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상상력 1 - 정호완 8. 힘과 해 (2/2) 8-4. 머리와 마립간(麻立干) '머리카락 뒤에서 숨바꼭질한다'는 속담이 있다. 머리카락 뒤에 숨어서 어찌 안 보이기를 바랄까. 얕은 꾀로 사람을 속이려고 하나 곧 들통이 나는 것을 이른다. 머리는 사람의 신체 부위로 보아서 가장 높은 데 있기도 하거니와 사람 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생물학적으로도 모태 속에서 태아가 머리부분부터 성장한다는 보고가 있다. 피부의 감각에 따른 촉각만 제외한다면 시각, 청각, 미각, 후각이 모두 머리 부위에달려 있다. 감각기관은 물론 언어기능이 뇌의 우쪽 반면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유의해야 할 일이다. 요컨대 머리는 사람의 몸을 움직이는 의사결정의 총지휘부이다. 지휘부가 바로 서면 나머지 지체들은 탈없이 환경에 적웅하게 되고 부분들이 맡은 바 구실을 해 내는 것이다. 옛말을 더듬어 보면 '머리 ((용가) 95)' 는 '마리 ((석보) 6-44)' 로도 쓰인다. 일종의 모음교체에 다른 형태의 바뀜이라고 하겠다. '마리'는 '머리털'의 뜻으로 쓰이다가 '머리'에 와서 머리[頭]를 가리키게 되 었다. 오늘에 와서는 '마리' 가 수량의 단위를 나타내는 의존명사로 쓰이게 되었는바, 기본적인 속성은 한가지로 보인다. 즉 윗부분이면서 가장 높은 것,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치환할 수 있으니까. '마리'가 '말'로 줄어들어서 '크다. 좋다'의 뜻을 드러내는 접두사로 쓰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한때 임금의 칭호로 불리던 '말한'이 그러하며 현대어에 와서 '말개미, 말거머리, 말곰, 말나리, 말냉이, 말다래, 말매미, 말박(큰 바가지), 말벌, 말선두리(물방개)' 등이 바로 그러한 보기들이다. '머리'와 '마리'를 하나의 뜻에서 분화되어 나온 것으로 가정할 수 있을 때 '멀리'와 '멀다'도 하나의 장으로 묶일 가능성이 있다. '마리/머리'는 높이 있는 공간상의 특징을 드러낸다고 하였다. 새가 높이 날아오르면 넓게 바라다 볼 수 았는 것처럼 낮은 장소에서 보다는 높은 장소에서 더 많이 더욱 널리 살필 수 있게 된다. 결국 '멀리'와 '멀다'도 높은 데서 보는 그러한 공간지각을 바탕으로 해서 분화되어 나간 형태가 아닌가 한다. '마루'를 생각해 보자. 산마루, 고갯마루 흑은 대청마루와 같은 형태들이 그러한 테두리에 드는 것들로, 좀더 높은 곳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중세어 '마리 (머리)-' 를 중십으로 한 낱말의 겨레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마리-/머리-'의 낱말겨레 1) '마리_'계-마리 ((석보), 6-44), 마리ㅅ골((한청), 150 b), 마리다((한청), 145 d), 말 더휘가((유씨명) 말마얌이 (유씨명))등. 2) '머리-'계-머리 (頭, 遠 ; (석보), 6-32, (석보) 6-3), 머리맡((월석), 10-10), 머리ㅁ놈((훈몽) 상 29), 머리보다(멀리보다, ((유합),하 32), 머리지어 ((한중록) p. 450), 머리크락((가례해), 5-34), 머리털 ((소해), 3-lO), 머리터럭 ((능엄) 10-82), 머리톄 ((번소), 1O-27), 머리ㄷ골 ((구황간), 6-44), 머리뎡바기 ((월석), 2-41), 머릿조조리 ((월석), 2-41) 등. 보기에서와 같이 '머리-' 계의 말이 더 넓은 분포를 보이고, 특히 '마리-'계는 접두사로서의 발달이 눈에 뛴다. 이는 다시 현대어에 와서 '크다, 으뜸'의 의미를 더하는 접사로서 자리를 잡게 된다. 오늘날 방언에서는 '대갈-'계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방언분포를 살펴 보면, 머리 (한반도 전역), 대가리 (경기, 강원, 충청, 전북 대부분 지역/전남 영광 장성 담양, 곡성, 구례, 광주, 광산, 함펑, 목포, 무안, 영암, 나주, 고흥, 장흥 해남, 완도/경북 울진, 봉화, 영주, 영양, 청송, 영덕, 안동, 상주, 선산금릉, 연천, 경주, 월성, 대구 경산 청도 성주 고령/경남 함천, 밀양, 울주, 울산, 하동, 진주, 진양, 마산, 동래, 부산), 대갈(함남 신고산, 안변, 덕원, 문천, 영흥, 정평, 함흥, 오로 신흥, 홍원), 데구리 (제주 전역), 대갈통(전남 지 역/경북 김천, 금릉/경남 함안, 산청, 진주, 진양, 사천), 대 갈뺑이 (전북 김제 정읍/경남 합천, 밀양, 진주, 진양), 대가빼기 (전북 김제, 정읍了경남 함천, 밀양, 진주, 진양, 통영 마산 거제 남해), 대그삥이(경남 함안, 고성, 마산), 대가빠리 (경북 김천, 금릉, 영일, 칠곡),대갱이 (전남 광주, 광양, 함평, 나주, 영암, 해남, 강진, 진도, 완도/제주 전역), 대 망생 이 (제주 전역), 골(함남 신고산, 안변, 덕원, 문천, 영홍, 정평, 함흥, 오로, 신흥, 홍원) 등과 같다. 중세어에서는 '대가리 ((월석), 23-94)' 가 본시 '껍질'의 뜻으로 쓰이었다.그러니까 머리는 얼굴을 포함한 상체부위지만, 대가리는 머리의 겉부분 곧 껍질인 셈이다. 오늘날에는 흔동하여 쓰는 말이 되었다. 흔히 '머리'에 대한 비속어 정도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8-5. 팔과 발 '팔이 들이굽지 내굽나 ?' 생김새로 보아 팔은 안쪽으로 들이굽게 되어 있다. 자신과 자기에게 가까운 사람에게 이익이 되게 하고 정이 쏠리는 것은 모두에게 공통된 마음, 인지상정이라 할 것이다. 머리에서 결정된 판단의 대부분은 팔의 움직임을 따라서 그 목적이 이루어진다. 원시적인 농경과 목축에서 시작하여 고도한 문화형태에 이르는 인간의 활동 중 팔이 관여하지 많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우리의 마음을 파고드는 감명 깊은 음악과 그림이 그러하고 문학작품이 그렇다. 팔은 사람이 곧게 뒤로 기어다닐 때의 부담에서 벗어나 공간적인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옛말을 보면 지금의 팔은 'ㅂ ((능엄), 8-1O4)' 이었고 오늘의 발[足]은 그대로 '발-((능엄경), 1-68)' 이었다. 모음의 음상만 다를뿐 거의 같은 형태로 보인다. 그러니까 몸의 윗부분에 있는 'ㅂ'은 팔이 되었고 아랫부분의 '발'은 그대로 발이 된 셈이다. 오늘의 '팔'이 된 'ㅂ'은 히읗곡용(ㅎ)의 특징을 보이는 말이었는데 합쳐져서 'ㅂ~ㅍ>팔'의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ㅂ'은'발'과 표기가 다른데 무슨 근거로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느냐고 반문할 여지가 있다. 옛말에서 오늘의 '밟다'에 해당하는 말이 'ㅂ다(踏 ; ((월석), 21-1O2)' 였으니, 자연 그 둘의 관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발과 팔은 몸에 달려 있는 지체로서 다 함께 땅을 기어다니고 나무를 기어 오르는가 하면 물 속에서도 앞과 뒤의 차이가 있을 뿐 크게 보아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이다. 팔에 관련하여 '수완이 있다, 솜씨가 좋다'는 말을 한다. 수완이나 솜씨는 사람의 재능을 손이나 팔로 나타내는 표현이다. 순간순간 일어나는 상황에 알맞게 큰 무리 없이 적응해 가거나, 같은 일을 했는데 다른 사람보다 횔씬 보기 뭏고 효과 있게 하는 경우에 수완이 있고 솜씨가 좋다고 한다. '솜씨'는 손의 쓰임 곧 손놀림을 의미하는데 어떤 일을 해 놓은 결과를 일컫기도 한다. 그럼 'ㅂ/발'을 중심으로 하는 중세어의 낱말겨레를 알아 보도록 한다. 'ㅂ'과 '발' 의 낱말겨레(중세어) 1) 'ㅂ-'계 -ㅂ (ㅎ)((능엄) 8-1O4), ㅂ덩(팔짱 ; (금삼), 3-4), ㅂ독(팔꿈치 ; (중두해) 16-24), ㅂ쇠(팔쇠 ; (초두해) 20-9), ㅂ다(踏; (월석) 13-58) 등. 2) '발-'계-발(능엄), 1-68), 발 휘 (발더퀴 ; (역해보) 51), 발돕(발톱 (박해), 중 상 47), 발뒤측((동문) 상 16), 발등거리 (倒掛 ; (물보), 발목(역해) 상 36), 발바당((역해보) 32), 발ㅂ다(발을 베다 ;(중두해), 1-52), 발ㅆ개 (한청), 332 b), 발자곡(발자국 ; ((역해보) 22), 발자최 ((월 인) 4), 발ㅊ((가례해), 5-16), 발헤엄 ((유씨명) 5), ㅂ귀머리 (복사뼈 ; (구급간) 1 -44), ㅂ둥(발등; (월석) 2-4O) 등. 3) 'ㅍ-'계 ㅍ((훈몽) 상 26), ㅍ거리 ((한청) 17 d), ㅍ구미 ((왜해) 상 17), ㅍㄷ ((어록), 39), ㅍ독((사성), 상 61), ㅍㅁㅎ다 ((한청) 208 d), ㅍ목((역해), 상 29), ㅍ버히옷((물보), ㅍ쇠 ((초박해), 상 20), ㅍ지((훈몽) 중 28) 등. 'ㅂ~ㅍ'이 공존하다가 'ㅂ~발'이 음운론적으로 층돌하는 까닭에 아예 'ㅂ>ㅍ>팔'로 굳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본시 언어의 공시태란 순수히 공시적인 모양으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통시태란 전단계의 시대에 쓰이던 언어들이 쌓인 것임을 생각해 볼 때, 공시태는 통시태의 복합형태라고 할 수 있다 헌재 쓰이고 있는 '팔`의 방언들을 보면 잘에 접사들이 붙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파리 (함북 경원, 경흥), 팔때기 (한반도 대부분 지역), 팔띠기 (경북 경주, 칠곡. 월성), 팔팅이 (경북 안동. 의성) 등. 이에 비하여 '발[足]'은 접사의 달라붙음이 활발하지 않다. 발보다 팔이 더 많이 쓰인다는 점이 반영된 것일까. 8-6. 힘과 해 어떤 물체에 작용하는 두 힘이 맞서 결국은 아무런 힘도 작용하지 않은 것과 같게 되는 수가 있다. 이런 경우, 우리는 물체가 '힘의 균형상태'에 놓여 있다고 한다. 가만히 있는 물체에 어떤 운동을 일으키거나 움직이고 있는 믈체의 속도를 변화시키거나 정지시키는 데 작용하는 기운을 '힘'으로 정의한다. 힘은 사람이나 동물이 스스로 움직이거나 다른 것을 움직이게 하는 데도 작용한다. 우리가 살아 가는 과정이나 위대한 대자연의 움직임은 결국 나름대로의 에너지 곧 힘에 따라서 좌우된다. 에르곤이라 하여 정지상태에 있는 힘을, 에네르기아라고 하여 운동상태에 있는 힘을 표현하거니와, 만믈은 어떤 상태에 있건 힘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이런 힘을 알아차림에 있어 그 근원은 어디에서부터 비롯하는 것으로 보았을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해의 속성에서 힘의 원천이 촐발한 것으로 본다. 우리 조상들은 우리가 밥을 먹고 사는 일, 아궁이에 불이 타오르는 것, 꽃이 계절을 피어서는 지는 것, 밤과 낮이 서로 바뀌어 하루 또는 한 달, 그리고 한 해를 이루게 하는 모든 힘이 해를 중심으로 하는 데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지금도 지역에 따라서는 '힘'의 방언형이 '힘 -/심-' 계로 나뉘어 쓰이고 있다. '힘' 은 경기 포천/충남 논산/전북 익산, 이리, 진안/경북 봉화, 영주, 영덕, 안동, 영천, 경산, 경주/황해 장연/함북 성진, 청진, 회령, 종성, 경흥/평남 전역에서, '심 '은 경기,강원, 층청 전지역/황해 해주, 옹진, 은율, 장연/함경 대부분 지역에서 쓰인다. '심 '의 형태를 분석해 보면 '시-+ㅁ>심'으로 풀 수 있다. 여기서 '시다' 는 힘이 강하거나 마음이 굳고 세력이 큼을 나타내는 '세다[强]가 단모음화하여 쓰이는 방언형(핑안, 강원 등)이다. 세다'는 중세국어에서는 '셰다'로 나타난다. 이남덕이 지적한(1985)바와 같이, '셰-' 의 '셰 '는 '닷쇄, 엿쇄 '의 '-쇄'와 같은 계통의 말이며, '한 살, 두 살'의 '살'이 중세어의 '설'과 같은 형태이며 동일한 의미 해 [年]'를 뜻하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 그는 특히 '새~쇄'가 넘나듦을 지적한다. 음운의 변천으로 볼 때 시옷(ㅅ)은 히읗(ㅎ)으로 넘나들거나 음가가 소멸되거나 그대로 유지되는 경우를 보인다. 간추려 말하자면 '해 (ㅎ)'는 한편으로 '새 ~쇄 (셰>세 ~셔'의 꼴로 살아남기도 하고 해 -' 계열로 바뀌거나 아예 '-웨 ~애'계열로 변해 버렸다는 말이다. 태양의 속성은, 고도의 열과 빛을 수반함으로써 태 양계에 존재하는 모든 항성을 움직여 간다는 데에 있다. 거기다가 그 엄청난 무게 곧 중력에 따르는 힘은 우리 조상들에게 크나큰 경이로움과 숭배하는 마음을 불러일으켰을 법하다. 이같이 태양을 숭배하는 사상은 인류의 어떤 사회에서도 그 혼적이 엿보인다. 중국의 '왕(王)'이 그러하며 이집트의 '파라오', 신라의 '박혁거세 (朴赫居世)'가 그러한 경우이다. 고대 글자의 변천과정을 보면 '왕(王)'은 불이 타오름을 상징하였다. '파라오'는 '큰 집'이라는 뜻으로 왕은 태양의 신인 '라' 의 아들이며 제사장이 된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박혁거세는 '태양의 밝음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자'라고 규정되어 있다. 모든 자연현상의 기본원리 가운데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는 것은 힘의 원리라고 샘각한다. 힘에는 여러 가지의 갈래가 있다. 소유의 힘, 지식의 힘, 인격의 힘, 신앙의 힘, 무게의 힘 등 실로 많은 힘이 있다. 힘이 있는 쭉은 없는 쪽을 지배하며, 힘이 없는 쪽은 그 다스림을 받게 된다. 개인적으로든지 민족적으로든지 간에 우리들은 힘을 길러야 한다. '힘 '과 관련된 말로는 '심-/힘-'계의 형태가 있다. '심-'계에 드는 것으로는 '심들다, 심다(풀, 나무 등을 땅에 파묻어 나름대로 힘껏 성장할 수 있게 하는 동작), 심기다'와 같은 형태가 있고, '힘-'계에는 '힘껏, 힘내다, 힘닿다, 힘들이다, 힘부치다, 힘쓰다. 힘없다'와 같은 꼴들이 있다.
우리말의 상상력 1 - 정호완 8. 힘과 해 8-1. 입과 잎 윗사람이 시키는 일에 기민하고 영리하게 행동하는 것을 '입에 혀 같다'고 한다. 입이 있는 곳에는 혀가 있어 입 본래의 구실을 해 준다. '병은 입으로 들어가고 화는 입에서 나온다'는 <청장판전서>의 기록이 있다. 입을 통하여 먹은 음식으로 병도 얻지만, 그에 못지 않게 말을 잘못하여 화를 입는 일이 있으니 말을 삼가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입은 동물이 몸 밖으로부티 음식을 받아들여, 음식이 밥통에 들어가 소화가 잘 되도록 씹어서 침올 섞어 보내 주는 일을 한다. 또 혀와 입술은 하고 싶은 행동을 대신하여 말을 하는 구실도 한다. 입은 한반도로 이르자면 부산항이나 인천항에 해당하는 첫 관문이요 어귀가 되는 것이다. 성문이 튼튼해야 적에 대한 공격과 방어를 잘할 수 있듯 입이 제 구실을 잘해야 몸 전체를 잘 유지할 수 있다. 때에 따라서 아직 어떤 일올 처리할 만큼 준비와 능력이 없는 사람을 일컬어 '이도 아니 나서 황밤을 먹는다'고 한다. 여하튼 입은 목숨을 부지하는 제일의 관문이며 거지인 셈이다. 옛말에 문어귀나 동네입구를 '잎(용가) 1-11)' 이라고도 하였는데, 앞에서 플이한 신체부분의 하나로서의 '입' 과 같은 성질을 띠고 있다. 동네나 어떤 집을 들어가려면 문이나 동네 어귀를 거쳐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입은 나무의 '잎'과는 어떠한 관련을 가지는가. 옛말에 잎은 '닙(해요), 113), 닢(용가) 84)' 이었다. 해 내는 구실을 보면 '잎'은 동물의 입과 크게 보아 같은 맥락에 놓인다. 잎은 식물의 영양기관의 하나로서 호흡작용과 탄소 동화 작용을 한다. 좀더 자세히 풀어 보면,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이고 필요없는 산소를 내어 놓음과 동시에 뿌리로부터 빨아들인 영양소를 결합하는 일을 해 낸다. 잎은 식믈의 관문이니, 그 관문으로 들어간 공기 중의 상당량이 식물의 밥통이라고 할 만한 뿌리와의 상호작용을 따라서, 식물이 필요로 하는 물질을 만들어 낸다. 이 관문으로 들어 가야 할 것이 들어가고 나와야 할 것이 나오지 않으면 큰 장애가 일어나는 것이다. 입과 관련한 말의 무리에는 '입거옷, 입ㄱ (토), 입길 (흉보는 놀림), 입내쟁이 (흉내를 내는 사람), 입노릇(식사하는 것의 비어), 입덧, 입뜨다{입이 무겁다)' 등이 있다. 닙 (닢)'과 관련한 중세어 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다. '닙 (닢)'의 낱맡겨레(중세어) 1) '닙-'계- 닙 <보권문> 32), 닙니피 <월석> 8-12), 닙다<월인>155; 옷을 입음이 나무가 잎을 두른 것과도 같으니까), 닙담ㅂ(청 구), 대 132), 닙성 (계축) 등. 2) '입-'계-입 ((용가) 88), 입거ㅇ (초두해) 8-19). 입ㄱ(훈해), 입내 <월석> 17-52), 입ㄷ다(식성이 좋음 ; (동문) 상 62). 입뎌르다((동문) 상 62), 입비우다(말못하다 ;(능엄) 7-43), 입시울(석보), 9-29). 입아괴 (훈몽) 상 26), 입웃거엄 ((무원) 1-30), 입졍 (입버릇, (역해보) 57), 입ㅊ말(역해보) 56), 입일흠(말다툼 ; (한청), 66 a), ㅇ거웃(입수염 ; <초두해> 8-55), ㅇ김(구급방), 상 10) 등. 위의 보기로 보아 '닢/잎'의 낱말겨레로 '입'이 널리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동물의 '닢' 은 '입 ' 이며, 식물의 '입' 은 '닢' 이 되는 셈으로 오늘에 와서는 서로 다르게 쓰인다. 이들은 무엇인가 필요한 음식을 받아들이거나 필요한 햇빛을 받아들여 그 생명을 이어나가는 역할을 하는 기관들이다. 이러한 입 (잎)이 없다고 가정할 때 우리의 삶은 그 의미를 잃고 만다. 입의 가장 큰 기능은 먹고 숨쉬는 것으로, 때로는 상대방을 공격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다음으로 큰 것은 말하는 기능이다. 폐에서 나오는 날숨[呼氣]을 이용하여 소리와 뜻을 결합시켜 사람의 생각을 전달한다. 분절작용에 따라서 자음과 모음을 이합집산시킨다. 분절작용은 사람의 머리 속에서 다시 신경을 타고 입술로부터 다시 공기를 울림으로써 분명한 말소리로 상대방에게 알려지게 된다. 매일같이 우리가 하는 말은 '전달성'이라는 값진 기능을 갖는다. 같은 소리이면서 다른 뜻으로 쓰이는 것으로 '말[馬]' 이 있다(경상도 방언에서는 타는 '말'은 소리가 더 높고, 입으로 하는 '말'은 낮고 길게 난다). 타는 '말'도 짐이나 사람을 나름으로써 옮겨 주는 구실을 하며, 입으로 하는 '말'도 이 사람의 생각을 저 사람에게로 옮긴다. 한 말, 두 말 할 래의 '말'도 수량을 헤아리는 단위로서 곡식을 담아 옮기는 일과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위의 말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고 한다. 말만 잘하면 어려운 일도 풀어 헤칠 수 있는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 심지어 모든 종교는 신의 언어까지도 사람의 말로 뒤치어 경전으로 만들어 내니 실로 사람을 언어적인 존재 homo loquens 라고 할 만하지 많은가. 말과 관련하여 이루어진 낱말로는 '말 내다, 말눈치(말 속에서의 암시), 말대답, 말더듬이 (평안도에서는 말더투워리), 말동무, 말 되다, 말맛(말의 느낌). 말머리, 말문, 말밑, 말본, 말본새 (말투), 말소리, 말씀, 말썽, 말언(未言 ;보잘것없는 말), 말일키다' 등이 있다. '말[語]'과 관계 있는 중세어로는 '말((능엄) 1-l7), 말거동(신어) 9-l4), 말 라-(몽어유해보) l4), 말겯(말투 ((신어) 9-17), 말겯고다(말다툼하다 ; (능엄) 4-8), 말구듸ㅎ다((훈몽) 하 28), 말더두어리다((동문) 하 8), 말디다(말 마치다, (송강) 1-l0), 말ㅅ((원각) 서 11), 말ㅈ이 (잔말하는이 ; (훈몽) 하 29)' 등인데 매우 생산적으로 파생되어 쓰이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말을 아주 조심하여 실수가 없도록 함을 언어교육 제일의 대강으로 삼아 왔다. 하지만 진정으로 전달해야 할 올바른 말은 해야 하며, 그에 따른 행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8-2. 맛과 멋 맛도 좋으려니와 값이 싸서 마음껏 음식을 만들어 먹는 갈치자반을 일러 '맛 좋고 값싼 갈치자반' 이라고 한다: 일석이조와 같이 한 가지 일로 두 가지가 이로움을 지적하고 있다. 물건을 혀에 댈 적에 느끼는 감각 또는 사물에 대한 재미있는 느낌을 '맛'이라고 한다. 많은 음식은 그 맛을 따라서 사람들의 기호가 결정되며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집에서 만드는 음식은 물론이고 맛을 겨냥한 식품산업이 얼마나 많은가.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음식은 가장 소중한 것일진대 맛 또한 빼 놓을 수 없는 요소가 된다. '맛'이란 말은 모음교체를 따라 '멋' 으로 드러난다. '멋'은 세련되고 풍채 있는 몸매, 아주 풍치 있는 맛, 온갖 사물의 진짜 맛' 등으로 그 개념이 정의된다. 음식은 맛이 있다고 하지 멋이 있다고는 아니한다. 생활의 비중으로 보아 맛이 제 일차적인 음식의 가치라면, 멋은 미적 또는 수식의 가치라고 하겠다. 우선 식생활이 해결될 때, 다른 욕구에 대한 층족을 찾게 마련이다. 하지만 사람은 다분히 심리적인 존재인 까닭으로 멋 또한 결코 소흘히 여길 수 없다. 중세국어를 되돌아 보면 '맛'은 음식을 뜻하기도 하며, 음식에대한 감각적인 면올 드러내기도 하였다. 음식의 뜻올 중심으로 하는 '맛' 과 관련하여 발달한 말에는 '마시다(물이나 술 같은 것을 목구멍으로 넘기다), 맛나다(맛이 좋다), 맛난이 (음식의 맛을 돋우기 위하여 치는 장물), 맛들다(익어서 맛이 좋게 되다), 맛들이다(맛이 들게 하다), 맛맛으로(마음이 당기는 대로), 맛바르다(맛있게 먹는 음식이 양에 차기도 전에 다 없어지다), 맛보다, 맛부리다(싱겁게 굴다), 맛있다, 맛장수(싱거운 사람), 맛피우다(맛없이 굴다)'와 같은 형태들이 있다. '맛' 이 음식과 관련한 느낌으로 쓰임은, 음식은 반드시 입으로 들어가 혀로써 그 맛을 바로 알게 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멋'과 관련하여 쓰이는 말로는 '멋갈 없다(멋없다), 멋거리 (멋이 있는 모양), 멋대로, 멋들어지다, 멋쟁이, 멋적다(동작이나 모양이 격에 맞지 아니하다), 멋질리다(아주 멋들어진 기상을 지니다), 멋모르다(아무것도 모르다), 머쓱하다(멋없이 키가 커서 싱거워 보이다)'와 같은 꼴이 있다. 중세어에서 '맛'과 관련한 낱말의 겨레로는 '맛((석보) 9-19),맛갓다(마땅하다 ; 맛이 입에 맞으니까 ; ((역해보) 33), 맛갓(음식,맛 ; (소해) 6-71)' 등이 있다. 현대어와 비교하면 낱말의 겨레가 풍부하지 못하다. 맛이 육신의 양식과 관련한 물질적인 것이라면, 멋은 심미적, 정신적인 풍치와 관련한 표현이라고 하겠다. 음성모음과 양성모음이, 같은 말의 뜻이나 느낌을 달리하듯이, '맛'과 '멋'은 언어감각에 따른 분화어로 보인다. 진정한 음식의 맛은, 음식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고 절제하는 멋을 바탕으로 하는 고마움의 생활에서 비롯하는 것이리라. 무엇인가를 먹고 마시는 일은 삶의 가장 기본이 되는 활동이다. 소에게 먹이를 주지 않고 일만 계속 시켰을 경우 그 결과는 간단하다(요즘에는 일소도 없지만). 그 소는 밥통이 텅텅 비어, 경련을 일으키다가 끝내 죽음에 이르게 된다. 하여간 먹는 일은 더없이 중요하며 이른바 본능 중의 본능이라고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생명보전과 이어지니까. 그래서일까 ? 먹는 일에 대한 속담이나 성어는 여러 가지 표현으로 드러난다. '먹기는 파발(수송원)이 먹고 뛰기는 역마가 뛴다(-엉뚱한 사람의 횡재), 먹는 개도 아니 때린다(-식사는 편안하게 할 일), 먹는 떡에도 실 박으라고 학다(,-*같은 값이면 모양도 중시), 먹은 죄는 없단다(-배고파서 흠쳐먹은 죄의 가벼움), 먹을 콩으로 알고 덤빈다(-먹지 못할 일에는 무관심이 상책), 먹지도 못하는 제사에 절만 죽도록 한다(-소득도 없이 수고만 함), 먹지 못할 풀이 오월에 겨우 나온다(~되지 못한 것이 저레는 퍽 한다), 먹지 않는 종 투기 없는 아내(-이치에 어그러진 일을 바라지 말라)'와 같은 꿰를 들 수 있다. 이들 성어만큼이나 '먹다'는 그 뜻이 여러 가지이다. 웬만한 일들은 음식을 먹는 페 비유하여 그 쓰임새를 터잡아 놓은 것이다. 물론 가장 알맹이가 되는 뜻은 '음식 을 씹어서 삼키다' 이다. 이 밖에 '술이나 믈을 마시다, 담배를 피우다, 가로채어 차리다, 상금을 타다, 꾸지람이나 욕을 듣다, 뜻을 품다, 겁을 느끼다, 나이가 들다. 더위 등의 병에 걸리다, 남으로 하여금 비방을 당하게 하다, 귀로 소리를 듣지 못하다, 칼 따위가 잘 들다, 맷돌이 잘 갈리다. 화장품 등이 잘 배어들다, 돈어 들다' 등의 아주 다양한 쓰임을 알수 있다. 생각하건대 '먹다'는 '막다'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막다'는 '막(腹) +-다>막다'로 모음교체를 함으로써 넉 다'가 되었다. 삶의 연속적인 유지를 위하여 몰동 에너지의 끊임을 막아 주는 활동이 곧 '먹다'인 것이다. 배고픔을 막아 주는 것이 음식을 먹는 일이기 때문이다. 장발장은 빵 한 개 때문에 열아홉 해의 윽살이를 하였다, 살아 있는 생물은 먹어야 하는 것임을 명심할 일이다. 행여 그 '막(隱)'은 우리 몸 속에 있는 밥통의 '막'이 아닌지 ? 그막'올 채우기 위해, 공허한 영혼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먹을 밖에..... 8-3. 거짓과 참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하여도 곧이듣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콩으로 메주를 만드는 것같이 명백한 사실도 말하는 사람이 워낙 거짓말을 잘하여 도저히 믿을 수 었는 경우를 이르고 있다. 거짓말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해서는 안 될 거짓말이 있고 참말 같은 거짓말도 있다. 또한 예술적인 빛깔을 더함으로써 만들어지는 소설과 같은 그럴싸한 거짓말도 있다 뒤의 경우는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의 이상과 현실에 대한 문제를 풀어 보기 위한 가상의 공간이요 시간이다. 어느 나라의 말이든지 그 나라 말의 말본에는 가정법이란 게 있기 마련이다. 표현상의 차이는 조금씩 있지만, 거짓스런 상황을 설정하여 놓고 여러 가지 조건화의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제기한 거짓이 과연 합리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가를 찾아 헤매는 가운데, 놀라운 진리가 발견되고 인간생활에 전혀 새로운 삶의 장이 마련되는 일이 때때로 종종 있어 왔다. 그것이 학문이요 예술이요 종교가 아닌가 한다. 하지만 악의를 가지고 흑은 악의는 없더라도 거짓말의 탓으로 다른 사람이 어려움을 겪는다면 참말로 불행한 일이 된다. '것짓'은 껍질을 뜻하는 '거죽[皮]'에서 온 말이다. 옛말에 겉 부분을 이르는 형태로 '것 (皮 ; ((초두해), l5-5), ㄱ ((월석) 1-42)'이 쓰이었는바, 다시 '거줏>거짓'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속과 겉이 다른 것을 '거짓'이라 하고 그런 말을 '거짓말'이라고 한다. 아니면 속이 텅텅 비어 헛된 말을 '거짓말'이라고도 한다. 중세어 자료에서의 분포는 아주 폭이 넓다. 거ㅈ(거짓 (유합), 하 18), 거적눈(한청 153 b), 거줏 ((월석) 2-71), 거줏말((석보), 6-10)/거출뫼 (荒山-실속이 없고 엉성하니까 ; ((용가) 7-8), 거ㅊ다((소해),6-20) 등. 한펀 그 반대가 되는 것이 참이요, 그런 말이 참말이 되는 것이다. 속이 비어 있지 않고 속과 겉이 잘 들어맞는 사실을 '참' 이라고 하는 것이다. 속 따로 겉 따로일 때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는가 ? '참(참말)'은 이지러진 데 없이 아주 완전한 상태를 가리키는'차다[滿]'에서 비롯한다. 차면 넘친다고 한다. 너무 분수에 맞지 않으면 도리어 불완전하게 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참과 거짓은 속과 겉, 내용과 형식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자루도 속이 차지 않으면 제 모양을 찾지 못하고 바로 설 수 없다. 속과 겉은 떼어 놓아서는 안 될 것이어서 따로 떼어 놓으면 그 순간부터 참뜻을 잃고 만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에게 혼히 속임을 당한다. 생각건대 '속다'도 허위의 거죽을 속으로 안다는 말이 아닌가 한다.
