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지리산과 섬진강 - 노고단 밑으로 달래강이 흐르고 우리 민족의 영산 지리산을 지키는 산신은 천신의 딸인 마야고 또는 마고라 부르는 여신이다. 흔히 선도성모라고도 일컫는 마야고는 지리산에서 수도하는 반야를 너무나 사랑했다. 맹렬 여신 마야고의 구애에 넘어간 반야는 천왕봉에 보금자리를 틀고 한동안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즐긴다. 그러나 반야는 이런 세속에서의 행복에 더 이상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 마야고가 여덟 번째 딸을 낳던 해에 반야는 홀로 수도의 길로 나선다. 지리산 두 번째 봉우리로 떠난 그의 수행길은 너무나 길었다. 여덟 딸이 모두 장성하여 무당이 되고, 이들이 각기 팔도로 흩어질 때까지 반야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산신도 늙음만은 어쩌지 못하는지 마야고도 할미가 되었다. 딸들마저 모두 떠나 더 외로워진 마야고는 천왕봉에 앉아 온종일 서쪽 능선을 바라보는 일이 일과가 되었다. 기다림에 지친 할미는 때때로 애꿏은 나뭇가지를 할퀴기도 하고, 때로 줄기에서 뽑아낸 나무실로 베를 짜면서 무료한 시간을 달랜다. 세석평전은 할미가 베를 짜던 능선이며, 주능선에 흩어진 고사목은 할미의 손톱에 희생된 나무들이라던가. 한 번의 이별이 영원한 이별이 되어 기다림에 지친 마야고는 남편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끝내 세상을 뜨고 만다. 마야고가 죽은 뒤 반야 역시 아내의 뒤를 따라 열반에 들었다. 수도의 길은 그처럼 처절한것인지 팔도 무당이 된 여덟 딸의 모습도, 아내 마야고의 임종도 못 본채 수행만 하던 그도 그 자리에 선채 굳어져 반야봉이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노고단에서 보이는 반야봉의 자태는 분명 해탈의 모습 그대로이다. 마야고가 죽은 뒤 할미의 넔을 위로하기 위해 노고단을 새워 해마다 제사를 올리고 있다. 언제까지나 반야봉을 올려다보고 있는 마야고의 넔은 이제 외롭지 않다. 지리산 관광도로가 뚫린 뒤로는 슬리퍼를 신은 신은 관광객까지 이곳 노고단을 참배하기 때문이다. 노고는 늙은 할미라는 뜻으로 산이름에 쓰이는 노고, 즉 "할미"는 본래 큰 산(대산)을 뜻하는 "한뫼" 또는 "한미"를 한자어로 옮긴 것이다. 전국 곳곳에 노고산(대산)이 즐비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리고 한미, 즉 할미를 할머니와 동일시 하는 것은 큰 산을 모성의 품으로 여긴 데서 비롯된 것 같다. 세파에 부대끼다 오갈 데 없어 되돌아온 자식을 언제나 포근히 안아주는 어머니의 품 속, 그 넓은 모성의 품이 바로 성산 지리산이 아니던가. 섬진강은 지리산 자락의 전설을 담아 남해로 흘려 보낸다. 눈부시게 흰 모래밭과 강바람에 휘청대는 대나무 숲, 어느강보다 맑은 물은 섬진강의 자랑이다. 지리산의 물을 담아 남해로 보내는 이 강은 전라도와 경상도의 전설을 한데 뒤섞었다는 데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섬진이라 할때 한자말 그대로 해석하면 "두꺼비 나루"가 된다. "두꺼비 섬"이라는 어려운 한자를 강이름에 끌어 쓴 것은 이 강에 두꺼비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왜구의 침탈이 극심하던 고려 때의 이야기다. 왜구가 이 강을 거술러 침범해 왔을 때 난데없이 두꺼비 떼가 나타나 굉장한 소리로 울어대는 바람에 혼비백산하여 광양쪽으로 도망쳤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왜구를 물리친 두꺼비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섬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전설만 믿고 지명을 해석해서는 안된다. 섬은 차자표기에서 "달"로 읽히는 차훈자로 섬진은 "달나리, 달나루" 또는 줄여서 "달래" 라는 고유어를 한자 지명으로 적은 것이다. 달을 달리 섬토 또는 섬백이라 하고 달빛을 섬광이라 한다. 예로부터 달 속에 두꺼비가 있다는 신화에서 섬을 달로 읽은 것이다. 따라서 섬진강은 본래 달래강으로 불리었다고 생각한다. 이 강은 난달래골(진안) 상추막이에서 발원하여 진안고원을 거쳐 백두대간의 대미를 장식하는, 지리산 계곡을 감싸고 흐르기에 산골강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리라. 하동은 달래강 동쪽 마음이란 뜻인데, 옛 문헌에는 한다사라 기록하고 있다. 한다사의 상류쪽, 그러니까 지금의 악양을 소다사라 이름한 것을 보면 한다사는 큰 강을 지칭하는 고유어로 짐작된다. "다사" 또는 "다시" 는 다시마라는 예에서 보긋 강이나 바다를 뜻하는 또 다른 어사이기 때문이다. 하동포구 팔십리가 시작되는 화개 탑리에는 지금도 화개장이 열리고 나루터에서 나룻배가 강을 건너는 손님을 기다린다. 그러나 화개는 너무 변하고 말았다. 옛 정취를 맛보기에는 화개가 너무 개화해 버린 느낌이랄까. 김동리의 단편 "역마"에서 보이는 시골 장터의 특유의 흥청거림이나 조영남의 노래 "화개장터"에서 들을 수 있는 인정스러움은 이제 섬진강 물결 따라 먼 바다로 흘러가 버렸다. 탑리 버스터미널 한 켠에 선 작은 비석 하나가 그 유명했던 화개 장터임을 알린다. 매년 봄마다 쌍계사 가는 십리 길에 벚꽃 터널이 펼쳐지고, 작설차가 영그는 차밭가로 산수유,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핀다고 한다. 환상적인 드라이브 코스라느느 화개, 하동간 19번 도로상에 군데군데 배롱나무꽃이 피기는 한다. 그러나 옛 풍정만은 찾을 길 없으니 꽃 피는 산촌 화개도 이젠 어쩔수 없이 꽃지는 도시가 되어 가고 있다.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영암과 월출산 - 달래골에서 만나는 두 성인 옛날 성년에 가까운 오누이가 여름날 호젓한 산길을 걷고 있었다. 고갯마루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하지 못하고 두 사람은 흠뻑 비에 젖고 말았다. 물에 젖은 얇은 옷 속으로 내비치는 누이의 속살을 본 오라비는 순간적으로 강한 성욕을 느껴 상대가 혈육인지도 미처 깨닫지 못한다. 그것도 한순간, 제정신으로 돌아온 오라비는 참담한 죄의식에 사로잡힌다. 잠시 자리를 피한 그는 잔뜩 발기한 자신의 남성을 꺼내 돌로 짓이기며 괴로워한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누이가 바위 뒤에 숨은 오라비를 찾았을 때 그는 이미 피투성이가 된 채 숨져 가고 있었다. 모든 사정을 안 누이는 오라비의 시신을 끌어안고 이렇게 절규한다. "그렇다면 한번쯤 말이나 해 보지. 차라리 달래나 보지..." 그 사건이 있은 뒤 누이의 "달래나 보지"라는 말이 빌미가 되어 이 고개를 "달래네" 또는 "달래고개"라 부르게 되었다니 참 엉터리 같은 전설이 되고 말았다. 근친상간의 성적 충동을 부끄러워하는 남성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다는 이야기는 전국에 산재되어 있는 매우 흔한 지명전설이다. 자살한 곳이 고개가 아닐 수도 있다. 충주의 달래강 전설처럼 강가일수도 있고 숲 속이나 동굴 속일수도 있다. 등장 인물도 오누이가 아닌 누나와 남동생 또는 아저씨와 조카 사이일 수도 있다. 