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주기 언어예절 “사람을 죽인 자는 그도 죽이며, 남을 다치게 한 이는 곡물로 보상하고, 물건을 훔친 이는 임자의 노비로 삼는다.”(옛조선 8조 금법에서) 형벌을 담은 선언이다. 소략한 듯하지만 기록이 사라졌을 뿐 옛조선의 규율이라고 그리 허술하지만은 않았을 터이다. 나무라거나 꾸짖어도 안 되면 결국 벌주기(징계)로 갈 수밖에 없다. 이는 일상적인 말로 풀 수준을 넘은 것으로서, 집단마다 간추린 학칙·사규·복무규정 등 갖가지 제도화된 법규가 있다. 드물지만 사사로이 행하는 벌도 있다. 학교에서는 경고·견책·근신·정학·퇴학·제적·퇴교 등이, 기업·공무원 쪽에서는 경고·견책·감봉·정직·해임·파면 등 단계를 나눠 벌을 준다. 형사·민사 사항은 이런 쪽과 상관없이 법 따라 행한다. 이처럼 틀로 굳혀 행하는 절차들이 과연 말의 영역을 벗어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좀더 복잡해질 뿐이다. 누구도 억울해선 안 되겠기에 절차마다 말글로 경위를 밝힐 기회를 준다. 떼나 억지처럼 보이는 시위도 나름의 정당성이 있다. 잘못이 없음을 말하거나(발명), 구실을 대며 그럴듯하게 둘러대고(변명), 그리 된 까닭이나 이유를 밝힌다.(해명) 집단 앞에 개인은 약하지만 집단을 걸어 시비를 가리는 절차가 있다. 법·행정·정치도 결국은 말글로 이뤄진다. 법은 강제력을 바탕으로 행정·판결의 근거가 되는데, 언제든 새롭게 거래를 트고 규제할 필요가 생기므로 손질을 자주한다. 법·제도가 아무리 정치해도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이는 동물이 사람이다. 극단적 징계 방식인 전쟁도 말로 합리화한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생각의 집부터 지어라 설계를 의뢰하려는 이들 중에는 ‘구름 같은 집’의 겉모양에 집착하거나, 집을 지을까 말까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정작 설계는 초스피드로 해 달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이들이야말로 집을 지을 마음의 준비가 부족한 사람들이다. 집을 잘 지으려면 무엇보다 생각부터 잘 지어야 하는데, 밑바탕도 없이 대뜸 그림부터 그리려는 조급함이 여간 커다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좋은 설계를 하는 데 있어 소요 공간의 기능이나 면적 등도 중요한 필요조건이지만 비껴가서는 안 될 본질적인 물음들이 있다. 이를테면, ‘집은 왜 지으려 하는가?’, ‘집을 지어서 무엇을 얻으려(즐기려) 하는가?’등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그들이 평소 갖고 있는 집에 대한 생각들을 살펴보기 위해 소설가 유진오의 《창랑정기》나 법정 스님의 《텅 빈 충만》, 또는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같은 작품들을 읽어 보았는지 슬며시 묻곤 한다. 물론 읽어 보지 않았다면 반드시 일독을 권하면서, 이들 작품을 예로 들어 구체적으로 집의 진면목은 어떠한 것이어야 하며 제대로 된 집을 위해 어떠한 개념이 필요한지를 내 식대로 풀이해 드리곤 한다. 그렇게 문학을 화두로 삼아 ‘사유의 집’을 함께 그리다 보면 서로의 인연이 어디까지일지를 대략 가늠하게 된다. 문학적인 상상력이 바탕이 되어 다소나마 정서적인 교감이 오고가는 경우라야 일을 함께 할 만하다고 보는 것이 내 나름의 일감 선택 방식이다. 수많은 문학 텍스트가 여실히 증거하고 있듯이 집을 제대로 짓는다 함은 하늘과 땅과 사람 사이의 소중한 인연을 잘 보듬어 이어가고자 함이다. 또한 집을 굳건히 일으켜 세운다 함은 단순히 아름다운 모양이나 풍광만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 스며들 정신을 구축해 내는 것인 동시에 집주인의 자화상(인품)을 곧바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기에 설계에 뜸을 들여가며 신중에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사유의 집 짓기는 집의 뼈대를 튼튼하게 하기 위한 기초공사나 다름없다. 생각이 부실하면 집 짓기는 형태의 유희로 끝날 공산이 크다. 집 모양이야 건축가에게 맡기더라도 사유의 텃밭만큼은 집주인도 함께 일구어야 한다. 문학적 상상력으로 대지 위에 ‘사유의 집’을 짓는 것! 그것이 바로 건축의 기본이요 출발이다. 김억중 님 | 건축가 , 한남대 교수 -《행복한동행》2008년 7월호 중에서