우리말의 상상력 1 - 정호완 7. 아이와 알 7-1. 아이와 알 '아이 자라 어른 된다'고 하거니와 아이가 자라서 성인이 되는 건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다. 불완전하고 보잘것없는 사물이 차츰 발달하여 기능면에서 더 완전에 가까운 것으로 되는 자연의 이치를 이르는 말이다. 어린 사람 또는 자기의 아들을 낮추어 부를 때 '아이' 라고 한다. 워즈워드 의 <무지개> 라는 시에 나온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란 시구는 그 내용을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그럴 듯함이 있다. 낡은 것은 점차 사라져 가고 그 자리에, 새로운 것이 자리를 잡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섭리라고 할 밖에. 육체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정서적으로도 또한 그러하다 노인이 되면 되돌아을 길이 없는 젊은 날을 그리며 산다. 그래서 노인은 과거에 살고 젊은이는 미래에 산다는 건지. 젊은이는 '아이'로, 노인은 '어른'으로 대표하여 가리킬 수 있다. 아이들은 항상 어떤 일을 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으며 틀에 박혀 있지 많아 젊음 그 자체만으로도 노인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층분하다, 가능성은 씨앗에 비유되기도 하는바, 경우에 따라서는 일이 이루어지는 계기 또는 실마리로 되풀어지기도 한다. 사람의 '아이' 에 상응하는 말로 짐승의 새끼는 '아지 ((훈몽: 상18)' 라고 이르는데, 이는 궁중에서 유모 또는 보모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했다. '아이'는 중세어에서도 '아기 ((석보) 9-15)' 로쓰이는데, '아지(훈몽), 하 12)' 가 그 전단계의 형태이다. 이는 다시 '아시' 혹은 '앗'에서 그 비롯됨을 알아차릴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지금도 방언에 따라서는 '아시당초, 아시 벌매기 (층청. 경상.강원)'와 같은 형태가 쓰이는 것으로 그 근거를 잡아 보는 것이다. 음운변천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ㅅ> > o'의 과정을 생각하면 금세 이해할 수 있다. 좀더 덧보태어 풀이하자면 '아지'의 단계에서 하나는 '아지>아이 (>애)'의 과정을 거쳐 '아이' 가 되었으며, 다른 한 쪽으로는 '아씨'에서 음운의 강화현상이 일어나 '아지' 또는 '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 '아시/앗'은 근왼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가. '낮'과 '아침'의 부분에서 풀이한 바와 같이 '앗'은 시작'이요 '태동'의 뜻으로 보인다. '앗'은 받침이 바뀌어 '앗'(신어) 4-12)' 으로도 드러나며 다시 'ㄷ>ㄹ'의 변화를 따라서 '알'로 드러나기도 한다. '알'은 생명이 촐발하는 공간이요 시간이라면, 보이지는 않으나'알' 이 있게 한 내면의 과정 혹은 하나의 힘이 '얼' 이 아닌가 한다. 물론 모음의 교체를 따라서 이루어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앗'이 표면상에 드러난 것 또는 느낄 수 있는 것이라면 '어시 (엇)' 는 '앗(아시)'이 있게 하는 하나의 근거로 생각한다. 부모를 가리키는 중세어의 '어ㅅ(석보)'는 바로 '어시 >어 >어 이 '의 증간단계라 할 것이다. 상대적으로 '아시'를 부모의 몸을 이어받은 생명체로 가정할 수 있지 않올까. '아이'는 어른들이 낳은 자식이지만 생명을 이어 가는 가장 기본이 되는 단계이기도 하다.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니, 서로는 삶을 이어 감에 있어 반드시 교체되어야 하는 위상에 속한다. '앗_/엇-' 계와 '알-/얼-' 계에 해 당하는 형태들을 찾아 보자. 먼저 '앗_' 계에 들어가는 말에는 '아스라이 (흐릿하고 아득하게 ; 태초의 시간과 공간이 멀 듯, 인식하기 어려운 사실이나 사물을 이를 때), 아시 (아씨 ; 미흔녀로서 생산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음), 아시빨래 (애벌빨래 ; 경상도 방언), 아예 (처음부터), 아우, 아수(아우 ; 충청 경상 방언), 아이, 아이다(빼앗기다), 아이배다, 아저씨(부모와 한 항렬의 남자. '앗>엊'의 과정을 거쳐, 부모를 뜻하는. 어시 '가 블어 만들어겼다), 아주먹이 (더 이상 손을 댈 필요가 없이 깨끗한 쌀), 아주, 아직, 아침, 애 (아이), 애 갈이 (애 벌 갈이), 애기, 애호박, 애기플, 애늙은이 (나이는 어리면서 하는 짓이나 체질이 아주 노숙한 사람), 앳되다(어려 보이다), 애띠다(앳되다 ; 충청 방언), 애새끼, 애시 (당초). 애송이 (애티가 나는 사람), 애잇기름(애벌기름), 애저녁 (초저녁), 애 젊다(아주 젊다)'와 같은 형태들이 있다. 여기에서 '아이>애'의 과정을 거쳐 내 (아이)'가 접두사로 쓰이면서 많은 파생어를 만들어 내는 일은 흥미롭다. '엇_'계에 드는 말로는 어시('어이'의 함경도 방언), 어이 (짐승의 어미), 어이없다(어처구니가 없다. 터무니가 없음을 일컫는 말), 어이아들[母子], 어이 딸[母女]' 등이 있다. 이와 함께 '엇'은 접두사로 쓰이어 서로 어긋나게 되어가는 뜻의 파생어들을 만들어 가는 경우가 많다. 그 의미로 보아 아이에서 부모는, 부모에서 아이로 넘어 오는 것과 달리 거슬러 을라 가야 하는 속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반대'의 의미로 쓰이는 '엇'이 붙어 이루어지는 말에는 '엇가게 (한 쪽으로 어슷하게 기울여 덮은 헛가게의 한 가지), 엇가다(언행이 서로 엇나가다), 엇갈리다(서로 만나지 못하다), 엇결 (나무의 결이 비꼬인 것), 엇노리 (에누리 ; 받을 갔보다 더 많이 부르는 일), 엇대다(어긋나게 대다), 엇된놈(좀 건방진 놈), 엇뜨다(빗보다 ; 사실대로 보지 못하고 잘못 보다), 엇먹다(사리에 맞지 않게 비꼬다), 엇물리다, 엇셈 (서로 맞물리는 셈), 엇비슷하다(거의 같다-부모가 같으니까), 엇섞 다(서로 어긋매껴 섞다) '와 같은 형태가 있다. 그러니까 '엇'이 '거꾸로'의 뜻으로 쓰이는 것은 자손의 대에서 부모의 대로 이르는 억행의 순서이고, '앗'이 '앞으로 나아감'을 뜻하는 것은 부모에서 자식으로 이어지는 순행의 순서가 전제되기 때 문이다. '앗다'는 '나아가는'의 뜻으로 쓰이기도 하며, '빼앗음'의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먼저 있던 뒤의 것을 부정해야 한다.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도 사람은 그 부모의 소질이나 능력 혹은 재산을 물려받는다. 아이는 어머니의 몸 안에서 가장 소중한 영양을 공급받아 살아 간다. 제 흘로 영양을 섭취하기까지는 어머니의 품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얻어내야 하는 필연성이 있으므로 아이를 포기하지 않는 한, 어머니는 의무적으로 아이에게 필요한 일들을 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형태로 보아 '앗/ㅇ/알'은 '엇/얻/얼'과 대립되는 짜임새를 갖는다. 척기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알/얼'이다.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앗'은 어린이요 '엇'은 부모이다. 따라서 '알/얼'이 그에 상응하는 계열이라면, 결국 알은 얼에서 비롯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부모가 만나 아이를 낳고 기르듯이 알은 얼에서 말미암는다. 남녀가 서로 성적인 관계를 갖는 것을 중세에는 '얼다(두해)'라고 하였다. 부모들이 가정을 이루고 결합함으로써 그 아이들이 태어난다. 일반적으로는 '씨알(씨앗)'의 '씨' 는 아버지의 혈통으로, '알'은 어머니의 혈통으로 말하지만, 필자는 얼을 부모로 알을 자식으로 보면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 '알-'계에는 '알, 알나리 (어린 사람이 벼슬한 경우에 놀리는 말), 알도요(작은 물새떼), 알뚝배기 (작은 뚝배기), 알땅(비바람을 막을 수 없는 땅)' 등의 형태가 있고 '얼-'계에는 '얼갈이 (겨울에 대강 논밭을 갈아 엎어 놓는 일), 얼다, 얼녹이다. 얼어붙다(어우러져 붙다)' 등이 있다. 부모에게서 자식이 태어나듯이 얼'에서 '알'이 비롯된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얼다'는 옛말에서 물이 어는 것과 남녀가 성적인 결합을 하는 것을 일렀다. 결국 부모들이 서로 결합하여 하나의 애기로 굳어져 생명이 탄생하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그럴 듯한 논리 정연함이 있다. 7-2. 앎과 진통 '아는 놈 붙들어 매듯한다'고 한다. 죄를 다스리는 사람이 죄인을 맬 때 죄지은 사람을 잘 아는 경우에 아무래도 사정을 보아 주어 아프지 않게 맬 수 있다는 애기다. 어쨌든 물건을 느슨하게 잡아 맴을 비유하고 있다. 어떤 사물이나 사실에 대하여 직간접으로 인식하거나 인정하는 일을 '안다'고 한다. 알아야 면장을 한다고 한다. 무슨 일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이는 어느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 성취를 하기란 어렵다. 안다고 하는 건 적어도 어떤 사실을 플기 위한 비롯함이요 출발점이 된다. 할 일의 앞뒤를 을바르게 정할 수 있고 잘되고 못된 점을 가려 낼 수 있으려면 '알아야' 한다. 한편 모르면 마치 눈먼 사람이 길을 가듯 그 방향과 상태를 바르게 파악하기가 어려우며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게 된다. 육체를 밝히는 등불이 눈이듯이 앎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밝게 하는 햇불이며 신호등인 것이다. '알다'는 명사 '알'에 접미사 '-다'가 들어붙어 이루어진 동사로 보인다. '아이'에 대한 말의 뿌리를 플이하는 부분에서 살펴보았듯이 '알'은 '앗~ㅇ>알'과 같은 과정을 통하여 낱말이 분화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알'이 개체 생명의 비 롯됨이요 효시이면서 동시에 '얼 (엇/얻)' 에서 얻어진 소산물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 '알다'차 사물인식의 과정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사물을 대하여 인식함에 있어 우리 사람들은 눈, 입, 코, 귀, 피부 등의 감각기관을 통하여 보고, 먹고, 냄새를 맡고, 듣고, 점촉하여 사물을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즉 우리의 감각기관이 사물에 관한 동작이나 상태를 판단한 결과로부터 우리는 어떤 수준의 앎에 이르게 된다. 한마디로 우리의 감각기관과 인식하고자 하는 사물과의 상호작용을 '얼(바탕)'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 '앎'에 이르는 일련의 의식현상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뭘 안다고 하는 것은 얼에서 알로 이어지는 순행적인 흐름이며, 나아감인 것이다. 이를테면 '얻다'의 경우, 중세어에서의 뜻은 '찾다, 결혼하다, 갖게 되다'의 의미로 쓰였는바, 감각과 사물 상호간의 교호작용이 가져다 준 것이 앎이라는 또 하나의 개연성올 더해 준다. 더 확고하고 실증할 수 있는 지식의 탐구와 연마를 위하여, 이른바 진리탐구를 향하는 학문의 영역은 꾸준히 깊어지고 넓어져 왔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으로 짐작된다. 낡은 지식은 새로운 지식으로 대신하게 되며 그릇된 지식은 바른 지식에 의하여 고쳐지지 않으면 안 된다. 언제나 우리의 곁을 떠나지 않는 하나의 명제는 아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이에 걸맞은 행함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는 올바른 정신 곧 얼이 바르게 서지 않으면 안 된다. 얼이 가버린 사람을 '얼간이'라고 하거니와 얼이 빠지고 건강하지 못한 사람에게서 그럴 듯한 인식 (앎)이나 행동을 기대할 수는 없다. 정신병을 밞고 있는 사람에베 산황에 알맞으며 모두에게 공감이 될 만한 일을 수행할 것을 기대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나의 밀알이 떨어져 엄청난 열매를 거두게 하듯이 진정한 하나의 앎(지식)은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의 사회를, 인간을. 문명을 다르게 만들 수 있는 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 지식이 바로 하나의 큰결과를 낳게 하는 말미암음이 되기 때문이다. 중세어에서 보면 '까닭'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말로 'ㅇ(금삼))'이라는 형태가 있다. 이 말도 '앗/ㅇ/ㅇ/알'의 계열에 드는 것으로서 알은 하나의 큰 까닭이 되는 것이다. 한 개의 성냥불이 온 산을 불사르듯이 바른 지식 (앎)은 엄청난 결과를 가져을 수도 있다. 원자병기를 지키는 한 병사의 오판이 제동을 받지 않고 원자폭탄을 상는 행위를 가걱을 경우 인류의 파멸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말미암음을 생각해 볼 때 그럴 듯함이 있지 않은가. '지식인의 윤리'라는 말이 어떨지는 모르겠으나. 참으로 지적인 산업이나 할동을 하는 사람들의 책임이 큰 것은, 그들의 판단이나 지식이 우리 인류가 앞날을 살아감에 커다란 교두보의 역할을 하기때문이다. '알다'와 관계되는 말로서는 앞의 '아이'에서 알아 본 것은 제외하고, '아랑곳(남의 일에 나서서 알려고 들거나 참견하는 짓), 아랑곳없다, 아리송하다(비슷한 것이 뒤섞여 있어서 무엇인지 또렷이 알아 내피 어렵다), 알쏭달쫑(생각이 헛갈리어 분간할 수 있을 듯 하면서도 얼른 분간아 안 되는 모양), 알음알이 (꾀바른 수단), 알음알음(서로 아는 관계)'` 과 같은 형태들이 있다. 7-3. 어둠과 얼 어두운 밤중에는 아무리 중요한 눈끔적이기를 한다고 해도 정확하게 그 뜻을 전달할 길이 없으니, 쏠데가 없다. 이를 일러서 속담으로는 '어둔 밤에 눈끔적이기' 라고 한다: 한마디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해도 아무런 효과가 없음을 드러내는 말이다. 혹은 남이 알지 못하는 일을 하는 것은 인정을 받지 못함을 암시하고 있다. 밝은 빛이 없으므로 환하지 않고, 눈으로 보는 힘이 약하거나 밝지 못한 상태를 '어둡다' 고 한다. 우리 주변에는 참으로 어두운 일이나 장소가 많이 있다. 때로는 '어두움' 을 인간이 불행해지는 까닭으로 이르기도 한다. 개인의 탓으로 일어나는 불행도 있지만, 전반적인 사회구조의 모순과 엇갈림으로 인어나는 불행들이 많이 있음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더러 역사의 새 벽이라는 말을듣게 된다. 새벽에는 어둠과는 대립되는 아침의 밝음이 서리기 시작하므로 그러한 표현을 하는 것이 아닐까. 흔히 어둠과 밝음, 밤과 아침은 대립되는 개념으로 쓰인다. 이와 관련하여 어둠이란 말의 의미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낱말겨레란 관점에서 살펴 보고자 한다. 밤이 가면 낮이 오듯이 어둠이 물러가면 밝음 곧 아침의 빛이 찾아 온다. 시간이나 상태의 이어짐으로 보아 어두운 밤은 아침의 터전이 되는 것이니, 둘의 관계는 대립관계이면서도 연접현상이 아닌가 한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아침'은 '앗(자식)/ㅇ/알'의 낱말겨레에서 비롯한 분화형태로 보인다. 다시 말헤서 '앗' 에서 어말자음이 터짐갈이소리 (파찰음)가 되면서 '앗>ㅇ(ㅇ)'이 된 것으로 풀이된다. 한편 '앗/ㅇ/알'의 계열이 모음이 바뀌면 '엇 (부모)/얻/얼'의 계열이 만들어진다. 이 '얻'과 상관되는 형태가 곧 '어둡다로 보면 될 것이다. 오늘날의 '어둡다'는 중세어에서는 '어듭다((용가) 30)' 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를 풀어 보면 '얻 十으十 ㅂ다>어둡다'로 그 과정이 설명된다. 결국 '얻'은 '엇'에서 비롯하였으며'앗/ㅇ/알'과 대렵되는 것으로 보인다. '엇/얻/얼' 로 드러나는 어둠의 뜻이 담긴 낱말겨레에는 어떤 형태들이 있을까. 먼저 '엇-'계의 형태를 보면, 어스름(저녁이나 새벽의 어스레한 빛 또는 그때), 어스레하다, 어스름 달밤, 어슬어슬(날이 어두워지거나 밝아지는 모양), 어슴막(초저녁의 경상도 방언), 어슴푸레하다, 어슷어슷(여럿이 조금씩 다 기울어진 모양) 어슷썰기 (한 쪽으로 비슷하게 써는 일), 어슷하다(물건의 모양이 한 쪽으로 비뚤어져 았다), 어슬렁거리다(몸이 크고 다리가 긴 사람이나 짐승이 천천히 걸어가는 동작)'와 같은 낱말들이 있다. '얻-'계에 드는 말로는 '어두컴컴하다, 어둑새벽(여명), 어둑어둑하다(물건이 보일락 말락 보이다 ; 어둡-'의 비읍(ㅂ)이 자음교체를 하여 기역(ㄱ)으로 바뀐 결과임), 어둠침침하다, 어득하다(>아득하다), 어뜩하다(갑자기 어지럽다), 얻다(어떤 원인으로 결과를가져 오는 동작)'와 같은 형태가 있다. '얼-' 계에 드는 말에는 '어른, 어른거리다(그림자가 회미하게 움직이다), 어름대다 (우물쭈물 명확하지 않게 움직이다), 어름적거리다(느릿느릿하다), 어리다(나이가 젊어 모든 게 똑똑하지 않다), 어리대다(공연스레 어정거리다), 어리둥절하다(정신이 얼떨떨하다),어리뜩하다(말이나 행동이 똑똑하지 못하다), 어리마리 (잠이 든 둥만 등한 모양), 어리벙벙하다(갈피를 잡을 수 없다), 어리석다(어리숭하다(>아리송하다 ; 보기에 어리석은 듯하다), 어리치다(너무심한 자극으로 정신이 흐릿해지다), 어린이, 어림없다(짐작할 수없다), 어릿거리다(말과 행동이 생기가 없이 움직이다)'와 같은 형태가 있다. '얻/엇/얼'의 낱말 겨레에서 우리의 인식작용과 증요한 관계를 드러낸 것은 '얼' 이 아닌가 한다. 인간의 모든 인식작용과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그 바탕이 바로 얼이다. 얼은 다른 사물이나 사실과 관계하여 어떤 앎에 이르도록 한다. 개인이나 겨레나 온 인류로 보아서도 생산적이고 참된 얼이 있는 데에서 올바른 일이 만들어짐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배달의 겨레는 흥익인간의 정신을 살려인간이 인간다운 우리의 누리를 빚어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겨레가 하나 되기를 지향해야 한다. 얼이 알의 심층구조라면 알은 얼의 표면구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니, 얼은 알과 함께 모든 일을 처리함에 값진 말미암음이 된다. 7-4. 젊은이와 짧음 '젊은이의 망녕은 몽둥이로 고친다'고 한다. 아직 망녕이 들 때가 안 된 사람이 정신없이 함부로 굴 때는 매로라도 다스려야 한다는 교훈적인 내용을 이르고 있다. 나이가 비교적 어리고 혈기가 왕성한 상태를 '젊다'고 하는데, 혈기가 왕성하고 나이가 젊기 때문에 짧은 점도 많으나, 하는 일이 진취적이다. 살아 온 시간보다는 살아 갈 시간이 횔씬 길어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다. 힘이나 그 패기에서라면 나이 든 사람은 비길 바가 못 된다. 청춘을 인생의 황금기로 비유한 이도 있듯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층분히 예찬의 대상이 된다. 젊음의 가능성에 적절한 자극과 반응을 꾀하는 조건화 과정을 거쳐, 더 성숙한 인간으로 이끌어 가는 문화유산의 전달작업이 교육이다. 가르칠 교(敎)를 글자의 짜임으로 보더라도 그러하다. 이끌어 감과 매로 침의 뜻을 합한 것이니, 여기서 매는 적절한 자극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때로는 직접 매로 다스리는 것도 물론 포함된다. 젊음은 계절로는 이제 막 싹이 돋아 오는 첫봄이요 꽃으로 이르자면 봉오리가 맺혀 삶의 열기를 불사르는 개화기에 비교할 수 있다. 그러기에 노인은 젊은 시절을 회상하고 그리워한다. 비록 시행착오가 많지만 언제나 넘치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옛말에 '젊다'는 '져므니 ((초두해) 25-29)' 혹은 '졈다(능엄) 4-64), 'ㅈ다(역해보), 19)' 로 쓰이었다. 이남덕이 지적한(1985) 바와 마찬가지로 필자도 '젊다' 는 '뎌르다(短 ; 법화, 2-167)' 에서 비롯 한 것으로 본다. 그는 '젊다'가 발달하여 온 과정을 '뎌 ㄹ(르)다>져르다>졈다>젊다'로 상정한 바 있거니와, '뎌ㄹ(르)-+오十ㅁ>뎔옴>덞 (ㄷ)'의 과정이 앞선 것으로 보인다. 구개음화가 이루어진 것은 근대국어에 와서의 일임을 미루어 보아, '덞>젊>젊'으로 바뀌어 갔다고 풀이하는 것이 좋을 듯하기 때문이다. '뎌ㄹ(르)->ㄷ-' 이 된 것은 마치 'ㅅ로-十오十ㅁ>ㅅ->삶-' 이 된 것과 같이, 용언의 어간에 명사형 어미 (ㅁ)가 붙어 어간을 이룬 형태로 생각한다. 요컨대 '젊다'는 '뎌 ㄹ(르)다>덞다(덤다)>ㅈ다>젊다'와 같은 과정을 거쳐 오늘에까지 쓰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뎌ㄹ(르)-' 의 꼴은 어디에서 비롯하고 그 뜻은 무엇인지 살펴 보기로 한다. '뎌ㄹ(르)다'가 '뎔다((법화), l-190)' 와 같은 의미로 쓰이는 것으로 보아 '뎌ㄹ(르)-' 의 모음이 줄어 '뎔-' 이 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일본어에서 절을 '데라' 라고 하거니와 범어의 '데라 ' 에서 비롯한 것이 아닌가 한다. 결국 '뎌ㄹ(르)' 는 사찰을 뜻하는 범어의 '데라'에서 빌려쓴 말로 보인다. 그런데 '절'과 '짧다' 그리고 '젊다'는 어떤 의미의 유연성을 보이는가. 세속적으로 보면 절에서 이루어지는 수도생활이란 금욕이며 절제요 삼가하는 것이다. 단(短)은 긴 것[長]의 반대요, 짧게 자르는 것 (斷)이라고 본다. 필요한 것을 더 적게 그리고 작게 줄이는 속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금욕의 수도생활이 이루어지는 '절'과 '짧다' 사이에 서로 관련성이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럼 '젊다'와의 상관성은 어떠한가. 앞 부분에서도 플이한 바와 같이 늙은 사람에 비하면 젊은 사람은 살아 온 날이 짧으며, 세상 욕심에 그래도 덜 찌들었으니, 금욕적이라고 할 것은 없으나 순수하며 영혼의 맑음을 가지려는 지향이 강하다. 그들은 이상에 치우친 나머지 갈팡질팡할 때가 많이 있다. 비약이 될지 모르겠으나 '짧다'고 하는 속성은 결국 순수함이요, 현실보다는 미래지향을 갖고 있다. 엄청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동식물의 싹이나 새끼를 보아도 그러하다. 우선 그 크기에 있어 짧고 경험 또한 넉넉하지 못하지 않은가. 모음의 바뀜을 따라서 '뎌ㄹ(르)-' 는 '댜ㄹ(르)-' 로 바뀌어 쓰이었으며, 뒤로 가면서 '쟈르-(ㅈ-)>자르-(짧-)' 의 과정을 거친다. 현대국어에서 보아 '뎌ㄹ(르)'에서 파생되어 온 형태들은 '젊-/절-/자르-/짧-/덜-' 과 같은 계열의 말들로 무리를 지어 나아간다. 이제 그 보기를 들어 보자. '젊-'계에 드는 말로는 '젊다, 젊으신네 (젊은이의 존칭), 젊은것(젊은이)'과 같은 형태가 있다. '절-'계에 드는 것으로는 '절, 절다(걸음을 절뚝거리며 걷다, 한 쪽 다리가 더 짧으니까.), 절뚝거리다, 절뚝발이, 절렁태 (절름발이의 핑안도 방언), 절렁거리다, 절름거리다, 절버덩거리다(절름거리며 걷는 사람의 걸음을 의성화한 소리), 절써덕거리다, 절쑥거리다, 절음나다(짐승이 다리 저는 병이 나다)' 등의 꼴이 있다. '자르-' 계에는 '자르다, 자르르(자르는 데에서 느끼는 감정의 표시), 자리자리하다, 잘가닥(자물쇠 같은 것이 잠기거나 열리는 소리), 잘각거리다, 잘강거리다, 잘그다(자르다), 잘그랑(>짤그랑>찰그락), 잘라 먹다, 잘록하다, 잘름거리다'와 같은 형태들이 있다. 아울러 '잘되다(사물 또는 신분이나 처신이 좋게 되는 것)' 의 경우도 절과 상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절에서 불공을 어떻게 드리느냐에 따라서 생과 사를 뛰어넘어 소원을 성취하기도, 이루지 못하기도 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정이 가능한 것이라면, '잘(옳고 바르게)'도 절의 뜻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절에서 이르고 가르치는 내용은 선한 것과 바른 것을 중심으로 하니까. '짧-'계에 드는 형태로는 '짧다, 짤따랗다, 짧아지다, 짧은작(길이가 짧은 화살)' 등이 있고, '덜-'계에 드는 말로서는 '덜다(적게하다), 덜되다(하는 짓이나 생각이 모자라고 온당하지 못하다), 덜렁거리다(덤벙거리다 ; 단점의 하나일 수 있음), 덜름하다(아렛도리가 드러나도록 옷의 길이가 짧다), 덜리다(덜어짐을 당하다), 덜(한도에 다 차지 못함을 드러냄)'과 같은 형태들이 있다.' 덧붙여 두고 싶은 것은, 같은 말무리에 드는 것으로 '절하다'가있는데, 절에서 부처님께 예배를 을리듯이 웃어른에게 인사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앞에서 설명한 문화적인 전통이 우리 말에 되비쳐 살아 남아 쓰이고 있다 하겠다.