있어서는 안 될, 그러나 있을 수도 있는 일이기에 이런 이야기는 전국 30여곳의 지명 속에 묻혀 전해지고 있다. 옛말에 "달"은 산과 동의어로서 달내, 달랫골이라 하면 산골마을을 지칭하는 지명이었다. "달래나 보지"라는 말에서 "달래"라는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은 한낱 흥미 위주로 지어낸, 그야말로 호사가들의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달"을 표기하기 위해 월과 과 같은 한자가 동원되었다. 진안이나 섬진강의 본이름과 마찬가지로 영암에 있는 월출산도 본래 달나뫼 또는 달래뫼로 호칭되었다. 영암도 달래골이라 불리던 곳으로, 이 달래란 고유어를 백제 때는 월계라 적었고 고려 때는 월출이라 적었다. 월은 "달"의 차훈 표기이다. 영암땅에는 월출산 외에도 월평, 월곡, 월산, 월봉, 월천, 매월 등의 월자계 지명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다. 달내라는 고유 이름은 신라 경덕왕 때 어려운 한자 이름인 영암으로 개칭된다. 영암은 말 그대로 신령스러운 바위라는 뜻인데, 일설에 따르면 월출산 구정봉 밑에 움직이는 바위가 있어 한 사람이 밀거나 열 사람이 밀거나 똑같이 흔들린다고 하여 이런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흔들바위는 월출산에만 있는 특별한 명물이 아니다. 영암은 이 산에 있는 한두개의 특정한 바위만으로 붙여진 이름이 아니다. 넓은 평야 한가운데 우뚝 솟은 신령스러운 바위 덩어리 전체를 일컬어 영암이라 명명했던 것이다. "남쪽 고을 한 그림 가운데 산이 있으니 달은 푸른 하늘에서 떠오르지 않고 이 산간에서 오르더라" 수많은 기암괴석이 조화를 이루는 월출산을 두고 매월당 김시습도 이렇게 노래했다. 북의 설악산, 동의 주왕산과 함께 달래골 월출산은 누가 뭐래도 남한의 3대 명산이라 이를 만하다. 월출산 도갑사로 들어서는 길목에 구림리라는 고풍스러운 마을이 있다. 비둘기가 깃들이는 숲이라는 아름답게 구림리는 온통 숲으로 덮인 평화스러운 마을이다. 영암땅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라는 구림리는 풍수지리설의 비조 도선국사와 백제시대 일본땅에 한자와 유교를 전했다는 왕인 박사의 출생지로 알려져 있다. 도선은 전설적인 인물이라 그런지 출생 또한 신비의 베일에 가려있다. 도선의 어머니는 처녀의 몸으로 냇가에서 물에 떠내려 오는 오이를 집어 먹고 잉태하여 도선을 낳았다는데, 집안에서는 그 아이를 숲 속에 내다 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수많은 비둘기때가 날아와 날개로 햇볕을 가려주고, 밤이면 새의 깃으로 품어주며, 먹이를 물고 와 아이를 먹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목숨을 건진 도선은 문수사라는 절에서 성장하였고, 후일 중국 유학에서 돌아와 절터에 도갑사를 짓고 자신이 태어난 마을을 비둘기의 숲 곧 구림리라 이름했다는 것이다. 왕인 박사가 태어났다는 구림리 성기동은 월출산 줄기인 문필봉 아래 위치한다. 지금도 문필봉에서 흘러 내리는 계곡을 성천이라 하고, 박사가 즐겨 마셨다는 샘을 성천이라 부르고 있다. 또한 왕인 박사 기념관에서 문필봉 쪽으로 오르면 박사가 어릴 적 책을 읽었다는 "책굴"이 그대로 있고, 그 앞에 제자들이 스승의 모습을 바위에 새겼다는 왕인석굴도 남아 있다. 월출산 국립 공원 관리소가 있는 사자마을에는 넓은 주차장이 있고, 항상 수많은 관광객으로 들끓는다. 이들은 대개 바람골의 바람 폭포나 벼랑 위에 흔들리는 구름다리를 타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영암땅에서 정작 가 보아야할 곳은 천황봉 너머 그 반대편인 구림리에 있다. 자랑스런 조상 왕인박사와 도선 국사의 숨결이 밴 유적 말이다. 왕인 박사 기념관은 일본 관광객들의 전유물만은 분명 아니기에 누구나 한번씩은 들러보아야 할 곳이다.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목포와 몽탄강 - 유달산과 삼학도의 노래 한반도의 서남단 무안반도 끝에 위치한 목포만큼 대중가요의 노래말로 유명해진 항구도 드물다. "목포의 눈물", "목포행 완행열차". "목포는 항구다" 등등, 목포를 무대로 하는 노래는 아직도 우리 귓전에 생생하다. 목포의 시정을 자아내게 하는 3박자. 곧 유달산, 삼학도, 영산강은 이미 옛 정취를 잃었음에도 목포가 지금껏 우리의 뇌리 속에 자리한 까닭은 이들 노래말이 심어준 여운 탓이 아니겠는가. 목포를 상징하는 유달산은 정말 "유다른" 산이다. 본래 노적봉이라 불리던 이 산이 유달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종교적 이유에서라고 한다. 말인즉슨 이 산의 북쪽에 있는 승달산에 대하여 불교가 아닌 유교의 가르침에 의해 도에 통달한다는 의미로 유달산으로 이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승달이든 유교의 유달이든 꼭 그런 대립적 개념으로 해석하고 싶지은 않다. 비록 산세는 빈약하지만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작은 명산일 뿐 아니라 시내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어 누구든지 손쉽게 오를 수 있다. 말하자면 유달리 가까이 있고 유달리 친근한 산이기에 유달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지 않았을까. 목포는 원래 무안군에 속한 땅으로 백제시대에는 "물아래골(물아혜현)"이라 불렀다. 물아혜, 물아래는 이 지역이 영산강 하류에 있기 때문에 물의 아래쪽이라는 뜻으로 쓰인 말이다. 물아래골은 신라 때 무안이라는 한자 지명으로 바뀌었다가 고려 때 다시 물량으로 되돌아온다. 목포라는 현 지명은 조선 태조 때 "목개나루" 즉 목포진을 설치하면서 유래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목포가 나주의 관문으로서 나주의 남쪽 포구라는 뜻으로 남개라 했는데, 이 남개가 "나무개"로도 발음되면서 "남녘 남"을 "나무 목"으로 취하여 목포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서 목은 나무와 아무 관련이 없다. 나무 목 자가 아니라 "길목, 골목, 건널목"이라 할 때의 그 "목(정)"을 지칭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나주로 들어가는 길목으로서의 포구, 곧 "목개(정포)"인 것이다. 지금도 고하리 서남쪽에 "큰 목개"니 "작은 목개"니 하는 전래지명이 있어 이를 뒷받침해 준다. 목포 앞바다에 떠 있는 삼학도는 학으로 변신한 세 처녀의 혼이 깃들인 섬이라는 전설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지금은 섬도 아닌 이 삼학도에 대해 목포인들이 유달리 애정을 쏟는 것도 전설이 너무 애틋하기 때문이다. 옛날 무예에 출중한 한 청년이 유달산에서 수련중일 때의 이야기다. 힘이 장사였던 청년은 빼어난 용모 못잖게 여복도 많았던 모양이다. 산 중턱 옹달샘까지 날마다 물 길러 오는 아랫마을 세 처녀에게서 한꺼번에 사랑을 받게 되었으니 하는 말이다. 수련에 전념하던 청년도 아리따운 세 아가씨의 애정 공세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수도하는 일과 사랑하는 일 사이에 고민하던 청년은 어떤 결단을 내려야 했다. "낭자들, 나 역시 세 분을 다 좋아하오. 