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계시나요? 사람들은 보통 자신에 초점을 두고 행복을 추구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윤리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둘의 사고를 종합하는 입장도 있습니다. 나도 남도 이롭게 하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전자는 윤리적 이기주의라고 말할 수 있고, 후자는 공리주의와 의무론적인 입장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양자를 수용하면서 내가 남에게 베풀고 잘 하는 것이 결국은 나에게 이익이 된다고 하는 입장이 있습니다. 중국의 묵자가 대표적입니다. 묵자는 남을 사랑하는 이유를 결국은 내가 잘 되기 위한 전략이라고 말합니다. 그런가하면 내가 남에게 행위하는 것에 어떤 원칙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행복한 삶이란 자신이나 타인 모두가 똑같이 어떤 윤리적 원칙에 입각해서 성실하게 삶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사람들은 적절하게 훈련을 받으면 선을 발견할 수 있고, 이를 실천함으로써 보다 행복해질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스스로도 이러한 원칙에 따르는 삶을 죽을 때까지 실천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원칙주의자로서 행복관을 실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절대적인 선과 그에 따르는 원칙을 강조한 소크라테스에 반해 노자는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여 어떠한 일도 꾸미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 것을 강조합니다. 노자에게 있어 이러한 자연스러운 삶의 상징은 강한 것이 아니라 약한 것에 있습니다. 노자에 따르면 강한 것은 부러지기 쉽고 따라서 강한 것은 금방 죽어 없어집니다. 굳이 따지자면 노자는 강한 것을 상징하는 남성의 원리보다는 약한 것을 상징하는 여성원리에 입각한 삶과 정치가 오래갈 수 있으며, 이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보았습니다. 자연스러운 삶으로서 조화와 균형을 중요시한 노자는 행복한 삶의 근거지로 소규모 농촌에서의 삶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혼란스러운 세상에 대한 반응은 노자와 같이 무위자연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절대자와의 연관 속에서 자기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이를 통해 행복을 가꾸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기독교가 형성될 당시의 초기 기독교인은 언제 세상에 종말이 올지 모르는 긴박감 속에서 살았습니다. 이러한 종말의식이 신약성서의 배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 주님의 날이 밤에 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은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안하다. 평안하다’하고 말할 그 때에, 아기를 밴 여인에게 해산의 진통이 오는 것과 같이, 갑자기 멸망이 그들에게 닥칠 것이니,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 16-18) 위 내용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 편지의 결론을 보면, 주의 날이 임박했으니 깨어 정신 차리고 있으라는 교훈과 그 날이 오기 전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에게서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삶은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음으로서 현재 자신의 삶이 의미를 가지며, 그러한 의미가 있기에 현재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감수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와의 연관 속에서 보면 고통이 없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이 있기에 행복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행복에 관한 철학은 누구에 가깝습니까? 오늘,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적용되고, 의미를 갖는 행복철학의 원리들을 참고하여 나의 삶을 보다 행복하게 가꿔보는 것은 어떨까요? 서동은 <행복론의 철학적 탐구 中>
불가능에 도전하는 용기학교 서점가의 베스트셀러 코너는 수많은 자기 계발서들로 빽빽하다. 이 책들은 다양한 기법으로 사람들에게 조언을 해 주고 지침을 알려준다. 이제는 자기 계발서가 제시하는 수많은 지침과 법칙을 실행에 옮기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책을 통해 얻은 그 지침들을 실행에 옮기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영어의 알파벳이 ‘a’로 시작하는 이유는 ‘action(행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간적 삶의 존재 근거는 생각과 아이디어, 머리가 아니라, 단순한 실천이라도 진지하게 반복하는 우직한 손과 발에서 유래한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어리석은(愚) 노인(公)이 산(山)을 움직인다(移)는 뜻이다. 