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짤방’과 ‘짜르다’ ‘잘림 방지’라는 뜻의 ‘짤방’이란 말이 있다. ‘우리말샘’에서는 “사진 없이 글만 올렸을 때 글이 삭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사진을 함께 올린 것에서 유래하였다”라고 설명한다. 요즘 수없이 만들어지는 줄임말 중 하나지만, ‘잘림 방지’가 ‘짤림 방지’로 바뀐 뒤 ‘짤방’이 만들어진 과정은 특이하다. 이 말의 기원을 생각하면 ‘잘방’이란 형태가 간혹 쓰일 법한데 그런 쓰임은 찾기 어렵다. 오로지 ‘짤방’이다. 그러니 이 말은 처음부터 ‘짤림 방지’를 줄인 말이라 해야 할 것이다. “내가 올린 제안서는 위에서 자꾸 짤려.” “힘없는 비정규직이라지만 그렇게 사람을 함부로 짜르면 안 되지.” ‘잘리다’와 ‘자르다’가 표준어라는 걸 아는 사람도 습관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이런 사람도 대부분 “아름드리 나무가 잘려 나간 자리에 새순이 돋았다”라거나 “나무를 함부로 잘라 숲이 망가졌다”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자르다’와 ‘짜르다’의 어감적 차이를 느끼고 이 느낌에 따라 말하는 것이다. 자르는 것처럼 매정할 수 있는 행위에 감정의 진폭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국어사전에서는 ‘짜르다’를 ‘자르다’의 잘못으로 설명한다. 국어사전의 설명대로라면 어감적 차이를 활용할 여지가 없다. 물론 별다른 이유 없이 어두음을 된소리로 발음하는 경우는 표준어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유 있는 된소리는 그렇지 않다. ‘달랑달랑’이 있지만 ‘딸랑딸랑’도 인정하며, ‘비뚤비뚤’도 있지만 '삐뚤삐뚤‘도 인정한다. ’삐뚤삐뚤‘이나 ’짜르다‘나 어감의 차이를 드러내려 쓴 말일 텐데 대접은 다르다. ‘짜르다’에 대한 ‘조선말대사전’의 풀이는 “‘자르다’를 힘주어 이르는 말”이다. 그 풀이를 참고함직하다. 최경봉 원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Board 말글 2025.02.06 風文 R 0
검은 고양이(The Black Cat:1843) - 포 해설 '최고의 작품은 최대의 상상에서 생긴다'이것이 작가로서 포의 생애의 표어였다. 보들레는 "고통과 싸우며 칼날 같은 날카로움으로 대상에 접근하는 그의 작품의 남성도 포 자신이요. 병들었으나 빛이 있고 모든 소리가 음악처럼 울리는 작품의 여성 또한 포 자신이다"라고 말했다. 포는 철두 철미한 개인주의자였다. 그는 시대에 무관심했다. 외적 상황이 아닌 오직 자기 자신의 내적 요구에 충실하며 순수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포는 시인으로서 아름다움의 창조를 시의 생명이라고 하였으며 "갈가마귀", "헬렌에게" 등 죽음 및 우수를 테마로 하는 극히 음악적인 서정시를 지었다. 단편 작가로서는 철저하게 단일적 효과를 노려 '그로테스크 하고 아라베스크 한 이야기'에서와 같은 불유쾌 공포 우울 등의 정서를 표현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비평가로서는 "호손론", "시의 원리" 등에서 단편 소설의 이론을 수립하였고 시를 사회적인 효용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순수시론을 주장했다. 시대 및 환경에서 이탈되어 사상성이 빈곤하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포와 같은 날카로운 분석적 두뇌로 오직 미의 세계만을 추구한 문학자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그가 근대의 과학적 탐정 소설의 시조라는 점이다. 그의 치밀한 추리나 해석은 보통 두뇌의 작가로서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작가 약전 포는 1809년 미국 보스턴에서 출생하였다. 부모는 가난한 순회 연극단의 배우였으며 3형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부유한 상인의 손에 의해 길러졌다. 소년 시절에는 양부를 따라 영국에 가서 살기도 하였다. 후에 미국에 귀국하여 버지니아 대학에 다녔다.젊어서 배운 술과 도박 때문에 양부와 이별하고 자립해야 할 형편에서 저널리즘에 관계하기 시작했다. 1836년에는 버지니아 클렘이라는 13세의 어린 소녀와 결혼했으나 절망과 방탕으로 인한 빈곤한 생활에서 헤어나지 못했으며 건강도 좋지 않았다. 직업을 전전하는 동안에도 꾸준하게 시집과 단편집을 내어 인정을 받았으나 1849년 10월에 술집에서 폭음으로 인사 불성이 되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을 거두었다. 짧고 불행한 생애였지만 그의 작가적 활동은 실로 놀랄 만한 것이었다. 세계 3대 단편 작가로 미국의 포 프랑스의 모파상 러시아의 체호프를 꼽을 수 있다. 전문 내가 이제 여기에 쓰려고 하는 광포한 그러나 지극히 솔직한 이야기에 대하여 믿어 줄 것을 기대하지도 않거니와 애원하지도 않는다. 