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여성의 이름 - 언년이, 영자, 정숙, 한송이 남존여비, 남아선호 사상에 찌든 지난 세월 우리의 할머니, 어머니들은 무명의 존재로 살아왔다. 1910년 최초로 민적부가 만들어질 무렵 약 80퍼센트에 달하는 여성들이 이름이 없었고 또 10퍼센트는 성조차도 없었다고 한다. 모든 여성은 태어나면서부터 초보적인 식별의 필요에 따라 임시로 불린 젖이름(아명)이 있었을 뿐이다. 곱단이, 삼월이, 광주리, 자근년정도로 호칭되던 아명도 시집을 가면 그나마 없어지고 대신 남편이나 자식의 이름에 덧붙여 한평생을 이름 없이 보내게 된다. 여자에게 혼인은 남편의 인권적, 법률적 단위로의 종속을 뜻하기에 독립적 지위의 표현인 이름이 있을 리 만무했다. 민적부 작성 당시에 이런 일반적인 아명, 그것도 토박이말로 불리던 이름을 한자로 기록해야 했던 면직원의 고충은 매우 컸을 것이다. 아들인 줄 알았다가 그만 딸이어서 섭섭이, 서운이, 얼굴이 예쁘다 하여 이쁜이, 개처럼 아무거나 잘 먹는다고 해서 동개 또는 개야등의 이름을 기록하기 위해 면직원들은 그야말로 창작에 가까운 차자표기를 시도했을 것이다. 아명이 어색해질 무렵 여성은 출가와 동시에 택호라는, 이름 아닌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자신이 태어난 친정의 지명, 남편이나 자식놈의 이름 밑에 "-댁" 이라는 접미사를 붙이는 호칭법을 택호라고 한다. "과천댁, 남산댁, 샘골댁" 따위가 친정 택호요, "돌쇠댁, 삼동이댁, 진동이댁"등이 남편 택호며, "개똥이엄마, 똘똘이엄마, 자야엄마"등이 자식 택호인 것이다. 우리 여성들이 이런 무명의 시대를 지나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얻게 된 것은 한일합방 이후의 일이었다. 우리 민족은 일제에 의해 종속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여성은 오히려 독립을 쟁취했다고나 할까. 한국 여성이 처음 가지게 된 이름은 미에꼬, 다마꼬, 아끼꼬, 히데꼬등 일본식의 "꼬"였다. 우리 발음대로 한다면 영자, 순자, 미자, 숙자, 애자, 춘자등 이른바 "영자의 전성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서울 모 여고에서 1944년생 학적부를 조사해 봤더니 260명 졸업생 가운데 절반이 훨씬 넘는 160명이 이런 "영자식"이름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사십대 이상의 주부들이 모이는 자리에 가서 "영자야", "순자야" 하고 소리쳐 부르면 반수 이상의 아주머니들이 호응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이런 영자의 전성시대는 5공 시절 대통령 부인인 순자의 전성시대를 거쳐 집권 여당인 민자당의 민자의 전성시대에 와서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영자의 전성시대는 광복과 함께 정숙의 전성시대로 이어진다. 상투적인 작명법에 대한 반발에서인지, 아니면 일제의 잔재를 씻어내려는 애국심의 발로인지는 모르겠으나 "자" 자식이름은 점차 자취를 감추고 대신 여성다움을 강조하는 한자어가 등장하게 되었다. 여성의 고유정서를 반영하는 한자가 그런 글자들이다. 이 이름들은 종래의 무개성한 고정틀을 깼다는 점에서는 진일보한 것이나 여전히 한자의 굴레나 남녀구분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최근에는 남녀 구분을 무시한 이름, 이를테면 세돈, 신경, 명환, 인영, 창림, 현호등이 등장하여 남녀평등 사상을 과시하고 있다. 아들딸 구분없이 한 자녀만 낳아 기르려는 현 사회에서 바람직한 경향이라 하겠다. 한걸음 더 나아가 아름다운 우리말 이름이 등장하여 새로운 맛을 더한다. 김나라, 이누리, 김바로나, 장한빛, 원빛나, 한아름, 조약돌, 김한솔, 한송이, 한가람, 오사랑, 금잔디, 윤봄시내, 강버들등이 그런 유형이다. 의미도 좋을뿐더러 감각도 매우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나라나 누리는 한 뿌리에서 나온 말로 옛 지명이나 인명에서 많이 쓰였다. 이 밖에 하나, 두나, 세나와 같은 수사를 비롯하여 유리, 아리, 나리, 새로미, 새미등도 최근에 매우 선호하는 여성 이름들이다. 이들 인기있는 여성 이름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서구계 여성명에 영향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서구계 이름의 유형에서 "-아"형과 "-이"형이 전체 여성의 73퍼센트를 차지한다는 보고서가 있다. 이를테면 "주리, 마리, 낸시, 베티"등의 두 음절이 "-이"형이며 "마리아, 수산나, 루치아, 마르타, 새로나"등의 세 음절이름이 "-아"형이라는 것이다. 이들 이름이 비록 서구어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나 받침이 없어 발음하기도 좋고, 앞서 예든 나라, 누리처럼 의미도 좋기 때문에 전혀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박미리, 조아리, 고우리, 정메아리, 맹다리, 최새로미, 우수미, 이새미"등의 "-이"형 이름이나 "윤새라, 김하나, 박두나, 정세나, 이루다, 고루다"등의 "-아"형의 이름도 현대적 감각을 갖춘 좋은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최근 각종행사에 동원되는 봉사자들을 "도우미"라고 칭한다. 발음도, 의미도 좋은 적절한 용어라 생각되지만 이 말을 여성 봉사자에게 국한 시킬 필요는 없다고 본다. 또 신세대의 이름이라 하여 이처럼 가볍고 산뜻한 어사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지나치게 현대적인 세련미만을 찾는다면 이름이 지니는 또 다른 맛을 잃을 우려도 있다. 지난 시절 애용되었던 몽실이, 광주리, 복실이, 동고리, 송이, 어진이, 음전이, 예쁜이, 점박이 등은 다소 촌스러운 데가 있지만 그런대로 예스럽고 소박한 멋이 있지 않은가.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고유어 인명 - 돌쇠면 어떻고 개똥이면 어떤가 고향 마을에 개동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저씨가 계셨다. 간혹 친구분들과 허물없이 주고 받던 농담이 생각난다. "야 이 똥개야, 느거 모심기 언제 할 끼고?" "이놈아, 이름 좀 똑바로 부르거라. 내가 우째 똥개고?" 이때 옆에 있던 또 한 사람이 말추념에 든다. "아따, 똥개나 개똥이나 그게 그거 아잉가." 이 아저씨의 젖먹이 이름이 개똥이다보니 그만 평생의 본명으로 굳어지고 말았다. 요즘 사람 같으면 진작 버렸어야 할, 이 천한 이름을 아저씨는 용케 평생 간직해 왔다. 언젠가 "이산가족 찾기"에 나오는 노인분들의 이름에서 김간난, 이언년, 박삼월, 최자근애기, 정음전, 조복실, 박몽실, 김조갑등 낯익은 이름을 대할 수 있었다. 간난은 갓 낳은 이를 뜻하고, 언년은 아들을 바랐으나 기대에 어긋난 여자(년), 조갑은 여성을 상징하는 "조가비"를 지칭하는 이름이다. 이런 고유 이름은 대게 강아지, 두꺼비와 같은 동물명이나 마당, 우물 가와 같은 출생지에서 따온 것들이다. 또 삼월이, 보름과 같은 출생 시기나 이쁜이, 깜둥이와 같은 용모나 성격에서 딴 이름도 더러 있다. 현대인의 정서에는 유치한 듯 보이나 재미있고 소박하기 이를데 없는 이름들이 아닌가. 앞서 말한대로 우리 조상들의 이름은 삼국시대까지는 순수한 고유어로 지어지고 음절수에도 제한을 받지 않았다. 거시마루(거칠부), 이사도(이차돈), 흑치상지, 노리사치계, 구례칠급벌간, 아라눌척실리, 동오로첩목아 등등은 한자로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어형을 재구하기 어려우나 모두 전통적인 우리말임에 틀림이 없다. 