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처'와 '자청' "이 광고를 촬영할 때 '가게가 예쁘게 나오도록 하려면 여기서 찍어'라며 카메라 각도를 알려주고 '소쿠리는 이게 제격이지'라며 화면에 나오면 좋을 것 같은 소품을 집에서 갖고 오는 등 마을 주민들이 조감독 역을 자처했다." 위 예문에서 '조감독 역을 자처했다'는 제대로 쓰인 것일까. '자처'와 '자청'은 자칫 헷갈리기 쉬운 단어들이다. '자처(自處)는 '자기를 어떤 사람으로 여겨 그렇게 처신함'이라는 뜻이다. 이에 비해 자청(自請)은 '어떤 일에 나서기를 스스로 청함'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위 글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조감독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기 마을에서 광고를 찍으니 기뻐서 스스로 나서 조감독처럼 도와주는 것일 뿐이다. 이럴 경우는 ''조감독 역을 자처했다''가 아니라 ''조감독 역을 자청했다''로 하는 것이 옳다. "공자는 주(周) 문왕(文王)의 정신적 계승자를 자처했다." "공형진은 좋은 연극을 할 요량으로 극단 ''유''의 막내 단원 되기를 자청했다." 이 두 예문에서는 자처와 자청이 바르게 쓰였다. 공자는 스스로를 문왕의 정신적 계승자로 생각하고 있고, 공형진은 연극을 하기 위해 자기가 원해서 고달픈 막내 단원이 되려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자신이 어떤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자처라면 '어떤 일을 맡아서 하겠다고 스스로 나서는 것'이 자청이다.
Board 말글 2011.05.01 바람의종 R 10020
끼치다와 미치다 "경제적.경제외적 요인 등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변동하는 환율은 다시 국제수지, 물가, 경제성장 등 경제 변수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책의 저자들은 최명희의 '혼불', 조정래의 '태백산맥' 등 문학작품에서 방언이 작품의 리얼리티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분석하고 있다." '끼치다'는 '영향.해.은혜 따위를 당하거나 입게 하다'란 뜻이고, '미치다'는 '영향이나 작용 따위가 대상에 가해지다. 또는 그것을 가하다'라는 의미다. 사전의 뜻풀이나 앞에 든 예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끼치다'와 '미치다'는 서로 바꿔 쓸 수 있다. 하지만 '끼치다'는 대체로 다른 사람에게 걱정(심려/염려), 누(累), 불편, 수고, 손해, 폐(弊), 해(害) 등을 주게 될 때 사용된다. "인간 사회에서 그 누구든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서까지 자유를 누릴 수는 없다" "선생님께 누를 끼친 것은 아닌지 심히 염려됩니다" "하수도 공사로 보행자들께 불편을 끼쳐 죄송합니다"처럼 긍정적인 말보다는 부정적인 말과 함께 쓰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끼치다'가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크든 작든 자신에게 은혜를 끼친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보답할 줄 아는 것이 사람의 도리다" "현재의 역사가들 중에서도 로마문명을 이렇게까지 발전시키는 데 가장 큰 공로를 끼친 사람을 카이사르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등에서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미치다'는 받는 쪽보다는 주는 사람 쪽에 초점이 있으나, '끼치다'는 주는 쪽보다는 받는 사람 쪽에 초점이 있다(임홍빈, ''뉘앙스 풀이를 겸한 우리말사전'').
Board 말글 2011.05.01 바람의종 R 13084
병구완, 병구환, 병간호, 고수련 스페인의 국민가수 훌리오 이글레시아스는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기 전까진 레알 마드리드의 골키퍼였다. 갓 스물의 그는 모든 게 끝났다고 절망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생각이 달랐다. "그래도 인생은 계속된다"고 격려하며 매일같이 아들의 병상을 지켰다. 그리고 5년 뒤, 이글레시아스는 다시 걷게 됐을 뿐 아니라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가수로 거듭났다.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도 있듯이 오랜 병시중은 누구나 지치게 하지만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이 또한 무색하게 만든다는 걸 보여 주는 일화다. 이처럼 병을 앓거나 다친 사람을 곁에서 돌보는 일을 병구환.간병.병간호 등 다양한 말로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엔 주의해야 할 표현이 있다. 흔히 ''병구환''으로 알고 사용하고 있지만 ''병구완''이 바른 표기다. ''구완''이 ''구환(救患)''에서 온 말이긴 하나 원말에서 변한 형태의 ''구완''을 표준어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병구완에 필요한 의료 지식을 습득해 간호사가 되려던 나이팅게일의 뜻은 가족들의 심한 반대에 부딪혔다"와 같이 써야 한다.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노인들의 간병 문제가 새로운 사회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처럼 ''간병(看病)''도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있지만 일본어의 잔재로 병간호.병구완 등으로 순화해 쓰는 게 좋다. 비슷한 뜻으로 ''고수련''이란 예쁜 우리말도 있다.