바로 나 자신도 믿지 않을 만한 사건을 가지고 다른 사람이 믿어 주기를 기대한다면 정말 미치광이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미친 것도 아니고 확실히 꿈을 꾸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내일이면 나는 죽을 몸이다. 나는 내일 영혼의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릴 생각이다. 나의 목적은 솔직하고 간결하게 아무 주해도 달지 않고 평범한 가정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세상 사람들 앞에 내 놓으려는 것이다. 사건의 결과는 나를 공포에 떨게 하였고 들볶아 왔으며 마침내 파멸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이들 사건에 해설을 붙이려고 하지는 않는다-대부분의 사람들 눈에는 이들 사건이 무섭다기보다는 기괴하게 보이겠지 앞으로 어떤 지성인이 나타나서 내 환상을 흔해 빠진 것이라고 설명하게 될는지도 모른다-나보다 더 냉정하고 더 논리적이고 도무지 흥분하기가 어려운 지성인이 있다면 두려운 마음으로 그리고 있는 이 전후 상황 속에서 지극히 평범한 인간 관계의 단순한 사실밖에는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어려서부터 나는 성질이 온순하고 인정이 많기로 유명하였다. 유약한 마음씨가 얼마나 유난했던지 친구들의 조롱감이 될 지경이었다. 나는 특히 동물을 좋아해서 양친이 가지 각색의 동물을 사 주셨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것들과 함께 보냈다. 그들에게 먹이를 주며 쓰다듬어 주는 순간처럼 즐거운 시간은 없었다. 내가 자라면서 이런 특성도 같이 자라게 되어 어른이 되면서는 더욱 중요한 쾌락을 얻게 되었다. 충실하고 영리한 개에게 사랑을 가져 본 사람들에게는 이런 데서 맛보는 만족감이 어떤 성질의 것이며 또 얼마나 강한 것인지를 애써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인간의 하찮은 우정과 경박한 성질에 시달려 본 일이 있는 사람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뒤흔드는 그 무엇이 짐승의 비이기적이며 희생적인 사랑에는 있는 것이다. 나는 일찍 결혼했는데 아내에게도 나와 비슷한 성미가 있음을 알게 되어 행복했었다. 내가 집에서 기르는 귀여운 동물들을 유달리 좋아하는 것을 보고 아내는 마음에 드는 동물을 사들였다. 우리는 새 금붕어 개 토끼 작은 원숭이와 고양이들을 길렀다. 이 고양이는 퍽 크고 예쁜 동물로 몸 전체가 검은 것이 놀랄 만큼 영리하였다. 아내는 내심으로 상당히 미신을 믿고 있는 터라 이 고양이가 영리하다고 말하면서 검은 고양이는 모두 마녀의 화신으로 간주하는 옛 사람들의 말을 자주 들춰 냈다. 아내가 이 점을 전적으로 믿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지금 문득 생각이 났기 때문에 말하는 것뿐이다. 플루토(저승의 왕)-이것이 고양이의 이름이었다-는 내가 귀여워하는 애완 동물이며 같이 뛰어놀던 친구였다. 내가 도맡아 길렀더니 집 안에서 내가 가는 곳마다 졸졸 따라다녔다. 내가 외출할 때에는 고양이가 거리까지 따라나오는 것을 떼어 놓느라 애를 먹곤 했었다. 나와 고양이와의 우정은 이렇게 몇 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 동안에 내 기질과 성격은-음주라는 악마 때문에(고백하기 부끄러운 노릇이지만)-급격하게 악화되었다. 나는 나날이 더 침울해지고 성급해져서 다른 사람의 감정 따위는 염두에도 두지 않게 되었다. 아내에게는 욕설을 퍼부었고 드디어는 폭력을 가하게까지 되었다. 내가 귀여워하던 동물들도 물론 내 기질의 변화를 맛보게 되었다. 그들을 돌봐 주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학대까지 하였다. 토끼나 원숭이라든가 개까지도 무심코 또는 좋다고 내 곁으로 오기만 하면 학대를 하였지만 플루토에 대해서는 그래도 학대를 삼갈 만한 여유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도 병은 점점 악화되어-알콜 중독과 같은 병이 또 어디 있으랴!-마침내 이제는 차츰 늙어 좀 억지로 어리광을 부리는 플루토에게까지도 손을 대게 되었다. 어느 날 밤 거리의 술집에서 잔뜩 취해 집으로 돌아오니 고양이가 나를 피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놈을 움켜 잡았다. 그러자 그 놈은 나의 난폭한 짓에 놀라서 이빨로 할퀴어 내 손에 가벼운 상처를 입혔다. 순간적으로 악마와 같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이성을 잃었다. 악마보다 더한 악의가 전신의 모든 근육을 타고 흘렀다. 나는 조기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날을 편 다음 고양이의 목을 붙잡고 눈알 하나를 날렵하게 도려 내었다. 이 저주받을 만한 폭행을 써 내려가는 동안에도 얼굴이 붉어지고 화끈거리고 몸서리가 쳐진다. 이튿날 아침 제 정신으로 돌아왔을 때-간밤의 취기에서 깨어나서-나는 내가 저질러 놓은 죄악에 대해서 공포와 회한이 반반 섞인 감정을 체험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미약하고 모호한 느낌 뿐이었지, 내 마음은 그래도 바뀔 줄 몰랐다. 