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공주와 금강 - 곰나루와 백마강 전설 먼 옛날 연미산에 살던 암콤 한 마리가 이 산에 나무하러 온 나무꾼을 납치하여 남편으로 삼았다. 이 나무꾼은 산 아래 금강에서 고기잡이 하던 어부로 암콤이 물 마시러 갈 때 한두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동물과의 부부생활이 결코 원만할 수는 없는 법이어서 아들, 딸둘을 낳았을 때 나무꾼은 과감히 동굴을 박차고 인간세계로 돌아오고 만다. 암콤은 이를 극구 만류했으나 굳이 떠나려는 남편을 막지는 못했다. 연미산 기슭의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흐르는 금강의 물살은 제법 거세다. 용케 배를 얻어 타고 강을 건너는 남편을 향해 울부짖던 암콤 아내는 두 자식을 양팔에 끼고 급류속으로 뛰어들어 함께 물귀신이 되고 만다. 지금까지 연미산 기슭에서 여러차례 배가 전복되고 익사사고가 잦았던 것은 금강이 그렇게 수심이 깊어서도, 또 물의 흐름이 급해서도 아니다. 이곳 주민들은 암콤의 한이 그토록 깊은 탓이라고 믿고 있다. 건너편 노송이 우거진 강변 나루터에 곰상과 함께 곰사당을 마련하여 해마다 제사를 지내고 있으나 암콤의 한이 아직도 풀리지 않은듯하다. 곰은 예로부터 우리 민족이 가장 신성시 했던 동물로 단군신화에서는 여성으로 변신한 곰, 즉 웅녀가 우리의 국모신으로 추앙받는다. 곰나루 전설도 백제인이 "곰 토템"을 가졌던 북방 민족임을 내세우기 위해 구전시킨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곰나루 전설은 단군신화에 비해 비극적 요소가 강하게 드러난다는 차이가 있다. 공주의 본래 이름은 "고마나루"였다. "고마"에서 말모음이 줄어들면 "곰"이 되는데 고마나루, 곧 곰나루를 한자말로 옮기면 웅진이 된다. 공주나 공산성의 공은 단지 "곰"의 변한 음 "공"을 한자 공으로 표기했을 뿐이다. 고마나루라고 할 때의 "고마(곰)"은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된다. 하나는 크고 신성하다는 뜻으로 쓰인 예인데, 대개 부족장이 웅거하는 고을에 붙는 이름이다. 다른 하나는 "니마" 또는 "님"과는 대조적으로 방위상 뒤쪽을 가리키는 경우이다. 따라서 고마나루 곧 웅진은 수읍명이기도 하지만 강을 등지고 있어 뒤쪽에 나루터를 지칭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공주와 부여를 감돌아 흐르는 금강의 이름 역시 고마(곰)와 관련된다. 비록 "비단 금"자를 쓰고 있지만 방위어로서의 "고마"가 본래뜻이다. 남한에서 한강과 낙동강 다음으로 긴 금강은 차탄강, 웅진강, 백마강, 고성진강등의 여러 이름을 가졌고 또 이름만큼 유래도 많은 강이다. 본래 한강유역에서 발흥한 백제 왕조는 남하하는 고구려와 서진하는 신라 세력에 밀려 금강의 고마나루를 거쳐 소부리(부여)에서 종말을 고한다. 곰나루 암콤의 전설도 그렇지만 "백마강 추억"으로 대변되는 부여 부소산성의 전설 역시 패망의 슬픈 내용을 담고 있다. 금강이 부여를 지나는 부분만을 따로 떼어 백마강이라 부르는데, 여기에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의 이야기다.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이 이 강을 통해 사비성을 공략할 때 짙은 안개와 풍랑으로 진출이 여의치 않았다. 그런데 그때 어느 노인이 말하기를 이런 현상은 백제왕이 용으로 변신하여 조화를 부리기 때문이며, 백제왕은 평소 흰 말고기(백마)를 즐겨 먹는다고 알려 주었다. 이에 소정방이 백마의 머리를 잘라 그것을 미끼로 용을 낚아 죽이자 이내 안개가 걷히고 물결이 잦아져 손쉽게 사비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 황당한 이야기이지만 하나 그 후부터는 이 주변의 강을 백마강이라 하고, 당시 용을 낚았던 바위를 조룡대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공주 제일의 유적지로 역시 공산성을 빼놓을 수 없다. 