옛이름 중에 우리는 아직도 의리의 사나이 돌쇠를 기억하고 있다. 가장 흔했던 이름이면서 천하게 여기는 "돌쇠"에 대해서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신라 고허촌장이 소벌도리였고 지증왕의 본 이름이 지도리였다. 여기서 도리는 "돌"로 축약되어 "순돌이, 꾀돌이, 바람돌이, 호돌이, 꿈돌이"등과 같이 남자 이름의 애칭으로 쓰인다. 그런데 이 "도리, 돌"을 단순히 돌(석)로 생각하여 특별히 한국식 한자를 만들기도 하고, 때로 돼지의 옛말 "돌"로 생각하여 자식을 일러 우리집 "똘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본래의 "도리"는 돌도 돼지도 아니고 귀한 자식을 이르는 호칭어였음을 알아야 한다. 어디 도리, 돌뿐일까. 돌쇠, 마당쇠의 인명 접미서 "쇠"가 그렇고, 장사치, 양아치의 "치", 뚱보, 울보의 "보", 검둥이, 귀염둥이의 "둥" 같은 보통 이름들이 세태의 변천에 따라 한결같이 흔해빠진 천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는 오로지 한자말 이름을 귀하게 여기고 우리말 이름을 천시한 데서 비롯된 일종의 언어 사대주의의 소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성씨나 이름이 지금처럼 한자어로 틀을 갖추게 된 것은 1910년 민적부 작성 이후의 일이다. 채 벽년 안되는 역사를 가지고 우리는 이 방식을 수천년 내려온 전통처럼 잘못 생각하고 있다. 더구나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한자 이름 일색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결코 내세울 만한 일도 분명 아니다. 그런데 최근 서구계 중심의 외래어가 우리 이름에 얼굴을 내밀고 있다. 패티 김, 쟈니 윤, 앙드레 김과 같은 일부 연예계 인사들에서 JP, YS, DJ와 같은 정계 인사에 이르기까지 이런 유행이 확산되고 있는데, 이들이 모두 유명인이나 지도층 인사들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언어사대주의의 빌미가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그러나 최근 일부에서 우리말 이름이 되살아나는 바람직한 현상도 눈에 띈다. "금난새"라는 음악가의 이름에서 비롯되어 이후 "고운 이름짓기" 모임을 중심으로 배우리, 이대로, 신난다, 박보람, 이하나, 서달샘, 서바로, 손세모돌, 한빛나리 등의 이름이 뒤를 잇고 있어 이름에서도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느낌이다. 옛 선인들의 이름 가운데 누리, 나라, 마루, 서리, 아리, 수리, 고마등의 고유어는 지금도 되살려 쓰고 싶은 이름들이다. 고유어라고 해서 무조건 촌스럽고 고리타분한 것은 아니다. 생각을 바꾸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세련된 이름으로 거듭 날 수 있다. 요는 우리것을 찾고 이를 아끼는 마음가짐에 있다고 하겠다. 젖이름이란 대게 아이가 태어난 지 사흘에서 이레만에 지여주는 이름으로 남자의 경우 관례 때까지, 여자의 경우는 죽어서 장례 때까지 부르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남자 젖이름의 대명사 "노마"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게 아니라 그저 "놈아"의 호칭에 불과하다. "아이고, 내 강아지야!", "이렇게 이쁜 내 새끼", "우리집 돼지들이 잘도 먹는구나" 필자가 어렸을 때 할머니에게서 자주 듣던 호칭어들이다. 똥, 오줌을 가리게 된 자식에게 밥을 맛있게 잘 먹는 자식들에게 우리의 어버이들이 곧잘 쓰던 애칭이 아니던가. 예로부터 천명위복이라 했다. 천한 이름이 오히려 복이 된다는 뜻인데, 이처럼 저명한 인사의 이름이라고 해서 반드시 고상할 필요는 없다. 그 사람의 용모나 개성이 잘 드러나고 부르기 좋으며 기억하기 쉬우면 그만일 터이다. 장수라고 해야 꼭 오래살고 명철이라 해야 꼭 똑똑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야말로 돌쇠면 어떻고 개똥이면 어떤가?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인명의 작명 - 이름을 불러 주는 의미 김춘수님은 "꽃"이라는 시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까지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름을 불러 준 뒤로 그는 나에게 꽃이 되었다고 했다. 타인의 이름을 불러 주는 의미는 그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고 관심과 애정이 있음을 드러내는 일이다. 세상 만물은 이름이 있음으로써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경에 보면 하느님은 아담에게 이 세상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이름을 지으라고 명하셨다고 한다. 아담(Adam)이라는 말의 뜻도 "이름을 짓는 자"라고 하니 우주 삼라만상은 생성과 함께 존재 가치를 부여받은 셈이다. 창세기 이후 이 지구상에는 수많은 인류가 나고 죽었다. 그 무수한 사람들의 이름은 누가 지어 주었을까? 성경 말씀대로라면 하느님의 위임을 받은 제 2, 3의 아담에 의하여 지어졌을 터이다. 그러나 누구에 의해 작명되었건 그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떤 이름을 부여 받았든지 이름이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은 이름의 소유자가 어떤 삶을 살았느냐 하는 점에 달려 있다. 지하철에서 "누가 이름을 함부로 짓는가"라는 표제의 책광고를 본 적이 있다. 너무나 강렬한 질책성 제목에 순간적으로 멈칫했으나 이내 "왜 이름을 함부로 지을수 없는가"라는 강한 반발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름은 누구나 마음대로 지울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장미를 장미라고 부르지 않아도 아름답다고 했다. 이름을 남들이 얼마나 많이 불러 주고, 또 그것이 어떤 의미나 가치를 지니느냐 하는 점은 오로지 이름의 주인에 달린 문제이다. 필자는 고유명사에 대한 학위 논문을 쓰면서 수없이 많은 고대 인명을 조사해 본 경험이 있다. 그 결과 한자를 빌려 표기한 옛 사람들의 이름이 모두 지금처럼 작명법에 따라 지은 이름이라 생각되지 않으며, 또 현대인들도 이름이 좋아 장수하고 출세하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이름을 빛내는 일도, 그 이름에 먹칠을 하는 일도 모두 자기 하기 나름이 아니겠는가. 앞서 언급한 셰익스피어는 이름의 철자가 너무 까다로워서 이를 제대로 쓰는 사람이 드물었으나 정작 당사자는 틀린 이름자를 보고도 태연했다고 한다. "일백개의 셰익스피어가 있다 한들 나라는 본질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름은 나에게 손톱과도 같은 하나의 속성에 불과하다."고 했다던가. 이름 한 자만 틀려도 온통 난리가 나는 줄 알고 있는 우리와는 정말 대조적이다. 작명법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인은 이름에 대한 집착이 너무 지나친 것 같다. 문패는 물론 명함에도, 화환이나 죽은뒤 비석에도, 심지어 낙서에 이르기까지 자기 이름을 새겨 놓아야 직성이 풀린다. 