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L'Etranger:1942) - 카뮈 해설 카뮈의 작품은 놀랍고도 야릇한 이야기를 이루고 있는데 그 속에는 심오한 사상이 들어 있다. 카뮈 문학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부조리'와 '반항'의 사상이다. 부조리 반항이란 무엇인가? 카뮈는 인간 존재를 모순으로 보고 있다. 인생은 모순된 두 가지 기본 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죽음에 대한 절망과 삶의 환희', '고독과 사랑', '악과 선'으로 대립되어 있다고 볼 수 있으며 또 다른 상징적인 면으로 본다면 '암흑과 광명', '질병과 건강', '겨울과 여름', '얼음과 불' 그런 것으로 대립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졸고 있는 의식이 깨어나는 과정 그리고 깨어나는 의식이 불가피하게 허망한 모순에 부딪쳐 부조리를 깨닫게 되는 귀결을 보여 주는 것이 "이방인"이다. 모순에 봉착할 때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이성을 가진 존재인 인간의 당연한 욕구일 것이다. 카뮈는 부조리를 인간으로서 벗어날 수 없는 모순으로 보고 있다. 그는 부조리 해소의 희망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카뮈의 부조리는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 인생이 그토록 허망하고 반복적인 것이라면 차라리 죽어 버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 혹은 인생의 뜻이고 뭐고 다 귀찮고 괴로우니 인생에 대한 물음은 덮어 두고 그저 편히 살면 그만 아닌가?(사르트르는 그것을 '물질화'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허망에 직면한 의식을 끌어당기는 또 하나의 유혹이다. 카뮈의 대답은 그렇지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카뮈 문학의 열쇠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살아야 한다'는 대답에는 비약이 있어 보인다. 거기에서 우리는 생명의 약동을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그렇지만 살아야 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삶에 대한 자세가 긍정적이기 때문이다. 카뮈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먼저 부정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소설 분야에서는 "이방인" 희곡으로는 "칼리굴라"와 "오해" 사상적으로는 "시지프의 신화"가 그것이었습니다. 만약 나에게 체험이 없었다면 그런 것을 이야기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작가 약전 카뮈는 1913년 알제리의 몽도비라는 작은 읍에서 수공업 노동자들의 아들로 태어났다. 다음 해에 아버지는 전사했으며 어머니는 스페인계의 여자였다. 카뮈는 고학을 해가며 알제리 대학 대학원 과정을 마쳤다. 그는 자동차 부속품상 알제리 총독부 직원 기상대 요원 해운 중개인 등 직업을 번갈아 가며 공부를 계속했다. 철학 전공으로 문학사 학위를 받은 후 대학원 졸업 논문으로는 '성오귀스탱과 플로맹'에 대한 논문을 제출했다. 그 후 결핵으로 인하여 교수 자격 시험을 포기하고 말았다. 학생 시절부터 연극에 열중하여 '동지좌'라는 극단을 조직하여 몸소 배우 겸 극단 대표로 활약했다. 여러 희곡을 각색했으며 그 자신이 쓴 "아스튀리아의 반란"과 그 밖에 몇 편은 당국의 상연 정지 처분을 받은 것도 있다. 이 무렵에 "결혼"이란 수필집을 냈다. 처음에는 알제리 시에서 파리로 건너가 기자 생활을 하던 중 2차 대전에는 독일 점령하에서 레지스탕스로 일했다. 프랑스가 해방될 무렵에는 "콩바"지 주필로 활약하고 1945년에 사임할 때까지 세인의 이목을 끌던 그 탁월한 사설은 "악튜엘"이라는 논설집에 수록되었다. 이미 그의 문학적 명성이 확립되어 있었다. 특히 앙드레 말로의 주선으로 "이방인"(1942)을 유명한 출판사 '칼리마르사'에서 간행하고 이어 "시지프의 신화"(1943)가 출판되었다. 