함께 말라 죽었다. 싹을 위로 보내고 뿌리는 일제히 밑으로 가자! 이 글은 방정환 선생이 아동문제 강연에서 했던 말씀의 일부입니다. 1920년대, 당시에 어린이들은 교육의 기회조차 얻지 못했고 온전한 인간으로서 대우받지 못하였습니다. 멸시와 구타, 각종 질병과 배고픔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이 어린이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지식과 덕성과 건강한 신체를 갖춘 쾌활한 소년으로 양성하자고 일어선 이들이 천도교소년회 회원들이었습니다. 어린이는 귀찮은 존재이고, 말썽꾸러기이고 좋게 보아야 심부름꾼인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가 인격적 존재라고 생각해서 이들은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었습니다. 방정환선생은 <색동회> 회원들과 함께 어린이날을 만들었고 어린이들이 읽을《어린이》라는 잡지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의 노력으로 인해 우리나라 어린이 운동이 세계적으로 앞서서 전개되었습니다. 어린이 중심으로 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미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을 하늘같이 섬겨야 한다면 어린이도 똑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싹은 지금 어디에 어떻게 있습니까? 싱싱하고 자유롭게 잘 자라고 있습니까 아니면 말라 죽어가고 있습니까? 가슴 속에 하느님이 앉아 있습니까? 아니면 불안의 씨앗이 자라고 있습니까?
젖은 꽃잎 / 도종환 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 대신 비가 밤새 왔다 이 산 속에서 자랑하며 보여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아 산벚나무가 환하게 꽃을 피운 연분홍 꽃그늘과 꽃 사이 사이를 빈틈 하나 없이 파랗게 채운 한낮의 하늘을 보여 주고 싶었는데 젖은 꽃들은 진종일 소리 없이 지고 나무는 천천히 평범한 초록 속으로 돌아가는 걸 보며 오후 내내 도라지 밭을 매었다 밭을 점점이 덮은 꽃잎 흙에 묻히고 꽃 향기도 함께 묻혔다 그댄 지금 어느 산을 넘는지 물어볼 수도 없어 세상은 흐리고 다시 적막하였다 -「젖은 꽃잎」 제 시 「젖은 꽃잎」입니다. 봄에 피었던 꽃들이 지고 있습니다. 가지 끝에 매달렸던 꽃들은 지고 나무는 다시 평범한 초록으로 몸을 바꾸고 있습니다. 꽃잎도 흙에 묻히고 꽃 향기도 거기 함께 묻히는 걸 바라봅니다. 꽃이 필 때도 가슴 설레지만 꽃이 질 때는 더 가슴 떨려 어찌해야 좋을지를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붙잡을 수도 있지만 지는 꽃은 잡을 수도 없습니다. 며칠만이라도 더 붙들어 두고 싶은데 그 며칠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꽃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지는 꽃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꼭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 같은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꽃이 피어 있는 동안 더 가까이 가 바라보고 사랑해 주지 못한 것 같은 죄책감이 듭니다. 그대와 함께 이 꽃을 바라보고 싶었는데 그것도 제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그대에게 연분홍 꽃과 꽃 사이를 가득 채운 파란 하늘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대와의 인연은 멀고 꽃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았습니다. 꽃잎이 먼저 스스로를 버리는 날 비가 내렸고 세상은 온종일 흐리고 적막하였습니다. 어디에 계시는지요, 젖은 꽃잎 같은 그대는.