Board 말글 2011.01.30 바람의종 R 13003
슬라이딩 도어 문은 열고 닫는 방법에 따라 크게 미닫이.여닫이로 구분된다. 옆으로 밀어서 열고 닫는 문이 ''미닫이''고, 문틀에 고정돼 있는 경첩이나 돌쩌귀를 축으로 해 열고 닫는 문이 ''여닫이''다. 구조와 여는 방식에 따라 외미닫이.쌍미닫이, 외여닫이.쌍여닫이, 가로닫이, 내리닫이 등으로 세분되기도 한다. 접이문과 들문도 있다. 병풍처럼 접어가며 열 수 있는 문이 ''접이문''이며, 천장 쪽으로 들어올려 매달 수 있게 만든 문이 ''들문''이다. 대형 건물에서 많이 사용하는 ''회전문''도 있다. 문이 돌아가면서 한 사람씩 출입하는 방식이다. 과거에는 이들 문을 사람이 직접 열고 닫아야 했지만 근래에는 자동으로 열리고 닫히는 자동문이 설치된 곳이 많다. 주로 미닫이 문이나 회전문에 전자 장치를 달아 사람이 접근하면 자동으로 열리고 닫히는 형태다. 단추를 누르거나 신분증 등을 갖다 대면 자동으로 열리는 방식도 있다. 요즘은 이들 우리말 이름이 아닌 ''슬라이딩 도어(sliding door)''라는 용어가 심심치 않게 쓰이고 있다. 미닫이 문을 뜻하는 영어로, 특히 자동으로 열리고 닫히는 미닫이 문이 늘면서 ''슬라이딩 도어'' 또는 ''자동 슬라이딩 도어''란 말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영어 ''오토매틱 슬라이딩 도어(automatic sliding door)''를 줄여 대충 ''슬라이딩 도어''라 부르기도 한다. 디자인보호법 시행규칙에도 ''슬라이딩 도어''라는 용어가 나온다. 여기저기에서 ''슬라이딩 도어''가 우리말 ''미닫이''를 밀어내고 있다. ''미닫이(문)'' ''자동 미닫이 문'' 또는 그냥 ''자동문'' 등 우리말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을 굳이 영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Board 말글 2011.01.30 바람의종 R 14337
Board 말글 2010.12.19 바람의종 R 11671
변죽 얼마 전 검찰의 중간수사 발표 결과 제이유그룹과의 부적절한 돈거래 의혹이 제기됐던 고위 공직자들이 모두 무혐의 처분돼 논란이 일었다. 이를 두고 많은 언론이 "이번 검찰 수사는 의혹에 대한 면죄부만 준 변죽 수사였다"고 보도했다. 이처럼 '변죽 수사'라는 말을 가끔 쓰지만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이럴 땐 '변죽을 울리다' 또는 '변죽을 치다'는 관용구를 써 '변죽만 울린 수사' '변죽을 친 수사'라고 써야 맞다. '변죽'이란 그릇이나 세간, 과녁 따위의 가장자리를 의미하는 말로 "소반은 혼자 들어 나르기에 편하며 변죽이 자연스럽게 도드라져 그릇이 미끄러지지 않는다" "그는 젓가락으로 상의 변죽을 두드리며 흥을 돋우었다"처럼 쓰인다. 그러므로 '변죽을 울리다(변죽을 치다)'는 말은 그릇의 가장자리를 쳐서 소리가 나게 하듯 바로 본론을 말하지 않고 빙 둘러 말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알아차리게 하는 것을 뜻한다. 핵심에 접근하지 못하고 곁가지만 건드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정부와 여당이 또다시 부동산 대책을 내놓았으나 이번에도 공급 확대와 거래 활성화라는 핵심은 외면했으니 변죽만 울린 꼴이다" "가치와 시가총액이 낮은 기업들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변죽만 울리는 셈이다"처럼 쓸 수 있다. '변죽'과 같은 뜻으로는 '언저리' '시울' '가두리' 등이 있다.
