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미사 (2) <표준국어대사전> 검색창에 ‘이’를 치면 모두 38개의 표제어가 나온다. 이 가운데 ‘-이29’부터 ‘-이33’까지가 접미사다. 모양은 같아도 하는 일은 다른 접미사 ‘-이’가 다섯 가지라는 뜻이다. ‘-이29’는 명사를 만드는 접미사다. ‘먹이, 재떨이, 멍청이, 딸랑이’ 등에 쓰인 ‘-이’는 ‘앞말이 가리키는 속성을 가진 사람이나 사물’이라는 뜻을 더하면서 앞말을 명사로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한다. ‘-음(얼음), -개(날개), -기(모내기), -보(울보)’ 등도 명사를 만드는 접미사다. ‘-이30’은 받침 있는 사람의 이름 뒤에 붙어서 어조를 고르는 접미사다. ‘갑돌이를 사랑한 갑순이’에서 ‘갑돌이, 갑순이’에 붙은 ‘-이’가 그것이다. ‘-이-31’은 피동 또는 사동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다. ‘깎이다, 떼이다’에 쓰인 ‘-이-’는 ‘앞말이 가리키는 행동을 당하다’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고, ‘기울이다’, ‘높이다’에 쓰인 ‘-이-’는 ‘앞말이 가리키는 행동이나 상태가 되게 하다’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다. 이처럼 피동 또는 사동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로는 ‘-기-(쫓기다/맡기다), -리-(뚫리다/알리다), -히-(뽑히다/앉히다)’ 등이 더 있다. ‘-이32’는 부사를 만드는 접미사다. ‘많이, 같이, 집집이, 나날이’ 등에 쓰인 ‘-이’는 형용사나 1음절 명사 반복 구성 등의 뒤에 붙어서 ‘그러하게’ 또는 ‘그와 같게’의 뜻을 더하면서 앞말을 부사로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한다. ‘-히(조용히)’도 부사를 만드는 대표적인 접미사다. ‘-이33’은 수를 나타내는 말 뒤에 붙어서 ‘그 수량의 사람’이라는 뜻을 더하는 접미사다. ‘친구와 둘이 영화를 보러 갔다’에서 ‘둘이’에 붙은 ‘-이’가 그것이다.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Board 말글 2025.02.10 風文 R 4
재미있는 한글 이야기 한글의 재미있는 특징 중에 하나는 글자를 뒤집어도 다른 글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심지어 글자뿐 아니라 단어를 뒤집어도 다른 단어가 되는 경우도 있다. 먼저 한글의 자음 중에 뒤집으면 다른 자음이 되는 것으로 ‘ㄱ, ㄴ, ㄹ, ㅁ, ㅇ’ 등이 있다. ‘ㄱ’을 뒤집으면 ‘ㄴ’이 되고, ‘ㄴ’을 뒤집으면 ‘ㄱ’이 된다. ‘ㄹ, ㅁ, ㅇ’은 뒤집으면 똑같은 ‘ㄹ, ㅁ, ㅇ’이 된다. 한글의 모음 중에 뒤집으면 다른 모음이 되는 것으로 ‘ㅗ, ㅛ, ㅜ, ㅠ, ㅡ’ 등이 있다. ‘ㅗ’를 뒤집으면 ‘ㅜ’가 되고, ‘ㅛ’를 뒤집으면 ‘ㅠ’가 된다. ‘ㅡ’는 뒤집으면 똑같은 ‘ㅡ’가 된다. 또한 자음과 모음이 결합한 글자를 뒤집었을 때 다른 글자가 되는 것으로 ‘공, 농, 롱, 몽, 옹’, ‘굥, 뇽, 룡, 묭, 용’을 비롯해 총 125개 글자가 있는데, 예를 들어 ‘공’을 뒤집으면 ‘운’이 되고 ‘룡’을 뒤집으면 ‘율’이 된다. 그래서 ‘공룡’이라는 단어를 함께 뒤집으면 ‘율운’이 되고 ‘공군’이라는 단어를 뒤집으면 ‘곤운’이 된다. 이처럼 한글이 글자를 뒤집어도 다른 글자가 되는 이유는 한글의 위대한 창제 원리 때문이다. 한글의 모음은 하늘과 땅과 사람을 형상화한 ‘ㆍ’, ‘ㅡ’, ‘ㅣ’를 기본으로 만들어졌는데, 땅 위에 하늘을 둔 모양으로 ‘ㅗ’를 만들고, 땅 아래에 하늘을 둔 모양으로 ‘ㅜ’를 만들었으며 땅 위에 하늘을 두 번 합성해 ‘ㅛ’를 만들고, 땅 아래에 하늘을 두 번 합성해 ‘ㅠ’를 만들었다. 이처럼 땅을 기준으로 해서 그 위아래로 하늘을 합성해 모음을 만들었기 때문에 모음을 뒤집어도 다른 모음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Board 말글 2025.02.08 風文 R 6