artnstudy.com 유가 사상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맹자의 정치 철학은 춘추전국시대, 적자생존의 논리가 쉽게 통용되던 시대에 정립되었다. 당시는 크고 작은 국가가 난립하고 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대였다. 때문에 각국이 이익을 추구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데, 맹자는 왜 이(利)의 가치를 쫒지 말고 인의(仁義)의 가치를 추구하라고 강조했을까? 맹자의 논리를 따라서 의문의 답을 찾아보자! 『맹자』편에 보면, 孟子見梁惠王하신대 王曰 不遠千里而來하시니 亦將有以利吾國乎잇가 孟子對曰 王은 何必曰利잇고 亦有仁義而已矣니이다 王曰 何以利吾國고하시면 大夫曰何以利吾家오하며 士庶人曰何以利吾身고하야 上下交征利면 而國危矣리이다 맹자가 양나라 혜왕을 만났는데, 왕이 말하길, 선생께서 천릿길을 멀다 여기지 않으시고, 우리나라에 오셨으니, 앞으로 어떻게 우리나라를 이롭게 해주시겠습니까? 맹자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왕은 어찌하여 꼭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오로지 인의(仁義)가 있을 뿐입니다. 왕께서 만약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 하신다면, 대부(大夫)는 나의 가(家)를 어떻게 이롭게 할 것인가 이렇게 생각할 것이고, 사서인(士庶人)들은 어떻게 하면 나 한 사람을 이롭게 할 것인가? 여기에 골몰하게 되어서,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나 모두 상호간에 이익을 다투게 되고, 그러면 나라가 위태로워집니다. 왕이 이익을 생각하게 되면, 그 아래 사람인 대부는 자신의 家(가족이 아니고 행정조직, 지금으로 치면 주(state) 정도에 해당하는 규모)의 이익을 생각하고, 그 아래 사람인 선비와 서인들 일반 백성들은 자기 한 몸의 이익을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왕을 비롯한 모두가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국가의 근간이 되는 상하 간의 위계는 흩어지고 국가가 어려움에 처한다는 것이 맹자의 생각이다. 그러면 상호 이익을 다투어 위태로운 국가는 어떻게 무너질까? 맹자는 만승지국(萬乘之國)의 군주(제후를 가리킴)를 시해하는 자는 그의 밑에 천승지가(千乘之家)의 신하이며, 천승지가의 군주를 죽이는 자는 반드시 백승지가(百乘之家)의 신하라고 했다. 즉 이익을 중심으로 생각하게 되면 자신의 신하에 의해 스스로마저도 위태롭게 됨을 이야기 했다. 이와 같은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사유는 패도 정치라는 정치 사상으로 나타났다. 당시의 진나라와 제나라의 국왕은 패도 정치 사상을 실천하여 국가를 통치했으며, 이를 통해서 군사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그런데 맹자가 패도 정치를 비판한 까닭은 무엇일까? 맹자에 따르면 왕이 힘으로 국가의 이익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패도 정치이다. 그런데 패도 정치의 결과는 푸줏간에 살찐 고기가 가득하고, 마구간에 살찐 말이 가득하지만, 백성들은 굶주리고, 들판에는 굶어죽은 시체가 널려있는 것이다. 군주가 다른 나라를 정복해서 자기 나라의 이익을 증진시키려는 노력을 했지만, 애초의 목적과 다르게 백성들의 삶은 황폐해 진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패도 정치가 토지와 성 등의 가치를 사람의 가치보다 더 위에 놓음으로서 토지와 성을 빼앗기 위한 목적에 백성의 희생이 정당화되는 결과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맹자가 내세우는 정치가 추구해야 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맹자가 왕도정치를 이야기 할 때, 근간은, 사민양생상사무감(使民養生喪死無憾)이다. 백성들로 하여금, 산 사람을 부양하고, 산 사람을 기르는 데 문제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은 사람을 전송하는 데에, 한스러움이 없게 하는 것, 이것이 왕도지시야(王道之始也), 왕도정치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또한 왕도 정치는 인정(仁政)이다. 인정은 물리적인 힘을 통해 백성을 굴복시키기보다는 백성들을 직접 정치의 대상으로 보면서, 백성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정치이다. 