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외수의 감성사전 콩나물 음지에서 물만 먹고 자란다. 거적대기 하나를 이불 삼아 맨살을 부비며 오손도손 서민으로 살아간다. 머리가 모두 샛노란 것은 햇빛을 간절히 그리워 했기 때문이다. 저마다 가슴 안에 샛노란 해를 하나씩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해파리 바다의 도신선사다. 떠도는 일에도 걸리지 않고 머무르는 일에도 걸리지 않는다. 일엽편주지만 무심지경이다. 파도가 치면 파도에 흔들리고 바람이 불면 바람에 흔들린다. 마음을 비워 온 육신이 투명하고 천지를 비워 온 바다가 투명하다. 물보라 포세이돈의 백마. 바다의 수염. 비탄의 분말 이슬 새벽에 내린다. 만물이 깊이 잠든 안식의 새벽에 소리 없이 내려와 꿈을 적신다. 신의 서늘한 입김이다. 생명의 속삭임이다. 사물들의 표면에 닿아 물방울이 되고 물방울은 땅에 스미어 옹달샘을 만든다. 옹달샘은 그 흐름을 다하여 바다에 다다른다. 이슬은 바다의 투명한 미립자다. 모든 생명의 기원이다. 앵두 유년 시절 누나의 가시 찔린 손 끝에 맺혀 있던 선홍빛 피 한방울. 쓰레기 인간이 만들어 놓은 모든 가공물의 말로. 또는 지구가 바라보는 인간. 텔레비전 수다스러운 가전제품. 시간과 채널만 조정해 놓으면 혼자서도 쉬지 않고 수다를 늘어 놓는다. 언론매체의 중심적인 위치에 놓여 있으므로 독재국가에서는 권력의 꼭두각시가 되어 우민화 정책의 선봉이 되기도 한다. 온 국민의 눈이며 온 국민의 입이지만 꼭두각시가 되면 온 국민을 벙어리로 만들거나 장님으로 만드는 일에 주력하기도 한다. 때로는 자기도취에 빠져서 시청자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프로그램으로 아까운 전력을 낭비하게도 하고 때로는 가슴이 뭉클해지는 프로그램으로 인생의 참다운 의미를 생각케 만들어 주기도 한다. 외래문화의 쓰레기를 유입하는 창구가 되기도 하고 전통문화의 진수를 찾아내는 길잡이가 되기도 한다. 광범위한 정보도 내장되어 있고 다양한 상품광고도 내장되어 있다. 현대인들은 누구나 텔레비젼에 조금씩은 중독되어 있다고 하지만 심한 경우에는 이성을 잃어버리는 사태까지 일어난다. 텔레비젼에서 얻은 정보라면 무조건 신뢰해 버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텔레비젼에 붙어 있는 동안 자신의 금쪽 같은 시간이 엄청난 양으로 폐기처분 되고 있음을 허망해하는 시청자는 별로 없는 것 같다.
Board 추천글 2025.02.05 風文 R 23
손님맞이 - 이해인 아침에 까치가 울면 “오늘은 반가운 손님이 오시려나 보지?”하며 빙긋 웃던 가족들의 모습은 늘 따뜻한 정과 그리움의 추억으로 떠오른다. 집에 손님이 온다는 날이면 어떤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공연히 마음이 들뜨고 즐거웠던 어린 시절. 가족들이 집 안을 평소보다 더 깨끗이 하고, 고운 옷을 입으며, 바른 인사법과 공손한 예절을 익히며 준비하는 그날이 내겐 늘 설레임 가득한 축제로 느껴지곤 했다. 그러나 우리집에 다니러 온 친척, 이웃 손님들이 잠시 머물다 작별의 인사를 하고 떠날 때쯤이면 나는 너무 아쉽고 허전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씁쓸히 서성이던 기억이 새롭다. 