이외수의 감성사전 바퀴벌레 파리나 빈대 따위처럼 인간의 생활근거지를 주무대로 노략질을 하면서 살아가는 위생곤충으로 의복이나 음식물에 해를 끼친다. 주로 야행성이며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학자들에 의하면 지구상의 전 생명체가 멸종되었던 빙하기에도 죽지 않고 그 종족을 오늘날까지 보전 했다는 곤충이다. 살아있는 화석이라고도 지칭된다. 인간보다 먼저 지구를 차지하고 있었던 곤충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이제 바퀴벌레에게 가느다란 벽 틈서리조차도 내어주려 들지 않는다. 눈꼽만한 과자 부스럭지조차도 내어주려 들지 않는다. 오직 다량학살만을 모색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바퀴벌레가 미워도 빙하기부터 지금까지 시간의 바퀴를 굴리며 종족을 보전해 온 생명의 불가사의에 대한 취소한의 경의는 표해야 한다. 신경통 날이 궃으면 뼈들이 먼저 알고 신음을 한다. 비바람이 몰아치면 뼈들이 먼저 알고 비명을 지른다. 비로서 사람과 하늘이 따로가 아님을 알게 된다. 성불구자 모든 불제자. 성불하기를 구하는 사람. 출근 경제적으로 궁핍하지 않은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자신을 인간에서 로보트로 전환시키는 행위. 직장을 가진 인간이라면 대부분 기상과 동시에 출근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힌다. 세면장에 들어가 부품을 소제하고 에너지를 보충한 다음 서둘러 직장으로 달려가 출근부에 도장을 찍을 때까지 모든 작동을 빠르게 진행시킨다. 비애를 느낄 겨를조차 없다. 반드시 그렇게 살아야만 행복이 보장된다고 입력되어 있는 로보트처럼 매일 같은 일상을 반복한다. 출근은 보금자리로 돌아오기 위해서 보금자리를 일시적으로 떠나는 서민들의 습관화된 이별이다. 외로운 출발이다. 이 세상에 남들처럼 살아남아 있고 싶은 자로서의 소박한 희망이다. 희망에의 도전이다. 스트레스 가슴 밑바닥에 침전된 불만의 찌꺼기를 연소하지 못할 때 생겨나는 유독성 폐기물이다.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고 정신을 피로하게 만든다. 만병을 불러들이는 근원이 된다. 다량으로 침전되면 자체 내에서 폭발할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모든 경쟁의 과정에서는 스트레스가 따르고 모든 패배의 결과에는 스트레스가 증폭된다. 군자와 백치에게는 스트레스가 따르지 않는다. 능력이상의 욕망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며 어떤 경쟁에도 휩쓸림이 없기 때문이다. 호수 고여 있는 슬픔이다. 고여 있는 침묵이다. 강물처럼 몸부림치며 흐르지도 않고 바다처럼 포효하며 일어서지도 않는다. 다만 바람 부는 날에는 아픈 편린처럼 쓸려가는 물비늘. 기다림 끝에 흘리는 눈물들은 기다림 끝에 흘리는 눈물들끼리 한자리에 모여 호수가 된다. 온 하늘을 가슴에 담는 사랑이 된다. 음담패설 음담배설. 속물근성 천박한 자기수준을 끝끝내 개선하지 않은 채로 자신이 타인에게 가치 있는 존재로 부각되기를 바라는 습성. 모든 욕망의 나무를 자르지 못한 채 가지마다 공명심, 이기심, 질투심, 시기심 따위의 거추장스러운 과일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살아가는 습성. 아무런 철학도 없고 아무런 고뇌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장 요긴한 생활필수품. 소인배들의 전유물.
