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문이란 과거시험의 마지막 관문이 되는 시험을 말합니다. 대과를 거친 인재들 가운데 33명이 남습니다. 이들은 더 이상 탈락하지 않습니다. 다만 등수만 결정될 뿐입니다. 이들이 왕 앞에서 치르는 최종 시험이 책문입니다. 왕은 절박한 심정으로 인재를 뽑기를 원했기에 그 시대의 가장 절실한 물음을 던지고 과거에 응시한 사람 역시 목숨을 걸고 시대의 문제를 날카롭게 질책하며 답합니다. 광해군 3년에 임금은 선비들의 의견 차이를 조정할 길이 없고 전란을 겪고 살아남은 백성을 소생시키기 위해 시급하게 해야 할 세제문제와 토지문제 등에 대해 대책을 묻는 문제를 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피력하면서 임숙영은 답안지에다 이렇게 씁니다. "정치적 조치는 반드시 시의에 맞게 해야 하고 인재를 쓰거나 무능한 자를 내칠 때는 반드시 공정한 방법에 따라야 하며, 높은 지위에는 반드시 후덕한 사람을 써야 하고, 모든 관직에는 반드시 유능한 사람을 등용해야 하며, 수령은 반드시 재능 있는 사람을, 장수는 반드시 능력 있는 사람을 기용해야 합니다. (.....) 전하께서는 자기 수양에 깊이 뜻을 두시되, 자만을 심각하게 경계하십시오. 대체로 자만하면 뜻이 날로 교만해지고, 마음이 날로 게을러지며, 덕이 나날이 깎이고, 공이 나날이 무너집니다. 그렇게 되면 만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온갖 정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 책문에서 임숙영은 책제를 벗어나 왕에게 아첨하는 자와 척족의 횡포와 언로가 막혀서 임금과 신하 사이에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등을 격렬하게 비판합니다. 시험을 주관하는 우의정 심희수는 장원으로 급제시키려 했으나 광해군은 진노하여 그의 이름을 삭제할 것을 명합니다. 그러자 영의정 이덕형, 좌의정 이항복이 삭과의 부당함에 대해 간절히 변론을 하게 되고 이 파동은 넉 달을 끌다가 결국 시관인 심희수가 벼슬을 내놓으면서 일단락됩니다. 물론 임숙영은 벼슬길에 오릅니다. 벼슬길로 나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 앞에 서 있으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나라의 병은 왕 바로 당신에게 있습니다" 하고 직언하는 기개는 이 나라의 선비정신의 핵심을 이룹니다. 시대는 달라도 시대의 고민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이 책문의 구절구절을 대통령이나 권력의 핵심에 있는 이들도 읽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도종환/시인
"촛불은 평화의 상징이며 기도의 무기이며 비폭력의 꽃입니다. 우리가 비폭력의 정신에 철저해야만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 버릴 수 있습니다." "모든 신앙인에게 호소합니다. 촛불은 안으로는 내면의 욕심을 불태우고, 밖으로는 어둠을 밝히는 평화의 수단입니다. 저마다 마음을 비우고 맑게 하여 지친 세상을 위로하고 서로에게 빛이 됩시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성명에 나오는 이 구절은 어느 신부님이 쓰셨는지 모르지만 울림이 깊고 큽니다. 폭력의 악순환을 걱정하는 건 사제단만이 아닐 것입니다. 폭력으로 촛불을 끄고자 하거나 폭력으로 국민의 입을 막고자 하는 정부에 대한 비폭력의 경고이면서 항의 수단 역시 비폭력으로 전환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심정이 들어 있습니다. 폭력의 한가운데를 뚫고 내려오는 신부님 수녀님들의 모습을 보며 참 고맙고 다행스럽다는 생각을 하는 건 저만이 아닐 겁니다. 침묵하고 단식하면서 평화롭게 대열을 이끄는 모습을 통해 촛불을 든 첫마음으로 돌아가게 하는 신부님들을 비난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으므로 이미 종교단체가 아니라느니, 좌파성향의 종교인들은 반성해야 한다느니, 국법으로 다스려야 한다느니 하는 말을 하는 걸 봅니다. 버스의 정체에 항의하는 시민들에게도 미안하다고 말하고, 돌아가지 않으려고 하는 집회참가자들에게 집으로 돌아가 줄 것을 권유하는 신부님들이 그들에게는 오직 좌파 종교인으로 보이는가 봅니다. 슬기로운 이는 도(道) - 진리의 말씀을 듣고 곧장 그대로 하고, 괜찮은 이는 반신반의하고, 어리석은 이는 비웃는다고 했습니다. 그가 비웃지 않으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합니다. 노자에 나오는 말입니다. 사제단의 말씀대로 촛불이 안으로는 내면의 욕심을 불태우고, 밖으로는 어둠을 밝히는 평화의 수단이 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도종환/시인