내가 유난히 까치가 많고 소나무가 많은 이곳 부산 광안리 산기슭의 성 베네딕도수녀원으로 `시집`와서 산 지도 벌써 30년이 되었다. 워낙 식구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 수녀원엔 거의 하루도 손님이 없는 날이 없다. 손님은 귀찮은 존재가 아니라 귀한 선물임을 늘 강조하는 베네딕도 성인은 그의 규칙서에서 `찾아오는 모든 손님을 그리스도처럼 대하고` `손님이 오면 사랑의 봉사로써 마중 나가, 함께 기도하며 평화의 인사를 하라`고 강조한다. 우리 동산의 꽃과 나무들만큼이나 우리 손님들의 모습도 다양하다. 수녀가 되고 싶어 찾아오는 아가씨들, 수녀가 된 딸들을 만나러 오는 가족과 친지들. 여행길에 가벼운 마음으로 들렀다 가거나 강의를 해주러 오는 선생님들,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이 갖고 싶어 며칠 묵어 가는 성직자와 수도자들, 도움의 손길이 필요해서 달려오는 몸과 마음이 아프고 지친 사람들 등등. 특히 여러 날 묵어 가는 경우엔 시설이 불편하다고 불평할 수 있는 자그만 객실인데도 손님들은 대체로 고마워하며, 식탁에 올리는 반찬도 극히 단순 소박한 것이지만 밭에서 직접 가꾼 것이기에 더 귀하다며 맛있게 드는 모습을 보면 고맙고 기쁘다. 처음엔 서로 낯설고 서먹한 사이였던 손님들끼리도 이곳에 머무는 동안 서로 좋은 친구가 되어 연락을 주고받는 걸 보면 흐뭇한 마음이다. 손님은 우리의 창문이 되어 준다. 생활이 비교적 단순한 우리는 손님들의 이야기를 통해 잠시 잊고 있던 세상의 일들을 더 구체적으로 보고 느끼게 된다. 손님은 우리의 좋은 친구가 되어 준다. 우리의 좋은 점을 칭찬하고 격려해 주는 지지자나 힘든 때의 위로자가 되기도 하지만,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실수하는 부분이나 그 밖에 개선해야 할 사항들에 대해선 예리한 지적도 서슴지 않는 고마운 충고자이다. 그러므로 손님은 우리가 게으르거나 방심하며 살지 않고 조금은 긴장하며 깨어 살도록 도와 주는 역할도 톡톡히 하는 셈이다. 손님맞이야말로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가 치르어야 할 아름다운 사람의 임무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예를 갖추어 손님을 맞는 일이 때론 힘들고 번거롭게 여겨질 때도 있겠지만, 손님의 발걸음이 뜸한 집 안은 얼마나 쓸쓸하고 삭막할 것인가. 우정과 사랑이 피어나는 만남의 관계, 인정이 오가는 이웃과 이웃 사이엔 항상 손님이 있게 마련이다. 손님들의 평범한 인사말과 웃음, 유머, 재치, 그리고 그들의 기쁨, 슬픔, 괴로움, 갈등, 때로는 본의 아니게 우리를 성가시고 힘들게 하는 어떤 부담까지도 깊이 끌어안고 사랑하려는 자세로 우리는 오늘도 손님을 맞는다. 수녀원의 종소리를 따라 그들과 함께 기도하며 마음을 나누는 좋은 친구, 진실한 이웃이 되려고 한다. 나도 매일매일을 반가운 손님 대하듯이 환히 열린 마음과 시선으로 맞아들여야겠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귀한 손님을 맞듯이 단정하고도 다정하게 예를 갖추고 맞아들여야겠다. 그리하면 나의 삶은 따분하고 지루한 일상이 아니라 늘상 싱싱한 기쁨과 활력이 넘쳐나는 초록빛 축제가 될 것이다.