우리말의 상상력 1 - 정호완 6. 가루와 분절 6-1. 겉치레 밖에 드러나는 모습은 부드럽고 안으로는 굳센 경우를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고 한다. 인간관계에서 다른 사람에게는 부드럽게 대하고 자기 자신에게는 아주 냉철하게 대하는 것을 이르는 교훈이 담긴 말이다. 물론 의도적으로 안과 밖이 다른 것은 자연스럽지 못한 일이나,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고 예의바르게 대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밖이 형식이라면 안은 내용에 해당한다. 안과 밖은 언제나 함께 있기 마련인데 밖에만 치중하여 꾸밀 경우를 보고 겉치레한다고 한다. 옛말에서는 밖이 '밧(능엄),' 혹은 '받(소해)'으로 쓰이었다. '밧(받)'이 '밖'으로 바홴 것이다. '밧'에서 비롯된 형태를 보면 흥미롭다. 입고 있었던 옷올 벗을 경우에 옛말로는 '밧다(((초두해), s-47)' 또는 '벗다(용가 36)' 로 샜으니 '밧/벗'은 넘나들엇다. '밧'은 '발' 의 의미로도 쓰였으니, 그러면 '밖'을 의미하는 '밧'과는 어떤 유연성이 있는 걸까. 생각건대, 발로 걸어 밖에서 안으로, 안에서 밖으로 나돌아 다닐 수가 있다는 데 근거하지 않을까. 분화과정에서 '밧>발'로 됨은 'ㄷ>ㄹ'의 유음화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보인다[밧가락 (법화, 4-141), 밧목((구급방)하 26) 등] 친구 사이에 가면을 쓰지 말고 벗으라고 하는 수가 더러 있다. 가면을 '벗다', 이는 짐작하건대, 안과 밖이 다르다는 가정 아래 안에 있는 생각을 밖으로 내어 놓으라는 말이다. 그럼으로써 밖과 안을 일치시키는 결과를 가져 오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옷을 벗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하겠다. 밖에 걸치던 옷을 벗으면 속옷이 나오니 안이 곧 밖이 되는 게 아닌가. '바꾸다'와는 또한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바꾸다'는 엣말로는 '밧고다(원각), 상 1-2 : 135)' 였다 한마디로 서로가 갖고 있는 생각이나 물건을 드러내 놓고 교환하는 동작을 뜻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바꾸다'는 어떤 자리나 계획을 변경할 때에도 사용되는 말이다. 그러면 똑같이 '밖'을 뜻했던 옛말 '받'은 어떻게 되 었을까. 받아들이고, 받들고, 받치고 할 때의 '받다'와 어떤 의미상의 유연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자기가 소유하고 있던 것을 자기 소유 밖으로 내놓으면 누군가가 그것을 받게된다. 주는 사람이 받는 사람보다 사회적 신분이 높을 때 잘 모셔야[奉]한다는 것이 사회 관습이다. 상대방과 생각이나 힘이 같아서 맞부딪히면 맞대거리가 될 것이다. 우리말에서 '밧(ㄱ)[外]' 과 관계되는 낱말겨레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밧(ㄱ)' 의 날말겨레(중세어) 밧(ㄱ) ((월석), 1-9), 밧겻(바깥 ; ((어록), 17), 밧고다(능엄) 2-I3), 밧기다(벗기다 ; (용가) 58), 밧나라(ㅎ) (외국 ; (삼역) 3-10), 밧니기 (밖걸기 ; (한청) 117 a), 밧다(받다 ; (한청) l74 b),밧도리 (바깥둘레 ; (노해)하 32), 밧번던(外舊鎭 ; (어제소학언해),6-90), 밧삼다(셈 밖으로 치다 ; ((초두해,, 16-l8), 밧장조아리(한청), 222 d), 밧집 鄕((훈몽)중 55), 밧쳔량(外財 ; (월석) 18-31,밧치다(받치다 ; (한청), 291 b), 밧침 ((역해 보), 41), 안밧(박해),상 61) 등. '밧(ㄱ)' 의 낱말겨레(현대어) 1) 받-'계-받다, 받들다, 받들어총, 받아넘기다, 받아들이다, 받아쓰기, 받침, 받히다 등. 2) '밖-'계-밖, 밖에, 안팎 등. '밧->받-' 과 '밧(ㄱ)>밖' 등 두 가지 계열이 생긴 것은 음소인식에 변이를 가져와 변별적으로 씀으로써 오해 었이 더 많은 어휘를 생성헤 낼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밧'이 중세어에서 지녀야했던 의미변별의 부담이 줄어지면서 별개의 의미소를 분화시켜 나간 셈이다. 밖과 안은 불가분의 것이니, 참으로 밖이 튼튼하고 안이 견실하다면, 무슨 일에서든 종은 결과를 기다려 볼 수 있을 것이다. 6-2. 굳음과 곧음 무른 땅에는 물이 고이지 않고 아주 여물고 단단한 땅에 물이 고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굳은 땅에 물이 괸다' 고 하여 절약하는 사람이 재산을 모으고 살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땅이나 사물의 견고한 상태를 '굳다'고 한다 땅이 '굳다'고 할때의 '굳' 은 (훈몽자회)와 같은 자료에서는 굴[穴] 의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고대인은 오랫동안 굴에서 살아 왔다. 너무 물러서 흐트러지는 '굳'에서는 살 수가 없고, 견고한 토질이나 암벽으로 된 '굳'이라야 생활이 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굴/굳'은 여문 땅이거나 암벽으로 둘러싸인 곳에다 건조한 경우가 많다. 굳은 곳은 한번 잡힌 모양이 무른 데에 비하여 비교적 변하지 않고 늘 그러한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 '곧다'는 그러한 '굳'의 성질에서 비롯된 '굳다'가 모음의 바찝으로 갈라져 나온 말이라고 본다. 곧음과 굳음은 서로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이 두 형태의 음절구조는 'ㄱ十모음+ㄷ'이다. '굳다'와 연관되어 쓰이는 말에는 '구덕구덕 (물기가 약간 마른모양), 구두쇠, 굳이, 굳은 돌, 굳히다, 구덩이, 구덥다(아주 미덥다), 구들, 구들돌' 등이 있다. '구들'에 대하여 좀더 풀이하자면, 방의 바닥으로서 진흙으로 단단하게 만들어 놓은 부분을 일컬은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곧다'와 관련되어 쓰이는 것으로는 '고두밥(된 밤), 고들고들(물기가 적어서 된 모양), 꼬드러지다(말라서 뻣뻣하게 된 모양), 곧다, 곧이, 곧이곧대로, 곧이곧솔(곧이곧대로의 방언), 곧이 듣다, 곧추, 곧추다'와 같은 꼴들이 있다. 사물의 상태가 변함없음을 '곧다' 라고 하고, 여기에서 유추하여 직선과 같이 변화가 없는 모양을 이를 때도 쏜다. 반대로 구부러진 것은 변화가 있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성품이 정직한 상태를 '곧다'라고 함도 굴절됨 없이 변함 없음을 드러낸 것이다. '고치다'도 형태 바뀜의 속을 들여다보면 '곧十히 +_다>곧히다>고치다'로서, 구부러진 것을 바르게 한다는 것이다. 즉 가변적인 것을 불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 '고침' 이니, 아마도 우리 조상들은 가변적인 것은 틀린 것으로 인식하였던 것 같다. 그러면 중세어에서 '굳'을 중심으로 하는 낱말의 겨레에 어떤 형태들이 있는지 알아 보도록 한다. '굳-/곧-' 계의 낱말겨레 (쫑세어) 1) '굳'- 계_굳(굴 ; (월 인), 60), 굳다((용가), l9), 굳ㅂㄹ다(구급간), 1-19), 굳세다((유합), 하 2), 굳이 (소해 2-50) 등. 2) '곧'_.계_곧다(석보), 19-7), 곧티다(소해), 2-61) 등. 현대어보다 어휘들이 짧게 쓰임이 눈에 띈다. 중세어에서 종성의 변이로 말미암아 '곧>골((석보, 6-4), 굳>굴 ((유합), 하 56)' 의 과정을 거침은 홍미롭다. 골은 ㅅ(시옷)을 더하여 꼴(形 ; (월석) 8-28)' 이 되며 굴은 '꿀" ((훈몽), 중 2l)' 로 가지 벋어 나아간다. 6-3. 가까움과 가장자리 가까울수록 예의를 지키라고 한다. 가깝다고 마구 대하면 오히려 멀어지고 인간관계가 나빠질 것을 경계하고 있다. '정에서 노여움난다'고 함도 이와 같은 상황을 전제로 하여 만들어진 속담으로 보인다. 거리나 시간이 멀지 않거나 친족관계로 보아 8촌 이내로 당내에 속할 경우 흔히 '가깝다'고 한다. 옛말에 가깝다는 '갓갑다(월석), 2-50)' 로 표기된다. 갓갑다의 변이형태로는 '갓갑다((한청), 264 b)'가 있으며 같은 뜻으로 쓰인다. 갓갑다의 형태를 풀어 보면 '갓'에 접미사 '-갑다'가 붙은 것이다. 결국 '갓/갓'은 동사의 어근으로서, '가장자리'라는 의미를 중심으로 갈라져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가운데가 아닌 가장자리이기 때문에 다른 부분과 공간적으로 가장 밀접해 있으며, 경계선이 되기도 한다. 한 쪽에서 다른 한 쪽으로 넘어가는 마지막이자 처음이기도 하다. 또한 가장자리에서 가장자리로 가는 것은 가장 멀다. 사람의 계획에 비유하자면, 목적을 달성해 내기까지의 역경이라고나 할까. 모음이 바뀜에 따라서 '갓' 은 '긋(끗) (청구), p. l14, (한청),32 d)' 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긋은 다시 받침이 변동되어 '굳/긋/ㄱ'으로 가지 벋어 나아간다. '갓/긋/끝/궂'계에 드는 것에 '가깝다, 가까스로, 가꾸러지다[머리를 가꾸로 박음으로써 땅 표면(끝. 경계 선)에 닿게 하는 것], 가쁘다(힘에 겨워 어렵고 괴롭다), 가장 (제일 먼저), 가장자리, 끗끗이 (끝내). 끝마치다, 끝막다(어떤 일의 끝을 내어 더할 나위가 없이 하다), 끝빨다(끝이 뾰족하다), 끝장(일의 마지막 결과), 끝전 (끝돈), 끝판(일의 마지막 판), 긋다(줄을 치거나 금을 그리다, 비가 잠깐 그치다, 쉬다, 끊다)'와 같은 형태들이 있다. 이것들은 '가깝다'의 어근형인 '갓/긋/귿/궂'의 뒤에 접미사가 붙어 만들어진 파생어나 합성어들이다. '가(갓)[邊]'의 방언분포를 살펴 보면, 가(ㅅ) (층남 천원.아산. 당진 서산. 예산. 청양. 서천 부여. 논산. 대전. 대 덕), 갓(제주전역), 가상(전북 무주 김제 부안. 임실. 정읍. 순창/전남 장성. 곡성. 구례. 광주. 나주. 순천 여수 고홍. 강진), 가생이 (경기 여주/충남 연기. 공주. 홍성. 보령. 대전 대덕 금산/전북장수. 남원/전남 구례/경남 밀양. 산청), 가싱이 (경남 창녕), 가서리 (경북 예천), 가상다리(전남 담양. 보성. 장흥. 강진), 가상사리 (층북 단양) 등이다. 이들 방언의 형태를 보면, 점미사 '-앙,/-앵이/_잉이/_어리 (_아리)'가 어근에 붙어 파생되어 나아간다. 시작이 곧 끝이라는 말이 있듯이 한 사물의 가장자리는 다른 사물에 있어서는 들어가는 입구가 되는 것이니 처음과 끝은 사실상 상대적인 인식의 차이임을 알겠다. 6-4. 느리광이 평소 느릿느릿 움직이며 일만 하는 소도 상항에 따라서는 공격과 방어의 본능을 드러내는 일이 있다. 마음씨 좋아 보이는 사람도 화를 낼 때가 있음을 나타내 주는 좋은 비유이다. 행동이 느린 사람을 '느리광이' 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빠르지 못하거나, 꼬임이나 조임의 정도가 성근 모양을 '느리다'고한다. 옛말울 더듬어 보면 느리다는 '날외다(초두해), 16-65), 날회다((초박해), 75)' 라는 말로 드러난다. 느리다는 개념은 공간지각으로 보아 '너르다'와 서로 그 맥을 같이 하며, 공간의 연장을 바탕으로 한다. 지금도 강원. 층북. 전남 일부 지역에서는 널을 '늘' 이라고 한다. 너르다와 느리다는 '널/늘'에서 파생된 형용사임을 알 수 있다. '날'은 앞에 든 예와 같이 중세어에서 '날'로 표현되기도 하였는데 필자는 '날'이 기역(ㄱ)곡용을 하던 말이 아닌가 한다. 결국 '날'계의 원형적인 어근은 '날(ㄱ)_' 로 볼 수 있다. '날(ㄱ)' 에 접미사 '_다'가 붙은 '낡다'는 '늙다'와 서로 모음의 대립을 보이면서 앞의 것은 사물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서 삭아 헐어지는 것을, 후자는 나이가 들고 오래된 상태를 이른다. 지금도 방언에서는 '늘고대기 (늙은 소의 평안도 방언), 늘구다(늘리다의 함경도 방언)'와 같은 형태가 나타나고 있다. 국어의 변천과정으로 볼 때 '날구다(늘구다)'의 '날구(늘구)-' 가 어말모음의 탈락올 따라서 '낡(늙)-'으로 바뀌어 간 것으로 보인다. 그럼 '날구'는 무엇인가. 오늘날, 함경도 방언에서는 강의 나루를 '날구'라고 하거니와, ' 날구'에서 'ㄱ'이 떨어져 '나르'가 되고 이것이 다시 어말의 모음이 바뀌어 '나루'가 된 것이다. 강이나 바다의 좁은 목에다 배가 건너 다니도록 만들어 놓은 일정한 곳을 나루라고 하거니와 나루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아 가게 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때로 사람들은 좁은 도랑이나 구덩이와 구덩이 사이에 널을 놓아 건너 다닌다. 늙음의 본바탕은 낡아 가는 것이다. 즉 매가 나루에서 물의 흐름을 따라 가듯이, 가다 보면 출발지점에서 종착지점에 이르듯이 젊음도 사랑도 그떻게 훌러 인생이 가는 것이다. 요컨대 '낡(늙)-'계의 분화형태를 이루는 어간의 모형은 '낡(늙)-/날(널)-/낙(늑)-' 과 같은 꼴을 갖는다고 하겠다. 그 보기를 들어 보면 '낡(늙)-'계에 드는 것으로서 '낡다, 낡아빠지다, 낡은이(노인을 얕잡아 보고 하는 말), 늙다, 늙다리, 늙마, 늙수그레하다. 늙은이, 늙직하다, 늙히다'와 같은 꼴이 있다. '날(널)-'계에 드는 것으로는 '나루, 나루질(나룻배를 부리는 일), 나루터, 나릇배. 나르다, 나른하다, 너르다, 너럭바위 (넓은 반석), 너름새 (떠벌이는 솜씨), 널다, 널대문(널빤지로 만든 대문), 널감(널의 재료가 될 목재, 죽을 날이 가까워진 늙은이를 농조로 이르는 말). 널구다(넓히다의 함경도 방언), 널따랗다, 널려지다, 널리, 널어 놓다, 널찍이, 넓다[널웁다(널과 같다)의 준말 ; (여사서),], 넙치 (넓은 고기, 넙치과)'와 같은 형태들이 있다. '낙(늑)-' 계에 드는 말로는 '낙낙하다(조금 남음이 있다), 느긋하다(부족함이 었다), 느꾸다(늦추다 ;결국 본래의 약속보다 시간을 늘리어서 보다 넉넉한 시간이 되게 했음을 드러낸다), 늑장(곧 볼일이 있음에도 블구하고 딴 일을 하고 있는 느린 짓), 늑줄주다(엄한 감독을 늦추어 줌), 늑하다(느긋하다)'와 같은 형태들이 있다. 다음으로 중세어에서 '널 (늘)-' 을 중심으로 하는 말에는 어떤 형태가 있는지 알아 보도록 한다. '널-/늘-' 의 낱말겨레 1) '널'_계-널(초두해) 15-2), 널다((해요) p. 68), 널뒤기 (물보), 널문((초박해), 상-58), 널오다(넓히다 ; (역해보), 29), 널쭉(역해), 상 66) /너ㄹ다(번소), 10-29), 너러바회 (송강), 1-4),너럭이소라(물보), 주식), 너룹다(여사서), 4-2) 등.2) '늘_'계_느러가다(느릿느릿 가다 ; (유합), 하 51), 느러나다(유합), 하 62), 느러지다(한청 2O5 a), 느리다((한청), 280 C), 느리혀다(능엄), 2-48), 늘횟늘횟(역해보), 60) 등. 모음이 바뀜에 따라 말의 겨레가 불어남은 현대어와 다름이 없고, ' ? ' 등의 음운이 소실되거나 '널오다, 너룹다, 널문' 처럼 사용빈도가 줄어 죽은 말이 된 것도 보인다. 6-5. 뚫림과 막힘 나무에 뚫어진 구멍을 메운다고 자꾸만 깎으면 끝내 그 구멍은 커질 도리밖에는 없다. 그때서 '구멍은 깎을수록 커진다'고 했을까. 허물을 감싸고 얼버무리려고 하면 할수록 그 허물은 더욱 크게 드러남을 비유하고 있다. 물건이나 땅이 뚫어지거나 파인 자리를 구멍이라고 하거니와 이때 구멍을 내거나 막힌 것을 갈라서 통하게 하는 동작을 '뚫다'라고 한다. 한 부분 곧 한 쪽을 증심으로 하억 물체에 구멍을 냄으로써 다른 부분파 이어진 하나의 공간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과정을 롱해 두 개의 양면이 이어져 서로 통하게 되고. 한 물체가 부분적 으로나마 두 면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뚫려야 할 곳이 막히고 막혀야 할 사물이나 장소가 뚫릴 때, 말 그대로 구멍난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바로 삶의 순환과정에서도 알 수 있는바, 순환과정의 한 과정이 막히면 다른 곳도 잇따라 막히게 되 어, 모두는 제 본래의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고, 반대로 막혀야 할 데가 뚫릴 경우도 큰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상수도를 생각해 보라 어느 한 곳이 잘못되면 다른 장소에도 수돗물이 나오지 않는다. 혼히 누수현상이라고 하지만 필자는 이러한 일을 뚫림현상이라고 이름 붙이고자 한다. 엣말에서 '뚫다'는 '뚤다(박해) 중 35), 듦다(두요), 상 8), ㄸ다(역해보), 45), 뜻다(박해), 하 52), ㄷ다(남명), 하 27)' 와 같은 여러 가지 변이형으로 실현된다. '뚫다'의 형태를 풀어 보면 '뚫-十-다>뚫다'인데, 이때 '뚫'은 '둘[二]'의 변이형으로 보인다. 첫소리에서 된소리되기 (>ㄸ)가 일어난 것 이고. 히웅(ㅎ) 종성체언이라는 점에서는 '뚫'이나 '둘(ㅎ)' 이나 마찬가지이다. 구멍을 뚫는 것은 상반된 두 개의 면을 전제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니, 그둘의 상관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뚫린 구멍을 통해서 두 면을 다 보게 되니 떱 은 이치에 통하다'라는 뜻으로도 '뚫다'를 쓰게 되었을 것이다. '뚤(ㅎ)-' 과 상관을 보이는 말로는 '뚤뚤(물건을 여러 겹으로 감거나 맛는 모양), ㄸ다(뚫다의 경상도 방언), 뚫리다, 뚫어 내다, 뚫어뜨리다, 뚫어새기다'와 같은 형태들이 있다. 6-6. 똥과 뒤 뒤를 볼 부인이 국거리를 썰 일이 바쁠 경우를 일러 '똥 마려운 계집 국거리 썰 듯'이란 속담을 쏜다. 급한 일이 있을 경우 그만큼 관심이 쏠리지 않는 일은 아무렇게나 해치움을 이르는 말이다. 사람 또는 동물이 음식물을 먹고 삭이어 항문으로 내보낸 찌끼 또는 갈아 쓰는 먹물이 벼루에 말라서 붙은 찌끼를 '똥'이라고 한다. 똥은 배설작용의 결과이고 배설작용은 신진대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우리 몸에서 음식이 들어가는 데는 입이요, 다시 나오는 곳은 항문이다. 좀 예스럽긴 하지만 변소에 가는 것을 '뒤 보러 간다'고 한다. 창피스러운 일을 당했을 때, '뒷간 개구리한씨 하문(下門) 물렸다'고 하며, 변소가 가까우면 냄새가 나고 사돈집이 가까우면 말이 많다고 해서 '사돈과 뒷간은 멀어야 된다'고 하는데 여기서 '뒷간'은 변소를 가리키는 것으로, 지금도 경기. 강원. 층청.전라.경상 지 역에서는 혼히 쓰는 말이다. 변소를 뒷간이라 함은 냄새가 나는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항문이 몸 뒤에 있기 때문으로도 추측해 볼 수 있다. 필자는 '똥'이 바로 이 '뒤'에서 비롯한 말이 아닌가 한다. 음식이 들어가는 입이 앞이라면 음식이 소화되어 나오는 항문은 뒤인 것이다. '뒷구멍으로 호박씨 깐다'고 한다, 겉으로는 얌전한 체하면서도 속으로는 온갖 짓을 다 함을 비유하는데, 이때의 뒷구멍은 똥을 누는 구멍 곧 항문을 듯한다. 중세어에서 '뒤'는 히읗(ㅎ)종성체언으로서 '따(ㅎ)>땅>땅, 집우(ㅎ)>집웅>지붕'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뒤 (ㅎ)>뒹>둥>동(똥)>똥'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자료를 살피건대 표기되는 형태로 보아 '뒤'는 두 갈래로 발달해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뒤 (ㅎ)>뒹>둥>동(똥)>똥'과 '뒤 (ㅎ) >뒷 [뒷다((월석)21-1l8), 뒷치다(삼역), 6-3)]' 이 그것이다. 음식이 들어가는 '입'은 옛말에 '문. 창문'과 같이 앞올 뜻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기능면에서 보아 입과 대립되는 '항문', 그리고 항문과 깊은 연관을 보이는 '똥' 이 뒤를 뜻하였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앞과 뒤는 방위 개념으로서 '님了곰'에 해당하는 말이다. '앞(남)/뒤 (북)'으로 쓰인 적도 있다[뒷심골]; (용가) 2-32), 뒤北((훈몽), 증 4)]. 배설물로서의 '뒤'와 관계되는 말의 겨레를 살펴보면 '뒤보다(똥 누는 일을 점잖게 일컫는 말), 뒤틀(매화틀 ; 방안의 변기통을 미화한 말), 뒷간, 뒷거름(인분), 뒷구멍, 뒷물(항문올 씻는 일), 뒷물대 야, 둥개다(쩔쩔매다 ; 똥을 으깨어 플려니까), 뒹구르다(똥에서 구르다)' 등과 같은 형태들이 있다. 먹는 것 못지않게 배설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흘러 가야 할 물이 흐르지 않고 괴어 있듯이 소화돼야 할 음식이 밥통에 그냥 있는 상태를 '체하다' 라고 한다. 앞과 뒤는 따로 중요한 몫을 차지 하는 것으로서 입이 받아들이는 기능을 제대로 하고 항문이 내보내는 기능을 잘 하여야만 사람은 알찬 건강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6-7. 가루와 분절 체로 치는 가루는 칠수록 곱게 되나, 말은 입에서 입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거칠게 되기가 쉽다. 그래서 '가루는 칠수록 고와지고 말은 할수록 거칠어진다'고 했던가. 가루는 특정한 사물이 분화하여 쪼개진 결과 생겨나는 것이다. 생믈의 생성과정을 보면, 생물계의 진화가 그러하듯 단일에서 복합으로 갈라져 나아간다. 중세어에서 가루는 'ㄱ ㄹ((원각), 상 2-2 의 154)' 였다. 이 형태에 터를 둔 낱말들이 여럿 확인된다. 'ㄱㄹ (용가), 2o))' 의 예를 들어 보자. 물이 흐르면 그것을 경계로 하여 반드시 지역파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선의든 악의든 간에 마을과 마을, 고을과 고 을, 부족과 부족, 나라와 나라가 갈리어 금을 긋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마을이 이루어지는 요건 가운데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물이다. 강을 가운데로 하여 서로가 독립 된 취락 흑은 부족을 이루어감은, 강이 갈라짐 곧 가루의 속성과 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세 갈래 길에서 지역이 갈리듯이 모든 생물들은 갈라짐(분화)의 질서를 따라서 그 종족의 번영과 보존을 꾀한다. 쪼개어 갈라지는 곳에 생식의 기능이 부여됨은 우연한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가루'는 오늘날 방언에서 '가루. 갈기. 갈구'와 같은 변이형태들로 나타난다 '가루(한반도 전역), 가리 (전북 부안. 고창. 정읍.순창/경북 안동 의성 청송. 영덕. 영일. 포항. 영천. 군위. 칠곡 대구), 갈기 (경남 고성/강왼 속초 양양), 갈구(강원 강릉명주) 등이다. 가루는 '가락'으로도 그 모습을 갈래지어간다. 물레로 자은 실을 감는 쇠꼬챙이를 가락이라고 하거니와 이것은 실을 갈라 가지런히 감음으로써 셈의 단위가 된다. 실 한 가락이 이어져 뽑아 나옴을 연상하여 노래의 어울림을 '가락'이라고 한다 가락국수나 가락엿 또한 예서 크게 벗어나지 아니한다. '가루'는 어말모음이 떨어져 '갈-' 계의 꼴로 나타나기도 한다. '갈다'는 굵은 곡식알을 잘게 쪼개어 놓는 동작을 말하며 기차 또는 자동차를 옮겨 타는 일을 '갈다. 갈아타다' 라고 한다. 생각건대 차를 갈아탐은 새로운 방향으로 갈림, 즉 바로 앞서 풀이한 분화의 분기점울 전제로 한 것이 아닐까 ' 갈기갈기 (여러 가닥으로 찢어진 모양), 갈태'와 같은 형태도 가루의 특성을 바탕으로 분화된 꼴로 판단된다. 흔히 종류를 '갈래'로 말하는데, 갈라진 한 무리 혹은 그러한 흐름을 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의 족속(族屬)을 '겨레'라고 하는바, 이는 갈라진 사람들의 무리 혹은 흐름을 이르는 말이다. 때로는 켤레'와 같이 짝을 드러내가도 한다. 원몸에서 갈라져 나간 지체란 뜻이 이 말들 속에 담겼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몸의 '겨드랑이'도 이러한 테두리에 들어가는 말의 한 가족이라 하겠다.
