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팔과 긴소매 “손목까지 내려오는 소매를 뭐라 할까요?” 이렇게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긴소매’라고 대답할 것이다. 질문을 바꿔 “팔꿈치 위나 팔꿈치까지 내려오는 짧은 소매를 뭐라 할까요?” 이렇게 물으면 ‘반소매’로 대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대답한 사람들도 실생활에서는 ‘긴소매 셔츠’보다 ‘긴팔 셔츠’를, ‘반소매 셔츠’보다 ‘반팔 셔츠’를 자연스럽게 쓸 것이다. 이처럼 의미를 먼저 제시하고 물을 때 실생활에서의 쓰임과 달리 대답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옷의 소매가 길고 짧은 것이라는 사실만 상기하면 ‘긴소매’와 ‘반소매’라 말하는 게 상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긴팔, 반팔’을 ‘긴소매, 반소매’와 같은 말로 풀이하고 있다. ‘긴팔, 반팔’이 일상화된 언어 현실을 인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긴팔’과 ‘반팔’처럼 상식에서 벗어난 표현이 일상화된 언어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규범적인 관점에 선다면 의미에 주의하지 않고 말하는 것이 이런 표현을 양산한 이유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의미에 주의하지 않은 결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긴소매, 반소매’의 ‘소매’를 일관되게 ‘팔’로 대체할 수 있다면, ‘소매’에서 ‘팔’을 혹은 ‘팔’에서 ‘소매’를 연상하는 것도 언어 작용의 원리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떤 것(팔)을 이용하여 그것과 상관성이 있는 다른 것(소매)를 나타내는 것은 비유의 한 방법이다. 비유의 원리를 감안한다면 언어 상식의 범위는 넓어질 수 있다. ‘주전자가 끓는다’에서는 ‘주전자 안의 물’을 ‘주전자’로, ‘손이 모자란다’에서는 ‘손으로 일을 하는 일꾼’을 ‘손’으로 표현했다. 상식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최경봉 원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Board 말글 2024.12.04 風文 R 163
불규칙용언 (3) ‘낳다, 넣다, 놓다, 닿다, 땋다, 빻다, 쌓다, 찧다, 좋다’는 ‘낳고, 넣지, 놓은, 좋아’ 등과 같이 어떤 어미를 만나더라도 어간의 형태가 변하지 않는다. 불규칙용언이 아니라는 말인데, ‘좋다’만 빼고 모두 동사다. 이들 외에 어간 끝음절의 받침이 ‘ㅎ’인 말은 모두 형용사다. ‘까맣다, 거멓다, 노랗다, 누렇다, 말갛다, 뿌옇다, 좁다랗다, 그렇다, 이렇다, 어떻다, 조그맣다, 동그랗다’ 등. 그런데 이들은 ‘까마면(까맣+면), 누레(누렇+어), 좁다란(좁다랗+ㄴ), 그럴(그렇+ㄹ), 동그랬어(동그랗+었어)’와 같이 특정한 어미와 만나면 ‘ㅎ’이 탈락한다. 히읗불규칙용언인 것이다. 정리하면, “어간 끝음절의 받침이 ‘ㅎ’인 형용사는 모두 히읗불규칙용언이다. 단, ‘좋다’는 아니다.” ‘노랗다, 동그랗다’는 ‘노래, 동그랬다’로, ‘누렇다, 둥그렇다’는 ‘누레, 둥그렜다’로 활용한다. 활용형에 모음조화가 적용됨을 알 수 있다. 이에 비추어 보면, ‘그렇다, 어떻다’도 ‘*그레, *어떼’로 됨직하지만 이들은 모음조화와 관계없이 ‘그래, 어때’로 적어야 한다. 본말이 ‘그러하다, 어떠하다’인 것과 관계가 있다. ‘그러하여→그러해→그래’. 즉, ‘그러하여’의 준말인 ‘그러해’가 다시 줄어들어 ‘그래’가 된 것이다. 히읗불규칙용언이 어미 ‘네’와 결합할 때는 ‘ㅎ’이 탈락하기도 하고 탈락하지 않기도 한다. 즉, ‘노랗네, 그렇네, 조그맣네’와 같이 써도 되고 ‘노라네, 그러네, 조그마네’와 같이 써도 된다는 뜻이다. 종전에는 ‘ㅎ’을 탈락시킨 것만 맞는 표기로 인정해 왔으나, 불규칙활용의 체계성과 현실의 쓰임을 고려하여 2016년부터는 ‘ㅎ’을 탈락시키지 않은 것도 표준형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Board 말글 2024.12.04 風文 R 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