백제문화가 금강에 와서 꽃피운 것처럼 금강은 공산성 주변에 와서 아름다운 풍경을 펼쳐 놓는다. 수도 웅진을 방어하기 위해 세운 이 성은 백제가 망한 뒤 의자왕이 일시 거처하기도 했고, 조선조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하기 위해 잠시 유숙한 사실이 있다고 한다. 인조는 열흘남짓 머물렀지만 이 기간동안 한두가지 어원 전설을 남기고 있어 주목된다. "인절미"라는 떡이름이 인조의 피난 살이와 관련이 있다. 인조가 공산성에 머무르고 있을 때 인근에 사는 임씨 성을 가진 백성이 떡을 만들어 진상했는데, 그때 임금이 먹어 본 떡이 너무 맛 좋아 절미라는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이 절미는 임씨가 만든것이어서 "임절미"가 되었는데, 이 말이 후일 인절미로 변했다는 민간어원설이 남아있다. "도루묵"이라는 생선 이름도 이 무렵에 생겼다는 설이 있다. 도루묵은 본래 생긴 모습 때문에 목어 또는 맥어라고 했다. 그런데 피난지에서 맛본 그 생선 역시 임금님에게는 절미였을 터여서 이를 은어라 부르게 했으나 환도 후에 먹어 본 은어는 예전 그 맛이 아니었다. "은어라는 이름은 과분하다. 도로 목어라고 해라."하는 임금님의 일갈에 이 생선은 "도로목어", 한자어로 환목어로 되돌아오는 신세가 되었다. 어쨌든 대궐에서 다시 먹어 본 인절미 또한 절미는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속담을 인조 임금은 미처 몰랐을 테니 말이다.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황지와 태백산 - 밝은 뫼에서 솟는 시원의 샘 태백산은 백두대간의 중추이자 한강과 낙동강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부연하면 국토의 모산이자 한민족의 시원지라는 표현도 가능하다. 한밝산 곧 태백이 민족의 영산이라는 사실을 서해에 사는 이무기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용이 되고픈 욕망에 514km에 이르는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이곳 태백산 자락 금대봉골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더 이상 오르지 못하고 주저앉은 곳이 검룡소, 비록 신령스런 용이 산다는 이름은 얻었으나 그 이무기는 아직도 용이 되어 승천하지는 못한 것 같다. 한때 이곳 주민들이 검룡소를 메워버린 적이 있다고 한다. 용이 될 때까지 매사에 조신해야 할 이무기가 인근 마을의 소를 잡아먹는등 행패를 부렸기 때문이라 한다. 승천하고자 몸부림치던 이무기의 흔적이 지금도 못 아래 암반에 선연히 드러나있다. 두 번째 한강의 기적이 일어나 우리나라가 명실공히 선진국으로 진입할 때 까지 이무기의 승천은 더 지체 될 수 밖에 없을 듯하다. 용이든 이무기든 하루 수십톤의 물을 내뿜는다는 검룡소의 물은 맑고도 차다. 샘의 깊이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으나 한겨울에도 일정한 수량의 물이 펑펑 솟는걸 보면 신비스럽기 그지없다. 또 하나의 시원지, 곧 낙동강의 발원지이자 장자못 설화의 본거지인 황지는 태백시의 중심가에 위치한다. 옛날 이 마을에 지독한 노랑이 황씨(황동지라 함)가 살았다 한다. 하루는 노승 한분이 찾아와 시주를 청하자 이 노랑이가 박절히 거절한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스님이 계속 목탁을 두드리자 마침 외양간을 치고 있던 황부자는 쇠똥을 잔뜩 퍼서 스님의 바랑에 쑤셔 넣는다. 이런 대접에도 스님의 태도는 의연하다. 쇠똥 보시면 어떠냐는 듯 주인에게 정중히 인사하고 그 집을 나선다. 이때 부엌에서 방아를 찧고 있던 며느지 지씨가 몰래 뒤따라와 쌀을 시주하고 시아버지 대신 사과를 드린다. 이 착한 며느리에게 노승은 이렇게 귀뜸하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 이 집의 운세가 다했으니 며느님은 빨리 이곳을 떠나시오. 