석굴암 보수 공사 때 발견된 낙서 가운데 본존불의 이마와 콧등에까지도 이름을 새겨 놓은 사람이 있다고 하니 가히 병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착오로 이름이 다소 틀렸다 해도 그렇게 큰일이 나는 게 아니다. 자의성이 언어의 본질이듯 이름도 자연스럽게 짓고 자유롭게 불러 주면 그만이다. 미국의 인디언들은 꼭 하나의 이름만을 고집하지 않으며 성과 이름의 전통성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언젠가 개봉된 "늑대와 함께 춤을"이라는 영화에서 보았듯이 그들의 작명은 매우 자연스럽게 이루어 진다. 새 사람을 만나면 언제든지 새로운 이름을 지어 줌으로써 새로운 인간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도 평생 두서너개의 이름을 가지고 행세했다. 어려서는 젖이름(아명)이 있고, 부모가 지어준 본명과 함께 성인이 되어 자를 가진다. 벼슬길에 나서면 관명이 붙고 사회적인 지위나 교분에 따라 아호가 생겨 본명을 대신한다. 이런 이름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 부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어느 프랑스 신부가 한국인의 이름 부르기는 자국어의 동사 변화보다 더 까다롭다고 엄살을 부렸을 정도라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죄인에게는 이름을 불러 주지 않는다. 이름 대신 수인번호로 다른 사람과 구분할 뿐이다. 사람뿐 아니라 땅에도 고유 이름, 곧 지명이 있게 마련이다. 가능하다면 고유지명을 불러 주는게 마땅한데, 때에 따라 아무 죄도 짓지 않은 땅에 이런 수인번호를 붙이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신림 1동, 2동, 3동이나 봉천 1동, 2동, 3동등이 그러한데 이는 그 땅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행정상의 편의만 생각한다면 서울의 모든 동명을 서울 1동, 2동식으로 불러 주면 더 편리 할지 모른다. 우리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가 우리 앞에 꽃이 되는 것처럼 고유 이름을 불러 줄 때 그 땅도 비로소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우리의 인명은 삼국시대까지는 순수한 고유어로 지어지고 음절수에서도 제한을 받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아름답고 인상적인 이름을 얼마든지 많이 남기고 있다. 그러나 통일 신라 이후 이름의 한어화는 애석하게도 아름다운 고유어를 몰아 냈을 뿐 아니라 항렬을 맞추고 음양오행설에 따르는, 한자 2자제의 전통적인 작명관에 따라 이름에서의 자유와 개성을 잃고 말았다. 이제 이런 작명법의 굴레를 과감히 탈피해야 겠다. 아름다운 우리말로서 부르기 좋고 기억하기 쉬운, 개성있는 이름을 가질 권리가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왜 이름을 함부로 지을 수 없는가? 더 이상 이름자체에 대한 집착이나 주술적 사고는 끊어 버리자. 누구나 자연스럽게 그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지어주고, 그 이름이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잊혀지지 않을 하나의 의미가 되게 하자.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고유 이름 산책 서울과 한강 - "아리수"가의 새마을 조선 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는 즉위한 지 3년 만인 1394년(음력 10월 25일)에 새로운 도읍지로 한양을 택한다. 따라서 1994년(11월29일)은 서울이 정도 600주년을 맞는 뜻 깊은 해였다. 도읍지로서의 서울의 역사는 이보다 더 멀고도 깊다. 지금부터 2천여년 전 이 땅에 삼국이 정립되던 시기, 곧 백제의 온조왕이 처음 도읍을 정한 때로 소급되어야 한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이 지역의 이름 또한 숱한 변화를 겪어야 했다. 문헌에 따르면 백제 초기 이 지역의 이름을 위례성이라 적고 있다. 우리글이 없던 때라 한자로 적고 있으나 위례는 "우리골" 또는 "여르(열)골"이라는 우리말을 차자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울"은 울타리, 신울 등에서 보듯 경계를 뜻하는 말로서 "나"의 복수형 "우리(we)"의 기원이 되기도 한다. "여르", 또는 "열(고어로는 열히)"은 수사 10을 뜻하는 말로 백제 초기에는 "여르제", 곧 십제라 불렀던 것으로 짐작된다. 초기에는 열 개 정도에 불과했던 마을(씨족 및 부족)이 점차 백여 개로 늘어나면서 "온제"라 부르게 되어 지금의 백제라는 나라 이름을 얻게 되었다. 수사 백의 고유어가 "온"인 것을 고려하면 온제란 말과 시조의 호칭 온조와는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온조의 "조"나 십제, 백제의 "제"는 마을을 뜻하는 고유어를 각기 다른 한자로 차음 표기한 것이다. 따라서 위례의 여르골은 열 개에 이르는 고을이란 뜻이며, 우리골은 마을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곳에 토성이나 목책을 울러 우리(울)을 쌓은 도성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지금도 "나"라는 단수보다 "우리"라는 복수 대명사를 즐겨 쓰는 것도 한 울타리 안에 사는 공동 운명체라는 본뜻이 좋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골은 언제까지나 우리의 골이 되지 못하고 세력의 부침에 따라 다양한 변화를 겪는다. 한산, 북한성, 남평양, 신주 등이 삼국시대에 사용되었던 이름인데, 이 가운데 한산의 "한"과 "신주"의 "신"이라는 말이 주목된다. 다만 고유어인 "한"을 표기한 차음자는 한민족이라 할 때의 한으로 적지 못하고 중국인을 지칭하는 한으로 적은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고유어 "한"은 누구나 다 아는 것처럼 크다(대)는 뜻으로 "한모르" 또는 "한뫼" 정도로 부르던 이름을 한산으로 표기했을 것이다. 또한 한산을 끼고 흐르는 강도 한수 곧 한강이라 이름하였다. 한양은 이 한수에서 나온 이름으로 지명에서 산의 남쪽, 강의 북쪽을 양(강의 남쪽은 음)으로 보기 때문에 한양이 된 것이다. 우리 고유 지명을 두 자의 한자식 이름으로 고친 신라 경덕왕 이후 한주 또는 한양군이라 불리던 서울은 고려에 와서 양주 또는 남경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양주는 버들골이라 불리던 곳이 한어식으로 변한 것이며, 남경은 고려의 수도 개성을 염두에 두고 붙인 이름이었다. 그러나 조선 왕조가 들어서면서 도읍을 이곳으로 옮김에 따라 본이름 한양, 한성을 되찾게 되었다. 5백 년 왕업과 운명을 같이한 한양은 일제 때 경성(경성, "게이쪼오")으로 일시 개칭되었다가 광복과 함께 그 옛날 신라 국명의 기원어가 된 "서울"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서울은 한반도에서 최초로 통일 성업을 이룩한 신라의 본이름인 서라벌 또는 서벌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새로운 마을(신읍)"을 뜻하는 고유어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서벌의 "서"는 새롭다(신)의 "새"와 샛바람(동풍)의 "새"와 같은 뜻이며 "벌"이 마을을 뜻하기에 서벌은 새로운 도시, 곧 새마을이 된다. 