종전 후 희곡 "오해", "칼리굴라"를 각각 상연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전후에 쓴 것으로는 "계엄령"(1948), "정의의 사람들"(1950)이 상연되었다. 1951년에는 "반항적 인간"이 발표되었다. 카뮈는 자기가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으로는 알제리 대학 교수 장 그로니에를 내세우고 있다. 그는 또한 앙드레 지드에게 고전주의를 배웠으나 지드의 영향은 그것으로 그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편 앙드레 말로와 카프카를 찬양하고 있으며 특히 "백경"의 작가이며 부조리의 스승인 멜빌을 높이 찬양하고 있다. 195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60년 1월 4일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였다. 줄거리 -제1부-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마랑고에 있는 양로원으로부터 이러한 전보를 받고 내가 양로원을 찾아간 것은 매우 무더운 여름날 오후였다. 양로원의 원장은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찬 키가 작은 늙은이었다. 그는 서류를 뒤적이고 나서 나에게 말했다. "뫼르소 부인은 지금으로부터 삼 년 전에 이 곳에 들어 왔습니다.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당신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나는 그가 나를 나무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변명을 하려 했으나 그는 나의 말을 듣지 않고 어머니를 보게 해 줄 테니 따라오라고 했다. 우리는 안뜰을 지나 조그만 빈소 앞에 이르렀다. 나는 원장에게 사례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한가운데는 뚜껑이 덮인 관이 가로놓여 있고 기름을 칠한 판장 위에 대충 박아둔 나사못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 때 문지기가 들어와서 입관을 하였으나 볼 수 있도록 뚜껑을 열어 주겠다고 하면서 관으로 가까이 갔다. 나는 그를 멈추었다. "안 보시렵니까?" "그만두겠습니다"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그런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을 것이라고 느껴서 매우 어색해 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의자를 권하고 내 뒤에 앉았다. 문지기는 그가 양로원에 들어 오게 된 경위와 또 다른 얘기를 들려 주었다. 그러는 동안 날이 어두워졌다. 그는 저녁을 먹으러 가라고 했으나 나는 생각이 없다고 했더니 카페 오 레를 가져오겠노라고 했다. 나는 카페 오 레를 매우 좋아했으므로 그렇게 하라고 했다. 커피를 마시고 나니 담배가 피우고 싶었으나 어머니 시신 앞이라 잠시 주저했다. 그러나 조금도 꺼릴 이유가 없어서 문지기에게도 한 대 권하며 함께 피웠다. 이튿날 아침 원장의 부름을 받고 내가 그를 찾았을 때 그는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 말했다. "장의사쪽 사람들이 조금 전에 왔는데 관을 닫아야 하겠습니다. 그 전에 한 번 더 어머님을 보시겠습니까?" 나는 보고 싶지 않다고 했더니 전화에다 뭐라고 명령을 했다. 원장은 일어서서 사무실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다가 문득 말했다. "마랑고 신부님이 벌써 오시네, 꽤 이르시군" 빈소가 있는 건물 앞에 신부와 복사가 둘이 있었다. 나는 곧 관에 나사못이 박히고 방 안에는 일꾼들이 있는 것을 보았다. 동시에 영구차가 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매우 빨리 진행되었다. "고인의 나이가 많았습니까?" 