Board 삶 속 글 2025.02.05 風文 R 15
불규칙용언 (6) ‘(제품을) 만들다’는 ‘만드는(만들+는), 만듭니다(만들+ㅂ니다), 만드세요(만들+세요), 만들(만들+ㄹ)’처럼 ‘ㄴ, ㅂ, ㅅ’ 등으로 시작하는 어미 앞에서는 ‘ㄹ’이 탈락한다. ‘살다, 날다, 녹슬다, 거칠다, 말다’ 등등 어간이 ‘ㄹ’ 받침으로 끝나는 용언은 모두 같은 방식으로 활용하므로 학교문법에서는 불규칙용언에서 제외하고 있지만, 어간은 본디 변하는 것이 아닌데 어간의 형태가 변했으니,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면 ‘리을불규칙용언’이라 할 수 있다. 실제 언어생활에서는 잘못된 활용형을 쓰는 경우가 많다. 동사 ‘날다’에 어미 ‘는’이 결합하면 ‘나는’이 된다. ‘(하늘을) *날으는 비행기’가 아니라 ‘(하늘을) 나는 비행기’가 맞다는 뜻이다. 형용사 ‘녹슬다’에 어미 ‘ㄴ’이 결합하면 ‘녹슨’이 된다. 따라서 ‘*녹슬은 기찻길’이 아닌 ‘녹슨 기찻길’로 써야 한다. 단, ‘말다’는 ‘(걱정하지) 마/마라/마요’와 같이 써도 되고 ‘(걱정하지) 말아/말아라/말아요’와 같이 써도 된다. ‘ㄹ’ 탈락 여부를 임의로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명사형어미 ‘-ㅁ’ 앞에서는 ‘ㄹ’이 줄지 않는다. 따라서 ‘*책상을 만듬, *담배를 안 팜, *아파트에 삼’과 같이 쓰면 틀리고 ‘책상을 만듦(만들+ㅁ), 담배를 안 팖(팔+ㅁ), 아파트에 삶(살+ㅁ)’과 같이 써야 맞다. ‘하다’는 ‘하여(하+어), 하였다(하+었다)’로 활용한다. 어미 ‘-어’가 ‘-여’로 바뀌는 것이어서 ‘하다’를 ‘여불규칙용언’으로 분류한다. 이런 활용은 ‘하다’ 또는 ‘하다’로 끝나는 말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다. 따라서 ‘*(사람)이였다, *(꽃이) 피여서’와 같이 쓰면 안 된다. ‘(사람)이었다, (꽃이) 피어서’와 같이 써야 한다.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Board 말글 2025.02.05 風文 R 6
말과 느낌 같은 말이라도 이렇게 말해 다르고 저렇게 말해 다르다는 ‘아 해 다르고 어 해 다르다’라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우리말의 어휘에는 비슷한 뜻을 지니고 있더라도 자음이나 모음의 차이로 인해 미묘한 어감의 차이가 있는 어휘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푸르다’라는 형용사에는 어감이 다른 다양한 ‘푸르다’ 계열의 형용사들이 있는데, ‘푸르다’를 강조한 ‘푸르르다’가 있고 ‘산뜻하지 않게 푸르다’는 뜻의 ‘푸르퉁퉁하다’, ‘곱지도 짙지도 않게 푸르다’는 뜻의 ‘푸르께하다’, ‘조금 푸르다’는 뜻의 ‘푸르스름하다’ 등의 말이 있다. ‘푸르다’에서 나온 ‘푸르스름하다’에도 역시 어감이 다른 형용사들이 많이 있는데, ‘약간 푸르스름하다’는 뜻의 ‘푸르레하다’에서부터 ‘엷게 푸르스름하다’는 뜻의 ‘푸르무레하다’, ‘고르지 않게 푸르스름하다’는 뜻의 ‘푸르뎅뎅하다’, ‘푸르죽죽하다’ 등의 형용사들이 있다. 이처럼 우리말에는 어감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어휘들이 존재하므로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각각의 상황과 어감에 맞는 어휘들을 선택해 사용해야 한다. 기사문이나 판결문, 논문과 같은 글에서는 객관적이고 느낌이 없는 어휘들을 주로 사용하는 반면 시나 수필과 같은 문학적인 글에서는 작가의 느낌을 충분히 담아낼 수 있는 어휘들을 주로 사용한다. 그래서 전자에서는 ‘높다’ ‘낮다’ ‘크다’ ‘작다’ ‘얕다’ ‘깊다’ ‘멀다’ ‘두껍다’ ‘가득하다’ 등의 어휘들을 주로 사용하는 데 비해 후자에서는 ‘높다랗다’ ‘나지막하다’ ‘커다랗다’ ‘자그맣다’ ‘야트막하다’ ‘깊숙하다’ ‘멀찍하다’ ‘두툼하다’ ‘그득하다’ 등의 어휘들을 많이 사용한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Board 말글 2025.02.05 風文 R 13
