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2. 태양숭배와 곰신앙 어머니와 곰신앙 있으렴 부디 갈다 아니 가든 못할쏘냐 무단히 네 싫더냐 남의 말을 들었는다 그래도 하 애닳구나 가는 뜻을 일러라 세상에서 어머니처럼 그립고 정겨운 말이 그리 많이 있을까. 우리 삶의 말미암음이요, 고향이며 가람이 곧 어머니이다. 가람이 흘러 뭇 목숨을 살리듯이 우린 그 품에서 태어나 삶을 누린다. 위의 노래는 조선조의 성종 임금이 유호인(兪好仁)의 귀향을 말리는 가락을 읊고 있다. 늙으신 어머니를 받들어 모시기 위하여 선비는 벼슬을 내 놓고 고향마을인 선산(善山)으로 가야만 한다. 마음으로 가까운 이들의 헤어지기 서운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이나 그리움은 말로 드러내기 이전의 그 무엇이다. 나를 낳아 오늘이 있게 한 임이야말로 내 목숨의 보금자리요, 거룩한 성모가 아닌가. 저승으로 가신 어머니를 그리고 아쉬워 하는 애틋한 마음이 없는 이가 누구일까. 해서 돌아가신 날이 되면 영혼 앞에 흐느끼며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샘물처럼 솟구치는 울음을 멈출 길이 없음은 누구 혼자만의 정서는 아닐 것이다. 자기를 낳은 여성 혹은 아들 딸을 둔 여성을 자식에 대한 부름말 또는 가리킴말로 쓰는 게 어머니이다. 어머니의 사랑과 고마움을 기리기 위하여 매년 5월 8일을 어버이날로 고쳐 부르게 되었던 터. 가람이 있으매 샘이 있고 나무가 있을진대 그 뿌리가 있다. 우리말 '어머니'의 말미암음은 무엇인가. 살피건대 고조선 시대 단군의 어머니는 곰(고마)부인 곧 웅녀(熊女)였으니 그게 사실이라면 곰(혹은 고마)과 어머니와는 무슨 걸림이 없는걸까. 그 언어적 질서는 어떻게 풀이 할 수 있을 것인가. 말이란 겨레들의 얼과 이로 빚어지는 문화를 드러낸 소리상징이다. 문화는 사회성과 역사성을 기본 틀로 한다. 소리 상징에 깃들이는 정서와 상징은 사람을 언어 사회 역사적인 존재로서의 자리를 굳건하게 만들어 준다. 시대와 사회를 따라 말에 되비치는 존재와 인식은 다시 그 본래의 존재와 인식이 사람의 생각속에서 재구성된다. 이른바 언어적인 중간세계가 만들어지며 여기서 말의 차별성이 드러난다. 같은 능금이라도 같은 머루 다래를 놓고도 나라마다 종족에 따라서 다른 소리로 말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간추리건대 문화를 삶의 전체적인 모습으로 풀이하거니와 말은 문화를 되비친다. 글쓴이는 이를 말의 문화투영이라 한다. 예를 들면 산속의 '절'이란 말의 경우 그 말이 쓰인 때부터 이미 불교문화의 존재가 옮겨왔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지 않은가. 일본에서 아직도 절(寺)을 '데라'라고 한다. 하면 우리말의 절은 구개음화를 겪고 파찰음소가 자리 잡은 이후에 널리 쓰였음을 알아 차리기에 어렵지 않다. 말은 소리로 이루어 지는 약속이어서 어느 개인이 마음대로 고칠 수가 없다. 겨레들의 말에는 오랜 시간을 두고 이룩된 사회와 역사가 갈무리되어 푸른 강물처럼 넘쳐 흐른다. 누구에겐가 은혜를 입어 마음이 뜨겁고 즐거운 상태를 '고맙다'고 한다. 이 말을 더 잘게 쪼개 보면 이름씨 고마(용비어천가3.15熊)와 씨끝 '-ㅂ다(如)'로 나누어 진다. 고마는 용비어천가에서 볼 수 있듯 오늘날 '곰'의 또 다른 말이다. 이를 바탕으로 한 '고맙다'의 풀이는 '당신의 은혜가 고마의 은혜와 같다'와 같이 할 수 있다. 이 풀이는 다시 바뀌어 '당신은 고마와 같다'로 다시 '고맙다'로 바뀌어 쓰인 것으로 보인다. 하면 '고마'란 무엇이고 앞에서 이른 역사성이나 사회성은 어떤 것인지. 고마(熊)는 끝소리가 줄면 곰이 된다. 다름 아닌 단군신화의 웅녀 - 곰부인이요, 단군의 어머니란 데에 그 터를 대일 수 있다. 부족의 머리이자 제사장이던 단군은 분명 조상신이자 어머니신인 곰(고마)부인에게 경배를 드려 제사를 모셨음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지금도 돌아가신 어버이에게 제사를 모시나니 하물며 제정일치 시대야 말해 무엇하리오. 오늘날의 한자 자전격인 중세국어 시기에 신증유합(新增類合)이란 자료를 보면 고마는 경건하게 흠모해 마지 않을 속성을 보이고 있다(고마敬고마虔고마欽). 본디 '고맙다'는 중세어에서 '존귀하다 높이다 아끼다'의 뜻으로 쓰였다(명종판<소학언해>등). 곰(고마)은 조상신이요 영혼이다. 그저 단순하게 곰(고마)을 짐승으로만 보면 그뿐이겠으나 곰이 겨레들의 조상신으로 믿고 바라는 수조신앙(獸祖信仰 totemism)의 대상이 되면 그 의미가 달라진다. 곰신앙은 지역으로 보아 중국의 동북방을 포함하여 시베리아와 내외몽고 지역과 북구까지도 널리 퍼져 있었다고 한다. 한반도가 여기에 포함됨은 이를 여지가 없다. 지금도 흑룡강 주위의 아무르강 유역에는 2만여 사람들이 곰신앙을 갖고 조상신 숭배와 문화를 누리고 산다는 것이다. 우리말과 같은 계통의 퉁그스말에서는 곰(고마)을 '호모뜨이(곰) - 호모꼬르(조상신) - 호모겐(영혼)'이라 하여 곰신앙의 흔적을 언어적으로 보이고 있다. 이르자면 근원상징으로서 곰(고마)신앙이 겨레 삶의 빛을 던졌던 것. 토템(totem)이란 말의 뿌리가 브라질의 오토템(ototem)에 바탕을 둔다고 한다. 본디 형제란 뜻으로 자연물 숭배는 물론이요, 자연과 벗하려는 믿음이 있었음을 드러내는 것으로 짐작된다. 짐승을 사람의 조상으로 여기는 것은 곰뿐이 아니고 소나 원숭이 그 밖에 새(鳥)나 식물이 등장하는 수도 있다. 그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 오던 구전문학 자료에서도 곰신앙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는가. 충남 공주의 곰나루 설화는 그 얼굴에 값하는 경우요, 전남 구례지방의 곰소 이야기, 중국 후민 마을의 왕핑 이야기는 손 쉽게 찾을 수 있는 것들이다. 곰나루에 대한 이야기의 줄거리를 떠올리자면 아래와 같다. "백제시대 곰냇골 산허리 동굴에 암콤 한 마리가 홀로 살았다. 그런데 고기 잡는 어부를 데려다가 함께 살아 새끼곰 둘을 낳아 길렀다. 곰이 생각하기를 새끼도 낳고 하였으니 어부는 더 이상 집으로 갈 생각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해서 어느 날 바윗굴의 문을 열어 놓은 채 사냥을 갔다. 돌아 왔다. 상황은 전혀 달랐다. 새끼만 놔 두고 열려진 문으로 도망쳐 버린 게 아닌가. 뒤에 어미곰은 새끼곰을 데리고 강물에 빠져 죽었다는 것이다. 한데 웬 일인가. 당시만 해도 호남사람들이 거의 곰나루를 건너서 울로 다녔는데 타고 건너는 배가 까닭 없이 갑작스런 바람으로 뒤집혀 빠져 죽곤 했다. 이로 말미암아 나루터 숲속에 곰사당을 짓고 봄가을로 제사를 드린 후로는 탈 없이 나루를 잘 이용하면서 살았다." 설화 속에서 사람이 곰과 더불어 사는 것은 물론이요, 아이도 낳아 기르는바, 둘이 아닌 한 종족으로 드러난 셈. 이러한 곰이야기는 삼국유사 에 실려 전해 오는 단군왕검의 그것과 줄이 닿는다. 여기서는 아다시피 곰의 몸에서 사람이 태어나 세상을 다스리고 곰을 어머니신으로 예배한다. 곰나루로 오면 곰이 사람과 어우러져 새끼곰을 낳는 것으로 크게는 같은 종류의 이야기로 판단된다. 고마(곰)는 음절이 바뀌고 모음이 넘나들어 굴의 공간상징으로 떠 오른다. '구무(구먹 구멍) 굼'이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살아가는 생활의 공간임은 말할 게 없지만 미루어 보면 생명이 자라나는 어머니의 태가 바로 굴이요, 구멍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것도 양수(羊水)에서 자라나 밖으로 나오니 물에서 뭍으로 삶터를 바꾸는 것이다. 흔히 물과 땅의 신을 지모신(地母神)이라 함도 어머니는 땅과 물의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곰은 본성이 땅을 잘 파며 굴에서 겨울을 난다. 몸집에 걸맞지 않게 나무에 잘 기어 오르며 검은 털에 고기를 주식으로 하며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특히 불곰은 사나워 호랑이도 범하질 못한다는 것.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1927) 에 따르면 곰의 고기는 먹거리로, 털은 이부자리로, 가죽은 옷감으로, 그의 뼈는 농기구...나 사냥도구로 쓰여 거의 버릴 것이 없다고 한다. 하긴 그렇다. 얼마전만 해도 곰 발바닥을 재료로 한 요리가 말썽이요, 곰의 담 - 웅담에 관한 것은 이름난 약재로서 밀수입 등 항상 말썽이 많다. 곰이 사는 방위는 북쪽이요, 계절로는 추운 겨울이다. 큰곰, 작은곰 자리라 하여 북극의 별 이름이 된 것이 아닌가. 특히 큰곰자리별은 계절 시간 방위를 드러내기에 이른다. 영혼을 별에 빗대어 씀도 곰신앙과 무관하지가 아니하다. 곰과 어머니의 걸림 고리 사회문화적인 볼모에서 어머니와 곰(고마)의 사연에 대하여 알아 보았다. 하면 언어적인 질서의 고리들은 어떠한 것일까. 한국어와 같은 말의 계열을 살핀 알타이어학자 람스테트(Ramstedt 1873-1950)는 무성파열음 기역(ㄱ)이 약해져서 나아간 발자취를 [ ㄱ ㅎ ㅇ]으로 풀이한 바 있다(알토1957, 알타이어학 입문). 곰(고마)과 어머니의 걸림에서도 이렇게 될 가능성은 없을까. 먼저 한자말의 보기를 보면 쇽(俗) - ㅅ - 쇼 - 소 ㄷ(笛) - ㄷ - 뎌 - 져 - 저 견(見) - 현 개(解) - 해 등에서 기역이 약해져서 히읗으로 될 기미가 보인다. 만일 같은 한자말인데 일본어의 그것과 비교하면 상당한 분포를 알 수 있다(학교 - 가꼬 화학 - 가가꾸 학문 - 가꾸몬 해결 - 가이게쓰 헌병 - 겐뻬이). 만주말과는 어떤가 하면, 이 또한 예외가 아님을 알게 된다(가시개 - 하사하 가루 - 하루 골(谷) - 호로 구유 - 후유 곤(gon<만주> - 혼(흔:일흔 마..흔) - 온(은:쉰 예순)등). 곰(고마)이 '곰 구멍'의 뜻을 가리키는 경우 위의 소리바뀜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먼저 '구멍'의 경우를 살피면, 고마(곰)(구무 굼(穴) - 홈(훔 험 흠;호미 허물 홈 패다 훔치다 흠집) - 옴(옴;옴팍하다 오막하다 / 움;우물 우묵하다)와 같은 보기들이 눈에 뜨인다. 다시 곰(고마)이 단군의 조상신이요, 어머니임을 떠 올려 보자. 구멍으로서의 옴(움)과 어머니의 사투리말과 크게 다르지 않음은 상당한 암시를 주는 것으로 보인다('어머니'의 방언 - 옴마 옴매 오마니 오메 오매 / 움마 암마 어무이 어매 어머이 어머니 엄마<최학근(1978)한국방언사전)>). 그럼 방언형과 어머니의 걸림은 어떻게 풀이되는지에 대하여 살펴 보도록 한다. 방언형을 자세히 보면 제주에서는 어망, 강원 경상 전라 일부 말에서는 어멍이, 어망이, 어뭉이로 쓰인다. 미루어 볼 수 있는 건 '어망'과 '이'의 이가 바뀌어 '-니'가 되었지 않나 하는 점이다. 콩잎이 '콩닢'으로 땅일이 '땅닐'로 되듯이 어망(어멍 어뭉)과 사람(사물)을 가리키는 씨끝 '-이'에 니은(ㄴ)이 덧붙어 '-니'가 되었다 하면 어떨까 한다. 하면 앞의 엄(암 옴)은 곰(고마 검 감)에서 나온 것이란 말이 된다. 물론 엄마의 '-마'는 사람이나 자연물에 경칭을 쓸 때에 붙이는 씨끝이다. 연변에서 나온 주장 가운데에는 '엄아'에서 처럼 사람이나 상대를 부르는 부름씨끝으로 보려는 생각들도 있기는 하다(한진건(1990)조선어원사탐고). 간추리건대, 단군의 조상신 곧 어머니신인 곰(고마)에서 오늘날의 어머니가 말미암았다는 것이다. 덧붙여 둘 건 고마와 곰의 걸림이다. 열린 소리마디 '고마'가 닫힌 소리마디로 되면 '곰'의 소리꼴이 나 온다. 오늘날의 일본어에서도 곰은 '구마(고마)'로써 읽혀 진다. 소리마디의 펴나아감은 열린 데에서 닫힌 꼴로 되었을 우리말의 흐름도 점 쳐 볼 수 있을 것이다. 곰(고마)이란 말은 제정일치 시대의 제의문화를 되비치는 소리상징이요, 어머니의 뿌리요, 샘임을 상정하였다. 어머니는 나와 배달겨레를 있게 한 말미암음이요, 생명의 고향이다. 우리 모두는 그 품에서 태어나 자연의 어머니인 흙으로 되돌아 가는 것을. 서로에게 고마워 하며 겨레의 일을 염려할 때 우리들의 천국이 가까워 올 것이다. 어머니는 우리들의 영혼이요, 안식이다.
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1. 강은 우리의 어머니 강과 삶 산이 있는 곳에 물이 있듯 강이 흐르는 곳에 삶이 깃든다. 목숨살이의 말미암음이요, 여름지이의 어머니가 강이다. 강이란 무엇인가. 한자로 보면 강은 샘물이 모인 내가 이루어 낸 것이요, 본디 말로는 가람이 된다. 이름하여 가람이란 갈라 놓은 가름. 가람이 흐르는 곳이면 반드시 이 마을 저 마을이 나누어 지고 이런 저런 겨레들의 갈래가 이루어 진다. 사람의 삶이 처음 열리던 문명의 새벽은 모두 강에서 비롯했다. 하루로 치면 분명 새벽이요, 계보로 따지자면 어머니에 값한다. 마침내 문화와 문명이 펴어 나아가는 삶의 모꼬지요, 옹달샘이 된다. 우리의 경우 한강, 낙동강, 대동강을 비롯한 5대강 유역에 6대 도시가 형성되었으며 그 물을 쓰면서 오늘의 문명을 열어 왔던 게 사실이다. 이제 인류 문명의 새벽을 연 강물에 얽힌 이야기를 더듬어 보자. 메소포타미아와 서남 아시아 그리고 이집트로 이어지는 오리엔트 문명을 먼저 살펴 본다. 늦 여름이나 이른 가을이면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비가 내려 홍수가 진다. 나일강의 상류 지방은 우리보다도 훨씬 많은 비가 내린다. 하여 큰 피해도 입지만 동시에 중류 하류 지역으로 가면 기름진 들판이 만들어져 말 그대로 엄청난 생산의 보금자리를 이루게 된다. 해서 그리이스의 유명한 역사가인 헤로도투스(Herodotus 기원전 484-425)는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라고까지 하였다. 참으로 나일강 없이 이집트 문명이란 생각할 수조차 없지 않은가. 때때로 밀어 닥치는 홍수가 주는 어려움을 막기 위하여 둑을 쌓아야 했으며 여름지이에 물을 쓰기 위하여 저수지와 많은 도랑도 만들어야 했다. 중하류의 나일강 유역에는 일년 중 거의 비가 오지 않으니 홍수가 났을 때 물을 가두기 위한 저수지가 필요했다. 엄청난 노력이 들었다. 둑과 저수지를 만드는 물 다스리기 - 치수의 일은 도저히 한 마을의 힘으로는 해 낼 수가 없었다. 해서 여러 마을이 어우러 힘을 합했으니 이에 큰 마을이 생겨 났고 이른 시기에 힘 센 나라가 만들어 졌던 것이다. 이집트를 다스리는 임금의 권위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힘 든 일을 슬기롭게 해 나가기 위해서는 억센 정치력이 있어야만 했다. 서력 기원전 삼천년 경에 앞 선 이집트와 뒤 선 이집트가 힘을 합해서 통일된 이집트를 이룬다. 고왕국 - 중왕국 - 신왕국시대를 지나 약 이천오백년의 역사를 누린다. 겨레를 다스리는 사람과 신에게 제사하는 종교직능자가 같은 사람의 시대 곧 제정일치 시대가 옛 문명의 새벽적에 공통된 특징이다. 이집트 경우도 그 예외는 아니었으니 파라오(Paraoh)가 바로 교황에 맞먹는 통치자였다. 파라오는 태양신 라의 아들이었으며 파라오가 제사를 모시는 것은 다름 아닌 태양신 라(Ra)였다. 말 그대로 살아있는 신으로 우러름을 받았으니 그의 권위는 '신 - 태양신'이 내린 만큼 절대적이었다. 권력의 상징물 가운데 하나가 피라미드로서 죽어서도 사는 권위의 화신이 아닌가. 쿠푸 왕의 피라미드는 높이 146미터 밑변의 한쪽 길이가 230미터 평균 1.5톤의 돌 230만개를 쌓아올렸다 하니 놀랄 만하다. 매년 10만명씩 일을 하였고 30년이나 걸렸다는 얘기. 영혼불멸이라 해서 육체를 남겨 두면 죽은 뒤에도 저승에 가서 이어 산다고 믿었던 것이다. 시체에 약을 바르고 천을 감아서 썩지 않게 미이라로 만들어 피라미드 안에 넣어 두는 것으로 본을 삼는다. 일종의 부활 - 다시 태어나는 삶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은 부활인가. 다시 사는 부활신앙도 그 뿌리는 나일강이라 한다. 나일강과 관련해서 옛부터 전해 오는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신화가 있었다. 오시리스(osiris)와 이시스(Isis)의 이야기다. 같은 어머니 몸에서 태어나 부부가 된 것이다. 이는 모르간(Morgan)의 고대사회(하) 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형제들끼리의 혈족혼이 옛적에는 행하여 졌을 가능성을 드러낸다. 죽은 뒤에 모두가 신이 된다. 오시리스는 이집트 사람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고, 쇠붙이로 농기구를 만들어 쓰게 했으며 법률을 널리 알려 사회 질서를 바르게 하는 등의 거룩한 임금이며 신으로 숭배를 받았다. 이집트는 물론이요, 그의 가르침은 나라 밖에까지 미쳐 많은 겨레들에게 빛을 남겨 주었다. 그러다가 동생인 세트(Set)신은 질투와 노여움으로 에티오피아의 여왕과 함께 짜 가지고 오시리스를 죽여서 시체를 나일강에 던져 버린다. 그의 아내 이시스는 오시리스의 주검을 찾아 내었지만 세트는 다시 빼앗아 오시리스의 주검을 14개로 잘라 여러 곳에 흩어 버린다. 이시스는 여러 곳에 흩어진 주검을 거두어 베로 온 몸을 감아 약을 뿌리고는 미이라로 만들었다(비옥근안정 애굽종교문화사 174면). 기쁨에 넘친 나머지 이시스(Isis)는 새가 되어 오시리스의 둘레를 이리저리 날았는데 날개 바람이 오시리스의 코에 들어가 다시 숨을 쉬게 된다. 오시리스는 이미 저승에 가서 그곳에서 임금이 되어 있었다는 것. 그의 아들 호루스(Horus)는 자라서 세트를 죽임으로써 아버지의 복수를 한다. 호루스는 본디 남쪽의 신이었는데 옛 이집트에서는 독수리의 신으로 떠받들기도 하였다. 뒤에 여신 하톨(Hathor)의 아들이 되었다가 오시리스신 숭배와 어우러짐으로써 오시리스와 이시스의 아들로 다시 바뀐다. 마침내 태양신 라(Ra)의 숭배와 결합해 태양신의 자리로 오른다. 사납고 못된 신 세트(Set)를 물리침으로써 이집트 왕들의 할아비가 되어 임금들은 자신들이 '호루스의 아들'임을 스스로 일컬었다. 영어로 강을 리버(River)라 한다. 말의 뿌리를 캐어 보면 라틴말로 리파리우스(Riparius) 곧 '둑'- 물을 막기 위하여 쌓아 놓은 흙더미란 말이다. 또 리버는 '죽사리의 갈림길'이란 뜻으로도 쓰였으니 강이란 참으로 삶의 결정적인 구실을 하는 역사의 뿌리 깊은 의미를 드러낸다. 이와 같이 말이란 사회생활의 쟁기가 됨은 물론이요, 사람들의 문화를 알게 하는 까닭에서 비롯한다. 이집트 신화 또는 벽화에서 이시스가 그의 아들 호루스를 팔에 안고 젖을 먹이는 모습을 아주 좋아 하여 많은 돌그림이나 조각에 이들 모자의 모습을 그려 넣는다. 상징적으로 보아 이는 무엇을 드러내고 있을까. 호루스의 어머니 이시스는 나일강이며 강의 여신이다. 아들 호루스는 이집트 겨레들이며 사람들은 나일강의 젖줄에 삶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 강은 생명인 동시에 죽고 사는 갈림길의 상징임에 틀림 없다. 또한 부활의 말미암음이다. 힘은 힘을 부른다. 강력한 생산력과 공격의 힘을 갖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더 많이 다스리고 싶어 하고 더 많은 땅을 갖고자 싸워 댔다. 빛이 있는 곳에 그늘이 따라 가게 마련. 하지만 쇠붙이로 말미암아 먹고 입고 살아 가는 집의 모양이 아주 달라졌으니 큰 개혁이 일어난 셈이라고 할까. 강이 흐르는 곳에 삶이 있고 삶이 깃드는 곳에 문화는 꽃 피어 그 열매를 거둔다. 마치 봄이면 나일강 가에 씨앗을 넣고 가을 되면 열매를 거두어 들였다가 이듬 해 다시 씨앗을 내어 놓는 오시리스와 이시스의 신화인 것처럼. 강의 질서와 인간 이집트와 때를 같이 하여 오늘날의 이라크 땅인 메소포타미아의 벌판에서도 강을 따라 문명의 강은 흐르기 시작. 본래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란 '두 강 사이에 있는 땅'을 뜻한다. 이르자면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서 생겨난 삶의 터전이란 말이 된다. 홍수 때문에 물난리를 겪어야 했던 일은 나일강에서와 마찬가지이다. 벌판을 일구고 여름지이를 하자매 강물을 쓰는 건 당연한 과정이었으니 여러 마을이 합하여 도시국가를 이루기에 이른다. 여기에는 강력한 힘의 통제와 다스림이 필요했다. 큰 강물의 홍수에 맞서는 것만큼이나 말이다. 