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시기 최근 '거시기'가 표준어냐 아니냐를 놓고 논란이 인 적이 있다. 결국 표준어라고 판정이 났지만(표준어 규정 제4항에 당당히 표준어로 예시되어 있음), 뭔가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기고 있다. 표준어라는 판정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은 여전히 이 말이 방언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충분히 이유 있는 의심이다. '거시기'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표준어 사정 원칙 제1장 제1항)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말은 호남 지역에서나 주로 들을 수 있다. 말하자면, '거시기'는 원칙대로 사정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충분한 언어 현실 조사 없이 사정이 이뤄진 결과이다. 이런 문제가 어디 '거시기'에 국한되겠는가? '시방(時方:지금), 짱짱하다(팽팽하다/튼튼하다), 식겁하다(질겁하다), 짠하다(가엾다)' 등은 국어사전에 표준어로 올라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방언의 혐의가 짙어 보인다. 이렇듯 치밀성이 결여된 표준어 사정도 문제지만, 표준어는 맞는 말이고 방언은 틀린 말이라는 일반인의 인식이 더 큰 문제다. 이것은 표준어 제도가 가져온 커다란 폐해이다. '거시기'가 설사 방언이라 할지라도 틀린 말이거나 열등한 말이 결코 아니다. 방언도 훌륭한 우리말 자산이다. 방언에는 우리말의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을 뿐 아니라, 언어의 역동성과 다양성이 살아 숨 쉬고 있다. 다만, 방언은 지역어이기 때문에 극히 규범적인 말이나 글에서는 쓰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Board 말글 2011.11.14 바람의종 R 10725
백넘버, 노게임 야구에서 백넘버가 처음 선보인 것은 1929년 미국 양키스 팀에 의해서다. 그 뒤 아메리칸리그는 31년에, 내셔널리그는 33년에 정식으로 백넘버를 사용하게 됐다. "박찬호가 백넘버 61번을 유지할 수 있을지가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이승엽이 자진해 25번 유니폼을 입고 미야자키 캠프에 들어갔다. 25번은 메이저리그에서도 마크 맥과이어.배리 본즈 등 홈런왕의 백넘버로 유명하다" 등에서 보듯 운동선수들은 각자 자신만의 고유번호, 즉 백넘버가 쓰인 유니폼을 입고 있다. 그러나 '백넘버'는 영어권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콩글리시다. 언중이 많이 쓰는 바람에 국어사전에도 올라 있지만 정확하게는 영어로 '유니폼 넘버(uniform number)'라고 해야 한다. '백넘버'의 우리말 순화용어는 '등번호'다. '백넘버' 말고도 스포츠에서 많이 쓰이는 '노게임' 또한 콩글리시다. "한국이 3-2로 이기고 있는 4회 말 상황에서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는 바람에 노게임이 선언됐다" "두산 선수들이 오랜만에 우천으로 인한 노게임 세리머니를 펼쳐 발길을 돌리는 팬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처럼 '노게임'이란 말이 흔히 사용되지만 영어에는 없는 말이다. '노게임' 대신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는 바람에 경기가 무효가 됐다" 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다. 이 밖에도 '노'가 들어간 '노 타이틀' '노 세일' 역시 콩글리시다.
Board 말글 2011.11.13 바람의종 R 8216
쌍둥밤 / 쌍동밤 조율이시. 차례에 쓰이는 과실을 상에 올릴 때 왼쪽부터 대추, 밤, 배, 감의 순으로 차린다는 뜻이다. 과실이 품은 씨의 수에 따라 감보다 배를 먼저 놓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율곡의 ''격몽요결''엔 율조시이로 돼 있는 등 지방이나 가정에 따라 그 순서는 조금씩 다르다. 제사상에 올릴 밤을 까다 보면 한 껍데기 속에 두 쪽이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할 때가 있다. 이런 밤을 가리켜 흔히 '쌍둥밤'이라고 한다. 생김새가 똑같은 쌍둥이를 떠올려 "얘야, 예로부터 쌍둥밤은 사이좋게 나눠 먹는 거라고 했단다"처럼 쓰는 사람이 많지만 '쌍동밤'이라고 해야 맞다. '쌍동(雙童)'과 '밤'이 합해진 말인 '쌍동밤'은 그러한 성질이 있거나 그와 긴밀한 관련이 있는 사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둥이'가 붙은 '쌍둥이'와는 그 구조가 다르다. '-둥이'가 붙어 이뤄진 말이 아니므로 '쌍둥'으로 적어선 안 된다. "밤송이를 까면/ 밤 하나하나에도/ 다 앉음앉음이 있어/ 쭉정밤 회오리밤 쌍동밤/ 생애의 모습 저마다 또렷하다"(오탁번의 '밤')와 같이 써야 한다. 쌍동아들.쌍동딸.쌍동중매.쌍동바람꽃도 마찬가지 형태다. 간혹 "독일산 밤은 표면이 울퉁불퉁하고 속껍질이 과육 내부로 파고들어 간 쪽밤이 많아 한국에서처럼 삶아서 찻숟가락으로 파먹는 게 힘들다"처럼 쌍동밤을 '쪽밤'으로도 쓰지만 아직은 표준어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Board 말글 2011.11.11 바람의종 R 9878