영구차를 따라가는 인부가 내게 물었다. "꽤 많았습니다" 정확한 나이를 몰라서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신이 좀 흐리멍텅했으나 모두가 급속하고 순조로이 또 자연스럽게 진행되었으므로 나의 기억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제 하루 일로 피로하였기 때문에 일어나기 괴로웠다. 오늘은 무엇을 할까 생각한 끝에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거기에서 우연히 우리 회사의 타이피스트로 있었던 마리 코르도나를 만났다. 나는 그녀가 부표 위로 오르내릴 때 거들어 주었으며 팔로 그녀의 허리를 둘러 함께 헤엄을 쳤다. 나는 저녁에 영화 구경을 가고 싶지 않느냐고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페르낭델이 주연한 영화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영화관을 나와 그는 내 집으로 왔다. 내가 눈을 떴을 때 마리는 가버리고 없었다. 어머니의 장례식도 다 끝나고 내일은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겠고 그러니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저녁에 회사에서 집으로 돌아와 컴컴한 계단을 올라가다가 옆방에 사는 자칭 창고 감독인 레이몽 생테스를 만났다. 그는 나에게 자기 집에 가서 술을마시자고 했다. 술 기운이 조금씩 돌기 시작하자 그는 나에게 자기를 도와 달라면서 얘기를 꺼냈다. 머뭇거리면서 털어놓은 그의 얘기로는 며칠 전에 자기의 정부로부터 이용을 당하고 있음을 알았다고 한다. 그가 그녀의 살림을 대어 주고 있는데 그녀의 핸드백 속에는 전당표며 노름표가 들어 있고 자기가 애써 사다. 준 팔찌도 두 개씩이나 팔아먹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를 단단히 벌을 주려고 하니 나에게 편지를 한 장 써 달라는 것이었다. 여자가 그리워할 만한 사연의 편지를 써서 보내면 그녀가 돌아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마음껏 짓밟아 주고 아침에 얼굴에다 침을 뱉아 내쫓아 버리겠다는 것이다. 나는 그가 만족할 만한편지를 써 주었다. 일요일 아침 마리와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옆방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레이몽이 때리는 여자의 비명 소리를 듣고 복도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나는 그가 법정에 설 때는 증인이 되어 줄 것을 약속했다. 다음 일요일 마리와 함께 레이몽과 함께 해수욕을 갔다. 그런데 레이몽의 정부의 오빠가 그 일로 해서 레이몽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 그의 친구 아랍 사람들이 레이몽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우리들은 곧 버스를 타고 레이몽의 친구 마송을 찾아가 재미있게 놀게 되었다. 마송은 해변에 별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아랍 사람들은 거기까지 뒤쫓아 왔다. 그들과의 싸움에서 레이몽은 팔이 찔리고 입이 찢어졌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나와 레이몽은 해변을 거닐다가 큰 바위 뒤에 있는 조그만 샘가에 이르렀다. 거기서 우리는 또 다시 아랍 사람들을 만났다. 레이몽은 주머니에서 피스톨을 꺼냈다. 나는 얼른 그것을 빼앗았다. 그러자 아랍인들은 뒷걸음질을 하며 바위 뒤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레이몽을 별장까지 바래다 주고 다시 해변가로 나와 바위 뒤에 있는 서늘한 샘을 찾아갔다. 나는 당황했다. 서늘한 그곳에서 조용히 휴식을 취하려 했는데 뜻밖에도 아랍인 한 사람이 그 곳에 번듯이 누워 있지 않은가 나는 안주머니에 있는 레이몽의 피스톨을 쥐었다. 아랍 사람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뜨거운 햇빛에 뺨마저 달고 땀방울이 눈썹에 맺혔다. 그 햇빛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여 나는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그러자 아랍인은 단도를 뽑아 나에게 겨누었다. 