Board 추천글 2025.02.07 風文 R 22
어느 소년의 미소 - 이해인 `...자주 만나지 않아도 마음속에 있는 사람, 우리는, 우리형제들은 - 이제는 태고적 같기만 한 어린 날로부터 그대와 한 형제 되어 한 줄기 강물을 타고 흐르는 여정이 되었다네. 눈감아도 보이는 그 강물은 언제나 그리움 그 자체, 잊을 리가 있겠는가, 그대를... ` 지금은 이름난 화가로 활동중인 진의 언니의 엽서를 받고 나는 문득 옛 생각에 잠긴다. 나를 열 살 먹은 소녀로 돌아가게 하는 한 소년의 그리운 모습도 함께 떠오른다. 그의 삼형제의 이름 가운데에 `진`자가 들어가므로 나는 그들을 묶어서 `진형제`라고 부르기도 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 나는 늘 새침하고 조용한 아이, 책 속에 파묻혀 꿈을 꾸는 아이였다. 4학년 때 나는 5반 부반장이었고 소년 진은 3반 반장이었는데, 그애는 공부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외모도 이국적이어서 여학생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반은 달랐어도 나 역시 호감을 갖고 있던 차에 한 번은 3반 담임선생님이 편찮으셔서 며칠 결근을 하셨는데 그 반의 반장과 임원들이 문병을 가고 싶어도 집을 몰라 못 간다는 얘길 전해 들었다. 마침 나는 그 여선생님과 한 동네에 살고 있었고, 그의 여동생과도 친구여서 내가 길잡이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선생님을 방문하던 날, 우리는 그 댁에서 준비한 맛있는 과자도 먹고 이야기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 이후로 나는 장난기 가득하지만 따뜻하고 인상적인 소년 진의 미소를 기억하며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초등학교 2학년 2학기 때, 혜화동 성당에서 함께 첫영성체를 받은 친구임도 알게 되어 집에 와 사진을 보니, 하얀 너울을 쓰고 잔뜩 긴장해 있는 내 옆에 푸른 띠를 두르고 손을 모은 그 소년이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 있었다. 5,6학년 때 그는 사생대회에서 입상을, 나는 백일장에서 입상을 해 나란히 상을 받는 영광도 안게 되었다. 서로 반이 달라 접촉할 기회가 없던 우리는 졸업 전에 꼭 한 번 길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 짧은 순간을 두고두고 잊지 못했다. 비원 돌담길을 끼고 나는 친구 집을 향해 걷고 있었고, 그는 반대편에서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는데 우리는 새삼 반가우면서도 서로 아무 말 못하고 그냥 웃음만 교환했다. 참으로 따스하고 정감 어린 표정으로 미소짓던 진의 모습은 어린 내 가슴을 콩콩 뛰게 만들었고,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걷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그후론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문득문득 그가 궁금하고 보고 싶기도 했으나 알 수가 없었다. <빨강 머리 앤>의 남자 주인공인 길버트의 모습에서 자주 그를 떠올려 보기도 했다. 중학교 3학년이 끝날 무렵 하루는 우리집에 자주 놀러오던 오빠의 성당 선배인 B아저씨가 당신의 먼 친척뻘 되는 댁이라며 나를 데려가셨는데 그 집이 바로 진형제들의 집이었고, 나는 뜻밖의 반가움 속에 모든 가족들과도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중학생이 된 소년은 더 멋져 보였고 수줍은 듯하면서도 내가 늘 좋아했던 그 미소로 정답게 대해 주었다. 