광복 후 한자식, 일본식을 거부하고 이렇게 고유한 이름을 찾게 된 것이 무엇보다 반가운 일이다. 특히 제 24회 서울 올림픽을 치른 뒤부터 서울은 지명의 뜻 그대로 뻗어나는 국력에 힘 입어 세계 속의 "새로운 도시"로 부상하게 되었다. 서울을 끼고 흐르는 한강 역시 서울 올림픽을 통해 온 세계인에게 새로운 모습으로 부각되었다. 올림픽에 즈음한 각종 행사가 한강에서 시작되고 한강에서 끝났기 때문이다. 인류 문명의 발생이, 또 한 도시의 형성이 물(강) 가에서 비롯되었기에 강을 중심으로 펼쳐진 행사는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한강은 큰 강을 뜻하는 말이지만 본래 이름은 "아리가람"이었다고 추정된다. 사료에 따르면 한강을 비롯한 낙동강, 압록강, 송화강과 같은 큰 강(또는 긴 강)은 모두 "아리수"라 기록하고 있다. "아리"는 길다(크다)는 뜻 외에도 아래(하)나 앞(전) 또는 남쪽(남)을 나타내는 고유어였다. 대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주거지나 집은 산을 등지고 강을 마주하는, 이른바 배산임수로 앉는 것이 통례이다. 방위어에서 뒤는 북쪽이요 앞은 남쪽이므로, 멀리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강은 이러한 방위에 따라 고유 이름으로 삼는 예가 많았다. 아리수, 아리가람도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새마을에 아리수가 흐른다. 백제의 위례, 조선의 한양, 일제하의 경성, 그리고 한국의 서울로 이어지는 수도로서의 역사는 유구하지만 언제나 새로운 이름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제 남북통일이 이루어지는 날 서울은 또다시 새로운 수도로 거듭날 것이다. 이 새 수도를 안고 흐르는 큰 강 아리수 역시 이름 그대로 먼 미래를 향해 영원히 흐르는 강이 될 것이다.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고유 이름 산책 전철역의 이름 - 향토색 짙은 서울 역명 복잡한 도시에서 출퇴근하면서 새삼 지하철의 고마움을 느낀다. 만약 전철이 건설되지 않았다면 이 엄청난 교통량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서울이나 부산 같은 대도시는 혼란의 극을 달리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쾌적하면서 대량 수송이 가능한 지하철(전철)은 말 그대로 도시 교통의 총아라 할 만하다. 전철을 이용하면서 이따금 못마땅한 점도 눈에 띈다. 전공이 우리말인 만큼 자연히 전철에서 사용하는 용어나 표지판, 이를테면 역이름이나 안내문 또는 안내 방송 등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지적된 바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철역에서 이런 안내 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 "지금 열차가 도착하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들은 안전선 밖으로 한걸음씩 물러나 주시기 바랍니다." 아무 생각없이 듣고 지나치던 말이지만 곰곰이 따져 보면 잘못된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도착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서 이미 완료된 상태를 나타내고, "안전선 밖"이라면 안전하지 못한 위험 지역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안내말은 이렇게 고쳐져야 마땅하다.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은 안전선 안으로 한걸음씩 들어와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최근에 이와 비슷한 문안으로 바뀐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된다. 열차를 바꿔 타는 역을 환승역이라 한다. "바꿀 환"에 "탈 승"을 결합한 한자 조어인데, 아마도 일본의 승환이라는 용어를 모방한 것 같다. 전철역 중에서 종로 3가는 1호선과 3호선이 만나는 역이며, 을지로 3가는 2호선과 3호선이 만나는 역이다. 이처럼 두 선이 서로 교차하는 역을 쉬운 우리말을 써서 그냥 "만남역"이라 하면 어떨까? 고속도로 휴게소를 "만남의 광장"이라 부르고 있으니 만남이라는 그 자체가 매우 의미있는 말이기에 하는 소리다. 개별적인 역이름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역명의 명명에는 그 지역의 고유 지명이 우선으로 채택되어야 한다. 때로 관청명이나 학교명, 또는 주요 건물명이 역명으로 쓰이고 있으나 이들이 고유지명에 우선하는 것은 아니다. 역명은 또한 그 도시의 특성을 드러낼 수 있는 이름이라면 더욱 바람직하다. 서울은 대학의 도시가 아니라 고궁의 도시며 북한산과 남산, 한강이 어우러진 천혜의 경승을 자랑하는 도시다. 그런데 5백년 도읍지였음을 드러내는 고궁명 또는 남산이나 한강에서 연유한 지명이 전쳘 역명에 얼마나 반영되고 있는가? 중앙청역을 경복궁역으로 고친 것은 바람직하다. 보신각이 있는 종로 2가는 종각역이라 명한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좀더 욕심을 부린다면 종로 3가역을 종묘역이나 돈화문역으로 명명했더라면 더 좋았을 게다. 아울러 시청역도 덕수궁역으로 바꾸자고 주장하고 싶다. 전부터 시청을 옮긴다는 풍문이 있었는데, 만약 옮긴다면 "구시청역"으로 불러야 하지 않겠는가. 누가 보아도 시청이 옮겨 갈 가능성은 있어도 덕수궁이 옮겨 갈 가능성은 전혀 없기에 하는 말이다. 지역 역명도 이왕이면 우리말 이름이면 좋겠다. 5호선에는 강서로와 곰달래길 교차 지점에 "까치산역"이라는 이름이 있어 산뜻한 인상을 준다. 출근길에 이 역을 지나면 청아한 까치 울음이 들릴 것만 같다. 숨막힐 듯한 도회의 콘크리트 숲에 갇힌 시민들에게 향토색 짙은 역이름만으로 잠시나마 숨통을 트여 줄 수가 있다. 대야미, 상록수, 도봉산, 망원산, 연신내, 무악재, 구파발, 뚝섬, 강변 등은 이름만 들어도 포근하고 정겹지 않은가. 최근 발표된 6,7호선 역명에는 이런 고유지명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 다행스럽다. 서강역, 삼각지역, 녹사평역, 한강진역, 봉화산역을 비롯 불광동의 독바위역, 갈현동의 연신내역, 신당동의 버티고개역, 석관동의 돌곶이역, 상도동의 살피재역, 신길동의 보라매역, 상도동의 장승백이역에 이르러서는 지명에 고유어가 파격적으로 많이 들어간다는 점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이와 같은 고유지명은 불필요하게 대학명이 주류를 이루었던 3,4호선과는 완전히 대조가 된다. 여기서 불필요하다는 건 위치도 잘 맞지 않을뿐더러 그것으로 대학을 홍보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다. 동대 입구, 한성대, 성신여대, 서울대, 총신대, 성대, 홍대, 이대, 한대, 교대, 건대 등의 대학 역명은 장춘단, 삼선교, 돈암동, 신림동, 이수교, 율전, 서초동, 연희동 등의 고유지명에 이름을 넘겨 주어야 옳다. 대학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앞서 말한 대로 대학명이 고유지명에 우선할 수 없기에 하는 말이다. 서울 사람치고 삼선교나 돈암동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게다. 지하철 삼선교 역사에는 세 신선을 그린 모자이크가 장식되어 있다. 