나는 폭음으로 나날을 보냈고, 내가 저지른 짓에 대한 모든 기억을 술 속에 파묻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고양이의 상처는 차츰 회복되었다. 도려낸 눈 구멍은 사실 끔찍한 모양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그 놈은 평상시대로 집안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내가 가까이 가면 당연히 그럴 테지만 그만 질겁을 하고 달아났다. 전에는 나를 그렇게도 따르던 동물이 이렇게 변한 것을 보며 처음에는 슬픔을 느낄 만큼 옛날 심정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런 감정은 이내 분노로 변했다. 그러자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을 자초하려는 것 같은 정신의 변태가 생겨 났다. 이 정신에 대해서 철학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변태성이 인간의 심정의 원시적 충동의 하나라는 것-인간의 성격에 방향을 제시해 주는 불가사의한 원시적 본능 혹은 감정임을 확신하며 내 영혼 속에 있다는 것도 확신한다. 고약하거나 어리석은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지르게 되는 경우를 때때로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우리의 가장 건전한 판단력을 무시하고 오직 법률이라는 것을 아는 까닭만으로 끊임없이 그것을 범하려는 경향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뒤틀려 버린 정신이 내 최후의 파멸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이 죄없는 짐승에게 가했었던 위해를 그대로 계속하다가 결국에는 죽이게까지 나를 충동한 것은 자기의 본성에다 폭력을 가하고 악을 위해서 악을 범하려는 자학에 대한 영혼의 무한한 욕망이었다. 어느 날 아침 나는 평정한 마음으로 고양이 목에 올가미를 씌워 나뭇가지에 매달았던 것이다. 눈물이 흘렀고 쓰디쓴 회한으로 가슴이 메었다. 그 놈이 나를 꽤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그 놈이 분노를 일으킬 아무 구실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이 죄를-내 불멸의 영혼이 위험한 너그러우신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심으로도 어쩔 수 없는 경지에까지 떨어지게 하는 끔찍한 죄를-범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놈을 매달았던 것이다. 이 잔인하기 그지 없었던 짓을 저질렀던 그날 밤 나는 "불이야!" 하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내 침실 커튼에 불이 붙고 있었고 집은 온통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아내와 하인과 나는 간신히 화염 속을 피해 나왔다. 모조리 파괴되었다. 전재산을 완전히 날려버리자 나는 절망에 몸을 던지게 되었다. 나는 이 재난과 폭행과의 사이에 인과 관계를 찾아보려고 할만큼 마음이 약하지는 않다. 오직 사건의 연쇄를 자세히 설명하여 사슬의 고리 하나라도 내버려 두고 싶지 않은 것이다. 불이 난 그 다음 날 나는 불탄 자리에 가 보았다. 벽은 한쪽만 남고 모두 무너져 있었다. 그 한쪽이라는 것은 집 한가운데에 있는 그리 두껍지 않은 간막이 방의 벽으로 내가 침대머리를 붙여 두던 벽이었다. 이 벽의 벽토가 불에 견뎌낸 것은 바른 지가 얼마 안 된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벽 근처에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는데 어떤 부분을 여러 사람이 세밀히 살펴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상한데!" "기묘하군!"하는 말들이 내 호기심을 끌었다. 가까이 가 보니 커다란 고양이 모양을 한 것이 얇게 조각이나 한 것처럼 나타나 있었다. 나타나 있는 모양은 신기하리만치 선명했다. 동물의 목에는 올가미가 걸려 있었다. 나는 처음 이 망령-딴은 망령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았으니까-을 보았을 때 내 놀라움과 공포는 극도의 것이었다. 그러나 가만히 지난 일을 돌이켜 보고 나니 마음이 덜컹 가라앉았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고양이는 집에 딸려 있는 정원에 매달아 놓았었던 것이다. "불이야" 하는 소리에 정원에는 사람들로 꽉 차 버렸는데 그들 중 누군가가 나무에 매여 있는 끈을 끊고 그 동물을 열려 있던 창문으로 내 침실에 던졌던것에 틀림없었다. 그것은 아마 잠자고 있는 나를 깨우려는 뜻에서 였을 것이다. 다른쪽 벽이 무너지면서 내 잔인성에 희생된 제물을 새로 바른 회벽에다 압착시켰을 것이다. 