나를 포함해 그와 그의 누나들, 그리고 다른 젊은이들에게도 정신적인 스승 역할을 했던 B아저씨의 영향으로 우리는 성직자, 수도자를 가장 아름다운 미래의 꿈과 이상으로 지니게 되었다. 진 역시 사제직을 지망하여 소신학교에 들어갔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중도에 포기하고 일반대학에 들어가 철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나는 생각보다 빨리 대학도 포기하고 수녀원에 입회하게 되었다. 그와 나는 열심히 편지를 주고받았으나 내가 수녀원에 오고 나서는 몇 번의 연락을 끝으로 자연 멀어지게 되었다. 가끔 그의 누나들로부터 그가 프랑스 유학중에 아리따운 아가씨와 사랑에 빠져 공부가 채 끝나기도 전에 결혼을 했으며, 아이도 셋이나 낳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나는 그의 행복을 빌어 주었다. 그는 캐나다 퀘벡시의 유능한 도시환경 건축가가 되어 한국을 다녀갔고 텔레비전에 출연한 적도 있다고 했다. 그의 누나들은 내게 가끔 얘기하곤 했었다. 오래 전의 일이지만 흰 눈 내리던 어느 겨울날, 동생이 마당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줍고 있어서 살펴보니 강아지가 다 뜯어 놓아 읽을 수 없게 된 내 편지봉투 속의 시 조각들을 하나라도 더 찾으려고 낱말을 맞추고 있었는데, 그 정성스런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항상 나의 시를 제일 먼저 읽는 독자가 되어 주고, 어른이 되면 제일 먼저 나의 시집을 묶어 많은 이들에게 읽히고 싶다고 말하던 친구, 수도자로서 멋있게 살려면 판에 박힌 고루한 사고방식을 가져선 안되며 생각의 폭을 더 넓혀야 한다고 충고하던 친구, 때로는 조개껍질과 도화지에 아름다운 그림도 그려 주고, 수녀원에 뜻을 둔 내가 나를 좋아하던 다른 소년 때문에 괴로워하며 다른 생각을 할라치면 정색을 하며 “그도 나도 널 좋아하지만 벨라뎃다(필자의 세례명) 소녀는 하느님 외의 누구의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 너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우리는 마음이 아프더라도 슬픔을 견뎌야 하고, 너도 마찬가지야” 하고 짐짓 오빠라도 된 것처럼 단호히 말해 주던 좋은 친구를 나는 수녀원에 와서 더욱 고마워할 때가 많았다. 나의 첫시집을 보면 그가 제일 기뻐할 것 같기에 간단한 사연과 함께 우편으로 보낸 일이 있는데 돌아온 답은 뜻밖에도 `시집은 간데없고 웬 반공서적만 봉투 안에 몇 권 들어 있더라`는 것이었다. 번번이 훼방꾼이 나타나는 것도 심상치 않아 난 그후로 아예 연락을 안하는 게 현명하겠다고 판단하고 열심히 수도생활에 전념했다. 못 만난 세월 동안 많이 변했을 그 친구를 종종 기도중에 기억하는 가운데 나는 어느새 중년의 나이로 수도서원 25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바로 그해 나는 우연히 수녀원의 심부름 겸 초청강의도 할 겸 캐나다 토론토에 갔다가 본래는 예정에 없던 몬트리올에서 강의 관계로 이틀을 묵게 되었다. 그곳 본당 신부님께 혹시나 하고 그의 이름을 댔더니 대뜸 잘안다며 그 자리에서 즉시 그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주셨으나, 아직 퇴근 전이어서 우리는 저녁미사에 들어갔다. 