주로 슈메르족이 중심을 이루었으며 신전을 세우고 청동기와 글자도 만들어 썼으니 옛 문명의 새벽길을 활짝 열어 젖힌 셈이라고 할까. 이른바 쐐기 모양의 설형문자가 그것이다. 기름진 메소포타미아는 주위 여러 겨레들이 눈독을 들이던 터전이었다. 마침내 기원전 이천년 경에 바빌로니아 왕국이 서게 되었고, 그 가운데 함무라비 왕은 많은 백성을 강력하게 다스리기 위하여 법률을 만들었으니 이가 곧 '함무라비 법전'인 것이다. 죄인은 지은 죄만큼 벌을 받게 하는 대응처벌이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뼈에는 뼈'와 같이 그대로 갚아 주는 법이 중심을 이루었다는 속내. 기원전 1500년 경 세계에서 가장 먼저 쇠를 썼던 힛타이트 사람들에게 무너졌다. 어쨌든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가에서 나일강의 이집트와 더불어 옛 문명의 길을 열고 닦은 일은 우연의 일치라고는 할 수 없다. 농사를 짓느라고 이에 필요한 달력.셈.하늘 보고 점치는 천문학이 비롯하였다. 이집트 사람들이 태양력을 썼다면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태음력을 썼던 것이다. 뒤에 페르시아 제국으로 이어졌으며(기원전 525년), 힘이 센 중앙 집권의 정치를 행한 터전이 되었다. 믿음으로 보면 이들은 색 다른 점이 있었으니 배화교(拜火敎)로 불리우는 조로아스터교가 그것이다. 세상을 선과 악의 두 신이 싸우는 마당으로 보아 광명의 신 아후라마즈 다. 곧 착한 신과 함께 하면 죽어 천당에 가고 나쁜 신인 암흑의 아리만과 함께 하면 지옥으로 떨어진다. 이 같은 생각은 뒤에 유다교나 그리스도교에 큰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어 기독교의 처음이라 할 유다의 왕국이 뒤를 잇는다. 이들의 조상은 말할 것 없이 헤브라이인들이었다. 헤브라이는 히브루(Hebrew)라고도 하는데 '강을 건넌 사람'이란 뜻으로 이집트에서 학대에 못 이겨 요단강을 건넌 사람들이란 말로 간추려 진다. 그럼 인도와 중국의 경우는 어떠했는가. 성자의 강이라고 불리우는 갠지스와 인더스 강의 가장자리에 빛나는 문명의 보금자리를 튼 것이다. 인더스 문명은 모래 속에 파묻혀 있던 나머지 물건들이 드러남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유물로서 구리로 만든 그릇과 아름다운 흙그릇들, 갖가지 금은으로 된 장식품들이 나왔으니 당시에도 상당한 수준의 문명이 있었음을 보이고 있다. 까닭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기원전 1500년 전후에 무너졌으니 지금의 드라비다족의 조상들이 아닌가 한다. 중국의 경우는 어떤가. 황하와 양자강이 곧 중국의 옛 적 문명의 터전이었으며 특히 황하 유역인 화북지방이었다. 기름진 황토 벌판은 농업생산에 알맞은 보금자리라. 기원전 2000년 경에는 흙으로 이루어진 토성으로 둘러 싸인 자연부락 - 도시들이 생겨났고 작은 마을을 한데 어울러서 점차 큰 도시국가로 펴 나아갔다. 한자로 나라국자의 네모는 바로 토성으로 둘러 싸인 도시 모양을 본 뜬 것. 네모(口) - 큰 입구 안에 창과 사람이 하나의 통치자를 중심으로 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國). 이는 바로 농업생산과 마을의 번영을 지키기 위하여 함께 힘을 모은 공동체가 나라란 뜻이 아니던가. 끊임 없이 쳐 내려 오는 흉노족들의 공격을 막으려고 쌓은 만리장성도 나라를 지키고 중국의 전 국토를 하나로 묶어 보려는 상징물이다. 특히 중국에는 땅이 커서 그런지 가뭄과 홍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 온다. 우(禹)임금의 물 다스림이 바로 그 대표이다. 서경(書經) 에 따르면 강물이 넘쳐 흘러 아픔을 겪었다. 해서 순 임금은 곤 임금에게 물을 잘 다스리도록 하였으나 잘 안 되었으므로 우 임금에게 10년 동안 물을 다스리게 해서 뜻을 이루었다. 따라서 순 임금은 우 임금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 주었으니 그만큼 강물에 대한 관심이 컸던 게 아니었을까. 삼황오제에서 하 왕조로 다시 은 왕조로 이어지면서 강과의 삶이 펼쳐 진다. 은나라의 도읍을 은허라 하는데 이 곳에서는 제사 그릇, 무기 등 청동기 제품과 글자가 새겨진 거북의 껍데기 - 귀갑(龜甲)과 짐승의 뼈가 나왔다. 이르러 갑골(甲骨)문자라 한다. 갑골문자는 귀갑점이라 해서 은나라의 왕들이 전쟁이나 물로 말미암은 큰 어려움이 있을 때 점을 치는 데 썼던 글자이다. 불에 태운 거북의 껍데기나 짐승의 뼈 안쪽에 간 금을 보고 좋고 나쁜 걸 점쳤다는 얘기. 하지만 일종의 물신앙이요, 토템이기는 하지만 어찌 보면 유사시에 발뺌을 할 구실을 미리 만들어 놓은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거북이는 주로 물신의 상징으로, 짐승의 뼈는 소나 곰과 같은 짐승을 숭배하는 수조신앙(獸祖信仰)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해서, 임금이 정치는 물론이요, 신에 대한 제사도 아울러 맡았으니 이런 때를 제정일치 시대라고 한다. 황제들의 옷에 용을 그린 것은 바로 물신 숭배요, 황금빛은 하늘의 태양을 섬기는 제사장의 옷을 드러내는 보람이 된다. 강은 겨레의 어머니 태양숭배나 짐승을 숭배하는 제정일치의 문화는 우리 겨레에게도 있었다. 삼국유사에 따르자면 '단군'은 곰부인과 하늘에서 내려 온 환웅 사이에서 태어난다. 여기 곰(혹은 고마 <용비어천가>)은 바로 사람의 조상으로 섬겨지는 토템이기도 했다. 조선왕조의 옛 말 자료에서 곰(고마)은 경건하게 그리워 해야 할 대상으로 풀이된다(고마敬 고마虔 고마欽 <신증유합>). 같은 계통의 말인 퉁그스어에서는 '곰(고마)- 영혼 - 조상신'과 같은 뜻으로 그 걸림을 보이고 있다. 나머지 태양숭배는 어떻게 풀이하면 좋은가. 단군왕검에서 왕검은 '님금(임금)'으로 읽고 이는 다시 니마(님)와 고마(곰)로 가를 수 있다. 이 때 니마(님)가 태양신을 드러낸다. 본시 단군이란 오늘 무당을 뜻하는 전라방언의 당골. 당골레미. 당굴레와 같은 뜻으로서 제사장을 이른다. 하면 제사하는 그 대상이 바로 태양신 '니마(님)'와 태음신 '고마(곰)'가 된다. 부모에 비긴다면 단군에게는 태양신계의 환웅이 아버지요, 태음신계의 고마(곰)가 어머니이다. '어머니'의 사투리말이 지역에 따라서는 '오마 옴마 암마 엄마 어무이 어매 어머이 어머니'와 같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드러난다. 우리는 이런 여러 가지 형태들을 변이형이라고 한다. 우리말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소리도 바뀌고 그 뜻도 바뀌었다. 이르자면 '새비 - 새우 개금 - 개암 누비 - 누에 가슬 - 가을 겨슬 - 겨울' 등과 같은 보기들이 그러한 경우다. 옛 적에는 마누라 영감이 모두 벼슬에 대한 부름말이며 가리킴말이기도 하였으니까. 마찬가지로 겨레들의 조상신이요, 영혼으로 떠 받들던 숭배의 대상 고마(곰)의 '곰'에서 곰(굼 검 금 감) - 홈(훔 험 흠) - 옴(움 음 엄 암)으로 바뀌고 말조각이 덧붙어 오늘의 '어머니'가 되었다. 옛날 신화의 표현이나 대표적인 말은 겨레의 뿌리됨을 드러내는 일이 많았다. 우리는 이를 일러 뿌리상징이라 한다. 수렵생활에서 농경생활로 뿌리 내리면서 고마(곰) 신앙은 그 내용이 물과 땅, 그러니까 지모신 숭배로 그 속내가 바뀐다. 물과 땅은 농사의 어머니요, 젖줄이며 밑바탕이니까 말이다. 땅이름 가운데에서 강의 이름이 아주 오래동안 변하지 않고 쓰인다고 한다. 가령 경북 제일의 큰 평야요 농업생산의 터전인 금호평야의 금호 - 금호강이 그러하고 충청도의 금강(錦江) 또한 이러한 어머니의 신앙이요, 고마(곰) 숭배신앙을 드러낸 것이 아닌가 한다. 지금도 금강가 곰나루엔 곰사당이 있으며, 금호강의 말미암음인 영천의 보현산을 대동지지 에는 모자산(母子山 - 어머니산)이라고도 함을 보고 이는 다시 검단산(儉丹山)으로 이어짐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쓰이는 한자는 다르더라도 드러내는 소리상징은 같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방위로 보면 이들 고마(곰)계의 강이나 산은 거의가 북쪽인데 이는 우리 겨레의 뿌리가 북방지향에서 말미암은 탓. 이르자매 북극성을 중심으로 하는 별에 대한 믿음 따위가 그러한 보기들이다. 굽이쳐 흐르는 강은 언제나처럼 우리들의 몸과 마음의 고향이다. 하지만 산업사회의 공해, 사람들이 쓰다 버리는 나쁜 물로 강물은 더 이상 우리들에게 젖과 꿀이 아니며 아예 해독을 주는 독약이 되어 간다. 강이 죽어 가고 있다. 우리 삶의 어머니가 점점 시들어 가지를 않는가. 금수강산이 공해의 강산으로 바뀌고 있음은 실로 안타까움이요, 통탄스러운 일이다. 조상 대대로 물려 받은, 하늘로부터 받은 우리들의 강은 우리의 얼이 담기는 삶의 공간, 안식과 정서가 깃들이는 온누리 문화의 옹달샘이어야 한다. 어머니의 젖을 빨던 어릴 적의 마음으로 물을 다루고 강과 우리의 자연을 가꿀 일이다. 강을 건너며 노을은 지고 어두운 밤의 어스름. 봄가물로 메말라 가릴 것 없이 드러난 강바닥을 철벙거리며 건너고 있다. 언제나처럼 금호강은 높낮이를 따라 가벼운 바람에도 흔들리면서 스스롭게 밤의 세상을 안아 돈다. 오염이 심하다고, 강이 죽어 간다고 아우성들이건만 말없는 강은 뭇 시름을 나르고 있을까. 물새들만 찾아오는 밤을 홀로 깨어 흐르는듯 술렁이며 흐르는 강이 어쩐지 외로워 보인다. 연암이 건너던 강물도 이러했을까. 거룻배 하나 없는 강언덕을 굽이쳐 능금꽃 향내음을 머금어 늘 그 양으로 가는 곳은 낙동강. 그리운 영혼이듯 초승달이 오르면 강은 마음을 열고 눈을 두리번 거린다. 내 별은 어디 있을까를 헤아리면서. 언제나 미리내 고운 흐름으로 그 먼 나라 두고온 영혼의 강에 대한 그리움으로 마음을 설레이는 건 아닐지. 이내 낙동강이 강어구에서 손짓을 한다. 어서 따라 오라고 저 구름 흘러 가는 곳으로 가자고. 밤강이 새를 부르는가. 바람의 노래를 부르는가. 갈대밭 향내로운 언덕에 꺼웍이며 물오리들의 소리가 가까이 들리고. 더러 달밝은 밤이면 달님은 도처에 저승에의 꿈을 뿌린다. 저리고 아픈 강의 가슴과 허리를 감싸 안는다. 좀 쉬라고. 너무 지쳤다고. 다시 온 누리에 우리네 사람들을 보고 타 이른다. 여기 당신들의 젖줄이 흐르고 그 영혼이 사위어 간다고 . 옛말로 강은 가람이었다. 이 마을과 저 마을이 갈리고 이 겨레와 저 겨레가 갈리던 가늠자. 애틋한 마음으로 못 잊을 임을 강건너 보내고 출렁이는 강물만. 그 속의 푸른 하늘만 물끄러미 보던 남정네와 아낙네들. 때로 갈라짐이란 새로운 삶에의 비롯됨으로도 떠 오른다. 불타오르던 꽃잎이 갈라져 떨어진 그 자리에 하늘과 땅이 만나는 목숨살이의 말미암음이 있듯이. 세월속에 묻혀 버린 가야와 신라의 사이가 곧 낙동강이었으니 말이다. 가까이 북녘으로 팔공산을 바라보며 왕건과 견훤의 이야기며 연구산의 돌거북 이야기를 들려 준다. 바람에 서걱이는 묵은 갈대의 소리와 물굽이에 부딪는 바람소리로. 밤만 되면 낙화암 아래 보로 생긴 못물 위에 전설같은 별꽃이 피어 오른다. 두고온 영천의 어머니산을 그리는 설레임으로. 전혀 흐르는 물소리조차 멎어 버린다. 어둠침침하게 구름에 가린 달그림자 사이로 물비린내가 바람결에 묻어 온다. 때로 독한 시궁창 냄새와 같이. 참으로 야단이구려. 이제 초승달은 지고 더욱 어두워 온다. 이 어두운 밤을 나르는 밤새들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가까이서 들린다. 자갈밭을 걷는 내 발자욱 소리에 놀랐음인가. 솨-악 퍼드득 거리며 밤의 허공을 새들이 날아 오른다. 소나기 내린 뒤 부는 바람에 떨어지는 나무숲의 빗소리 같다. 그 가난한 강의 어름쯤에서 새들은 무얼하고 있었단 말인가. 먹거리를 찾는 너희들이나 일 마치고 이 밤을 따라 강물을 건너는 나나 다를 게 없구나. 먹이사슬의 고리들로 강물은 어둠만큼이나 짙게 드리워져 있다. 살다 되돌아 갈 고리처럼. 강은 이 밤도 말없이 뭇 목숨을 갈라 놓으며 엄청난 목숨살이들의 뜨락에 물을 댄다. 불을 지핀다. 생명의 불꽃. 강물이 여러 갈래의 시내를 어우르듯이 큰 어울림의 가락으로 흐른다. 맑고 푸른 금호강의 꿈은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 보리삼단 같은 그 치렁치렁한 어머니의 머리결로 말이다.
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1. 강은 우리의 어머니 어사매, 그 가로지름의 속내 무르녹는 봄언덕을 말 놓아 동쪽 들녁 가네 여름지이를 재촉하는구나. 열성으로 지어보세 올해 남쪽 들은 얼마나 농사가 되려노 간밤에 흠씬 내린 비는 나라님의 은덕일레 (홍귀달의 한시에서) 산이 있는 곳에 언덕이 있고 물이 흐른다. 때로 내는 굽돌아 흐르며 고이다가 곧게 내려 크고 작은 사람의 삶터를 빚어 낸다. 남으로는 치악산이 구름처럼 드리워 있고 동으로는 태기산이, 북으로는 어답산이 병풍을 치듯 둘러 있는 곳, 이 중에 벌을 가로 지르는 남천을 따라 꽃 피듯 펼쳐진 데가 횡성이다. 역사란 사람과 자연환경의 걸림이요, 사람과 사람의 걸림에 뿌리 내린 내력이질 않는가. 본디는 고구려의 땅으로 어사매(於斯買)라 하였으며 신라의 35대 경덕왕 16년에 황천(潢川)으로 고쳐 부르게 된다. 고려 현종 9년 춘천에 속했다가 뒤에 원주로 바뀐다. 공양왕 원년에 현감을 두었으며 조선왕조 태종 때에 이르러 횡성이라 했다. 까닭인즉 홍천(洪川)과 횡천은 소리가 너무 가깝다는 것. 이를테면 같은 소리로 이어 있는 곳을 부르는 것은 변별력이 떨어진다고 본 것이다. 땅이름으로 보아 천(川) 계열의 땅이름은 거의가 고구려계로 보면 된다. 물론 고구려 이전, 삼한 적에는 진한의 땅이었지만. 조선조 태종은 친히 횡성을 찾아 군사훈련(講武)을 가진 바 있어 지금도 치악산 쪽에는 태종대라 불리는 곳이 있다. 대동지지 전고 부분을 보면 나라가 어지러운 때 정의를 부르짖고 민중봉기를 꾀한 기록이 나온다. 인조 5년 병자호란(1627)이 일어난 때이다. 인조가 왕의 자리에 올라 서인이 정권을 장악해서 청나라를 배척한 결과 빚어진 난리. 임진왜란의 포성이 멎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전쟁이 나니 백성들은 살 길이 묘연했다. 생불여사라, 죽지못해 사는 게 아니었을까. 때에 횡성 땅의 이인거(李仁居)는 스스로 의로움을 내세워 사회개혁을 부르짖었으나 받아 들여 지지 않았다. 벌이 내리지 않으면 다행이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인거는 뜻을 함께 하는 수백명의 동지를 모아 동헌을 쳐들어 갔다. 현감 이탁남(李擢男)을 묶은 채 무기를 빼앗고 군사들의 진을 치고 높은 언덕에서 서울로 쳐들어 갈 꾀를 내고 있었다. 임금은 계엄의 명을 내리고 주위에 있는 군사들로 하여금 군사 요충지를 지키게 하였다. 한편 삼남의 병사들로 횡성 주위에 대기를 명하고 때를 기다렸다. 마침 원주목사 홍보라는 이가 군사를 이끌고 이인거를 붙잡아 난리를 가라 앉혔다. 왜 문제가 일어 났는지는 안따져 보고 사람만 족치면 뭐가 되는가.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닌가. '어사매'와 횡천(橫川) 횡천은 본디 어사매(於斯買)라 했다. 고구려 계열의 땅이름에 매홀(買忽) 등과 같이 '매'가 나오는데 이는 모두 물(川 水 江)을 이른다. 하면 '어사'는 무엇인가. '엇간다 비껴 간다'는 뜻의 한자소리를 빌려 쓴 말쯤으로 풀이하면 된다. 그러니까 '어사 - 엇(橫)'이란 말로 간추릴 수 있다. 횡성이 남쪽벌을 흐르는 남천(南川)의 말미암음에서 '횡천 - 엇매'가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현의 남쪽 5리 쯤에 흐르는데 뿌리샘은 원주 치악산에서 시작된다. 산음(山陰) 즉 산의 북쪽으로 흘러 회현(檜峴)을 지나 우무골(井谷)의 북에 이른다. 갑천의 서류를 지나 흘러 서천과 함께 만나 원주의 섬강으로 든다. 간추리면 치악산을 북쪽으로 해 거꾸로 흘러 다시 꺾어져 현의 남쪽을 가로 지나는 특성을 떠 올려 '엇매 - 횡천'이라 이른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횡성으로 바뀌었지만 마을이 이루어지는 곳에 물이란 가장 결정적인 알맹이가 되는 법. 하긴 물과 땅은 먹거리 생산과 삶의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니까 말이다. 이르자면 우리 삶이란 물과 땅의 맞걸림이라 하겠다. 엇먹는다든가 빗나감은 좀 삐딱한 느낌을 준다. 요즈음 텔레비전에도 횡성장이 소개되거니와 왜인들이 강제로 점령, 마구잡이로 빼앗아 갈 때 안성 개성과 함께 횡성에서는 일본 사람들이 장사를 해 재미 본 일이 없다고 한다. 그건 한국사람들이 한국사람의 물건을 팔아 줌이 마땅했기 때문. 수입 농산물, 걸핏하면 외제 상품이 머리를 들고 어린이 옷가지부터 외국말이 버젓이 눈에 띄는 건 참말로 부끄러워 해야 될 일이다. 일본인의 눈에는 가시처럼 보였을 게 뻔한 노릇. 태기의 못 이룬 꿈 산이 높으면 골짜기 또한 그윽하기 마련. 횡성의 산 하면 태기산이요, 어답산이다. 한국의 허리뼈 태백의 용틀임이 서남쪽으로 물결치다 오대산(1563)이, 계방산(1571)이, 다시 태기산(1261)의 서기 어린 매듭으로 솟아 오른다. 진한 무렵 마지막 왕이던 태기왕이 신라의 첫 임금 박혁거세와 삼랑진에서 자웅을 겨루다 쫓기고 몰리어 마침내 오늘날의 태기산에 배수의 진을 쳤다. 해서 아예 산이름조차 태기산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한반도의 허리에서 일어나 고조선의 대통이라 할 예와 맥의 얼을 깊이 지키고 마한 변한을 어우러 이르러 삼한 통일의 불같은 꿈이 있었는데. 끝내 박혁거세의 세에 몰려 태기산에 쌓았던 성이며 모든 살림을 던져 버리고 심지어 임금의 신표인 옥쇄도 던지고 도망하여 버린다. 해서 태기산 동쪽에는 옥산대(玉散台)란 곳이 있기도 하다. 싸움에 쓰던 칼이며 갑옷을 씻었다 하여 산의 서쪽으로 흐르는 내를 갑천(甲川)이라 했다는 거다. 정말 그러했을지도 모른다. 아직도 갑천내 둘레에는 아기장수 전설이 입에서 입으로 옮겨져 온다. 감내라 하는 곳에 가면 소따배기와 강신터라는 데가 있다. 소따배기 위에서 뛰어난 장수가 나오므로 어지러운 세상을 평정하는 일에 큰 구실을 했다는 것. 해서 일본의 강점기에는 소따배기 어름 쯤에 혈맥을 끊는다 해서 큰 쇠말뚝을 박아 놓았다고 전한다. 그럼 강신터는 무얼 하는 데인가. 다름 아닌 성황터, 흔히 이르는 서낭터라 이르는 곳이다. 옛부터 성황목으로 소나무가 많이 늘어서 숲을 이루었다가 뒤에 사람들이 베어 내 버리고 지금은 그 자리에 기독교의 교회가 들어서 아침 저녁으로 영혼의 구원을 받으라는 종을 울린다. 예나 지금이나 귀신을 모시기는 마찬가지요, 한국귀신이 서양귀신으로 바뀐 것뿐이다. 하필이면 교회뿐이랴. 한다 하는 산의 쓸만한 자리이며 산천에 제사 지내던 곳엔 거의 절터가 되고 만 것도 그러한 보기요, 절 없애고 백운동 서원 같은 유교의 배움터를 지은 게 다를게 하나도 없다. 절에 가면 크고 오래 된 절간일수록 국사당(國師堂)이나 칠성각(七星閣)이 있다. 이 모두가 전통신앙의 종교 공간이었으니 여기에 외래 종교가 들어 와 함께 어울리는 믿음의 어울림터를 인정한 셈. 갑천은 중앙을 흐르는 내 횡성 지역에 가뭄이 들거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강신터에 와서 태기산의 산신(山神)에게 이바지를 드렸을 게 분명하다. 그로 말미암아 농사는 뜻대로 풍년이 들고 나라는 평안해질 것이라는 믿음을 키워 나아갔던 것일 게다. 옛적의 여름지이 시대로 올라가면 산천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으며 이런 일이 거듭되어 세시풍속이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한마디로 신본위 중심의 생각을 바탕으로 해서 살았던 터. 갑천이란 땅이름도 무슨 걸림이 있는 듯하다. 본 바탕은 물의 이름이나 땅의 그것으로 아예 굳어진 보기이다. 옛부터 불러오는 갑천의 땅이름은 '갑내'이다. '갑'은 가운데 중앙을 뜻한다. 한가위의 경우만해도 그러하다. 가운데의 '갑'에 접미사 '애'가 붙어 이루어진 '가배'에서 소리가 바뀌어 '가위'가 되며 여기에 '좋다 크다 제일 가다'의 뜻을 보인 '한'이 어울려 '한가위'가 되기에 이른다. 갑내의 '갑'은 신(神)을 뜻하는 감(검)에서 비롯하여 '감(검) - 갑 - 갚'과 같은 말의 겨레들을 이룬다. 신이라면 무슨 신인가. 