벽의 석회분이 불꽃과 짐승 시체에서 나온 암모니아와 섞여서 내가 보고 있는 화상을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내가 지금 자세히 말한 놀라운 사실을 내 이성으로는 이렇게 설명했다. 하지만 내 공상에 심각한 인상을 뿌리박아 놓고 말았다. 여러 달 동안 나는 그 고양이의 환상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동안에 회한 비슷한 실은 그것도 아니지만 모호한 감정이 내 마음 한 구석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고양이를 잃어버린 것이 애석하여 그 당시 자주 가던 하류 주점 같은 데서라도 혹시 그와 같은 고양이나 좀 어딘가 닮은 데가 있는 고양이가 없을까 두리번거리게 되었다. 어느 날 밤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는 술집에 정신없이 앉아 있으려니까 방 안의 주요한 가구를 이루고있는 진과 럼을 담은 커다란 통들 중 어느 하나 위에 무엇인가 시커먼 것이 웅크리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그것을 좀더 일찍 보지 못했다는 사실은 참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가까이 가서 손으로 건드려 보았다. 그것은 검은 고양이로서-썩 큰 놈이었는데-플루토만큼 큰 데다가 하나만 빼고 모든 점에서 그 놈과 흡사하였다. 플루토는 몸에 흰 털이라고는 없었는데 이 고양이는 선명치 못한 윤곽이긴 하나 가슴이 거의 큼직한 흰 점으로 덮여 있었다. 내가 건드리자 그 놈은 곧 일어나서 골골 소리를 크게 지르더니 내 손에다 몸을 비벼대며 자기를 알아 주는 것을 기뻐하는 눈치였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찾던 고양이었다. 나는 당장 주인에게 그 놈을 사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주인은고양이를 알지도 못하고 전에 본 일도 없으니 자기에게는 아무 권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고양이를 계속 쓰다듬어 주었다. 집에 갈 준비를 하니 고양이도 나를 따라올 눈치를 보이는 것이었다. 나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 걸으면서도 이따금씩 허리를 굽혀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집에 오자마자 그 놈은 곧장 길들여져 아내에게도 당장 귀여움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얼마 안 되어 그 고양이에 대해 싫증이 났다. 그것은 내가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도대체 웬일인지 그 놈이 확실히 나를 따른다는 그 사실이 못 견디게 불쾌하고 귀찮아졌다. 이러한 염증에 대한 불쾌감은 극도의 증오로 변해 갔다. 어떤 수치심과 이전의 내 잔인한 행위 기억이 나로 하여금 그 놈을 육체적으로 학대하는 것을 삼가게 했다. 여러 주일 동안 그 놈을 때리지도 않았거니와 횡포하게 다루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점차로-나도 모르는 사이에-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증오감으로 그놈을 바라보게 되었고 악취를 피하듯 고양이를 슬슬 피하게 되었다. 이 고양이에 대한 내 증오심을 부채질한 것은 그 놈을 집에 데리고 온 다음 날 아침 플루토와 같이 그 놈도 눈 하나가 없다는 것을 발견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인정이 많은 아내는 이러한 사실로 더욱 고양이를 측은히 여길 따름이었다. 인정이 많다는 것이 전에는 나의 유별난 특징이었으며 나의 소박하고 순수하기 이를데 없는 즐거움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내가 고양이를 미워하면 할수록 그놈은 더욱 성가시게 내 꽁무늬를 따라다녔다. 내가 앉아 있으려면 으레 의자 밑에 쪼그리고 앉거나 무릎에 뛰어 올라와 지겹게 핥거나 제 몸을 내 몸에 비벼대는 것이었다. 일어나서 걸어가려고 하면 가랑이 새로 기어들어 나를 넘어뜨릴 뻔하거나 뾰족하고 긴 발톱으로 옷을 할퀴면서 가슴까지 기어 올라오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그저 한 방에 때려 죽이고 싶었지만 참을 수 있었던 것은 한편으로는 내가 전에 저지른 죄가 생각나서이지만 그 주된 이유를 솔직히 고백하면 그 짐승이 끔찍하게 두렵기 때문이었다. 이 공포감은 육체적 위해의 공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는 그것을 무어라고 정의를 내리기는 곤란했다. 좀 부끄러울 정도지만-그렇다. 이중죄수의 감방에서까지도 고백하기가 부끄러울 정도이다-이 고양이가 내게 불어넣은 공포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어떤 망상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이다. 