세 신선상은 그림으로 남아 있으나 가장 중요한 삼선이란 이름은 엉뚱하게 먼 거리에 있는 대학에 빼앗기고 구차스럽게 "00대 입구(삼선교)"하며 괄호 속 신세가 되고 말았다. 돈암동 역시 마찬가지 신세여서 그 옛날 오랑캐 됫놈들이 넘어왔던 "되너미고개" 돈암은 지금 인근 여자 대학에 이름을 빼앗긴 채 그만 한 많은 고개가 되고 말았다. 지명은 단순히 지표상의 한 표지만도, 또 하루 아침에 붙여지는 일시적인 이름만도 아니다. 고유지명은 문자 이전의 시애부터 존재해 왔다. 또한 이들은 생물 유기체와도 같은 진화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른, 고유어의 화석과도 같은 존재다. 그것은 또한 어제와 오늘이 함께 숨쉬는 시제 없는 언어로서 그곳에 살아 온 많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 뿌리내려 있는 만큼 쉽게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전철역 이름 하나 짓는 데도, 또 그 이름을 불러 주는 데도 조상이 물려 준 정신적 유산을 소중히 대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고유 이름 산책 신도시의 이름 일산과 김정숙군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영변에 약산 / 진달래꽃 /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봄이 오면 우리 땅 어디든 진달래가 피지 않는 곳이 없으련만 우리가 유독 영변을 떠올리는 건 김소월의 "진달래꽃" 덕분이리라. 비록 가볼 수 없다 하더라도 영변은 우리에게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핀, 연인들의 애틋한 이별의 현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런데 진달래꽃의 본고장 영변에 지금은 원자력 발전소가 있고 핵무기를 만드는 시설이 들어서 있다고 한다. 이별의 고장, 명시의 무대가 지금은 죽음과 공포의 무대로 돌변했다고나 할까. 진달래를 나라꽃(국화)으로 섬긴다는 북한이 하필이면 왜 그 꽃의 본고장인 영변에 핵무기 공장을 세울 계획을 세웠을까? 대포동에는 미사일 기지가 있다고 한다. 미사일도 대포의 일종이기에 그 이름은 그런 대로 어울린다고(?) 하겠다. 노동 1호, 노동 2호의 미사일명에서 "노동"은 노동이 아니라 지명이라고 한다. 어떻든 영변에 핵시설이 있다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세월 따라 강산이 변할지라도 우리에게는 꼭 간직하고픈 지명의 유래와 전설이 있다. 영변의 진달래도 그런 것 가운데 하나이다. 영변이 핵무기가 아닌 진달래의 전설로 남아 있을 때, 어느 시구처럼 무궁화도 진달래도 백의로 물드는 그날이 올 때 비로소 하나 되는 한반도, 한마음 되는 그날이 오리라 믿는다. 북한은 해방 후 반세기 동안 15회에 걸쳐 행정 구역을 개편했기 때문에 생소한 지명이 너무나 많다. 장진강과 허천강의 두 강에서 연유한 양강도, 평북 자성과 강제의 머리글자를 딴 자강도라는 도명도 우리에겐 생소하다. 그러나 이보다는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랄 수 있는 특수한 지명들, 이를테면 김일성의 부친명을 딴 김행직군, 전처명을 딴 김정숙군, 김정일을 지칭하는 새별군, 항일 유격대 대장이었다는 김책시 등은 우리를 더욱 당황스럽게 한다. 사람 이름을 딴 지명뿐 아니라 선봉군, 영광군, 낙원군, 천리마구역, 붉은거리동(평양), 태양동, 영웅동, 해방동, 전우동, 충성동, 전진동, 전승동 등도 한결같이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통일이 되면 이 지명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새롭게 마을이 조성되었을 때는 거기에 어울리는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다. 다만 새 이름을 지을 때는 지역의 특성에 어울리는 합당한 이름을 찾아내야 한다. 북한의 경우처럼 국가 이념이 지나치게 강조되어서도 안 될 것이고, 남한의 경우처럼 충분한 논의 없이 졸속으로 명명되어도 또한 곤란하다. 최근 수도권에 건립된 신도시의 이름에서 졸속의 예를 찾는다. 대표적인 신도시로 분당을 들 수 있겠는데, 이 지명의 유래와 뜻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 같다. 언뜻 생각하면 어떤 정당이 둘로 나누어지는 분당인 것도 같고, 또 "당"자가 있어 중국의 지명을 흉내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분당은 본래 분점리와 당우리가 합칠 때 머리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두 마을이 합칠 때 이런 식으로 머리글자를 따면 두 지역민의 반감을 줄인다는 이점은 있으나 지명 본래의 뜻을 잃어버린다는 단점도 있다. 정작 분당의 중심지는 "돌뫼(돌산)로서 이 이름은 채택되지 못하고("돌마"라는 이름으로 일부 남아 있음) 일제 때 억지로 붙인 분당이라는 이름만 남게 된 것이 아쉽기만 하다. 이름은 한 번 불리어지기 시작해면 다시 바꾸기 어렵다. 분당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이를 합당으로 고칠 수도 없는 일이니만큼 처음부터 명명에 신중을 기했어야 옳았다. 이런 지명은 비단 분당만이 아니다. 산본이나 평촌, 일산 중동 등 수도권 신도시의 이름이 한결같이 일본식 지명의 잔재라는 것은 이미 지적된 바 있다. 특히 산본이나 일산은 일본인의 이름 냄새가 진하게 풍겨 꺼림칙하다. 산본이란 수리산 아래 있던 마을로 산이름 그대로 "수리"라고 불러도 좋았으리라 생각된다. 수리는 꼭대기나 으뜸을 뜻하는 고유어로서 비록 한자가 없기는 하나 "서울"이 한자가 없더도 불편함이 없는 것처럼 그저 수리라는 고유어로 족할 것이다. 일산의 본래 이름은 큰 산이라는 뜻의 한산이었다. 한강의 하류로서 인근의 송포면 덕이리 한산 마을을 한뫼(한메)라고 불렀는데, 일제가 경의선을 건설하면서 의도적으로 일산으로 개칭한 것이다. 일제가 빼앗아간 우리 고유 지명은 너무나 많다. 국호조차 Corea에서 Korea로 바뀌었고 동해 또는 한국해(Sea of Korea)가 일본해(Sea of Japan)로, 독도가 죽도(다케시마)로, 영일의 호랑이 꼬리(호미)가 토끼꼬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광복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회복하지 못한 지명이 많은데 이처럼 신도시 이름마저 일본식을 따른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최근 신도시의 건설이 졸속이었다는 비난이 있는데 정작 졸속은 그 땅의 작명이 아니었나 싶다. 당시 지역 주민들이나 학술단체의 건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런 건의를 무시해 버린 당국의 처사가 졸속이었던 것이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지명은 단순히 지표상에 한 지점을 다른 곳과 구분 짓기 위해 붙인 이름만은 아니다. 그것은 조상들이 살고 간 흔적, 곧 숱한 역사가 앙금처럼 누적된 문화의 유산이다. 새로운 이름을 지을 때는 남쪽이든 북쪽이든 좀더 신중을 기했어야 옳았다.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고유 이름 산책 잃어버린 지명 - 아름다운 이름, 보은단, 고운담 어느 해 초 대학을 졸업하는 의대생이 6년 동안 받은 장학금 3천 여 만원을 몽땅 모교에 내놓아 화제가 되었다. "장학금까지 주면서 의사의 길을 가게 한 학교에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라고 했던 그는 장차 인술을 베푸는 좋은 의사가 되리라 믿어진다. 