그건 물신이요, 땅신을 속으로 하는 지모신(地母神)의 개념이다. 갑내 - 갑천은 횡성에만 있는 게 아니다. 금강의 지류인 대전의 갑천, 강원도 평강에도 갑천이, 지리산에도 갑천이 있는바, 모두는 중앙천이란 뜻이 된다. 평강의 갑천에 걸림을 둔 얘기는 횡성의 그것과 비슷하다. 후고구려의 궁예가 갑작스런 침략에 도망할 때, 내 위에 갑옷을 버리고 달아 났기 때문에 갑천이라 불렀다는 것. 사실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말 특히 땅이름에 사회언어학적인 풀이가 될 수 있다는 볼모에서라면 역시 중앙을 흐르는 큰 내, 더 올라가서 지모신 숭배의 소리상징이 아닌가를 상정할 수 있다는 줄거리. 우리 삶에 물처럼 중요한 게 어디 있을까. 태기산에서 흐르기 시작한 갑내는 골에 골물이 어우러져 원주의 섬강으로 들어 남한강의 또 다른 큰 흐름을 만들어 낸다. 이름하여 횡성강 댐의 자리가 갑내의 물로 이루어 진다. 마을 사람들은 말한다. 옛 조상들의 뛰어난 슬기가 있었다고. 잠시 횡성강댐과 관련하여 갑내 주변의 땅이름을 보자. 화전 갑내 금대는 댐을 암시하고 먼저 강물이 모여 담기는 곳에 가마골이 있다. 물이 담기는 가마라면 그처럼 큰 가마솥이 있을까. 물론 땅의 모양이 가마처럼 생길 수도 있다. 이 곳이 갑내 주변의 들로서는 가장 큰 벌판이다. 이 곳에서 나는 쌀이며 누에고치는 고치와 쌀농사에 있어 단연코 다른 지역보다 앞서 감은 바로 크고 넓은 분지형 평야 때문이리라. 횡성의 또 다른 이름을 화전(花田)이라고도 하는 바 이는 바로 가마골에 이르는 물돌굽이에 지금도 화전이 있다. 물에 잠기면 꿈꾸는 전설 속의 마을이 되고 말겠지만. 꽃화라 꽃송이가 툭 튀어나온 모양으로 물이 돌아 흐르는 곳에 물에 떠 내려 온 흙이 모이다 보니 코의 모양으로 툭 튀어 나온 논밭이 되었다는 풀이를 하면 어떨까. 다시 거슬러 오르면 마무리라 하는 물굽이 마을이 있다. 여기에 뜻 있는 이가 있어 뚝을 막고 논밭을 일구어 많은 쌀을 생산하였다. 가마골에 물이 고이면 마무리 와서 댐의 물이 마무리 된다는 얘기가 전해 왔던 터라. 댐이 서는 쪽은 수백(水白)이라는 곳. 물이 희고 잡맛이 없어서인가. 갑내의 물이 물중에 으뜸이라 갑천으로 불렀다는 이름과 같이 수백의 경우도 그럴지 모른다. 횡성강댐이 막히고 물이 고이면 횡성은 물론이요, 원주시민들이 마시는 물, 경공업 단지에서 쓰이는 물이 모두 이 댐물로 채워진다. 낮이면 낮대로 호수처럼 맑고 푸른 물 위에 하이얀 낮달이 뜨고 많은 황새며 청둥오리 떼들이, 밤이면 흐르는 별과 달님이 물 위에 떠 올라 잠들었던 태기왕의 전설을 말 없이 미소 짓는 물줄기로 밤을 지새울 것이다. 갑내는 본디 '감내'라 이르는 이름에서 말미암는다고 했다. 지형으로는 중앙을 흐르는 물이지만 지모신 상징으로라면 물신이요, 땅신이라 할 섬김의 대상이 된다. 농경사회에서는 지모신 이상 가는 주요한 숭배의 대상이 달리 있을까. 결국 땅과 물을 잘 받들고 보존하라는 조상의 숨은 가르침이기도 하다. 그래야만 겨레의 번영이 될테니 말이다. '금대'는 비파를 연주하는 무대 큰 바람이 불면 많은 곳에 영향이 가듯 땅이름도 그렇다고 본다. '갑내 - 감내'의 경우 물신(水神)상징의 '감(검)'은 가마골이나 한 지류인 금대(琴台)천 흔히 이르는 검두마을이 그러하다. 그러니까 '감 - 검 - 금'은 모두 물신이며 조상신을 뜻하는 물신앙에서 말미암는다. 일종의 같은 뜻을 밑으로 하는 표기적인 변이형들이 되는 셈이다. 금대 하면 글자 그대로 비파를 연주하는 무대란 말. 신에게 제사를 모시려면 무당의 노래와 기원이 있게 마련. 여기에 바람과 구름의 노래가 어울린 자연의 교향악이라면 어떠하리. 방위로 보아 '검(감)'의 물신은 북쪽상징으로 드러난다. 갑내(감내)야말로 중앙천이자 횡성의 동북을 돌아 서북으로 이어 지는 북쪽의 강이 된다. 집단무의식으로 보면 우리 겨레들은 두고 온 조상들의 땅이 시베리아며 만주 벌판, 더 거스르면 중앙 아시아의 빛나던 초원(草原)의 영광에 대한 짙은 향수가 있어 그러할지도 모른다. 임금도, 조상신도, 별신앙도 모두가 북녁지향성이 강하다. 고려나 고구려는 보기에 값하는 왕조들이었다. 실제로 뜻을 펴 보진 못했을지라도. 해서 북으로 모진 바람이 막히고 따스한 남쪽 들판 어디쯤에 해 밝은 동녁으로 문을 내고 아들딸 낳아 오손도손 살기를 원하는 흐름이 생겼는가. 어답산이 그러하고 가장 깊은 산골로 치는 병지방도 그런 이해가 가능하다. 적어도 왕으로서 태기는 병지방과 어답산에 군사를 놓아 지키게 하고 둔내(屯內)쪽에 병사의 진영을 주둔케 했던 것도 갑내로 빚어지는 농업생산과 싸움할 때 지리상의 긴 점을 샀기 때문일 것이다. 바르고 꼿꼿한 어사매 - 횡성의 정기가 태기산이듯 갑내이듯 굽이져 길이 흐를 일이다. 비파처럼 아름다운 금호강 맑고 잔잔한 금호강에 배를 띄우네 오가며 하얀 물새를 가까이 하지 자연에 취하여 달이 밝도록 노닐다 배 저어 돌아 가노라 멋으로라면 오호(五湖)의 그것에 비길 수가 없구나 (서거정의 '대구십영'에서) 말의 역사로 보아 가장 잘 바뀌지 않는 게 땅이름이요, 그 중에서도 강의 이름은 더욱 그러하다. 서울의 경우 한 때 한산주 한주 한성 한양으로 불리웠으며 일제의 강점기에는 경성으로 쓰였지만 다시 서울로 쓰이지 않던가. 세월의 굽이를 돌아 끈끈한 그리움처럼 되쓰임을 누구라서 막을 수 있을까. 땅이름이 보수적일수록 오랫동안 알게 모르게 강이름에 역사가 되비칠 수 있다. 금호강의 '금호'에 대하여 그 속내가 어떠한가를 더듬어 본다. 경북지명총람을 따르자면 바람이 불 때 갈대밭에서 비파소리가 나기 때문에 금호라고 했다는 것. 재미있는 풀이다. 갈대는 여러 곳에서 살아간다. 물이 흐르다 늪이 되는 장소라면 마다 않고 갈대들이 모여 산다. 하필이면 금호뿐일까. 땅이름으로 보더라도 금호는 영천에도 창원 마산에도 있다. 그것도 같은 한자를 써서 말이다. 행여 물신과 땅신 곧 지모신 상징을 드러낸 강이름이 아닌가 한다. 농업생산은 땅과 물에서 말미암는다. 먹거리는 겨레의 번영이며 자기보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니, 옛적 샤머니즘 시대에는 물과 땅에 신격을 부여하여 온 나라가, 농사가 시작되고 끝날 때를 가려 제사하였다. 이르자매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 부여의 영고 등이 모두 여름지이와 걸림을 보이는 지모신 숭배의 보기들이다. 짐작하건대, 금호강의 '금(琴)'도 지모신을 가리키는 소리상징일 가능성은 없는 걸까. '금(琴)'과 지모신 금호강의 뿌리샘에 걸림을 둔 대동지지 의 이야기를 떠 올려 보자. 금호강은 청송과 영천의 사이에 솟아 있는 보현산(또는 모자산(母子山))의 남쪽에서 말미암는다. 물은 흘러 빙천으로 다시 자율아천이 되어 병풍암과 신녕의 서편을 돌아 영천을 굽이쳐 흐른다. 죽방산의 남쪽에 이르러 남천 범어천 시천 영지산천을 지나 물띠미 곧 하양의 강을 이룬다. 관란천 황율천 반계 남천이 어우러져 대구의 사수 진탄내가 되며 신천을 왼쪽으로, 해안천을 바른쪽으로 해 여천의 서편에 들어 금호진에 다다른다. 해서 하빈을 지나 낙동강의 긴 가람을 이루어 한반도의 남쪽 허리를 휘감아 메마른 벌을 적시운다. 이밖에도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화성지(花城誌-화성=하양) 와 같은 자료에서 크게는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금호강의 흐름을 타고 떠 내려 온 흙과 모래가 쌓여 경북에서 으뜸 가는 금호평야 혹은 대구평야가 삶의 터전을 만들어 준다. 강을 둘러 싼 자연부락은 크게 1직할시 5군 1시 25개의 읍면이나 된다. 물이 있는 곳에 마을이 이루어짐은 자연스러운 일이요, 자연의 한 섭리이기도 하다. 금호강은 모자산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보현산이나 모자산이 같은 산이기 때문에 그렇게 본 것이다. 그럼 금호강의 금(琴)과 모자산의 모(母)는 어떤 걸림이 있단 말인가. 강은 여름지이의 어머니요, 삶의 뿌리에 값한다. 강을 가람이라 하거니와 가람의 본질은 갈라짐에 있다. 마을과 마을이 갈라지며 넘실거리는 삶의 무늬로 짜여진 목숨살이들이 깃들인다. 가람은 생명현상의 말미암음이요, 모태라 하여 지나침이 없다. 다스리는 영지이며 거룩한 믿음의 터전이 된다. 금호강의 '금'과 지모신의 '모(母)'가 마주 걸릴 가능성은 다음의 몇 가지 보기로서도 커 진다. 금성(金城)-모성(母城)(대동지지)웅천(熊川)-웅신(熊神)-금주(金洲) (대동지지)금강(錦江)-웅천하(熊川河)(대동지지)금호-모자(母子)(대동지지)왕검(王儉)-궁홀(弓忽)-금미(삼국유사) 위의 보기로 보아 '금-어머니'의 서로 맞걸림을 엿볼 수가 있다. 말의 뿌리로 보아'곰(고마)'에서 나온 말임을 알게 되는바 이는 단군왕검의 어머니신이 웅신(熊神)이요, 웅녀가 되기로서이다. 인류학에서라면 곰 우러름은 짐승을 사람의 조상으로 여기는 곰토템을 믿는 수조신앙에서 비롯한다. 우리말로는 어떻게 '곰-어머니'의 대응을 풀이할 수 있을까. 사람의 목에서 피어 나는 소리는 그 바탕이 마찰음으로 곧 갈림소리이다. 그러니까 갈림소리로 인식되지 않는 다른 소리들은 경우에 따라 약해지면 갈림소리로 되었다가 소리가 더 약해지면 아예 소리값이 없어 진다. 곰(고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상징성으로 보아 곰(고마)은 굴 북방 뒤 겨울 목소리 물 등을 드러 낸다. 곰을 조상신, 어머니신으로 숭배하자매 당시 사회의 가치지향이 곰의 속성과 멀리 있을 수가 없지 않은가. 곰(고마)의 머리소리가 약해 지면 홈(호마)이 되고 다시 약해 지면 옴(오마)으로 소리 난다. 간추리면 '곰(굼)-홈(훔)-옴(움)'이 된다.우리말 '어머니'의 사투리말을 보면 '어머니 엄니 어무이 엄마 어머이 어메 오마니 옴마 오매'와 같이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말을 한다. 이들 가운데 오마(옴마)형은 '곰(고마)-옴(오마)'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흔히 곰을 짐승으로만 보면 그뿐이겠으나 이같이 사람의 조상이라는 의미부여가 되면 사뭇 달라 진다. 조상신이요, 어머니신이 되는 법. 만주 지방의 에벤키말에서도 보면 곰을 호모뜨리. 조상신을 호모꼬르(homokkor), 영혼을 호모겐(homogen)이라 해서 우리와 거의 비슷한 소리모습을 보여 준다. 아직도 아무르 강 유역에는 곰신앙을 갖는 사람들이 2~3만 가량 살고 있다는 것. 이들은 모두가 고아시아족으로 짐작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오백년전의 자료를 보더라도 고마(곰)가 경건하게 숭배하고 흠모해야 할 대상임을 보여 주는 보기들이 있다(고마敬고마虔고마欽<신증유합>). 눈에 띄이는 것은 같은 말'곰(고마)'이 땅이름 등에서 뒤로 오면 거북으로 바뀌어 쓰이는 경우이다(熊神 龜山(세종실록)人君以玄武爲神(한서)前朱鳥後玄武(예기)). 하긴 한반도에서 곰보다는 거북이 많이 살고 있다. 이는 다름 아닌 사회변동의 결과라고 하겠다. 유목생활에서 따스한 남쪽으로 정착하면서 농경생활의 사회로 변동을 하였다. 해서 곰의 숭배보다는 농업생산에 필요한 물과 땅신에 대한 믿음 곧 지모신 믿음으로 바뀐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니 동물상징도 물과 뭍에서 함께 살아 가는 거북이 곰의 자리에 들어 간 것이다. 기존의 살핌에 따르면 거북도 곰과 같은 음절구조를 보이는 '검(감)'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박지홍,1957,구지가 연구). 그 보기로 양산지방의 민요인 '왕거미노래'를 들고 있다. 하긴 함안지방의 땅이름인 현무(玄武)나 앞에 든 <예기>의 현무도 이두식으로 읽으면 '검'일 가능성이 엿보인다(玄(검) + 武(ㅁ) 검). 하면 '검 + 음(이) 거믐(거미) 거뭄 > 거붑 > 거북'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오늘에 쓰인다는 풀이를 할 수 있다. 우리말로 신은 '검'이니까. 한편 곰(고마)이 북쪽 추운 지방에 살았으며 우리의 선조 또한 그러했으니 북방을 위로 할 수밖에. 선조가 살았던 고향이니까, 두고 온 산하이니까, 마치 월남한 겨레들이 북쪽을 그리워 하고 절을 하듯이 말이다. 곰(검)의 또 다른 변이형이라 할 '감-검-굼-금'으로 적히는 땅이름에서도 같은 상징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를테면 공주의 금강이 그러하고 대구의 금호강도 예외가 아니다. 굴만해도 그러하다. 삼국유사 의 단군신화에서 굴속에서 호랑이와 곰이 함께 사람이 되게 해 달라는 삶을 누린다. 그 곰이 우리의 조상이라면 그 굴 또한 조상들의 집이었음에 틀림 없다. 기록에 따라서는 여름에 새둥우리 같은 나무 위에 집을, 겨울에는 굴속에서의 집을 꾸리고 살았다는 것(후한서 삼국지 등). 이 굴속에서 스무하루의 통과제의를 거쳐 곰이 사람의 몸을 입는다. 더 좁혀 보면 모든 생명은 굴(구멍)의 모양을 한 보금자리에서 태어 난다. 우리 모두는 어머니의 모태에서 태어났으니 말이다. 마침내 곰신앙을 지닌 겨레들의 삶이 단군신화에 되비쳐졌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굴살이 곧 혈거생활은 공주 석장리나 서울의 암사동,춘천의 굴집 따위에서도 그러한 개연성을 찾아 볼 수 있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곰은 추운 지방에서 살던 이들에게는 주요한 먹거리이기도 하였다. 리지린(1927)의 조선경제사 에 따르면 곰의 살은 먹거리요, 가죽은 이불과 옷거리이며, 그 뼈는 짐승을 잡는 도구이며 동시에 집을 짓는 좋은 건축재료였다는 것이다. 곰은 의식주 생활의 참으로 귀한 물질의 샘터가 되었으니. 해서 퉁구스 겨레들은 곰을 사냥할 때도, 먹은 뒤에도 곰제사를 지냈을터. 사회변동이 일어 나면서 농업생산에 주요한 공간이자 뿌리는 땅과 물이었으니 곰(고마)이 드러내는 변이형 가운데에서는 이들 땅과 물에 신격을 부여하기에 이른다. 오늘날의 말에서 감사하다는 우리말을 본디는 '고맙다'고 한다. 이를 쪼갈라 보면 '고마'에 접미사( ㅂ다(如))가 붙어 된 것인데 속뜻은 '당신의 은혜가 나의 어머니(고마)와 같다'는 알맹이다. 결국 금호의 '금'은 곰이요, 어머니 즉 지모신 상징의 강이름이 된다. 산이름 팔공산에서도 풀이하였지만 본디 이름은 공산(公山)으로 금호의 '금'과 더불어 그 뿌리는 곰신앙-지모신 신앙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금호와 물신 물이 있는 곳에 생명이 움 튼다. 사람의 역사는 물과의 걸림을 풀어 가는 삶의 과정이라면 어떨까. 넘쳐 흐르는 홍수를 다스리고 이를 삶의 편의로 이끌어 드리려는 애씀. 가물어 온통 누리가 생기를 잃어 갈 때 어디에 편안한 안식이 있을까. 앗시리아나 이집트에 전해 오는 천지창조는 물과 흙으로 이루어진 공간에서 말미암는다.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 언제나처럼 출렁이는 바다의 파도에서 생명이 비롯된다는 것이며 그리이스 신화에서는 물이 여자요 생명의 어머니란 것. 물은 생명의 뿌리이며 영혼과 육신이 함께 만나는 매개체로 값매김 된다. 단순한 홀세포의 생물일지라도 세포들은 물로 차 있으며 고등생물일수록 조직의 배합과정은 물분자와 긴밀한 걸림을 보인다. 물과 더불어 농경문화가 정착되었고 문명의 새벽이 열리기에 이른다. 나일강, 티그리스강, 인더스강, 황하강의 문명이야말로 물에 따른 삶의 터전이라 할 것이다. 신화학자 바슈라르는 물을 재생과 사랑, 죽음과 영혼의 상징으로 풀이한다. 문학공간으로서 바다 혹은 강은 더욱 그러하다. '공후인 청산별곡'이 예외일 수는 없다. 이제 삼국유사 의 고조선조에 나오는 곰의 상징이 농경생활로 접어 들면서 물신의 보람으로 바뀌어 쓰인다. '곰'에 걸림을 둔 이야기의 보기를 더듬어 볼 수 있다('금강' 부분을 참조). 공주의 곰나루 전설이나 구례, 또는 중국의 후민 마을의 곰사당 이야기, 대구의 연구산 이야기의 자료에서 곰이 물과 깊은 걸림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도 풀이하였듯이 유목사회에서 농경사회로 바뀌면 곰의 상징성은 그 속내를 달리 하기에 이른다. 물신과 땅신-지모신 상징을 떠 올리는 구실을 '곰'이 맡게 된다. 같은 말이라도 쓰임이 달라지면 뜻이 달라지니까 말이다. 거북과 걸림을 둠에 있어 먼저 거북의 생태를 보자. 거북은 물과 뭍을 고루 다니며 배고픔에 오래 견딘다. 물가의 모래땅에 구멍을 파서 알을 낳고 굴안에서 새끼를 기른다. 마치 곰이 굴안에서 사는 모습과 비슷하다. 민요나 땅이름 자료에서 '거북'의 또 다른 말인'검(거무 거미)'은 곰(고마)의 소리마디틀과 같은 것으로 보이며 암시하는 바가 크다. 민간신앙에서의 물신앙 분포는 아주 폭이 넓으며 모습이 다양하다. 반드시 신령한 '거북-검(곰)'으로만 드러 나는 건 아니며 직접 무당이 물신굿을 정성스레 올린다. 예컨대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물신굿의 분포는 어떠한가. (물신앙의 분포) 용당별신굿(문경호계)동해안별신굿(울진)무지개샘제사(경산용성)칠성바우제(경산용산)용담제(경주현곡)하회별신굿(안동하회)청송약수제(청송진보) 조왕신굿(영일군죽장) 참으로 물에 대한 믿음은 깊고 넓다. 마치 샘물이 모여 내를 이루어 바다에 이르듯이 말이다. 그뿐인가. 삼국유사 의 박혁거세 부분에 나오는 신비스러운 우물 '나정'과 그의 부인 알영과 걸림을 보이는 '알영정'의 경우도 물의 신앙과 깊은 걸림을 보여 준다. 물이 있으매 온갖 삶이 보금자리를 튼다. 풀이한 바와 같이 금호강의 '금'은 소리상징으로 보아 물이요, 구멍이요, 뭇목숨을 거느리는 자애로운 어머니가 아닌가. 금호강은 어머니 강이요, 겨레 만대로 이어 살 삶의 터전. 한데 이게 웬일인가. 먹다 버린 쓰레기로, 공장이나 농장의 폐수로 오염되어 작은 피라미조차 살 수 없게 되어 가다니. 우리가 우리의 젖줄이요, 어머니를 못 살게 하고 있다니 말이 되는가. 안된다, 안돼. '금'과 땅이름의 걸림 빛이 있는 곳에 그림자가 따르듯이 강이 흐르는 데면 자연스레 사람 사는 마을이 이루어 지고 여름지이가 일어 나는 법. 118키로나 되는 금호강이 조상신 숭배를 뜻하는 어머니강이라면, 그 물줄기를 따라 만들어 진 둘레에 '금'과 같은 뜻을 보람으로 하는 공간들이 생기게 마련. 방언으로는 이들 가장 영향력이 있는 말의 영향을 물결에 기대어 개신파(改新派)라고 이른다. 금(곰, 고마)의 소리마디 틀은 '자음-모음-자음-모음'으로 미루어 볼 수 있다. 이 틀에 맞추어 이르는 땅이름은 크게 두가지로 나눈다. 우리 글자가 없어 한자를 빌어다 땅이름을 적었던 때가 있다. 이르러 글자 빌림 시기라고나 할까. 한자의 뜻을 빌면 훈차(訓借)요, 소리를 빌면 음차(音借)가 된다. 말은 있으되 이를 적을 글이 없었으니 달리 할 길이 없었기 때문. 뜻빌림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땅이름엔 웅(熊) 부(釜) 구(龜) 현(玄) 흑(黑) 음(陰) 칠(漆) 계열의 땅이름이 있다. 각 계열에 따른 땅이름 지도를 그려야 할 것이나 몇 가지 보기로 대신한다. (뜻 빌림의 땅이름들) 웅진(공주)웅천성(창원)웅암(음성)웅곡(선산)웅고산(의주)웅산(창원)웅남(순천)웅도(영흥)웅령(진안)웅림(회양)웅양(거창)웅이(갑산)웅지(여산)웅현(전주)웅포(함열)구미(선산)구포(부산)구성(김해)구산령(안동)구산포(칠곡)구호(하양) 부곡(창녕)부산(부산)부곡포(웅천) 음죽(음성)현풍(현풍)현성왕(玄聖王)(신라) 물신앙을 드러내는 땅이름은 예서 멈추지 않고 용(龍-미르辰 훈몽자회 )으로 벌어져 나아 간다. 이는 용이 물을 다스리는 물신상징의 이정표가 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불교가, 유교가 들어 오면서 수호신으로서 용을 받들어 모셨기에 더욱 강력한 신앙으로 승화되었으며 권위는 물론 많은 땅이름에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다(용성 용천 구룡 용전(경산)용계 화룡 용호 용화 용신 회룡 용전 오룡 용소 용계(영천지역)용수 용계(달성)등). 한편 소리빌림은 어떠한가. 주로 금(金 琴 錦 今)계열이 땅이름에 가장 많이 있고 감(검) 공(궁)계열의 땅이름도 보인다(금호 금물 김천 김해 금성 금락/감천(외감 중감 내감 가물 거물)/고모령(경산)공산(달성)공주(공주)공암(공주)궁동(대덕) 등). 나무의 큰 줄기에 작은 가지가 벋고 많은 꽃잎과 잎새를 거느리듯 금호강은 자애롭고 정갈한 어머니의 그 모습을 그리면서 낙동강으로 든다. 그래도 그 물위에 푸른 하늘이 되비친다. 비록 오염으로 찌들었을지라도.