억지조어 "멋지君, 야한 girl, ○○ 속에 多있다" "○○주에 美치다" "水준이 다르다"-. 최근 지하철에서 본 광고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신세대의 감각에 호소하는 듯한 광고 문구다. 기발한 착상에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다. 그러나 이런 억지 조어는 우리말을 왜곡하는 행위로 역기능이 적지 않다. 한자는 뛰어난 조어력을 가지고 있다. 한자를 적당히 조합하면 그럭저럭 뜻이 통하는 새로운 말을 쉽게 만들어 낼 수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즉 외환위기를 ''환란(換亂)''으로 간명하게 표기해 일반화한 것이 좋은 예다. 하지만 위에서와 같이 광고 문구나 신문 제목 등에서 가끔 보이는 억지 조어는 우리말 파괴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정리해고 男存女悲" "세 사람 同床三夢" "쇼핑몰愛 빠졌다" "떠도는 돈 경매路 몰린다" "그리움 속으路" "성과급 富럽다" "오늘은 美쳐라" "유비무韓, 우리는 방심 안 한다" "技막힌 佛운" "濠好 아줌마, 반가워요!" 등이 이런 억지 조어다. "We-心心Free" "酒Go 걸리Go 酒Go" "Young원한 오빠" 등처럼 요즘은 영어까지 동원된다. 이런 억지 조어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시선을 끌 수는 있지만, 결국은 우리말 체계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특히 어린이 등 한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인터넷상의 언어 파괴와 더불어 우리말을 가벼이 여기게 하는 데도 일조하고 있다. 번득이는 재치가 있다면 억지 조어보다 세련된 우리말 표현을 찾는 데 머리를 쓰는 게 낫겠다.
Board 말글 2011.11.11 바람의종 R 8266
푸르름 최고의 권위와 최대의 어휘를 자랑하는 표준국어대사전에 단어 '푸르름'은 실려 있지 않다. 물론 이는 실수가 아니고 의도적인 배제임이 분명하다. 이유는 간단해 보인다. '푸르름'은 '푸르르-+-ㅁ'으로 분석되는데, 한국어 형용사에 '푸르르다'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규범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렇게 쉽게 폐기해 버리기엔 뭔가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첫째, 이 말은 수많은 문학작품에 쓰여 왔다. 애초에 음률을 고르기 위해 시어로서 쓰이기 시작했을 이 단어는 시뿐만 아니라 소설.수필 등에서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또한 일반인의 서정적인 글쓰기에도 자주 등장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 이미 상당한 언어 세력을 얻은 단어라 할 수 있다. 둘째, 규범형이라고 할 수 있는 '푸름'은 '푸르름'을 대신하기 어렵다. 둘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존재한다. '푸름'은 푸른 빛깔을 모두 가리키지만 '푸르름'은 숲이나 바다 등의 싱그러운 푸른빛만을 가리킨다. '푸르름'에는 특별한 정서적 분위기가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셋째, 중세 국어에는 '프르다'와 '프를다'가 병존했는데, '푸르름'은 기원적으로 '프를-+-음'일 가능성이 있다. 만일 이런 가정이 옳다면 '푸르름'이 문법적 일탈을 범했다는 혐의도 벗을 수 있다.
Board 말글 2011.11.10 바람의종 R 9685
暴 (포와 폭) '暴'는 '포'와 '폭'으로 읽힌다. 궁금한 점은 어떤 때 '포'로 읽고, 어떤 때 '폭'으로 읽느냐다. "조선조 제10대 왕 연산군(燕山君)은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켜 많은 선비들을 죽였으며, 폭군(暴君)으로 지탄받은 임금이다."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때린, 아들의 친구를 보자마자 난폭(亂暴)하게 주먹을 휘둘렀다." "교도소 재소자들이 폭동(暴動)을 일으켰다." "포악(暴惡)한 군주 밑에서 백성들의 고통은 날이 갈수록 더해 갔다." "권력을 잡은 자가 횡포(橫暴)를 부리면 국민의 고통은 끝이 없는 것이오." "일본의 지배가 워낙 야만적이고 흉포(凶暴)했으므로, 조선의 백성뿐만 아니라 전통문화는 특히 더 큰 손상을 입었다." "국제유가 폭등(暴騰)은 세계 자본주의 경제 구조에 일대 혼란을 야기했다." "우리는 어젯밤 폭음(暴飮)함으로써 분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간밤에 내린 폭설(暴雪)로 교통이 두절된 곳이 생겼다." '暴'의 음과 훈은 '사나울 포/폭, 햇빛 쬘 폭'이다. 그 뜻을 자전에서 찾아보면 '사납다(포) ; 모질다, 모질게 굴다(포) ; 쬐다(폭) ; 나타내다(폭) ; 갑자기, 급작스럽게(폭)' 등으로 나와 있다. '暴'는 폭군(暴君).폭도(暴徒).폭력(暴力).폭행(暴行).난폭(亂暴) 등 물리적인 힘을 불법적으로 사용할 경우 '폭'으로, 포리(暴吏).포악(暴惡).포학(暴虐).광포(狂暴).횡포(橫暴).흉포(凶暴)처럼 거칠고 사나운 성격 또는 사람을 해치거나 모질게 구는 기질을 뜻하는 단어에서는 '포'로, 폭등(暴騰).폭락(暴落).폭음(暴飮).폭우(暴雨)처럼 급작스러운 변화를 뜻하는 낱말에서는 '폭'으로 소리 난다.