그러나 사랑은 똑같이 나누어 가질 수 없는 법, 세 분이 어디 먼 섬으로 가서 기다리면 내가 수련이 끝나는 대로 한 분을 택하여 모시러 가겠소." 세 처녀는 청년의 제안을 승낙하고 그 섬으로 떠날 차비를 차린다. 그런데 일은 이때 벌어졌으니, 처녀들을 실은 배가 막상 포구를 벗어나려 할 즈음 그만 청년의 마음이 흔들리고 만다. 배를 멈추게 할 작정이었던지 배를 향해 마구 화살을 쏘아댄 것이다. 청년이 쏜 화살 하나가 배를 꿰뚫게 되자 배는 서서히 가라앉는다. 배가 바닷속으로 잠기려 할 즈음 돌연 이변이 일어났으니, 죽음을 앞둔 세 처녀가 학으로 변신한 것이다. 세 마리 학은 하늘 높이 솟구치더니 구슬픈 울음소리와 함께 바다 위로 떨어지면서 세 개의 작은 섬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유달산 중턱에 대학루라는 정자가 있어 학으로 변신한 세 처녀의 혼이 돌아오기를 지금껏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이미 육지로 변해 형편없이 일그러진 삼학도의 형편으로는 학의 귀환은 아무래도 기대 밖인 것만 같다. 노래말처럼 슬픈 전설로만 간직할 수밖에 없을 듯 하다. 목포에 이르러 비로소 몸을 푸는 영산강은 담양땅에서 발원하여 광주, 나주, 영암을 차례로 적시고 하류에 와서 영산호라는 거대한 인공호를 만들어 놓는다. 본래 금강이라 불리던 영산강은 인공호에 이르기 직전에 몽탄강이라는 더 멋진 이름으로 불린다. 몽탄은 꿈에 현몽을 입어 건너게 된 여울이라는 뜻으로 고려를 건립한 왕건의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왕건이 그의 정적인 견훤과 이 강을 사이에 두고 한판 승부를 겨룰 때의 이야기다. 도강 시가를 정하지 못해 망설이던 왕건에게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그 시기와 방법을 일러 주었다고 한다. 왕건이 견훤을 꺾고 고려 왕조를 세울 수 있었던 것도 꿈에 나타난 백발노인의 계시에 따른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몽탄강의 낙조처럼, 대중 가요의 노래말처럼 목포는 아름다운 고장이다. 영산호 주변이 그렇고 유달산이나 고하도 산정에서 내려다보이는 목포항의 전경이 슬프도록 아름답다. "목포의 눈물"이 남긴 슬픈 이미지 때문일까?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남원과 춘향 - 여성의 절개, 남성의 절개 남원은 가는 곳마다 춘향이의 숨결이 배지 않은 곳이 없다. 광한루원이 그렇고 춘향로, 춘향고개, 춘향터널, 오리정, 눈물방죽, 버선밭 등이 모두 그렇다. 심지어 지리산 정령치로 향하는 구룡계곡에는 어느 왕릉에 못잖은 춘향의 묘까지 마련되어 있다. 묘에 잠들어 있어야 할 춘향의 혼백이 지금도 남원 고을을 활보하고 있다고나 할까. 광한루원을 찾을 때는 단순히 옛날 10대 소년소녀의 연애 장소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광한루원에 있는 누각과 연못, 못 속에 솟은 삼신산과 오작교 등은 그보다 더 오래고 깊은 역사와 전설을 가지고 있으면, 차원 높은 조경문화의 산실로서 되새겨져야 한다. 달 속에 항아가 사는 전각의 이름이 광한루이며, 년에 오직 한 번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를 건너 재회하는 상상 속의 가교가 오작교이다. 이 누각은 춘향이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저 유명한 황희 정승에 의해 건립되었고, 대학자 정인지에 의해 환상적인 이름을 얻게 되었다. 말하자면 이 남원골에 이상향을 세워 보고자 했던, 선조들의 오랜 염원이 이런 멋진 누원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남원이라는 고을의 본이름도 하늘의 은하수에서 찾아야 한다. 은하수를 고유어로 "미리내"라 하고 용을 "미르" 또는 "미리"라 한다. 남원의 옛이름이 고룡 혹은 용성이고, 이 고을을 둘러싼 산을 지금도 교룡산, 청룡산이라 부른다. 따라서 남원의 본이름은 "미리골, 미르골"로 추정되며, 구체적인 미리내 곧 은하수는 여뀌꽃(요화)이 아름답게 피던 요천이었다. 요천 가에 광한루가 세워지고 그 물 위로 오작교가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한양으로 시집 간 춘향은 이젠 오작교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요천 곧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별거중인 견우와 직녀는 올해도 틀림없이 칠월칠석에 까막까치가 놓아 준 사랑의 가교에서 눈물의 재회를 이룰 것이다. 광한루원을 거닐며 이제는 항아가 사는 달궁을 떠올리고 견우, 직녀의 미리내 전설을 되새겨 보는 것이 좋겠다. 춘향은 실존 인물로서 추녀였다는 이설이 있다. 이 고장에 전하는 신원설화에 따르면 춘향은 본래 기생으로서 남원 부사의 아들과 관계를 맺은 것은 사실이라 한다. 그러나 기생 춘향의 생애는 소설처럼 해피 엔딩은 아니다. 다시는 낭군을 만나지 못한 채 죽어 원귀가 되었고, 이 귀신의 장난으로 남원골은 3년이나 흉년이 들었다고 한다. 오늘날 전해지는 춘향전은 그 원혼을 위로하는 무녀의 살풀이굿 과정에서 형성되었다는 이야기다. 판소리와 춤의 고장 남원은 이런 반전 심리에서 오늘날의 예향으로 거듭난 게 아닌가 한다. 추녀 춘향을 절세가인으로 변신시키고 비운으로 끝난 이들의 연애 사건을 해피 엔딩으로 이끌어 간 그 기저에는 현실에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이상향을 이 고을에 세워 보고자 했던 광한루의 전설과 맥이 통하는 듯하다. 남원 여인의 절개를 말한다면 남원에서 운봉으로 넘어가는 여원치 고개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얼만 전까지만 해도 있었다는 고갯마루 산신각의 주인공, 비록 그 이름은 잘 모르지만 절개가 춘향이보다 더 맵고 애국적이었다고 생각된다. 고려 말 왜구가 이 고장을 유린할 때의 이야기다. 당시 왜구의 우두머리인 아지발도가 이 고개에서 마주친 한 여인을 겁탈하려 했다. 무례하게 젖가슴을 만지며 희롱하려는 놈에게 그녀는 칼로 자신의 가슴을 도려 내면서 저항했다. 결과적으로 이 여인은 자신의 순결만을 지킨 게 아니었다. 사후에 왜구를 토벌하려고 이성계의 군사가 이 고개에 이르렀을 때 여인의 혼령이 나타나 이를 잘 인도함으로써 왜구를 일망타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진주의 논개에 비견될 수 있는, 이 이름 모르는 여인을 두고 어떤 이는 함양에 사는 과수댁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고갯마루 주막의 주모였다고도 말한다. 지금은 고개 위의 도로 가에 마애여래불이 남아있는데, 부처의 오른손이 자신의 젖가슴 위에 놓여 있는 것이 이런 전설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한편 남원땅에는 남성의 절개를 그린 전설도 있다. 언젠가 양생이라는 총각이 있어 일찍 부모를 여의고 만복사 절방 한켠에서 외롭게 살았단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부처님께 배필을 구해 달라고 간청하며 하루는 부처님과 저포 놀이로 내기를 걸었다. 