이 흐뭇한 선행을 일컬어 모 신문은 "보은의 반환"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은혜에 보답하는 일,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만 그런 이야기가 들릴 때마다 우리는 흐뭇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이런 보은 설화는 우리 주변에 널리 흩어져 있다. 특히 지명에서 많이 눈에 띄는데, 인간사뿐 아니라 동물 세계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본다. 인간에 대한 개의 보은은 의견총 설화로 전승된다. 술에 취해 잠든 주인 쪽으로 산불이 몰려오자 개는 계곡에서 자신의 몸에 물을 적셔 달려와 불을 끄고 결국 죽음을 당한다. 이런 개의 충직을 기리기 위해 전북 오수에서는 의견상까지 건립해 놓았다. 또 꿩 사냥에 동원된 매는 주인이 마시려는 샘물에 독이 든 것을 알고 이를 말리려다 자신이 죽음을 당한다. 전쟁터에 따라 나선 말도 이와 유사하게 주인을 위해 목숨을 잃는다. 모두가 동물들이 그들의 주인을 위하여 희생한다는 이야기인데, 짐승도 이렇거늘 하물며 사람이야 하는 식의 교훈을 담고 있다. 가축뿐만 아니라 깊은 산중의 호랑이나 까치 이야기도 자주 거론된다. 인육을 먹은 호랑이의 목구멍에 비녀가 꽂혀 신음중일 때 스님이 이를 구해 주어 후일 크게 보답을 받았다는 풍기의 희방사 연기 설화, 또 원주 치악산 까치의 보은 전설은 너무나 유명하다.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가 까치 새끼를 위협하는 구렁이를 죽인 뒤 자신은 그 구렁이의 암놈에게 잡혀 사경에 이른다. 이때 까치가 높은 망루에 달린 종을 머리로 세 번 쳐서 선비를 살리고 자신은 죽는다는 이야기는 옛날 교과서에도 실린 바 있다. "보은에서 받은 물건은 보은으로 되돌려 준다"는 충북 보은 땅의 속곳바위 전설은 실제로 이 고을에 부임해 왔던 원님의 이야기로 이 때문에 보은이라는 멋진 지명을 얻게 되었다. 서울 땅에도 그런 멋진 지명 전설이 있어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서울의 중심가인 중구 을지로 1가를 전에는 "보은단골"이라 불렀다. 이 보은단골은 음이 약간 변하여 "고운담골"이 되고 이를 한역하여 미장동이라 했다. 지금의 롯데 1번가, 현 롯데호텔 지하 주차장이 된 그 자리에 조선조 선조 때 홍순언이라는 역관의 집이 있었는데, 보은단은 그 집의 담장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은혜에 보답하는 비단"이라는 뜻의 보은단과 그 음이 와전된 고운담은 한결같이 아름다운 이름이다. 이런 고운 이름을 얻게 된 데는 나름대로 사연이 있다. 홍 역관은 사신을 따라 자주 북경에 갔는데, 한 번은 홍등가에 들른 적이 있었다. 이른바 객고를 풀기 위해서였는데, 그날 밤에 꽃값(화대)이 유독 비싼 어느 창가에서 절세의 미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런 유곽에서 몸을 팔 것 같지 않은 그 미인은 소복을 하고 있었는데, 홍역관에게 들려 준 사정이 매우 딱했다. 즉 객지에서 부친상을 당하여 장례 치를 돈을 구하기 위해 처음 홍등가에 발을 디뎠다는 것이다. 중국판 심청과도 같은 그녀의 효심에 탄복한 홍 역관은 노자 2천 냥을 받아 딱한 사정을 해결해 주었다. 홍 역관의 도움으로 그 여인은 자유의 몸이 되어 객지에서 진 부채도 갚고 아버지의 시신을 절강성 고향으로 모실 수 있었다. 몇 년이 지난 뒤 홍 역관이 다시 중국에 갔을 때 그녀는 놀랍게도 명나라 예부시랑의 계실이 되어 있었다. 오랜만에 그녀와 재회한 홍 역관은 융숭한 대접을 받았을 뿐 아니라 돌아올 때는 그녀가 손수 짠 비단 옷감까지 선물로 받았다. 비단에는 보은단이라 하여 꽃무늬 글씨가 곱게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수년 전 2천 냥의 희사에 대한 보상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선은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녀의 부군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당시 그녀의 남편 석성이 지금의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병부상서라는 자리에 있었기에 손쉽게 조선에 지원군을 파병시켰던 것이다. 이런 보은단의 사연이 알려지자 홍순언은 이내 부자가 되어 아름다운 담장이 있는 큰 집을 짓게 되었다. 그 담장에는 효제충신이라는 문구를 채색 벽돌로 새기고 흰 분칠로 장식했다. 이 집 때문에 보은단골이라 부르던 마을 이름을 금세 고운담골로 바꿔 부르게 된 것이다. 고운담골이라는 이름은 한때 미장동으로 한역되어 법정동명이 되더니 일제 때 엉뚱하게도 황금정 일정목이 되고 광복 후에는 다시 을지로 1가로 고정되었다. 지금은 롯데 1번가라 불리는 이 유서 깊은 골목이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과 젊은 베르테르의 애인 롯데와 무슨 관련이 있다는 이야긴지... 세월 따라 산천의 이름이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이런 아름다운 이름이 없어지는 게 아쉽기만 하다. 담장의 일부라도 남아 있었으면, 그도 아니면 호텔 로비 어느 구석에라도 이런 미담을 적은 표석이라도 세웠으면, 아니면 인근 수많은 점포 가운데 보은단, 고운담이라는 상호라도 하나 있었으면 좋으련만.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고유 이름 산책 지명어의 작명 -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 아름마을, 정든마을, 푸른마을, 샛별마을, 장미마을, 양지마을, 정자마을, 이매촌, 효자촌, 까치마을... 신도시 분당의 마을 이름들이다. 행정상의 법정동명과는 상관없이 아파트 단지별로 붙인 이름이지만 참으로 고운 이름들이다. 아름마을이나 이매촌은 오얏꽃과 매화가 피어 아름다운 곳을 듯하고 정단마을은 한 번 입주한 사람은 쉽게 떠나지 못할 것만 같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내가 사는 마을의 이름이 이왕이면 좋은 이름이기를 바란다. 분당처럼 새로 개발되는 도시라면 마음 내키는 대로 다홍치마 이름을 지을 수도 있겠다. 기존의 도시에서 이름이 나쁘다 하여 억지로 바꾸기는 어렵겠지만 제한된 범위 안에서나마 고쳐 보려는 노력이 몇몇 지명에서 발견된다. 좋은 이름을 갖고자 하는 욕망의 흔적을 서울의 동명에서 찾아보도록 한다. 도봉산 산자락에 조선시대 무수리(궁녀)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 있어 이를 무수골이라 불렀다. 그러나 문헌에는 무수동이라 적었으니, 궁중에서 허드렛일을 맡아 하던 계집종이라는 이름보다는 "근심걱정이 없는 마을"이 훨씬 좋아 보였을 것이다. 종로구의 효자동이나 봉익동은 본래 "화자골"이라 불렀다. 화자는 고자와 같은 말로 조선 초기부터 이곳에 내관들이 모여 살았던 데서 비롯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이 마을에 효자 형제가 살았기에 붙은 이름이라고는 하나 기실은 주민의 여론에 따라 화자를 효자로 바꾼 것이다. 봉익이라는 이름도 마찬가지여서 봉은 왕을 상징하는 말로 왕을 가까이 모시면서 나라일을 도운다는 뜻이니 바로 내관을 비유한 말이다. 중국 문헌에서 따온 말이기는 하나 참으로 멋진 이름이 아닐 수 없다. 중구 신당동은 본래 무당골이라 불렀다. 