이외수의 감성사전 우박 구름의 진신사리. 거미 노스님 하나가 허공에다 투명한 그늘을 걸어 놓고 하루종일 무념무상에 빠져 있다. 해거름이 되어도 그물에는 하루살이 한 마리 걸리지 않고 새들만 흥건히 노을 속으로 떠내려가고 있다. 한 마리 거미만 허공에다 일 점을 찍고 온 우주를 삼키고 있다. 달맞이꽃 밤에만 핀다. 어둠 속에 흩어져 있는 달의 비늘이다. 그리움의 편린이다. 눈 뜨는 사랑이다. 수절 같은 슬픔이다. 파리 인간들에게 가장 싸구려 목숨을 가진 생명체로 취급되고 있는 곤충. 신으로부터 장티푸스, 콜레라, 아메바, 이질 등의 전염성 병원체를 인간들에게 공급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곤충. 여름에 많이 발생한다. 주무대는 주택가의 쓰레기 처리장. 해변의 어물 건조장. 양돈양계장. 재래식 변소. 두엄더미. 동물의 시체 등이 있는 장소다. 잡식성이며 태고 이래로 인간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함께 나누는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온 곤충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조상을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한 뱀보다도 파리를 더 증오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뱀을 죽이는 도구보다 파리를 죽이는 도구가 더 많이 발달해 있음이 이를 입증한다. 파리는 비행하는 시간과 음식을 탐닉하는 시간과 명상하는 시간을 빼고 나면 오직 간구의 시간만이 존재한다. 끊임없이 두손을 맞부비며 자신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임무에 대해 인간들의 오해가 없기를 간절히 비는 것이 생활의 전부로 되어 있다. 그러나 대분분의 인간들은 아직 원수도 사랑할 수 없으며 파리도 사랑할 수 없는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파리는 부패의 전령이다. 이 세상 만물들은 반드시 부패하고 거기에서 파리는 태어난다. 이 세상 만물들이 아무것도 썩지 않으면 하나님은 파리를 만들어 내지 않았을 것이다. 파리는 부패를 촉진하고 부패는 또 다른 생명의 탄생을 촉진한다. 인간에게 불필요한 존재가 지구에게도 불필요한 존재는 아니다. 성냥개비 본디는 한 그루 나무였다. 지금은 전신이 억만 갈래로 쪼개져 전생의 업보를 다 털었다. 마지막 희디흰 뼈 하나를 모두 태우고 적멸로 돌아갈 때까지 충혈된 눈빛으로 암송하는 나무관세음보살. 하루살이 하루만에 한 평생을 사는 벌레. 지렁이 지하의 우울한 방랑자. 지상으로 나오면 체액이 말라 질식사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지상의 여러가지 동물들이 지렁이를 즐겨 먹는다. 공중을 나는 새들도 지렁이를 즐겨 먹고 물 속을 헤엄치는 고기들도 지렁이를 즐겨 먹는다. 땅 거죽을 기어다니는 개미들도 지렁이를 즐겨 먹고 땅 속을 기어다니는 두더쥐도 지렁이를 즐겨 먹는다. 그러나 지렁이는 절대로 다른 동물들을 공격하지 않는다. 아무런 무기도 휴대하고 다니지 않는다. 이빨도 없고 발톱도 없고 독침도 없다. 완벽한 비폭력주의자다. 징그러움과 꿈틀거림이 무기라지만 그것으로는 적에게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먹다가 반만 남겨 놓으면 다시 한 마리의 완벽한 지렁이로 복원된다. 암수 양성을 모두 한 몸에 지니고 있으며 길이가 같은 지렁이끼리 배우자로 삼아 서로 자세를 엇바꾸어 사랑을 나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렁이에게 대지의 창조자라는 찬사를 보낸 바가 있는데 이는 지렁이가 박토를 옥토로 바꾸어 놓는 토양의 마술사이기 때문이다. 지렁이 한 마리가 일생 동안 토해내는 흙의 양은 수만 톤에 이르며 아무리 척박한 산성토양도 기름진 알카리성 토양으로 변모된다. 만약 하나님이 지렁이를 이 세상에 보내시지 않았다면 지구가 오늘날 이토록 아름다운 초록별로 존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막 바람의 무덤.