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1. 강은 우리의 어머니 백마강(白馬江)의 뒤안 돌팔매를 던져도 닿을 수 있는 거리 강을 사이에 두고 나는 여기에 너는 거기에 있다. 언제나 건널 수 있던 강이 오늘은 왠지 건널 수가 없구나. (남락현의 '강을 사이에 두고'에서) 말 없는 강물이 흐른다. 그것도 흰 말의 기상으로 모래톱에 물자국을 남기면서 말이다. 한 시대의 삶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백마를 탄 거룩한 지도자가 나타나서 어두움을 밝히는 횃불이 되어 주기를 바란다. 벗어남이랄까. 어지러운 현실을 뛰어 넘는 초월주의와 같은 것일 게다. 푸른 삶, 푸른 하늘에 대한 그리움이 있기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백제의 하늘가에 저녁놀이 물들고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진군의 나팔 소리와 함께 깃발을 펄럭이던 때. 망한 나라의 겨레를 이끌고 도침 스님, 흑치상지 장군과 함께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백마의 기세를 드높이고자 했던 복신(福信)은 의자왕의 아들 풍장을 왕으로 내세우는 한편 일본에 구원병을 보내달라고 한다. 일만여명의 일본인 구원병은 백강(白江)어귀에 이르렀고 이를 맞이한 백제의 군인들은 나당 연합군에 맞서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다. 대세는 기울었는지라 다른 길이 없었다. 백제와 일본군은 싸우다 물에 빠져 죽는 길 밖에는. 여기 백강의 자리가 정확하게 어디인가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주장들이 있다. 백강을 백마강(白馬江)이라 부른 건 무슨 까닭인가.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성을 칠 때다. 마침 강에는 안개와 구름이 비바람으로 뒤덮여 건널 수가 없었다. 때에 한 늙은이가 나타나서 이르기를 '백제의 의자왕이 밤에는 용이 되고 낮에는 사람이 된다. 하지만 지금은 싸움 때라 왕이 사람으로 바뀌지 않아 그렇다.'고 하였다. 이야기를 들은 소정방은 백마의 머리를 베어 미끼 삼아 물속에 잠긴 용을 낚아 올렸다. 이윽고 안개와 구름이 걷히게 되어 강을 건너서 백제성을 빼앗았다. 지금도 고란사 맞은 편에, 용을 낚았다 해서 조룡대(釣龍臺)가 있다. 무슨 낚시가 백마를 미끼로 할 만큼 크며 나라는 바람 앞에 등불인데 백말 머리 하나 먹고 그리도 쉽게 의자왕이 손을 들었단 말인가. 용은 왕을 떠 올린다. 왕이 입는 옷을 곤룡포라 하거니와 용이 그려져 있다. 앉는 의자를 용상(龍床), 그의 얼굴을 용안(龍顔)이라 하는바, 어지러운 이야기를 퍼뜨려 민심을 당나라 쪽으로 기울게 하려는 얘기가 아니었던가. 삼국사기 등의 거리를 보면 백강(백마강)의 자리는 전라도의 내포, 더러는 전북의 동진강, 더러는 충청도의 웅진강일 거라는 가설이 있다. 주로 일본 사람들이 내세운 것으로 백제와 신라군이 싸운 곳을 중심으로 한 생각들이었다. 이와는 달리 도수희(1983)님은 부여의 소비포 옛 소부리, 사비성, 사불성이라 불리우는 '사비'계의 분포로 보아 백강은 사비하와 같은 이름이라고 풀이하였다. 또 백강은 지금의 부여에서 군산포에 이르는 강을 통틀어 백강이라 했을 가능성을 들고 있다는 것이다. 하면 '사비 백강(백촌강白村江 백마강) 기벌포 장암'의 맞걸림이 이루어지게 된다. 조선왕조 중기의 시인 이승소의 '부여회고'란 글에도 백강(白江)이 나온다. 한자의 뜻으로 보면 백(白)은 '희다'는 말이다. 희다의 '희'는 ㅎ(日)에서 비롯한 형태로 보아 'ㅎ 희, ㅅ ㅅ'와 같은 맞걸림이 있음을 알겠다. 이는 일종의 소리의 넘나듦으로써 마찰음끼리의 닮음이라 할 것이다. 흔히 입천장소리되기로도 풀이한다. 지금도 사투리말에서는 희다(ㅎ다)는 '시다(새다)'로 말하지 않는가. 이두말로 보면 백(白)은 'ㅅ'과 같다(유서필지 이두편람 나려이두 등 참조). 그럼 백강의 백과 'ㅅ(새) 시'와는 어떤 걸림이 있을까. 시대와 지역을 달리 하면서 말도 그 소리가 다르게 쓰이기 마련. 이는 또 '새(시)'와는 어떤 걸림이 없는지. 하나의 형태를 이루는 낱말이 쓰이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표현된 걸 변이형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ㅅ'은 'ㅅ(새 시)'의 변이형이란 말이 된다. 백강은 새마을 곧 초촌(草村)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소부리 곧 부여의 본디 이름인 새마을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성주탁 1982). 국립박물관의 조사자료에 힘 입은 바가 크다. 이르자면 초촌면의 송국리에서 옛 선사시대의 유물이 상당수 발견되었다는 거다. 새마을은 소부리로부터 동남쪽으로 30여리쯤 떨어진 곳이다. 옛 사람들이 백마강쪽으로 자리를 옮겨 삶의 뿌리를 내린다. 새로이 이사한 곳에 이름을 부친 곳을 소부리로 볼 수 있다. 새마을의 '새'의 방사형이 소부리이며 백강(ㅅ강)이라고 보면 좋을 듯하다. 향약구급방 같은 옛 자료를 보면 초촌의 초(草)는 모두 '새'로 나오며 당시의 소리값은 '사이'가 된다. 중세기에는 '새'의 소리가 두 홀소리인 '사이'로 났기에 그러하다(속새 박새 등). 따지고 보면 'ㅅ' 또한 '사이'임에 틀림이 없다. 지금도 사이나 경계를 '살피'라 함을 떠 올리면 그런 가능성이 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말이 문화의 되비침이라면 '새 - 사이'는 여러가지 복합적인 뜻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 방위로는 동쪽이요, 삶의 터전으로는 강과 산의 사이 또는 강과 강, 산과 산의 사이에 삶터가 새로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면 백강(白江)은 '사이(살비 사비)강'이란 뜻이 된다. 살비(사비)에서는 울림소리 가운데에서 비읍(ㅂ)이 약해져서 떨어져 이루어졌다면 어떠할까. 경우에 따라서 백강은 마한과 진한의 경계 - 사이가 될 수도, 고구려와 백제의 사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소리로 보아 비슷한 음절과 값을 드러내는 말이 쇠다. 지역에 따라서는 쇠가 '새(쎄) 시(씨)'로도 쓰이는데 이는 청동기 곧 쇠그릇 문화가 들어 오면서 붙여진 이름들이다. 쇠붙이로 된 농기구로 여름지이를 하니 말 그대로 농업생산이 크게 늘어 나고 새로운 삶에의 힘이 생긴다. 우선 먹거리이며 옷가지, 집 따위의 모든 것이 아주 손쉽게 풀린다. 하니 산에서 가람으로 벌판으로 사람들은 옮겨살이를 하게 되고 새로운 마을을 이루게 되었던 것. 아니면 흐르는 물이 넘쳐 흐르다가 떠 밀려 온 흙이 쌓여 새로운 물줄기가 골을 터 흐르나니 이르러 새로운 강 - 백강이 될 법도 하다. 부여의 옛 이름인 소부리의 '소'와 사비의 '사'와 함께 '사이'란 뜻으로 쓰일 수도 있는 법. 방위 상징이라면 백강의 백(白)은 서쪽이 된다. 그러니까 초촌 - 새마을의 서편을 흐르는 가람이 된다는 겐가. 불가에서 서쪽은 특별한 뜻이 있덜 아니한가. 극락왕생하는 깨끗한 나라 - 정토(淨土)를 떠올릴 수도 있긴 하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길목의 밤을, 수 없는 밤을 별빛으로 더러는 달빛으로 밝히면서 끊임없는 수도자의 굽이를 돌아 흐르는 강은 아닐런지. 망한 나라 백제의 겨레가 되었을망정 왕생극락에의 꿈을 안아 자지 않고 깨어 흐르는 물처럼 오래고 먼 그리움을 주는 지를 그 누구라서 알리오. 물속으로 떨어진 꽃다운 이들이 다시 연꽃으로 피어 올라 강물에 비치는 달빛으로 어린 제 모습을 들여다 보며 하나 둘씩 바람에 제 몸을 떨구는 것을 어이 하랴. 그 맑은 별님의 노래를 따라서 지는 것을. 빛나던 강과 언덕의 성채, 강릉 거북아 거북아 수로(水路)를 내 놓아라 남의 부인 앗아간 죄가 얼마나 크냐 네 만일 따르지 않고 내 놓지 않으면 그물로 잡아서 구워 먹으리 ('해가(海歌)'에서) 순정공의 아내 수로는 얼굴이며 모습이 빼어나 큰 산이나 못 또는 강이나 바다를 지날 때면 언제나 귀신들에게 붙들려 가곤 했다. 해가는 신라 성덕왕 때, 강릉 태수의 벼슬길에 오른 순정공의 아내인 수로가 바다의 용에게 이끌려 간 것을 되찾아 내기 위하여 노인의 말대로 여러 사람이 모여 함께 부른 노래이다. 이어 바다의 용은 수로부인을 모시고 나와 순정공에게 되돌려 준다. 해서 평화로이 강릉태수의 자리에 앉게 된다. 통과제의라 할까. 필시 바다의 용은 바다의 해적이 쳐들어 온 것으로 미루어 볼 수 있다. 여럿이 마음과 힘을 합하여 되찾은 것이니 여기 수로는 빼앗긴 영토 또는 사람이 아닌가 한다. 이런 풀이의 가능성은 <처용가>나 <구지가>에서도 드러난다. 강릉엔 옛부터 바닷가에 예(濊)라는 겨레가 살고 있었다. 또 달리는 철국(鐵國) 하서랑(河西良) 하슬라(何瑟羅)라 한다. 신라 경덕왕 때 와서 명주(溟州)로 고쳤다가 고려 충렬왕 때 와서 강릉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예'의 소리상징은 무엇인가. 당시 말소리가 없어 한자를 빌어 썼을 뿐 본디 우리말이다. 한자의 뜻과 소리를 빌어 쓰는 수가 있으니 앞의 것은 훈차라 하며 뒤의 것은 음차라고 한다. '예'는 한자의 소리를 빌린 음차로 볼 수 있다. 소리의 바뀜을 함께 고려하면 예는 셰(歲羽切)에서 비롯된다. '셰'에서 시옷의 소리가 약해지고 떨어지면 '셰 예'가 되니 말이다. 여기 '셰'는 중세시대만 해도 겹홀소리 '서이'로 읽었을 것이다. 하면 신라이전이니 분명 '예 - 셰 - 세 - 서이'의 걸림에서 '서이'로 읽을 게 뻔하다. 사투리말의 분포로 보면 '세(새)'는 '새(쌔) 세(쎄) 시(씨)'라고 한다. 쇠의 경우도 거의 비슷한 소리임은 물론이다. 그러니까 예나라나 철국(鐵國)이나 같은 뜻을 드러냄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쇠 - 세(쎄) 새(쌔) 씨 시 등). 말은 그 말을 쓰는 겨레들의 문화를 되비친다. 그것은 말을 가지고 그들의 사회와 역사를 이루어 가기 때문이다. 문화사적으로 보면 태양숭배를 하는 겨레가 쇠그릇문화를 가지고 돌그릇문화를 누리던 겨레들을 다스리게 된다. 해우러름에 관한 자료들은 보편적으로 드러나는 믿음이자 삶의 모습이었다. 태양을 본디 우리말로는 '해'라고 한다. 해는 사투리말이나 중근세기의 자료로 보아 새 쇄 세 시(씨)로도 쓰인다. 그럼 '예 - 철 - 해'는 사이를 바탕으로 하는 낱말의 겨레라는 말이 되는데 뜻으로 본 이 말들의 걸림은 어떻게 되는 걸까. 사이와 말겨레들의 고리 겨레를 이름은 물론이요 나라이름으로 불리우는 '예'는 셰(세)에서 비롯된다. 사투리에서 쓰이는 소리를 보면 태양이 새(쇄)로 나는 것이나 쇠붙이가 새(쌔)로 나는 것이나 하늘을 나는 새의 음상은 같은 소리로 나는 말겨레라고 하겠다. 이들 말 사이에서 드러나는 뜻바탕의 걸림은 무엇일까. 이 말들은 모두 사이를 바탕으로 하는 말이라 생각하면 좋을 듯하다. 쇠의 경우 나무도 돌도 아니면서 때로는 돌보다도 더 강하며 때로는 나무보다도 더 부드러운 물체가 쇠붙이 아니던가. 한마디로 나무와 돌의 사이쯤 되는 속성을 보임은 물론이요, 돌을 쓰던 돌그릇문화 사회에서 일대 혁명과도 같은 문화의 태양 - 해와 같은 영향을 미쳤으니 가히 신기원을 이루었다 할 것이다. 해 또한 그 다름이 아니다. 해는 앞서 이른 것처럼 '새'라고 하는바, 이 또한 '사이'라 읽는 것이 당시의 소리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떠 올랐다가 다시 그 사이로 모습을 감춘다. 해가 떠서 지는 것은 예외 없이 되풀이 된다. 해서 날과 달 그리고 한 해를 헤아리는 셈단위의 동작을 뜻하는 '헤아리다(세아리다 - 헴(셈)'의 밑바탕이 된다. 사이란 말만해도 그러하다. 아래아로 쓰는 'ㅅ'에서 비롯 '사이'가 되기에 이르렀음은 이미 밝혀진 일이다. 하늘을 날으는 새의 경우, 중세어 자료는 사투리말을 보더라도 '사이(시 새)'와 같은 말로 쓰였음을 알게 된다. 길짐승도 뛸 짐승도 아니고 하늘과 땅 사이를 자유롭게 날으면서 삶의 보금자리를 찾아 다닌다. 하긴 사람도 분명 동물이면서 신도 인간도 아닌 그 사이쯤 되는 존재들이다. 자신을 가르쳐 준 이를 높이어 부르는 말에 '스승'이 있다. 본디는 무당이란 말로서 제정일치 시기에는 거룩한 대제사장을 뜻하였다. 오늘날에는 선생을 높여 부르는 말로만 쓰이지만. 말의 짜임새를 보면 사이를 드러내는 '슷(間)'에 씨끝' 응'이 녹아 붙어 이루어진 말임을 알 수 있다( 훈몽자회 참조). 사이라면 무슨 사이일까. 이른바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사이일 것인즉 앞에서는 제사장으로, 뒤에서는 행정의 머리로서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이미 삼국유사 의 환인천제가 바람, 비, 구름 스승(師)을 데리고 내려 왔다고 했으니 스승의 부름말이 쓰이기 시작한 지는 오래되었다. 옛적 우리들의 거룩한 스승들의 눈에 비치는 자연물에는 이미 태양 - 해(새)에 대한 믿음으로 '새(사이)'라는 의미가 흘러 녹아 신격이 부여되었을 것이다. 미루어 생각해 보면 강릉의 경우도 큰 예외는 아니다. 고려 충렬왕 이후로 불리워진 이름이다. 말 그대로 강과 언덕 - 강언덕(江陵)이다. 여기 강은 개울이 될 수도 있고 바다일 수도 있다. 반면에 언덕은 물의 북쪽이라 할 산자락으로 풀이 되기도 한다. 대관령으로 이어지는 태백산맥의 줄기라고나 할까. 신라 경덕왕 때 강릉을 일러 바다명(溟)의 명주라 하였음을 보더라도 강릉의 강은 바다가 주요한 대상이라고 미루어 보는 것이다. 바다 곧 물을 중시하였던 해양국다운 이름이다. 뒤로는 큰 산으로 둘러 싸여 천연의 성으로 이루어진 나라였으니 바다로부터 침략만 막아낸다면 별 시름이 없는 부족국가였음을 짐작케 한다. 신라 이전에는 강릉을 하슬라(何瑟羅), 하서랑(河西良)이라고 하였으니 이 또한 바닷가의 입지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한자에 대한 칼그렌(Karlgren)의 자료를 살펴 보면 '하 - 가(何)'의 걸림을 찾을 수 있다. 하면 '하슬라(하서랑)은 가슬라(가서랑)'의 소리로 읽었음을 알겠다. 그럼 가슬라(가서랑)가 바닷가란 말인가. 가장자리를 뜻하는 '가(邊)'의 사투리말을 보면 '갓 가 가생이 가상 가싱이 가서리 가상다리 가상사리'와 같은 여러가지의 변이형들이 쓰인다. 여기서 가슬(가서)과 걸림이 있는 말은 '가서리 갓'이라고 하겠다. 가령 '가서라'의 '가서'가 가장자리라면 나머지 '- 라'는 무엇인가. 신라의 '- 라'가 땅 혹은 국가를 말하듯이 가서라의 '라'도 땅이나 나라를 뜻하는 말로 보면 된다. 그러니까 큰 산 태백산맥의 가장자리이자 동해 바다의 가장자리란 말이다(대동지지 참조). 이 곳은 신라 무열왕 때만 해도 군사 요충지로서 상당히 주목을 받았던 공간이다. 해서 군제(軍制)로 보아 지금의 서울인 한산정(漢山停)과 함께 하서정(河西停)이라 했다. 흔히 큰 진영이 있는 곳을 정(停)이라 한다. 정은 군대의 주둔지를 이름이요, 지킴의 터전이 된다. 강릉은 본디 세 읍을 어우러서 하나의 큰 마을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시련의 강언덕을 넘어 강릉대도호 풍속이 좋을시고 절효정문이 골골이 벌였으니 비옥가봉(比屋可封)이 이제도 있다 할까 - ('관동별곡'에서) 충효열은 유교사회에서 으뜸가는 덕목이다. 충신 효자 열녀가 많이 있어 이를 드러내기 위하여 정문을 세웠다는 얘기. 이 글은 조선왕조 선조 때 송강 정철이 강릉을 노래한 관동별곡의 한 부분이다. 나라가 어지러우면 슬기로운 선비를 필요로 하고 집안이 가난하면 어진 아내를 생각한다. 그렇다면 충신 효자 열녀가 그리도 많을 정도로 강릉엔 옛부터 많은 시련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동쪽 바다에서 쳐들어 오는 왜적이며 북으로 여진이나 말갈족의 끊임없는 침략에 우리의 조국이 어려움을 겪을 때 언제나 강릉은 그 시련의 현장이었던 터. 해서 신사임당같은 어진 지어미가 있어 율곡 이이 선생을 길러 겨레의 스승되기에 이르지 않았던가. 대동지지 에 따르면 강릉은 옛부터 있어 왔던 세 고을 - 연곡(連谷) 우계(羽溪) 동제(棟堤)가 어우러서 이루어진 것으로 상정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예 곧 셰(세) 나라는 작은 세 고을의 부족들이 합하여 이룬 나라란 풀이도 된다. '사이'를 바탕으로 함에는 셋의 '세'도 다를 바 없다. 가령 하늘이 첫째(하나)이고, 땅이 둘째(둘)이라면 그 사이에 으뜸가는 사람이 셋째(세)가 되는 셈이 아닌가. 물론 이 것은 하나의 미루어 본 짐작이지만. 연곡은 도호부의 북쪽 30리에 있으며 본디 그 이름은 볕양자 양곡(陽谷)이었다. 경덕왕에 이르러 다시 지산(支山)으로 고쳐 불렀다. 뒤에 다시 고려 현종 9년에 명주가 다스리는 영현에 들게 된다. <용비어천가>에 하였듯이 물의 북쪽을 양이라 한다(水之北曰陽). 강릉의 남쪽을 지나면서 가장 중심이 되는 남천의 북쪽 땅이라면 어떨까. 연곡의 연(連)은 이을 연이요, 양곡의 양(陽)은 볕인데 무슨 걸림이 없을까. 땅이름이나 비교언어학으로 보아 태양을 해(새)라고 하기 전에는 '니(님)'가 아니었나 한다. 가령 '일(日) - 니(泥) - 열(熱) / 일(日) - 니(日本)' 등의 자료에서 그러한 가능성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연곡이나 양곡은 모두 태양을 뜻하는 '니'와 걸림이 있다 치자. 하면 지산(支山)과는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지. 태양을 가리키는 말은 고유어에서 두 계열이 있으니 하나는 '새(해)'요, 다른 하나는 '니(낮 - 날)'가 그것이다. 새(해)는 앞서 풀이한 듯이 철기문화 곧 쇠그릇 문화를 가리킴이며 '니(날 - 낮)'는 돌그릇문화 곧 고인돌과 같은 거석문화를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새(해)의 변이형이 '새(쌔) 세(쎄) 시(씨)'임을 떠올리고, 지산의 '지'가 당시 이런 파찰음소가 자리잡지 못했을 거라는 풀이를 받아 들이면 '지산 시산'이 되어 곧 '해돋이 산' 혹은 '해맞이 산' 또는 다른 지역과 경계를 둔 산이란 말이 되지 않을까. 한편 우계(羽溪)는 어떠한가. 강릉의 남쪽 60리에 있으며 본디의 부름말은 우곡(羽谷)에서 말미암았다는 것. 또 다른 이름으로는 옥당(玉堂)으로 불리운다. 그러다가 경덕왕에 와서 당나라의 주군현식 지명을 고치는 중국화의 과정에서 우계현으로 바꾸면서 삼척군의 영현을 삼았다. 우곡은 우리말로 '우골'이 된다. 맨 위 쪽에 있는 골짜기이니 높을 수밖에. 고려 우왕(禑王) 8년 왜적이 우계로 침입한 것을 보더라도 군사적인 요새지임에 틀림 없다. 이 때 강릉도원수 조인벽을 중심으로 해 30여급의 왜적을 목베인 일이 있었음은 널리 아는 일이다. 연곡 우계와 함께 동제(棟堤)현은 어떤 곳인가. 강릉 서남 65리의 임계(臨溪)역 자리에 있던 옛 고을이다. 원래의 이름은 동토(東土)현으로 부른다. 그러다가 경덕왕에 이르러 동제로 고쳐 쓰게 된 것이다. 한자의 뜻 풀이로는 대들보의 구실을 하는 언덕이 된다. 한편 동토라 함은 동쪽의 터전 곧 새터 - 동토가 된 것이다. 옛 것이 새 것으로 바뀌어 져 나아가듯 연곡 우곡 동제의 세 고을이 강릉으로 어우러 큰 부족국가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강릉은 강언덕이다. 바다에서는 왜적이, 북방에서는 여진과 거란이 쳐들어오므로 강릉의 강과 언덕은 시련을 겪어 왔다. 고려 현종 20년 이후로 여진과 거란의 침략이며, 공민왕 21년 이후 조선왕조 태종 때까지 6번에 걸친 왜적과의 싸움이 있었다. 한반도의 허리쯤에서 조국강산을 지키는 성이요, 굳건한 문지기 구실을 한 곳이 강릉이다. 기실 따지고 보면 강원도의 강원(江原)은 강릉 원주의 줄임으로도 볼 수 있으나 이는 강릉의 또 다른 별칭이라 해서 지나칠 게 없다. 둘 다 물이요, 언덕이 아닌가. 공양왕 기사년 12월 왜적이 강원도에 쳐들어 왔을 적에 이를 물리친 신유정(申有定)이란 이를 바로 강릉부사로 삼았음은 이러한 방증이 되기에 충분하다. 시련을 겪으므로 개인이나 한 단체는 성장하게 마련. 통일된 조국의 봄이 멀지 않았음을 알리는 푸른 바다의 갈매기며 파도가 우리들의 가슴으로 다가선다. 높게 드리운 산과 거칠 것 없이 출렁이는 바다의 그 기상으로 말이요.