햇빛이 강철 위에 반사되어 기다란 칼날이 이마에 와서 부딪치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눈썹에 맺혔던 땀이 한꺼번에 눈꺼풀 위로 흘러내려 나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그 뜨거운 햇빛은 나의 속눈썹을 쓸고 어지러운 눈을 파헤치는 것이었다. 바로 그 때였다. 모든 것이 동요한 것은 나의 온 몸이 긴장하여 피스톨을 힘껏 그러쥐었다. 방아쇠가 놀라고 짤깍하고 요란스런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이어서 굳어진 몸뚱이에서 다시 네 방을 쏘았다. 그것이 마치 불행의 문을 두드린 짧은 네 토막의 소리인 듯 싶었다. -제2부- 체포되어 나는 여러 번 심문을 받았다. 판사는 그 날 사건을 자세히 이야기하도록 재촉했다. "당신의 행동에 나로서 이해하기 곤란한 점들이 있는데 그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 줄 것을 확신합니다" 나는 그 날의 사건을 요약하여 레이몽, 바닷가, 해수욕, 싸움, 다시 바닷가, 조그만 샘, 태양, 다섯 방의 권총, 쓰러진 시체까지 이야기를 마쳤다 "좋습니다" 다음 그는 다짜고짜로 어머니를 사랑했느냐고 물었다. "네, 다른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로 사랑했습니다" "첫 번째 방아쇠를 쏠 때와 두 번째와의 사이에는 왜 간격이 있었습니까?" 그가 말하였을 때 나는 다시 한 번 붉은 바닷가를 눈 앞에 보고 뜨거운 햇볕이 나의 이마 위에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느꼈다. 그러나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왜 당신은 땅에 쓰러져 이미 죽은 사람 위에 다시 총을 쏘았습니까?" 그 물음에도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판사는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왜 그랬어요? 그것을 말해 주어야 합니다. 왜 그랬습니까?" 나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 예심은 십개 월이나 계속되었다. 그 동안 마리는 여러 번 찾아와서 석방되면 곧 결혼하자고 했고 해수욕도 가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결국 여름이 지나가고 또 다시 여름이 되었다. 아침 일곱 시 반. 나는 호송차를 타고 재판소에 닿았다. 재판장은 서류를 뒤적이고 나서 처음으로 왜 어머니를 양로원에 넣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어머니를 부양할 돈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것으로 마음이 괴로웠느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우리들은 서로 아무것도 누구에게도 기대할 것이 없었으므로 곧 그 생활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고 했다. 다음으로 증인 심문이 있었다. 먼저 양로원 원장이 진술했다. 그는 어머니가 나에게 불평을 했다고 말하고 또 장례식 날 나의 냉정한 태도에 놀랐다고 말했다. 내가 어머니를 보려고도 하지 않고 한 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며 무덤 앞에서 묵도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두 번째로 문지기의 진술로 그는 내가 어머니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것 담배를 피웠다는 것 잠을 자고 까페 오레를 마셨다는 것을 말하였다. 다음에 마리 마송 레이몽 등의 공술도 끝났다. 검사와 변호사의 변론은 너무나 차이가 있었다. 검사는 어머니가 죽은 뒤의 사실을 요약하였다. 내가 냉정했다는 것 어머니의 나이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 이튿날 여자와 함께 해수욕을 갔었다는 것 영화 구경을 가고 마리와 함께 집으로 왔다는 것을 지적하고 레이몽과 합의하여 그의 정부를 꾀어다가 성품이 불측한 사나이의 흉악한 행위에 맡기려고 편지를 썼으며 바닷가에서는 레이몽의 적에게 대들었다는 것이다. 