그 사이에 친구는 전갈을 보내 우리의 다른 일정을 취소하게 하고 그의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자고 초대했다. 하도 오랜만이라 어색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면서도 그 옛날의 소녀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프랑스풍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집의 현관 앞에서 친구도 이젠 중후한 아저씨가 되어 환히 웃는 얼굴로 두팔을 벌리고 나를 맞아들였다. “이게 분명 꿈은 아니겠지? 30년 만이야. 그렇지? 며칠 전엔 내가 코스모스꽃을 보다가 문득 네 생각을 했었는데... 정말 이상하다... 텔레파시가 통한 것 아닐까?” 그는 몇 번이나 말하며 내게 포도주를 따라 주었고 옛이야기에 꽃을 피우는 우리의 모습을 내가 처음 보는 그의 부인과 아이들도 바라보며 함께 기뻐했다. 멋과 낭만이 넘치는 소설가이기도 하신 K신부님은 식사중에 우리의 만남을 축복하는 특별기도도 해주셨다. “너무 오랜만인데도 어색하지 않고 반말이 절로 나오네”하고 나도 친구에게 웃으며 이야기했다(`이런 자연스러움은 우리가 주님 안에서 참으로 순결하고 애틋한 우정을 나누었기 때문이겠지?`하고 나는 속으로만 말했다). 시종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또 물었다. “너, 수녀원에 간 것 후회 안하니?” “아니.” “수녀로서 행복하니?” “응.” “그럼 됐어.” 다정한 작은오빠같이 말하던 그는, 내가 떠나던 날 이른 아침 몬트리올 공항에 나와 그의 팀이 구상해서 만들었다는 도시 건축 예술관련의 불어 서적 한 권을 내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최근에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느낀 것, 그동안 체험한 자신의 인생, 신앙, 예술에 대해 짧은 시간이지만 담담하고 솔직하게 들려주었다. 30년 만의 만남이 이루어졌던 2년 전 가을, 캐나다에서 가져온 단풍잎 몇 개가 지금도 내 책갈피에서 고운 추억의 빛깔로 불타고 있다. 단풍잎 속에서 그 옛날의 소년 진이 빙그레 웃으며 다시 말을 건넨다. “생각나니? 네가 수녀원에 가기 전에 내게 주었던 그 빨간 노트 말이야. 내가 제일 소중히 생각하는 그 노트는 아마 누나가 갖고 있을 거야.” “그래, 그런데 넌 그 귀한 노트를 네가 대학에서 처음으로 사귄 여자친구에게 내 허락도 없이 보여 주었잖아. 그애가 너와 헤어지고 나서 이별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나한테까지 찾아왔던 일 너는 모르지? 자기는 떠나지만 날더러 요한의 영원한 친구로 남아 달라는 부탁을 하러 일부러 수녀원까지 왔다고 해서 나는 누군지도 모르고 면회실에 나갔다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라.” “그래? 그런 일이 있었구나. 미안해. 괜히 나 때문에 곤란하고 마음이 아팠겠네?” “아니야. 그래도 너에겐 고마운 일이 더 많아. 어린 시절에도 그토록 어른스럽고 절제 있게 행동한 네가 지금도 무척 기특하고 신기하게 생각될 때가 있어.” “고마워, 어쨌든 앞으로도 좋은 시 많이 쓰고 건강해. 알았지?” “응, 알았어. 나도 늘 너를 위해 기도할게. 그런데 있잖니. 비행기가 하늘로 뜨고 나서 이제 어쩌면 너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눈물이 나서 조금 울었어. 나 우습지?” “아니...” 아직도 투명한 그리움이 묻어 있는 캐나다의 빨간 단풍잎 속에서 친구가 웃으며 손을 흔든다.