우리말의 상상력 1 - 정호완 5. 물의 순환 5-5. 내와 높낮이 일반적으로 부모와 같은 윗사람은 자식 같은 아랫사람들의 작은 잘못은 너그럽게 보아 넘겨 준다.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는 드물게 표현되니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고 짜지 한 것이 아닐까? 이 말은 형제가 여럿 있을 때 부모들이 나이 어린 형제를 더욱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이르기도 한다. 방위로 보아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상태나, 시간의 흐름으로 보아 처음부터 끝까지를 '내리'라는 부사로써 나타낸다. 이와 같은 형태이면서 움직임을 드러내는 말에 '내리다'가 있다. 내리다'는 자동사와 타동사로 다 같이 쓰인다. 자동사의 경우 '높은 데서 낮은 데로 옮다, 먹은 것이 삭아 아래로 가다, 신이 몸에 붙다(귀신이 내려서 병을 닳다), 뿌리가 땅으로 들어가다'위 같은 의미로 쓰이며, 타동사일 경우, '높은 데서 낮은 데로 옮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주다'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 '내리.내리다'는 시냇물을 뜻하는 '나리'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모음이 거꾸로 닮아 '나리>내리'로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나리(냇물)는 지구의 표면을, 또한 지구의 어느 정도의 깊이까지를 감돌아 흐른다. 물은 한결같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린다. 하늘에서 물의 또 다른 형태인 구름이 기압의 골짜기를 따라 모여서 땅으로 내리는 것이나, 비가 내려 시냇물이 되고 다시 강. 바다로 흘러드는 것이 모두 그러하다. '나리'가 물을 드러내는 경우는 방언의 '나리다`, 고려가요의 '정월나릿므른 아으 어저녹저 하는데 ((악범))` 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앞에서도 지적하였지만 증세국어에서는 명사에 접미사가 붙어 동사 또는 형용사를 이루는 경우가 많이 있는바, '나리[川=+-다>나리다'의 근거를 댈 수 있을 듯하다. '나리'가 주로 운동의 방향, 운송의 기능을 중심으로 쓰이는 말이라면, 일부 방언에서 '나리'를 '그랑(동래)', '거랑 (영주, 예천)', '걸'(청송. 영양. 의성. 군위. 칠곡. 대구)' 등으로 부르는 이름은 '가람'의 변이형으로서 양쭉 땅과 땅을 갈라 놓는 모양이나, 기능을 중심으로 쓴 것이라고하겠다. 물은 생물의 서식처로서 혹은 그 보금자리로서 오랫동안 인간의 모듬살이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 왔다. 진실로 자연물 가운데 물만큼 엄청난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은 드물다. 그래서 예부터 강이나 바다를 이용한 해운이 발달했고, 강이나 바다 속에 많은 목숨살이들이 깃들어 살아 왔다. 저 깊고 너른 바다는 진실로 우리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삶의 무진장한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본다. '내리다'는 시냇물(나릿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속성을 드러내는 말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시냇물의 흐름을 드러내는 가장 중심이 되는 원래의 의미로부터,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물건이나 사랑을 베푸는 것이나, 신이 무당과 같은 사람에게 아래로 옮아 오는 것 또는 새나 사물들이 위에서 아래로 옮는 동작이나 상태 등의 주변적인 뜻으로 펴 쓰이게 된 것으로 간추릴 수 있다. '나리'의 낱말겨레는 내려가다, 내 려갈기 다, 내려긋다, 내려깔기다, 내려 놓다, 내려누르다, 내려다보다, 내 려다보이다, 내려 두다, 내려디디다, 내려뜨리다, 내려비치다, 내려쏘다, 내려쏟다, 내려앉다, 내려오다, 내 려조기다(위에서 막 두들겨서 꺾어지거나 으스러지게 하다), 내려지다, 내려질리다(값이 얼마씩 싸게 치이다),내려쫓다, 내려치다, 내리, 내리긋다, 내리깎다, 내리내리 (언제까지나), 내리다, 내리닫다, 내리뜨다, 내리매기다, 내리먹다(집의 번지나 번호가 위에서 아래로 정하여지다), 내리밀다, 내리키다(아래로 떨어지게 하다), 내리패다, 내리퍼붓다, 내리흩다(아래쪽을 향하여 내려가면서 훌다), 내 림(혈통으로 보아 윗대에서 유전되어 오는 특성), 내 림굿(무당이 되려고 할 때 신이 내리기를 비는 굿), 내 림내 림 (대 대 로), 내 림대 (신을 내리게 하려고 무당이 사용하는 소나무나 대나무의 가지), 내 림바탕(유전형질), 내 림표, 내 림떠보다(눈을 아래로 뜨고 노리어보다) 등이다. 같은 말의 뿌리에서 나왔지만 '내커다'와 '내리'는 서로 다른 말과 결합하여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리_' 의 '내' 와 같은 형태이면서 그 내용은 다르게 이해해야 할 내 [川]'가 있음도 우리는 지나칠 수 없다. 앞의 '내 리-' 의 '내'는 뒤의 모음을 닮아서 이루어진 형태음소적인 변동의 경우이고, 뒤의.내 [川]'는 '나리>내'의 과정을 겪어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모음과 모음 사이에서 리을(ㄹ)이 떨어져 쓰이는 예는 우리말에서 혼히 나타나는 음운변천이다, 흔히 순서가 뒤집힌 경우를 보고 '내 건너 배 타기' 라고 한다. '내'와 관련된 '냇가. 냇둑 냇물. 시냇물.냇버들' 등이 있다. 냇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은 자연의 섭리려니와 이러한 사물인식에 터를 둔 말들이 낱말겨레를 이루어, 존재. 상태.동작의 개념을 나타내고 있다. 5-6. 값과 동등성 '값도 모르고 싸다고 한다'는 속담이 있다. 값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값을 따짐은 아무 뜻이 없다. 어떤 일에 대하여 그 자세한 사정도 모르면서 그 옳고 그름을 따질 때 혼히 그런 비유를 한다. 보통 사람이나 사물 자체 안에 남아 있는 중요성이나, 물건을 사고 팔 때에 주고받는 돈 또는 바꿀 만한 물건을 '값'이라고 한다. 인간의 욕구를 채우는 사물을 얻기 위하여 활동하는 것을 경제라고 하거니와 그것은 관계를 갖는 이들 서로간의 약속을 전제로 한다. 이 약속은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적어도승복할 수 있는 속성을 띤다.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 모두, 너무 지나치게 잃고 얻음이 없음으로 해서 값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오늘날에도 중간에서 소개를 하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증권거래소가 그렇고, 은행 또한 그 범주에서 멀리 있지 않다. 복덕방 역시 그 대표에 해당하는 직종이라 할 것이다. 한마디로 값은 팔고 사는 사람이 함께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감의 특성인 '동등성'을 하위 속성으로 한다. 이 동등성은 내 칭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일정한 값을 중심으로 서로가 대칭의 상황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대칭성과 동등성은 반드시 둘 이상의 복합관계가 있음으로써 가능한 특성이라고할 수 있다. 공간인식으로 보면 쌍방간에 동등한 영역이 되는 것을 중간 곧 중심이라 하겠다. 바로 이러한 중심을 두고 하나의 사물은 둘로 갈라져 인식되는 '분절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때 하나의 공간과 다른 공간의 경계가 만들어져, 요컨대 '간극성' 이라는 특성을 부여할 수 있게 된다. 결국 '값' 은 그 낱말이 가지는 '대칭성. 분절성. 간극성' 등의 특성에 의해 낱말겨레를 펴 나아가게 된다. 먼저 대칭성과 관련하척 '값'을 생각해 보면, 가운데를 뜻하는 공간명사 '갑'과 어떤 관계가 있어 보인다. ((동문류해), 나 {(한청문감}과 같은 문헌에서 '값'은 '갑'으로도 나타난다. 따라서 필자는 '값'이 중앙을 뜻하는 공간명사 '갑'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터를 대고자 한다." "갑'은 다시 접미사 '-다'를 허용하여 '갑다'로 되었는데, 그 분포는 흔하지 않다. 대칭성은 사물을 가운데로 하여 부피나 두께를 겹침으로써 배로 늘어나는 특징을 가진다. '값了겸了곱' 등은 바로 '갑'의 변이형이라고 하겠다. 모음교체에 따라서 느낌과 의미의 차이가 생겼을 뿐 대칭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하다. 이 형태들이 관여하여 이루어진 말들의 겨레로는 '갑-' 계에 '감시다(물이나 바람이 목구멍으로 들어갈 때 가운데의 숨이 막히는 것), 갑절, 가운데, 가운데치마(갈퀴코를 잡아 매도록 갈퀴의 위아래 두 치마 사이에 가로 지른 나무), 가운뎃소리, 한가위, 가윗날, 가웃(되 말 자 따위로 되거나 잴 때, 그 단위의 절반 가량에 해당하고 남는 분량을 이르는 말)' 등이 있다. '값-'계에는 '값나가다, 값늦다, 값놓다, 값땋다, 값매다, 값보다(값을 어림짐작하여 보다), 값 부르다, 값싸다, 값어치, 값없다. 값지다. 값치다, 값치르다' 등이 있다. 겹 -'계는 아주 다양한 분포를 보이고 있다. 본래 '겹' '이란 넓고 얇은 물건이 포개어진 것으로 사물이 거듭된 것을 이른다. 그러니까 가운데의 공간을 중심으로 하여 대칭을 이룸으로써 겹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사물이나 사실, 관계에서 겹쳐지는 평행선 상태의 것에 대하여 '겹'이라는 말이 붙어 낱말겨레를 이룬다. 석기에 속하는 말에는 '겹간통(-間通 ; 집의 앞칸과 뒤칸이 서로 통하게 지은 짐), 겹것 (겹으로 된 것을 통틀어 이르는 말), 겸겹 이, 겹꽃, 겹 닿소리, 겹대패, 겹도르래, 겹문자[예 :청청 (靑 옴)=, 겹사돈, 겹사라지 (헝겆이나 종이를 겹쳐 만들어서 기름에 결은 쌈지), 겹옷, 겹월 (복합문), 겹저 고리, 겹집 다, 겹거 마, 겹 창, 겹치 다, 겹 치마, 겹솔소리' 둥이 있다. '갑'에서 모음이 바뀌어 쓰이는 것으로 '곱'을 또한 들 수 있다. 여기에 들어가는 말로는 '곱걸다(두 번 겸치어 얽다), 곱꺾 이 (뼈마디 등을 오그렸다가 다시 펌). 곱놓다(노름에서 먼저 태운 돈의 곱을 다시 걸어 놓다), 곱되다(배가 되다), 곱들다, 곱배기, 곱삶다(두 번 삶다), 곱새치기 (돈을 곱을 걸어 하는 노름), 곱셈, 곱솔(꺾어 박은 솔기를 다시 한번 더 꺾어 박는 일), 곱씹다(말이나 생각 따위를 거듭 되풀이하다), 곱쟁이 [곱절이 되는 수량), 곱치다(반으로 접어 한데 합치다), 곱하다'와 같은 꼴들이 있다. 구부러짐을 드러내는 '곱다[曲]' 도 곱하는 현상 곧 겹으로 되는 현상을 뜻하는 '곱'에서 비롯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하나의 사물을 겸치노라면 그 형태는 굽을 수밖에 었는데, 이때 굽는 형태를 가리켜 '곱다'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원형으로 된 사물을 일러 '곱다(<굽다)'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굽이져 흐르는 강물을 보라. 구부러진 부분에서 보면 강물이 두 갈래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 이도 '값'의 분절성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한다. 중세어 자료를 보면, '감'과 관련한 것으로, 제 흘로는 쓰이지 못하는 의존형식 '줍' 이 있다. 우선 '줍-'계에 드는 말을 살펴 보면 '갈비 (겹), 굶다 (아울다/맞서다), ㄱ션므지게 (쌍무지개), ㄱ(겹),ㄱㅅ닛다(나란히 잇다)'와 같은 옛말들이 있다. 현대 어에서는 갈비(늑골, 쇠갈비, 나란히 있는 뼈란 뜻으로 쓰인 듯), '갈비,(앞 추녀 끝에서 뒤 추녀 끝까지의 지붕의 넓 이), 갈비뼈, 갈빗대, 갈피(일이나 물건의 부분과 부분이 구별되는 어름)' 와 같은 형태들이 있다. 이러한 대칭성은 결국 사물이나 사실인식의 가늠을 드러내기도 하며 공간의 나누임 곧 분절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분절성은 벌어진 틈 곧 간극성으로도 표현되는 것이니 앞에서 보기를 든 '좁-'계의 '갈비,'이 그러한 경우라고 하겠다. '조'은 받침의 탈락을 따라서 '갈' 계로 분화해 나아가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형태가 먼젓 것 대신에 새것으로 바뀜을 뜻하는 현대어 '갈다'라 할 수 있다. 잘_,계에는 '갈다[替], 갈아들다, 갈아내다, 갈아대다, 갈아서다(묵은 것이 나간 자리에 새것이 대신 들어서다), 갈아입다, 갈아주다(물건을 팔아 주다), 갈아 치우다, 갈아태우다' 와 같은 말들이 있다. 공간명사 '갑(굶/ 굼)'은 사물이나 사실을 알아차림에 있어 중앙에서 양쪽으로 갈리는 과정을 나타내는 대칭성과 분절성을 기본으로 하는 낱말겨레의 밭을 이룬다고 하겠다. 5-7. 해의 변이 '회고도 곰팡이 핀 놈' 이라는 속담이 있다. 겉으로는 회고 깨끗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몹시 어둡고 더러운 데가 있는 것을 이른다. 실상 외모로는 그럴싸한데 실속이 없는 사람을 비유하고 있다. 눈빛과 같이 깨끗하고 모든 광선이 한데 어울린 상태를 '회다'고 한다 횐 옷을 입고 살았다 하여 예부터 우리민족을 일러 백의민족(白衣民族 ; (위서), 동이전)'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태극기의 바탕이 횐 것도 맥을 같이하는 것이 아닐까. 부모의 상을 당했을 때, 물든 옷을 벗어 버림은 바야흐로 모든 겉치레와 거추장스러운 걸 비우고 오로지 자식으로서의 도리와 예의를 바치는 것으로 보인다. 옛말을 더듬어 보면 '희다'는 '히다(석보), 6-43)' 에서 비롯하였음을 알게 된다. 히 다'는 태양을 뜻하는 히'에 집미사 '-다'가 붙어 태양빛의 밝은 속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본다. '히'의 모음이 바뀌거나 탈락함으로써 여러 가지 분화형이 생겨나며 음성상징을 따른 표현감각이 달라진다. 음운의 변천과 방언 및 중세어 자료를 되돌아 볼 때, 히 '의 기원형은 '세 (셰)'가 아닌가 한다(이남덕, (한국어 어왼연구 I, II, III, Ⅳ, l985~l986). 지금도 '날이 샌다, 머리가 세다, 눈이 시다'고 할 때의 '시-' 계의 분조는 '해'와 함께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의미의 유연성을 보여 준다. '히'의 기원형을 '세 (셰)'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는 견해에 함께하는 것은 'ㅅ~ㅎ올' 의 넘나듦은 마찰음으로서 일어나기 쉬운 구개음화 현상이라고 플이되기 때문이다. 'ㅎ-' 가 분화하는 과정에서 '하-/허-해/-회-' 따위의 낱말들이 생겨났으며, '시-'계는 아직도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우선히 -'계의 분화 형태를 들어 보이면 다음과 같다. '하양, 하얗다, 하애지다, 허옇다(어느 정도보다 지나치게 회다), 허예 지다, 헤멀끔하다, 해말갛다, 해말쑥하다(얼굴이 회고 말쑥하다), 해거름(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질 때), 해거리 (한 해를 거름),해껏 (해가 질 째까지), 해끄무레하다(반반하게 생기고 빛깔이 해끔한 듯하다), 해끔하다(벚깔이 조금 회고 깨끗하다), 해끗해끗{횐빛이 군데군데 나타난 모양), 해납작하다(얼굴이 하얗고 납작하다),해넘이 (헤가 막 넘어가는 째), 해 님, 해동갑(해질 패까지의 동안),해돋이, 해뜩발긋(빛이 해끔하고 발그스럼하다)' 등이다. '회-' 계에 속하는 것으로는 '회 디회다(아주 회다), 회떰다(겉으로는 호화롭다), 회뜩머룩이 (아무렇게나 돈올 쓰는 사람), 회뜩회뜩, 회멀겋다(얼굴이 회고 맑다), 회묽다[얼굴이 회고 보기에 여믈지 못하다), 회 번덕거리다(회번드르르하게 번덕거린다), 회번드르르하다(회멀쑥하고 미끄럽다), 회번주그레하다(얼굴이 회넓적하고 번주그레하다), 회번하다(동이 르며 허연 빛이 조곰 비치다), 회부영다(회고 부옇다), 회블그레하다(빚이 회고 블그레하다), 회붐하다(새벽의 밝은 및이 조금 휘다)'와 같은 꼴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시-/셰-' 계에 속하는 낱말겨레에는 '새다(날이 밝아 오다), 새 달, 새 벽, 새되다(목소리가 늦고 날카롭다), 새뜻하다(새롭고 산뜻하다), 새롭다, 새 벽' 등과 같은 꼴이 있다 특히 '새롭다'는 뜻의 접두사 '새-'는 많은 꽈생어를 만들어 내는데, 모두가 '밝음.새로움'의 의미이다. 한펀 '셰-' 는 뒤로 오면서 '세-/시-' 로 바뀌기도 하는데, '해=年='를 뜻하는 의미가 셈을 헤아리는 동작을 나타내는 것으로 바뀌어 갔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여기에 속하는 형태를 보면 '세다, 셈, 셈나다(사물을 분별하는 슬기가 나다), 셈낱씨 (양대명사), 셈본(셈의 법칙), 셈판(사실의 형편 또는 까닭), 셈펴이다(생활이 나아지다)' 등이 있다. 강세를 드러내는 접두사 '시'도 '세-' 에서 비롯한 것으로 본다. 점두사 '시'는 강조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바, 특별히 형용사에 앞서서 상이는 경우가 많은데 '새-'로도 변이하여 상인다. 예 컨대, 시 퍼떻다, 시누래지다, 시뻘겋다, 새노랗다, 시누렇다'와 같은 보기들이 그러한 경우이다. '새' 가 '해'와 더불어 쓰이는 예는 종종 볼 수 있다. '세다'가 '헤다(헤아리다)'로 되는 경우나, '형'이 '싱'에서 넘나들었음을 생각해 보면, '새'계의 말이 '해'계의 말보다 음운사적으로 보아 기원형 임올 알게 된다. 마치 태양을 중심으로 찮은 떠돌이 별들이 제자리에 머물러 살아 가듯이 태양을 드러내는 말들은 '해-' 계 및 '새-' 계로 혹은 접두사 피-/새-' 등으로 분화하여 태양을 인식하는 우리 조상들의 의식을 되비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제 '히 (회)-' 를 중심으로 하는 낱말겨레에는 어떤 말들이 있는지 중세어 자료에서 찾아 보도록 한다. '히- (회) ' 계의 낱말겨레 1) '히-'계-히다(용가) 50), 히도디(월석) 2-35), 힛모로(해무리 ; [한청] 9 b), 해바라기 (물보) 화훼), 히포(여러 해 ; (계축), 햇빛(초두해) 7-3) 등. 2) '희-'계-회다(초두해), 25-2), 희옵스러하다(결백하다, (두방),25), 회조츨하다(회고 조촐하다 ; (박신해) 3-l3), 횐ㄱ믈(白獲 ;(마경) 상 1OO), 횐꼿개나리 (물보), 화훼), 흰권모(횐떡,{(청구) 대학본 p. 117), 횐노(훤비단 ; (역해) 하 4), 횐바곳(白附子 ; (동의), 탕액꾄 3-22), 횐ㅈ의 (동문), 하 55) 등 하얀 눈을 바라다보는 한국인의 정서에는 박꽃을 보는 듯한 그리움이 있다. 기원적으로 보아 우리민족이 기마민족으로서 '눈이 쌓인 지역에 익今한 탓만은 아닐 듯싶다. 해가 비치고 있는 동안과 그 반대의 시간들은 하나의 리듬을 만들어 빛과 그림자를 이루어 낸다. 우리에게는 환하고 하얀 것을 가까이하려는 본능 같은 욕구가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말의 상상력 1 - 정호완 5. 물의 순환 5-1. 솟음과 거룩함 민속놀이에서 '솟대장이'란 탈을 쓰고 솟대 꼭대기에 올라가서 몸짓으로 온갖 재주를 부리는 재주꾼이다. 여기에서 '솟대' 는 농사를 크게 짓는 대농가에서 세 안에 다음 해의 풍년을 바라는 뜻으로 볍씨를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늦이 달아 매는 장대를 뜻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늦이 솟은 장대' 를 가리킨다. 그것은 하늘을 향하여 더 높이 올림으로써 경건하고 간절한 씨 천의식을 드러냄을 뜻하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솟대는 또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보다 잘 되게 하고 드러내기 위하여 마을 입구에 높이 세우던 붉은 장대로, 우러러 보는 대상물이기도 하였다. 솟대의 끝부분에는 푸른 칠을 한 나무로 용을 만들어 달아 놓았다고 한다. 이러한 '솟대'는 우리의 역사기록에도 나오는 바, 소도(蘇塗)와 어떤 상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도는 마한. 변한. 진한 시대에 하늘의 신에게 제사지내던 지 역이었는데, 각 고을에서는 제사지내는 신단(神壇)을 베풀어 그 앞에 방울과 북을 단 큰 나무를 세우고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제단은 언제나 단을 쌓아 올리든지 아니면 나무를 세워 마련된다. 거룩한 공간은 정신적으로도 높은 곳이어야 하며,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숭배하기에 알맞은 곳이어야 한다. 오늘날의 '솟대'가 바로 이러한 말에서 기원하엿을 것임을 유추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필자는 '소도(蘇塗)'가 '숟'을 표기하였던 것이라 생각한다. '흔'은 시간과 공간을 따라 바뀌어 가면서 '숟[蘇塗]>솟'으로 되었으며, 받침 글자의 넘나듦으로 '훈(솥)/솟/솔'의 꼴들이 쓰이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 형태들온 다시 자음과 모음이 바뀌면서 '솟아 있는 모양'을 드러내는 말들로 발달해 간 것이다. 신을 제사하기 위하여 만든 제단에서 비롯한 일종의 솟음의식의 결과라고나 할까. '훈'계는 그리 많은 보기는 찾아지지 않는다. '숟 덩(料). ㅅ 확(鎖) ((훈몽) 증 IO)' 과, '距賊數十里壹料山훈뫼峯料山在雲峯縣東十六里(용가)' 의 땅이름 'ㅅ뫼' 정도에서 '솜(>솥)'이 확인된다. 제사를 지내는 데 있어 제물을 만드는 '숟(>솥)' 은 신성한 것이었다. 밥솥조차도 불을 땔 아궁이의 제일 두드러진 곳에 걸지 않는가. '솥' 과 같이 생긴 그릇에 제사 음식을 담기도 하였다 한다. 이렇듯 오늘날의 '솥'은 '숟'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는데, 디굳(ㄷ) 받침이 거센소리로 된 결과 티올(ㅌ)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솔'계는 '숟'의 받침이 유음(ㄹ)으로 되면서 갈라져 나간 말인 바, 소나무를 가리키는 '솔'이 그 대표적인 어형으로 보인다. 지금은 무당이 솟대로 대나무를 쓰지만 옛적에는 소나무를 샜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렇게 보면 오늘날의 '솔' 도 제단에 쓰는 신성한 솟대로서 '숟'으로 기록하다가 뒤에 '솔'로 바젼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솔'파 관계 았는 말은 그 보기가 상당히 딱다. 이를테면 '솔1 (소나무)', 솔(먼지를 떨거나 물감 따위를 칠할 패 쓰는 도구 ;뾰족해 솔잎에서 유추하여 쏜 것으로 보임), 솔가리(말라서 땅에 떨어진 솔잎), 솔가지 (꺾어서 말린 소나무 가지의 뻘나무), 솔과(科), 솔나물, 솔나방, 솔딱새, 솔방울, 솔포기(비늘 같은 소나무 껍질),솔뿌리, 솔새 (벼과의 다년초), 솔부엉이, 솔밭, 솔이끼, 솔잎, 솔장이 (플칠하는 솔을 만드는 사람), 솔포기 (가지가 다보록한 작은 소나무), 소나무, 소나무 겨우살이'와 같은 말들이 있다. '숟'이나 '솔'과는 달리 '솟'으로 발달해 간 '솟'계가 있는데 소릿값의 실현으로 보면 '숟'이나 '솟'이나 다를 게 없다. 모두가 무성 내파음 디굳(t)으로 소리가 나기 때 문이다. 이 형태가 접미사'_다'와 합하여 동사를 만들어 간다. 그 보기를 들면, '솟다, 솟고라지다(솟구쳐오르다), 솟구치다, 솟대, 솟대장이, 솟아나다, 솟아 오르다, 솟을 꽃살창(창살을 꽃무늬로 만든 창), 솟을대문(행랑채 보다 높이 솟은 대문), 솟올동자(머름의 간막이를 한 작은 기등), 솟을무늬(피륙의) 도드라지게 놓인 무늬, 솟치다(위로 높이 올리다)'와 같은 형태들이 보인다. 나물이나 풀싹이나, 나무가 배게나 있는 것을 사이가 뜨도록 하기 위하여 뽑아 내는 동작을 '휴다' 라고 히는데 이 '휴다' 도 '솟' 계에 드는 말로 추정된다. 중세어를 보면 '솟고다(>솟다>휴다 ; (한청)' 에서 발달해 온 것으로 검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근대어 자료로서 오늘날의 '솥'이 '솟(동문, 하 14)' 으로도 기록된 것을 보면 확실한 음운의식은 아닐지라도 '숟/솟/솥'이 같은 말 '숟'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면 '솟'에서 모음교체나 자음교체로 말미암은 형태에는 어떤것이 있을까. 