레이몽이 다친 뒤 레이몽에게 권총을 받아 가지고 그것을 사용할 생각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계획대로 아랍 사람을 쏘아 죽인 것이다. 잔인하게도 일이 잘 되었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다시 네 방의 탄환을 태연하게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쏘았다고 검사는 말하였다. 끝으로 검사는 말했다. "나는 이 사람에게 사형을 요구합니다" 재판장이 나에게 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다. 내가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된 동기는 태양 때문이었다고 말하자 장내는 웃음으로 소란해졌다. 변호사의 긴 변론이 끝난 다음 나는 옆방으로 끌려갔다. 변호사는 "배심원의 답신을 재판장이 읽습니다. 당신은 판결을 언도할 때에야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변호사는 나를 두고 가 버렸다. 나는 마리 있는 쪽을 보지 못했다. 재판장은 내가 프랑스 인민의 이름으로 광장에서 목이 잘리게 되리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나는 소속 신부의 면회를 여러 번 거절하고 새벽이 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새벽녘에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풀벌레의 울음 소리가 축축한 대기에 울려 퍼지고 검은 하늘에는 별들이 반짝이는 밤을 보내며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형제애를 느꼈다. 나는 그 동안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완벽하고 내가 외롭지 않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이외수의 감성사전 도둑질 가진 자들이 못 가진 자들에게 부를 나누어주기 이전에 못 가진 자들이 가진 자들의 수고를 자발적으로 거들어 주는 자선 범죄 행위. 열등의식 자신이 남에게 자랑할 만한 건덕지를 조금도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 대문에 생겨나는 우울의 늪지대. 신의 공평성에서 제외된 생활형태를 가진 사람들이 비하해서 생겨나는 의식의 지하감옥. 그러나 모든 진보는 열등의식을 그 원동력으로 삼고 있다. 새에 대한 인간의 열등의식이 비행기라는 괴물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입증한다. 이민 자신을 다른 나라에 내다버리는 행위를 점잖게 이르는 말. 광신자 오직 지상에서 자신들만이 신의 유일한 사도라는 착각에 빠져서 모든 인간들을 악마로 규정하고 그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불사하겠다는 결의를 굳힌 사람. 그들은 대개 제일 먼저 자신의 가족을 팽개침으로써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모순점을 드러낸다. 그들은 오직 자신이 믿고 있는 신만이 전지전능하며 남들이 믿고 있는 신은 무지무능하다고만 단정하는 특질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타인의 종교적 성숙도를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종교인이다. 그들은 천국에 대해서보다는 지옥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고 구원에 대해서보다는 멸망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다. 