무당들이 귀신을 모시던 신당이 있었기에 붙은 이름인데, 이 신당을 "새 신" 자를 써서 신당동이라 적는다. 이는 갑오개혁 당시 미신 타파의 일환으로 취해진 조치이기는 하나 그보다는 지역 주민의 바람이 더 크게 작용했으리라 짐작된다. 동대문구 회기동도 유래가 깊은 이름이다. 이곳에는 한때 조선조 국모였던 윤씨의 무덤, 곧 회묘가 있던 곳으로, 그녀의 소생 연산군이 즉위하자 능으로 승격되고 실각하자 다시 묘로 격하되었다. 능에서 묘로 되돌아왔다 하여 회묘리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이곳 주민들의 바람 때문에 묘를 기로 바꾸어 지금의 회기동이 된 것이다. 종로구의 제동이나 계동도 역사적 사건의 산물이다. 제는 불타고 남은 재를 차음한 차자, 곧 계유정란 때 김종서, 황보인 등의 학살에 따른 피를 지우기 위해 이곳에 재를 뿌린 데서 유래한다. 마땅히 재동으로 옮겼어야 제대로 된 한역이겠으나 아픈 역사를 되새기고 싶지 않은 심정에서 제 또는 제를 취하고 있다. 계동의 유래도 그런 대로 재미있다. 이곳은 조선 초기부터 이름난 양반촌으로 제생원이란 기관이 있어 제생동이란 이름을 얻었는데, 언제부턴가 제생의 제를 계수나무를 뜻하는 계로 바꾸어 계생동이라 불렀다. 그런데 계생동의 계생을 잘못 들으면 기생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어 아예 가운데 생을 빼고 계동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경기도 과천으로 넘어가는 곳에 남태령이라는 큰 고개가 있다. 이 고개는 여우가 자주 출몰한다 하여 "여시고개(엽시현 또는 호현으로 기록됨)"라 불렸는데 정조 대왕의 행차 이후 남태령으로 둔갑하였다. 부왕인 사도세자의 능에 참배를 가던 정조가 이 고개에 이르러 고개 이름을 물었다 한다. 이때 과천 원님이 임금에게 요사스런 여시(여시)라는 말을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하고 그저 "남쪽으로 가는 큰 고개"라고 어물쩡 답한 것이 그대로 남태령이 되었다. 지금의 관악구 남현동이라는 동명도 그래서 생긴 것이다. 옛날 무쇠를 녹여 솥이나 호미 등의 농기구를 만들거나 무쇠솥을 걸어 놓고 메주를 쑤어 팔던 곳을 "무쇠골" 또는 "무쇠막"이라 불렀다. 무쇠를 한자어로 수철이라 하는데, 서울에도 수철리는 여러 군데 있었다. 따라서 이를 구분하기 위해 상수동, 하수동, 신수동, 또는 주성동, 금호동 등으로 나누어 부르게 되었다. 이 가운데 금호동이 가장 멋진 이름으로 남게 되었는데, 수철에서 쇠는 부수 금을 취하고 물은 호수의 뜻인 호를 취했으니 참으로 기가 막힌 아역이라 하겠다. 서초구의 서초는 본디 "서리풀"에서 유래하여 상초리라고 적었다. 상은 서리의 한역으로 첫음절 "서"를 따고 이와 유사한 "상서로울 서"로 대체하였다. 상초, 곧 서리맞아 시든 풀보다는 서초, 곧 상서로운 풀이 의미가 더 고상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농수산물 시장이 있는 가락동도 비슷한 경우다. "가락"이란 갈래와 같은 말로서 지형이 갈려져 나온 곳에 붙이던 이름이다. 한역한다면 분기가 되겠으나 이왕이면 "살기에 가히 즐거운 곳", 그래서 가락동이 되었다. 순수한 우리말이 한자어로 바뀐 것은 애석하지만 그 통에 좋은 뜻을 얻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랄까. 말 그대로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고유 이름 산책 지명 속담 - 보은 아가씨 추석비에 운다 어려서 필자는 "가시어미 눈멀 사위"라는 말을 듣곤 했다. 유난히 국을 좋아하던 나에게 할머니가 하신 말씀인데, 당시에는 그 말뜻을 알지 못했다. 훗날 가시어미가 장모의 옛말이라는 것과 제주도의 전통 가옥 구조를 안 연후에야 그 말의 참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제주도에서는 부엌에 솥을 거는 아궁이가 따로 굴뚝과 연결되지 않아서 불을 땔 때마다 연기가 온 집안에 퍼지게 되어 있다. 유독 국을 좋아하는 사위를 둔 장모님은 사위가 올 적마다 모진 연기를 맡아 눈이 멀 지경이라는 뜻이다. "너무 국을 좋아한다"는 의미를 이처럼 우회시킨 표현법이 재미있다. 필자의 장모님은 아직 시력이 좋으시지만 어떻든 이 말은 지역 특성을 기반으로 한, 그 속에 따뜻한 정이 스며 있는 절묘한 표현법이다. "안성맞춤"이나 "함흥차사"라는 말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안성에 가 본 적이 없어도, 또 그곳의 특산물이 무엇인지, 그것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도 상관없다. 단지 어떤 것이 거기에 꼭 들어맞을 때를 대개 안성맞춤이라 하고, 한 번 가면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 경우를 일러 "함흥차사"니 "강원도 포수"라는 말을 곧잘 쓴다. 이처럼 지역 특성이 속담에 반영된 말을 지명 속담이라 이르는데, 이런 속담이 우리말의 표현을 더 풍부하게 만들고 있다. 지명 속담은 나름대로 독특한 유래를 가졌다. "강경장에 조깃배 들어왔나 떠들어대기는 천안삼거리"라는 속담은 그런 대로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유래를 모르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도 적잖이 있다. 곧 "작아도 화동 애기", "보은 아가씨 추석비에 운다". "양천 원님 죽은 말 지키듯", "다시 보니 수원 손님", "안악 사는 과부", "양주 사는 홀애비", "넉살 좋은 강화연" 등이 그런 예들이다. "벽창호"라는 말도 지역 특산물에서 유래하였다. 평북 벽동과 이웃한 창성에서 나는 소, 곧 벽창우는 몸집이 크고 힘이 센 반면 고집이 세고 우악살스럽다고 한다. 그 벽창우가 사람에게 옮겨 붙어 지금의 벽창호로 만들어 놓았다. 이처럼 지역 특산물은 곧잘 사람의 성격 묘사로 옮아 간다. 황해도 봉산의 수숫대는 유달리 키가 크고 평양에서 생산되는 나막신은 품질이 무척 좋았던가 보다. 껑충 키가 큰 사람을 일러 "봉산 수숫대 같다"고 하고, 사근사근 부드러운 사람을 만나면 "살갑기는 평양 나막신"이라 비유한다. 이 밖에 "파주 미륵 같다"면 대단한 뚱뚱보를, "자인장 바소쿠리"라면 유달리 입이 큰 사람을, "능라도 수박"이라면 "무등산 수박"과는 달리 지독히 맛없는 수박의 대명사로 쓰인다. 지명 속담을 쓸 경우 자칫하면 그 지역민의 반발을 살 우려가 있다. 좋은 이야기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내용이라면 해당 지역민의 애향심에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걸음 물러나 생각하면 지명 속담은 그 지방의 내력이나 고유한 특성을 담고 있기에 이를 지역감정만으로 받아들일 일은 아니다. "삼수 갑산을 간다 해도". "무주 구천동이야". "담양 갈 놈"이란 표현을 써도 이 지역 주민들이 언짢아할 일은 아니다. 예로부터 전남 담양은 귀양지였고, 삼수 갑산이나 무주 구천동은 심산궁벽의 대명사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고장이 궁벽한 곳이었기에 지금 와서는 오히려 무공해 지역으로 더 각광받지 않는가. "밀양놈 싸움 하듯"이나 "아산이 깨어지나 평택이 무너지나"라는 속담도 내용을 알고 보면 결코 나쁘지 않다. 밀양 사람들이 싸움을 잘해서가 아니라 임진왜란 때 이 지역의 전투가 길었기에 긴 싸움을 지칭한 말이며, 동학혁명 때 아산과 평택에서 청일전쟁이 벌어졌기에 붙여진 말이다. "개성 여자 남편 보내듯한다"는 속담도 언뜻 생각하면 개성 여인들이 언짢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이 또한 직업상 항상 장사를 나가야 하는 개성 상인들의 생활상을 안다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강경 사람 벼락바위 쳐다보듯한다"는 속담도 마찬가지다. 