우선 오(ㅗ) 와 우(ㅜ) 의 교체를 들 수 있다. 명사 위에 붙어서 본디의 성질을 드러내는 '숫'계의 말들이 '솟'에서 분화해 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신의 제단에 바치는 제물은 신성해야 하며 아무도 손을 대서는 안 되는 특성이 있기에, 사물 인식에서 그러하다고 본다. 불이 탄 뒤에 나무의 등걸을 재나 아궁이에서 처리하여 만든 '숯' 도 증세어에서 '숫爲炭(((훈례),)' 이라 한 것을 보면 상관성이 있올 듯싶다. 여기에 속하는 말들로는 '숫겅 (숯의 경상도 방언), 숫가락(-솟대처럼 솟아 있는 모양에서 유추한 듯하다), 숫국(아주 진솔한 사람이나 물건), 숫되다(어수룩하다), 숫돌(칼을 갈기에 알맞게 솟아 있는 돌), 숫색시, 숫접다(순박한 태도가 있다), 숫지다(인정이 후하다), 숫처녀, 숫하다(순박하고 어수룩하다)'와 같은 말의 무리가 있다. 다음으로 '솟' 의 모음 오(ㅗ) 가 어(ㅓ)로 바뀌어 이루어진 경우가 있다. 보통 저 있다>섰다'로 풀이하지만. 원래의 기본형이 '섯 (_섣)'으로 보인다. 앉았다가 일어서면 높이 솟아 있는 상태를 이루게 된다. 물가에 배를 매어 두기 좋은 곳이나, 서슬이 불끈 일어나는 감정 또는 물건의 두께를 '삯'이라고 한다. 칼날이나 물건의 날카로운 곳을 '서슬' 이라고 하는바, 이러한 보기에서 '섯' 의 가능성을 찾아 볼 수 있지 않을까. 모옴교체와 더블어 자음교체를 따라 '솟'계의 말들은 같은 속성의 다른 말들을 분화시켜 나아간다. 자음교체를 따라 '솟'은 '줏/젓/잣'으로 그 음성을 달리하면서 말의 뜻이 달라진다. 그렇지만 그 솟이 있는 모양은 다를 바가 없다. 이 말들은 모두 생식이나 생명, 흑은 성장과 관계가 있는 말들로 가지 변어 나아간다. 성숙한 남자의 생식기를 '좇'이라고 표기하지만 지금도 많은 방언에서는 '줏'이며, '젖' 또한 넷' 인 것이다. 남근 숭배의 사상과도 멀지 않음이니, 그 생명의 비롯됨을 신성시하는 데서 온 것으로 보인다. '젖'도 그 모양을 보면 후대를 양육하기에 알맞도록 솟아 있다. 이처럼 언어는 자연을 인식하는 방법이나 그 소리의 느낌을 따라 말의 꼴들이 분화해 가는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5 -2. 속과 솜 속이 텅 비어 있는 강정이 먹을 것이 없듯이 속으로는 아무런 실력도 없으면서 겉치레만 일삼을 패, '속빈 강정'이라고 한다. 우리는 깆숙히 안에 들어 있어서 중심을 이루고 있는, 유형 또는 무형의 사물을 가리켜서 '속'이라고 한다. 여기서 유추하여 마음의 한가운데, 배의 속 자리를 뜻하는 수도 있다. 속은 겉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쓰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참' 과 동일한 뜻으로 쓰인다. 겉만 있고 그 내용(속)이 차 있지 않은 상태가 거짓이요, 그 반대가 참이지 않은가. '속'이란 명사에 접미사 '-다'가 붙어 '속다'가 만들어진다. 남의 꾀에 넘어 가거나 거짓을 참인 줄로 아는 것이 '속다'라면, 거짓을 참으로 곧이듣게 하거나 거짓말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이롭도록 꼬이는 것은 '속이다'라고 할 수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과 자기자신이 속은 것 모두 내용(속)에 관한 관단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우선 명사 '속'이 관여하여 이루어지는 보기들을 찾아 보면, 다음과 같다. 속가량(속으로 대강 쳐 보는 셈-겉가량), 속가루(쌀이나 고추 같은 것을 빻을 때 나중에 되는 가루). 속가죽(겉가죽 안쪽에 있는 가죽), 속가지(삽요어 ; 擇腰語), 속감(쌍시의 속에 든 감), 속갱이 ('관솔'의 경삼도 방언), 속겨 (고운 겨-겉겨), 속고갱이, 속고름, 속고샅(지봉을 이엉으로 이을 래 먼저 지붕 위에 건너 질러서 매는 새끼), 속고의 (속바지), 속곳바람, 속커 (안쪽의 귀), 속긋(글씨나 그림을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 덮어 씌우게 하기 위하여 먼저 가늘게 그리어 주는 획), 속긋넣다(속긋을 그어 주다), 속꺼풀, 속껍데기, 속끓이다, 속나깨 (메밀의 고운 나깨), 속내평 (속 내용), 속눈 뜨다(겉으로는 눈을 감은 체하면서 속으로는 무엇을 조금씩 보다), 속눈셉, 속다, 속다짐(속셈), 속닥이다(쏙닥이다 ; 동아리끼리 가만히 이야기하다), 속달거리다, 속달다(안타까와지다), 속대, 속대쌈(배추의 속대로 싸는 쌈), 속더께 (찌든 물건에 낀 속의 째), 속등겨, 속뜨물(곡식을 여러 번 씻은 뒤에 나오는 깨끗한 뜨물), 속마음, 속말, 속바람(숨을 고르게 쉬지 못하고 몸이 떨리는 현상). 속버선, 속벌(속에 입는 옷의 각 벌), 속보이다(속에 품은 마음이 드러나다), 속뽑다(속을 알아 내다), 속삭이다, 속살(옷에 가리어진 부분의 피부), 속살다(속으로는 버티고 겨루는 뜻이 있다), 속살이(게의 일종), 속살찌다, 속서근풀 (황금초 ; 黃후草), 속속들이, 속아리(속병), 속없다(줏대가 없다), 속이다, 속적삼, 속주다(숨김 없이 말해 주다), 속창(구두에 덧까는 창), 속치마, 속치레, 속치장, 속탈(소화가 안 되는 병), 속힘 (실 력) 등. 시대를 거슬러 중세어의 자료를 보게 되면 '속' 의 형태는 '솝 리(舊)(훈몽), 하 34), 솝 정(精) (훈몽), 상 33), 솝서근풀((사성),하)' 등에서 '솝' 으로 확인되는데, 같은 뜻을 드러내는 변이헝으로서 '씁(몸쏘블보리옥 ; (능엄) 1-64)' 의 형태가 보이기도 한다. 그럼 '솝/속'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많은 보기는 아니지만 말의 받침으로 쓰이는 비읍(ㅂ)이 변천과정에서 이른바 자음교체를 따라 기역(?)으로 바뀐 결과로 보면 좋을 듯하다. 예컨대 거봅/거북(능엄)), 붐>북((석보), 6-82), 부섭>부엌' 등에서 그러한 보기를 찾을 수 있으니, '솝>속'도 예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지금도 지명에서는 '속'에 해당하는 말이 '솜[이리 (理里)-솝리>솜니] 으로 쓰이고 있으니, 그것은 중세어 자료에 보이는 것과 같은 형태가 아직 어휘의 고도(孤島)처럼 살아 있는 경우라 하겠다.' 하나의 음절과 또 하나의 음절이 만나 그 소리가 달리 쓰이다가 아예 달리 소리 나는 대로 굳어져 하나의 형태로 쓰이는 일은 흔히 볼 수 있다. 이를 이른바 형태음소적인 변동에 따른 말의 변천이라고 풀이한다. 옷을 해 입을 때에 쓰이는 '솜'도 따지고 보면 열매 부분의 속이라는 특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목화도 삭과 즉 터지는 열매의 하나로서 그 속이 여러개의 칸으로 나뉘고 각 칸에 많은 씨가 들어 있다. 한마디로 '솝'과 '솜'이 넘나들며 쓰이다가, 아예 '솝'으로는 그 형태가 인식되지 압고 '솜' 으로만 굳어져 버린 결과이다. '솝' 이 쓰이지 않은 그 빈 자리에 받침이 바뀌면서 '속'이 쓰이게 되니 같은 뿌리에서 나와 '속/솜'으로 갈리어 그 가지마다 서로 다른 모양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솜은 목화씨에 달라 붙이 있는 섬유질의 한 부분이다. 파란 다래는 가을을 살다 검은색 다래로 변하여 마른다 다시 다래는 세로로 갈라져 그 사이로 하얀 솜의 속살을 드러내 어, 말라가는 목화에 또 다른 계절의 꽃인 양 피어오른다. 솜은 희고 부드러우며 가벼운 것으로서 목화의 씨를 감싸는 옷이기도 하며 겉껍질과 씨의 사이에 끼어 있어 겨울을 지내기에 알맞도록 그 씨앗에 견 딜성을 더해 주지 압는가. 이러한 보온과 탄력, 가벼움의 장력을 이용하여 사람들은 솜을 틀어 실로 옷감을 짜기도 하며, 고 자체를 옷의 겉과 속 사이에 끼워서 쓰기도 한다. 그 쓰임에 있어서나 그 본질에 있어 솜은 속올 내용으로 삼고 있음을 알겠다. 결국 솜은 목화씨를 감싸는 옷일 뿐더러 사람을 감싸 주는 옷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솜'과 상관을 보이는 말의 형태로는 '솜, 솜돗(솜을 얇게 펴서 솜반을 만드는 돗자리), 솜몽둥이, 솜방망이 (엉거시과의 다년생 풀), 솜버선, 솜병아리(알에서 갓 깬 병아리), 솜붙이(겹옷 빔을 철에 임는 솜옷), 솜사탐, 솜옷, 솜털, 솜채 (솜올 잠재우기 위해 두드리는 대나무), 솜화약(솜을 황산과 질소의 혼합액에 적셔 만든 화약)' 등이 있다. 냉수 마시고 속을 차린다고 하거니와 참으로 속이 찬 사람, 속이 차 있는 세상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인간을 보호하는 보호막 곧 솜이 알맞게 마련되어 있는 공간이라고 하겠다. 솜은 솜으로서의 고유한 구실이 있듯이 겉껍질은 그 나름.대로의 고유한 기능이 있다. 겉과 속이 걸맞은 그러한 누리야말로 살아 볼 만한 세상일 것이다. 5-3. 불의 겨레 개가죽이 불에 타면 우선 오그라들기 마련이다 하는 일이 늘어 가지는 못하고 자꾸만 오므라들고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불에 탄 개가죽 같다'고 한다. 사람이 오늘날과 같이 문명생할을 할 수 있는 근거 중의 하나로 불의 구실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힘이 세고 큰 동물이라도 블에 타지 않는 것은 없다. 호랑이도 불을 보면 도망을 간다고 한다. 불은 그 속성으로 보아 빛과 열을 수반한다. 그런 의미에서 환한 것에는 불을 붙여 말하는 일이 종종 있다. 불이 빨갛고 환하게 보이기 때 문에, 꽃이 벌어지는 것을 핀다고 하며, 아픈 얼굴이 건강하고 고와지는 것을 핀다고 하지 않는가. 옛말로는 '블(석보), 9-37)' 이었는데 뒤로 오면서 '불'이 되었다. '블'은 받침으로 기역(ㄱ)을 취하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블'이 '붉다/ㅂ다'로 쓰이는 보기들이 확인된다 '블근섬, 블근못 등은 '붉다'가 다른 말과 합성하여 드러난 지명이고, 기다, 블곰 등은 용언으로 쓰인 경우이다. 오늘에 와서 '불'을 중심으로 한 말들은 하나의 겨레를 이룰 만큼 다양하게 발달되어 쓰인다. '불그덩덩하다, 불그데데하다(좀 야비하게 불그스름하다), 불그레하다, 불구무레하다(태가 나지 않고 엷게 불그스름하다}, 불그스름하다(조금 붉다), 불그죽죽하다(칙칙하게 불그스름하다), 불끈거리다[(마치 불이 타오르는 것처럼) 걸핏하면 성을 잘 내다=, 붉디붉다, 붉히다' 등 상태 또는 과정을 나타내는 표현들이 낱말의 밭을 이루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아 이들 '붉-' 계의 형태들은 자음이 갖는 소리의 느낌을 따라 더욱 강한 말로 바뀌어 쓰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같은 형태인데도 된소리의 자음이 옴으로써 보다 강한 느킴을 받게 된다. '뿔그스럼하다, 뿔구무레하다, 뿔그죽죽하다, 뿔끈거리다'와 같이 형태의 변이를 가져 오는 일이 때때로 있다. 이어서 '밝-' 계의 낱말로서 그 무리를 보게 되면 '발갛다(>빨갛아), 발가벗다(<빨가벗다), 발깍(<발칵/벌컥), 발간(<빨간 ; 아주 터무니 없는), 발강이 (<빨강이), 발개지다(<뻘개지다), 발그레하다(약간 곱게 발그스름하다), 발그스름하다(<빨고스럼하다)'등의 형태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중세어에서 '블(붉)/ 블(ㅂ)' 올 중심으로 하는 낱말의 겨레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가. '블/블계의 낱말겨레 (중세어) 1) '블- 계-블(석 보) 6-33), 블강도(火賊 ; 동국삼강; 열 4-61), 블거ㅎ다(구급간 6-8). 블찌디다(유합)하 62), 블곧(동국삼강), 효 4-88). 블그트렁이 (유합 하 52), 블근못((용가), 7-25), 블근섭((용가) 1-8), 블내다((한청 317), 블똥((한청) 317), 블디 ㄹ다(유합), 하 4I), 블딛다(블을 때다, ((훈몽) 하 12), 블리다((한청) 311 d), 블묻다(노해) 상 23), 블붙다((능엄) 8-75), 블빛(유항) 하 54), 블사개 (한청), 398 d), 블퇴 (((한청), 317), 붉다{(두해1 초 7-26), 붉히다((한청) 230), 붉나올(불꽃; (금삼, 3-29) 등. 2) '블-'계-블가하다((월석) 2-58), 블기다((용가) 30), 붉가숭(발가숭이 ; (청구), 대학본 p. 136), 밝다(용가) 71) 등. 이상의 '블 (블)-'에 대한 보기 1) 2)에서와 같이 현대어에 비교하면 경음화를 경험하지 않은 어휘들이 많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세어에서 현대어에 이르도록 '불'이 기역(ㄱ) 특수곡용을 하는 형태적인 특성을 보임에는 변함이 었으나, 점차 리을(ㄹ) 발음은 약화되고 기역(ㄱ) 받침으로만 발음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자음 셋이 연속될 때는 중간자음이 묵음이 된다. 폐구조음원칙에 따르면 입술이나 연구개(혀뿌리)에서 나는 소리가 살아 남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ㄱ' 계가 더 이상적이지만 언어현실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니어서 '밝다'의 방언분포에서 보는 것처럼 '-ㄹ' 계도 많은 방언분포를 갖고 있다. '밝다'의 방언 분포 1) [발따]-경북 영천. 포항. 영덕. 대구. 김천. 의성. 예천. 안동. 영주. 청송. 울진. 평해스경남 울주. 양산 울산 동래. 김해. 부산. 마산 창녕 등 2) [볼다]-경남 마산 등. 3) [박다]-경북 고령 영양.성주/경남 합천. 함양. 산청 진주 충무. 저창. 밀양 진양 고성. 의령 등. 4) [복따]-경남 거제. 남해. 함양 등. 5) [뽁다]-경남 남해 등 6) [북따]-경북 영천了경남 하동. 합천. 산청.사천 등 5-4. 물의 순환 가뭄이 들고 논에 물은 넉넉지 않은데, 자기 논에만 물을 댈 때. 결국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경우를 비유하여 '아전인수(我田引水)'라고 한다. 물은 지구 표면적의 약 7 할을 차지하고 있으며, 생물체의 몸 속에는 7할에서 9할에 이르는 수분이 있다. 진실로 물은 생명의 고향이요 원천임을 알겠다. 공기가 지구의 옷이라고 한다면 물은 지구의 피라고 하여 지나침이 없다. 끝없는 사막도 물만 있으면 옥토가 될 수 있으며, 온갖 생물이 새끼를 치게 된다. 물이 전혀 었다면 부패는 물론이요, 생물체 내의 영양분 공급과 노폐물의 신진대사도 이루어질 수 없다 물은 흐른다. 둥근 지구를 따라 흐르니 마침내 큰 원형의 바퀴를 이루고 돌아가뜬 셈이다. 옛말에 물은 '믈'이었고, '물'은 하나의 무리 곧 떼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옛말에서 '믈'에 대립되는 형태로서 '블'은 찾아 볼 수 없지만, 분명 '맑' 계의 꼴로 드러나는 것이 있으니, 'ㅁ'계의 꼴과 서로 대립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현대어에 '물'이 쓰이는 모양은 '물(ㄱ)' 계와 '말(ㄱ)' 계가 있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러한 두 계열은 구체적으로 어떤 꼴로 나타나는가 살펴 보도록 한다. '물(ㄱ)'계에는 '물거품, 물결, 물긋물긋하다(묽은 듯하다), 물쿠다, 물덤벙 술덤벙(대중없이 날뛰는 모양), 물렁하다, 무르다, 무르녹다, 물잡다(마른 논에 물을 대어 두다), 물집, 물큰거리다 (물컹한 감각), 물큰물큰, 물타작(미처 마르기 전에 물벼를 그대로 하는 타작), 물컹이 (물컹한 물건), 물할머니 (샘의 귀신), 물호랑이(범고래), 묽수그레하다(조금 묽은 듯하다)'와 같은 형태들이 있다. 한편 '맑-'계에는 '말갛다, 말개지다, 말그스름하다, 말긋말긋(액체 속에 덩어리가 섞인 모양), 말끔하다(티없이 깨끗하다), 말랑거리다, 말랑하다, 말캉거리다(평안도에서는) 말큰거리다 ; 너무 익거나 옳아서 좀 무르다, 말캉하다, 몰칵(냄새가 코를 찌르듯이 갑자기 나는 모양), 몰캉거리다, 몰캉하다, 꼴큰(연기나 냄새가 갑자기 나는 모양)'과 같은 형태들이 있다. '물'은 옛말을 보면 지명에서 '매 /미'로도 드러난다. '매끄럽다, 매 끈거리다, 매끈하다, 매끈둥하다(퍽 매끄러운 맛이 있다), 미끄름, 미끈유월[(빠르게 지나가는 유월이란 뜻으로) '음력 유월'을 달리 이르는 말], 미꾸라지, 미끄러뜨리 다' 등이 '매 /미'와 물의 관련성을 보여 주는 말들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타나는 '水-買' 의 대응이 말해주고 있듯이 '믈' 계는 '미 '계로도 발달하였다. 어두자음의 소리상징을 따라서 분화된 형태로 보이는 것은 바로 '미/비/피'의 대림적인 낱말의 겨레들이라고 하겠다. 이들 형태 가운데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형태는 미 '이다. 소리 상징으로 보면 가장 평범한, 정지상태 이거나 운동상태이더라도 파열성 없이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음성상징을 드러낸다. 물이 수증기가 되어 구름이 되었다가 다시 '비'가 되어 내린다. 그러니까 땅에서 하늘로, 다시 하늘에서 땅으로 순환하여 하나의 고리를 이루는 것이다. 비는 농경사회에서 생명과도 같은 구실을 하였다. 제때 비가 안 오면 기우제를 지내고 온 부락이 회동하여 부정탄 사실들을 처단하기도 한다. 이와 함께 '피'는 직접 동물의 몸 속을 돌아 흐르는 가장 생명적인 미 '의 변형이 된다. 미 /비/피'와 관런한 낱말의 떼 중에서 미 '는 현대어로 올수록 분포가 얼마 안 되고 '비/피'를 증심으로 하는 낱말겨레는 상당히 넓은 분포를 보인다. 중세어 자료에서 보이는 '믈-'계의 낱말겨레는 다음과 같다. '믈-/맑-' 계의 낱말겨레 I) 믈-'계-믈(석보), 13-33), 믈ㅅㄱ래 (한청,, 29 c), 믈가지(역해), 하 11), 믈견흠(물 깊이 겨냥 ; (유합, 하 IZ). 믈결 ((유합), 상 6), 믈고기 (소해; 3-25), 믈구뵈 (혼몽), 하 35), 믈그여디다(믈크러지다 ; (유합), 하 59), 믈끄이다(큰물지다 ; (훈몽), 상3), 믈담다(물에 빠지다), 믈떰(물방울 ; (유합), 하 6o), 믈되야지(돌고래), 믈쯔다(젖다 ; (동문) 상 8), 믈방울(송강), 2-14),믈미다(물밀다), 믈불회 (물의 근원 ; (유함) 하 8), 믈쇼(역해보) 48), 믈언덕 (훈몽) 상 3), 믈에군사(水軍 ; (삼역) 3-6), 믈여위다(물이 마르다 ; (유합)하 5o), 믈줄(유합)하 41) 등 2) ㅁ-'계-묽다((구급방) 상 27), 맑다(초두해) 8-24), 맑안츠다(맑게 가라앉히다 ; (구급방) 상 10) 등. 위의 보기에서와 같이 'ㅁ +모음十ㄹ/ㅁ+모음'의 어근형태에서 파생하여 상당한 말의 겨레를 이루었다. 음운론적으로 원순모음화를 겪어 '믈>물'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형태론적으로는 특수곡용을 하는 '물(ㄱ)' 계의 말들이 보이는데 오늘날의 방언에서도 흔히 나타난다. '물(ㄱ)' 은 모음이 바꿩을 따라 '맑(ㅁ)-' 계의 어휘들을 분화시켜 나아갔다. 물이 인간의 삶에 끼치는 영향은 절대적이다. 물이 있음으로써 풀. 나무 등의 식물이 있고, 다시 동물의 삶이 가능한 것은 자연의 이치일진대 물을 비롯한 자연에 대한 조심스러움이야말로 우리 인간들에게 요구되는 기본적인 자세라 할 것이다.
우리말의 상상력 1 - 정호완 4. 돌과 원운동 4-4. 돌과 원운동 흔히 돌림의 현상을 윤회라고 한다. 불가에서는 윤회를 '어리석은 백성이 해 탈의 경지에 이를 때까지, 그들의 영흔과 육채가 업(業)을 따라서 삶과 죽음의 과정을 되플이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한편 지리학에서는 지각의 발달단계를 유년기-청 년기-장년기-노년기로 나누는데, 그러한 과정이 되풀이된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정치학에서는, 페르겐부르크같은 이들은 홍망성쇠의 반복 속에서 국가의 형태가 발전해 나아간다고 한다. 우리가 살고 있음도 자연계의 돌림구조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있다. 밤과 낮으로 돌아가는 지구가 그러하고 대기권의 기상현상 또한 그러하다. 뿐만 아니라 우리 몸 속에서 돌고 있는 피 또한 그러하다. 본시 '돌다' 라는 말은 '돌 十-다'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돌'은 '사람이 나거나 죽어서 한 해에 한 번썩 해마다 돌아오는 날'로 이해하면 된다. 여기에서 파생된 '돌아가다'는 사물이 '원래 있던 자리로 다시 가는 것이나, 사람이 죽는 것을 높여서 말하는 경어이다. 죽는 것을 일러 '돌아가다' 라고 하는 경우, 원래의 태어나기 이전의 어떤 시간과 공간을 전제하는 것으로 삶의 영원성, 곧 영원회귀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돌아가다' 는 표현으로서의 설득력을 잃게 된다. 생각해 보니 이 세상 어느 것 하나 돌아가지 않는 것이 없다. 우리가 '돈' 이라고 부르는 화폐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화폐는 유통이 안 되면 올바른 제 구실을 할 수 없지 않은가. '정신이 아주 돌았어' 라고 할 때는 수평면에서 보아 일백팔십 도를 돌았다는 얘기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도 돌림현상의 하나이다. 바다에서 피어 오른 수증기가 모여 구름이 되고, 기압의 골짜기를 따라 구름이 모이면 비가 된다 비는 대지에 내려 모이어 냇물이 되고 냇물은 다시 강으로, 다시 바다로 흐르는 것. 결국은 모든 것이 돌아가는 것이라고나 할까. 동물의 혈관에 흐르는 '피'는 어떠한가. 그 피도 온몸을 돌며 영양을 공급하거나 필요없는 물질을 가지고 가 버린다. 마치 들의 풀꽃들이 피고지고 하여 계절을 살아가듯이 말이다. 그럼 '돌다'의 '돌-' 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의미적인 특징을 갖고 있을까. 필자는 '돌'의 의미적 특성은 '돌림'에 있으며 기본 형태는 '돌' 에서 비롯한 것으로 생각한다. 바위의 조각으로서 모래보다는 크고 바위보다는 작은 것, 또는 암석이나 광석을 통칭하여 우리는 '돌' 이라고 이른다. 돌이 생성되는 과정은 쪼개어 지고 서로 부딪혀 구르는 모습을 전제로 한다. 분절파 회전이 거듭 되어 더 작은 돌뗑이로 바뀌어 가는 것이다. 때로는 산사태에 의해 돌기도 할 것이고, 홍수에 떠내려 가면서 씻기어 점차 작아지고 둥글어져 가기도 할 것이다. 바위에서 쪼개어져 돌이 되고, 다시 쪼개어져 돌껭이가 되었다가 결국 자갈이 되고 다시 모래로 된다. 부딪혀 쪼개져 흙이 되고, 흙은 모이어 다시 바위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돌고 돌아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면서 대지의 토양을 살찌우는 것이 '돌'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돌' 의 순환성에 바탕을 두고 다른 동사나 복함어가 파생되어 간다. 그 낱말겨레는 다음과 같다. '돌'의 낱말겨레(증세 어) 돌개 (石浦 ; ((용가), 1-38), 돌고(돌달구 ; (박해) 중간 상 10), 돌 ㄷ리 (역해), 상 14), 돌다(월석) 1-25), 돌덩이 다신속삼강행실도), 효 4-89), 돌매 (월석 23-79), 돌보다((송강, 2-3), 돌저귀 ((청구) p. 119), 돌보치(한청) 17l C), 돐((소해), 4-22), 돐서리 (石間 ; ((초두해), 7-l0), 돌탕관(청구,, 대학본 86) 등. '들'의 낱말겨레 (현대 어) 1) 돌-'계-돌, 돌계집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 돌고드름, 돌공이, 돌곪기다(종기가 겉은 딴딴하나 속으로 몹시 곪다), 돌구멍, 돌구유, 돌기둥, 돌기와, 돌길(돌아가는 길), 돌날, 돌담, 돌대 (회전축), 돌덩이, 돌돌(여러 겹으로 둥글게 마는 모양), 돌돌하다(영리하다-머리가 잘 돌아가니까), 돌라내다(남의 물건을슬쩍 빼돌리다), 돌라놓다(각자의 몫으로 나누어 놓다), 돌라대다(돈이나 물건 따위를 변통하여 대다), 돌라막다(둘러막다), 돌라버리다(게워 버리다), 돌라방치다(무엇을 빼돌리고 그 자리에 다른 것을 살짝 대신 넣다), 돌라붙다(<둘러붙다), 돌라서다(<둘러서다), 돌라싸다(<둘러싸다), 돌라쌓다(<둘러쌓다), 돌려내다(남을 샅살 꾀어서 있는 곳에서 빼돌리어 내 다), 돌려 능다, 돌려보내다, 돌려보다, 돌림, 돌림병, 돌림자(항렬자), 돌립장이 (따로 돌림을 받는 사람), 돌뗑이질, 돌물레(고삐를 꼴 때 새끼 한끝에 달고 돌리어 꼬게 만든 기구로 '자세' 라고도 함), 돌보다. 돌부리, 돌부처, 돌비알(가파른 돌언덕), 돌샘 (돌 사이에서 솟아 나는 샘), 돌순, 돌아가다, 돌아내리다, 돌아눕다, 돌아다니다, 돌아들다, 돌아서다, 돌아앉다, 돌아오다, 돌알(돌로 만든 안경알), 돌우물, 돌이키다, 돌잔치, 돌잡이(돌잡히는 일)돌잡히다(돌날에 여러 가지 음식과 믈건을 상 위에 차려 놓고 돌쟁이에게 마음대로 잡게 하다), 돌장이, 돌절구, 돌집, 돌짬(갈라진 돌과 돌의 틈), 돌쩌귀 (문짝을 문설주에 달아 여닫게 하기 위한 암수 한 벌의 쇠붙이 물건), 돌탑, 돌팔매, 돌함(돌로 만든 함), 돌확(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 돌비늘 등. 2) 도르_.