거대한 산을 움직이는 힘은 이리저리 머리 굴리는 사람이 아니라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과제 앞에서 결코 포기하지 않고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흙을 옮기는 사람에게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성공에는 ‘대로 법칙’과 ‘되고 법칙’이 존재한다. ‘꿈꾸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바라보는 대로’, ‘실천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생각과 꿈, 아이디어를 실천하는 데 특별한 비법이란 없다. 그냥 하면 되는 것이다. 실천을 방해하는 심리적ㆍ물리적 장애물, 다양한 난관과 역경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일단 한번 시도해 보는 것이다. ‘되고 법칙’은 ‘돈 없으면 돈 벌면 되고’, ‘하기 싫으면 다음에 하면 되고’, ‘실패하면 다시 하면 되고’라는 긍정적 사고이다. 바다를 건너기 전에 바다 건너에서 발생한 문제를 미리 고민할 필요는 없다. 과거는 흘러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현재라는 선물(present)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길밖에 없다. 인간은 해 본 일을 후회하기보다 해 보지 않은 일을 후회한다고 한다. 해 보지 않고 후회할 바에야 해 보고 후회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시도하다 실패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시도하다 실패하고 나서 다시 시도하지 않고 포기하는 것이다. 도전을 친구로, 용기를 배우자로 삼고 가슴 뛰는 삶의 여정에 빠져 보지 않겠는가? 그 다음 문제는 그때 고민해도 늦지 않다. 『들이 대학교(大學校) 저질러 학과(學科) 무대뽀 전공(專攻)』, 걸림돌을 디딤돌로 바꾸는 ‘용기학교’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유영만 님 | 한양대 교육공학과 교수《용기》 저자 -《행복한동행》2008년 4월호 중에서
열역학적 관점에서 무질서도를 엔트로피(entropy)라고 하고, 질서도를 네그엔트로피(negentropy)라고 한다. 인간이 어떤 물질을 모아 물체를 만들어내는 것은 네그엔트로피를 창출하고 정보를 만드는 것이고, 그것들이 오랜 세월을 통해 자연상태가 되어 무질서해지는 것은 엔트로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열역학의 법칙이다. 인간의 문화활동은 그런 의미에서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이다. 죽음을 극복하는 생명의 과정. 자연으로 돌아가게 되는 상태,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다. 예를 들어 어떤 행성에 우주선을 내려 사진을 찍었는데 거기에 대리석으로 된 조각 작품이 있다. 자연 상태에서 물질이 조각 작품의 형태를 이룰 확률은 적다. 그럴 때 우리는 그것이 자연이 아니라 어떤 존재가 만들었다는 것을 예상한다. 저것은 일종의 정보 곧 네그엔트로피라고. 그런 방식으로 인간이 정보를 생산한다는 것은 죽음의 충동을 극복하고 위로 올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엔트로피가 예술에서는 미적 정보에 해당한다. 예술 작품은 기본적으로 자연의 산물이 아닌 인간이 만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질서도만 있게 되면 예술작품은 매우 지루해지므로 거기에 약간의 무질서도를 이루어 미적 정보를 크게 만든다. 예를 들어 서예를 할 때 정자체를 쓰게 되면 금방 알아볼 있다. 의미 정보가 크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글자를 거의 알아보기 힘든 해서체는 미적정보가 더 커진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해서가 정서보다 예술인 이유는 거기에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서예의 서체들도 엔트로피와 네그엔트로피의 관계가 다 다르다. 앙리 미쇼의 서예 비슷한 무늬는 글자가 아니다. 언뜻 보면 서예처럼 보이지만 그런 건 그냥 엔트로피 상태이다. 미적 정보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상태인 것이다. 예측불가능성은 이제 현대예술의 코드가 되었다. 난해한 현대음악, 난해한 현대시.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는 17개 국어를 사용한 다차원적이고 복잡한 구성으로 제대로 읽을 수도 없다. 컴퓨터로 생성한 것과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생성해낸 것을 구별할 수 없는 이 상황. 예술에 대한 관념이 변하고 있다. 현대에서 엔트로피가 강해지고, 그만큼 예술 자체의 엔트로피도 강해진 것이다. 질서와 무질서의 기묘한 결합, 엔트로피와 네그엔트로피의 프로그래밍이 예술이 되는 시대. 컴퓨터 아트의 시대가 도래했다. 진중권 <생성과 충돌의 디지털 미학: 컴퓨터 아트> 제1강 컴퓨터 아트의 등장
Board 추천글 2008.04.09 바람의종 R 19763
에리히 프롬은 7~80년대의 미국 사회를 목도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태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기술의 발전으로 더 풍요롭게 살게 된 사람들이 왜 그 여유를 누리지 않고 알콜 중독이나 마약 중독에 빠지는지, 왜 자기에게 주어진 자유에서 도피해 파괴적으로 변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책에 담았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을 둘로 나눈다. 하나는 소유하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하는 삶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어떤 물건을 자기의 것으로 하고자 꿈꾼다. 