늙은 총각의 소원이 이루어지려고 그랬던지 이 윷놀이에서 양생이 부처님을 이기게 되고, 부처님은 약속대로 탑돌이 나왔던 처녀를 택하여 그와 인연을 맺어 준다. 부부가 된 이들은 한동안 행복한 시간을 보냈으나 그 시간은 결코 길지 않았다. "저는 삼년 전 왜구에게 원통하게 죽은 혼령입니다. 그대와의 전생의 연이 있어 잠시 만났으나 이제 이승을 떠나야 할 시간입니다. 그대는 너무 아쉬워 마시고 부디 불도를 닦아 윤회를 벗어나도록 하십시오." 꿈 속에 나타나 양생에게 이런 말을 남긴 아내는 다시는 이 세상에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잠에서 깬 양생은 그 길로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짧았던 사랑의 연을 되씹으며 양생은 약초를 캐면서 산 속에서 홀로 여생을 마친다. 지리산에는 반야를 사랑했던 여신 마야고의 무덤(노고단)과 이도령을 사랑했던 춘향의 무덤이 있다. 그러나 남자로서 절개를 지킨 양생의 무덤은 어디에도 찾을 길이 없다. "금오신화"의 "만복사저포기"에서 매월당 김시습이 들려 준 이 희귀한 이야기를 그저 흘려 들을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절개가 여성의 전유물은 아닐진대 한번쯤 양생의 무덤도 찾아봄직하지 않은가.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경주와 남산 - 서라벌의 탄생 신화 2천 년도 더 된 아득한 옛날 이야기다. 한반도에서 태양이 가장 먼저 비치는 동쪽의 서라벌, 이 신천지를 찾아오는 부부신의 발걸음이 있었다. 남신은 검붉은 얼굴에 울퉁불퉁 근육이 솟아 있었고, 여신은 부드러운 얼굴에 가냘픈 몸매의 소유자였다. 서라벌은 동방의 새로운 땅이라는 뜻을 가졌다. "서라"는 동쪽이나 새것을 나타내고 "벌"은 사람이 살 수 있는 마을을 나타낸다. "서라"에서 "ㄹ" 이 줄면 "새" 또는 "서"가 되고, "벌"이 변하면 "을" 또는 "울"이 된다. 신라라는 나라 이름은 새벌을 한역한 것이고 서울 역시 이 새벌의 변화음이다. 동방의 신천지는 넓고 아름다운 땅이었다. 살 만한 땅을 찾아 헤매던 두 신이 이곳에서 발걸음을 멈추려는 순간이었다. "우야꼬, 저기 사람 같은 산이 걸어온데이!" 남천 가에서 빨래하던 원주민 처녀가 거대한 두 신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만약 그 처녀가 "산 같은 사람"이라 말했다면 사정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사람 같은 산"이라는 표현에 문제가 있었던지 두 신은 그 자리에서 굳어져 말 그대로 산이 되고 말았다. 경주벌에 우뚝 솟은 두 산, 곧 남산과 망산이 바로 그 흔적인데, 전자가 험준하고 후자가 부드러운 산세를 가지게 된 것은 이들이 부부신의 변신이기 때문이다. 경주벌에서 일어선 신라 천년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한반도에서 최초로 단일 민족국가를 세운 나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남산의 억센 힘과 망산의 우아하고 섬세한 여성다움이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 아닐까. 남녀 두 신이 정착한 서라벌에는 그 후 기라성 같은 전설의 인물들이 사방에서 몰려온다. 북방 또는 남방으로부터, 하늘 또는 바다로부터 몰려온 이들은 각기 기묘한 탄생설화를 낳으면서 역사의 무대 위로 등장한다. 신라의 시조가 나정이라는 우물가에서 붉은 알을 깨고 나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표주박 같은 알에서 태어났기에 "박"을 성으로 삼고, 그 밝은 빛으로 온 누리를 다스릴 만하다고 하여 밝은 누리 곧 "밝은 뉘(혁거세)"를 이름으로 삼았다. 출생 당시 아이의 몸을 씻었다는 우물, 나정은 지금도 남산 밑 해묵은 소나무 숲에 포근히 안겨 그날의 전설을 들려 준다. 나정 부근에는 또다른 유적인 포석정이 있다. 두 유적 사이는 고작 1Km 남짓인데 이 짧은 거리에 한 나라의 생성과 소멸에 이르는 천년 세월이 가로놓여 있다고 생각하면 결코 짧게 느껴지지 않는다. 탈해 이사금의 탄생과 이후의 행적은 혁거세거서간보다 더 화려하다. 다파나국이라는 미지의 땅, 역시 알에서 태어난 탈해왕이 궤짝에 실려 동해안에 상륙하고, 어부로 지내다가 묘한 꾀로 반월성의 주인이 되고 또 사후에 토함산의 산신이 되기까지 그의 전생애는 모두 전설 아닌 것이 없어 보인다. 석탈해라는 이름부터 결코 예사롭지 않다. 태어날 때 까치가 울었기에 "까치 작"에서 새(조)가 떨어져 나간 석이 성이 되었고, 탈해 또는 토해라는 이름은 그가 사후에 묻힌 토함산의 기원이 되었다. 이사금이라는 왕칭어도 그가 남보다 이가 많았기에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어떻든 토함산 석굴암 앞에서 맞는 일출은 언제 보아도 그의 생애만큼 신비스럽다. 탈해이사금 시절 박, 석과 함께 또 하나의 성 김씨가 역시 알을깨고 탄생한다.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가 시림이라 불리는 숲에서 닭 울음소리와 함께 금빛 찬란한 궤짝에서 태어난 것이다. 경주 남천이 휘감아 흐르는 반월성 서편의 느티나무와 왕버들 숲이 무성한 계림은 경주 김씨의 탄생설화를 간직한 곳이다. 다파나국이나 나정, 계림의 이 신비로운 탄생설화가 있었기에 세 성씨가 서라벌을 다스릴 수 있었고, 그 역사가 천년으로 이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경주 시내 한복판의 노송으로 뒤덮인 낭산은 언제 가 보아도 정겨운 뒷동산을 연상케 한다. 그 옛날 구름 속에 누각의 영상이 어리고 야릇한 향기가 피어 올랐기에 신유림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신유림의 정상 도리천에 대단한 여걸 선덕여왕이 잠들어 있고, 그 턱 밑에 사천왕사 절터가 잡초 속에 버려져 있다. 황량한 사천왕사지를 돌아보려면 아무래도 황혼녘이나 달 밝은 한밤중이 제격일 듯하다. 해질 무렵 이 절터에서 낭산의 숲을 바라보면 이곳을 왜 신유림이라 칭했는가를 알게 된다. 뿐인가, 달 밝은 밤에 피리소리 하나로 지나가는 달을 멈추게 했다는 월명스님(월명사)과 거문고로 방아소리를 흉내냈다는 위대한 풍류객 백결 선생을 만나는 행운도 얻기 때문이다. "제망매가"와 "도솔가"의 작가로 알려진 월명사는 이곳 사천왕사에 머무르면서 사랑하는 누이동생의 죽음을 슬퍼했고, 달밝은 밤이면 월명로에 나와 앞마을 월명리를 향해 피리를 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피리소리도, 인근 마을에 사는 백결 선생의 거문고 가락도 들을 수가 없다. 단지 사천왕사지를 가로지르는 철로와 경주, 울산간 국도의 자동차 소음만이 요란할 따름이다.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영일과 호미동 - 호랑이꼬리에서의 해맞이 한반도가 구부린 자세에서 엉덩이를 한껏 동해로 치민 곳, 영일은 이 땅에서 가장 먼저 해를 맞는 곳이다. 이 해맞이골은 옛날 신라 아달라왕 때의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의 태양신과 관련된 전설로도 유명하다. 바닷가 "도기뜰"에 살던 어부 연오(연오 또는 연오)는 어느 날 해초를 뜯던 중 거센 파도에 밀려 일본땅으로 흘러간다. 섬나라 왜인들은 홀몸으로 바다를 건너온 연오가 예사 인물이 아님을 알고 그들의 왕으로 추대한다. 