이는 놀란 토끼 눈으로 바라본다는 이야기인데, 넓디넓은 들판 한가운데 사는 이 지역민들에게는 큰 바위가 생소하고 신비스럽게 여겨졌을 터이다. 실제로 "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진다"는 말에는 지금도 삼천포 시민들이 흥분하고 있다고 들었다. 도중에 일이 잘못되었음을 뜻하는 말인데, 이 속담은 최근에 생긴 것으로 유래도 모호할 뿐만 아니라 동기도 좋지 않으므로 삼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추운 방을 일컫는 "삼청 냉돌"이라는 말이 와전되어 "강원도에 안 가도 삼척"으로 고정된 경우도 마찬가지다. 유독 삼척만이 특별히 추울 리 없지 않은가. 속담은 풍자나 교휸을 담아 비유의 형식으로 표현되는 관용구이다. 말 그대로 속된 말이기는 하나 그 속엔 선조의 예지나 독특한 정서까지 배어 있다. 언제, 어디서, 누가 처음 발설했는지는 몰라도 그 말의 타당성이 공인되기에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특히 지명 속담에는 그 지역 고유의 특성이 물씬 배어 있으므로 오늘에 와서 유래를 되새겨 보면 그 적절함에 새삼 놀라게 된다. "보은 아가씨 추석비에 운다"는 속담은 새길수록 애틋하고 귀엽다. 가을비가 오면 그 해 추수를 망치고, 추수를 망치면 시집을 못 가기 때문에 보은에 사는 처녀가 울었다는 이야기다. 반면 "서울놈은 비가 오면 풍년이란다"는 지방 농사꾼의 빈정거림에도 서울 사람은 오히려 웃어 넘길 만한 여유가 있다. 속담은 그저 속담으로 새겨듣기 때문이리라.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우리말에 대한 반성 막가파 용어 - 전쟁과 파괴의 시대 최근 "가격 파괴"라는 말이 등장하더니 "파괴"가 무슨 유행어처럼 번지고 있다. "인사 파괴, 학력 파괴, 자연 파괴" 등이 그런 유형이다. 가격을 파괴한다는 건 값을 대폭 낮춘다는 뜻이니 소비자 측에서 보면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반 소비자를 대변하는 언론 매체가 이를 대서특필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런데 이 말은 일본에서 먼저 사용했다 해서 그런 건 아니지만 꼭 그런 극한 용어를 써야 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해 본다. 파괴는 글자 그대로 때려 부수거나 깨뜨려 버린다는 뜻이다. 새로운 건설을 위한 것일지라도 파괴에는 폭력이 수반되고 그 이전에 과거부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가격을 낮춘다면 낮출 만한 여건이 충족되었을 것이므로 그저 낮춤이나 하락 정도로 족할 터이다. 개선이나 개혁을 위한 여건 조성이라면 몰라도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기존의 모든 질서나 관행, 또는 미풍 양속마저도 깡그리 파괴하려 덤빌지 모르겠다. "전쟁"이라는 말도 전천후 용어가 된 지 오래다. 한때 전직 대통령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적도 있지만 뭔가 좀 강조할 일이 있다 싶으면 시도때도 없이 전쟁을 선포하곤 한다. 적과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게 전쟁이라면 범죄와의 전쟁은 그런 대로 괜찮은 편이다. 그런데 "예매전쟁, 입시전쟁, 귀가전쟁, 주차전쟁" 등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부분까지도 이런 용어를 쓰는 건 좀 심하지 않을까 게다가 교통 문제에서는 전쟁만으로 마음에 차지 않았던지 지옥이나 대란이라는 용어도 서슴지 않는다. 전쟁, 전투, 투쟁 등 싸움 용어에 관한 한 북한을 따르기는 어려울 게다. 언어를 이데올로기의 선전 수단으로 이용하는 북한에서는 모내기도 전투요 수술도 전투라고 한다. 삿대질도 "손가락 총알"이라 하고. 몸의 살을 빼는 일도 "몸깐다"고 말한다. 툭 하면 까부시고 떨쳐나서고 얼떠 나서라고 선동한다. 그런데 근묵자흑이라고 했던가, 우리도 어느새 북한의 그것을 닮아 가는 듯하다. 이런 풍조가 특히 젊은 세대에서는 호응을 얻는 듯 하여 더욱 염려스럽다. 이들에게 기성세대는 타도의 대상이요, 기존의 사고나 관습은 타파의 대상이다. 잘못된 고정관념은 깨뜨려야겠지만 때로 정도를 넘어서는 경우가 이들이 애용하는 언어에서도 잘 드러난다. 무슨 일이든 화끈하게 끝내 주는 해결사가 선망의 대상이다. 돈을 벌어도 한목에 싹쓸이해야 하고 망해도 일시에 왕창 망한다. 이들이 쓰는 말 가운데 "온통, 왕창, 몽땅, 깡그리, 싹쓸이"라는 수식어를 얹어 "끝내 준다, 끝장 낸다, 엄청나다, 기똥차다, 까무러치다, 댓길이다, 죽여 준다" 등등의 서술어가 예사롭게 쓰임도 역시 예삿일이 아니다. 이런 극단적 용어가 욕구 불만에 가득 찬 이들의 정서를 만족시키는(?) 어휘 목록이라고 하니, 그야말로 언어 폭력 시대라 아니할 수 없다.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언어도 함께 타락하게 마련이다. 공자님도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언어가 불순해지고(명부정 즉언불순), 언어가 불순하면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언불순 즉사불성)고 했다. 실력이라는 말도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본뜻을 잃어 가고 있다. 하나의 법안 개정을 두고 여당은 이를 실력으로 통과시키려 하고 야당은 실력으로 저지하려고 한다. 실력이 실제의 역량, 곧 개인이나 집단이 가진 진정한 힘을 말할진대 여기서 말하는 실력은 아무래도 불법이나 폭력을 뜻하는 말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의회 정치를 표방하는 우리 국회에서 여야 공히 진정한 실력 행사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 실력이라는 것이 여당 측에서는 날치기를 뜻하고 야당 측에서는 무슨 아우성이나 폭력을 뜻한다면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우리 정치의 "정"이 바른 길, 곧 정을 향해 걸어왔다면 이 말이 이렇게까지 변질되지는 않았으리라. 신문 사회 면에는 "기관원 사칭"이라는 기사가 심심찮게 눈에 띈다. 기관원은 말 그대로 어떤 기관에 종사하는 구성원을 이름이다. 예컨대 학교 선생님은 교육기관원, 은행원은 금융기관원, 신문 기자는 언론기관원이라 부를 수 있다. 한때 힘깨나 썼다는 정보 기관원만을 굳이 기관원이라 칭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유행했던 "운동권"이라는 말도 같은 유형에 속한다. 운동권 학생이 학업보다는 운동(스포츠)에 전념하는 학생을 지칭하는 말은 아닐 게다. 그 운동이라는 게 사상이나 정치 운동을 뜻하는 말이겠지만 어떻든 무언가 잘못된 이 시대 이 사회가 이런 기형어를 양산하고 있다.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우리 사회, 우리 정치의 형태가 어딘가 잘못되었더라도 언어만은 곱고 바른 말을 사용해야겠다. 파괴, 전쟁, 타도 등의 폭력적인 언사는 자제해야겠고, 실력은 결코 불법적인 폭력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능력을 뜻하는 말로 제자리 매김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