그들은 용서에 대해서 보다 심판에 대해서 더 많이 이야기하고 성자들의 행적보다는 죄인들의 행적을 더 많이 알고 있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자기 자신조차도 구원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으며 그들의 배후에는 대체로 욕망에 가득찬 악마가 신의 얼굴을 하고 자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이기주의적인 신앙심에 부채질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완장 자신의 임무를 타인들에게 식별시키기 위해 팔에 착용하는 표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소인배들은 완장을 착용하게 되면 갑자기 자신을 영웅시하여 권력을 남용하고 타인을 멸시하려는 습성을 가지게 된다. 서민층일수록 완장에 약하고 특권층일수록 완장에 강하다. 여름 일년 중에서 태양이 가장 심하게 발작을 일으키는 계절이다. 구름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바다가 빈혈을 일으키며 쓰러진다. 매미들이 발악적으로 울어댄다. 길바닥이 타고 있다. 태양이 쏘아대는 빛의 화살들이 모든 사물들을 살해한다. 수목들이 지친 모습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다. 빨갛게 토마토가 익고 있다. 개들이 혀를 빼 문 채 낮잠에 빠져 있다. 사람들은 산으로 바다로 피서를 떠난다. 도시가 비어 있다. 때로는 사나흘씩 비도 내린다. 밤이면 신음 같은 천둥소리가 잠을 설치게 만들고 새도록 은백나무 숲이 흐느끼는 소리도 들린다. 문득 지난 여름의 잔해처럼 떠오르는 사랑의 편린. 보내지 못한 편지마다 곰팡이가 부식하고 있다.
Board 추천글 2024.12.06 風文 R 327
수녀 언니 - 이해인 언니라는 말에선 하얀 찔레꽃과 치자꽃 향기가 바람에 실려 오는 것 같은 상큼한 향기가 난다. 언니라는 말은 엄마 다음으로 가장 아름답고 포근하고 다정한 호칭이 아닐까? 큰언니, 작은언니, 올케언니, 새언니, 선배 언니. 그 대상이 누구든지간에 `언니!` 하고 부르면 왠지 마음에 따뜻한 그리움이 밀려오며 모차르트의 시냇물 같은 음악이 듣고 싶어진다. 내가 여학교 시절, 어느 길모퉁이에서 만나 불쑥 “얘, 너 내 동생하지 않을래?” 하고 말을 건네던 상급생 언니. 문예반시절의 그 꿈과 낭만이 가득했던 예비 시인 언니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질 때가 있다. 아주 오래 전 일이지만 나와 내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 서로 헤어져 살던 시절 어느 해 방학날, 난 동생을 기쁘게 해주고 싶어 그가 집에 올 때쯤 일부러 방에 숨어 있었는데, 집에 들어온 동생은 가방을 놓자마자 “엄마, 언니 왔지?” 하다가 “응, 온다더니 아직 안 왔어”라고 대답하니 와락 울음을 터뜨리며 그리움과 서러움에 목메어 하던 그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때 난 동생으로부터 사랑받는 작은언니로서의 몫에 감격하여 눈물을 닦다가 참으로 반가운 해후를 했던 일을 고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지금은 멀리 해외에 나가 있는 동생이 어쩌다 내가 있는 수녀원에 전화를 걸어 “언니야, 별일 없지? 꿈에 언니를 보았거든” 한다든지 `보고 싶은 작은언니`로 시작하는 긴 글을 보내오면, 그 옛날 싸움도 더러 했지만 서로를 깊이 이해하며 정을 나누었던 아우가 더욱 그리워진다. 나보다 네 살 아래지만 두 아이의 엄마로 늘 부지런하게 살림을 꾸려 가며 마음도 넓고 아름다워 로사라는 세례명이 잘 어울리는 동생은 “적어도 세상일에 있어서만은 내가 더 언니인 것 같다”며 웃곤 했다. 나에겐 늘 현명한 스승 같기도 하고, 어진 친구 같기도 한 13년 연상의 수녀 언니가 계시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이 한 번 만나고 나서 그 모습이 꼭 성모 마리아님과 보살님을 합해 놓은 것 같은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고 표현하셨던 언니. 나에겐 하나밖에 없는 인숙 언니는 내 동생이 일곱 살, 내가 열한 살 때 가장 엄격한 봉쇄 수도원인 가르멜수녀원에 들어가 40년을 살았으니 나이가 예순이 훨씬 넘었지만 아직도 순진무구한 소녀 같은 모습이다. 