Board 말글 2011.11.10 바람의종 R 16000
강냉이, 옥수수 어릴 적 시골에서는 설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뻥튀기 아저씨가 동네에 나타나곤 했다. 뻥튀기 기계를 돌리는 아저씨 옆에는 옥수수, 쌀, 마른 가래떡 등의 자루가 일렬로 늘어섰고 구경하는 아이들이 주변을 에워쌌다. 간간이 "뻥이요!" 하면서 이어지는 "뻥" 소리에 귀를 막고 즐거워하던 기억이 난다. 이처럼 옥수수.쌀 등으로 튀긴 것을 보통 '뻥튀기'나 '튀밥'이라 부르지만 지역에 따라서는 '강냉이'라 일컫기도 한다. 옥수수로 튀긴 것만을 '강냉이'라 부르기도 하고, '쌀 강냉이' '떡 강냉이'처럼 종류와 관계없이 뻥튀기한 것은 모두 '강냉이'라 지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옥수수'나 '강냉이'는 같은 말이다.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자 조선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했고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가 평양에 도착해 진을 쳤다. 이때 들어온 명나라 군사 중에는 양쯔(揚子)강 이남에서 차출된 사람이 많았는데 이들이 군량으로 가져온 옥수수가 민간에 퍼지면서 우리나라에 전해졌다고 한다. '강냉이'는 이렇게 양쯔강 이남인 강남에서 들어온 것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옥수수'는 수수 알갱이와 비슷하지만 그 모양이 옥처럼 반들반들하고 윤기가 난다고 해 '옥 같은 수수'라는 의미에서 이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1690년에 발행된 '역해유해'에는 '옥슈슈'라는 표기가 나오는데 '슈슈'는 '수수'의 옛말이다. 따라서 같은 물건(식물)을 두고 '강냉이'는 그것이 들어온 지역에서, '옥수수'는 그 생김새에서 유래한 말이다. 둘 다 표준어다. 강냉이와 옥수수가 같은 말이므로 '옥수수 강냉이' '쌀 강냉이' '떡 강냉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옥수수 뻥튀기(튀밥)' '쌀 뻥튀기(튀밥)' '떡 뻥튀기(튀밥)'라고 해야 한다.
Board 말글 2011.10.27 바람의종 R 10270
은폐, 은닉 미국의 부통령을 지낸 앨 고어가 출현해 화제가 됐던 '불편한 진실'은 지구 온난화의 심각성을 경고하는 다큐멘터리다. 미국과학자연맹이 정부 연구기관의 과학 보고서를 은닉하고, 과학 정보를 은폐해 환경오염을 외면했다고 비난해 온 부시 대통령은 보지 않겠다고 선언한 영화이기도 하다. 이처럼 무언가를 숨기는 것을 '은폐' 또는 '은닉'이라고 한다. 둘 다 감춘다는 뜻으로 사용하지만 그 쓰임의 대상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은폐(隱蔽)는 '적에게 관측되지 않도록 주변의 지형지물을 이용해 인원.장비.시설 등을 숨기는 일'이란 군사 용어로 쓰일 때를 제외하곤 진실.사건.잘못.죄상 등 주로 추상적 개념과 어울려 '덮어 감추거나 가리어 숨긴다'는 뜻으로 사용한다. 이들 단어를 '은닉'과 함께 쓰면 부자연스럽다. "부시는 지구 온난화가 이산화탄소 때문이란 확증이 없다며 기업의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덜어 주는 등 과학을 정치도구로 이용하고 진실을 은폐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세계 최대 석유기업인 엑손모빌이 유엔 기후변화 보고서에서 지구 온난화의 해악을 은폐하기 위해 과학자들에게 1만 달러씩 주겠다고 제의한 적이 있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이 보도했다" 처럼 써야 한다. 은닉(隱匿)은 "장물을 은닉하다" "불법 자금을 은닉하다" "수배자를 은닉하다"와 같이 주로 남의 물건이나 재산, 범인을 숨기는 데 국한해 쓰인다. 이때도 '은닉' 대신 '은폐'를 사용하면 어색한 문장이 된다.
Board 말글 2011.10.25 바람의종 R 11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