개울은 제가 그저 개울인 줄 안다 산골짝에서 이름 없는 돌멩이나 매만지며 밤에는 별을 안아 흐르고 낮에는 구름을 풀어 색깔을 내며 이렇게 소리없이 낮은 곳을 지키다 가는 물줄기인 줄 안다 물론 그렇게 겸손해서 개울은 미덥다 개울은 제가 바다의 핏줄임을 모른다 바다의 시작이요 맥박임을 모른다 아무도 눈여겨 보아주지 않는 소읍의 변두리를 흐린 낯빛으로 지나가거나 어떤 때는 살아 있음의 의미조차 잊은 채 떠밀려 서쪽으로 서쪽으로 가고 있는 줄로 안다 쏘가리나 피라미를 키우는 산골짝 물인지 안다 그러나 가슴속 그 물빛으로 마침내 수천 수만 바닷고기를 자라게 하고 어선만한 고래도 살게 하는 것이다 언젠가 개울은 알게 될 것이다 제가 곧 바다의 출발이며 완성이었음을 멈추지 않고 흐른다면 그토록 꿈꾸던 바다에 이미 닿아 있다는 걸 살아 움직이며 쉼없이 흐른다면 「개울」이란 제 시입니다. 골짜기에서 흐르는 작은 물줄기가 개울입니다. 개울은 아무도 눈여겨 보아주지 않는 물입니다. 그저 쏘가리나 피라미가 사는 산골짝 물입니다. 그러나 거대한 바다도 개울에서 출발하였습니다. 개울은 비록 낮은 곳에 있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물이지만 그 개울 하나 하나가 바다의 핏줄이었던 것입니다. 바다의 시작이요 맥박인 것입니다. 그러나 바다까지 가려면 멈추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살아 움직이면서 쉼 없이 흘러야 합니다. 주저앉거나 포기하면 그 순간부터 개울은 부패하기 시작합니다. 늘 깨어 있어야 하고 맑은 모습으로 흘러야 합니다. 바다를 향해 달려가는 걸음을 멈추지 않으므로 개울물이 맑은 것입니다. 그래야 바다의 출발이고 완성일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아무도 눈여겨 보아주지 않는 개울물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혼자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실핏줄처럼 다른 물들과 연결되어 있고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멈추지 않고 흘러가 바다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도종환/시인
Board 추천글 2008.07.21 바람의종 R 10023
거리에서 황당한 발명품을 전시한다는 펼침막을 보았습니다. 황당한 발명품이란 빨대 달린 국자, 조미료통 달린 젓가락, 대접 냄비, 마사지 슈즈, 앞뒤로 신을 수 있는 실내화 등등 기발하면서도 재미있는 발명품들을 말합니다. 이것을 '진도구(珍道具)'라고 한답니다. 진기한 도구의 준말인데 1987년 일본인 가와카미 켄지(川上賢司)라는 사람이 만들기 시작한 황당한 발명품을 말한다고 합니다. 책으로도 출판되어 미국 캐나다 일본 등 세계 15개 나라에서 수백만 부나 팔렸다고 합니다. 발명품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사용해보면 더 불편하게 되는 도구들도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정관념을 깨는 이들의 발상은 재미있습니다. 답답하게 반복되는 일상을 뒤집어엎는 이들의 전복적 사고와 괴짜 행동은 우리를 유쾌하게 합니다. 창의적인 사람들은 본래 괴짜의 기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정진홍 교수에 의하면 이들은 복합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명석하면서도 천진한 구석이 있고, 만족스럽게 일하기 위해 게으름이나 명상을 즐기고, 그 뒤에 따라오는 활력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답니다. 장난기와 극기, 책임감과 무책임이 혼합된 모순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고, 상상과 공상 현실의식 사이를 오가며 외향성과 내향성이라는 상반된 성향을 함께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개방적이고 감성적인 성향으로 인해 종종 즐거움뿐만 아니라 고통과 역경을 겪는다고 합니다. 그럴 것 같습니다. 