그 사랑의 순서가 맹자식으로 이야기하면 이른바 환과고독폐질자(鰥寡孤獨廢疾者). 홀아비, 과부, 고아, 홀로 사는 노인, 장애나 질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정치적인 혜택을 주어야 한다고 한다. 결국 맹자의 정치는 강자 위주로, 예를 들면 전쟁에 승리할 수 있는 강한 군대와 충분한 물자를 갖고 다른 나라를 침략해서 그 이익을 이런 사람들에게 돌리기보다는 직접 정치의 대상인 약자에게 인정을 먼저 베풀어야 한다고 접근한 것이다. 이것이 맹자가 패도를 반대하고 왕도를 주장하는 까닭이다. 맹자가 양혜왕의 국가를 이롭게 하기 위한 방도를 묻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어찌 이익을 말씀하시는가? 라고 되물은 이유는 결국 국가의 이익도, 왕의 이익도 아닌, 백성의 이익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나날이 이(利)가 행위의 중요한 동기가 되어가고 있는 오늘날에도, 그것이 가져올 여러 가지 문제점을 성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맹자의 반문은 여전히 유의미하다고 볼 수 있다.
후배 직원을 가족같이 사랑하라 살다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생생해지는 기억이 있게 마련이다. 내게는 1998년도가 그렇다. 사회 전체가 IMF에 휩싸였던 시기였다. 그해 6월 하나뿐인 아들이 갑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설상가상으로 10월 초에는 병원에서 암 진단을 받았고, 의사는 내게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내렸다. 1998년 말, 나는 병실에 누워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다시 저 눈을 밟아볼 수 있을까?’하는 상념에 잠기곤 했다. 죽음의 문턱에 서 본 사람은 누구나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 나 또한 그랬다. 그때 가장 간절했던 생각은 직장 생활에 대한 후회였다. 남들이 보기에는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어왔고, 일도 썩 잘해 내고 있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만이 아는 미진함이 남았던 것이다. 직장 생활은 내 인생 역사의 가장 중요한 페이지 중 하나였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하루도 빠짐없이 병실을 찾아 준 수많은 사람들, 특히 그중에서도 20년 넘게 몸담았던 당시 직장의 동료와 후배 직원들 덕택에 건강도 조금씩 회복되었다. 그들은 지금도 나에게 가족과 같은 사람들이다. 나는 현대자동차 역사상 최초의 일선 영업사원 출신 부사장이다. 발로 뛰는 사원에서부터 직원들을 관리하는 지점장이나 지역본부장으로 재직할 때까지, 나는 어려운 여건과 좋지 못한 상황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루곤 했다. 그래서인지 내게 성공의 비결을 묻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 그때마다 나는 서슴지 않고 이렇게 대답한다. “영업에서 성공하려면 고객을 내 자신처럼 생각하고, 인생에서 성공하려면 후배들을 가족처럼 사랑하라.” 2005년 부사장 직위를 마지막으로 정들었던 회사에서 명예롭게 은퇴했다. 그리고 지금은 새로운 길을 찾아 도전하고 있다. 대개 직장을 떠난 뒤에는 그 좋아 보이던 인간관계도 끝을 맺게 마련이지만 아직도 내게는 후배 직원들의 연락이 끊이지 않는다. 어쩌면 현직에 있을 때보다 왕래가 더욱 잦은 것처럼 느껴진다. 더 자주 안부를 묻고 술잔을 부딪치며, 얼싸안고 박치기를 하던 그 시절을 회상하곤 한다. 그들은 내게 늘 고맙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더 큰 사랑은 내가 받았다. 그들은 내게 인생의 의미와 진정한 행복을 일깨워 준 사람들이다. 그런 가족 같은 사람들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문수 님 | 전 현대자동차 부사장, 킹웨이인재개발그룹 원장 -《행복한동행》2008년 7월호 중에서