Board 추천글 2025.01.31 風文 R 23
헝겊 주머니 - 이해인 평소에 집 안에서도 늘 헝겊 주머니나 헝겊 가방을 즐겨 들고 다니는 나에게 며칠 전에 바느질 솜씨가 매우 좋으신 팔순의 선배 수녀님 한 분이 작은 크기의 비단 주머니 한 개를 들고 오셔서 “이것 어때요? 여기에 무엇을 담든지 마음대로 하시고, 혹시 마음에 안 드시면 내게 다시 주세요”하셨다. 수녀님은 전에도 몇 번 색색의 자투리 비단 헝겊으로 앙징스런 복주머니들을 만들고 정성껏 복이라는 글자까지 새겨 주었는데, 나는 그것을 꽃이 귀한 계절에 수녀원을 방문하는 외국 손님들에게 작은 기념으로 가슴에 달아 드리기도 했었다. 검은 바탕에 국과.매화.단풍무늬가 그려져 있는 고운 비단주머니를 만들어 주신 수녀님의 정성도 고맙고, 주머니도 마음에 들어서 나는 어린 시절에 했듯이 그 주머니를 며칠간 베개 옆에 두고 잤다. 문득 어린 시절 어머니가 만들어 주시던 여러 가지 노리개와 한복을 입을 때 달아 주시던 예쁜 주머니. 그 외에도 쓰임새에 따라 솜씨를 발휘하신 신주머니, 책가방, 성당에 들고 다니던 미사보 주머니 등이 생각난다. 특히 고운 꽃이나 나비, 새들을 수놓고 튼튼한 안감을 대어 만들어 주시던 헝겊 책가방은 하나도 보관 못한 것이 후회될 만큼 그리운 추억으로 떠오른다. 상점에서 산 고급스런 책가방이나 주머니들을 들고 다니는 요즘의 아이들을 보면 정겹고 소박한 헝겊 책가방을 그토록 좋아하고 열심히 들고 다니던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의 내 모습이 생각나곤 한다. 학교에 다녀오면 나는 얼른 가방을 열어 숙제부터 해놓고는 다음날 수업에 가져갈 교과서와 공책을 정성껏 챙겨 넣고, 동무들이 좋아할 만한 색종이나 인형옷에 필요한 자투리 헝겊들을 골라 넣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책과 도시락, 온갖 잡동사니로 무거운 가방도 내겐 늘 희망과 기쁨이 가득한 보물주머니로 여겨졌다. 밖에서 뛰어놀기를 좋아하는 동생에 비해 나는 늘 책상 앞에 붙어 앉아 가방 정리하는 것을 즐겼으므로 나의 별명은 `새침데기` `책벌레` 또는 `가방 싸는 아이`였다. 요즘도 가끔 헝겊 주머니나 가방이 눈에 띄면 그냥 지나치질 못하고 한참 서서 구경을 하거나 꼭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당장은 필요 없더라도 일단 사놓고 보는 버릇을 버리지 못한다. 퍽 오래 전 내가 필리핀에 있을 때, 한번은 시장에 갔다가 햐얀 푸대자루 몇 개를 얻게 되어 함께 공부하던 언니 수녀님과 같이 그것을 이용해 가방을 만들고 우리가 바닷가에서 주운 조개껍질들로 장식을 하며 즐거워하던 적도 있다. 푸른 작업복을 입고 외출할 때마다 그 가방을 들고 다니면 절로 파도소리가 나는 듯 낭만적으로 느껴지곤 했었다. 더 세련되고 우아한 가죽 가방을 구해 줄 테니 멀리 외출할 때만이라도 구질구질한 그 헝겊 가방은 좀 그만 들고 다니라고 옆에서 핀잔을 주거나 말려도 나는 굳이 헝겊 가방을 들고 다니길 좋아한다. 그래서 멀리 여행을 갈 때도 큰 헝겊 가방안에 여러 개의 작은 주머니들을 준비해 두었다가 기도서, 수첩과 볼펜, 세면도구, 속옷과 손수건 등을 분류해서 넣어 두면 찾기도 쉽고 무척 편리하다. 수도자의 신분으로 평생을 흰색, 검은색, 회색의 유니폼만 입다 보니 가방 속의 소지품 역시 화사한 빛깔과는 거리가 먼 우중충하고 검박한 것들뿐이지만 그 사이에서 잔잔한 꽃무늬나 별무늬의 작은 주머니들은 내게 늘 리본을 단 어여쁜 소녀처럼 다정한 웃음과 기쁨을 안겨 준다. 지난해 어느날은 불우이웃돕기 바자회에서 주머니가 세개 달린 갸름한 모양의 편지꽂이를 사다가 방에 걸어 두었는데, 나와 늘 가깝게 지내는 동료 수녀가 잠시 내 방에 들어왔다가 이걸 보더니 주머니 위에 살짝 얹혀 있는 리본 세 개를 내 의사도 묻지 않고 모조리 가위로 떼어내는 것이었다. 내가 말리는데도 그는 리본이 없어야 더 깨끗하고 보기가 좋다고 했다. 