워낙 조용하고 차분하며 수줍은 성격의 언니는 오랜 세월의 수도생활을 통해서 좀더 활발하고 명랑해지신것 같다. “수녀님의 오늘이 있게 된 것은 어머니의 희생과 가르멜수녀원에 계신 언니의 깊은 기도 때문인 거야” 라는 말을 주변에서 많이 듣듯이 언니가 내게 주는 끊임없는 사랑의 관심과 격려와 기도는 참으로 각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의 주변엔 눈에 보이지 않는 기도 외에도 언니를 생각나게 하는 소박한 선물들이 많이 있다. 내가 수도생활을 시작할 무렵, 늘 좋은 생각만 하며 살라고 여러 좋은 말들을 골라 친필로 적어 준 수첩, 세심한 배려와 충고가 담긴 편지들, 민들레의 노란빛과 잎사귀빛을 배합하여 `민들레 이불`이란 이름을 붙여 손수 뜨개질해 주신 침대보 등등. 해마다 가을이면 향기를 맡으며 시심을 떠올리라고 탱자와 모과를 상자에 가득 담아 보낸 주는 언니. 가끔은 `취급주의`라고 쓴 조그만 플라스틱통에 고운 꽃씨나 민들레솜털을 담아 보내기도 하는 언니의 그 정성이 어느 땐 성가신 생각마저 들어 그만두라 해도 소용이 없다. “얘, 좋게 말하면 곰살같고, 무엇이나 주기 좋아하는 성격, 너 역시 예외는 아니지 않니? 이제 고치려고 해도 잘 안되는구나” 하는 언니의 말을 듣고 보니 얼마 전 첫월급을 탄 기념으로 아기자기한 선물 보따리를 보내 조카 진이가 `고모님들께 한 가지 부탁이 있다면 저희가 드린 선물들을 훗날 다시 저희에게 선물하시는 실수를 하지 마시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라고 메모한 것이 생각났다. “난 참 이상하지? 내일 아침에 외출한다고 하면 오늘밤부터 신발도 돌려 놓고, 가방도 열어 놓고 해. 걱정이 돼서...”하기도 하고, “육십 넘은 나더러 글쎄 우리 젊은 원장수녀가 귀엽다고 하는구나”하며 활짝 웃는 언니를 만나고 오는 날은 내 마음도 밝고 맑아진다. 나의 글을 읽은 독자들이,어쩌다 언니에게 좋은 평가를 들려주면 너무 기뻐서 가뜩이나 빠른 말씨가 더 빨라지며 흥분해서 전화를 걸오 오는 언니. 여러 차례의 큰 수술을 받을 만큼 병치례도 잦고 몸이 약하지만, 깊은 마음과 사랑 안에 누구보다 기쁘게 수도생활을 하고 계시니 나도 기쁘고 행복하다. 오랫동안 세상과 격리되어 있어서인가, 가르멜수녀원의 수녀님들이 빚어내는 에피소드 또한 다양하다. `기차표`신발 가게에 들어가서 “저, 서울 가는 기차표 한 장만 주세요”했다든가, 샴푸를 선물받고 얼굴에 바르는 것인 줄 알았다든가 하는 것 등등. 언니도 예외는 아니다. 어느 날 병원에 진찰받으러 갔을 때 간호 수녀님이 건네준 브라보콘 아이스크림 먹는 방향을 몰라 뾰족한 끝부터 먹기 시작했더니 그게 아니더라고 해서 웃은 일도 있다. “내가 사용법을 몰라 보내니 네가 쓰렴”하고 가끔 내게 보내는 볼펜도 실은 간단히 누르면 되거나 돌리면 되는 단순한 것들인데도 새것을 보면 지레 겁부터 나시는가 보다. 남들이 두 개 갖고 있는 콩팥도 한 개 밖에 없고. 이런저런 합병증에 요즘은 갈수록 귀도 어두워진다는 언니의 얘길 들으면 가슴이 아프다. 언니의 지나친 자상함에 나는 종종 짜증까지 내며 거부하는 얄미운 동생이지만, 누구에게나 푸른산처럼 어질고 덕스러운 언니가 계시기에 늘 든든하다. 수도자로서 부족한 내 모습을 보고 실망할 법한 이들에게 난 미리 언니 자랑부터 하고, 마침 같은 부산에 살고 계신 언니를 만나게 해준다. 나의 든든하고 소중한 `빽`인 언니가 오래오래 사시길 기원하는 마음으로 나는 오늘도 언니의 어진 모습을 그려 본다. “고모, 큰고모는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세상 사람과 같질 않아요”라고 우리 조카들이 어린 마음에도 그 고움과 맑음을 일컬어 표현하는 나의 수녀 언니, 언니처럼 나도 먹이를 먹으면서 좀더 푸근하고 온유해지길 원하지만 모든 이의 어진 언니가 되기엔 늘 폭이 좁고 인상도 마음도 차가운 편이어서 아쉼움을 느낀다. 그 옛날, 어린 동생을 둘이나 떼어놓고 수도원으로 들어간 것은 결코 현명하고 인간미 있는 선택은 아니었다고 어느 날 내가 불쑥 시비를 걸어도 그 큰 눈을 껌벅이며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들었느냐며 오히려 통쾌하게 웃던 인숙 언니. 언니는 지금쯤 어떤 기도를 바치실까? 깊은 봉쇄의 담 안에 숨어 살면서도 마음은 동생들을 향한 애틋한 사랑과 기도로 활짝 열려 있을 언니의 초록빛 창을 향해 나는 “언니!”하고 가만히 불러 본다.
Board 삶 속 글 2024.12.06 風文 R 148