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1. 강은 우리의 어머니 영산강과 용 섬진강의 두꺼비 백마강의 뒤안 빛나던 강과 언덕의 성채 어사매, 그 가로지름의 속내 비파처럼 아름다운 금호강 강과 삶 강을 건너며 영산강과 용 세곡 나르는 선주(船主) 어찌나 교활한지 쌀로는 받지 않고 돈으로만 챙기는구려 서울에선 쌀값이 4백냥이나 눅다니 이번 행차 한번에 논밭을 살테지 (김려의 '황성리곡'에서) 혹심한 가뭄이 든 영산강. 쌀값이 서울보다 사백냥이나 비싸기 때문에 배삯을 돈으로만 받아 선주는 서울 가서 싼 세곡을 사서 바치고 남는 돈으로 논밭을 산다. 하긴 탐관오리란 언제나 있었다. 맹자에 사람 고기 먹는 양혜왕이나 뭐 다른 게 있을까. 민초들은 죽겠다고 걱정이 태산 같은데 한편에선 벼슬하는 이들이 장사하는 이와 짜고서 딴 주머니를 찬다. 참으로 속이 뒤집히는 얘기다. 길잖은 물줄기일망정 말 없는 영산강은 흘러 바다로 든다. 사람들의 기쁨과 서러움을 함께 섞어서 씻어 버리듯이. 그 피어린 민초들의 한을 싣고서. 담양(潭陽)의 용고개 혹은 용못에서 흘러 광주 나주 함평 무안을 지나 목포에 이르러 바다로 흐른다. 길이는 115키로. 그러니까 삼백리 정도다. 호남의 뜰에 생명의 젖줄을 대는 조국의 어머니요, 오아시스다. 조선왕조 중종 7년(1514) 무렵에는 영산포가 강에서 으뜸가는 항구도시였다. 오히려 목포보다도 말이다. 영산강 유역에서 거두어 들이는 곡식이나 세금으로 바치는 세곡들을 여기서 모은다. 해서 서울로 보냈으니 이 때 물건을 관리하던 곳이 영산창(榮山倉). 그러면 영산강은 영산포 혹은 영산창에서 따온 이름일까. 일단 의심해 볼 수는 있겠다. 영산강의 내력을 더듬어 볼 차례. 가람의 큰 샘줄기는 담양에 있는 추월산(秋月山)의 용연분소(龍淵噴所)에서 비롯된다. 산의 동쪽엔 두 개의 큰 방아확처럼 생긴 바위못이 있다. 못 아래로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바위에는 굴같은 구멍이 있으니 이 바윗굴에서 샘이 흘러 공중에서 내리는 폭포를 이룬다. 그러니까 못 밑에서 물이 솟아 폭포처럼 흩뿌림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여기가 용연분소가 된다. 사람들은 바위구멍(岩穴)을 용이 뚫어 놓은 것이라 말한다. 혹 용암시대에 공룡이라도 헛디뎌 난 구멍인가는 알 수 없는 일. 용이 기어 다닌 자욱이 바위에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게다. 옛 적 벼슬하는 이가 용연분소에 와서 용의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머리를 내민 용의 빛나는 눈을 보고 벼슬하는 이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놀라 죽었으니 지금도 용연분소 아래에 안렴사와 따라온 기관(記官)의 무덤 자리가 있다고 전한다. 해서인지 용연의 주위에 용연에 제사하는 곳을 만들어 봄 가을로 용에게 정성껏 제사를 드린다. 특히 가물면 여기 와서 비를 오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면 비가 오곤 했다(신증동국여지승람). 비는 우리 몸의 피와 다를 바 없다. 땅에서 수증기가 하늘의 구름으로 모여 다시 땅으로 떨어져 도는 흐름이나 피의 그것과 같지 않은가. 소리상징으로 보아 비보다 피는 거센 파열음이 될 뿐. 기원적으로 비와 피는 물을 가리키는 '미'에서 말미암는다(미추흘 내미의 '미'). 생명현상을 있게 하는 게 바로 물이며 불이 아닌가. 그러니까 미- 비 - 피는 한 낱말의 겨레로서 '미'의 또 다른 말들이다. 가장 바탕이 되는 소리상징이 '미'이기 때문이다. 용못에서 나온 물이 흘러 북으로 담양을 싸고 돌아 창평현의 죽록천과 만나 광산(光山)의 굼개(구멍개穴浦)에서 어우러져 여울진다. 담양의 북으로 흐르는 내가 원율천(原栗川)이다. 대동지지에도 없어진 고을(縣)로 드러났지만 담양의 옛고장인 것으로 보인다. 본디는 밤마을(栗支)이었는데 뒤에 밤언덕(栗原)으로 바뀌었고 담양의 옛 이름인 가시개 혹은 갓개(秋子兮)에 속하는 오래된 마을. 가시가 있는 열매가 밤이니까 추자혜(개) - 율지 - 원율 - 원율천으로 이어지는 걸까. 흔히 밤하면 사과 배 감 밤의 밤만을 떠올린다. 말의 밑을 캐어보면 '벗다 - 벗음(밧음) - 바암 - 밤'으로 되어 껍질을 벗겨 먹는 것을 '밤'으로 일컬었다(훈몽자회). 하면 밤은 당시에 여섯 곡식(六米)에 드는 먹거리였으니 원관념은 '양식'으로 풀이하여 지나침이 없다. 밤과 걸림을 둔 땅이름은 어디서나 찾아 볼 수 있다. 결국 담양의 담(潭)은 용못을 이르며 먹거리 생산의 주요한 땅이란 말이 된다. '양'은 물의 북쪽이니 담양은 용못의 북쪽에 발달된 들판이란 속내가 되지 않을까. 영산은 용천산(龍泉山)에서 용천에서 나온 내를 원율천이라 한다. 대동지지를 보면 용천산의 용천에서 나와 남쪽으로 흐른다고 했다. 여기 용천산에는 용추 곧 용못이 있다. 함께 동아리 지으면 추월산의 용연분소나 용천산의 용추나 모두가 용이 뚫었다는 바윗굴에서 나온 샘줄기에 그 말미암음을 두고 있다. 만주말로 용은 륑(Rung)이라 하고 한자로는 영(靈)이라고 적는다. 따지고 보면 용은 물을 다스리는 절대 능력의 소유자이니 신령할 수밖에. 한마디로 농업생산의 열쇠를 쥐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용을 두려워 하고 숭배하는 것이다. 이르자면 물신으로서 용이 우리의 의식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때에 알맞게 비가 와야 곡식이 넉넉하고 삶의 꽃이 핀다. 그래야 온갖 문화의 열매가 달리지 않겠는가. 먹는 게 하늘이라고 먹거리가 우선이고 다음에 집과 옷이 아닐까. 참으로 물신은 위대하며 숭배 받아 마땅하다. 물과 땅은 우리 목슴살이들의 뿌리며 고향이니까 그러하다. 영산강의 영산은 용산이며 영산의 또 다른 땅이름에 지나지 않고 본뜻은 같다고나 할까. 추월산(秋月山)이 담양의 바람막이 진산(鎭山)이라면 삶의 울을 두른 게 금성산성(金城山城)이다. 담양부의 북쪽 약 20리쯤에 있는 돌성이다. 조선의 선조임금 30년에 다시 성을 쌓고 산에 기대어 성을 만들었다. 효종 4년 다시 내성을 쌓았으니 둘레는 610걸음이요, 밖에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4,940걸음이더라. 성에는 지키는 참호가 72소나 되고 못이 5개며 우물이 27개곳이나 된다. 성을 지키는 이가 부사를 겸하여 지냈으니 성의 중요함을 보여 준다. 금성(金城)이라, 쇠잣으로 읽기도 한다. 아니면 금은동의 금으로 봐야 할까. 필자 보기로는 용천은 용이 뚫어 놓은 바위굴의 '구멍'과 걸림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옛말로 구멍은 '구무(굼)'였는데 '굼'을 적을 한자가 없으니 금(金)으로 적은 것이다. 용에 대하여 잠시 떠올려 보자. 용은 생각으로 그려 낸 파충류의 동물. 인도와 중국에서 옛 적에 있었다고 하는데 몸뚱이는 뱀과 비슷하며 억센 비늘에 발이 넷이라 한다. 뿔은 사슴에, 눈은 귀신에, 귀는 소에 비슷하다고 했다. 날개가 있어 하늘을 나는 비룡도 있다. 바람과 비를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봉황 기린 거북과 함께 아주 상서로운 짐승으로 의미가 부여된다. 개천에서 용 난다고 하거니와 용을 훌륭한 사람에 비유함을 보아도 용의 상징성을 짐작할 수 있다. 임금과 관련한 말에 용이 많이 있으니 '용안, 용발, 곤룡포, 용상' 등이 모두 그러하다. 임금이 거처하는 궁전이나 절간을 보라. 거의 용의 모습을 담지 않은 건축물이 얼마나 될까. 땅이름만 해도 용과 걸림을 둔 곳이 아주 많이 있음을. 용강, 용담, 용산, 미륵이, 미륵고개 등 실로 많은 이름들이 우리의 땅을 가리키며 용소 또는 용못이라 하는 곳은 우리나라 온 누리에 많다. 이 모두가 용신앙이요, 물신에 대한 뿌리 깊은 믿음을 드러냄에서다. 영산창, 영산포도 따지고 보면 금강진(錦江津) 나루에 자리잡은 갯목이다. 달리 금강을 금천(錦川) 혹은 목개(木浦), 남개(南浦)로 부른다. 미루어 보건대, 용이 뚫어 놓은 바윗굴에서 말미암은 강이다. 좋게 미화하여 비단강이 되었다. 겨레의 전통신앙으로 보면 곰신앙의 또 다른 이름으로 보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곰 - 검 - 금 - 감'이 땅이름에 되비친 것이 아닐까. 짐승으로서 곰이라면 그뿐이지만 조상신, 그것도 어머니신으로서 뒤에 물과 땅의 신이 되었으니 결국 곰신앙과 용신앙이 서로 녹아 붙은 것이다. 본디 용신앙은 불교에서, 유교에서 수호신으로 삼았지만 농경사회에서는 물신이 되기에 이른다. 오늘날 목포로 불리우는 목개와 남포는 어떤 걸림이 있는가. 나무목을 쓰기는 했지만 바다에서 강으로, 벌로 들어오는 '목'에 그 본뜻을 둔 것으로 보인다. 나무는 나모(남(ㄱ))라고 옛글에 하였으니 그 소리를 따오면서 영산강의 제일 남쪽의 갯목이 되니 남녁남을 썼던 것으로 보면 어떨까. 세월 두고 흐르는 용샘에서 나온 영산강은 오늘도 내일도 호남의 삶터를 축여 준다. 우린 살다 오래고, 먼 고향으로 돌아 간다. 한 줌의 흙이 되어서라도 영산강의 온 소리를 진혼가 삼아 서러운 역사의 한을 씻고 달래며 이를 거름 삼아 탐스러운 꽃으로 열매로 되살아 날 것을 믿는다. 저 영산의 믿음으로. 그 영험함으로. 섬진강과 두꺼비 전라도 광양땅에는 옛부터 전해 내려 오는 이야기가 있다. 이름하여 두꺼비 전설. 섬거(蟾居)에 살고 있던 수만 마리의 두꺼비가 떼를 지어 섬진나루로 15리 길을 들어 갔다. 해서 두꺼비 섬자 섬진강이 된 것이다. 한 때는 모래, 가람, 모래내, 다사강, 대사강으로 불리웠다. 왜 하필이면 섬진강에만 두꺼비가 그렇게 많이 떼지어 살았을까.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섬진나루의 내력을 다음처럼 풀이하고 있다. 남원부의 잔물나루에서 남으로 흘러 진주 화개현에 이른다. 서쪽으로 가면 용왕연(龍王淵)이 되고 바닷물이 들어 온다. 화개현의 남쪽 59리쯤에 섬진(蟾津)이 있는데 나루의 동쪽이 진주 악양현의 어름이 된다.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에 든다. 고려 때에는 섬진강 물이 바다의 조수에 밀려 거꾸로 흘러 어려움을 겪었다(以此水爲背流). 두꺼비와 걸림을 보이는 강원도 원주의 섬강(蟾江) 부분을 보자. 근원은 홍천 공작산에서 나와 남으로 흘러 횡성 서쪽이면서 외로 흐른다. 남천을 지나 관어대에 이른다. 화사천(花似川)을 지나 달내강이 되고 안창역을 지난다. 서남으로 원주에서 50리쯤에 섬강이 된다. 앙암진(仰岩津)에 드는데 강변에 두껍바위(蟾岩)가 있어 강이름을 섬강이라 했다는 줄거리. 바위나 바다에 잇다은 바위 모양이 두꺼비처럼 생겨서 그렇게 부를 수도 있고 두꺼비의 이야기 때문에 그리 부를 수도 있다. 글 쓰는 이는 '섬'의 소리에 주목하여 섬진강을 떠 올려 보고자 한다. 네 면이 물로 싸인 육지를 '섬'이라 한다. 옛말에서는 '셤(용가 53)'이었다. 미루어 보건대 '셤'은 '셔다(셰다)(<석보상절 9-13>)'의 파생명사가 아닌가 한다. '셔다(셰다)'는 '사이'를 뜻하는 '셰(셔 세 새 시 혀 헤 해 히)'에 동사접미사 '- 다'가 어울려 이루어진 움직임말이다. 섬이 되려면 물 사이로 솟아 올라야 한다. 마찬가지로 두꺼비로 치면 물과 뭍의 사이에서 언제든지 적응할 수 있다. 섬진나루도 예외는 아니다. 강과 바다의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뭍으로 갈수록 경상도(하동)와 전라도(광양)의 '사이'가 되지 않는가. 더 위로 거슬러 오르면 구례에서 두 갈래로 크게 갈라진다. 서쪽으로는 보성이요, 북쪽으로 흐르면 전북의 순창 진안에 이른다. 섬진강의 줄기를 중심으로 하여 산줄기가 울타리 같이 둘러 싸여 있다. 결국 강으로 둘러 싸인 곳이 광양, 순천, 낙안, 보성이다. 곧 섬이 되는 셈이다. 앞에서 두꺼비 바위는 곧 섬바위로도 불러 마땅할 것이다. 이형석(1990. 한국의 산하)에 따르자면 섬진강의 뿌리샘은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에 있는 봉황산의 상추막이골 테미샘이라는 것이다. 영산강과 함께 호남의 벌을 적시며 흘러 나린 섬진강은 임진 정유의 왜란 때에 죽창으로 맞서 조국을 지키던 우리 역사의 현장이다. 어디나 그렇지만 섬진강을 사이해 호남과 영남의 삶이 더불어 건강해 질 것을 기다려 본다. 모든 사람의 삶은 바로 서로의 걸림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므로.
서울의 어원 1) 서울의 명칭 우리말로 한나라의 도읍지를 뜻하는 '서울'이란 이름은 어떻게 생겼을까?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서라벌이라 이름지었으며, 또 이를 서벌이라고도 했다 한다. 당시의 신라는 나라 이름과 수도의 명칭을 같은 말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신라의 서울인 서라벌 또는 서벌이나 나라 이름인 신라, 시림 등으로 부르는'ㅅ.ㅣㅂ.ㄹ''로 '이 모두 지금 우리말의 수도를 뜻하는 서울의 어원으로 보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백제의 수도인 소부리와 고려의 수도인 개성(송악), 후고구려의 수도인 철원 등도 다소 차이가 있지만 우리말의 수도를 뜻하는 서울의 어원인 'ㅅ.ㅣㅂ.ㄹ'로 보고 있다. 이와같이 우리나라의 도읍지는 왕조가 바뀌고 시대가 바뀌어도 부르는 칭호는 'ㅅ.ㅣㅂ.ㄹ''로 ' 곧 서울이었으며, 그것은 새국가가 수도를 옮겨 이룩한 '새 벌', '새 땅'의 의미를 지녔다. 2) 서울의 시대별 이름 서울은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서울은 백제 온조왕 때에 위례성이라 했는데, 이는 역사상 서울에 붙은 최초의 이름이다. 위례는 곧 우리말의 우리, '울'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나아가 '우리'라는 말도 울이 변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백제 근초고왕 26년(371년)에는 한산이라 했고, 뒤이어 북한산, 북한성이라는 이름도 보이는데 한산은 '큰 산', '한 뫼'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고구려 장수왕이 서울을 점령한 후에는 그전 이름대로 북한산군을 두었다가 장수왕 63년(475년)에 이 곳을 남평양이라 했는데, 남평양은 고구려 도읍지 평양의 남쪽에 있는 평양을 뜻한 것으로, 고구려가 이 곳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점령한 후에는 이 곳에 새로운 주를 설치했으므로 신주라고 했다가 4년 후인 557년에는 그전 이름대로 북한산주라 했고, 또 11년 뒤인 568년에는 고을 다스리는 곳을 이천으로 옮기고 이름도 남천주로 바꾸었다. 한양/ 진평왕 때 (604년) 다시 그전대로 북한산주를 두었으며, 통일신라의 경덕왕 16년 (757년)에는이 일대를 한주라 하고 서울에는 한양군을 두었으니, 한양이란 이름은 이미 조선왕조가 아닌신라 경덕왕 때부터 쓰기 시작했다. 한자식 땅 이름에서는 산은 남쪽, 또 강은 북쪽을 양이라하므로 크다는 뜻을 지닌 한과 북한산 남쪽, 한강의 북쪽을 뜻하는 양을 합하여 한양이라 한 것으로본다. 고려 태조 때(918년) 서울 부근을 통털어 양주라 하였는데, 양주는 버들골을 뜻하므로 고구려때의 남평양이라는 이름과도 서로 뜻이 통한다. 고려 문종 때는 서울을 남경이라 했다. 그 후 조선 왕조가 고려의 옛 수도인 개성을 떠나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한성으로 불렀다. 1910년 일제 강점기에는 경성으로 고쳐서 일제 36년간 불렸다. 그리고 해방이 되면서 우리말로 수도를 뜻하는 서울이란 이름을 찾아쓰게 되었다. http://www.metro.seoul.kr/kor/overview/kidspage/myseoul-index.html 지금 서울의 어원은 새울 그러니까, 새로운 울타리, 새로이 형성된 지역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한울=하늘과도 비슷한 어원으로 쓰입니다.