꽃길 “포기 안 하려 포기해 버린 젊고 아름다운 당신의 계절, 여길 봐 예쁘게 피었으니까 바닥에 떨어지더라도 꽃길만 걷게 해 줄게요.” 꽃시절에 가시밭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를 생각하는 자식의 마음이 꽃처럼 예쁘다. 이렇게 노래한 가수에게 누군가 이런 글을 남겼다. “앞으로는 꽃길만 걸으시기를....” 이들에게 ‘꽃길’은 ‘꽃이 피어 있거나 꽃으로 장식된 길’이면서 ‘순탄하고 행복한 삶’이자 ‘승승장구하는 화려한 스타의 삶’이다. ‘꽃길’과 함께 떠올릴 수 있는 말로 ‘꽃보직’이 있다. “관직 생활 30년 동안 꽃보직으로 돌면서 꽃길만 걸어온 사람”은 별 어려움 없이 편안하고 화려한 관직 생활을 했을 것이다. ‘꽃보직’은 편안하되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만큼 화려하고 중요한 보직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꽃보직’은 편안하고 좋다는 뜻만을 지닌 ‘꿀보직’과는 다르다. 이처럼 우리말에서 ‘꽃’은 ‘화려함, 아름다움, 중요함’을 상기시킨다. 봄을 알리는 ‘꽃’은 신선함을 나타내는 데 쓰이기도 한다. ‘한창 젊은 여자의 나이’를 ‘꽃띠’라 하고, ‘젊고 활기 찬 시기’를 ‘꽃시절’이라 한다. 그런가 하면 ‘결혼한 신랑 신부가 처음으로 함께 자는 잠’을 ‘꽃잠’이라고도 한다. 젊고 신선함이 곧 아름다움이라는 생각이 이 말에 담겨 있다. ‘꽃’은 대상의 화려함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 ‘꽃단장’은 얼굴, 머리, 옷차림 등을 꾸미는 단장(丹粧)의 정도가 화려함을 뜻한다. ‘꽃분홍’과 ‘꽃자주’는 꽃 색깔과 관련 있는 ‘분홍’과 ‘자주’에 ‘꽃’을 붙여 색채의 짙고 화사함을 강조한 말이다. 그 자체로 화려하면서 가까이 있는 것마저 돋보이게 하는 꽃. 그런 꽃의 매력을 이 말들에서도 발견한다. 최경봉 원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Board 말글 2025.02.07 風文 R 5
접미사 (1) 단어는 단일어와 복합어로 나뉘고, 복합어는 다시 합성어와 파생어로 나뉜다. ‘합성어’는 둘 이상의 단일어가 결합하여 하나의 단어가 된 것이다. 쌀밥(쌀+밥), 출렁출렁(출렁+출렁), 잡아먹다(잡다+먹다) 따위. ‘파생어’는 단일어나 합성어에 접사가 결합해서 만들어진 단어를 가리킨다. 맨밥(맨-+밥), 시퍼렇다(시-+퍼렇다), 선생님(선생+-님), 빛깔(빛+-깔), 덮개(덮다+-개), 많이(많다+-이), 울음(울다+-음), 삶(살다+-ㅁ), 익히(익다+-히) 따위. ‘접사’는 다른 말에 붙어서 일정한 뜻을 더해 주는 요소인데, ‘맨-’, ‘시-’처럼 앞에 붙는 것이 ‘접두사’, 뒤에 붙는 것이 ‘접미사’이다. 접미사 중에는 ‘-님, -깔’처럼 뜻만 더하는 것이 있고, ‘-개, -이, -음/ㅁ, -히’처럼 품사도 바꾸는 것이 있다. 가령, ‘울다’는 동사지만 ‘울음’은 명사다. “어간에 ‘-이’나 ‘-음/-ㅁ’이 붙어서 명사로 된 것과 ‘-이’나 ‘-히’가 붙어서 부사로 된 것은 그 어간의 원형을 밝히어 적는다.” 한글맞춤법 제19항이다. ‘굳다’와 접미사 ‘-이’가 결합하면 [구지]로 소리 나지만 어간의 원형 ‘굳-’이 드러나게 ‘굳이’로 적으라는 뜻이다. 명사 파생 접미사 중에는 ‘-이’와 ‘-음/-ㅁ’이, 부사 파생 접미사 중에는 ‘-이’와 ‘-히’가 가장 널리 쓰일 뿐만 아니라 규칙성도 있어서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도 누구나 손쉽게 분석해 낼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은 그 원형을 밝혀 주는 것이 쓰기에도 편하고 읽기에도 도움이 된다. 그래서 접미사 ‘-이’, ‘-음/-ㅁ’, ‘-히’가 결합할 때는 어간과 접미사의 형태를 밝혀 적는 것을 원칙으로 삼은 것이다. 이것이 한글맞춤법 제19항의 취지다.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Board 말글 2025.02.07 風文 R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