얼굴빛 언어예절 몸가짐에서 공손함을 제일로 친다. 남을 높이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태도로서, 마냥 굽실거리거나 꼿꼿한 것과는 다르다. 어릴 적 숱한 가르침과 배움 끝에 나온다. 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마음공부로 받쳐 주어야 유지된다. 튀거나 깨뜨리는 언행도 그 바탕에서 성금이 난다. 마음이 얼굴에 비쳐 드러나는 표정이 낯빛·얼굴빛인데, 말하지 않아도 이를 통해 사람 마음을 어느 정도 읽어낼 수 있다. 얼굴이 곧 마음의 거울인 셈이다. 굳이 도를 닦는 사람이 아니어도 제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는 이를 어른으로 친다. 살다보면 좋은 일, 궂은일이 겹치기 마련이고, 이를 제대로 건사하자면 자신을 무척 눌러야 하는 까닭이다. 이 덕목은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솔직함’과는 좀 차이가 난다. 솔직함은 자신과 남을 속이지 않는다는 점, 진실을 말한다는 점에서 큰 덕목이다. 하지만 이는 자신 아닌 남과 그 처지를 생각해야 하는 쪽에서는 걸림돌이 될 때가 있다. 자칫 ‘막말’로 발전하기도 한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는 말처럼 웃는 얼굴은 보는 이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 그러나 히죽거리거나 싱겁게 웃거나 하면 실없어지고, 웃음거리가 된다. 웃으면서 뺨치기, 억지 웃음, 거짓 웃음, 비웃음들은 부정적인 쪽이다. 풍자나 우스개는 상품으로 만들어 사고파는 산업 영역이 된 지도 오래다. 언제나 웃음 띤 낯빛으로 말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이를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여겨 경계하기도 한다. 좋은 얼굴도 얼굴빛도 때와 곳을 가려야 함을 일깨운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빈 병 가득했던 시절 연극배우가 늘 배고픈 건 아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보다 배고픈 날이 더 많은 건 사실이다. 십수 년 전 내가 가장 즐거워했던 자리는 삼겹살에 소주 또는 통닭에 생맥주가 있는 술자리였다. 몇 끼를 굶었건 얼마나 오래 연습을 했건 그런 술자리가 있으면 나는 흥분했고 어느새 행복해졌다. 지금까지도 몇몇 그때의 술자리들은 가슴 구석에 아련히 모셔져 있다. 제법 유명해진 요즘은 원 없이 그때처럼 먹을 수 있지만, 그때의 맛은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다. 언제인지 어떤 자리인지 생각도 나지 않지만 그날은 ‘따따블의 날’이었다. 삼겹살에 소주, 통닭에 생맥주가 이어지는 술자리였으니 말이다. 흥분된 만취 상태로 밤을 찢어 새벽을 맞이했고 첫차 뒷좌석에 실려 자취방에 들어왔다. 몇 시간이나 잤을까. 술은 못 깨고 겨우 잠만 깨 냄새나는 자취방을 나와 연습실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려는 순간, 차비가 없음을 확인하고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정신없이 동전을 찾기 시작했다. 삼십 여 분 후 손아귀에 들어온 돈은 오십 원. 그때 물가로 백 원이 부족했다. 걸어서 세 시간은 족히 걸리는 연습실, 작은 절망이 몰려왔다. 염치없이 옆집에서 빌릴 수도 없고 운전기사에게 사정하기도 쪽팔리고…. 평소 잔머리 잘 굴린다 소리 듣던 머리를 아무리 굴려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공연도 아니고 연습인데 뭘…. 원래 성실한 놈도 아니구, 에잇, 양말이나 빨자.’ 신발장 옆에는 스무 짝이 넘는 양말이 쌓여 있었다. 대야를 가져와 양말을 담으려는 순간 신발장 옆에 수북이 쌓인 빈 병들에 시선이 꽂혔다. ‘가만, 저게 얼마야?’ 삼십 병도 거뜬히 넘는 빈 병들을 세어 보니 거의 천 원에 육박했다. 차비가 문젠가, 담배까지 살 수 있었다. 하하. 갑자기 천하를 얻은 기분. 정류장에서 담배 한 개비를 아주 건방지게 태우고 보무당당히 버스에 올라탔다. 그 시절은 그렇게 늘 아슬아슬했고 오늘 벌어 내일을 버텨야 했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일치했으니, 한 끼 굶어 술이었고 동가식서가숙이었지만 늘 행복했고 신났다. 삼겹살에 소주, 통닭에 생맥주 한번 원 없이 먹어 본 적 없던 그 시절의 술자리. 그 잊을 수 없는 맛을 또다시 좋은 벗들과 느껴보고 싶다. 박철민 님 | 배우 -《행복한동행》2008년 6월호 중에서