열심히 일하기만 하고 책임감과 현실인식으로만 무장되어 있다면 창의적인 발상을 하기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창의성과 자발성은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활력소입니다. 당위성과 헌신성으로 이끌어져 가는 삶은 우리를 쉽게 지치게 합니다. 물대포를 맞고도 "온수, 샴푸!"하고 외치는 전복적 상상력을 보고 저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외치는 동안 저항은 축제가 되고 분노와 고통은 즐거움으로 전환합니다. 이런 천진함이 있어야 무슨 일을 하든 여유를 잃지 않으며 해 나갈 수 있습니다. 1037개의 특허를 갖고 있는 에디슨의 발명 방식은 역발상에 기초해서 시작한 것이 많다고 합니다. 레코드판을 거꾸로 돌리듯이 생각하거나 좌충우돌하는 발상을 자주 했고, 천진난만한 다섯 살짜리 아이의 말에도 귀를 기울였다고 합니다. 언제 어디서고 이런 창의적인 사고가 살아 있는 사람이 세상을 활기차게 이끌어 갑니다. 도종환/시인
부귀와 명예가 찾아오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권세와 이익과 화려한 명성이 찾아와주기를 바랍니다. 자기가 갖고 있지 못하면 그걸 가진 사람과 가까이 지내며 간접적으로라도 누리게 되길 바랍니다. 그러나 부귀공명도 어떻게 얻은 것이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덕을 닦고 도덕을 지키면서도 자연히 얻게 된 부귀와 명예는 마치 산이나 숲 속에서 자라나는 꽃과 같아서 뿌리가 깊다고 합니다. 이슬을 마셔 마음껏 튼튼하게 자라서 꽃 피고 열매 맺으니 생명 또한 길지요. 큰 공적이나 업적을 세워서 갑자기 얻은 부귀와 명예는 마치 화단이나 화분에 심어 놓은 꽃과 같아서, 마음 내키는 데 따라서 이리저리 옮겨지기도 하고 혹은 뽑혀 버리기도 하며 때로는 활짝 피어날 수도 있으니 언제 어떤 경우를 당할지 몰라 조마조마하고 초조하게 보내야 한답니다. 만약 권력을 이용하여 빼앗은 것이라면 마치 화병 속에 잘라다 꽂은 꽃과 같아서 뿌리가 없으니 잠시 서서 바라보는 짧은 시간에 시들어 버리고 말게 된다고 합니다. 『채근담』에 나오는 이야기를 황병국 선생이 상세하게 풀이하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권력이 얼마나 사람들이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며, 또한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권력의 자리에 앉았다 물러난 사람일 것입니다. 권력으로 얻은 부귀와 명성이 얼마나 짧은 순간에 사라져 버리고 마는 가를 가장 잘 아는 사람 역시 권력의 자리에 앉았다 채 몇 달도 되지 않아 손가락질 당하고 물러나 본적이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명성과 명예의 뿌리가 깊다는 것은 그가 평생을 다해 그 씨앗을 뿌리고 가꾸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덕으로 얻은 명성이라서 뿌리가 깊고, 깨끗하게 살면서 얻은 명예라서 부함과 귀함도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사람이라면 그 부귀명성의 생명력이 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많아지는 세상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도종환/시인
Board 추천글 2008.07.21 바람의종 R 11838
잘 배우기 위해서는 온화(溫和, moderation)보다 좋은 것이 없다. 온화한 학생은 자신의 생각에서 자유롭다. 그는 하늘처럼 너그럽고 떠오르는 해처럼 한결같고 태산처럼 굳건하고 바람 부는 날의 대숲처럼 유연하다. 보이는 것을 기대하지 않고, 인생의 오솔길에서 자기에게 닥쳐오는 모든 것을 활용한다. 온화한 학생에게는 불가능이 없다. (......) 그는 사랑하는 부모가 자녀들 돌보듯이 자신의 행복을 돌볼 수 있다. 파멜라 메츠(Pamela K. Metz)가 「배움의 도」에서 한 이야기입니다. 배우는 사람에게는 온화한 성품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 그는 말합니다. 온화하다는 것은 날씨로 치면 따뜻하고 화창한 것을 말합니다. 온화한 사람은 태도가 온순하고 너그럽습니다. 온(溫)은 따듯하고 순수하고 원만함을 뜻하는 글자입니다. 화(和)는 화합하고 조화를 이루고 서로 응하는 것을 뜻합니다. 화(和)에는 커뮤니케이션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서로 소통할 줄 알고 하나 될 줄 아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본래 농사지은 곡식을 같이 먹는 것을 뜻하는 글자이기도 합니다. 