뿐만 아니라 남편을 찾아 뒤따라온 세오 부인도 왕비가 된다. 한낱 어부에 지나지 않았던 이들이 졸지에 섬나라의 왕이 되었다니 신나는 일이지만 반면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는 이변이 벌어진다. 일식과 월식이 한꺼번에 생긴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일월이 갑자기 사라져 온 천지가 암흑으로 변한 것이다. 이때 일월을 관측하던 천문학자가 해와 달의 정기가 일본으로 옮겨 갔다고 아달라왕에게 아뢰자 왕은 사신을 급파하여 이들 부부를 소환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연오는 자신이 일본왕이 된 것은 하늘의 뜻이라며 소환에 불응하고 대신 세오 왕비가 짠 비단을 보내 그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게 한다. 신라 조정에서는 연오의 말에 따라 사신이 가져온 비단을 모셔 놓고 정중히 제사를 올렸고 이내 해와 달이 밝은 빛을 되찾게 되었다. 베를 짜는 행위를 가리켜 우주의 질서에 호응하는 인간의 의식이라고 이른다. 그렇다면 세오 왕비를 두고 그 비단을 짠 여신이라고 당시 신라인들은 생각했을지 모른다. 아무튼 신라 조정에서는 비단을 잘 갈무리해 두고 그곳을 귀비고라 하여 국보로 삼게 되었다. "해야 솟아라"고 절규하는 박두진님의 시가 생각난다. 옛날 영일땅에서도 이처럼 해가 솟기를 바라는 간절한 절규가 있었을 것인데, 당시 제사를 올리며 기도 드리던 곳을 "도기야"라 부른다고 "삼국유사"(권 1)는 기록하고 있다. 도기야는 지금의 동해면 도구동이며 이곳에 일월지라 일컫는 "해달못"이 남아 있다. 해달못에 관한 이야기는 단순히 연오, 세오 부부의 이동설화만이 아니라 고대 태양신화의 한 유형으로 설명된다. 연오와 세오 두 사람의 이름에서 공통으로 쓰이는 "오"는 까마귀를 뜻한다. 예로부터 태양 속에 까마귀가 있다는 설을 고려할 때 연오는 해맞이로, 세오는 달맞이로 해석될 수도 있다. 또 이 전설은 일본측 문헌에 전하는 신라 왕자 천일창 설화와도 관련이 있는 듯하다. 아무튼 연오랑, 세오녀의 이야기는 일찍이 우리 조상들이 일본에 건너가 그곳을 다스렸던 역사적 사실을 원시적 태양신화에 동점설화까지 가미하여 설명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영월은 지리적인 여건으로 인해 일본과각별한 관계에 있다. 과거 우리 땅을 침범했을 때 일본은 영일이라는 지명을 조선이 일본을 맞는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우쭐댄 적이 있었다고 한다. 연오랑, 세오녀의 전설을 안다면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를 깨달았을 텐데 말이다. 영일은 옛날 삼한시대에는 근기국이라 했고, 삼국시대에는 근오지라 적고 있다. 여기서 "근(근 또는 근)"은 우리말 "큰(대)"의 옛말 표기이며, "기(기 또는 기)"는 땅을 지칭하는 고유어로서 큰 고을이라는 뜻이다. 영일땅에서도 일출이 가장 빠른 곳이 영일만의 꼬리 부분에 해당하는 대보면 장기곶이다. 이곳 지형이 반도의 등줄기나 말(마)의 갈기와 같다 하여 어려운 한자를 빌려 쓰고 있다. "긴 갈기" 곧 장기곶을 때로 호미등, 구만리, 또는 삐중다리라 부르기도 한다. 동해안으로 삐죽 나왔기에 삐중다리요 등줄기가 여러 겹으로 중첩되었기에 구만리라 이름한 것이다. 호미등이라는 이름은 호미의 등처럼 생겨서가 아니라 호랑이 꼬리처럼 생긴 비탈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우리를 얕잡아 보려는 일본인들은 이를 두고 "토끼꼬리" 곧 토미등이라고 격하시켰다. 그러나 어느 문헌을 보아도 토끼에 관한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다. 분명히 말하건대 한반도는 호랑이가 중국 대륙을 향해 포효하는 형상이며, 장기곶 곧 호미등은 호랑이의 꼬리 부분에 해당하는 곳이라 강조하고 싶다. 호미등에는 한말 고종 때 건립된 등대가 있고 그 옆에는 등대박물관이 있다. 호미등에 처음 등대가 세워질 때 이곳 주민들의 반발이 매우 컸다고 한다. 이유인즉 호미등, 즉 호랑이꼬리에 불을 붙이면 호랑이가 요동치는 통에 그 일대가 불바다가 되리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실지로 등대의 건축 과정에서 타지로 이주하는 주민들이 속출했고, 준공 후에는 일본인 등대수가 부임한 지 두 달 만에 화재로 온 가족이 몰사하는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장기갑이 토끼꼬리인지 호랑이꼬리인지는 이 정도면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을까. 동해 연안이 풍경은 어디나 그렇지만 영일만에서 보는 바다 풍경은 특히 아름답다. 김포에서 구룡포와 대보의 장기곶 등대를 거쳐 도구동에 이르는 호랑이꼬리 해안은 그야말로 절경의 연속이다. 최근 정동진이 젊은 세대에게 인기가 있다지만 모름지기 일출을 보려거든 해맞이의 본고장, 이곳 호랑이꼬리를 찾을 일이다.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선산과 금오산 - 복사골에서 솟는 불도의 샘 먼 옛날 신라땅에 불법을 전하고자 이곳 일선(선산의 옛 이름)으로 숨어든 한 스님이 있었다. 그 스님을 일러 묵호자 또는 아도라고 부르는데, 옛 기록이 워낙 들쭉날쭉하여 두 이름이 별개인지 아니면 동일인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필자는 동일인으로 보고자 하는데, 곧 한 사람을 두고 부르는 사람에 따라 호칭을 달리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북쪽에서 온 얼굴이 검은 사람이어서 "묵호자(묵호자, 또는 묵호자)"라 했고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어서 "아무개"라는 뜻으로 "아도(아도 또는 아두)"라 하지 않았나 싶다. 어떻게든 얼굴이 검은 이 아무개는 일곱 살 나이로 모례라는 부잣집에 머슴으로 들어가 여러 해 동안 숨어 살게 된다. 소년 아도는 소와 양 각 1천 마리를 키우면서 새경 없이 열심히 일하다가 주인의 신임이 두터워질 무렵 어디론가 훌쩍 떠난다. "이 집에 칡순이 뻗거들랑 그 칡순을 따라오면 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아도는 열두 살이 되던 해에 주인에게 이런 말을 남기고 떠났는데 그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어느 해 겨울, 집 문턱을 넘어온 칡순 줄기를 따라 냉산 중턱으로 갔더니 과연 그곳에서 수도중인 아도를 만날 수 있었다. 옛 주인을 만난 그는 절을 짓기 위한 시주를 부탁하면서 두 말들이 망태기를 내밀었다. 그런데 그 망태기는 요상한 물건이어서 곡식을 아무리 부어도 완전히 채워지지 않았다. 망태기를 다 채우지는 못했지만 모례는 1천 섬을 시주하게 되었고, 그 시주금으로 냉산 기슭에 절을 지을 수 있었다. 해동 최초의 가람 도리사, 절을 짓던 때가 한겨울이었는데 냉산 기슭에 복사꽃과 오얏꽃이 만발했다 하여 이런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도개면 도개동, 복사꽃 피는 마을에서 신라 불교의 길이 열렸다는 뜻으로 이런 지명이 붙었을 것이다. 모례 장자의 집터에는 아직도 옛 우물이 남아 있고, 소와 양 1천 마리씩을 키웠다는 소천골과 양천골은 냉산 북쪽 골짜기에 숨어 있다. 