계_도르다(먹은 것을 토하다, 둘레를 돋려 감다), 도르래, 도르르, 도르리 (음식을 돌려 가며 제각기 내는 일), 도리기(여러 사람이 돈을 내어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일), 도리깨, 도리깨침 (탐이 나거나 먹고 싶어서 저절로 삼키어지는 침), 도리깨열(도리깨 채에 달아 곡식의 이삭을 후려치도록 되어 있는 서너 개의 회초리), 도리다, 도리도리 등 3) 도로_'계 도로가다. 도로. 도로 오다 등. 이상에서, 원운동을 하는 물체나 원형의 물체 또는 돌과 같이 단단한 물체에 '돌_, 도르_, 도로_'가 붙어 어휘를 만들어 냄을 알 수있다. 이에 대해 과연 이러한 순환성을 드러내는 말들에 돌이 만들 어지는 과정이 반영된 것일까 하고 의심하는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자는 어떤 사물이나 사실의 속성은 언어표현의 바탕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인간이 인식하는 여러 가지 인식방법이나 관점에서 언어적인 사고가 비롯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적인 표현들이 내적. 외적 재구에 따라서 호응하는 형태를 보인다면 한 언어의 변천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유익할 것이다. '돌' 의 경우, 돌고 돌아서 이루어지는 '원운동.원형'의 속성을 층족시키는 외연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돌-'은 현대로 내려올 수록 더 많은 합성어를 만들어 낸다. 물이 수증기로, 구름으로, 다시 비가 되어 대지와 바다로 돌아가 듯, 이 지구 위에 존재하는 어느 것 하나도 '돌림'의 속성을 지니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다. 둥글게 돌아가는 물체 위에 존재하기 때문일까. 4-5. 죽음과 뒤 아무 힘도 없는 사람이 힘이 센 사람에게 겁도 없이 달려드는 일이 있다. 속담에서도 이를 '죽은 고양이가 산 고양이 보고 아응한다. 고 이른다. 어느 곳에나 허세가 있는바, 이를 옹자하는 말이기도 하다. 삶과 반대되는 뜻으로서, 삶을 이어가는 데 필수적이고 결정적인 활동이 마비되고 파괴되는 일을 '죽음' 이라고 하며, 동사로는 '죽다'라고 한다. 죽음은 구체적으로 숨이 끊어지는 뜻을 중심으로 하여 쓰이지만, 비유적 인 의미로 '자살하다, 그림 같은 예술품에 생기가 없다, 블이 꺼지다, 움직이던 물체가 정지하다, 생생한 기운이 없어지다, 경기 또는 오락에서 상대방에게 잡히다, 음식이나 철물류가 산화에 따라 빛이나 맛을 잃다'와 같이 여러 가지의 주변적인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벽에 부딪혀 막다른 데까지 이른 상항을 한계상황 이라고 하거니와 그 가운데에서도 죽음처럼 절박한 것은 다시 없을 것이다. 그래서 죽음의 문제에 대하여 진지한 자세로 풀이하려 하지 않는 종교는 없다. 종교는죽음을 새롭고 영적인 삶의 출발로 보아, 죽은 뒤의 새로운 하늘과 땅을 설정하여 영원한 삶에의 기약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곧 육체적 죽음을 넘어서려는 지향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천국이라든가 극락과 같은 개념이 그 좋은 실례라고 할 것이다. 죽음이란 말은 어떤 문화적인 배경에서 만들어진 말일까. 주거생활의 원시 단계인, 굴살이나 수상생활(樹上生活)과 연관하여 잠시 생각하여 보기로 한다. 중국의 기록이긴 하나 <진서 (辰書) >,에는 동이 (東夷)들의 생활에 대하여 녀.름에는 나무 위에서 살았으며, 겨울에는 굴과 같은 곳에서 살았다(夏則眞居冬則穴處)' 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후한서 (後舊書)에는 '흙으로 무덤과 같은 집을 짓고 살았으며, 여닫이문은 무덤 같은 흙집 위에 설치하였다(作土로如家開戶在上)'고 전해지니, 우리 조산들이 이른바 움집에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삼국지),의 기록에 의하면 어떤 대갓집은 무덤과 같은 굴의 깆이가 사다리 아홉 개를 놓고 들어갈 만하다고도 한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의 우리가 거주하는 집들도 흙집의 모양을 옮겨 변형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몇 계단을 지하로 내려가서 타야하는 지하철 정거장을 보면 위의 기록이 그다지 생소하지만은 않다. 말 그대로 모든 생물은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 무덤과 같은 굴 속에서 태어난 우리 사람이 죽은 뒤에 다시 무덤으로 돌아가서 묻히니, 요람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돌림의 질서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생명종식어 '죽다'는 '죽十_다>죽다'로 풀이할 수 있는데 이때 '죽'이란 말의 바탕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풀이가 있다. 서재극은 '기운이 떨어지고 앞으로 기운다' 는 뜻을 드러내는 '숙다' 에서 비롯했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중세국어의 단어족연구), l979). 의미론적 인 유연성으로 보아 전혀 무관하지 않을 뿐더 러, 음운의 변화로도 설명할 수 있다. 고대 국어에서 는 터짐갈이소리(파찰음)가 없었음을 감안할 때 '숙다>죽다'의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숙'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물음과, 끼 운이 줄고 앞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곧 죽음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여전히 답히지 못하는 여백이 남는다. 필자는 말의 짜임새로 보아 '죽다'는 명사 '죽'에 접미사 '-다'가 붙어 된 것으로, 여기서의 '죽'은 '둑'에서 비롯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둑은 홍수의 예방이나 저수(貯水)를 위하여 돌이나 흙 따위로 높이 쌓은 언덕이나, 높은 길을 내려고 흙이나 돌로 쌓아 올린 언덕을 말한다. 한마디로 이러한 '둑'의 원형(原形)은 거처하기 위하여 만든 무덤파 같은 집이요, 죽은 뒤에 돌아가는 무덤과 같은 공간을 이른 것으로 생각된다. '둑>죽'으로 되었을 가능성은 같은 낱말겨레의 방언자료를 통해 예측할 수 있다. '둑'의 방언분포를 들어 보이면, 둑(경기 포천. 강화. 광주/강원 흥천/충북 충주. 제천/경북 울진 경주 월성. 청도/경남 사천. 고성), 뚝(한반도 대다수 지역), 개뚝(경기 안성), 두거리 (강원 홍천), 걸뚝(경남 진주), 방죽(층남 서천/경남 함양), 방축(경기 파주/강원 양구), 방천 (전북 무주 전주 진안. 순창/경북 영주. 영양 청송 영천. 선산. 금릉. 청도/경남 거창. 울산. 합천. 진주. 하동), 데부(경기 가평/층북 옥천), 데부뚝(강원 양구 화천 춘천. 인제. 원주) 등과 같다. 이상의 보기 중에서 '둑~죽'의 상관성을 보이는 형태는 '방죽'의 꼴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물을 막기 위한 것을 '방죽'이라한다. 이는 사람의 주거나 무덤의 의미로 상이던 말이 오늘날에 와서 확대. 유추된 경우라고 할 것이다. 또 다른 풀이의 바탕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둑'의 낱말겨레에드러나는, 죽은 뒤 바로 무덤에 묻히는 상태나 과정과의 연관성이다. '둑' 은 모음교체를 따라서 양성모음이 되면 '독(궤. 항아리 ;(구급간), 6-29. (능엄 8-88)' 으로 드러나고, 음성모음이 되면 '둑(유씨명) 5, 덕 (나뭇가지 사이 등에 걸쳐 맨 시렁 ; (금삼),2-25)' 으로 쓰이게 된다. 시루에 안쳐 곡식가루를 찌거나 굽거나 흑은 소댕에 부쳐서 익혀 만든 음식을 '떡'이라 함도 '덕'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중성모음으로 바뀌면 '딕다(찍다 ; (박해), 하 6)' 가 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박물관에 가서 옛 사람들의 무덤에서 나온 것을 보면 뼈를 따로 담아 두는 항아리인 '골호(骨豪)'가 있는 데 일종의 '독'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넉'의 경우만 해도 그러하다. 원래 여름 더운 때면 나무 위에 덕대를 매 놓고 살았다고 하거니와 풍장(風葬)을 하는 고장에선 지금도 사람이 죽으면 일정한 장소에 덕대를 매고 그 위에 시체를 놓아 일정한 기간이 지난 뒤 뼈만 거두어 다시 장례를 모신다. '둑'이 '죽'과 관련이 있음을 드러내 주는 좋은 보기라 하겠다. 닉 다'의 경우는 어떠한가 ? '딕다' 는 어떤 표 같은 데에 구멍을 내어 뚫을 때에 쓰이는 말로, 굴살이나 무덤과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죽음'을 '독/둑/덕/딕-'과 관련짓는 또다른 바탕은, '죽다'와 뜻을 함께하는 이른바 생명종식어에 땅과 관련한 형태가 보인다는 점이다. 우리말의 생 명종식어를 들어 보이면, 밥숟가락 놓다, 입이 닫히다, 입다물다, 눈감다, 숨소리 멈추다, 목숨이 끊어지다, 눈감기다, 목숨이 사라지다, 목숨이 없어지다, 꼭숨이 떨어지다, 숨지다(이상은 주로 신체 부위의 변화)/거꾸러지다, 쓰러지다, 죽어 자빠지다, 죽어 넘 어지다, 몸이 식 어지다, 몸이 굳어지다(이상은 외양의 변화)뒈지 다(뒤지다 ; 비속어) 등과 같다. 이는 주로 고유어의 경우를 든 것인데 이들 형태 중에서 가장 많이 드러나는 것이 '-지다'이다. 아주 생산적으로 쓰이어 많은 용언들과 함께 복합동사를 이루고 있다. 그러면 '-지다'는 옛말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까 ? 중세어 자료를 보면, '지다'는 니 다'로 드러난다. '죽다(월석, 21-215), 떨어지다((용가), 85)' 가 중심된 뜻으로 삽인 것으로 확인되며, 낱말의 짜임새는 니 十-다>디다 (>지다)'로 풀어 볼 수 있다. 이때 '디-'는 공간명사 '뜰'에 니 '가 결합한 'ㄷ十이 >더 (>지)' 로 보든 디 (地)>지'로 보든 간에 땅(ㄷ)'과 관련한 형태임을 알 수 있다. '죽다.쓰러지다'로 쓰인 예로 보아, 디다'가 죽음에 이르러 다시 땅으로 가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상정할 수 있다. 위에서는 '죽음'이란 낱말이 만들어지는 의미의 바탕이 땅과 상관이 있음을 보았다. 과연 '죽음'은 방위의 개념으로는 어느 쪽을 나타낼까 ? '죽다'의 비속한 표현으로 '뒈지다'라는 말을 종종 듣게 된다. '뒈지다'는 '두어지다'의 줄임말로서 '두다+지다>두어지다>뒈지다(~뒤지다)'로 풀어 볼 수 있다. 중세어 자료를 보면, '두다'는 '뒷다(석보 6-2)' 의 변이형임을 알게 되는데, 이때 뒷'은 '뒤 (ㅎ)>뒷'과 같이 히읗(ㅎ)종성체언이 변형된 것이다. 흔히 뒤가 방위로는 북쪽을 뜻하고, 계절로는 겨울을, 동물로는 곰이나 뱀을, 별로는 북두칠성을, 소리로는 우면조를, 성으로는 여성을 상징한다. 특히 여성상징과 연계지을 때, 대지 (땅)이나 물 역시 여성 흑은 어머니의 성격을 띰을 상기하게 된다. 땅으로의 회귀, '죽다'가 '뒤'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을 점쳐 볼 수 있지 않을까 ? 우리 배달겨레의 북두칠성에 대한 별 신앙은 원시신앙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 손꼽을 만하다. 이름 있는 유명한 산의 봉우리 가운데 비로봉은 '별'의 방언형인 빌'에서 비롯된 것이고, 우리말의 '빌다'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문화인류학에서는 북쪽의 별이 중시되는 것을 고아시아족의 원거주지가 시베리이 부근이었기때문이라고 플이하기도 한다. 혼인 예식의 자리에 기러기를 놓는다든지 사람이 죽어 초혼(招魂)을 할 때, '복복(復復)'이라고 부름도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귀향의식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뒤'는 두고 온 우리 고향의 방위 (북쭉)이 며, 다시 돌아갈 영원한 마음의 공간이라고 하겠다. 형태상으로 보아 히읗(ㅎ)종성은, 기역 (ㄱ)으로 소리 나는 일이 종종 있다. 띠라서 '뒤 (ㄱ)다>ㄷ다>쥑다>죽다'의 과정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뒈지다~뒤지다'는 살아있는 현재의 삶이 아니고 이미 과거시제가 된, 멀어진 저승의 삶이라고 보아 무리가 없을 듯하다. 마침내 본래의 고향 땅으로 돌아가매, 땅을 드러내는 '디'에 접미사 '-다'가 붙어 '디다>지다'로 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앞에서는 '죽다'의 발달과정을 '둑 >죽'과 '뒤 (ㄱ)다>쥐 (ㄱ)다>죽다'리 두 가지로 생각해 보았다. 필자는 이중 '뒤 (ㄱ)다'에서 발달한 것으로 봄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둑'과 '뒤'모두 공간을 드러내는 말이기는 하지만, 소리가 변하는 규칙성이라는 면에서 볼 때, '둑>죽'의 가능성보다는 '뒤 (ㄱ)>쥐 (ㄱ)>죽'의 가능성이 더 늦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등의 자료를 보면, 뒤'가 '디' 로 표기되는 경우가 많이 보인다. 지금도 경상도에서는 '죽인다'를 '지긴다'로 쓰는 경우가 많음을 생각해 볼 때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배해수는 죽음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낱말밭은 추상적인 것, 내세관적인 것, 생명체적인 것 등의 세 개의 분절상(相)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현대국어의 생명종식 어에 대한 연구, l982). 이 가운데에서 '뒤 (ㄱ)' 의 내용과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내세판적인 것의 분절상이다. 배해수는 종교적인 교리의 바탕 위에서 죽은 뒤 영혼의 이동에 대해 풀이한 낱말의 겨레와, 이승과의 인연을 끊는 내용을 담은 낱말겨레를 보기로 들고 있다. 영흔이 이동하는 방향에 따른 낱말겨떼는 산승이동에 대한 것과 하강이동에 대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영혼의 상승이동에 대한 낱말겨레로는, 승천 (昇天)하다, 승하(昇速)하다, 예척 (禮陟)하다, 척방(陟方)하다, 등선 (효仙)하다, 신선(神仙) 되다, 천당가다 하늘나라 가다, 극락 가다, 왕생극락하다, 입멸 (入減)하다, 원적 (圓寂)하다, 피안(彼岸)으로 가다, 입적 (入寂)하다, 귀화(練化)하다, 귀원 (歸元)하다, 귀진 (歸眞)하다 등이 있다. 일단 죽은 뒤의 공간에 대한 표현은 종교에 따라 서로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늘'은 공통적인 이상향으로서 추구되고 있다. 그러한 신성한 공간으로서의 '하늘'은 후에 임금의 죽음과 관련하여 특별하게 다루어지기도 하였다 '피안(彼岸)으로 가다'의 '피 안'도 이상향으로 일컬어지는바 모든 번뇌에 얽매인 고통의 바다를 넘어선 가장 이상적인 언덕을 뜻한다. 이와는 반대로 죽은 뒤 영혼이 현재보다 나쁜 곳으로 가는 하강 이동에 대한 낱말 겨레로는 지옥 가다, 아귀 (餓鬼) 되다, 축생되다, 명부(冥府) 가다, 창천 (黃泉) 가다, 지하(地下) 가다, 구천(九泉) 가다 등이 있다. 이들은 공간의 위치로 보아 낮은 곳이거나 나쁜 곳에로의 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상승하는 것도 하강하는 것도 아닌 장소에로의 이동을 드러내는 말로, '연옥 가다(천주교), 환생하다(불교), 귀신 되다(민속신앙)'와 같은 표현들이 있다. 죽음과 관련한 내세관적인 표현에는, 앞에서 상승, 하강, 상승도 하강도 아닌 것으로 나누어 살펴 본 영흔의 이동상태에 따른 것 외에, 이승과의 인연을 끊는 내용을 담는 말들이 있다. 영혼이 떠나다, 혼백이 떠나다, 혼이 떠나다, 영혼이 없어지다, 영혼이 사라지다, 영혼이 나가다'와 같은 말들은 모두 영흔이 육체로부터 멀어짐을 뜻하고 있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은 분명 영원한 이별을 할 수밖에 없다. 사람은 누구나 한평생 동안 만났다 헤어지고 헤어겼다 만나면서 살아 간다. 이상(李繪)의 <봉별기 (逢別記)>에서도 나타난바, 죽은 자와 산 자의 만남과 헤어짐을 드러내는 말로는 '생리사별 (生離死別) 하다, 사별(死別)하다, 여의 다, 영결 (永訟)`하다, 영결종천 (永訟終天)하다' 등의 낱말들이 있다. 직접 사람은 아니더라도 세상과의 인연을 끊는다는 내용의 낱말겨레가 있으니 '세상을 버리다, 기세 (棄世)하다, 세상을 하직하다, 별세 (別世)하다, 하세 (下世)하다, 타계하다, 세상을 달리하다, 유명 (幽明)을 달리하다' 등의 형태가 그러한 보기들이다. 이 세상에 살아서 숨을 쉬고 감각할 수 있는 누리가 이승이요 현재요 앞이라면, 죽은 뒤의 세상은 저승이며 과거요, 분명한 뒤가 된다. 죽은 뒤의 세상에 대하여 아무도 객관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우리말의 '깜깜하다/캄캄하다/감감하다'의 '감감'은 어두운 신의 세계를 이르는 말이다. 중세어의 '감. 곰. 검. 금' 등은 신을 가리키는 말로서, 현대 일본어에서도 신을 '가미' 라고 하지 않는가. 가장 잘 죽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것이라고 한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다가 인간스레 죽는다는 것은 하나의 축복으로 보인다. 결국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펑무사하게 존재하는 하나의 섭리이기에 삶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확연하게 보석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죽은 소크라테스보다 산 돼지의 코가 되는 게 좋다고도 하지만, 사람은 영원한 생명의 본향을 그리며 사는 게 아닐까 ? 사망의 그림자를 자연스레 인정하면서 욕망을 조금씩 줄이고 모두가 함께하는 공간과 시간을 만들어가야 함은, 죽어야 하는 모든 사람들이 지향해야 할 기본적이고 근원적인 삶의 방향성일 것이다. 4-6. 흙과 살 '흙의 냄새가 고소하다'는 말이 있다. 흙의 냄새를 볶은 콩의 냄새처럼 고소하게 느낄 정도로 죽고 싶은 생각이 들 경우를 이르고 있다. 지구의 겉표면을 이루는 물질로서 바위가 부스러져서 가루로 된 것을 '흙'이라고 한다. 부드러우면서도 기름기가 있으며, 물기를 보존함으로써 풀과 나무를 길러 내는 힘을 지니고 있다. 생물이 호흡하는 공기를 지구의 옷에 비유할 수 있다면 흙은 지구의 몸을 이루고 있는 육체, 그 가운데에서도 살에 해당하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흙은 용암(마그마)이 굳어지고 굳어진 용암이 풍화되고 이리저리로 흩어져 생성된다. 흙이 전혀 없고 용암상태의 바위만이 있는 골짜기. 거기에 무슨 목숨살이가 가능하겠는가 ? 그곳은 공허한 바위굴과 바위굴의 연속 일 뿐, 참으로 우리가 발을 붙이고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옛말에는 '흙'이 '흙 (석보), 13-51)' 이었는데 뒤로 오면서 모음이 바뀌어 '흙'이 되었다. 일부 지역(경상.평 남)에서는 흙을 '흘이라고도 한다. 생각하건대 이 '흘'은 증세어에 태양 또는 하루를 가리키는 '흘 (능엄), 4-72)' 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모음이 바썹으로써 그렇게 될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중세어의 '흙'과 이 '흘'은 서로 어떤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흘' 곧 태양은 그 본질에 있어 불이요, 타오르는 사름이다. 조금 더 생각을 이어 보면, 흙이 끓어오르는 용암이 흘러내려 만들어진 결과라는 점과 '흘'의 연관성을 맺을 수 있다 필자는 '흘'이 그 뜻으로나 형태(음운)의 변천 혹은 넘나듦으로 보아 '슬(歲 ;((삼역),, {(계축),) ' 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먼저 뜻으로 본다면, '슬'은 앞서 말한 보기처럼 태 양을 뜻히며 불이 타오르는 연소과정을 나타낸다. '슬다(>사르다 ; (원각), 2-1 :48)가 '불을 사르다'의 의미로 대응하고 있음은, 불 곧 태양의 뜻과 상통함을 보여 준다. 그러던 '실'이 '나이'를 뜻하는 연령의 단위로바뀌어 간 것이다. 흙이 나타내는 모양이나 성질은 여러 가지로 갈라져 나아간다. 이를테면 흙이 용암의 상태에서 액체상태로 움직이는 것을 '흐르다'라고 하던 것이 물이 움직이는 것도 '흐르다'로 표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의 단점을 말하거나 세워 놓은 집을 부수는 것을 '헐다'라고 함도 '흙'의 생성과정이나 그 모양 또는 성질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한다. '흙'이 관여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 형태로는 얼 (할)-/흐(느.리.르)-/흘(ㄱ)-/흩-'과 같은 어형들이 있다. 헐-'계에 해 당되는 말로는 헐다, 헐다, 헐다,, 헐떡거리다, 헐겁다(낄 자리가 너르다), 헐뜯다, 헐 렁 헐렁하다' 와 같은 꼴이 있고 '흐-' 계에는 '흐너지다(포개 있던 작은 물건들이 낱낱이 헐리다), 흐느적이다(하늘거리다), 흐늘거리다, 흐리다(흙이 물에 풀리면 흐려지 니까), 흐르다,(물 따위가 낮은 곳으로 내려가다), 흐르다(짐승이 교배를 하다), 흐르르하다, 흐리디 흐르다, 흐리멍덩하다, 흐리터분하다, 흐릿하다'와 같은 말들이 있다. 한편.흘(ㄱ) 계에는 '흘러 가다(쓰인 예 :홀러 가는 물 퍼 주기 ; 주는 사람은 대수롭지 않으나 받는 이는 고마울 경우), 흘러 나오다, 흘러 내리다, 흘러 보다(남의 속을 슬그머니 떠보다), 흘렁거리다, 흘레붙이다(암수를 교배시키다), 흘리다, 흘림, 흘림이 ('술'의 심마니말), 흘미죽죽(일을 여믈게 끝맺지 못하고 흐리멍덩하게 질질 끄는 모양), 흘쩍거리다(일올 질질 끌어가는 것), 흙다리, 흙내, 흙감태기 (흙을 온몸에 뒤집어 쓴 사람이나 물건), 흙더미, 흙들이다(논에 새 흙을 들이다), 흙받이, 흙밥(가래 팽이 호미. 삽연장 따위로 한번 떠서 올리는 흙, 또는 쟁기. 긁정이 등으로 깔려 넘어가는 흙), 흙질 (흙을 바르는 것), 흙탕' 과 같은 말이 있다. 또한 I흩_계에 드는 것으로는 '홉날리다, 흩다, 흡뜨리다, 홉어뿌리기 (여기저기 씨를 홈어 뿌리는 일), 흩어지다, 홍이다(흩어지게 하다)'와 같은 형태들이 있다. 시대를 거슬러 을라가 중세의 '흘 (흘)-슬-' 을 중심으로 하는 낱말겨레의 분포는 어떤지 알아 보도록 하자. '흘(흘)-슬-' 의 낱맡겨레 1) 흘_ 계 _흘 ((석보)11-26), 흙 ((석보, 13-51), 흙고개 (용가)1-44), 흙구들(노걸대 상 23), 흙ㄷ리 (역해), 상 l4), 흙무디((훈몽, 중 9), 흙덩이 ((소해), 5-52), 흙ㅂㄹ다 (유합, 하 41),흙벽 (훈몽, 중 8), 흙비 (훈몽), 하 2), 흙빚다(훈몽), 하 20),흙성녕 (도기 만드는 일 ; (유합)하 7), 흙손(혼몽), 증 16), 흙집(초두해) 21-2) 등 2) '흘'계_흘리다((능엄), 5-82), 흘림ㅅ장(문서초안 대장 ; <역해>, 상 12) 등. 3) '슬_계'-슬(ㅎ) (능엄, 8-7), 슬다(燒, (원각), 상 2-l :48), 슬다(生 ; <계초> 초26), 슬이다(살라지다 ; ((석보), 9-37), 삶다(삼강) 열 28), 사로다(송강, 1-5),,사라느다 ((화해), 상 31) 등. 1)의 예에서 본래 '흘'은 기역(ㄱ)특수곡용을 하는 말이었옴을 알게 되는데. 말의 형태가 바뀌는 과정에서 아예 기역(ㄱ)이 붙어 오늘날의 '흙'이 되었음이 눈에 뛴다. 결론적으로 '흘-/홀-/슬-' 계의 어휘들은 태양의 '불사름'에 바탕을 두어서 이루어진 낱말의 겨레라고 생각하여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흙을 밟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흙은 삶의 근거인 것 이다. 흙은 블사름의 소산으로 우리는 대지의 품 속에서 따스한 신의 정서와 은혜를 느낀다. 우리는 흙의 내음을 그리워하며 살다가 죽음에 이른다. 죽어 땅에 묻히면 결국은 흙이 되어 또 다른 나 곧 꽃이 되기도 하고 새가 되기도 하며, 삶의 섭리를 따른다. 그러다 다시 사람으로 환생할 수 있으리라는 꿈을 꾸며 온 날을 기다릴지도 모른다. 지구의 육신이 흙이요, 피가 물일진대, 그 흙은 숙명적인 존재들의 보금자리가 되는 것이다. 이 보금자리에서 존재들은 끊임없이 삶과 죽음의 옷을 갈아입으며 자기 나름의 모양으로 머무르는 것이다.