이런 성품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생각에서 자유롭다고 파멜라 메츠는 말합니다. "하늘처럼 너그럽고 해처럼 한결 같고 태산처럼 굳건하고 바람 부는 날의 대숲처럼 유연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닥쳐오는 모든 것을 활용"할 줄 안다고 합니다. 그것이 어려움이든 절망이든 억압이든 그것을 활용하여 새로운 힘으로 전환시켜내는 것이지요. 온화한 사람은 그래서 창의적인 사람입니다. 그들의 유연하고 창의적인 상상력이 자신의 운명을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내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온화한 성품으로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특히 자라나는 학생들 젊은이들이 이런 성품을 지닌 사람으로 성장한다면 개인과 사회는 질적으로 크게 발전할 것입니다. 요즘 거리에서 만나는 젊은이들이 이렇게 굳건하면서도 유연하기를 바랍니다. 도종환/시인
용서 언어예절 잘못을 너그러이 봐 줄 것을 빌었을 때 기대하는 반응이 용서다. 받아들이고 씻어주는 일이다. 이는 마음 문제여서 고갱이 말은 극히 소박하다. 벌을 받아 마땅한 잘못도 연유를 먼저 밝혀 무겁게 사과하면 책임을 덜거나 마음이 풀릴 수 있다. 말로써 천냥 빚을 갚는다는 얘기는 과장이되 그럴싸하다. 사과가 그렇듯 용서는 힘센 쪽의 덕목만은 아니다. 이해하며 너그러이 삭이고 넘어갈 수 있다면 그가 곧 윗길이 된다. 뉘우치도록 짚고 헤아리지 않는 용서는 포기와 같은데, 헤아림과 챙기기가 보통 수고로운 일은 아니다. 그 갈래로 묵은 용서, 제때 용서, 말뿐인 관용, 감싸고 두둔하기, 종교적 용서 …들에다 개인·집단·종족·나라 등 주체도 갖가지다. 개인은 수양의 폭과 깊이, 집단은 역사·문화·품성에서 정도차가 난다. 용서는 사과를 전제로 한다. 예컨대 군위안부로 끌려갔다 참담한 삶을 사는 팔구십 노인들에게 묵은 잘못을 빌지 못하는 일본 정부는, 그쪽의 낱낱 사람 됨됨이와 상관없이 애꿎은 후손까지 용서받지 못할 족속으로 남긴다. 사과가 먼저다. 사람 사이에서 어른 곧 어버이 쪽, 신과 인간 사이에서는 신의 덕목이자 영역에 든다. 허투루 용서하면 후레자식을 만들고, 관대함이 지나치면 나라 기강이 흔들린다. “죽여 주시옵소서!, 무슨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는 낡은 말이지만 몹시 다급할 때 쓴다. 법에도 관용과 감형, 사면·복권 등 용서하는 절차가 있다. 정치를 잘못하면 백성들이 해를 보지만 마지막 심판과 용서도 그들의 몫이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사과 언어예절 잘못했으니 너그러이 봐 달라고 비는 것이 사과다. 사람이 아무리 바르고 곧게 산다 해도 일이 잘못될 때가 적잖다. 마음을 어지럽히고, 손해를 끼치거나 다치게 하는 등 살다 보면 사적공적인 잘잘못이 생기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잘못했다고 말하기를 꺼린다. 체면이 상하고 책임이 따르는 까닭이다. 그렇지만 사과할 일은 낯을 돌보지 말고 제때 하고 넘어가야 옳다. 뉘우치고 용서를 비는 자세가 비뚤어진 것을 바로잡는 길이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모른다거나 잡아떼거나 뭉개는 태도는 어질지 못한 일이다. 흔히 잘못을 정당화하기도 하고, 잘못을 인정하라는 상대를 트집 잡아 윽박지르기도 한다. 도둑이 매를 드는 격이다. 용서를 빌어도 받아들일 쪽 마음인데, 이 정도면 말이 통하지 않는 단계다. 일이 잘못된 데는 무능해서, 실수로, 게을러서, 일부러, 할 수 없이, 구조적인 문제로 … 연유가 숱하며, 사과 종류도 의례적인 것, 마지못해서, 말뿐인 사과, 묵은 사과, 대국민 사과 … 등 갖가지다. 세기에 따라 안됐다·미안하다·유감이다·잘못했다·사죄한다·책임지겠다 …에다 몹시·충심으로·깊이·대단히·매우·머리숙여·무척 … 같은 꾸밈말을 쓴다. 해명과 다짐을 아울러야 제격이다. 사과는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이자 문제를 푸는 좋은 방식이다. 보상이 따라야 할 때도 있다. 그 책임이 나라에 있을 때 ‘보상법’을 꾸리기도 한다. 나라 사이에서는 ‘사과’에 더욱 인색한데, 그 세기나 용어를 두고 협상을 하기도 한다. 주고받는 말이 아이들이나 동네 장삼이사의 말싸움과 크게 다를 바는 없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