보모(保姆) 로버트 켈리 교수의 BBC 인터뷰 방송 사고가 전 세계적으로 큰 화제를 모았다. 켈리 교수의 인터뷰 도중 발생한 자녀들의 귀여운 돌발 행동과 어머니의 당황한 모습이 고스란히 노출되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런데 일부 해외 언론사와 네티즌들이 영상 속에 등장한 켈리 교수의 부인을 보모라고 표현했는데, 이를 두고 BBC측은 고정관념에 따른 인종차별이라고 지적했다. 즉 동양 여자를 서양 남자의 아내로 보지 않고 보모로 인식하는 것이 피부색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고정관념의 결과라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나라에도 이런 편견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인종 차별에서부터 성, 장애인, 지역, 직업 차별에 이르기까지 각종 차별 표현들이 일상 언어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음에도 직업 이름에서 의사, 변호사와 같은 직업은 스승, 선비를 뜻하는 ‘-사(士)’, ‘-사(師)’의 접미사를 붙이는 반면 청소부, 파출부, 점쟁이, 때밀이 등의 직업은 평범하거나 낮잡아 이르는 의미의 ‘-부(夫)’, ‘–부(婦)’, ‘-쟁이’, ‘-이’ 등의 접미사를 붙여 불러 왔다. 직업에 대한 편견을 없애기 위해 청소부는 ‘환경미화원’으로, 파출부·가정부·식모는 ‘가사도우미’로, 점쟁이는 ‘역술가’로, 때밀이는 ‘목욕관리사’로, 구두닦이는 ‘구두미화원’으로, 봉급쟁이는 ‘봉급생활자’로 순화해 사용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보모(保姆) 역시 ‘아이를 돌보는 젖어머니’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보육사’ 혹은 ‘육아도우미’로 바꿔 부르는 것이 좋다. 어머니를 보모로 인식하는 서양 사람들의 편견을 탓하기 전에 우리부터 편견의 언어를 순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Board 말글 2024.12.06 風文 R 234
꿀 ‘꿀’은 달콤하다. 그래서 “배가 고파서인지 밥맛이 꿀맛이다”처럼 '꿀'은 ‘아주 맛있음’을 표현하는 데 적격이다. 또한 맛이 좋은 과일을 표현할 때도 ‘꿀사과, 꿀배, 꿀참외’처럼 ‘꿀’이 자연스럽게 쓰인다. 그런데 ‘꿀’이 미각을 표현하는 데 쓰이는 것만은 아니다. ‘꿀’은 인체의 특성이나 작용을 나타내는 데도 쓰인다. 아주 감미로운 목소리를 내는 사람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성대’에 ‘꿀’을 결합한 ‘꿀성대’가 있다. ‘꿀성대’가 가능하면 그 성대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꿀목소리’라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런데 신체 이름에 ‘꿀’을 결합한 말은 성적 연상을 부추길 수 있다. ‘꿀’과 ‘허벅지’를 합성한 ‘꿀벅지’가 쓰이면서 일어난 논란을 기억할 것이다. 이 때문인지 요즘은 ‘건강한 달콤함’이란 이미지를 부각할 때만 신체 이름에 ‘꿀’을 덧붙이는 듯하다. ‘꿀피부’는 곱고 윤기 있는 건강한 피부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꿀’의 쓰임이 많아지며 의미는 확장되고, 의미가 확장되는 만큼 ‘꿀’을 포함한 새말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꿀’의 의미를 더 일반화한다. ‘꿀직장’, ‘꿀보직’, ‘꿀팁’, ‘꿀강의’ 등에서 ‘꿀’은 ‘매우 좋은’이란 뜻을 나타낸다. ‘꿀재미’와 이를 축약한 ‘꿀잼’에서 ‘꿀’은 ‘매우’의 뜻으로 쓰인다. 이제 ‘꿀’은 ‘이다’와 결합하여 ‘좋다’라는 서술어로도 쓰인다. “가창력이 꿀이다”, “가격이 꿀이다” 등처럼. 달콤함은 인간이 추구하는 맛의 절정이다. 그 절정의 맛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여서 그럴까? 연인들의 사이좋음을 관용적으론 ‘깨가 쏟아진다’고 하지만, 요즘의 연인들은 ‘꿀이 떨어진다’고 한다. 최경봉 원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Board 말글 2024.12.06 風文 R 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