이 고양이와 내가 죽인 고양이 사이의 유일한 차이가 흰 털 반점이라는 것은 전에도 말한 바 있거니와 아내는 가끔 그 흰 점에 나의 주의를 끌게 했다. 이 반점이 크기는 했지만 원래는 그 윤곽이 뚜렷하지 않았다는 것을 독자는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천천히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그리고 오랫동안 내 이성은 그것을 공상이라고 부정하려고 싸워 왔던-그것은 마침내 아주 뚜렷한 윤곽을 드러냈다. 그것이 이제는 이름만 들어도 몸서리가 쳐지는 형상을 나타내고 있었다-이 때문에 무엇보다도 나는 그놈을 미워하고 두려워해서 할 수만 있다면 이 괴물을 없애 버렸을 것이다-그것은 저 소름끼치는 무시무시한 교수대의 형상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나는 보통 인간으로서의 불행한 범위를 넘어선 불행에 빠져 버렸다. 한 마리의 짐승이-제 친구를 내가 하찮게 죽여 버렸지만-나를 위하여-지고하신 하느님의 형상을 본떠 만들어 놓은 하나의 인간인 나를 위하여 이렇듯 견딜 수 없는 고민을 안겨 주다니! 낮이나 밤이나 내게는 안식의 기쁨이라고는 조금도 없구나! 낮이면 고양이는 한시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고 밤이면 밤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악몽에서 소스라쳐 깨어나면 얼굴을 뒤덮고 있는 고양이의 뜨거운 입김이며 영원히 내 가슴을 억누르는 그 육중한 무게가-도무지 뿌리칠 수 없는 몽마의 화신을 느끼게 했다. 이같은 고통의 압박을 받아 마음 속에서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착한 성질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흉악한 생각이-흉측하고 악독하기 그지없는 생각이-내 유일한 벗이 되었다. 평소의 내 침울한 기질은 점점 변해서 모든 인간에 대한 증오가 되었다. 별안간 주체할 수 없는 광란의 발작이 가끔씩 일어나 지각 없이 날뛰는 동안 아내는 언제나 불평 한 마디 없이 화를 도맡아 받는 희생자였다. 우리는 가난해서 할 수 없이 지은 지 오래 된 낡은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집안일로 아내는 나를 따라 지하실로 들어갔다. 고양이도 험한 계단을 따라 내려와 하마터면 내가 곤두박질할 뻔했다. 나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미칠 것 같았다. 나는 격분하여 어린애 같은 공포심도 잊어버리고 나는 도끼를 번쩍 들어 고양이를 내리찍으려고 겨냥을 하였다. 마음먹은 대로 내려쳤다면 고양이는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내가 손으로 막는 바람에 내리치지는 못했다. 방해가 자극이 되어 악마도 못 당할 정도의 심한 격노에 싸여 아내의 손을 뿌리치고 아내의 머리에 도끼를 내리쳤다. 아내는 그 자리에 푹 쓰러졌다. 이 끔찍한 살인을 치르고 나자 나는 아주 신중하게 시체를 감추는 일에 착수했다. 낮이나 밤이나 이웃 사람들에게 들킬 염려가 없이 집에서 시체를 내갈 수 없음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여러 가지 계획이 머리에 떠올랐다. 한 번은 시체를 토막으로 각을 떠서 불에 태워 버리려고도 생각하였다. 다음에는 지하실 바닥에 구멍을 파고 그 밑에 묻어 버릴까도 생각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뜰 안에 있는 우물 속에 던져 버릴까-상품처럼 상자에 챙겨 넣은 다음 포장을 하고서 짐꾼을 불러 집에서 내갈까-하고 이리저리 생각해 보았다. 끝내는 이제까지의 그 어느 것보다도 훨씬 더 낫다고 여겨지는 계획 하나를 짜냈다. 중세기 승려들이 그들이 죽인 사람을 벽 속에 넣고는 발라 버렸다는 기록처럼 나도 시체를 지하실 벽 속에 넣고 발라 버리기로 작정하였다. 이같은 목적에 지하실은 적당했다. 벽은 부실하게 쌓은 데다가 전면에 굵은 벽돌로 바른 것이 공기가 습해서 아직 굳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한쪽 벽에는 툭 두드러진 데가 있어 가짜 굴뚝으로 벽난로를 가리게 된 것 같으나 이미 메워져서 다른 벽과 비슷하게 되어 있었다. 이 부분의 벽돌을 떼고 시체를 넣은 다음 이전처럼 벽을 발라 버리면 누가 보더라도 의심나는 데를 찾아 볼 수 없게 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 계획은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다. 쇠지레로 거뜬히 벽돌을 떼고서 송장을 안쪽 벽에 기대어 감쪽같이 그 자리에 버티어 놓은 다음 별로 힘들이지 않고 먼저 있던 대로 벽 전체를 다시 쌓았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이전과 다름없는 벽토를 만들어 조심스럽게 벽돌 개수 공사를 끝마쳤다. 공사를 끝내고 나니 마음이 놓였다. 벽에 손을 댄 흔적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는 남김없이 치워 버렸다. 