Board 추천글 2008.05.02 바람의종 R 10102
만족과 불만 / 도종환 뉴욕 주립대학에서 연구자들이 '내가 ........가 아니라서 기쁘다' 라는 문장을 완성하라는 숙제를 냈답니다. 이 실험을 다섯 번 반복해서 받고나자, 실험대상자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전보다 더 만족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연구자들은 또다른 실험집단에게 '내가 .......라면 좋을 텐데' 라는 문장을 완성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실험을 반복하자 이번에는 실험대상자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더욱 큰 불만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내가 이런 질문지를 받았다면 뭐라고 썼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서 기쁘다.' '내가 지금 아픈 사람이 아니라서 기쁘다' '내가 정치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기쁘다' 이런 글들을 썼을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질문지에는 '내가 돈이 많은 사람이라면 좋을 텐데' '내가 전화 한 통이면 무슨 일이든 금방 해결해 내는 힘 있는 사람이라면 좋을 텐데' '내가 지금 20대 청춘이라면 좋을 텐데' 이런 문장들을 썼을 것 같습니다. 주위에 어려움과 불행을 겪는 사람과 자신을 비교해 보면 지금 내가 얼마나 행복하고 고마운 삶을 살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 갖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한 갈망으로 관심을 옮기게 되면 갑자기 자신이 초라해지고 불행하다는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살면서 어떤 쪽의 생각을 더 많이 하면서 살아야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만족할 줄 알 때 행복은 시작되지만 만족할 줄 모르면 언제나 결핍감에 시달리며 살게 됩니다. 감사할 줄 알면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지만, 정신적 결핍에 시달리면 남에 대한 시기와 질투, 자신에 대한 원망의 마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선택은 우리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습니다.
참는다는 것 / 도종환 남도에 꽃구경 갔다가 오는 길에 어느 절에 들렀습니다. 신라시대에 인도로부터 불법이 들어왔음을 알려주는 이 절 마당에는 봄풀 사이에 자잘한 봄맞이꽃들이 피어 있었고 그 꽃이 주는 기운으로 절 마당은 따뜻하였습니다. 봄기운을 담뿍 받고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법어 몇 말씀 적힌 오래된 게시물이 하나 붙어 있었습니다. "참기 어려운 것을 참는 것이 진실한 참음이요 누구나 참을 수 있는 것을 참는 것은 일상의 참음이다. 자기보다 약한 이의 허물을 기꺼이 용서하고, 부귀와 영화 속에서 겸손하고 절제하라.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것이 수행의 덕이니 원망을 원망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성내는 사람 속에서도 마음을 고요히 가질 것이며 남들이 모두 악행한다고 가담하지 말라. 강한 자 앞에서 참는 것은 두렵기 때문이고, 자기와 같은 사람 앞에서 참는 것은 싸우기 싫어서며, 자기보다 못한 사람 앞에서 참는 것이 진정한 참음이다." 『아함경』에도 나오는 이 말씀을 한번 읽고 지나치기 아까워 몇 번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참을 수 있는 것도 참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참을 수 있는 것을 참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고 당연한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참기 어려운 것까지 참는 것이 진실하게 참는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강한 자 앞에서는 말도 못하고 꾹 참다가 자기보다 못한 사람 앞에서 불 같이 화를 내는 우리들은 얼마나 비겁한 사람들입니까. 자기보다 못한 사람 앞에서 참는 것이 진정한 참음이라는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기로 하였습니다. 아니 그냥 참기보다 허물을 용서하고 절제할 줄 아는 것 또한 그를 위한 일이기보다 나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내 마음을 불같은 원망과 분노로 태우지 않고 고요하고 평안하게 유지할 수 있다면 그 일은 상대방보다 나에게 더 득이 되는 일입니다. 꽃 구경 절 구경 갔다가 귀한 말씀까지 얻어오니 참으로 복 받은 봄날입니다.