모례장자샘 또는 모례가정이라 일컫는 이 우물에서는 지금도 맑은 물이 퐁퐁 솟는다. 아도스님(묵호자)이 창건한 최초의 가람 도리사, 신라 불교의 뿌리가 닿은 도리사의 역사와 전설이 이 정자 모양의 우물에서 영원히 샘솟는다고 할까. 도리사 절문을 나와 모퉁이를 돌면 눈앞에 펼쳐지는 전망이 그야말로 장관이다. 멀리 황악산과 금오산 산줄기 사이로 넓은 벌판과 유장히 흐르는 낙동강이 아련한 모습으로 들어온다. 김천의 황악산에는 아도화상과 탯줄이 연결된 또 하나의 고풍 서린 가람이 있다. 이름하여 직지사, 스님이 도리사를 세운 뒤 다시 손을 들어 북쪽의 산을 똑바로(직) 가리키며(지) "저 산에도 좋은 절터가 있다."고 한 데서 직지사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이 이름은 선가의 가르침인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에서 따온 말이겠으나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 "똑바로 가리킨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싶다. 또 하나의 명산인 금오산은 구미의 상징인데, 이름부터 따로 떼어 생각할 수가 없다. 금오산이 명산, 명당임은 풍수지리의 비조 도선국사가 이곳에서 수도하고 득도한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케이블 카가 닿는 이 산 중턱에 자리잡은 도선굴이 바로 그 현장이라고 한다. 어떤 이는 금오산이 와불의 형상이라 하고, 또 어떤 이는 거인산이라 일컫기도 한다. 먼 발치에서 보면 산의 능선이 임금 왕 자를 새겼다고 하고, 정상의 봉우리가 흡사 하늘의 북두칠성을 응시하며 누운 거인의 옆 모습이라 말하기도 한다. 또 정상에서 보는 산세가 낙동강에서 끌어올린 매의 형상이라 하고, 또는 거북의 꼬리를 닮았다고도 하는데 이런 연유로 구미라는 이름을 얻었다던가. 더 그럴듯한 설은 옛날 이 산을 지나던 아도화상이 저녁놀 속으로 황금빛의 까마귀, 곧 태양 속에 있다는 그 금오가 나는 모습을 보고 금오산이라 이름했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금오의 전설은 한때 구미시 상모동 출신의 박정희 대통령에게 미쳐 그가 태양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것으로 희자되기도 했다. 지명이 전설처럼 금까마귀가 노닌다 하여 금오산이 되었고, 거북 꼬리를 닮았다 하여 구미라 명명했다고 쉽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지명 전설을 액면 그대로 믿거나 지명을 한자 뜻대로 해석하고 만다면 지명 학자들은 따로 연구할 일이 없을 터이다. 구미는 원래 변진 24개 나라 가운데 군미국에서 기원하여 훗날 금오나 구미라는 이름으로 달리 표기되었다. 따라서 군미, 구미, 금오 등은 한자의 뜻과는 상관없이 하나의 어형을 나타내기 위한 차자표기로 보아야 한다. 그 하나의 어형은 큰 산이나 물(낙동강)을 지칭하는 고유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고구려의 스님 아도가 뿌린 신라 불교의 씨앗은 선산땅에서 뿌리내려 무성하게 꽃피었으니 황악산에서 팔공산에 이르는 낙동강변에만도 무려 30여 곳을 헤아리는 가람이 지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한때의 일로 오늘날에 와서 이들 사찰은 한결같이 세월의 흐름에 묻혀져 가고 있다. 더러는 몇 조각 탑신이나 주추만을 남긴 채 폐허가 된 곳도 적잖으니, 갈항사가 그러하고 동방사나 법수사가 그런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쉬운 곳은 군위에 있는 인각사이다. 이 절은 일연 스님이 만년을 보내며 "삼국유사"를 저술했다는 유서 깊은 가람이다. 울도 담도 없이 길가에 내팽개쳐진 절의 흔적들을 보며 일연 스님의 부도만이라도 거두어 법당 안에 모셔 놓은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우리에게 신화나 전설의 샘을 물려 준 일연 스님에 대한 우리의 대접이 너무 소홀하지는 않은지 한번 반성해 볼 일이다.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안동과 하회 마을 - 제비연에서 물도리동까지 신라 때 고창(지금의 안동)으로 들어가는 길목 주막에 심부름하는 한 처녀가 살았다. 연이라는 이 처녀는 일찍 부모를 잃고 이 주막에 들어와 낮에는 부지런히 손님들 시중을 들고 밤에는 글을 읽었다. 그러면서 먼저 가신 어버이의 왕생극락을 기원하며 늘 염불을 외우곤 했다. 마음씨 고운 이 소녀의 불심을 가상히 여겼음인지 어느 독지가에게서 많은 재물을 얻게 되고, 이 재물로 고갯마루에 법당을 짓게 된다. 승려도 아니면서, 그것도 처녀의 몸으로 이런 큰 역사를 감당하기는 무리였는지 법당이 완성되던 날 연이는 서른여덟 나이로 부처님의 부름을 받는다. 그녀가 죽던 날 밤, 요란한 진동과 함께 법당 뒤 언덕 위의 바위가 갈라지면서 그 속에서 거대한 돌부처가 솟아난다. 안동 시내에서 영주로 가는 5번 국도를 타고 북으로 십리쯤 달리면 느릿한 고갯마루 암벽에 웅장한 부처의 형상이 고개를 내민다. 이름하여 "이천동 석불"(보물 제 115호), 흔히 "제비원 석불"로 통하는 이 미륵불 뒤에는 연미사라는 작은 절이 숨어 있다. 이 주변의 지형이 제비 꼬리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나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그런 형세는 찾아보기 어렵다. 제비원 석불에 얽힌 전설은 매우 구구하다. "제비"라는 명칭도 연이의 혼이 제비가 되어 날아갔다는 설에서, 이 절을 지을 때 죽은 와송의 혼이 제비가 되었다는 이설도 있다. 그러나 제비라는 명칭은 이 처녀의 이름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연(혹은 "년")"이란 말은 "언년이, 끝년이" 등에서 보듯 여성 이름에 흔히 붙는 접미어이다. 전설의 주인공 연이를 문자로 기록할 때 한자 연으로 적는 바람에 이를 제비로 해석하지 않았나 싶다. 지형이 제비 꼬리를 닮았다거나 이곳에 "제비원"이라는 역원이 있었던 사실도 모두 차음자 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자 한다. 전설에 걸맞게 이 석불은 여느 불상과는 달리 풍기는 인상부터 특이하다. 산신의 형상이랄까, 불심보다는 주술성을 짙게 느끼게 하는 그런 마애불이다. 아니나 다를까, 남도 지방에서 유행하는 성주풀이에서도 이 제비원이 성주님의 본향이라고 알려 준다. "성주야 성주로다 성주 근본이 어디메냐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이 본일러라...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여." 안동땅은 주지하는 대로 우리나라 추로지향이라 불릴 만큼 유교문화, 양반문화로 대변되는 전통문화의 산실이다. 거기에 성주님의 본이 여기라면 이 또한 무속으로 대변되는 민속문화의 본거지가 아닌가. 양반골 안동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 풍천면 하회 마을이다. 풍산 들판의 꽃뫼(화산) 주변을 꽃내(화천)가 마치 "오메가" 형으로 휘감아 흐르는 이 마을의 성황당을 찾는다. 이 마을 민속의 원류를 들여다보기 위함이다. 이곳 물도리(하회) 마을을 지켜 주는 여신은 무진생 서낭님이시다. 