득의 양양하게 주위를 돌아보니 저절로 이런 말이 나왔다. "적어도 이번은 헛수고가 아니었군" 다음으로 할 일은 이런 여러 가지 불행의 원인이 되어 온 그 고양이를 찾는 일이었다. 기어코 그 놈을 죽이기로 굳게 결심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때 그 놈을 만날 수만 있었다면 그 놈의 운명이란 두 말할 여지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교활한 고양이는 내가 무섭게 화를 내는 바람에 놀랄 일이 있어서 그 때의 그런 기분으로 있는 동안에는 나타나기를 꺼리는 것 같았다. 보기 싫던 고양이가 없어진 그 가슴이 후련하던 안도감은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대단한 것이었다. 그놈은 밤에도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놈이 집에 온 후에 처음으로 나는 아무 생각없이 잠을 잤다. 살인죄의 무거운 부담을 느끼면서도 편안히 잠을 잤던 것이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변함없이 지나갔건만 나를 괴롭히던 고양이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 번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숨을 쉬었다. 그 괴물은 공포에 질려 영원히 내 집에서 도망치고 말았구나! 그놈을 다시는 보지 않겠지! 그야말로 내 행복의 절정이었다. 내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죄의식도 별로 내 마음을 괴롭히지 않았다. 서너 차례 심문을 받았으나 거뜬히 대답해 냈다. 수색까지 당했으나 물론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내 앞날의 행복은 굳게보장된 것으로 보였다. 나흘째 되는 날 뜻밖에도 경관들이 집에 몰려와서 재차 엄중한 가택 수사를 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시체를 감춘 장소는 절대로 찾아낼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나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경관들은 나에게 수색 중에 자기들을 따라다니라고 말했다. 그들은 구석구석을 그대로 지나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지하실로 내려왔다. 나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심장은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사람의 그것처럼 평온하게 뛰었다. 나는 지하실을 끝에서 끝까지 걸어다녔다. 가슴에 팔짱을 낀 채 버젓이 왔다갔다 했다. 경관들은 의심이 풀려서 떠나갈 준비를 했다. 가슴에 북받친 기쁨을 참는다는 것은 나에게 너무 벅찬 일이었다. 버티고 서서 단 한 마디 말이라도 해서 내가 죄가 없다는 것을 그들에게 재인식시키고 싶어 몸이 달았다. "여러분!" 하고 마침내 경관들이 층계를 올라갈 때 내가 말했다. "여러분들이 의심을 풀어 드려서 기쁩니다. 여러분들의 건강을 빌며 경의를 표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러분 이 집은 이 집은 썩 잘 지은 집입니다(무엇이든지 태연 자약하게 말하고 싶은 미치광이 같은 욕심에서 나는 내가 무엇을 지껄이고 있는지 도무지 알지 못하였다 ) 참 잘 지은 집이라 할 수 있지요. 이 벽돌은 썩 튼튼하거든요" 그리고 허세를 부리고 싶은 미친 놈의 심사에서 쥐고 있던 지팡이로 그 뒤에 사랑하는 아내의 시체가 있는 바로 그 부분의 벽돌을 쾅쾅 두드렸다. 그런데 하느님이시여 악마의 손에서 저를 구하옵소서! 지팡이 소리의 반향이 가라앉자마자 무덤 속에서와 같은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짤막짤막한 것이 마치 어린애가 우는 것 같은 소리였는데 갑자기 길고 높이 연속적인 찢어지는 듯한 소리로 변하면서 사람 소리 같지 않은 아주 불규칙적인 고함 소리로 지옥에서나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공포와 승리가 반씩 뒤섞인 통곡 소리로 변하였다. 내 마음을 설명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나는 졸도하여 맞은편 벽으로 비틀비틀 쓰러졌다. 순간 경관들도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에 싸여 층계에 꼼짝 못하고 붙어 있었다. 다음 순간에 열 둘이나 되는 억센 팔들이 벽을 허물어 부수고 있었다. 벽이 무너졌다. 벌써 상당히 썩어 핏덩어리가 엉겨 붙은 시체가 사람들 눈 앞에 꼿꼿이 서 있었다. 그 머리 위에는 시뻘건 입을 벌리고 한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저 끔찍한 고양이가 앉아 있었다. 나에게 살인을 저지르게 하고 내가 잡히도록 소리를 내어 교수형 집행자에게 인도한 그 괴물의 술책에 빠지고 만 것이다. 나는 그 괴물을 시체와 함께 벽 속에 넣고 그냥 발라 버렸던 것이다.