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1. 강은 우리의 어머니 두만강과 조선 왕조 천평이 끝 없는데 홍송 숲 깊어 신시의 옛 터전을 찾는 다리만 동에는 홍단수 서엔 허항령(虛項嶺) 새로워 어제 같은 천왕당 있다. (최남선의 '조선유람가'에서) 겨레의 영산(靈山) 백두산의 천지못에서 동으로 흐른 물줄기. 이름하여 두만강이 되었다. 천평(天坪)이라, 단군이 신의 나라를 편 '하늘벌'이다.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소나무의 숲이 파도처럼 끝이 없고 천지에서 흐르는 물은 서쪽의 압록강과 더불어 두만강의 물줄기가 갈리는 분수령이 된다. 중국과의 경계를 표시한 정계비(定界碑)가 서 있음도 우연한 일은 아니다. 비록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18세기 초 청나라 측에서는 오라총관 목극등을, 조선에서는 참판 박권과 함경감사를 앞 세워 나라의 경계를 정하여 정계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고종 때까지 우리는 토문(土門)이다, 저들은 도문(圖門)이다를 놓고 엇갈린 주장을 하였다. 이 문제로 간도(間島)에 대한 영토문제가 미해결의 숙제로 떠 오른다. 정계비는 일본의 혜산진 국경수비대가 없애 버렸고 터만 있다. 여진족이 점령한 뒤로 백두산을 청(淸)의 발상지로 보아 마구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대동지지를 따르자면 청나라의 목극등이 옮겨 적은 내용은 아래와 같다. 토문(土門)의 뿌리샘은 수십리를 살펴 보아도 물의 흔적이 보이질 않는다(流至數十里不見水痕). 화산작용에 따른 돌밑으로 흐르는 물이 백리쯤 가서 갑자기 엄청난 양의 물로 흐른다. 물이 없음은 어찌된 까닭인가. 밑샘이 시작되는 어름 해서 혹은 흙으로, 돌로, 혹은 나무 울타리로 경계를 삼을 수 있다. 두만강(토문강)이 시작되는 부분의 내를 보다회산천(寶多會山川)이라 한다. '보물이 많이 모여 있는 산의 내'란 뜻이다. 그렇다. 여기 산은 백두산일 게 분명하고 백두산이니 그 안에 인삼 녹용 불로초며 목재는 물론이요, 나무 열매와 온갖 짐승이 살아 간다. 하면 이 게 바로 보물의 산이 아니겠는가. 냇물의 가장 윗 부분은 대홍단수(大紅丹水)가, 아래 부분은 소홍단수(小紅丹水)가 된다. 대소홍단수가 동으로 흘러 두만강 일명 어윤강(魚潤江)으로 이어 진다. 짐작컨대 붉은 물(紅丹水)이라 함은 화산현상에 따른 용암을 말하는 게 아닐까 한다. 여진말에 '두만(豆漫)'은 만(萬)을 이른다. 우리 국어의 중세어 자료를 보면 천(千)으로 쓰인다(월인천강지곡 등). 많은 물이 두만강에 모여서 합하여 흐른다고 해서 천강(千江)이 된 것이다(衆水至此合流故名之). 많은 샘이 한 데 흘러 한꺼번에 큰 물(巨水)이 되었다는 풀이로 볼 수 있다(용비어천가). 조선왕조와 두만강 이태조의 증조 할아버지 익조(翼祖)가 경흥에서 5천호 벼슬살이를 할 때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人皆歸心). 다른 벼슬들이 이를 시기하여 익조를 죽이려고 하였다. 20일 동안 사냥 갔다 온다고 해 놓았으나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물 긷는 할머니한테서 음모가 있었음을 알아 차리고 가족과 함께 배로 두만강을 따라 적도(赤島)섬에 다다르게 되었다. 뒤를 쫓는 적의 무리 300여 선봉장이 다가 왔다. 익조는 손씨부인과 함께 말을 갈아 타고 섬으로 피하고자 했으나 말로는 건널 수가 없었다. 홀연히 물이 빠져 백마를 타고 건너자 적들이 뒤쫓아 왔다. 어찌 된 일인지 물이 다시 밀어 닥쳐 익조만 무사히 불근섬으로 피하게 되었는바, 이는 모두가 하늘의 뜻이었다는 것. 거기서 구덩이를 파고 움막살이를 하였다고 전해 온다. 뒤에 덕원으로 옮아 가 자리를 잡고 살면서 조선왕조 세움의 터를 닦는다. 민족시인 윤동주의 고향으로 이름 난 간도는 만주 길림성의 북간도와 서간도를 싸 안은 두만강가의 일대를 일컫는다. 송화 우수리 두만강 사이에 있다 하여 간도(間島)가 된 섬. 19세기 이후 많은 한국인들이 들어 가 살고 있으며 일제 때에는 독립군이 활약하던 보금자리이기도 했다. 말할 것 없이 간도는 우리의 영토이다. 중국자료(1979)에 따르면 사는 사람의 6할이 조선족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한국인을 흔히 조선족이라고 부른다. 을사조약 뒤로 만주지방을 개발하는 데 따른 이권을 노린 일본은 간도를 중국(청)에게 넘겨 주는 조건을 내 세웠다. 참말로 희한한 일이다. 제 땅도 아닌데 누구 마음대로 넘겨 주고 받았단 말인가. 그게 모두 겨레의 힘 없음을 탓할 수 밖에.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윤동주의 '참회록'에서) 대동강과 한(韓)겨레 임이시여 물을 건너지 마시오 임께서는 물을 건너시는구려 임은 그예 물에 빠져 죽었다네 임아 이 일을 어이 할거나 (백수광부의 아내 지은 '공후인'에서) 고조선 때의 일이다. 술병을 차고 흰 머리의 백수광부(白首狂夫)가 강을 건너다 이내 빠져 죽는다. 그를 뒤 따르던 아내는 비파와 같은 공후인을 끌어 안고 따라 가면서 백수광부에게 가지 말라고 애타게 말린다. 쓸데가 없다. 무슨 생각일까. 공후인으로 애절한 사연을 노래한 뒤 백수광부를 따라 물 속에 몸을 던졌다는 것이다. 푸른 강물엔 새벽 노을만 붉게 타고 있을 뿐. 이 광경을 지켜 본 나루의 뱃사공 곽리자고가 집에 돌아 와 아내 여옥(麗玉)에게 그 사연을 얘기하자, 여옥은 공후인의 곡조를 본 받아 타니 듣는 이마다 울지 않는 사람이 없더라(聞者莫不墮淚而掩泣焉). 서러운 사랑의 이야기는 중국으로 옮겨져 이백을 비롯한 많은 시인들이 노래로 읊었다. 이 노래가 지어진 문학의 현장이 대동강이다. 대동이라, 모두가 하나로 된다는 게 얼마나 고귀한 일인가. 1700남짓 크고 작은 시냇물이 모여 이루어졌다 해서 대동강인가. 고구려 중천왕(中川王) 때 대동(大同)이란 미인이 있었다. 왕은 대동을 후궁으로 삼아 끔찍이도 아꼈다. 시앗을 본 왕비 연씨는 대동을 서위(西魏)나라의 임금에게 보내려고 애를 썼으나 임금이 듣질 않았다. 이를 안 대동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믿고 교만해지기 시작했다. 왕비 연씨를 내 쫓으려는 궁리를 하였다. 마침 왕은 며칠 째 신하들과 함께 사냥을 갔다가 돌아 왔다. 왕비가 대동을 미워한 나머지 가죽부대에 자신을 넣어 물에 던져 버리려 했다고 일러 바쳤다. 중천왕은 대동의 말이 거짓임을 알고 대동을 가죽부대에 넣어 강물에 던져 죽였다. 이 사연으로 대동강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럴 싸하다. 분수를 알아야지, 분수를. 그러면 대동강을 본래 패수(浿水)라 하였음은 어떻게 풀이할 수 있을까. 신증동국여지승람 의 자료를 본 삼아 대동강의 내력을 더듬어 본다. 패수(浿水)는 겨레의 상징 평양부 동쪽 1리쯤에 있으며 패강(浿江) 혹은 왕성강(王城江)이라 한다. 강의 뿌리샘은 둘이다. 하나는 영원군 가막동(加幕洞)에서 비롯된다. 가막동은 우리말로 '가마골(감골)'인데, '감(가마 검 금 굼)'은 '가운데 신(神) 가마(釜)'란 말이다. '감(검)'은 단군왕검의 '검(儉)'과 같은데 바탕은 곰신앙에 터한 것이며 나중에는 지모신 곧 물신과 땅신 우러름으로 바뀌어 간다. 덕천군의 경계에 이르러 삼탄(三灘)과 어우러지고, 개천군 경계에 이르러서는 순천강(順川江)이 되고 다시 성암진 나루를 지난다. 자산군 경계에 들면서 우가연(禹家淵)을 이루고 이로부터 동으로 흐르면 강동군 경계에 들면서 잡파탄(雜派灘) 여울이 된다. 대동강의 또 다른 뿌리샘 하나는 양덕 문음산(文音山)에서 발원, 서남으로 흘러 성천지역에서는 비류강(沸流江)이 된다. 비류는 온조와 함께 고구려에 나아가 백제를 일으킨 사람이다. 미루어 보건대, 비류강에서부터 바다를 따라 백제를 일으킨 것이 아닌가 한다. 강은 꺾이어 흐르면서 서강진(西江津) 나루에서 잡파탄내와 만나 함께 흐른다. 마침내 두 줄기의 가람이 큰 가람을 이룬다는 뜻으로 마탄(馬灘)이라 이른다. 평양의 동쪽으로 흐르면서 백은탄(白銀灘) 여울이 되었다가 바야흐로 큰 하나됨의 대동강을 이룬다. 다시 서쪽으로 흘러 구진익수(九盡溺水)가 되는데 다른 이름으로는 마둔진(麻屯津)나루라고도 한다. 이는 맏나루 곧 나루 중에서 제일 큰 나루란 말이다. 이어 순안 쪽에서 흘러 내린 평양강과 합쳐서 중화현의 배나루강(梨津江)이 되며, 물의 흐름은 쌍용총으로 알려진 용강의 급수문(急水門)을 나와 바다로 든다. 대동강은 패강(浿江) 또는 패수(浿水)라고 했다. 본래의 이름인 패수의 물이름은 주로 한(韓)겨레들이 사는 지역의 물이름으로 쓰였다(韓水名). 또는 물가패로 하여 '물가(水涯)'의 뜻이 중심을 이루기도 한다.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열전(列傳) 을 보면 패수의 풀이는 이러하다. 중국(漢)이 요동땅의 옛 요새를 다시 쌓고 경계를 패수로 하였다(浿水爲界)는 것이다. 위만이 망명하여 동으로 가서 패수를 건너 왕검성에 서울을 정하고 압록강으로써 패수를 삼았다고 풀이한다. 당서(唐書) 에 이르기를, 평양은 본시 중국의 낙랑군이라 했다. 산으로 둘러 싸여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남으로는 패수를 변경으로 한다. 여기가 지금의 대동강이다. 또 고려사(高麗史) 에서는 평산지방의 저탄(猪灘)을 패강으로 적고 있는 바, 백제의 시조는 패강을 북쪽의 경계로 삼게 했다는 것이다. 앞의 흐름으로 보면 패강 혹은 패수는 어느 강이름이나 한(韓)겨레가 사는 지역의 물이름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라고 할 수 있다. 패강이 압록강 대동강 저탄 요동의 패수 등으로 널리 쓰이기 때문이다. 두루 알려진 공통의 이름은 대동강뿐이다. 말 그대로를 풀이하면 '크게는 같다'의 뜻이 된다. 대동(大同) - 크게 하나됨의 바탕은 무엇일까. 한 핏줄을 타고 나와 살아 가는 겨레의식을 드러낸 것이 아닌가 한다. 패수의 '패(浿)'를 겨레와 걸림을 둔다면 어떨까. 겨레란 본디 '한 몸에서 갈라져 나온 것'을 이른다. 대동강의 큰 흐름은 하나이나 그 큰 가람을 이루는 시내는 1700여개의 작은 물이 모여 이룬 것이다. 우리말로 강을 '가람'이라 한다. 가람은 '가르다'에서 말미암은 이름이다. 가람이 흐르는 곳에 문화가 발생하고 마을이 이루어진다. 고을과 고을, 나라와 나라가 갈리는 경계선이 된다. 마치 낙동강이 신라와 가락국의 경계선이 된 것처럼 말이다. 앞서 이른 잡파탄(雜派灘)의 '파(派)'가 암시하는 바가 크다. 파(派)를 갈래 파로도 읽기 때문이다. '패' 또는 '파'는 갈래 곧 가람이요, 더 나아가서는 겨레가 된다. 이를테면 파(派)의 뜻을 따라 쓴 훈차(訓借)식 이름이란 말이다. 강은 모두가 패수요, 가람이니까. 대동지지(大東地志) 에는 대동강이 대통강(大通江)으로 나온다. 크게 통하는 강이란 말인가. 대동의 동(同)을 중국 사람들은 통(tong)으로 읽는 까닭에 그리 썼는지도 모른다. 못 다 한 묘청의 한(恨) 저 넓은 들 동쪽엔 점 찍은 듯한 산이 있어 긴 성을 끼고 도는 도도한 강물이여 (大野東頭點點山 長城一面溶溶水) (김황원의 글에서) 동인시화(東人詩話) 를 따르면, 김황원(金黃元)은 고려 때 이름 난 선비로서 부벽루에 올라 앞서 지은 글이 불만스러워 글 써 붙인 누각의 현판을 불살라 버렸다. 하루가 다 하도록 난간에 기대어 애써 얻어 지은 것이 머리의 글이다. 글이 풀리지 않았음인지 심히 울고 갔다는 것. 역사로 보면 고조선에서 고구려, 고려 때까지 서울과 같은 머릿고을이 되게 한 것이 대동강이다. 어찌 오늘의 서울에 비길 수가 있으랴. 잘 알려진 바로 대동강을 징검다리로 해서 잃어버린 왕도의 권위를 찾고자 한 묘청의 일을 더듬어 본다. 이른바 서경 천도의 일이다. 고려 인종이 서경을 돌아 보게 되었다. 묘청(妙淸)과 백수한(白壽翰) 등이 큰 떡덩어리를 만들어 가운데에다 큰 구멍 하나를 낸 뒤 끓는 기름을 넣어 가지고 대동강 물에 집어 넣었다. 마침내 기름이 물위로 떠 올랐다. 보기에는 마치 오색의 안개구름으로 보였다. 백수한 등이 인종에게 상황을 알리었다. '신룡(神龍)이 토해 낸 오색구름인 듯합니다. 참으로 놀랍고 좋은 일이 있을 징조입니다(非常之嘉瑞也). 많은 신하와 함께 축하례 드리기를 청하옵니다.' 이에 왕은 문공인(文公仁) 등을 보내어 현장을 잘 살피라 했다. 살펴보매 기름 덩어리 때문임을 알게 되어 임금에게 아뢰었다. '기름이 물 위로 떠 오른 것인즉 이상합니다.' 바로 헤엄 잘 하는 이로 하여금 떡덩어리를 찾아내어 이들의 말이 거짓임을 알았다. 해서 묘청은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해 죽임을 당하였고 평양으로 서울을 옮기자는 서경천도설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음을 강은 알고 있다. 차라리 삼국통일이 대동강 중심으로 되었더라면, 더 나아가 만주 중심의 일이었더라면 우리 배달의 겨레에게 오늘날 남북 분단의 아픔은 없었을 것을. 그 부끄러움의 몽고침입, 임진 정유의 난리며 경술의 침략이란 있을 법이나 한 노릇인가. 그건 바로 온 겨레가 하나 되는 대동의 큰 맥이 약해지므로서다. 하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는 돌아 가는 법. 대동의 하나되는 겨레의 슬기가 굽이쳐 흐르는, 그래서 인류평화라는 바다로 가는 큰 뜻이 이루어 질 날을 우리 모두는 빌어 본다. 한 맺힌 대동강에의 다시 만남을 기다리면서. 비 갠 언덕에 풀빛 더 푸르네 남포로 그대를 보내려 하니 슬픈 노래가 앞을 서고 어느 날에 대동강이 마르겠소 세월 두고 헤어짐의 눈물이 더해 갈 것을. (정지상의 '친구를 보내며')
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1. 강은 우리의 어머니 한강의 뿌리, 우통수(于筒水)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므로 꽃 좋고 열매 또한 많으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긋지 않아 내를 이루고 바다로 가나니 ('용비어천가' 중에서) 시작이 있으매 끝이 있게 마련이다. 뿌리가 깊을수록 삶의 가능성은 두터우며 그 열매 또한 소담스럽지 않으랴. 비유하건대 조선왕조의 나라 세움이야말로 하늘의 뜻을 따른 것이기에 뿌리가 깊어 오래도록 펴 나아갈 것임을 노래했다. 용비어천가의 '용'은 물론 세종의 한아비 되는 이들을 이른 것이다. 보는 이에 따라 한강의 뿌리샘이 어딘가 하는 데는 서로 다르다. 옛부터 전해 오는 자료를 떠 올려 보도록 한다. 먼저 한강의 말미암음은 오대산의 우통수(于筒水)라는 주장이다. 동국여지승람 이나 대동지지 등에는 모두 이 샘이 한강의 뿌리샘이라 적고 있다. 강릉도호부의 서녘 150리 쯤에 오대산이 있다. 산의 서쪽 그러니까 장령(長嶺) 아래에 샘이 솟아 흐르니 이것이 한가람의 말미암음이라는 것. 조선왕조 초기의 학자인 양촌 권근의 기록을 다시 생각해 보자. 산의 서쪽 장령 아래 구덩이 같이 깊숙한 샘[檻泉]이 있었으니 물맛이 다른 데 비할 바 없이 뛰어나고 그 물의 깊이나 양 또한 그러하여 우통수라고 한다. 서쪽으로 이어 흐르기를 수백리. 마침내 한강이 되고 바다에 이른다. 한강이 많은 갈래의 물을 받아 들이기는 한다. 하지만 우통수가 그 말미암음을 이루는 물줄기가 아닌가. 빛깔이나 맛이 변함이 없기가 마치 중국의 양자강과 비슷하다. 이어 한(漢)이란 이름으로 이 강물의 부름말을 삼는다(동국여지승람). 같은 오대산 지역에 금강연이 있으니 여기를 한강의 뿌리로 보는 자료도 있다(세종실록). 잠시 대동지지의 기록을 되짚어 보면, '강릉의 서쪽 110리 쯤에 월정사가 있다. 그 옆에 우통수가 있는데, 그 아래녘에 사면이 모두 넓적한 바위로 둘러 싸여 있어 못을 이룬다. 물은 폭포수로 쏟아져 내린다.'고 했다. 봄이면 사람의 키만한 남목어(餘項魚)가 떼를 지어 물살을 거슬러 오른다. 못에서 고기들이 물 위로 뛰어 오르기를 겨루다가 더러는 벼랑 위로, 더러는 반쯤 오르다가 떨어져 내리는 고기들도 있다는 기록. 금강연(金剛淵)의 경우 우통수의 아래녘이라 하였음을 보면 한강의 제일 위에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면 우통수가 한가람의 가장 상류라고 본 것이다. '우통'이란 어떤 말이며 한강과의 걸림은 어떠한가. 우선 글자대로 풀이하면 '우통 - 둥그런 모양의 움에 고여 흐르는 샘물'쯤으로 새길 수가 있을 것이다. 한편 우리말의 소리를 제대로 적을 글자가 없어 한자의 소리와 뜻을 빌어다가 적는 이두식 읽기를 하면 어떨까 한다. 신라 때만 해도 거센소리가 아직 뿌리내리지 못했음을 생각하면 '우통 - 우동'이 된다. '동'의 디귿(ㄷ)을 윗말의 받침으로 보면 '우동 ㅇ 웃 울(上)' 됨을 미루어 볼 수 있다. 해서 우통수란 '맨 윗물' 곧 가장 위에서 흐르는 뿌리샘이란 말이 된다. 비롯됨은 작고 적지만 그 열매는 무성하다고 한다. 물은 높은 곳 -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게 순리다. 고이면 다시 넘쳐 흐르고 메마른 대지를 적시우고 목숨살이의 어울림의 고리를 빚어 내면서. 더 멀기는 금대산 근대로 접어 들면서 열 사람 열 소리격으로 한강의 발원지에 대한 주장들이 있어 왔다. 그 가운데 고목샘 제당궁샘 금대샘을 머리로 해서 한강의 젖줄기를 살펴 본 이야기를 더듬어 본다(이형석, 1990, 한국의 산하). 금대산은 태백산의 한 갈래로서 금대산의 북쪽 골짜기가 한강의 뿌리샘임을 밝혀낸 것. 이 골짜기에는 3개의 샘과 한 개의 웅덩이가 있어 마르지 않는 깊고 먼 한강의 어머니가 된다. 한강의 하구인 유도산정에서 금대산까지는 497키로. 지금껏 알려진 길이보다도 7키로쯤 짧은 거리이다. 금대산 꼭대기에서는 북동쪽으로 제당궁샘이요, 북서쪽으로는 고목샘이 흐르기 시작하고 금대샘은 위 두 샘줄기가 어우르는 곳의 약간 윗쪽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제 이 세 줄기의 샘물들은 약 2키로쯤 내려가다가 검룡소 곧 용못에 이른다. 서해에 살던 용이 강줄기를 타고 올라 와서 이 못에 있다가 하늘로 올라 갔다는 얘기. 용은 혼령 - 물을 다스리는 물신을 드러냄이요, 지모신(地母神)이다. 물은 삶의 밑천이니 신을 모시듯 귀하게 여기고 그 신을 받들어야 한다. 독제(瀆祭)라 하여 냇물신 즉 물신에게 제사를 올렸으니 오늘날에도 제사를 올린다면 마땅히 금대산에 와서 물신제를 모셔야 옳을 것이다. 흔히 방위로 보아 물신은 북쪽이며 빛깔로는 검은 색 상징을 든다. 이를 샤머니즘 때까지 거슬러 오르면 우리 선조들이 믿고 바라던 곰신앙에서 비롯하지 않았을까 한다. 고목(古木) 아래 있다 하여 고목샘이라 했다지만 이를 신라 적의 이두식으로 읽으면 목(木)의 미음(ㅁ)을 '고'의 받침으로 보면 바로 '곰'이 된다. 소리 마디의 머리에서 기역(ㄱ)이 약해지면 '곰(굼) - 홈(훔) - 옴(움)'과 같이 되어 쓰인다. 방언에 따라서는 어머니를 '옴마 암마 움마 오매 어무이'라 하거니와 어머니는 곧 조상신이자 물신과 땅신으로 섬겨 왔던 생명의 신이다. 곰을 짐승으로만 본 게 아니고 토테미즘에서는 조상신으로 보고 믿기 때문이다. 또 지금도 고목샘이 있는 골을 곰추나무골 또는 움추나무골이라고 부름은 이러한 방증이 될 것이다. 제당궁샘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따지고 보면 금대샘의 '금'도 곰의 변이형이니 같은 뜻을 드러 내는 다른 곳의 이름으로 보면 어떨까. 땅이름이 바뀌는 과정에서 '금(金 錦 琴)'과 모(母)의 맞걸림이 보이기 때문이다(금강 - 熊川 金城 - 母城). 옛 자료의 우통수와 금대산의 샘물은 그 장소가 사뭇 다르다. 하지만 한강의 제일 윗샘(上泉)이라는 뜻에서라면 다를 게 전혀 없다. 그러니까 옛 어른들이 한강의 뿌리샘으로 본 오늘날의 우통수는 태백산의 금대산 줄기의 고목샘 곧 곰샘 - 어머니샘이 되는 것이다. 메밀꽃 필 무렵의 가람과 뫼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 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공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 늦여름 장마가 끝나면 한참 피기 시작하는 메밀꽃. 올해도 어김 없이 메밀의 붉은 대공이 향기같이 애잔하게 피어나건만 효석은 말이 없고 그가 꿈을 키우던 뒷동산 나무 숲에 바람과 새소리만 스산하다. 이야기 속의 허생원이나 조선달, 동이같이 고달픈 삶을 사는 이들에게 달빛어린 메밀꽃이 흐뭇할리가. 어쩌면 그이들에게는 한낱 메밀국수나 메밀적같은 음식을 떠 올리는 먹거리, 돈거리 이상의 그 무엇이었으리. 장에서 장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강산은 그대로 그에게는 그리운 고향이라 했다. 차를 타고 지나가기만 해도 온 몸과 마음이 푸르게 물이 드는 듯하다. 명작의 고향 봉평의 땅이름으로 본 그 내력은 어떠한가. 가장 높은 고장 - 우오(于烏) 신라적에 평창은 울오(鬱烏) 혹은 욱오(郁烏) 더러는 우오(于烏)라고 하였는데 뒤에 백오(白烏)라 하였으니 백오는 경덕왕 때(757년) 고친 이름이다. 이름만 들어봐도 숲이 우거지고 땅이 기름진 고장임을 가늠케 한다. 강원도하면 감자, 감자 하면 평창 아닌가. 겨울로 접어 들면 눈의 나라가 된다. 한국 제일의 용평 스키장이 있으니 말 그대로 하얀 나라 백오(白烏)라 일렀을까. 하긴 그 유명한 메밀꽃하며 감자꽃. 겨우 내내 눈꽃이 핀다. 지금은 없지만 겨울 들어 목화밭에 명다래에 피는 솜꽃은 어떻구. 울오, 우오, 백오의 오(烏)는 땅 또는 부락을 가리키는 씨끝-접미사라고나 할까. '오'가 땅이름 끝에 붙어 쓰이는 예는 용인(龍仁)에서도 볼 수 있다. 용인의 옛 이름은 구성(駒城) 또는 멸오(滅烏)였으니 '멸-용'과 '성-오'의 맞걸림이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럼 '멸'이 용이란 말인가. 그렇다. 옛 자료를 보면 용을 '미르(辰)'라 했음을 알 수 있다(훈몽자회). 성(城)을 '잣'이라 하거니와 한자의 뜻과도 상당한 걸림을 둔 게 아닌가 한다. 오(烏)는 새(사이)로 읽기도 하기 때문. '잣-새(사이)'란 사이를 이르는 말에서 갈라져 나아간 말이고 '잣'의 경우도 옛말에서는 지읒(ㅈ)과 같은 소리가 아직이니까 '잣 삿'의 가능성을 크게 보여 준다. 이제 욱오, 울오, 우오의 '울 우 욱'을 살펴 볼 차례. 이는 모두 위(上)란 뜻으로 경우에 따라 말의 모습이 조금씩 다르게 쓰인 것 뿐이다. 영서와 영동지방이 사이에서 산성의 구실을 하였으며 지역이 높은 곳에 있음을 밑뜻으로 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럼 우통수(于筒水)의 '우'는 어떠한가. 한강의 말미암음, 우통수(于筒水) 하늘에 맞닿은 산마루 가을 깊어지자 온 밭에 나락이 가득 오랜 서리와 바람에도 벼랑의 소나무는 꿋꿋하기도 해 산길 오르기가 촉나라보다도 어려워 연꽃 곱게 피는 서대암에서 보천(寶川)태자가 살면서 매일 아침 저녁으로 우통수의 샘물을 길어다가 문수보살에게 다(茶)를 다려 공양했다. 자료에 따라서는 우통수 샘이 한강의 뿌리샘이라 풀이한다(동국여지승람). 다른 물과 달리 우통수의 물은 그 빛이 변하지 않고 다른 냇물과 어울려 흐를 때도 가운데로만 흐른다는 것. 혹시 광천수이기 때문에 물빛이 다른 것 아니었을지. 이름으로 본 우통수의 '우통'은 무슨 뜻인가. 글자대로라면 '대롱과 같이 깊은 물'이다. 한자의 소리를 빌어 우리의 말을 적은 소리 빌림이 아닌가. 글 쓰는 이의 생각으로는 '우통수 가장 위에 있는 물'의 걸림을 바탕으로 한 풀이가 어떨까 한다. 우통의 '우'는 위 아래의 위요, 통(筒)은 위에 있는 '물통' 정도로 보면 좋을 것이다. 좀 더 살펴보면 통의 티읕(ㅌ)은 '우'란 말의 받침으로 볼 가능성도 있기는 하지만. 받침에서는 모두 디귿으로 소리가 나니까 '우통 - ㅇ -ㅇ(웃) 울 우'와 같은 걸림의 고리가 있다는 얘기다. 땅이름의 머리로 돌아가 '우오 - 울오 - 욱오'가 모두 한 뜻 '우(上)'를 밑으로 함을 미루어 볼 수 있지 않은가. 여기 욱오의 욱(郁)은 글자 뜻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 시골말에 따라서는 우(上)를 우그 우게 우기라고 함을 떠올리면 바로 '욱'이란 형태가 나옴을 덧붙여 둔다. 믿음의 터 오대산(五台山) 산의 봉우리이며 솟아오른 받침대도 다섯, 이에 따른 암자도 다섯. 오대산과 5와의 걸림은 예사롭지 않은 듯 하다. 해서 나라안 산 가운데에서 이곳이 가장 좋으니까 부처의 덕을 기림이 길이 흥할 거라는 일연 스님의 말이 전해 오는가(삼국유사). 오대산을 청량산(淸凉山)이라고도 한다. 맑고 서늘한 산. 그래 나라안에서 제일 가는 젖소농사와 맥주거리로 쓰는 호프가 자라는 건지. 다섯 봉우리가 고리 모양으로 나란히 어울렸으니 동엔 만월(滿月), 남에는 기린, 서로는 장령(長嶺), 북에는 상왕(象王)이며 가운데는 지로(指盧)라 했으니 산 봉우리 하나 하나에 부처를 모신 연화대로 떠올려 오대(五台)라 했을 터. 고산자 김정호 선생은 읊조리듯 오대산을 노래하였다. "나라를 걱정하듯 / 길게 패인 골짜기며 솟아 웅크린 바위들이 길게 서쪽으로 늘어섰네. /마치 비단폭을 두른 듯하이 / 온 산에 구름과 안개가 끼일 때면 동쪽으로 손에 닿을 듯한 바다의 출렁거림 / 이게 어디 속세의 모습일라고." 한국전쟁으로 월정사는 불에 탔고 상원사(上元寺)만 옛 모습 그대로다. 어떻게 상원사만 살아 남았을까. 중공군의 힘에 밀려 1.4 후퇴를 하던 국군은 오대산의 두 절이 적의 소굴이 된다고 판단, 작전상 모두 불 사르기로 하고서는 스님들 보고 피하라고 했다. 해서 월정사는 불 살랐는데 상원사는 뜻대로 못했다는 것. 며칠만 말미를 달라고 한 방 한 암 스님은 나머지 승려를 다 내 보내고 스님만 홀로 남아 죽음으로써 절을 지켰던 것이다. 약속한 날짜에 국군들이 가 본즉 목숨을 건 스님의 모습에 차마 할 수가 없어 상원사는 남겨둔 채 물러 갔으니 그 스님에 그 군인들이렸다. 자신의 몸을 던져 그것도 제자들을 다 살려 보내고서 보여 준 방한암 스님의 거룩한 믿음이 오대산의 봉우리만큼이나 높아 보인다. 누구나 저 살기에 급급한 세상인데 말이다. 평창강은 평안천(平安川)에서 가람이 흐르는 곳에 마을이 생기고 삶의 둥지를 틀게 된다. 오늘날에는 흔히 평창강으로 부르지만 김정호 선생의 대동지지 를 보면 사천(沙川)이라 했다. 강(江)이 쓰인 것은 적어도 김정호선생의 후에 일로 여겨진다. 사천은 어떤 냇물인가. 물은 계방산에 밑샘을 두고 흘러내린다. 산의 남서쪽으로 흘러 메밀꽃 필 무렵의 봉평에서 내리는 흥정천을 어우러 오늘의 평창강이 되느니. 다시 대화, 계촌에서 내리는 물과 합세, 남쪽으로 휘돌아 흘러서는 평창읍을 지난다. 이어 영월땅 서면에서 주천강을 맞아들여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김정호 선생의 자료에서는 사천의 사(沙)가 새로움(新)의 뜻으로 풀이된다. 하면 사천이 새로 생긴 물이거나 아니면 산과 산 또는 물과 물 사이에서 이루어진 내란 뜻이 된다. 물이 맑고 깨끗하니 모래 또한 그럴 수 밖에. 춘천의 소양강과 함께 송어 양식장으로는 단연 손 꼽히는 곳이 바로 평창이다. 산 같은 데서 솟아 흐르는 맑고 깨끗한 물이 아니면 살지 않는 송어떼들. 하긴 그래서인가. 평창의 동쪽 30리쯤에 참샘이 나오는 굴이 있지 않은가. 본디 정선과 경계를 두는 곳에 용암못이 있어 연촌강(淵村江)이라고 불렀다는 것. 연촌강까지 이르는 내를 평안천(平安川)이라 하였다고 전해 온다. 내의 남쪽에 새부리같은 샘이 있어 용틀임인듯 솟아 오르기를 자주 한다는 것이니 오늘의 송어장이 바로 이 샘물을 쓰는 것은 아닌지. 오늘의 평창은 평안천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너브내굴의 전설 메밀꽃 필 무렵의 봉평과 대화의 어름에 너브내굴(廣川窟)이 있다. 석회석으로 이루어진 자연동굴인데 아주 깊다. 전해 오기로는 검은 강아지가 굴로 들어가 태기산 서쪽으로 난 갑천쪽으로 빠져 나왔는데 하얀 강아지로 바뀌었다는 거다. 하기야 흰 돌가루에 희게 보일 법도 하다. 여름부터 늦가을에 이르도록 밭에다 두고 캐는 먹거리 감자. 세상의 먹거리 중에서 감자처럼 널리 먹는 뿌리 열매가 있을까. 깨끗한 청정채소를 길러 나라 안팎으로 이바지한다면 못할 것도 없다. 화란 사람들은 그 많은 꽃을 길러 비행기로 다른 나라에 판다는데. 물이라면 으뜸인 걸 잘 추슬러서 살아있는 물을 서울로, 상해로, 동경으로 낼 수도 있을 법한데. 힘이 있어야 한다. 평창이 이르듯 나라가 평화롭게 번창할 힘이 있어야 한다. 땅이름 평창에 담긴 선인들의 슬기를 오늘에 되살려야 한다. 우리 손으로, 우리 머리로. 해서 세상이 놀랄만한 너브내굴의 전설을 꽃 피워야 하지 않을까.