이 서낭님(또는 성황님)은 열다섯에 과부가 된 이 마을 삼신의 며느리라고도 하고, 열일곱 처녀인 의성 김씨라는 설도 있다. 어떻든 이 서낭님을 위해 마을에서는 매년 동제(당제)라는 제사를 오리고 3년, 5년 또는 10년에 한 번씩 별신굿이라는 특별한 행사를 마련한다. 신내림(신탁)에 의해 펼쳐지는 별신굿에는 저 유명한 탈놀이도 선을 보이는데, 그 첫 마당에 등장하는 각시가 바로 이 서낭님의 현신이다. 굳게 다문 입술, 가늘게 뜬 눈매로 보아 이 서낭님은 퍽 차분한 것 같으나 눈초리만은 심상치가 않다. 그 옛날에는 그토록 조용했던 물도리동, 우리 전통문화의 보고라는 이 마을에 최근 도시의 저질문화가 몰려오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이 마을 주막이나 가게마다 걸려 있는 각시탈의 표정에서도 분명 불편한 심사를 읽을 수 있다. 물도리동 하회 마을의 지형은 연못이 물 위에 떠 있는 형상이며, 낙동강과 함께 화산의 산줄기가 태극무늬를 연출하는 전형적인 명당으로 손꼽힌다. 외부와 철저히 격리되었기에 어떤 외침도 받은 적이 없으며 낙동강의 잦은 홍수 피해조차 입지 않았다고 하니 말이다. 임진왜란의 와중에도 왜적이 들어올 수 없었던 것은 이런 지리적 여건 말고도 서애 유성룡 대감의 숙부의 공로가 컸다고 한다. 치숙이라 불릴 만큼 우둔하게 처신하던 대감의 숙부는 조카를 살해하기 위해 잠입했던 중을 붙잡아 왜구의 첩자임을 자백케 하고, 그를 죽이지 않고 이용함으로써 전란 내내 안동땅이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 연유에서인지는 모르나 서애 대감의 본가인 충효당은 오백 년이 다 된 지금까지도 고색 창연함을 잃지 않았다. 옛날 큰 고을이라는 뜻의 "고타야"라는 고유지명은 신라 때 고창이란 한자말로 바뀌고, 이어 고려 건국과 함께 안동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동쪽이 안정되었다는(안어대동) 뜻의 이 지명은 왕건과 견훤의 전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왕건이 이 지역에서 견훤과 최후의 결전을 벌일 때 권, 김, 장씨 세 장군의 도움을 얻어 대승할 수 있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곳 주민들은 견훤이 지렁이의 아들인 점에 착안하여 낙동강에 소금을 풀고 얼개를 이용하여 지렁이를 짠 강물에 밀어넣음으로써 그 기세를 꺾어 버렸다. 오늘날까지 전승되는 차전놀이가 바로 그때의 모습을 재현한 놀이라는 것이다. 어느 시인은 안동을 "어제의 햇볕으로 오늘이 익고 과거로부터 현재를 대접하는 곳"이라 노래했다. 동쪽이 안정되었기에 안동이요, 전통문화의 보존이라는 긍정적인 면은 있으나 안정과 편안함이 너무 오래 지속되는 건 아닐는지.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진안과 마이산 - 난달래골에 내려온 신선 부부 천상의 신선도 때로 속세에서 살고플 때가 있나 보다. 한 신선 부부가 무슨 연유인지 이곳 진안 고을에 내려와 살았다. 사랑의 도피행인지 아니면 죄를 지어 일시 추방당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떻든 소풍이라도 온 듯 이들 부부의 이승 생활은 매우 행복했다. 꿈 같은 세월이 흘러 아이가 둘이나 생길 무렵 이들은 다시 하늘나라로 올라가야만 했다. 떠날 때는 말 없이, 그리고 흔적 없이 사라져야 함이 신선 세계의 불문율인지라 이들 부부도 한밤중을 택하여 승천하려고 했다. 그러나 일이 잘못되려고 그랬는지 그날 따라 아내가 늦잠을 자는 바람에 그만 출발이 늦어지고 말았다. 이미 동이 터 오는 새벽녘에야 비로소 하늘로 솟았으나 두 신선은 공교롭게도 사람에게 들키고 말았다. 어느 부지런한 아낙네가 우물에 물 길러 나왔다가 거대한 두 산봉우리가 둥둥 떠오르는 광경을 보고 그만 소리를 지른 것이다. 천기를 노출시킨 이들에게는 두 번 다시 승천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건 모두 게으른 당신 탓이야!" 남편 신선의 분노는 폭력으로 나타나 아내가 양쪽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두 아이를 빼앗으며 아내의 옆구리를 걷어 차고 만다. 이렇게 싸우면서 지상으로 추락한 신선 가족은 거대한 바위산으로 굳어져 갔다. 전북 진안과 마령군에 걸쳐 솟아 있는 마이산은 신선 부부가 땅으로 떨어질 때 다투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다. 동쪽으로 떨어진 남편 신선, 즉 수마이봉(웅봉)은 지금도 화가 풀리지 않은 듯한 형상이며, 등을 맞댄 채 서편으로 돌아앉은 아내 암마이봉(비봉)은 한 대 얻어맞고 잔뜩 토라진 모습 그대로다. 그 밑으로 덩치는 작으나 수마이봉 발 밑에 제법 오똑하게 솟은 봉우리는 두 아이의 형상이다. 속칭 "나도산"이라 불리는 이 봉우리를 두고 사람들은 "너만 마이산이냐, 나도 마이산이다."라는 새끼봉우리의 기상을 가상히 여겨 그렇게 불러준다고 한다. 땅에 떨어진 신선의 형상이 마이산이라 한다면 마땅히 지상에 있어야 할 인간이 하늘로 오른 상이 우화산이다. 마이산과 더불어 전설상이 묘한 대칭구조를 보이는 우화산은 진안 읍내에 있다. 옛날 진안 고을에 효성이 지극한 한 선비가 살았다. 일찍이 아내를 잃은 그는 부모님께 효도할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선행을 베풀어 주변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이런 선비의 행실에 하늘도 감복했음인지 부모 삼년상을 치른 그에게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난다. 하루는 앞산 기슭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천둥 번개와 함께 한 선녀가 나타나 선비를 하늘로 들어 올린다. 때마친 선비의 양 겨드랑이에 깃이 돋아나 스스로 날 수 있게 되어 선녀의 안내에 따라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다. 이를 두고 세상에서는 "우화이등선"이라 했다던가. 월왕산의 남쪽 누각에서 보면 우화산은 이름 그대로 예쁜 선녀가 진안 읍내를 향해 너울너울 춤추는 형상이며, 우화정이 선 산중턱은 깎아지는 절벽이어서 부여의 낙화암을 연상케 한다. 마이산은 오르는 산이 아니라 바라보는 산이다. 암, 수 모두 700M 미만의 낮은 산이어서 오르는 맛도 적을뿐더러 수마이봉은 아직도 노기가 덜 풀렸는지 사람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마이산은 본래 "섰다뫼" 또는 "섰다봉"으로 불리웠던 것 같다. 남성의 상징을 그대로 닮은 이 봉우리를 신라 때는 서다산이라 적었고 고려 때는 용출산, 조선시대에는 속금산이라 적었다. 이 밖에도 돛대봉, 용각산, 문필봉 등 점잖은 이름도 있는데, 이는 모두 우뚝 솟은 산의 외형상이 특징을 묘사한 것이다. 마이산은 조선 왕조의 창업과 관련하여 태조 및 태종과 인연이 깊다. 두 임금 모두 이 산을 다녀간 바 있으며 그때마다 새 이름을 하사받았다. 앞서 말한 속금산은 태조가 명명한 이름이며, 말 귀를 닮았다 하여 붙인 마이는 태종이 하사한 이름이다. 또한 태조가 이 산에 머무를 때 말을 매놓던 자리가 지금도 주필대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고, 태종이 다녀간 10월 12일(1413년)은 지금도 마이제로 매년 기념되고 있다. 