이외수의 감성사전 콩나물 음지에서 물만 먹고 자란다. 거적대기 하나를 이불 삼아 맨살을 부비며 오손도손 서민으로 살아간다. 머리가 모두 샛노란 것은 햇빛을 간절히 그리워 했기 때문이다. 저마다 가슴 안에 샛노란 해를 하나씩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해파리 바다의 도신선사다. 떠도는 일에도 걸리지 않고 머무르는 일에도 걸리지 않는다. 일엽편주지만 무심지경이다. 파도가 치면 파도에 흔들리고 바람이 불면 바람에 흔들린다. 마음을 비워 온 육신이 투명하고 천지를 비워 온 바다가 투명하다. 물보라 포세이돈의 백마. 바다의 수염. 비탄의 분말 이슬 새벽에 내린다. 만물이 깊이 잠든 안식의 새벽에 소리 없이 내려와 꿈을 적신다. 신의 서늘한 입김이다. 생명의 속삭임이다. 사물들의 표면에 닿아 물방울이 되고 물방울은 땅에 스미어 옹달샘을 만든다. 옹달샘은 그 흐름을 다하여 바다에 다다른다. 이슬은 바다의 투명한 미립자다. 모든 생명의 기원이다. 앵두 유년 시절 누나의 가시 찔린 손 끝에 맺혀 있던 선홍빛 피 한방울. 쓰레기 인간이 만들어 놓은 모든 가공물의 말로. 또는 지구가 바라보는 인간. 텔레비전 수다스러운 가전제품. 시간과 채널만 조정해 놓으면 혼자서도 쉬지 않고 수다를 늘어 놓는다. 언론매체의 중심적인 위치에 놓여 있으므로 독재국가에서는 권력의 꼭두각시가 되어 우민화 정책의 선봉이 되기도 한다. 온 국민의 눈이며 온 국민의 입이지만 꼭두각시가 되면 온 국민을 벙어리로 만들거나 장님으로 만드는 일에 주력하기도 한다. 때로는 자기도취에 빠져서 시청자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프로그램으로 아까운 전력을 낭비하게도 하고 때로는 가슴이 뭉클해지는 프로그램으로 인생의 참다운 의미를 생각케 만들어 주기도 한다. 외래문화의 쓰레기를 유입하는 창구가 되기도 하고 전통문화의 진수를 찾아내는 길잡이가 되기도 한다. 광범위한 정보도 내장되어 있고 다양한 상품광고도 내장되어 있다. 현대인들은 누구나 텔레비젼에 조금씩은 중독되어 있다고 하지만 심한 경우에는 이성을 잃어버리는 사태까지 일어난다. 텔레비젼에서 얻은 정보라면 무조건 신뢰해 버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텔레비젼에 붙어 있는 동안 자신의 금쪽 같은 시간이 엄청난 양으로 폐기처분 되고 있음을 허망해하는 시청자는 별로 없는 것 같다.
Board 추천글 2025.02.05 風文 R 4
손님맞이 - 이해인 아침에 까치가 울면 “오늘은 반가운 손님이 오시려나 보지?”하며 빙긋 웃던 가족들의 모습은 늘 따뜻한 정과 그리움의 추억으로 떠오른다. 집에 손님이 온다는 날이면 어떤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공연히 마음이 들뜨고 즐거웠던 어린 시절. 가족들이 집 안을 평소보다 더 깨끗이 하고, 고운 옷을 입으며, 바른 인사법과 공손한 예절을 익히며 준비하는 그날이 내겐 늘 설레임 가득한 축제로 느껴지곤 했다. 그러나 우리집에 다니러 온 친척, 이웃 손님들이 잠시 머물다 작별의 인사를 하고 떠날 때쯤이면 나는 너무 아쉽고 허전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씁쓸히 서성이던 기억이 새롭다. 내가 유난히 까치가 많고 소나무가 많은 이곳 부산 광안리 산기슭의 성 베네딕도수녀원으로 `시집`와서 산 지도 벌써 30년이 되었다. 워낙 식구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 수녀원엔 거의 하루도 손님이 없는 날이 없다. 손님은 귀찮은 존재가 아니라 귀한 선물임을 늘 강조하는 베네딕도 성인은 그의 규칙서에서 `찾아오는 모든 손님을 그리스도처럼 대하고` `손님이 오면 사랑의 봉사로써 마중 나가, 함께 기도하며 평화의 인사를 하라`고 강조한다. 우리 동산의 꽃과 나무들만큼이나 우리 손님들의 모습도 다양하다. 수녀가 되고 싶어 찾아오는 아가씨들, 수녀가 된 딸들을 만나러 오는 가족과 친지들. 여행길에 가벼운 마음으로 들렀다 가거나 강의를 해주러 오는 선생님들,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이 갖고 싶어 며칠 묵어 가는 성직자와 수도자들, 도움의 손길이 필요해서 달려오는 몸과 마음이 아프고 지친 사람들 등등. 특히 여러 날 묵어 가는 경우엔 시설이 불편하다고 불평할 수 있는 자그만 객실인데도 손님들은 대체로 고마워하며, 식탁에 올리는 반찬도 극히 단순 소박한 것이지만 밭에서 직접 가꾼 것이기에 더 귀하다며 맛있게 드는 모습을 보면 고맙고 기쁘다. 처음엔 서로 낯설고 서먹한 사이였던 손님들끼리도 이곳에 머무는 동안 서로 좋은 친구가 되어 연락을 주고받는 걸 보면 흐뭇한 마음이다. 손님은 우리의 창문이 되어 준다. 생활이 비교적 단순한 우리는 손님들의 이야기를 통해 잠시 잊고 있던 세상의 일들을 더 구체적으로 보고 느끼게 된다. 손님은 우리의 좋은 친구가 되어 준다. 우리의 좋은 점을 칭찬하고 격려해 주는 지지자나 힘든 때의 위로자가 되기도 하지만,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실수하는 부분이나 그 밖에 개선해야 할 사항들에 대해선 예리한 지적도 서슴지 않는 고마운 충고자이다. 그러므로 손님은 우리가 게으르거나 방심하며 살지 않고 조금은 긴장하며 깨어 살도록 도와 주는 역할도 톡톡히 하는 셈이다. 