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1. 강은 우리의 어머니 연구산의 돌거북 은은하기로는 마치 자라산 같다네 세상에 욕심없는 구름이 드리우듯 이 땅을 다스리는 영령이 보일듯 하이 대자연의 이법을 따라서 단비가 내리는 것을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봉우리가 동그란 산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미군의 통신부대가 들어서면서 산봉우리를 깎아 내 오늘의 산 모습이 된 거북산. 달리 자라같다고 하여 자라바위산이요, 정월 대보름날이면 달구경을 한다 해서 달맞이산(月見山). 더러는 조선왕조가 끝날 무렵 순종 때 점심 때를 알리던 포를 이곳에서 놓았다 해서 오포산으로도 불리웠다는 것이다. 사가(四佳) 서거정 선생이 본 연구산, 거북산은 거북의 영험함으로써 지역의 번영과 안녕을 빌었으니 거북은 참으로 신과 통하는 데가 있나 보다. 거북은 뿌리의 상징이니까. 영남전설지에서는 비슬산, 용두산, 수도산과 함께 연구산은 땅속의 화산띠가 이어지는 곳이라 불이 자주 났다는 것. 그래 고을 원님이 불을 다스린다고 용두산에는 얼음 창고를 만들었고 연구산 서쪽 기슭에도 석빙고를 설치하였다. 이어 물신 상징의 돌거북을 만들어 산꼭대기에 올려 놓은 뒤부터는 불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때인지는 뚜렷하지 않으나 읍을 처음으로 세울 적으로 한 기록도 있다(동국여지승람).거북의 머리를 남쪽으로, 꼬리는 북쪽으로 해서 땅에 거북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스며들게 했다는 얘기. 거북은 현무(玄武)라 하거니와 물신이요, 땅신이다. 신(神)은 현무요, '검'이라 한다. 거북의 신령함은 물과 땅신을 섬김으로 이어지나니 조상이 지켜온 우리 땅과 우리의 강을 소중하게 가꾸어 나아가자는 지향성에의 몸짓이 아닐까. 달구벌을 처음 개척할 때 할 수 있다는 자기확신과 예언을 돌거북으로 옷을 입힌 것이다. 돌거북은 언제나 말이 없다. 온 몸으로 온 날을 기다릴 뿐이다. 가장 크고 좋은 강, 한강(韓江) 지는 해 쓸쓸히 산을 넘고 맑은 봄을 실은 강은 스스롭게 흘러가는데 바람이 잔잔하여 고기들 입질하고 숲이 어두우니 새들 다투어 돌아 오네 보리 이랑 사이로 익은 길이 눈에 삼삼하네 사립문 바라보고 잠시 서 있노라니 시골 풍경 정말로 맑고 그윽해 (다산시선에서) 한반도의 허리자락을 감도는 겨레의 젖줄. 그리운 금강산에서 말미암은 샘줄기가 설악산, 오대산 쪽에서 흘러내리는 소양강과 홍천강이 춘천에서 어우러진다. 한편 소백산과 속리산을 발원지로 하는 냇물이 태기산 쪽에서, 치악산에서 비롯한 남한강이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어우러져 가장 크고 출렁이는 푸른 빛으로 겨레의 삶에 다가 선다. 윗글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한강을 바라보며 당신의 느낌을, 정한을 글로 옮긴 것이다. 한강을 에두른 삶이 어디 뭇새와 고기뿐이겠으며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꽃송이뿐이리오. 우리 겨레가 살아 온 기쁨과 슬픔이며 아픔을 우리의 강, 한강은 알리라. 강물은 서울에 이르러 남산(목멱산)을 휘돌아 흐른다. 옛적 서울을 한산이라 했으니 한강의 이름도 한산하(漢山河)라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소박하게 이름을 풀어 보면 한산(漢山)은 한나라 곧 중국의 산이요, 한나라의 강이란 말이 된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음 그 자체이다. 이게 어찌하여 한나라 - 중국의 땅이란 말인가. <용비어천가>에 보면 한양을 한수북(漢水北)이라 해서 조선왕조에서조차 중국의 속국이라는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기왕지사 한자를 빌어 쓰는 마당에 마한 진한 변한의 한(韓)을 두고 한수한(漢)을 쓰다니. 겨레의 젖줄인 강물의 이름까지 어지럽혀 놓았으니 사대주의가 이 지경에 이르면 가히 일품이라 하겠다. 신라 때는 한강을 북독(北瀆)이라 하였으니 북에서 흘러 내리는 개천이란 뜻으로 새겨진다. 고려 때는 사평도(沙平渡)요, 세상에서 이르기를 사리진(沙里津)이라 했다. 앞에서 이른 북한강과 남한강은 양수리에서 만나 경기도 광주의 어름으로 흘러 든다. 해서 도미나루(度迷津)를 지나 광나루(廣津)로, 다시 삼전도(三田渡)로, 용산강으로 돌아 흐른다. 하여 서강이 되며 금천(衿川) 북에 이르러 버들곶나루(楊花津)가, 양천 북쪽에 곰바위나루(孔岩津)가 되어 교하(交河) 서편 내와 함께 임진강이 한 데 어우러진다. 마침내 통진(通津)에 가서 할아비강(祖江)이 되어 바다로 든다. 본디 한수북(漢水北)이란 한강 북쪽에 자리한 벌판이란 뜻으로 한양(漢陽)이라 한다. 실로 서울은 한강이 낳은 열매요, 삶의 모꼬지이다. 대동지지를 따르자매, 큰 것을 한이라 이른다(大曰漢). 크고 좋은 건 모두가 중국이란 말인데 당시의 중국지향성이 되비쳐진 풀이로 보인다. 우리말로는 한강은 '큰 가람'이란 뜻이다. 강원도 14읍, 충청 12읍, 경기 16읍에 걸쳐 지나면서 고리 모양의 흐름으로 서울을 안아 돈다(水環京都). 백제 때에는 앞에서 이른바, 한산하(漢山河)라 했으며 여기 한산은 금단산(黔丹山)이라 불렀다. 금단산의 '금'은 단군왕검의 '검(儉)'과 같은 말로서 땅과 물신을 드러내는 지모신 상징이요, 곰토템을 보람으로 한다. 백제 시조 13년에 한산 아래 근초고왕 26년에 강북으로 서울을 옮긴다. 하여 북한산이 되기에 이른다. 북한산 쪽으로 옮기기 전을 남한산 시대라 불러 둔다. 지금도 남한산성이 있음은 이를 뒷받침 해 준다. 남한산을 일장산(日長山)이라고도 하는데 낮이 길다는 데서 말미암는다(晝長城). 신라 문무왕 4년에 다시 한산주로 고쳐졌다가 경덕왕 16년(757)에 한주로 된다. 이 모두가 한강을 중심해서 삶의 자리를 가꾸어 나아간 발자취라 할 밖에. 끼고 도는 즐펀한 한가람이 서울의 어머니라면, 불끈 솟아 오른 삼각산은 서울의 아버지요, 겨레의 기상이요, 멋이다. 자식을 보듬어 안 듯 긴 가람이 꿈 꾸어 흐르면서 끝 없는 삶의 메마른 터를 축여 기름지게 한다. 그러한 애환의 사연을 나르며 바다로 흐른다. 삼각산을 달리 화악(華岳)이라 하며, 애기를 업은 모양과 같다 하여 부아악(負兒岳)이라고도 한다. 고구려 동명왕 시절 비류와 온조 두 왕자는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 그러니까 삼각산에 올라 서로가 함께 살 만한 곳이라 했다고 전해 온다(相可居之地). 고려 적 오순(吳洵)의 글에 하였으되, '하늘로 솟은 세 송이 꽃은 푸른 부용이요, 실비단을 두른 듯 저 노을과 안개는 어디가 끝인가. 문득 옛적 누대에 올랐음을 생각하는데 해는 지고 어디선가 종소리만 들린다.'라고. 삼각산이 물 위에 뜬 연꽃처럼 고와 보이는가. 그러하다면 큰 가람 한강이 있어 그 위에 뜬 연꽃일 게고, 이는 극락정토의 지향성일 게다. 삼각산의 셋은 삼신사상에 기초한다고 하겠다. 신앙이라면 삼신 곧 환인 - 환웅 - 단군의 믿음을 떠 올릴 수 있다. 국망봉 인수봉 백운봉의 세 봉우리가 옛부터 내려 오는 겨레의 믿음처럼 한강 - 큰 가람의 굽이마다에 그 신비한 홍익인간의 꿈을, 통일 한국의 그리움을 달래고 있다. 천세 우에 미리 정하신 한수북(漢水北)에 누인개국하시어 복년이 가이 없으시니 성신(聖神) 이으셔도 경천근민(敬天勤民)하여야 더욱 굳으실 것입니다. ('용비어천가' 125장에서)
우리말의 상상력 2 - 정호완 1. 강은 우리의 어머니 - 낙동강과 가야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계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 꾸며 알알이 들어 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이육사의 '청포도'에서) 내가 바라는 손님과 맺은 칠월의 약속, 분명 약속의 빛이 있다면 그것은 청포도의 색일 것이다. 무얼 애 태워 기다리며 살아 가는 기다림의 미학은 오늘만을 살아 가는 우리 모두에게 던져 주는 가르침이 크다. 열린 가슴으로 고달픈 임을 그리는 시인은 끝내 마흔의 나이로 북경의 차디찬 감옥에서 숨을 거둔다. 임의 '내 고장'과 '푸른 바다'는 낙동강 굽이치는 안동의 원촌(遠村)마을, 벌써 물속의 꿈 꾸는 고장이 됐다. 퇴계를 낳고, 농암의 꿈이 어린, 육사의 전설이 들리는, 훈민정음 원본이 보관돼 세계적인 자료로 손꼽히는 고장을 싸 안은 낙동강. 임진의 난이다, 한국전쟁이다, 멀리는 기록조차 알 길 없는 김해의 가락국 얘기를 알고 증언할 수 있는 역사의 증인이다. 그저 말이 없을 뿐. 김해에서 강원도 태백의 황지에 이르는 1300리의 긴 가람. 태백산맥이 한반도 조국강산의 허리라면, 등뼈라면, 낙동강은 큰 핏줄이다. 해서 배달이 살아 온 자취마다 낙동의 숨결이 배어 있지 않은 곳이 어디이던가. 하면 낙동가람의 말미암은 샘이라 할 황지는 어떤 곳일까. 황지 하면 구문못 - 구문소의 전해 오는 옛 이야기가 재미 있다. 연못 안에 용궁이 있다는 전설. 옛 적 가난한 늙은이가 세상 살기가 싫어져 구문소에 뛰어 들었다. 용왕이 딱한 사정을 들은 뒤, 금은을 많이 주어 다시 이승으로 살려 보낸다. 해서 늙은이는 큰 부자가 돼서 잘 살았다는 사연. 전설의 고향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가. 찍어 바르면 먹물인 양 결코 여기가 낙동강의 뿌리샘일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다 이렇게 오염이 되었을까. 삼척부의 서남 150리쯤 태백산의 동쪽 지맥에 샘이 솟아 큰 못을 이루었다(有泉湧出成大池). 그 물이 남으로 흘러 30여리를 가면 구멍산-천산(穿山)에 이른다. 산의 남쪽에서 나왔다 해서 구멍내(穿川)라 부르고, 안동과의 경계가 된다. 이 내가 곧 낙동강의 뿌리샘이 되고 있음을 대동지지 에서 김정호 선생은 풀이하고 있다. 못 위에는 이성계의 조상인 목조(穆祖)가 살았던 활기촌(活耆村)이란 마을이 있다. 목조가 일찍이 적을 피해 황지로 옮겼기 때문에 못을 터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민간어원으로서 황씨 노인의 얘기가 전해 온다. 시내 복판에 20여평 남짓 되는 연못이 있었는데 이 곳에 황노인이 살고 있었다. 하루는 스님이 와서 시주를 청하자 황노인은 시주는커녕 거름을 한 삽 떠 안겼다. 이를 본 며느리가 시아버지 모르게 쌀을 퍼 주게 된다. 곧 난리가 날 터인즉 빨리 피하시오. 갈 때에는 뒤를 돌아 보지 말고 가라는 중의 말이었다. 애기를 업고 도망 가다 천둥번개가 치고 하여 집안 걱정이 되었음인지 뒤를 돌아 보았는데 그 자리에서 돌이 되었다. 얘기는 최상수의 한국민간설화집에 실려 온다. 뭇강의 어른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유수는 어찌하여 주야에 끊이지 않는고 우리도 이같이 하여 만고상청하리라 (이황의 '도산십이곡'에서) 세월을 두고 늘 푸른 산. 실은 산에도 언제나 변화의 이어짐 위에서 푸른 모습을 띠고 있다. 그 사이에 흐르는 물은 변하는 바로 덧없는 세상살이를 일컬어 이른 것이요, 청산은 변함 없는 피안의 누리에 대한 그리움이다. 누구나 자신이 자란 시간과 공간을 중심으로 하여 인식과 존재에 눈을 뜨게 마련이다. 퇴계가 자란 곳에 도산이 있고 흐르는 퇴계(退溪) 혹은 토계(兎溪)가 있었다. 그 산과 물에 접하면서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가치를 터득해갔던 게 아니었을까. 마침내 퇴계는 낙동강을 '여러 강 중의 으뜸이라'(尊爲衆水君)고 풀이한다. 손이 안으로 굽기 마련. 안동은 옛부터 낙동가람을 따라 삶의 본거지로서 마을이 크게 이루어졌다. 신라 때에는 고타야(古陀耶)군이었는데 경덕왕 때 고창(古昌)군으로, 영가(永嘉)로, 길주(吉州)로, 복주(福州)로 되었다가 안동으로 불리게 된다. 또 다른 이름으로는 화산(花山), 고창(古昌), 창녕(昌寧), 고녕(古寧)이라 한다. 모두가 물과 관련된 이름으로 보인다. 고타야나 고창은 다 물 사이에 돋아 나온 '곶'의 성격을 드러낸다(장산곶.장기곶의'곶'). 임하쪽에서 오는 물과 황지, 예천쪽에서 오는 물 사이에 이룩된 고장이 안동이다. 영가의 영(永)도 두 물이 합해서 되었음을 드러내지 않는가(永 - 二 + 水).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山高谷深)한다. 안동이나 황지로 이어 지는 물의 그윽한 샘은 한반도의 허리라 할 태백에서 말미암는다. 태백은 어떤 산인가. 대동지지의 안동 부분을 찾아 보면 다음과 같다. 북으로 120리에 접해 있어 영월 정선 삼척이 북으로 이어진다. 남으로는 안동 봉화 예안을, 서쪽으로는 소백산의 죽령으로 산세가 이어진다. 산은 거의 흰 돌로 차 있어 바라보면, 마치 눈이 쌓인 모습과 같다. 해서 태백이란 것이다. 둘레에는 수삼백리에 산의 바다를 이루어 파도처럼 산봉우리들이 솟아 올라 출렁인다. 산 남쪽으로는 샘물과 돌이 낮은 곳으로 흘러 모인다. 산허리 이상에는 큰 돌산이 없다. 큰 산임에 틀림이 없지만 멀리 보매 뾰죽하게 솟은 봉우리가 눈에 띄지 않는다. 마치 하늘에 흐르는 구름인 양 산은 그렇게 말 없이 드리워 있다. 황지의 아름다운 산마루에는 열린 언덕이듯 골짜기가 미더워 땅의 기운을 모아 놓는다. 산이 높아 서리가 일찍 내리고 조 밀을 주로 심어 여름지이를 한다. 산 남쪽으로 가면 점차 언덕같은 뫼들이 줄을 잇고 그 경치 또한 아름답다. 하얀 모래와 굳은 땅은 마치 서울의 그것과 비슷하다. 태백은 희고 황지는 누런 곳인가. 빛깔 상징으로라면 누런 황색은 가운데를 가리킨다. 알의 노른 자위처럼 알맹이는 황금색이 많다. 그러니까 태백산에는 많은 샘이 있지만 황지가 바로 노른 자위에 걸맞는 게 아닌가 한다. 임금의 도포도 따져 보면 주황색의 태양을 본 뜬 것이다. 땅의 그림을 보더라도 태백은 정중앙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으니 말이다. 이 샘이 황금보다 더 귀한 낙동강의 젖줄이 된다. 거룩한 이 샘이야말로 삼국통일의 일을 해 낸 신라와 가야국의 태어남을, 아니 고려와 조선조의 태어남을 이끌어 냈던 가람이 아니던가. 도산서원에 이르는 가람의 굽이는 낙동강의 풍치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 여기서 이기(理氣) 철학의 큰 나무가 된 퇴계가, 어부가를 지은 농암 이현보 선생이, 육사 시인이 태어난 것이다. 산과 물이 좋아 그러한가. 교육환경이 좋아 그러했는가. 강의 굽이는 아홉을 헤아린다. 이르러 구곡(九曲)이라 한다. 오천 코바위 달내 분천 천사(川沙) 단사(丹砂) 백운동 월명담(月明潭) 박석천(博石川)들이 아홉 굽이다. 이 중 분천과 천사는 안동댐에 파묻혀 본래의 모습은 아예 사라 져 버린 게 아쉽다. 농암이 그다지도 사랑했건만. 안동하면 물굽이가 태극형으로 되돌아 나가는 하회마을이 떠오른다. 이름하여 '물돌굽이'를 하회라 했다. 낙동강의 상류인 망천이 돌아 꺾여서 고리모양을 드러 낸다. 동에서 남으로, 다시 남에서 북으로 구부러져 둥근 태극의 모양을 이룬다. 징비록의 지은이 유성룡 선생이 이 고장의 사람이다. 풍산 류씨로 대표되는 집성촌인 본보기가 될 만한 양반 마을이다. 한데 별신굿을 할 때, 양반과 선비를 비난 공격하는 모습은 아주 특이하다. 그것도 머슴들이 탈을 쓰고서 말이다. 머슴으로 보면 하고 싶은 자기 표현의 일단을, 양반으로 봐서는 자기 반성의 계기를 삼아 서로가 어울리는 삶을 살아 보자는 뜻이 있다고 본다. 이 때 하회탈은 상징성을 갖는다. 일종의 역할극이, 탈을 씀으로써 자연스레 일어난다는 점이다. 탈과 걸림을 둔 이야기가 전해 오니 그것이 허도령 전설이다. 허도령은 신령의 명을 받고 아무도 없는 데서 탈을 만들었다. 사정도 모르고 그를 그리워 하던 처자가 휘장을 뚫고 뭘 하는가를 들여다 보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허도령은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는다. 때문에 마지막 탈인 이매탈은 덜 만든 턱이 없는 모습을 하게 된다. 필자가 1985년 여름 전수관에 들렀을 때도 턱이 없는 탈을 쓴 사람이 퍽 오래 남는 느낌을 받았다. 약간의 여백이 있는 그림이나 예술품이 갖는 개성이랄까. 오히려 탈의 두드러진 점으로 일러 좋을 듯하다. 공검지(恭檢池)와 낙동강 상주 함창 공갈못에 연밥 따는 저 처자야 연밥 줄밥 내 따 줄께 이 내 품에 잠 자 주소 잠자기는 어렵잖소 연밥따기 늦어가오 상주 함창 공갈못에 연밥 따는 저 큰 아기 연밥 줄밥 다 따줌세 백년 언약 맺어다오. (낙동강 '모내기 노래'에서) 연밥 따는 처자와 모를 내는 젊은이와의 사랑 이야기를 노래말로 삼은 것이 노래의 큰 줄기다.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 에서 공갈못 또는 공검지야말로 여섯 가야의 유일한 흔적이라고 풀이한다. 풀이대로다. 본디 상주의 딸림고을이었던 함창(咸昌)은 고령가야(古寧加倻)였으니, 고령(古寧)을 어우르면 '공'이, 가야(가라)를 어우르면 '갈'이라 읽을 수 있다. 함창이란 이름은 나중에 붙여진 이름이기로서다. 공검지는 상주의 북쪽 27리에 있다. 고려 명종 때 사록 최정분이 못의 옛 터를 보고 그 자리에 못을 만들었다. 둑의 길이는 860보, 둘레가 16647자나 되는 큰 못이다. 낙동강의 상류에서는 가장 큰 벌인 사벌(沙伐)에 물을 대던 중요한 농업생산의 열쇠이다. 공갈못의 '못'은 받침의 바뀜으로 보아 '못-ㅁ-몰'과 같은 낱말의 떼를 이룬다. 결국 '못'이란 많은 물이 모여 있는 곳을 이른다고 하겠다(衆水娶會). 탐관오리는 언제나 있는 법. 조선왕조 고종 때에 임금의 신임을 받던 이채연이 연못을 터서 논을 만들어 소유하려고 한 뒤 쓸모 없는 못이 되었다. 저 혼자 잘 살려고 많은 사람에게 겨레 앞에 부끄러운 일을 스스롭게 저지르다니. 