Board 말글 2010.12.19 바람의종 R 10598
성숙해지다, 주춤해지다, 팽배해지다, 만연해지다 "기상청은 앞으로도 당분간은 추위가 주춤해질 것으로 전망했다." "세계적인 자산운용사 UBS의 대한투신운용 인수가 돌출적인 감독 당국의 개입으로 주춤해졌다." 기상 예보나 증권 시황 관련 기사들에 자주 나오는 '주춤해지다'는 표현은 잘못 쓰는 말이다. '주춤하다, 주춤거리다, 주춤대다'(어떤 행동이나 걸음 따위를 망설이며 자꾸 머뭇거리다)는 자동사이므로 '아/어지다'를 덧붙일 필요가 없다. 동사 그대로 활용해 '주춤할' '주춤했다/주춤거리고 있다'로 써야 한다. '성숙해지다'도 잘못 쓰고 있는 대표적인 예다. "아직도 많은 기업의 사회공헌활동이 여러 방면에서 양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에 비해 그 평가나 기대효과는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지난 1년간 통일된 비폭력저항운동을 하면서 많은 경험을 했고 많이 성숙해졌습니다" 등에서 '성숙(成熟)하다'는 자동사이기 때문에 '성숙해지다'로 쓰면 틀린다. '성숙하는' '성숙했다'로 써야 맞다. "온라인에서 불법 복제물을 발견해도 시정하는 데 3~4일이나 걸려 이미 복제가 만연해진 뒤에 뒷북치는 식이 많았다" "논리와 실증이 빈약한데도 재벌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국내에 팽배해진 데에는 재벌 문제에 관한 논의가 이렇게 정치화됐기 때문이다"의 '만연해진' '팽배해진'도 동일한 사례다. '만연(蔓延/蔓衍)하다' '팽배(澎湃/彭湃)하다'가 자동사이므로 '만연해 있는' '만연한'으로, '팽배하게 된, 팽배해 있는'으로 써야 바르다. 이런 단어들을 잘못 사용하는 까닭은 이들을 형용사인 줄로 착각해 이것을 다시 동사로 만들어 쓰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Board 말글 2010.11.26 바람의종 R 17488
핼쑥하다, 해쓱하다, 헬쓱하다, 헬쑥하다, 핼슥하다, 헬슥하다 남편과 두 번이나 사별하고 세 번째 결혼을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아내를 위하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그녀는 잘 웃지도 않고 날이 갈수록 핼쑥해졌다. 보다 못한 남편은 그 이유를 물었다. 그녀의 대답은 간단했다. "당신이 먼저 죽을까 봐 너무나 걱정돼서예요." 긍정의 힘은 기적을 낳기도 하지만 부정적인 생각은 마음의 병을 만들고, 마음이 병들면 건강하던 몸도 축나게 마련이다. 이처럼 몸이 약해져 마르고 얼굴에 핏기가 없는, 즉 병약한 느낌을 나타낼 때 흔히 '핼쑥하다'고 표현한다. 또 '핼쓱하다.핼슥하다.헬쓱하다.헬슥하다.해쓱하다.해슥하다' 등으로 쓰는 사람도 많다. 어떻게 표기하는 게 맞을까? '핼쑥하다' '해쓱하다' 외에는 모두 잘못 쓰이는 말이다. 한 단어 안에서 뚜렷한 까닭 없이 나는 된소리는 다음 음절의 첫소리를 된소리로 적는다는 규정에 따라 '핼슥하다' '헬슥하다' '해슥하다'로는 표기하지 않는다. 발음이 비슷해 '핼쓱하다'' '헬쓱하다'고도 많이 사용하지만 이 역시 틀린 말이다. "말라 보이는 몸매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마른몸매증후군에 시달리는 사람이 늘면서 '왜 이리 핼쑥해졌어?'란 염려에 오히려 반색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깡마르다 못해 해쓱하기까지 했던 브라질의 한 모델이 살을 더 빼기 위해 과일과 주스로만 연명하다 목숨을 잃은 일이 발생했다"처럼 써야 한다.
Board 말글 2010.11.26 바람의종 R 48941
안전문, 스크린 도어 추락 방지 등을 위해 지하철역에 설치한 문은 '플랫폼 스크린 도어(platform screen door)'가 정확한 표현이며, 국립국어원이 '안전문'이란 대체어를 선정했으니 그렇게 부르자는 내용을 지난해 2월 이곳에 게재한 적이 있다. 요즘 '안전문'을 설치하는 지하철역이 늘고 있으나 용어는 계속 '스크린 도어'로 쓰이고 있다. 보다 못한 한글문화연대(대표 김영명)가 서울도시철도공사에 '스크린 도어' 명칭을 '안전문'으로 변경해 줄 것을 정식으로 요청했다. 하지만 도시철도공사는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이를 거부했다. 우선 '안전문'이 순수 한글 명칭이 아닌 한자어라는 점을 부적합 이유로 내세웠다. 우리말의 약 70%가 한자어다. 지나치게 어려운 한자어는 피해야겠지만 '안전문'은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므로 한자어라는 것을 문제 삼을 바 못 된다. 그렇게 따지면 '지하철'이나 '철도'도 한자어다. '안전문'이 '스크린 도어'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는 것도 이유로 들었다. 국립국어원이 이미 신중하게 검토하고 네티즌의 의견을 반영해 선정한 '안전문'이 '스크린 도어'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고 강변한다면 도시철도공사가 국립국어원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결과를 낳는다. 도시철도공사는 '스크린 도어'와 함께 '안전출입문' 또는 '안전덧문'이란 용어를 병행 사용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도 밝혔다. 앞에서는 '안전문'이 한자어여서 부적합하다고 해놓고선 '안전문' 사이에 한두 글자만 추가한 '안전출입문' '안전덧문'을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다니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안전출입문' '안전덧문'이 다소 구체적이긴 하지만 이름은 짧을수록 좋다. 궁색한 변명으로 '안전문'이란 용어 사용을 거부하고 별반 차이도 없는 말을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다면서 미적거리는 것을 보면 도시철도공사도 우리말보다 외래어가 좋은가 보다.
Board 말글 2010.11.25 바람의종 R 95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