입을 여는 나무들 / 도종환 나뭇가지에 어린잎이 막 새 순을 내미는 모습은 참 예쁩니다. 예쁘다는 표현보다는 앙증맞다고 해야 어울릴 것 같습니다. 어린 새의 부리처럼 보이기도 하고 펜촉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제 막 연초록의 부리를 내미는 어린잎들이 무어라고 재잘댈 것 같기도 하고, 저마다 사월 하늘에 푸른 글씨를 쓸 것도 같습니다. 신달자 시인은 그것을 나무들이 몸의 입을 열기 시작했다고 표현합니다. "어린 말씀들이 돋기 시작했다 / 나무들이 긴 침묵의 겨울 끝에 / 몸의 입을 열기 시작했었다 / 바람이 몇 차례 찬양의 송가를 높이고 / 봄비가 낮게 오늘의 독서를 읽고 지나가면 / 누가 막을 수 없게 / 말씀들은 성큼 자라나 잎 마다 성지를 이루었다 / 결빙의 겨울을 건너 부활한 성가족 / 의 푸른 몸들이 넓게 하늘을 받는다 / 잎마다 하늘 하나씩을 배었는지 너무 진하다 / 말씀 뚝뚝 떨어진다" ---「녹음미사」중에서 봄 숲에 봄비가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성당에서 성서를 읽는 독서의 소리라고 생각하고, 나무마다 어린 나뭇잎이 돋아나는 모습을 "결빙의 겨울을 건너 부활한 성가족"이라고 말합니다. 새로 돋는 나뭇잎에서 부활을 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봄숲에서 나뭇잎이 자라나는 모습을 "장엄한 녹음미사"라고 상상합니다. 사월 나뭇잎에서 가톨릭의 미사를 떠올리는 종교적 상상도 아름답지만 부활이 그냥 오는 게 아니라 봄비처럼 쏟아지는 통회의 눈물, 통성기도의 후끈한 고백성사를 거친 뒤에 오는 것이라는 그 말씀 또한 아름답습니다. 나뭇잎들이 그렇게 부활하며 다시 태어나듯 우리도 이 사월 새롭게 태어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섬기고 공경할 사람 / 도종환 우리는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 중에는 평생을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서로 별 도움이 못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번 만났지만 오래 기억하게 되는 사람이 있고, 만난 지 오래 되지만 서로 편치 않은 관계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잠시 만났는데도 끌리는 데가 있는 사람이 있고, 한 직장에서 일하며 지내도 데면데면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지만 마음속으로 존경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돌아서면 흉을 보고 비난하게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을까요? 나는 내가 만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일까요? 그들이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어 하는 사람일까요? 이 세상에는 섬기고 공경할 만한 일곱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 연민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 남을 기쁘게 하는 사람, 남을 보호하고 감싸는 사람,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비운 사람, 부질없는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 바라는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증일아함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이렇게 섬기고 공경할 만한 훌륭한 모습을 지닌 사람이 있습니다. 일곱 사람의 좋은 점을 다 가진 분도 있습니다. 살면서 이런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을 가까이서 자주 만나며 살아간다면 얼마나 큰 힘이 될까요? 아니 내가 이런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용연향과 사람의 향기 / 도종환 얼마 전 영국의 웨일즈 해변에서 용연향이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션 케인과 아이언 포스터라는 두 사람이 발견한 용연향은 약 50kg 정도로 50만 파운드(약 9억 4500만원)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고 합니다. 용연향은 향유고래 수컷의 창자 속에 생기는 이물질로 배설된 후 바다에 떠다니거나 해안으로 밀려 발견되는 귀한 향료입니다. 앰버그리스라고도 불리는 용연향은 향료성분을 알코올에 녹여 추출하여 향수를 만드는 값비싼 물질입니다. 그런데 이 용연향은 고래가 오징어를 먹거나 바닷물을 마시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바닷속에 있는 특별히 향기로운 것들을 먹으면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천연 동물성 향료인 사향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의 윈난성 · 쓰촨성 같은 높은 산지에서 사는 사향노루에게서 얻습니다. 사향은 사향노루의 향낭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향노루 자신은 사향을 찾아다니지 않습니다. 늘 풀을 찾아다니며 살 뿐입니다. 침향도 침향나무의 진에서 얻지만 침향나무는 향기만을 먹으며 자라지 않습니다. 침향나무는 그저 빗줄기와 햇빛으로 자랄 뿐입니다. 사람이 지닌 향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인품의 향기는 향수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특별한 것을 먹고 특별한 생활을 하면서 생기는 게 아닙니다. 훌륭한 사람은 오히려 평범한 모습으로 삽니다. 파트롤 린포체의 말대로 성인들의 비범함은 우리 눈에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반면 야바위꾼이 성인처럼 행세하며 남들을 속이는 비범한 재주에 우리는 잘 속아 넘어가곤 합니다.
Board 추천글 2008.04.21 바람의종 R 104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