괘씸한 일이다. '공검'의 공(恭)은 고령(古寧)의 합한 소리와 걸림이 있고, 검(檢)은 가라(가야)와 걸림이 있다 하였다. 가라(가야)는 갈래 가람 큰 물을 뜻하기 때문이요, 살피자면(檢) 갈래를 잘 봐야 하기 때문이다. 뜻 자체로 풀이하면 '늘 공손한 마음으로 연못을 잘 살피라'는 뜻도 크다. 아니면 그 큰 들에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으니까 말이다. 사벌(沙伐) 들은 어떤 곳일까. 신라의 땅이름에는 '-벌'에 맞먹는 '벌, 불(伐, 火)'계가 대부분이다. 상주의 옛이름이 사벌국이었으니 벌 또한 같은 뜻이 아닌가. 하면 사(沙)는 무엇일까. 대동지지 의 방언해 문목(門目) - 차례편을 보면 '새롭다'로 풀이한다. 방언분포로 볼 때, 그럴 가능성은 있다. 하면 '사벌 - 새로 세운 나라(새로개척한 들)'란 풀이가 옳을 것으로 보인다. 낙동강변에 새로운 나라 - 사벌이 있고 옛부터 전해 오던 연못을 고쳐 일으킨 마을이다. 사벌이 새로 되기 전에 오래된 옛 고장 중에 공성(功城)현이 있었다. 신라 때에는 대정부곡(大井部曲) 곧 큰 우물을 관리하는 마을이란 뜻이다. 상주의 북쪽에 있었다. 기원적으로 우물(井)은 '움'에 물이 붙어 된 말이고 '움'은 굼(금, 검, 곰 /구무, 구멍)에서 비롯한 말이다. '굼'의 기역이 약해지면 /ㄱ ㅎ ㅇ/으로 되기 때문이다. '굼(움)'을 적을 한자가 없으니 공(功)을 적은 것으로 보인다. 하긴 공검지의 은덕으로 농사가 이루어지니까 그럴싸 하기도 하다. 그 맥을 따라 오르면 금관(金官)가야의 '금(검 굼 감)'에 터를 댈 수 있기 때문이며, 이는 곰신앙 곧 땅과 물을 신으로 섬기는 지모신앙과도 걸맞는 말미암음이 있다. 신토불이라고. 그 땅에 그 사람 아닌가.검(곰 금 굼)은 상징성으로 보아 북쪽을 가리켰다. 북방지향성이 한반도 사람들에게는 줄기찬 의식의 기층인 탓일 것으로 본다. 사벌만 해도 그렇다. '사(沙)'는 새로움이요, 방위로는 동쪽이 된다. 처용가의 동경(東京)을 서울(ㅅㅂ)로 풀이하거니와 사벌도 '서울'의 또 다른 이름밖에 다른 게 아니다. 더 나아가서 낙동진(洛東津)이나 낙동강도 그런 맥락에서 '고녕가라(古寧加耶)의 동쪽에 있는 가람'이란 말로 하면 좋을 것으로 보인다. 부족국가의 연합으로 된 6가야는 동으로 낙동강(혹은 황산강이라고도 함), 서남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 동북쪽은 가야산으로 경계를 삼았다.삼국시대에는 황산강(黃山江), 황산하(黃山河), 황산진(黃山津)으로 불리다가 고려 때에는 낙동강, 낙동진으로 섞여 쓰이었다. 하지만 이조 때에 와서는 아예 낙동강으로 머리를 삼기에 이르렀다. 이 또한 중국의 낙양(洛陽)을 본 떠서 그리했다면 사대주의적인 생각에서일 수 있다. 하긴 정약용의 아언각비 에서도 낙동강을 황수(黃水)로 적고 있음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도산별곡>에서는 낙동강을 낙천(洛川)이라 적고 있으니 조선조에서도 두루 섞어 쓰긴 한가지이다. 낙동진 - 낙동나루의 구실은 어떠했던가. 조선왕조의 경우, 세금으로 내는 영남지방의 세미(稅米)를 낙동나루에서 모아 문경의 새재를 넘어 충주의 가흥창에 옮긴다. 해서는 다시 한강의 물을 이용, 서울의 삼개(麻浦)로 간다. 어디 물건뿐이겠는가. 사람이며 말이며 군사들, 도임하여 벼슬하는 이들, 그립고 안타까운 어버이와의 이별하던 곳, 꿈에도 잊지 못하는 임을 보내고 만나는 곳이 바로 낙동나루였던 것이다. 지금은 그저 쓸쓸한 강마을의 풍정이 있을 따름이지만. 아랑의 한과 밀양강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듯이 날 좀 보소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를 날 넘겨 주소 언제 들어도 무언가 한 서린 사연이 가슴에 와 닿는다. 아랑낭자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와 그럴까. 조선조의 명종 임금 시절에 어느 밀양 부사에게 예쁘고 정숙한 딸이 있었다. 달 밝은 밤, 낭자가 영남루에 올라 아름다운 달 구경을 하는데, 낭자를 늘 그리워 해 오던 머슴종이 낭자를 사랑한다고 했겠다. 놀란 낭자는 한사코 저항을 하자 끝내 머슴은 낭자를 죽여 땅에 묻는다. 딸을 잃은 부사는 벼슬도 그만 두고 낙향을 한다. 새로 오는 밀양부사들에게 낭자의 한 맺힌 넋이 나타나 복수를 당부하지만 부사는 모두 죽게 된다. 용기 있는 새 부사 한 사람이 낭자의 한을 풀어 준다. 사람들은 아랑의 혼을 달래기 위하여 노래를 불렀으니 이 노래가 '아리랑'이 되었다는 풀이. 그 후 아랑각을 지어 음력 4월 16일 밤에 군수가 제관이 되어 제사를 지냈다. 광복한 뒤로는 소복한 처자가 제를 모신다. 이 게 바로 '밀양아리랑'의 바탕 이야기. 대략 아리랑은 여러가지로 풀이되지만 한을 노래하는 겨레의 노래가 되었다. 정선 아리랑, 평창 아리랑 진도 아리랑, 진주 아리랑 실로 많은 지역에서 즐겨 부른다. 글쓴이 보기로는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이라고 하는 부분에서 아리랑의 밑바탕을 알 수 있지 않나 한다. 아리다의 '아리'와 쓰리다의 '쓰리'에 되풀이를 드러내는 씨끝 '-랑'이 어우러져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아리다의 옛 말은 '알히다'이다. '알히'의 말짜임은 어떠한가. 새알의 '알(ㅎ)'에서 '-이'가 붙은 것으로 보인다. 새가 알을 깰 때 많은 아픔과 시련의 과정을 지나면서 알에서 병아리가 태어난다. 간추리건대 '아리다'는 시련과 아픔을 전제로 한다. 밀양강은 농사를 짓게 해 주고 마실 물도 주지만, 홍수로 넘쳐 흐르면 많은 농경지가 물에 떠내려 가거나 파묻혀 버린다. 조상의 무덤이 그 물에 떠 내려 갈 수도, 살아 있는 사람과 집이, 산 어버이도 자식도 물에 목숨을 잃기도 하는 것이다. 해서 씻지 못할 한으로 남는다. 때로는 바다 건너 왜인들의 노략질이 일어나고 했으니. 밀양은 '물(강)의 북'이란 뜻인데, 삼국시대에는 추화(推火)였다. 밀추의 '밀'과 불화의 '불'이 합해서 된 말이다. 여기서 '밀 - 물'의 맞걸림을 생각하고 그 아래 '밀 - 삼(삼랑진 미쓰<일본>)'을 함께 고려하면 밀양강으로 말미암은 삼각주와 그 주위의 땅이 바로 밀양이다. 일종의 물에 대한 믿음이 삶의 뿌리라는 전제를 드러낸 것이 땅이름 '밀양'이다. 물에 대한 믿음을 상징하는 것에는 용이 대표적이다. 밀양강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밀양강의 지류이며 표충사의 주위에 전해 오는 호박소(臼淵)가 그 예이다. 천화령(穿火嶺) 고개 아래 백여 척이 넘는 폭포가 있다. 그 모양이 바윗돌로서 방아확처럼 생겨 구연(호박소)이라 한다. 세상에 전해 오기는, 깊이를 알 수 없고 그 안에 용이 있었다. 가뭄이 심하게 들면 호랑이 머리를 못속에 넣고 비오기를 빈다. 하면 곧 물이 용솟음치고 비가 온다. 참으로 믿기 어려운 얘기이지만 이는 곧 용신앙 - 물신에 대한 정성과 받들어 모심을 드러낸 당시 사람들의 심리적 투영이라 해서 좋을 듯하다. 김해로 이어지는 낙동강을 해양강(海陽江)이라 한다. 김해와 낙동강의 이야기를 살펴 보자. 김해와 곰신앙 거북아 거북아 네 머리를 내 놓아라 만일 내 놓지 않으면 구워 먹어버리겠다. ('구지가' 에서) 거북을 불러서 으름장을 놓는 까닭이 무엇인가. 도대체 거북은 어떤 짐승일까. 불에다 구워 먹다니. 그러면 그리도 만만한 게 거북이란 말인가. 이 노래는 김수로(金首露)왕을 맞이하는 실마리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것도 거북맞이봉 - 구지봉(龜旨峯)에서 말이다. 가락국의 머리왕인 김수로에게 거북을 통한 신성함을 주기 위한 의도가 엿보인다. 하늘에서 금궤짝이 내려 왔고 그 속에 금빛 찬란한 알 여섯이 해처럼 둥글고 환하였다. 이르러 천강(天降)의 하늘 내림이란 거스를 수 없는 명령임을 밑으로 한다. 하늘에서 내려 왔으니까 당연히 땅에서는 맞아 들여야 한다. 땅과 물의 상징인 거북을 통한 다스림의 걸림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니까 하늘에서 내려온 김수로를 지도자로 하고 원주민격인 구간(九干)들은 다스림을 받는 그러한 관계란 말이다. 그럼 어떻게 거북을 '물과 땅의 신'이라 할 수 있을까. 여기 '간(干)'은 거서간의 '간'과 마찬가지로 지도자를 이른다. 본래 거북은 물과 뭍에서 살며 모래 구멍에 알을 낳아 새끼를 기른다. 거북점이라 해서 좋고 나쁨을 점치는 신령한 짐승으로 여겨 왔으니 용, 기린, 봉황과 함께 아주 상서로운 짐승으로 모셔왔다. 옛말로는 거복, 거붑(능엄경언해 1-74)이었다. 거붑에서 '붑'의 끝소리가 기역으로 되어 거북이 된 것이다. '거붑'의 기원형은 무엇일까. 우리말에서 입술소리의 기본은 미음(ㅁ)이다. 결국 '검 + 음 > 거믐 > 거븝 > 거북'의 꼴바뀜이 상정된다. 박지홍(1952. 구지가 연구)에서 양산민요 중 왕거미 노래를 들어 '거미 - 거북'의 대응성을 풀이한 일이 있다. 거미는 '검 + 이 > 거미'로 짜임새를 풀이할 수 있다. 땅이름에도 보면 '거무(巨武) - 현무(玄武) - 감(咸) 칠(漆)'의 맞걸림이 찾아진다. 여기서 현무는 분명 오늘날의 거북이를 뜻한다. 이는 고구려의 동서남북의 사신(神) 그림에서도 마찬가지다. 거북은 북방을 가리키며 검정으로 드러난다. 위에서 든 현무(玄武)는 이두식으로 읽더라도 '검'이 나온다. 금호강 부분에서 풀이할 터인즉, '검(감 굼 금)'은 곰(고마熊)과 깊은 걸림을 둘 수 있다. 우리말로 신(神)은 '검'이니 암시하는 바가 크다. 물신이며 땅신인 거북(검 거미)은 단군신화에서 보이는 곰신앙의 변이로 보아 좋을 것이다. 수렵생활을 하던 북방에서 따뜻한 남쪽나라에 와서 농경생활로 바뀐다. 하면 비슷한 소리 '곰 - 검(감, 금, 굼)'이지만 동물상징이 물과 뭍에 사는 거북이로 바뀐 것이다. 지금은 김해로 읽지만 본음은 금해인데 익은 소리로 굳어져 김해가 된 셈. 뜻은 쇠요, 소리는 금이다. 간추리건대 쇠라 함은 청동기문화를 가진 쇠그릇 문화의 들어 옴을 이르는 것이요, '금'이라 함은 곰신앙의 맥을 그대로 존중하는 원주민의 뿌리 신앙을 아주 자연스레 어울리게 만든 소리상징이라 하겠다. 쇠를 앞 세운 태양숭배족은 지배를 하는 겨레이며 검(금金)을 앞 세운 겨레들은 지배를 받던 겨레들인 것이다. 김수로를 그대로 풀이하자면 '금(검 - 거북)의 머리가 나오므로 지도자가 된 이'로 미루어 볼 수 있다. 방위로 보면 김해는 금바다(검바다)이니까 북에서 남으로 흘러 바다로 드는 곳이다. 해서 이 지역을 흐르는 낙동강이 해양강이다. 바다의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강이란 말이다. 김해를 가락국 - 느슨하게 소리 내어 가야(가라)로 읽는다. 김해는 가락의 머리가 되고 여기서 다섯 가야가 갈라져 나아갔다. 금관가야(김해)를 중심으로 하는 갈래란 말이 된다. 하면 6가야는 한 조상에서 갈라져 나아갔고 그 중심은 금관가야이다. 여기 금(金)은 검이며, 곰신앙을 밑바탕으로 한다. 그러니까 쇠문화와 곰신앙을 가진 겨레 - 배달의 겨레란 뜻이 된다. 한 마디로 곰(검)의 믿음을 기초로 세운 부족들의 갈래가 된다. 이제 낙동강을 황산강이라 함도 가늠이 간다. 황금의 빛이 누른 색이요, 땅의 빛 또한 누런 색일 수는 얼마든지 있다. 낙동강은 가락의 동쪽 경계가 되는 강이요, 6가락은 곰(거북 - 검) 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갈래들이다. 일찍이 사라진 가야의 이야기를 읊조리듯 낙동강은 그렇게 바다로 흐른다. 수로왕릉 앞의 무성한 풀은 예와 같고 봄바람은 일그러진 문으로 불어 온다. 이제 갓 핀 매화는 나그네의 심회를 달래주는 듯. (주열(朱悅)의 한시에서) 신령한 우물(靈井) 얼마 전에 밀양의 천황산으로 여름 갈닦이 모임이 있다기에 함께 갔다. 그윽한 산골이라고는 하지만 워낙 가무는지라 골짜기의 물도 마르고 그저 바위틈으로 흘러내리는 물이 있을 뿐. 말 그대로 목이 타오르는 강산이다. 마침 그날 밤 비를 몰던 바람이 멎더니만 이내 반가운 빗줄기가 지붕 위에, 바위에 풀잎에 마음 속에 쏟아져 내린다. 비에 젖고 싶었다. 마음을 씻고 싶었다. 마침 밀양과 관련하여 땅이름에 대하여 이야기할 내 차례가 되었다. 혹시나 하여 세종실록지리지 의 밀양 부분을 베껴 간 것이 있어 다행이었다. 한자를 뜻과 소리로 읽던 적에는 밀양을 '밀벌(推火)'이라 했다. 신라 경덕왕 때에는 밀성(密城)이라고도 했음과 함께 공양왕의 증조 할머니 친정고장이라 해서 밀양부로 올린 후 생산이 넉넉하고 강을 이용한 수운이 발달해서 조선왕조 태종 때에는 도호부를 두기도 했다. 산수를 풀이한 부분에서 화악산과 영정산(靈井山)이 나온다. 영정산의 풀이를 하였으되, 밀양부의 동쪽에 있으며 산 아래 바위로 된 연못이 있었는데 그 물속에는 용이 살아 있다는 얘기. 마침 큰 가뭄이 들어 사람들이 기우제를 드릴 때, 호랑이 머리를 못속에 넣고 빌었더니 문득 용이 응신하여 비를 내렸다는 줄거리이다. 자리를 함께 한 동네 분의 설명으로는 일본 식민지 때에 천황산(天皇山)이라 했다는 사연. 어디쯤일까, 그 신령한 우물이 있는 곳이. 행여 산기슭에 자리 잡은 표충사 어름에 있다면 분명 이 산의 이름은 영정산이지 천황산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밀벌 - 밀양'으로 돌아가서 기원형으로 보이는 '밀'에 대하여 떠 올려 보기로 한다. 훈몽자회(상) 에 따르면 '미르진(辰) 미르룡(龍)'이 나온다. 미르진(辰)은 별을 뜻하며 천간지지의 지지로 보아 용에 속한다고 풀이하였다(地支屬龍). 밤하늘에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어 많은 사람들의 메마른 정서를 적셔주는 '미리내'를 하늘의 용신으로 상정하여 아무 의심 없이 써 온 게 아닌가 한다. 그럼 '미르-- 밀'은 어떻게 풀이하면 좋을까. 미르의 끝 음절의 모음이 떨어지면 곧 '밀'이 된다. 이르러 폐음절로 된 셈인데 이러한 보기들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거우르 > 거울, 드르 > 들 등). '밀'의 바탕은 물이다. 중세어에서는 '믈, 믓'(용비어천가 훈몽자회)으로 물이 드러나기도 하며 '미(매, 메)'로도 쓰였다(ㅁ海蔘,미나리,밋그라지). 동음이의어로 '밀(밋)'은 수로 3을 뜻한다. 밀양과 그 걸림을 풀이하자면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장소가 삼각주로 되어 있다. 강물에 떠내려 온 모래의 쌓임작용으로 말미암은 땅이요 물 때문에 시련과 함께 번영을 누려 온 고장이 바로 밀양이다. 그렇게 볼 수 있음은 우선 밀양의 양(陽)은 한강의 북쪽을 한양이라 하듯이 낙동강 당시는 해양강이라고도 하였는데 강물의 북쪽 벌판에 취락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벌(불) - 양'의 걸림은 땅이름의 고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특히 -벌(伐 火 弗)계의 땅이름은 신라지역에서 많이 쓰이는 형태이기도 하다. 강물로 말미암은 기름진 들판이며 풍성한 삶은, 푸른 산허리를 노래하는 작으나 맑고 끊임없는 옹달샘에서 비롯한다. 그 신령스러운 우물. 이름하여 영정이 그리운 세상이 되었다. 다음 날 안개를 머금은 산자락을 숨쉬며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의 배경이 되었다는 굽이길을 돌아서 물 흐르듯이 피곤한 줄도 모르고 내려 왔다. 혹시나 하여 표충사에 들러 그 신령한 우물을 찾아보기로 마음 먹고 새울음소리로 가득하고 밤꽃 - 밤느정이 내음으로 가득찬 절을 이리저리 찾아 보았다. 마침 절의 내력을 풀이한 글을 읽어 보았다. 신라 흥덕왕의 셋째 아들이 문둥병에 걸려 이곳 영정 약수를 마시면서 요양을 한 뒤로 병고침을 얻었다고 했다. 입맛이 당겼다. 중씰한 보살 할머니 한 분이, 절 마당에 연못이 있었음을 들어 안다고 했다. 글에는 절의 동쪽에 있다고 했으니 동쪽 어름을 찾을 밖에. 대웅전 서편에 영정약수라고 돌에 새겨 놓아 지나는 사람들이 마시게 해놓았다. 그렇다. 여기가 호랑이 머리를 넣은 우물 - 그 신령스러운 우물이 있었던 장소였구나. 그러면 응당 천황산의 이름은 세종실록의 기록대로 영정산이라 함이 옳을 것이다. 땅이름을 보면 우리나라 도처에 우물(井 泉 池 川)계의 이름이 많은데 이는 농경사회에서 물은 절대한 것이며 이 물을 다스리는 상징, 물신이 곧 용이었다. 만주말로는 '룽'으로 소리를 내었으니 혼령의 영(靈)과 통하는 같은 뜻을 드러냄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우물이란 말도 '움'에 물을 더하여 이루어진 이름씨로 '움'의 끝소리(ㅁ)가 떨어져 우물이 된 것이다. 움은 식물의 싹 또는 땅을 파고 구멍처럼 웅덩이를 만들어 화초나 채소를 넣어 두는 곳을 이른다. 움에서 나무나 채소의 싹이 돋는 것은 스스로운 일이요, 낮은 곳인 움에 물이 고임은 자연의 섭리다. 여성상징으로 보면 생명탄생의 아기집이 다름 아닌 생명의 움물이요 움막이며 평안이 깃드는 보금자리이다. 우리말의 방언 가운데에는 어머니를 '엄마 움마 오마니 암마 옴'이라 하거니와 필자가 보기로는 움 - 어머니와의 걸림이 있지 않나 한다. 움은 '구멍(굼) - 훔(훔치다 훔 패다) - 움'으로 바뀌어 오늘에 쓰인다. 구멍(굼)은 '구마(고마) - 굼(곰)'에서 비롯된 것으로 고마(곰)는 단군의 어머니 신이요, 토템으로 섬기던 생산의 상징이기도 하다. 맑은 물 푸른 산, 푸른 들로 이어지는 생명의 오롯한 가락이 어우러지는 맑은 영혼의 우물이라니. 때에 흘린 땀도 쉬일 겸 신령스러운 우물의 물을 흠뻑 마시니 푸른 산기슭을 부는 대밭의 바람이 더욱 시원하다. 법당 뒤뜰에 핀 꽃나무에 꿀따기가 한창인 벌의 노래, 풍경소리에 어울린 산새의 울음소리가 한층 멀리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