우리말의 상상력 1 - 정호완 4. 돌과 원운동 4-1. 봄과 꿈 손님을 대접하는 데 사돈이 제일 어렵다고들 한다. 식량 사정이 안 좋은 봄에 사돈을 만나 대단히 난감한 정황을 일러 '봄 사돈은 꿈에도 보기가 무섭다'고 한다. 이렇듯 주머니 사정이 뜻같지 아니 한 때 대접하기 어려운 사람을 만나는 수가 더러 있다. 봄은 가을과 짝이 되는 계절로서, 이제 막 이 누리의 생명이약동함으로 붐비는 계절이다. 절기로 보이 대략 입춘에서 입하에 이르는 시기로, 참으로 봄은 꿈으로 가득한 신의 선물이다. 뒤에서 가을이 '되돌림의 계절, 거두어 들이는 계절' 로 풀이되었거니와 봄은 대조적으로 논과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는 '기다림과 생산을 기약하는 계절'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봄이 '보다'에서 비롯한 말로 본다. '보다'는 '사물의 모양을 눈을 통하여 알다, 알려고 두루 살피다, 보살피어 지 키다, 일을 맡다, 시험을 치르다, 사고 팔기 위하여 장으로 가다, 값을 매기다, 참고 기다리다, 좋은 때를 만나다, 자손을 낳다, 자손을 결흔시키다, 음식을 차리다, 운수 같은 것을 점치다' 등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인다. '봄'은 '보_+_ㅁ>봄'으로 그 형태의 짜임새를 쪼개 볼 수 있는데, 여기서 '보다'는 위에서 설명한 것 가운데에서 '기다리다, 아이를 낳다, 자손을 결흔시키다'의 의미와 깊은 유연성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보다'의 어간 '보-'는 중세국어의 '보[보(쟁기) ; (훈몽), 보(방축 ; (유씨명), 보(ㅎ) (包料 ; (역해),), 보(ㅎ) (법화)' 와 친연성이 있는 것으로 본다. 모두가 생산성과 가능성의 뜻을 갖고 있다. 쟁기는 밭갈이에 사용되니 생산의 도구이며, 방축도 물을 가두어 두었다가 농사에 물을 대어 주니 역시 생산성과 관계가 있다. '보자기'는 어떤 사물(씨앗. 아이 등)을 간수하거나 기르고 '대들보'는 집을 장만하여 정착할 수 있게 하니 보다 큰 것을 위한 바탕으로서의 가능성을 가진다고 할 것이다. 이 '봄' 과 상관을 보이는 형태로는 '봄갈이(봄철에 논밭을 가는 일), 봄낳이(봄에 짠 무명), 봄놀다(뛰놀다), 봄맞이, 봄새 (봄철 동안), 봄철, 봄타다, 봄바람, 봄물(봄에 얼음이나 눈이 녹아서 흐르는 물)'과 같은 꼴이 있다. 덧불여 둘 것은 '보다'의 제일 중심이 되는 뜻이 눈으로 보는 것인데, 이때 '보-' 는 집에서 가장 중요한 '들보'의 의미에서 비롯한 것이 아닌가 한다. 보는 것은 사물인식의 가장 중요한 대들보의 구실을 하니까. 무엇을 보고 듣고 느낀다는 것은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가장 기초에 해당하는 일이다. 이 가운데에서도 보는 것, 즉 시지각만큼 중요한 게 또 있을까. 보는 일은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우리의 어두운 육체를 밝혀 주는 등대의 구실을 한다. 보지 못한다면 그저 막연한 추상이나 어림짐작이 있을 뿐. 그 중요성은 두번 다시 되플이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인간의 모든 감각과 모든 동작을 시각화하려는 경향이, 특히 우리 말에서는 두드러진다 '입어 보다, 먹어 보다, 만져 보다, 맡아 보다, 들어 보다, 느껴 보다'의 경우처럼 인간의 모든 감각을 시각화하고 있다. ('-보다'는 다른 동작 동사와 함께 복합어를 만들어 쓰지만 형용사와는 결합되지 않는 특성을 보이기도 한다). 봄은 계절 중에서도 시각의 구실을 하는 계절이다. 봄의 꿈은 부할과 생장을 의미한다. 봄은 대지에 생명의 불을 붙이는 신의 음성이요 신의 심부름꾼이 아닐까. 4-2. 여름과 해 '여름 불도 쬐다 나면 섭섭하다'고 한다. 더운 여름에 불을 쪼일 필요는 전혀 없다. 하지만 쏠데없는 것이라도 있다가 없어지면 서운하다는 말이다. 절기로 보아 여름은 입하(立夏)에서 입추(立秋)에 이르는 기간으로서, 네 계절 중 제일 덥고, 낮은 길며 밤은 짧다. 역리학 (易理學)에서 여름은 불로 비유되며 소리로는 헛소리(치음)가 된다. 지금은 계절로서의 '여름'이나 열매를 맺는 '열음'이나 음상이 같지만, 옛말에서는 계절을 녀름(석보)' 으로 열매는 '여름(능엄)' 으로 나타내었다. '녀름'은 '녈음'이라고도 하거니와 지금도 평안도 방언에서는 너름'으로 쓰고 있다.' 우선 '녈음'의 형태를 보면 녀十으十-ㅁ>녈음'으로 보인다. '녀-' 는 니-'로도 표현되는바, 니-' 는 원초적으로 태양을 뜻한다. 만주어에서 '닝구'는 위 또는 머리란 뜻으로 쓰이며, <삼국사기>,의 지명자료를 보면 '日/熱 의 대응관계가 확인된다. 이러한 이유에서 필자는 여름을 태양의 계절, 진행의 계절로 보고자 한다. 음식을 익히는 것을 중세어에서는 '니기다/닉다((월석)' 로 쓴다. 또 머리에 물건을 얹어 놓는 것을 니다((두해)) 라고 한다. 한펀 일본어에서도 '니'는 '丹. 赤. 熟.' 등의 의미로 쓰임을 생각하면, 그러한 가정에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지금도 함경도 선천 정주 등에서는 익 다'를 '닉다'라고 한다. 우리 선조들은 해가 뜨고, 해가 진다고 하였다. 지구는 가만히 있고 태양이 움직여서 모든 만물이 운행되는 것으로 파악하였던 것이다. 해가 돌고돌아, 봄에 이어 여름을 오게 하여 모든 생물을 자라게 한다. 특히 식량을 대변하는 말인 '벼'를 '니 (>이 ; (구급간),-86)' 라고 한 것도 관계가 있다고 보겠다. 공자님도 밥을 먹어야 산다는 말이 있지만 참으로 벼는 인간이 삶을 이어 감에 있어 특히 한국인에게는 두말할 나위 없이 증요한 자원이다. 마치 태양이 없으면 모두가 죽음에 이르는 것처럼. 태양과 식량, 이 둘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삶의 필수 조건으로 우리의 생활을 크게 좌우한다. 태양은 숭배의 대상으로 가장 위대한 '니마'신으로 표현된다. 지금은 구개음화되어 눈썹에서 머리털이 난 부분 사이의 얼굴 한 부분을 말하는 '이마' 정도로 남겨져 상일 따름이다. 비유컨대 태양은 하늘에 및나는 가장 위대한 이마요, 눈이요, 광명이니 에너지의 총본산이라 할 것이다. 계절과 관계지어 볼 때 태양은 '진행'의 뜻으로 연결시킬 수 있을 듯하다. 봄에 싹이 트고 꽃과 잊이 핀 것을 그대로 성숙되도록 잘 이끌어 나아가는 것이 태양 아닌가. 꽃이 피었던 자리에 열매를 맺게 해 그 씨앗 속에 생명을 거두어 넣는 것이 태양이다. 태양은 그렇게 함으로써 새로운 목숨살이의 장을 열어 나아가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보면 가을에 열매가 맺혀 땅에 묻혔다가, 봄이면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모든 만물이 영원히 그 생명을 부지하는 것이니,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부팥이요, 영생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것은 죽음과 삶이 뫼임없이 이어지는 반복의 연속이며, 그러한 연속은 생명에 영속성을 부여하는 길이 되는 것이다. 여름은 한창 활동하고 성장하는 계절이다. 따라서 일할 때 부지런히 일을 해야 함을 강조하는 권유도 있다. 여름에 하루 놀면 겨울에 열흘 굶는다'와 같은 성구가 바로 그것이다: 퉁구스의 말에는 열매가 맺음을 '일' 이란 어간으로 나타낸나. 그 영향관계를 소상히 밝힐 수는 없으나, 서로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여름에 관계되는 중세 어에서의 낱말겨레에는, '녀름((소해)) 5-5), 녀ㄹ지이 (농사 ; ((속삼강), 효), 녀름ㄷ외 다(농사가 잘 되다 ; <석보>, 9-34), 녀름됴타(풍년이 들다 ; 훈몽), 하 19), 녀름디을아비 (농부, (중두해), 3-3), 녀름지△리 (농부, (능엄), 3-88), 녀름지△아비(농부 ; ((두해), 3-5), 녀 름지△ㅏ (농사 ; ((초두해), 2l-41), 녀름짓다(농사짓다 ; 월 석,, 10-21)' 등이 있다. 주로 녀름-'의 형태가 중심을 이루며, 전체적으로 구개음화된 니은(ㄴ) 소리가 자리하고 있음을 눈여겨보게 된다. 그러면 현대어 에서는 어떤 형태로 어휘가 분화되는지 알아 보도록 한다. 낱말 겨레로는 여름, 여름고사리삼(고사리삼과에 딸린 여러해살이 양치류), 여름낳이 (여름 동안에 짠 피륙), 여름밀감, 여름살이 (여름에 입는 베로 지은 흩옷), 여름지이 (농사), 여름지기 (농부), 여름털 (새나 짐승의 여름 틸)' 등이 있다. 두음에 구개음화된 니은(ㄴ)이 오는 것은 현대어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녀름됴타, 녀름ㄷ외다'와 같은 말도 확인되지 않는다. 이와 함께 오늘날의 말에서는 '여름`이 식물의 명칭과 같은 학술용어에 덧붙여 쓰이는 경우를 찾을 수 있다. 4-3. 가을과 되돌아감 '동냥 얻으러 다니는 승려가 추수할 가을철이면 매우 바빠진다'는 말이 있다. 일러 '가을 중 싸대듯한다'고 하는바, 몹시 바쁜 정황을 드러내고 있다. 가을은 입추(立秋)에서 입동(立冬)에 이르는 계절로, 모든 곡식이 익어 가고 열매를 맺음으로써 겨울을 준비하는 철이다. 더욱이 낙엽이 지고 쇠락함으로써 많은 예술가들은 이러한 가을에 대한 정서를 여러 모양으로 표출한다. 낙엽은 떨어져 다시 뿌리로 돌아간다(舊葉歸根). 마찬가지로 많은 열매들은 겨울을 지나 봄애 뿌려졌던 상태로 돌아가되, 봄보다는 그 수와 양을 더한다. 퉁구스말에서는 가을을 '가시[kasi]라고 하고, 우리말에서도 방언에 '가슬(가실)'이라고 한다. 흑시 가을과 되돌아감' 사이에 무슨 상관은 없는 것인지. '가을(秋)' 의 방언 분포를 보면 '가을(경기. 강원 층청.경상), 갈(경기. 강원 층청 경상), 가슬(경상. 함경 강원 비주), 가살(층북. 전라. 경상 제주), 가실게 (경북 울진)' 등으로 나타난다. 이 가운데에서 '가슬.가실'은 바로 거울의 옛말인 '거스르(거슬)'와 같은 어형으로, 모음교체를 따라서 '가슬. 가실. 가실게'로 나타났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거울의 되비치는 속성이 가을에도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슬'계에 드는 분화형태로는 '가스랭이 (가시랭이,풀이나 나무의 가시 부스러기), 가스러지다(성질이 온순하지 않고 거친 것), 가슬가슬(베옷이 깔깔한 모양)'과 같은 꼴이 있다. '가실'계에는 '가시다(변하거나 달라지거나 없어지다), 가시라기 (가시 랭이), 가시세다(앙칼스럼고 고집이 세 다)' 등이 있다. 또 '가을'계로는 '가을갈이, 가을걷이 (가올페 곡식을 거두는 일), 가을내 (가으내의 본디말), 가을비, 가을하다(가을걷이를 하다), 가올일, 가을장마'와 같은 형태들이 있다.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길러 가올에 거두어 들인다. 이러한 주기는 그 다음해에 되풀이 되어, 자연계는 운행되어 나아간다. 이렇듯 '가을'이라는 이름은 되돌림으로써 재창조의 과정을 마련해 주는 속성에 어울리게 붙여진 것으로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중세어 자료에서 'ㄱ △' 과 관계되는 낱말의 겨레를 찾아보면 'ㄱ△(ㅎ) (초두해), 7-32, ㄱ ㅅ (ㅎ)<유합> 상 2, ㄱ ㅇ 졀<태광>1-36, ㄱ ㅅ (ㅎ) <칠대> 13, ㄱ을 미암이<물보> 등이 있다. 모음 사이에서 시옷(ㅅ)이 약화하여 덜어지는 것을 전제할 때, 'ㄱ ㅅ> ㄱ△>ㄱ ㅇ(ㄱ을)>가을'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앞에서 각 방언을 증심으로 하는 현대어 자료를 들었거니와, 어사분화를 일으켜 '가실/가슬/가을'계의 낱말겨레로 발달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가올과 같은 낱말겨레에 넣을 수 있는 '거울'과 관련지어 가을과 되돌림의 상관성에 대하여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단적으로 가을과 거울의 특성은 되돌림이 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거울 깬 머슴을 사위 삼는다'는 말이 있다. 거울을 고쳐 준다 해놓고 거울을 깨서 그 값으로 거울 주인에게 머슴으로 들어가 결국 그 집 딸에게 장가를 들어 살았다는 옛이야기이다. 이는 곧 최치원 선생의 유명한 <파경노(破鏡奴)>에 얽힌 이야기이 다. 매일같이 거올을 보면서 우리들은 자신의 용모를 가다듬는다. 이때 거울은 거울 앞에 서 있는 대상을 되돌려 비추어 준다. 이러한 되돌림은 경우에 따라서는 되돌아 봄의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한다.꺼 울.이란 되돌림, 곧 반조(反照)의 작용을 뜻하는 말로 생각된다. 옛말에 '거우루((능엄)), 거우로(훈몽)' 와 같은 형태가 보이며, '거역하다.대적하다'라는 뜻으로 '거우다((월 인))' 가 나타나기도 한다. 되돌아섬은 경우에 따라서는 등을 돌리고 대적하는 뜻으로도 쓰이게 되는 것이다. 더 적극적인 뜻으로는 공격하는 모양으로 된 물건을 이르기도 한다. '거우루/거우로'와 더불어 되돌림의 의미를 드러내는 형태에 거슬다((금삼))' 혹은 '거스리다(능엄)'와 같은 꼴이 있다. 분명 어떤 상관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소리가 시간의 흐름을 따라 바뀌어 온 것을 생각해 보면 그럴 가능성이 더욱 짙어진다. 시옷(ㅅ)이 모음을 포함한 울림소리 사이에서 반치음(△)으로 약해겼다가 아주 탈락되는 현상이 있음을 참작 할 때, 거슬-(거스라-)' 이 어떻게 '거우로(거우루)'와 이어지는가를 알게 된다. 지금도 '거스름'이란 말을 쓴다. 돈을 주고 되돌려 줄 경우에 쓰인다. 요컨대,.거스르>거스르>거으르~거울로 보는 것이다. 즉 거울은 거스르의 짜임 'ㄱ+모음十人十모음十ㄹ+모음'에서 끝음절의 모음이 탈락하여 생겨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거스르' 계열에 드는 형태로는 '거스러미 (나무의 결이 가시처럼 얇게 일어난 것), 거스러지다(성질이 거칠어지다), 거스르다, 거스름돈, 거슬거슬, 거슬러 올라가다' 등이 있다. 모음이 '가스'계열로도 바뀌어 나아간다. 그래서 '가스러지다(<거스러지다>), 까시레미(거스러미), 가시, 가시개 (가위)'와 같은 꼴이 쓰이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가위'를 말하는 '가시개'가 공격적이고 베어 치우는 정서를 환기함은 '거스르'가 기본적인 중심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가시'도 같은 짝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가시에 찔리어 상처를 입는 경우의 느낌과 통하는 부분이 있지 않은가 ? '거우르'계열에는 너우르다(기울이어 쏟다), 거우듬하다(조금 기울어진 듯하다), 거울삼다, 거웃(논밭을 갈아 넘긴 골. 양쪽에 경사진 기울기가 모여 한골이 됨)'과 같은 꼴이 있다. '거스르'는 모음교체에 따라 '기스르(기슭)'으로도 실현된다. '기스락(초가의 처마 끝. 기슭의 가장자리), 기스락물(방언에서는 기스랑물~지스랑물), 기슭'과 같은 형태가 이 부류에 드는데, 모두가 되돌림의 의미를 바탕으로 갈라져 나온 말이다. 비탈진 곳에 물건을 올리면 다시 되돌아오니까.
우리말의 상상력 1 - 정호완 3. 풀과 목숨 3-3. 꽃과 두드러짐 꽃의 빛깔이나 모양이 좋아야 나비가 그 꽃을 찾아온다. 그래서 '꽃이 좋아야 나비가 모인다'는 말이 있다. 자기의 상품이 좋아야 고객을 끌어모을 수 있고, 딸이 고와야 사위를 골라잡을 수 있음과 같은 경우를 일컫는 표현이기도 하다. 식물의 씨받이를 하기 위한 생식의 기관이면서 특유한 냄새와 가루가 있고, 꿀맛 나는 샘이 있는 부분을 일러 '꽃'이라고 한다. 여기 이런 뜻에 바탕을 두어 아름다운 여인 흑은 번창하고 영화스러운 사물이나 사실을 꽃으로 빗대어 쓰기도 한다. 기능으로 보아 꽂은 종족 보존을 위한 기관이다. 사람들은 꽃을 좋아하고 때로는 꽃말을 지어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지만, 꽃 그 자체는 식물의 성을 뜻한다. 수꽃이나 암꽃에 따라서 특성이 다르기는 하겠지만 꽃이 있음으로 해서 세대가 이어지며 번영을 약속할 수 있으니, 꽃은 씨알이며 부활이요, 생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꽃이야말로 식물의 정수리이며 가장 두드러져 뛰어난 곳이다. 꽃은 수직으로 그 봉우리가 솟아 옆으로 둥그런 꽃잎을 펴서 특유의 향취와 언어를 바람에 날린다. 보이지는 않으나 그 냄새를 따라 나비와 벌이 날아들어 서로 함께 살아 가는 지혜로운 생존과 생식의 욕구를 채워 나아간다. 식물의 부분 가운데에서 가장 두러져 솟은 기관이니, 수직성향은 태양을 지향하는 흐름이라고나 할는지. 꽃은 꽃받침과 꽃부리(꽃잎)로 이루어지는 꽃껍질과, 가장 중요한 알맹이인 꽃술로 짜여진다. 입술이 입을 보호하듯이 꽃껍질은 꽃의 내부를 보호하고, 꽃받침과 꽃부리(꽃잎)는 벌레가 꼬이게 하는 구실을 한다. 꽃부리와 꽃잎은 같은 부분으로, 가장 부드러우며 무지갯및의 고운 치마 저고리를 입는다. 그래서 꽃이라고 하면 우리는 우선 꽃잊을 떠올리게 된다. 본디 '부리' 는 새나 짐승의 주둥이를 말하는바, 물건의 끝이 뾰족하거나 병과 같이 속이 비고 한 끝이 터진 데를 이른다. 부리와 잎이 같은 맥락으로 쓰임을 고려할 때, 꽃잎은 특정한 나무나 풀잎에서 가장 두드러진 부분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물폰 나무와 풀의 잎이 비교적 오래 가는 것이라면, 꽃잊은 피었다 쉬 지는 것이긴 하지만. 옛말에서 꽃은 '곳((월석),), 곧(두해),), 곶(용가),) ' 과 같은 여러 가지 꼴로 쓰이었다. 오늘날에 와서 서로 독립한 낱말이 되었는데 이 형태들이 드러내는 뜻과 꽃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 '곳'은 꽃의 뜻으로도 쓰이나, '장소'를 뜻하기도 한다. '장산곶'에서의 '곶'처럼 육지로서, 바다에 튀어나온 부분을 기리키기도 하는 것이다. 근원적으로 땅은 만물이 나서, 자라고, 죽고, 다시 나는 죽살이의 본고장이요, 영원한 서식처이다 땅이 없는 국가와 민족을 생각헤 볼 수 있겠는가. 땅은 성으로 보아 분명 여성으로 상징된다. 마찬가지로 꽃은 열대, 즉 생명을 만들어 내는 공간이니 그 모양과 느낌이 다르긴 하지만 그 본성은 생산을 뜻하는 아주 주요한 부분이라는 점에서 모두가 같지 않은가. 원래 땅(뭍)은 바다 위로 솟아을라 존재하는 공간이다. 지구를 이루는 성분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물이나 뭍이나 같지만, 인식의 대상으로서는 육지는 분명 물 위에 솟아오른 물체이다. 이 가운데에서도 눈으로 보아 뒤어나온 곳을 '곳. 곶>꽃'이라 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꽃이 지닌 생명의 신비는 마침내 모든 종교에서 꽃이 생명과 부활의 상징으로 쓰이게 한다. 대부분의 무녀들이 꽃을 쓰고, 불가에서는 연꽃으로 상징을 삼으며, 모든 나라가 나라꽃을 가리어 정한다.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보아 화랑의 시초였던 원화(源花)도 꽃의 속성을 상징적으로 쓴 것이라고 보이며, 부여의 유화(柳花)도, <헌화가>의 수로부인도 모두가 꽃과 관계를 지어 상징적으로 쓰고 있음에 틀림없다. '곧'의 경우도 장소를 가리키는데, '곳(곶)/곧/골'로 자음의 바씸을 따라 이루어지는, 두드러진 장소를 의미하는 낱말의 데에 포함된다. '골'은 여러 가지 꼴과 뜻이 있지만, 특히 산골짜기가 대롱과 같이 긴 굴의 모양을 한 장소를 이른다. 굴의 변형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꽃도 안으로는 생명이 만들어지는 조그만 하나의 신비스런 굴이다. 참으로 꽃은 성스러운 삶이 만들어지는 생명의 고향이다. 사람의 목숨이나 풀꽃의 목숨이나 목숨은 다르지 않다 존재하는 방식이나 모양이 다를 뿐, 우리 사람도 짐승들이나 마찬가지로, 따지고 보면 어미의 태에서 태 어나, 자궁이라는 굴 속에서 자라나서, 이 세상에 나온다. 이를테 면 합일의 공간이 굴이요, 그 굴에서 나오면 분리가 되는 것이다. 요약건대 식물이 퍼져나아가는 생명의 굴이 골이라면, 동물이 싹터 생식하는 골이 바로 굴이라고나 할까. 굴은 말의 분화형태로 보아 '궂/굳/굴/궂' 같은 음성모음 계열의 낱말과 '깃-긷-길' 계와 같은 증성모음 계열로 발달해 왔다. 아울러 덧붙여 둘 것은 우리 얼굴의 코도 '골'에서 멀지 많은 낱말이라는 것이다. 중세어로는 '고((초두해), 20-17)' 인데 히ㅇ(ㅎ)종성체언으로서 '곳/곧/골' 과 서로 연관되기 때문이다. 즉 코는 얼굴에서 가장 두드러져 솟아 있는 부분으로, 속은 굴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코를 곤다고 한다. 이때의 '골다' 라는 말은 코가 바로 대롱과 같이 울림성이 좋은 기관임을 단적으로 드러낸 경우라고 하겠다. 우리말의 발달이란 관점에서 볼 때, 근대국어 이후로 오면서 어두자음의 경음화와 어말자음의 격음화를 거쳐 '곶'이 '꽃'으로 적어 쓰이게 되 었다. 그러면서 '꽃[花].곧[卽. 直]/곳[所]/골'은 각기 볍개의 낱말로 굳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제 각 단어를 중심으로 하는 낱말의 떼를 현대국어에서 더듬어 보기로 한다. '꿎/곧/곳/골'의 낱말겨레 1) 꽃-꽃가루, 꽃구경, 꽂(용수 안에 괸 술국), 꽃놀이, 꽃다지(가지, 오이, 호박 따위의 맨 처음 달린 열매). 꽃말, 꽃무늬, 꽃받침, 꽃샘, 진달래꽃, 연꽃, 나리꽃/꼬장(꽃의 제주 방언), 꼬지 (꽃의 함경 방언), 꼬치 (꽃의 함남 풍산 방언), 꼿(꽃의 경상. 강원. 전라. 제주 방언) 등 2) 곧- 곧, 곧다, 곧날대패, 곧은결, 곧은금, 곧은불림(자백), 곧이, 곧잘, 곧장, 곧추, 곧은바닥(수직으로 된 광산 구덩이), 곧은창자(직장) 등 3) 곳- 곳, 곳곳, 꼿꼿하다 등 4) 골-골골샅샅, 골골이, 골다, 골고루(골골十-우>골고루), 골무, 골목, 골마루(안방이나 건넌방에 딸린 골방 모양의 좁은 마루)/세모꼴, 꼴값 등. '꽃'의 경우 방언에 따라서는 '꼬지'와 같이 파찰음이 유기음화 되지 않은 중간 단계에 머무르고 있는 경우도 있음은 흥미롭다. 꽃이름 중에서 '-꽃'파 같이 꽃이 뒤에 붙어 꽃 이름을 나타내는 경우는 아주 생산적이다. 보는 이에 따라서 풀이가 다르긴 하지만 <헌화가>에서의 꽃은 진달래로 판단된다(삼유, 권 2). 중세어 자묘나 경북 경산지역의 방언을 보면, '진달배>진달외>진달래'로 되었을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무슨 연유로든지 꽃이 위에 든 <헌화가>와 같은 문학작품이나 종교설화에 등장하는 건 이미 오래다. 한마디로 '꽃/곧/곳/골'의 낱말겨레들이 '두드러져 솟음'을 의미특성으로 하는 데에서 분화 발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나무나 풀의 꽃은 다른 어느 부분보다도 횔씬 돋보인다. 꽃이 핀디고 하거니와 사람들은 피는 꽃을 불이 피는 것과 같은 사물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쓰는 듯하다. 환하기에 차이는 있더라도 꽃이 핀 모습은 불이 활활 타오르는 상징을 드러낸다 불은 모든 것을 태운다. 꽃은, 나무가 타 연기 냄새를 내듯, 자신을 불사름으로써 향기를 내어 벌과 나비의 눈길을 모은다. 모든 일에서 이러한 자기연소와자기회생이 없는 변신이란 거의 불가능한 법. 진통과 시련을 겪고 난 뒤에 거룩한 삶의 장이 열리는 것 이니, 불이 타는 원리에 따라 에너지의 변동이 일어난다. 연소현상은 생명을 이어가는 값진 사물의 근본이고, 신진대사를 따라 생물이 자라는 것도 불사름의 원리가 있음으로써 가능한 현상이다. 연소현상이 급하면 폭발과 파괴가 일어나지만, 느리면 동물의 소화작용과 같이 적절한 생명현상을 이루어 나아간다. 이런 연소현상의 한 헝태로 아름다운 많은 꽃송이들은 쉬임 없이 피어서는 이내 지고 만다. 산다는 것 자체가 꽃이 피뜻 자신을 불살라 태움으로써 활동의 근거를 마련하는 과정이지 않은가. 3-4. 뿌리와 생식 뿌리가 깊은 나무는 심한 바람이 불고 흥수가 나도 혼들림 없이 제 철에 꽃을 피워 퐁성한 열매를 맺는다. 어떤 사물이나 사실의 바탕이 튼튼하면 웬만한 시련이 다가오더라도 본래의 꿈을 이룬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용비어천가), 제 2장에서는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 꺾이지 않아 꽃도 좋고 열매가 많이 열리며, 샘이 깊은 물은 가물에도 그치지 않아 냇물이 되어 깊은 바다에 이른다'고 하였다. 뿌리는 땅속에서 식물체를 떠받들고, 수분과 양분을 빨아올리는 중요한 부분이다. 뿌리는 고등한 식물에게만 있는데, 그 종류는 여러 갈래다. 땅속에 내리는 것이 있는가 하면, 물 속에 내리는 뿌리도 있다. 더러는 대기 중에서 활동하며 호흡을 맡는 것도 있으며. 탄소동화작용에 따른 영양을 저장하는 뿌리도 있다. 옛말에서 뿌리는 '불휘 (용가1)' 의 계열로 드러나기도 하고, '부리 ((두해)). 의 계열로 표기되기도 한다. 하지만 뒤로 오면서 '불휘.는 뿌리[根]로 분화되었고, '부리'는 새의 주둥이 또는 산이나 꽃의 한 부분을 뜻하는 말로 분화되어 삽이고 있다. 나타내고 있는 속성으로 보아 부리나 뿌리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이 둘을 한 단어족으로 보는데 무리는 없을 듯하다. 나무의 뿌리와 새나 병의 주등이 부분을 틸펴 보자. 사물의 끝 부분에서 무엇인가 처음으로 받아들이고 맞이하며 점차 파고드는 성질이 서로 같다고 할 것이다.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이 자신의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서 영양이 될 만한 것을 섭취써야 한다는 점에서는 식물과 동물이 서로 다를 바 없다. 영양을 섭꺼하는 가장 앞선 부분이란 점에서 뿌리의 기능은 제일차적 이다. '먹는 것이 하늘'이라고 모든 생물은 먹어야 사니까. '뿌리가 든든해야 잎이 무성하다(擇固葉茂)'고 하였거니와 뿌리는 삶의 원천 또는 밑으로도 이해되기도 한다. 제 구실을 하는 뿌리를 가진 나무는 무성한 잎과 꽃, 그리고 열매를 맺어, 동식물의 보금자리인 그윽한 숲을 이룬다. '숲'이 거룩한 삶의 고향으로 상징되는 것은 단군신화를 비롯한 많은 신화에서 드러나거니와, 이는 우리들의 문화가 나무와 풀을 기초로 하여 이루어진다는 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집이라는 말도 그렇다. 집'은 짐'이란 형태에서 어말 자음이 파열음으로 바뀌어 이루어진 말인데, 짐 '은 먹는 김, 혹은 논이나 밭의 풀인 '김'이 구개음화하여 이루어진 형태다. 논밭의 풀을 매는 것을 김매다(경상. 전라. 평안), 기심매다(경북 안동. 군위. 예천. 봉화), 지심매다(경북 울진. 영양. 청송. 대구 성주/전남 강진. 완도. 구례)'로 표현한다. 풀을 뜻하는 '김'은, '기심/지심'으로 쓰이는 방언형으로 미루어. 기심 (>지심)에서 비롯한 말로 보이며, 이때 '기심(>지심)' 은 새깃이라 할 때의 '깃 (>짓)'에 걸맞은 말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니까 '집'이 김 (기 심/깃)' 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을 받아들인다면, ((삼국지), 나 <진서>의 기록대로 선조들이 나무 위나, 풀로 만든 집에서 살았으며 의복도 풀이나 나무껍질로 해 입고 살았으리라는 언어적 인 추리가 가능하다. 떨어지거나 해진 부분에 조각을 대거나 또는 그대로 궤매는 동작을 닙는다' 고 한다. '깁다'의 '깁 -'은 옷감을 뜻하는 말로서, 풀을 뜻하는 '김>깁'에서 비롯한다. 흔히 남근(男根)을 숭배하는 습속이 있다고 한다. 