뿐인가, 암마이봉 밑에 있는 마이탑사와 함께 즐비하게 늘어선 80여 기의 돌탑은 현대의 새로운 전설을 만들어 가고 있다. "무진장"이라면 강원도의 "영평정"과 함께 우리나라 두메산골의 대명사로 불린다. 무진장, 곧 무주, 진안, 장수는 영월, 평창, 정선에 못잖은 고원지대에 위치해 있다. 흔히 호남의 지붕이라 일컫는 무진장, 그 가운데서도 진안은 그 중심에 위치하여 속인들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신선 부부가 이곳을 택한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닌가 한다. 진안은 본래 "난달래골"이라 불리었으니 문헌상으로는 난진아현으로 표기되었다. 이 지명은 산골 마을을 뜻하는 "달래(진아)"에다 아주 높다는 지명접두사 "난"이 첨가된 어형이다. 진아를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도 월량 또는 월량으로 부기하여 이 표기가 "달아" 또는 "달래"임을 뒷받침해 준다.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의 가운데에 위치하여 금강과 섬진강의 발원지이기도 한 난달래골은 예나 지금이나 산간벽지로 남아 있다. 사람의 발길이 드문 곳이라 예스러운 풍정을 지금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세속의 일이 번거롭게 여겨질 때, 벚꽃이 만개한 초봄쯤에 가서 말 귀를 빼닮은 마이산의 모습을 볼 일이다.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보은과 속리산 - 속세가 산을 떠나 있네 보은에서 상주로 가는 25번 국도에 서면 오른쪽 산줄기에서 시냇가로 흘러내린 두 개의 큰 바위가 보인다. 흔히 북쪽 것은 보은바위라 하고 남쪽 것은 상주바위라 하는데, 가까이 붙어 있는 두 바위의 이름을 달리 부르는 것은 그 사이로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도 경계선이 지나기 때문이다. 보은이라는 지명의 기원이 된 이 바위를 치마바위 또는 속곳바위라 부르기도 한다. 전설이라기보다 실화라 할 수 있는, 이 고을의 지명 유래는 조선조 선조 때 청백리로 알려진 장현광의 미담에서 비롯된다. 장현광이 잠시 이 고을 현감을 지낼 때의 이야기다. 평소 학문과 교육에 뜻을 두었던 그는 부임한 지 반 년 만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장 현감의 인품과 선정에 감복한 주민들이 몰려와 석별의 선물을 전하며 좀더 머물러 주기를 간청한다. 그러나 그는 주민들의 선물을 모두 사양하고 부임할 때와 똑같이 빈 손으로 그 고을을 떠난다. 행렬이 보은과 상주의 경계선인 이곳 바위에 이르러 잠깐 쉬고 있을 때 그는 우연히 부인의 치마 속에 내비치는 비단 속곳을 보게 되었단다. 출처를 추궁하니 부인은 고을 백성들이 보은의 성의로 준 것이라 차마 물리치지 못했다고 변명한다. "청빈을 생활신조로 삼아 왔는데 부인이 그만 손상을 입혔구려."라는 남편의 장탄식에 부인은 몸둘 바를 몰라 하며 즉시 속곳을 벗어 보은 쪽 바위 위에 걸쳐 놓고 "보은에서 받은 것을 보은으로 돌려 드립니다."라는 글을 남긴 채 상주 쪽으로 떠났다고 한다. 참으로 아름답고 멋진 이야기다. 하찮은 속곳일망정 이를 되돌려 주는 것이 목민관으로서 갖추어야 할 진정한 자세가 아니겠는가. 전별금이 어떻고 "옷로비" 사건이 어떻고 하는 작금의 현실에서 꼭 들려 주고 싶은 지명전설이 아닐는지. 보은이라는 지명은 세조에 의해 명명되었다는 설이 있다. 피부병을 앓던 세조가 이곳 속리산의 법주사 계곡 목욕소에서 목욕을 한 뒤 병이 깨끗이 낫자 이에 보답하는 뜻으로 그렇게 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헌상의 기록을 보면 이 설이 성립되지 않는다. 보은의 신라 때 이름은 삼년산이었고 고려에 와서 보령이라 불렀다. 그런데 보령이라고 하면 충청남도의 보령과 혼동될 우려가 있으므로 태종 6년에(세조보다 60여 년이 앞섬) 이를 보은으로 개칭한 바 있다. 어쨌든 지역 풍속도 지명을 닮아가는가 보다. 보은만큼 열녀나 효자, 효부가 많이 난 고장도 드물다. 신라 때 훗날 선덕여왕이 된 덕만공주가 속리산에서 수도할 때 부왕을 그리워하며 경주를 향해 절하는 모습을 닮은 배석대 전설을 비롯하여 10여 곳에 이르는 효자문, 열녀문 들이 이 고을에 흩어져 있음이 그 증거라고 할까. 특히 속리산 입구에 있는 정이품송에 얽힌 전설은 사뭇 감동적이다. 이 소나무가 서 있는 서편 마을을 진터 또는 진대라 하고 그 안 골짜기를 가마골이라 하는데, 이곳에는 도저히 맺어질 수 없는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숨어 있다. 맺어질 수 없는 남녀란 세조의 딸과 세조에게 죽음을 당한 김종서의 손자를 가리킨다. 이 두 남녀가 놀랍게도 부부의 연을 맺고 이곳 가마골에서 숯을 구우며 살았다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부왕인 세조에게 직언을 하다가 노여움을 받아 쫓겨난 공주가 이곳에서 김종서 대감의 손자를 만난 것도 기연이지만 훗날 이곳에서 이루어진 부녀 상봉도 더 기막힌 인연이다. 피부병 치료차 속리산으로 행차하던 세조가 이곳 소나무 아래서 쉬고 있을 때 구경 나온 동네 아이들 가운데 공주를 빼닮은 두 아이를 발견했단다. 진터라는 이름은 세조가 훗날 딸과 사위를 찾기 위해 이곳에 진을 쳤던 데서 비롯된다. 아버지의 눈에 벗어난 딸이었지만 자신의 혈육임에 분명하고 또 정적의 자손이지만 사위임은 부인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를 인정해 주려 했던 세조는 끝내 딸과 사위를 찾지 못한 것 같다. 사위에게 주려고 했던 선물, 곧 부마도위라는 정이품 작위는 세조가 쉬었던 소나무에게 내려지고 만 것이다. 세간에 이르기를 왕의 가마가 지날 때 가지를 들어 올리고 소나기를 만났을 때 피신처를 제공한 공으로 이 소나무가 그런 벼슬을 하사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 볼 때 인간에게 내리는 벼슬을 한낱 나무에 내릴 수는 없지 않을까. 세조가 끝내 사위를 찾지 못하자 부마에게 내릴 정이품을 그만 소나무에게 주고 만 것이라고 생각함이 더 합당하지 않을까? 어떻든 보은처럼 뜻 깊고 아름다운 지명은 없을 것 같다. 보은뿐 아니라 이 땅이 품고 있는 속리산과 그 속에 안긴 법주사라는 이름도 역시 멋지다. 속세를 떠난 속리산과 불법이 머무르는 법주사이니 산과 절의 이름이 참으로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속리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다. 불구대천의 원수 사이에 기막힌 화해를 보여 준 진터의 가마골, 골골이 절효정문이 즐비한 보은벌을 속세라 부를 수는 없다고 본다. 또한 속세를 벗어나야 불법이 머무를 수 있다는 우리의 통념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최치원의 다음과 같은 한시가 좋은 해답을 던져줄 것이다.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으나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 산이 속세를 떠난 것이 아니라 속세가 산을 떠나 있네. (도비원인 인원도, 상비이속 속이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