어떤 물건을 끊임없이 소비하고 자신의 것으로 하는 과정에서 기쁨과 행복을 느끼고, 남들이 가진 물건을 자신이 갖지 못하면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유행에 의해 계속 욕구를 만들어내고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는 소유 지배 형태에 입각한 삶의 방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것, 그것이 에리히 프롬의 문제의식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은 끊임없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하나를 가지면 또 하나를 갖고 싶고, 더 좋은 것이 나오면 광고를 통해 다시 또 새로운 욕구를 생성해내는 악순환 속에서 결국은 만족할 수 없는 상태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문화를 서구문명이 오래 전부터 세상을 소유양식에 입각해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동양의 시인인 바쇼가 “울타리 곁에 냉이 꽃이 피어있는 것이 보이누나!”라고 있는 그대로의 꽃을 관조하는 것과 달리, 서양 시인인 테니슨이 “꽃을 뿌리 채로 손 안에 들고 있다”라며 읊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서구문명은 대상을 소유함으로써 이해하려하는 접근을 고수해왔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더 좋은 미래, 더 많이 가질 것에 대한 기대 때문에 지금 여기를 살지 못하고 과거와 미래에 집착하는 소유의 삶은, 사람이 실제로 자신이 지배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인 현재를 놓치고 만다. 그러나 존재적 실존양식은 인스턴트화된 소모적 일회성의 쾌락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를 통해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오는 존재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무엇을 소유함으로써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를 생각할 때, 존재적인 삶은 현재를 살며 삶 자체를 긍정할 수 있게 된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충족되지 않는 욕망에서 오는 불안으로부터 벗어나 진정 자유로워질 수 있다. 서동은 <소유냐 존재냐-자본주의 문화비판> 제4강 소유냐 존재냐
사람들은 사랑의 기쁨을 구름 위를 걷는 기분에 비유하기도 한다. 정말로 구름 위를 걸어본 사람은 없을테지만 사랑은 그만큼 사람을 행복하게 해준다는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과연 사랑을 할 때 우리는 시종일관 달콤하기만 했던가. 사랑을 주관하는 신 에로스. 그의 탄생신화에서 사랑의 본질을 찾아보자. 플라톤의『향연』에서 소크라테스의 스승으로 추론되는 여사제 디오티마(Diotima)가 들려주는 사랑 이야기에 귀기울여보자. 아름다움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생일 날, 많은 신들이 그녀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올림포스 신궁으로 모여들었다. 당연히 첫번째 타자는 풍요의 신 포로스(Poros). 그는 신들이 먹는 음식인 암브로시아(ambrosia)와 넥타르(nektar)를 충분히 배불리 먹고 한쪽에 가서 일찍 잠들었다. 그때 뒤늦게 결핍의 여신 페니아(Penia)가 나타났다. 이미 신궁에는 음식이 거의 남지 않은 상태였다. 페니아 여신은 너무 속상해 하면서 조금이라도 더 남은 음식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둘러보다 여유롭게 잠든 배부른 포로스 신을 보게 되었다. 페니아 여신은 분하고 괴씸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언제나 포로스 신과 함께라면 굶주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만 잠든 그를 범해버렸다. 이렇게 태어난 아기가 사랑의 신 에로스다. 그래서 사랑은 언제나 채워져 있는 듯 하면서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사랑이 이렇게 양면적 모습을 갖는 것은 에로스가 부모의 성질을 그대로 물러받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언제나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정말 구름 위를 거닐 듯한 충만감으로 언제나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을 하면서도 언제나 외롭다. 사랑이 잔혹한 건 어쩌면 에로스 부모 탓으로 돌려야 할지도. 에로스 신의 탄생 신화는 모두 일곱 가지 버전이 있다. 그렇다고 에로스가 일곱 번 태어났다는 것은 아니다. 가장 많은 학자들이 정설로 인정하는 버전은 전령신 헤르메스(Hermes)와 아름다움의 여신이자 사랑의 여신이었던 아프로디테의 결합에 의해 에로스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로스를 사랑(어머니의 속성)의 메신저(아버지의 속성)라고 부른다. 에로스 탄생과 관련한 또 다른 주장으로는 에로스를 아레스와 아프로디테의 아들로 보는 것이다. 아프로디테가 아레스와 사랑을 나눌 때에는 이미 헤파이스토스와 결혼한 상태였으므로 그들은 불륜관계였다. 오랜 시간 상당히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던 그들은 그들의 불안한 심정이 잘 반영된 두 아들 공포의 신(Phobos)과 근심의 신(Demos)을 낳은 후, 딸인 조화의 여신(Harmonia)을 낳았다. 그때는 그들의 사랑이 공포와 근심 속에서 성숙해 조화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이 가장 마지막에 낳은 자식이 바로 에로스. 사랑은 이렇게 수많은 고통을 겪은 두 사람이 조화를 이뤄 완성하는 것 아닐까? 김길수 <그리스 신화 다시보기> 제10강 사랑의 신화 1- 에로스의 탄생
Board 추천글 2008.03.27 바람의종 R 274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