종족에 따라서는 남자의 성에 장식을 하여 거리를 활보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재미있는 일이라고 하겠다. 남자의 뿌리에 대한 숭배는 남자로 상징되는 나무를 숭배하는 습속으로 이어진다. 이미 유명한 신화학자 프레이저의 <황금가지 Golden bought>에서도 풀이해 놓았지만 나무숭배는 상당한 분포를 보이며 고대인 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관습이다. 중국에서는 산소 위에 측백이나 소나무를 심어, 그것을 죽은 사람의 넋으로 생각하는 관습이 있었고, 몽고인의 졍우에는 우주산(宇宙山) 중심에 있는 나무에 신들이 그들의 말을 매어 둔다고 믿었다. 그들은 또한 자무부 라는 나무가 그 뿌리를 수멜산의 밑둥에까지 내믹고 산꼭대기를 덮고 있다고 믿었다는 기록이 있다. '신들은 나무의 열매를 먹고 살며, 악마들은 산골짜기에 숨어서 그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고 엘리아데는 (샤머니즘)에서 기륵하고 있다. (고조선기)에는 신(神)나무가 등장하고 그 신나무의 거리롤 신시(神市)라고 불렀다고 하는 기륵이 있다. 그 뒤에 와서 옥저는 '와지'라고 불렸는데, 이는 '수풀'을 뜻하였다. 신라의 경우도 시립(始林)이라 하였으니, 나무는 신성한 존재로서의 상징성을 갖고 있음을 옛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나무가 생명의 상징이라면, 그 생명은 하늘로부터 신이 주신 것이니 그 나무는 신을 드러내는 이정표 구실을 하였다고 할 것이다. 신나무가 서 있는 지역을 '소도'라 하여 감히 범할 수 었는 거룩한 성소(聖所)가 되었으니. 나무는 겨레의 뿌리 노릇을 톡톡히 한 셈이다. 그 뿌리에서 가지가 번어 하늘의 백성은 번식을 하게 되고 소담스러운 열매를 맺어 후일을 기약하게 되었을 것이다. 뿌리는 지역에 따라서 '뿌래기 (층청), 뿌랙지 (경상), 뿌랭기 (전라), 뿌렁거지 (강원), 뿌렁구(전라), 뿌레기 (경상 충청. 강원), 뿌팽이 (전라. 경상. 충청)'와 같은 여러 형태롤 분화되어 쓰이고 있다. 사람들은 남자의 뿌리를 '블알/불'이라고 하며. 고구마나 감자의 뿌리로 비유하기도 한다. '블알'의 '블'은 타오르는 불의 뜻으로 보인다. 불은 생성과 창조의 원천이니, 남자의 뿌리가 가지는 기능과 서로 통하는 점이 있지 않을까. 쏠데없는 믈건을 비유해서 '블 없는 화로, 딸 없는 사위'라고 한다. 생명의 뿌리로서의 불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의식 속에 뿌리내려 쉬임 없이 언어적 상상력을 충동시키며 가지를 벋고 있다. 3-5. 움과 구멍 겉으로 보이는 외양은 별로 좋지 않으나 그 내용에서는 흘륭한 점이 있을 때 '움 안의 간장' 흑은 '투가리보다 장맛'이라고 한다. 움 안은 우중충하지만 그 안에는 중요한 조미료의 하나인 간장이 있다는 것이요, 투가리는 별 볼일 없으나 끓인 장맛은 그럴싸하다는 것이다. 땅을 파고 그 위를 거적으로 덮고 다시 그 위를 흙으로 덮어 겨울의 채소나 화초를 두는 데를 '움' 이라 하며, 베어 낸 나무의 뿌리에서 나온 싹도 '움'이라고 한다 어두운 굴과 같은 장소에 넣어 둔 채소에서 싹이 돋는 것이나 나무의 뿌리에서 싹이 터 나오는 것도 '움이 튼다'고 한다 중심을 이루는 의미가 주변적인 것으로 전이되어 간 예라 할 것이다. 움은 또 다른 굴의 변형으로, 생 산적이고 여성적인 정감을 불러 일으킨다. 웅녀도 움 속에서 사람의 몸을 입었다 함은 대단히 암시적이다. '우물' 이라는 말도 '움의 물'에서 비롯한 것으로, 어떤 삶의 본거지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지방에 따라서는 '움물(경기. 강원. 층청. 경기 황해 등)'이라고도 하며, '웅굴(경북 안동 대구 등)'이라고도 한다. 가도가도 끝없는 사막의 길에서 움물이란 평안이 깃드는 안식처요, 보금자리요, 희망인 것이다. 그 움물에 마시는 물이 없을 때 거기엔 오로지 이리저리 물을 찾아 헤매이는 무리가 있을 따름이다. '움'과 관련하여 한 무리를 이루는 꼴에는 '움나무, 움돋이(초목의 베어 낸 자리에서 다시 돈아나온 움), 움딸(시집간 딸이 죽은 뒤에 다시 장가를 든 사위의 후실), 움막살이, 움벼(가을에 베어낸 그루에서 움이 나서 자란 벼), 움뽕(봄에 한번 뽕잎을 딴 뽕나무에 다시 돋아 난 뽕잎), 움실대다, 움씨 (뿌린 씨가 잘 싹트지 않을 때, 덧뿌리는 씨), 움잎(움에서 돋아난 잎), 움직이다, 우묵하다, 우묵주묵(군데군데 크고 작게 우묵하게 들어간 모양), 우믈거리다, 우물곁, 우물지다(뺨에 보조개가 생기다), 우물질(우물 물을 퍼 내는 일)'과 같은 겨레붙이들이 있다. 움과 물은 아주 가까운 관계로 인식되어 온 것 같다. 우물에 따라붙는 속담이나 성구들이 상당수 있음도 우연한 일은 아닌 듯싶다. 예 컨대, '우물길에서 반살기 받는다(-뜻밖의 음식}, 우물 들고 마시겠다, 우물에 가서 숭능 찾겠다(-급한 성미), 우물 안 개구리(세상 물정을 모름), 우물 옆에서 목말라 죽는다(-꾀가 었고 고지식함), 우물을 파도 한 우물 파라(-한 가지 일에 몰두하라), 우물가에 애 보낸 것 같다(미숙하여 마음이 놓이지 않음)' 둥의 표현이 있다. 물이 있는 곳에서 곧 삶이 시작되고 발전되기 때문인가. 이름하여 생명수라는 말도 있으니. 움물의 형태는 구멍이다. '움물'은 '움물>우물'로 미음(ㅁ)이 동음생략된 것이다. 우물에서는 이웃 사람들이 모이고, 거기에서 물올 길어다 목을 축이고 밥을 짓는다. 작은 오아시스라고 할 수 잇올까. 움에 성 (性)이 있다면 여성일 것이요, 소리로는 음성모음계열이 며, 우면(羽面)조에 해당하는 겨울의 상징을 자아낸다고 할 것이다. 밤이면 하늘에 뜨는 별이 우물을 비추고 기러기는 철을 따라 하늘을 난다. 애절한 사연이 담긴 선녀와 나무꾼의 이야기도 우물에서 돋은 무지개로 끝이 난다. 어린이의 우물은 어머니의 품이요, 젖가슴이 아니겠는가. 여성적인 것에 의하여 인간의 구원이 있다고 괴테 가 지적하였듯이, 물은 목숨살이를 가능하게 하는 젖줄이고 삶의 고향인 것이다. 단군임금의 어머니 신인 '고마' 가 바로 물의 신이요, 어두운 공간을 떠돌며 신비의 생명력을 북돋우는 지모신이었음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감사하다는 뜻으로 '고맙다'라는 말을 쓰는데, 이때의 '고마'가 바로 물신이며 어머니 신인 것이다. 고대인의 주생할이 굴살이였음을 돌이켜 볼 때 움, 곧 구멍은 우리 생할의 오래고 낯익은 공간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모든 생할이 움 안에서 이루어겼다. 필자의 언어 감으로는 '움'의 모음이 바뀌어 엄十이 >어미 '가 되어 어머니로 발달하였으며, 모음이 바뀌어 '암이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즉 '움/엄/암'은 하나의 낱말겨레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샘각된다. 움, 곧 싹이 있는 곳에 아름다운 꽃파 소담스러운 열매를 기약할 수 있으니까 '아이를 업는다'고 할 때의 넙 다'도 '엄'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어말자음이 바뀌어 넘 >엎>업'의 과정을 거친 것이 아닐까 ? 업다'는 등 뒤에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떴어 놓음을 가리킨다. 이는 뱀 '의 방위가 '뒤'라는 것과 깊은 상관성을 보인다. 모음의 대립으로 보아 '아비 (암小-이>아비)' 의 '압'은 넘 '과 대립되는 낱말의 조각이라고 판단 된다. 방위로 보아 아비는 앞인데, 어미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우리의 위대한 어떠니 (엄)은 고마님이시고, 그의 움은 단군이며, 그 가지의 잎과 열매로 이어지는 우리들은 배달의 겨레이니, 겨레는 하나되기를 힘써 '우리'이고자 하는 이상을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
우리말의 상상력 1 - 정호완 3. 풀과 목숨 3-1. 싹과 사이 '싹수가 노랗다'고 한다. 처음에 나오던 싹이 노오랗게 메말리다 이상 자라지 못하므로 기대한 결과가 없음을 드러낸 표헌이다. 한마디로 처음부터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 상태를 이르고 있다. 입버릇처럼 사람들은 '싹 쏠어 버려' 혹은 '싹쏠이'라고한다. 참으로 무서운 정서를 일으키는 말이다. 씨앗으로부터 이제 갓 나온 싹을 쏠어 없앤다면 엄청난 가능성을 모두 앗아 가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씨앗에서 처음 움터 나오는 어린 잎이나 줄기를 '싹'이라고 한다. 새싹은 어린이에 비유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어린이가 지닌 앞으로의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까닭이다. 원형적 인 형태라는 관점에서 볼 때, 싹은 사이를 뜻하는 중세어 '삿/슷 '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서로가 어떤 판계를 가짐으로써 우리는 상호간의 가치를 인정하게 되며, 이에 따라 삶의 조건들을 하나씩 풀어 나아가게 되는 것이 아닌가. 부분의 가치는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올바른 값매기기가 이루어지듯이, 자잘한 삶의 조건들도 혼자가 아닌 서로의 걸림틀 가운데에서 그 지위가 튼튼히 자리를 잡는다. 짐승의 새끼들은 암컷과 수컷 사이에서 태어나며 자라난다. 좀더 미시적으로 자라나는 정황을 보면, 어미의 다리 사이에서 솟아 나와 개체를 드러낸다. 식물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봄이 되어 싹이 트는 걸 보면 잎 사이에서 새순이 돋아 오르고, 뿌리와 뿌리사이에서 새싹이 나온다. 형태의 특징을 보면 '삿'은 기역(ㄱ)특수곡용을 한다. 기역 (ㄱ)곡용 어미가 아예 본래 말에 달라붙어 하나의 꼴로 되면서 꼴바썹이 일어나 싹으로 발전하였으니, 그 과정은 '삿(ㄱ>사>삯>쌍>싹'으로 풀어 볼 수 있다. '삿(?)' 에 접미사 '-이'가 붙으면 새끼가 된다[삿(ㄱ)+-이>삿기>사끼>새 끼>새끼. 오늘에 와서는 식물의 새끼는 '싹'이 되고, 동믈의 싹은 새 끼'로만 드러나게 되었으나 그 말 겨레의 뿌리는 하나라고:하겠다. 형태들이 분화하는 가장 보꾄적인 틀은, 모음이 바뀌거나 음절머리 또는 끝에서 자음이 바뀌거나 점미사가 더 붙는 경우라고 할 것이다. 모음교체의 경우는 양성모음과 음성모음이 대립하는 수가 제일 많고 여기에 증성모음의 계열로까지 발전하는 일이 있는데, 한마디로 간추려 '양성-음성-중성' 형은 가장 체계적인 분화의 틀이라고 하겠다. 먼저 '삿. 샅'을 중심으로 한 분화형태의 말 겨레를 보면, '손삿, 삿갓(대오리나 갈대로 엮어 만든 갓으로서 그 사이에 들어가 볕이나 비를 피한다), 삿갓가마(초상 중에 상제가 타는 가마), 삿갓구름, 삿갓나물, 삿갓반자(천장을 꾸미지 않고 그대로 바른 반자), 삿기낫(오정이 채 안된 낮), 삿쟁이 (새끼), 삿춤(돌이나 벽돌을 쌓을 때 돌과 돌 사이에 양회나 흙을 바르는 일), 삿갓연(내부의 지봉 밑에 천장 없이 보이게 한 서까래)'과 같은 말들이 있음을알 수 있다. 보통 일을 해 주고 그 대가로 받는 몫을 '삯'이라고 한다. 이 말도 '삿(ㄱ)'에서 갈라져 나온 말로, '파>삯'과 같이 받침자음의 앞뒤가 바젼 형태이다. 일한 사람이 일을 시킨 사람에게서 노동의 대가로 받는 것이니 노동가치를 이루어 낸 셈이 된다. 일을 했기때문에, 어떤 물건을 빌려 주었기 때문에 노동과 시설이 새끼를 쳐서 벌어 들인 싹이라고 생각해 봄직하다. 이와 관계있는 말로는 '삯꾼(삯을 받고 일하는 일꾼), 산돈(삯으로 받는 돈), 삯말[세를 주고 빌려 쓰는 말(馬)=, 삯메기 (먹지 않고 품삯만 받고 하는 농삿일), 삯방아(삯을 받고 찧어 주는 방아), 삯일(삯을 받고 하는 일),삯전 (삯돈), 삯팔이(삯을 받고 막일을 하는 품팔이)'와 같은 낱말들이 있다. 곁들여서 플이할 것은 '샅'의 경우다. '삿'은 말음법칙과 같은 소리의식 때문에 '섣'으로도 표기되는데, '삼>샅'과 같이 음절말 자음이 유기음화한 결과로 보인다. 이와 관련된 말 겨레에는 '샅(두 다리가 갈린 사이), 샅바, 샅걸이 (씨름에서 오른발을 상대방의 다리 사이에 넣고 왼다리를 뒤로 뻗치는 것), 샅샅이 (빈틈없이 모조리, 사이사이마다), 샅폭(바지 따위의 샅에 대는 좁다란 헝겊), 사타구니 (샅十아구니>사타구니)'와 같은 말들이 있다. '싹'은 '삿'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는데, 이와 같은 말 겨레에는'싹눈, 싹독(연한 물건을 토막쳐 자르는 모양), 싹수(앞길이 트일 징조), 싹트다'의 형태가 있고, '새끼'와 관련이 있는 말로는 '세끼발가락, 새끼가락(새끼발가락과 새끼손가락의 통칭), 새끼똥구멍(항문 위의 조금 옴폭 들어간 부분), 새끼발돕, 새끼집 (짐승의 자궁), 새끼 치다'와 같은 말이 있다. 짚으로 꼬아 놓은 줄을 새끼라고 하는데 이 말은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 새끼는 두 줄의 짚을 꼬아 만든다는 데 그 실마리가 있을 것 같다. 결국은 두 개의 끈을 꼬아 하나의 또 다른 끈을 만드는 생산성을 바탕으로 하여 '싹-새끼' 로 이어지는 공통의 속성을 드러낸다고 본다. '삿'의 분화형태는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모음이 바뀌거나 자음이 바뀌는 음절구조의 변동을 따라서 말들의 떼를 거느려 가게 된다. 우선 모음이 바뀐 경우 '삿/섯'의 보기를 살피기로 한다.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 사물이 뒤섞여 있는 것을 네 갈리다'라고 한다. '섞-' 은 '삿>파>삽>싹'의 '삯'과 대립되는 형태로 보인다. 모음의 음상(붐理)이란 관점에서 보면 '싹'은 안에서 밖으로 드러나는 밝은 상태이며, '섞'은 사이사이에 끼여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어두운 소리의 상징을 표현하고 있다. 어떤 물건에 다른 물건을 넣어 구별하기 어렵게 만드는 동작을 '섞다'라고 하는바, 기실 이 말도 따지고 보면 사이를 뜻하는 네-' 에 접미사 '-다'가 붙어 이루어진 동사라고 볼 수 있다. 네-'과 상관을 보이는 말의 겨레를 들어 보면, '섞갈리다, 섞다, 섞바꾸다(먼저 것과 다른 것으로 바꿈), 섞 박지 (절인 배추나 무우, 오이를 넓적하게 썰고 고명에 젓국을 넣어 한데 버무린 김치), 섞사귀다(환경이 다른 사람끼리 서로 사귀다), 섞이다, 섞 임월 [混文]'과 같은 말의 떼들이 있다. 이와 함께 섯/섣/설'과 같이 '섯'은 자음이 바뀌면서 또 다른 형태들을 만들어 낸다. '섣'과 걸림을 보이는 말에는 '섣달, 섣달받이(섣달 초순경 함경도 앞바다로 몰려드는 명태의 떼), 섣부르다(솜씨가 어설프고 설다)' 등의 말이 있다. 굳이 년 달'을 풀어 보면, '한해의 마지막과 또 다른 새해가 시작하는 가운데에 끼이는 달'로 설명할 수 있다. 요컨대 '삿/섯'은 사이 공간이나 사이에 끼이는 시간의 의 미자질로 간추릴 수 있다. '설 (초두해), 8-24)' 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새해의 첫 머리' 로, 묵은해와 새해 사이의 경계선 구실을 한다. 그래서인지 중세어 자료를 보면 델'은 년령((초두해), 8-24)' 을 뜻하기도 하였다. 현대국어로 오면서 살과 설은 별개의 형태로 나뉘어 쓰이게 되었다. 그럼 피부를 뜻하는 '살' 은 어떻게 볼 것인가. 피부와 뼈 사이에 있는 근육조직 모두를 통틀어 '살'이라고 한다 이는 '삿'의 분화형태로서 두 물체 사이에 생겨난 생성물을 뜻하는 낱말의 겨레라고 판단된다. '삿/섯'계와 합께 모음이 바뀌어 사이를 뜻하는 말의 계열로는, 중성모음으로 바뀌어 쓰이는 '슷(숯)/숟/슬/(숯)' 계의 말 겨레가 있다. '슷'계에는 '슷다({(가례해), 1-25), 슷봇다(셋어 흠치다 ;(석보), 11-25), 슷이다(시끄럽다 ; {(월석), 7-19), 숫이다(시끄럽다 ;(삼강)열 14)' 등이 있고, '슬`계로는 '슬다(알을 낳다 ; ((한청,, 446d), 쏠다(송강,, 1-9)' 등이 있다. '숫'계에 드는 형태로는 '숫다(씻다 ; ((중두해,, 5-22), 숫돌({(동문,, 상 48), 숫등걸 ((유씨명), 5火), 숫불(((동문,, 상 63), 숯((계축)' 과 같은 낱말겨레가 보인다. '슬'과 관련하여 발달한 말에 ㅅ다((용가, 91), 슬프다((초두해:,8-21)'가 있다. 유추하건대, '싫어함'은 인간관계에서 상대를 서로 꺼려하는 일이요, '슬퍼함`은 싫은 상황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상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한편 '슷(숯)'의 경우는 어떠한가. 우선 숯은 나무를 불에 태우되 완전하게 재간 된 것이 아닌 중간 상태의 가연물질이란 특성을 갖는다. 숯은 '숫' 에서 파찰음화하여 발달한 형태로 보면 되고, '숫~숯'으로 넘나들며 쓰이다가 뒤로 오면서 '숯'으로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숫(숯)'은 방언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숙껑 (경북 영천), 수깡(경북 문경), 수꿍(경북 울진 대구), 숫겅 (경북 영천 포항. 영덕. 의성. 안동. 영주), 숫기(함경도 일원), 쑥(평북 영변. 희천. 정주. 선천. 강계. 자성. 후창/전북 순창)'과 같은 변이형들이 있다. 이들은 '숫'이 '삿(ㄱ)'과 마찬가지로 기역(ㄱ)곡용을 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형태들이다 '숫'이 '삿(ㄱ)' 과 같은 뜻으로 발달하여 오늘날에는 접두사로 쓰이는 경우가 왕왕 있다. 예 컨대, '숫총각, 숫색시 (남자와의 교접이 없는 여자), 숫접다(순박한 모양-새싹과 같이 세상물정을 모르니까), 숫하다(순박하다)'와 같은 말의 겨레가 있다. '숫' 은 '술'계의 말로도 발달하여 쓰이는데, 음절말의 받침이 흘림소리 리을 (ㄹ)로 바뀌어서 가지덛음을 한 것이다. '술'계에 드는 형태로서는 '술술(물. 가루 등이 잇대어 새거나 흘러 나오는 모양), 술(장식용 실/숟가락 ; (증두해,, 6-2), 술렁거리다 (시끄럽다)'와 같은 꼴이 있다. 음상으로 보아 '술'계는 흐르는 모양을 상징하였으며, '숟가락'의 뜻으로 쓰이는 것은 음식 사이에 꽂아 먹는 도구로서의 기능을 강조한 것으로 판단된다. 모음이 바뀌어 발달한 '삿'계의 또 다른 한 계열은 '실'계의 낱말 겨레로 보인다. 그러니까 '슷>싯/싣/실'과 같이 전설모음으로 되면서 형태가 갈라져 나아가게 된 것이다. 이들 가운데에서 가장 쉽게 실례를 풀이할 수 있는 것은, '싯/실'의 낱말겨레라고 할 수 있다 '싯-' 계로서는 싯다(능엄 9-9), 씻다<동문> 하 55), 씻기다, 씻부시다(그릇 따위를 씻어 깨끗이 하다), 씻김굿' 등이 있고..실_'계로는 실고추, 실구름, 실꾸리, 실국수/질경이, 질기다, 질금거리다' 등의 형태가 있다. '질-'계를 '실' 과 관계지은 것은 파찰음화에 따라서 발달한 '실'의 의미자질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 앞에서는 모음이나 자음이 바뀌어 이루어진 형태들에 대하여 알아 보았다. 이제 음운이 덧붙어 만들어지는 형태들을 간추려 살펴보면 '삿'계의 변이형에 접미사 '-다, 이'가 붙어 이루어지는 것들이 증심을 이룬다. '-다'에 대하여는 '섞다. 싯다. 슷다'와 같은 예들을 보았으므로 줄인다. '-이'계의 낱말에는 '사이'. 서로.서리' 등이 있다. 사이는 '삿十-이>사이~새'로 쓰였으니, 공간이든 시간이든 틈을 뜻하는 말이다. 한편 '서로'는 '설 十-오>서로'와같이 발달하여 오늘에 이른 것으로 생각된다. 이 모양 저 모양으로 걸리는 사물들의 관계가 복잡하듯이 '사이'를 드러내는 '삿/섯'의 말겨레들은 폭 넓은 분포를 보이고 있다. 우리들의 인식이란 언제나 관계 속에서 그 값이 결정되기 때 문에, 이를 되비추는 말의 갈래가 여러 모양으로 펴 나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3-2 풀과 목숨 '풀베기 싫어하는 놈이 단 수만 센다' 고 한다. 베라는 풀은 베지 않고 얼마 베지도 않은 풀단의 수만을 헤아림을 이른다. 하는 일에 싫증이 나서 해 놓은 일의 성파만 만지작거리면서 빈등거림을 꼬집는 말이다. 초본과의 식물에 속하는 모든 것을 혼히 '풀'이라고 한다. 모름지기 살아 있는 생물은 물과 함께 풀이나 나무와 같은 녹색식물이 있어야만 지속적으로 삶을 누릴 수 있다. 물과 풀, 그리고 불(태양)이 있을 때, 비로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자연의 세계는 언어 이전에 존재하는 잣으로, 자연을 어떤 방법으로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언어사고의 장(場)이 달라진 다. 이는 다시 음성부호인 소리의 체계로 되비치어, 그 형식들은 형식들 나름으로 굴절하여 혹은 사라져 가기도 하며 혹은 되살아나기도 하며, 흑은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풀의 경우, 우리 배 달겨레에게는 어떤 자연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언어형식으로 투영되어 분화. 발달하였을까. 일반적으로 자연물에 대한 인식은 그 모양이나 성질, 크기 등에서 비롯되는 것이 있고, 빛깔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도 있다. 특히 빛깔로써 대상을 가리는 것은 시각상의 효과로 보아 가장 두드러진 인식의 실용가치를 더하여 준다 이른바 모든 감각은 시각적인 전이가 아주 자연스레 일어난다. 물과 불이 없는 세상이란 생명의 존재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요컨대 물과 불은 삶을 이어가는 가장 윈초적인 요소이며, 그 색깔은 자연물 인식의 기본 바탕이 됨을 부정할 수 없다. 그 중에서도 불(태양)은 빛의 원천이니 빛나는 모습에 관계없이 태양은 위대한 가능성이요, 희망이다. 우리는 '푸른 바다' 라고 하여 푸른색으로써 물을 알아차린다. 그럼 물과 풀의 푸르름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풀의 빛은 불의 빛으로 보이는 금빛의 주황, 그리고 물의 푸른색이 서로 어울려 이루어진 자연의 위대한 징표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생명의 색깔이라고 하겠다 땅 속에 뿌리를 내려 물과의 관계를 통하여 빨아들인 영양을 태양열로 광합성작용을 일으켜 사는 것이 식물이니 당연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시험 삼아 필자는 색의 배합과정을 살펴 본 일이 있다. 블의 색으로 보이는 주황과 물의 푸른색을 섞어 보았더니 초목의 푸른색이 됨을 확인하였다. 자연현상 가운데에서 벚의 갈래, 즉 빛깔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무지개가 아닌가 싶다. 태양이 없는 믈체의 빛깔은 검은색이다. 어두운 밤에 바라다 보이는 바다의 빛깔은 바로 이러한 방증이 될 수 있다. 솟아 오르는 밝은 태양이 있으매 무지개 및깔의 자연계는 더욱 멎나 제 모습을 드러내 살이 숨쉬게 된다. '빛칼' 이란 말도 따지고 보면 '빛의 갈래'란 뜻인바, 그 빛이 서로 다름으로써 밝고 어두운 공간과 대상을 확연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초목의 푸른 빛깔은 생명의 원천 같은 것이어서 물과 더불어 하루도 없어서는 안 될 주요한 먹거리로서의 풀의 의미를 더하여 준다. 식물이 없이 동물은 살아갈 길이 없으니까. 먹이의 사슬에서도 풀이되는 바와 같이 그 비롯됨은 푸른 녹색식물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소리의 상징체계로 본 '플'의 푸르름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국어사적으로 보아 유기음 피읖(ㅍ)은 푸기음 미음(ㅁ)과 비읍(ㅂ)보다 뒤에 발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물과 불의 빛깔이 먼저 언어에 투영되고 그 뒤에 '풀'의 빛깔이 인식됨으로써 '물/불/풀'의 자음체계에 맞는 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풀' 은 증세어에 '플(월석), 9-23)' 로 나타나며 그 변이형에 '풋(중두해 17-57)' 이 보이기도 한다 '플'에서 모음이 바뀌거나 접미어가 붙어 다양한 낱말의 겨레를 이룬다. 이를테면 '푸르-/퍼떻-/파랗-' 이 그러한 분화유형에 드는 형태들이다. '퍼 렇-'에 드는 말로서는, 퍼렇다, 퍼렁, 퍼렁이, 퍼르스름하다, 퍼르죽죽하다, 퍼릇퍼릇' 등이 있고 '푸르-'계에 드는 말로는, '푸르다, 푸렁(푸른 물감이나 및깔), 푸르대콩(열매의 껍질과 속살이 다 푸른 콩), 푸르디푸르다, 푸르락누르락, 푸르무레하다, 푸르죽죽하다, 푸르퉁퉁하다, 푸른곰광이, 푸릇푸릇'과 같은 낱말의 겨레들이 있다. 경우에 따라서 '풀'은 그 받침이 바뀌거나 탈락하여 일정한 말을 만들어 가기도 한다. '풋-/푸-' 따위가 그것으로, 주로 접두사로 쓰이는 일이 많다. 예컨대 '푸새, 푸서리 (잡풀이 무성한 땅), 푸성=, 푸대접 (~고기대접)/풋나기 (-이제 갓 돋은 풀에 비유한 말), 풋감, 풋걸음, 풋머리 (햇것이나 맏물이 나오는 무렵), 풋바심 (채 익기 전의 벼나 보리를 떠는 것), 풋밤, 풋술(맛도 모르고 마시는 술), 풋윷(서투른 윷 솜씨), 풋잠, 풋장(잡목의 가지를 푸른 채로 말린 것). 풋콩' 등과 같은 형태가 있다. 옷에 풀을 먹인다고 할 때, 혹은 '풀 먹은 개 나무라듯 한다`고 할 때의 '풀'과, 앞에서 풀이한 초목으로서의 '풀'과는 어떠한 유연성'이 있을까. 둘 다 먹이의 감이 된다는 점에서 그 효용성이 다르지 않다고 본다. 물질의 구성요소로 보더라도 그러하다. 푸른 풀이 물과 불(태양)의 빛이 합성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면, 옷에 입히는 풀은 밀가루 등에 물을 타서 불에 끓여서 만드는 것으도 서로 통하는 하나의 흐름을 보인다. 이렇게 '액체에 다른 액체나 가루 같은 것'을 타는 것을 '풀다' 라고 하는데, 이 말도 원한을 씻어 없애듯이 응어리진 것 또는 얻고자 하는 정도의 감으로 다시 만들어 내는 '만들어 냄'의 특징을 보인다. 풀이 있으므로 다른 생명들이 식량과 같은 삶의 중요한 문제를 헤결하여 살아가므로 그러한 풀의 생산성을 중심으로 풀의 뜻을 이해하면 좋을 듯하다. 물과 불과 풀을 소리 상징으로 보면, 물이 가장 부드럽고 불은 두 입술이 닿았다가 터지는 파열의 느낌을 환기한다. 한편 풀은 완전한 유기성 히웅 (ㅎ)이 첨가되어 있는 거센소리의 상징을 불러일으킨다. 아름답고 그윽한 꽃내음을 바람에 날리는 풀꽃의 일생을 생각해 보라. 울긋불긋한 여러 빛깔의 씨 앗에서 움이 돋고 잎이 피어 푸른 빛의 삶이 하늘과 땅 사이에 너울댄다. 그 고운 꽃은 타오르는 불처럼 피어나다가 때가 이르면 다시 씨앗의 상태로 돌아가 흙에 묻힌다. 물과 불은 어울려 푸른 산과 들에 엄청난` 목숨살이를.길러내고 삶과 죽음이라는 생명현상의 연금술을 꽃피운다. 때로는 풀꽃으로, 목련으로, 호랑이로, 양으로, 사람으로의 죽살이를 빚어 내어 이른바 삶과 죽음의 교향악을 연주한다. 그것은 무지개의 빛을 모두 어울리게 흐트러 놓은 것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아마 횐색으로 보일 것이다. 빛을 모두 어우르면 희게 보이니까. 살아 있음도 죽어 있음도, 물과 불을 다스리되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리어 이루어지나니,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은 태양(빛)의 밝음을 그리워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