손님맞이야말로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가 치르어야 할 아름다운 사람의 임무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예를 갖추어 손님을 맞는 일이 때론 힘들고 번거롭게 여겨질 때도 있겠지만, 손님의 발걸음이 뜸한 집 안은 얼마나 쓸쓸하고 삭막할 것인가. 우정과 사랑이 피어나는 만남의 관계, 인정이 오가는 이웃과 이웃 사이엔 항상 손님이 있게 마련이다. 손님들의 평범한 인사말과 웃음, 유머, 재치, 그리고 그들의 기쁨, 슬픔, 괴로움, 갈등, 때로는 본의 아니게 우리를 성가시고 힘들게 하는 어떤 부담까지도 깊이 끌어안고 사랑하려는 자세로 우리는 오늘도 손님을 맞는다. 수녀원의 종소리를 따라 그들과 함께 기도하며 마음을 나누는 좋은 친구, 진실한 이웃이 되려고 한다. 나도 매일매일을 반가운 손님 대하듯이 환히 열린 마음과 시선으로 맞아들여야겠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귀한 손님을 맞듯이 단정하고도 다정하게 예를 갖추고 맞아들여야겠다. 그리하면 나의 삶은 따분하고 지루한 일상이 아니라 늘상 싱싱한 기쁨과 활력이 넘쳐나는 초록빛 축제가 될 것이다.
불규칙용언 (6) ‘(제품을) 만들다’는 ‘만드는(만들+는), 만듭니다(만들+ㅂ니다), 만드세요(만들+세요), 만들(만들+ㄹ)’처럼 ‘ㄴ, ㅂ, ㅅ’ 등으로 시작하는 어미 앞에서는 ‘ㄹ’이 탈락한다. ‘살다, 날다, 녹슬다, 거칠다, 말다’ 등등 어간이 ‘ㄹ’ 받침으로 끝나는 용언은 모두 같은 방식으로 활용하므로 학교문법에서는 불규칙용언에서 제외하고 있지만, 어간은 본디 변하는 것이 아닌데 어간의 형태가 변했으니,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면 ‘리을불규칙용언’이라 할 수 있다. 실제 언어생활에서는 잘못된 활용형을 쓰는 경우가 많다. 동사 ‘날다’에 어미 ‘는’이 결합하면 ‘나는’이 된다. ‘(하늘을) *날으는 비행기’가 아니라 ‘(하늘을) 나는 비행기’가 맞다는 뜻이다. 형용사 ‘녹슬다’에 어미 ‘ㄴ’이 결합하면 ‘녹슨’이 된다. 따라서 ‘*녹슬은 기찻길’이 아닌 ‘녹슨 기찻길’로 써야 한다. 단, ‘말다’는 ‘(걱정하지) 마/마라/마요’와 같이 써도 되고 ‘(걱정하지) 말아/말아라/말아요’와 같이 써도 된다. ‘ㄹ’ 탈락 여부를 임의로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명사형어미 ‘-ㅁ’ 앞에서는 ‘ㄹ’이 줄지 않는다. 따라서 ‘*책상을 만듬, *담배를 안 팜, *아파트에 삼’과 같이 쓰면 틀리고 ‘책상을 만듦(만들+ㅁ), 담배를 안 팖(팔+ㅁ), 아파트에 삶(살+ㅁ)’과 같이 써야 맞다. ‘하다’는 ‘하여(하+어), 하였다(하+었다)’로 활용한다. 어미 ‘-어’가 ‘-여’로 바뀌는 것이어서 ‘하다’를 ‘여불규칙용언’으로 분류한다. 이런 활용은 ‘하다’ 또는 ‘하다’로 끝나는 말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다. 따라서 ‘*(사람)이였다, *(꽃이) 피여서’와 같이 쓰면 안 된다. ‘(사람)이었다, (꽃이) 피어서’와 같이 써야 한다.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Board 말글 2025.02.05 風文 R 2
말과 느낌 같은 말이라도 이렇게 말해 다르고 저렇게 말해 다르다는 ‘아 해 다르고 어 해 다르다’라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우리말의 어휘에는 비슷한 뜻을 지니고 있더라도 자음이나 모음의 차이로 인해 미묘한 어감의 차이가 있는 어휘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푸르다’라는 형용사에는 어감이 다른 다양한 ‘푸르다’ 계열의 형용사들이 있는데, ‘푸르다’를 강조한 ‘푸르르다’가 있고 ‘산뜻하지 않게 푸르다’는 뜻의 ‘푸르퉁퉁하다’, ‘곱지도 짙지도 않게 푸르다’는 뜻의 ‘푸르께하다’, ‘조금 푸르다’는 뜻의 ‘푸르스름하다’ 등의 말이 있다. ‘푸르다’에서 나온 ‘푸르스름하다’에도 역시 어감이 다른 형용사들이 많이 있는데, ‘약간 푸르스름하다’는 뜻의 ‘푸르레하다’에서부터 ‘엷게 푸르스름하다’는 뜻의 ‘푸르무레하다’, ‘고르지 않게 푸르스름하다’는 뜻의 ‘푸르뎅뎅하다’, ‘푸르죽죽하다’ 등의 형용사들이 있다. 이처럼 우리말에는 어감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어휘들이 존재하므로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각각의 상황과 어감에 맞는 어휘들을 선택해 사용해야 한다. 기사문이나 판결문, 논문과 같은 글에서는 객관적이고 느낌이 없는 어휘들을 주로 사용하는 반면 시나 수필과 같은 문학적인 글에서는 작가의 느낌을 충분히 담아낼 수 있는 어휘들을 주로 사용한다. 그래서 전자에서는 ‘높다’ ‘낮다’ ‘크다’ ‘작다’ ‘얕다’ ‘깊다’ ‘멀다’ ‘두껍다’ ‘가득하다’ 등의 어휘들을 주로 사용하는 데 비해 후자에서는 ‘높다랗다’ ‘나지막하다’ ‘커다랗다’ ‘자그맣다’ ‘야트막하다’ ‘깊숙하다’ ‘멀찍하다’ ‘두툼하다’ ‘그득하다’ 등의 어휘들을 많이 사용한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Board 말글 2025.02.05 風文 R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