나는 사실 연보라색 바탕에 진보라색 작은 리본을 달아 놓은 것이 예뻐 보여서 구입한 것인데-지금도 리본이 싹둑 잘려 밋밋한 모양이 되어 버린 그 편지꽂이를 보면 웃음이 절로 나고, 별것도 아닌 일로 끝까지 내 뜻을 우기지 못하고 리본을 쓰레기통에 내버리게 한 것이 매우 아까운 생각이 든다. 요즘도 매일 침방이 있는 윗집에서 일터가 있는 아랫집으로 푸른색이나 회색 헝겊 가방을 들고 왔다갔다하는 나에게 어떤 이들은 “늘 무엇을 주섬주섬 담고 나누어 주는 그 요술주머니 또 들고 나가는군요”하고 놀리기도 한다. 나는 “그럼요, 말씀만 하세요. 이 안엔 없는 것이 없으니까요”라고 대답하면서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분류해서 넣은 두는 자료실도 되고, 전해야 할 메모, 편지 그리고 사랑의 심부름거리로, 가끔은 작은 선물방이 되기도 하는 나의 기쁨 주머니를 흔들어 보인다. 헝겊 주머니나 헝겊 가방은 나의 오랜된 친구처럼 편안하고 만만해서 좋다. 때가 묻으면 언제라도 쉽게 빨아서 다시 쓸 수 있고, 매우 고급스런 재료로 만든 것일지라도 누가 그것을 필요로 할 땐 크게 아까워하지 않고 선뜻 내어 줄 수 있어서 좋다. 또 조금은 욕심을 내서 이것저것 여러 종류의 물건을 가지고 사는 얼마쯤의 사치를 누리더라도 이로 인해 비난받을까 근심하지 않을 수 있는 내 나름대로의 수수한 멋과 여유를 즐기게 해주어서 좋다. 할 수만 있다면 나도 나의 가까운 이웃과 친지들에게 부담 없이 편안하고 수수한 모습의 헝겊 주머니 같은 존재가 될 수 있길 바라며 혼자서 가만히 웃어본다.
‘행여나’와 ‘혹시나’ 낱말의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는 제대로 된 언어생활을 할 수 없다는 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낱말의 정확한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생각이 다를 수 있다. 어떤 낱말의 정확한 뜻을 따질 때 해당 낱말의 원 뜻을 중시할 수도 있지만, 현재 통용되는 현실 의미를 중시할 수도 있다. 치료에 (행여나, 혹시나) 도움이 될까 하여 이 약을 보낸다. 괄호 안 두 낱말 중 무엇을 써야 할까. 두 낱말의 기원이 ‘幸여나’와 ‘或是나’임을 의식하는 사람이라면, ‘행여나’든 ‘혹시나’든 별 차이가 없다는 말에 거부감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어떤 낱말을 쓰든 틀린 건 아니니 그 차이를 보란 듯 설명하는 건 쉽지 않다. 그러나 다음 예에서는 이들의 논리가 분명해질 것이다. (행여나, 혹시나) 내가 잠이 들거든 바로 깨워라. (행여나, 혹시나) 무슨 사고라도 생겼는지 걱정이 되었다. ‘행여나’의 행(幸)에는 행복과 행운의 의미가 있는데, 이 말을 ‘잠이 들지 않기를 바라지만 잠이 든 상황’과 ‘사고가 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사고가 난 상황’을 가정하는 데 쓸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국어사전은 이들의 편이 아니다. 그들은 행여나 늦을세라 서둘러 출발했다(표준국어대사전). 어머니는 자식들이 행여나 다칠세라 늘 마음을 졸이셨다(고려대한국어대사전). 국어사전 편찬자는 언어의 변화를 경계하면서도 언어의 변화 추이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러니 사전의 풀이가 고정될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이런 설명이 덧붙기도 한다. “‘혹시나’와 ‘행여나’는 대체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데 동일하게 쓰이지만, ‘행여나’의 경우는 ‘바라건대’라는 화자나 주체의 바람이라는 뜻이 덧대어 있다”(고려대한국어대사전). 최경봉 원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Board 말글 2025.01.31 風文 R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