그 시절 내게 용기를 준 사람 1974년의 봄은 유난히 추웠다. 겨울의 추운 여정을 끝내고 새싹을 틔우기에 여념이 없던 나무들에 따스한 봄빛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1.8평 남짓한 서대문구치소의 독방은 매우 추웠다. 성경책 이외에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볼 수 없고 누구도 만날 수 없는 좁은 공간에서 스며 나오는 한기와 외로움이 나를 더욱 오싹하게 만들었다.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분노가 그 스산함을 중화시켜 줄 뿐이었다. 재판을 받으러 다니는 육군본부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게 유일한 낙인 시절이었다. 두 달 정도 지났을 때 일반 죄수들과 합방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긴급조치 위반이라는 중죄인임을 표시하는 노란 표찰을 가슴에 달고 방안으로 들어서는 나를 바라보는 20여 명의 눈동자. 독재에 맞서 당당히 유인물을 만들어 뿌리던 나도 잔뜩 얼어 방안을 바로 보기가 어려웠다. 그때 “야 저 친구는 그냥 놔 줘.” 라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니 마음씨 좋게 생긴 남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어이, 여기가 네 자리야.” 서열이 있다는 감방 안에서 좀 괜찮은 자리가 배정되었다. “다 좋은 사람들이야. 단지 사회에서 잘 대접을 못 받아서 그렇지. 네가 진정한 운동권이라면 이들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품어야 해. 이 환경을 즐겨 봐. 그러면 좋은 경험이 될 거야.” 장물을 취급하다가 들어왔다는 ‘감방장’ 형님의 말은 사람들을 보는 나의 시각을 바꾸어 놓기에 충분했다. 어렵게 살아왔다고 자부했던 나도 그 사람들의 사연을 듣고 함께 생활하면서 가난은 정말 상대적인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금방 방안 식구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없는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의 순수함이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 하는 것을 배웠다. 나보다 9살이 많은 그 형님은 함께 있는 동안 내가 어려울 때마다 용기를 주었다. 먼저 출소한 내가 가끔 면회를 갔는데, 어느 크리스마스에 형님이 나를 찾아 왔다. 성탄절 가석방으로 나온 형님은 그 후 5년을 넉넉지 않았던 우리 집에서 함께 살다가 결혼했다. 최근 삶을 힘겹게 개척하면서 용기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 《무지개 가게》를 준비하면서 그 시절 내게 용기를 주었던 그분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분들이 여전히 내게 힘을 주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 한쪽이 든든해졌다. 이종수 님 | 사회연대은행 상임이사 -《행복한동행》2008년 6월호 중에서
여린 가지 / 도종환 가장 여린 가지가 가장 푸르다 둥치가 굵어지면 나무껍질은 딱딱해진다 몸집이 커질수록 움직임은 둔해지고 줄기는 나날이 경직되어 가는데 허공을 향해 제 스스로 뻗을 곳을 찾아야 하는 줄기 맨 끝 가지들은 한겨울에도 푸르다 (......) 해마다 꽃망울은 그 가지에 잡힌다 제 시 「여린 가지」의 일부분입니다. 나뭇가지를 잘 들여다보면 가지 맨 끝의 가늘고 여린 가지가 가장 싱싱합니다. 그곳이 가장 생명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움직이는 곳입니다. 꽃은 그 여린 가지 위에서 피어납니다. 잎들도 그렇습니다. 어린잎이 나무의 생명을 끌고 갑니다. 가장 여리고 가장 푸른 잎이 맨 위에서 나무의 성장을 이끌어 갑니다. 연둣빛 어린잎이 살아 있어야 나무도 살아 있는 것입니다. 연둣빛 어린잎이 밀고 올라간 만큼 나무는 성장한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도 그렇게 옵니다. 여린 가지처럼 싱싱하게 살아 있는 젊은 소년 소녀, 연둣빛 잎처럼 푸른 젊은이들이 변화의 맨 앞에 서 있을 때 새로운 시대는 오는 겁니다. 경직된 나무, 움직임이 둔해지고 껍질이 딱딱해지는 나무에는 새로운 생명이 깃들지 않습니다. 이미 몸집이 너무 커지고 스스로를 주체하기 힘든 고목의 둥치에는 새로운 꽃이 피지 않습니다.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정신으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가야 사회도 새롭게 성장하고 문화의 꽃이 핍니다. 후천개벽의 세상은 젊은 그들이 주인이 될 때 온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