다만 가는 도중에 절대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되오." 그러나 며느리 지씨는 스님의 당부를 지키지 못한다. 황급히 애기를 들쳐업고 내달리던 중 난데없는 천둥소리에 놀라 그만 뒤를 돌아보고 만 것이다. 순간 몰아닥친 홍수에 황부잣집은 물속에 잠기게 되고, 며느리는 등에 업은 아이와 뒤따르던 강아지와 함께 그 자리에 돌로 굳어지고 말았다. 한국판 "소돔과 고모라"라고 할까. 지금도 도계읍 구사리 산등성이에는 "미륵바우"라 불리는 모자상과 "개바우"라 불리는 개의 형상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하루 2,3천 톤의 물이 솟아 오른다는 황지는 세 개의 못으로 연결되어 있다. 위쪽의 가장 큰 못이 황 부자의 집터였다고 하고 가운데가 방앗간 터, 아래쪽에 있는 작은 못이 뒷간터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황지가 장자못 설화의 전형을 보여 주는 곳이라고는 하나 어떻든 520km 낙동강의 발원지가 탐욕스러운 부자의 집이었다는 사실이 왠지 꺼림칙하다. 그 이름도 주인 황씨와 며느리 지씨의 성에서 따온것이라는 설이 있으나 이는 단지 지어낸 말일 뿐 본래는 "넓은 못"이라는 고유어를 한자를 빌려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태백이 본디 영산이라 그런지 이 산자락에서 솟는 샘에는 대체로 용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산 정상의 천제단 밑에 있는 용정이 그 대표적인 셈이다. 예로부터 하늘로 제사를 지낼 때 제수로 썼다는 용정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서 솟는 샘물로서 어떤 가뭄과 장마에도 수량이 일정할 뿐 아니라 부정한 사람이 마시면 물빛부터 흐려진다는 설이 있다. 소천 땅에는 희고 검은 두 마리 용이 살고 있다는 용연이 있고, 소도동 창원사 경내에는 용이 된 어머니와 아들 삼형제의 전설이 서린 용담이라는 못도 있다. 뿐만 아니라 용궁으로 통하는 문의 흔적이라는 동점동의 구문소 전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황지천이 굽이쳐 흐르다가 바위산이 가로막자 큰 구멍을 뚫어 석문을 만들고 깊은 소를 이룬 곳, 이 구문소는 물이 구멍을 뚫었다 하여 "구무소" 또는 "뚜루내"라 불리기도 한다. 물의 위력을 절감케 하는 이 구멍못은 무지개처럼 생긴 석회 동굴과 자개문이라 불리는 천연 석문과 어울려 이색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태백은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의 아버지 환웅께서 하늘에서 내려와 당신의 큰뜻을 펼치신 성지로도 알려져 있다. 다만 민족의 성지 태백이 바로 이곳을 말하는지, 아니면 백두산이나 묘향산인지는 잘 모른다. 다만 이 산 정상에 모셔진 천제단이나 입구에 건립해 놓은 단군성전은 차지하고라도 인근의 소도동이나 혈리등의 지명은 결코 예사롭지가 않다. 소도를 지금의 소도로 적고 있지만 예로부터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성지 "소도"와 같은 이름일 것이다. 혈리 역시 샘이 솟는 구멍이 있어 "구멍 형"자를 쓰고 있지만 한반도 지맥의 혈을 뜻하는 풍수용어라 생각된다. 더구나 훗날 이 지역에는 단종의 원혼까지 묻어 와 정상 부근에 단종 비각이 세워지고 그 아래에 어평이니 정거리같은 지명까지 남겨 두고 있다. 우리나라 최대의 탄광촌인 태백도 이제 크게 변모하고 있다. 지난 시절 그 검고 삭막한 이미지를 벗어 던지고 지금은 무공해의 새로운 관광지로 탈바꿈하려고 한다. 겹겹이 둘러쳐진 산도 산이려니와 태백 기행의 주제는 무엇보다 차고 맑은 샘이 되어야 할 것이다. 승천하고픈 용들이 모여드는 곳, 그 샘은 다름 아닌 이 땅과 이 땅에 사는 우리 민족의 시원의 샘이기에 그러하다.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수원고 화산 - 아버지를 그리는 효심의 물골 서해가 가까운 옛 수원 화성땅, 물이 많아 "매골" 즉 물골이라 불렀던 곳, 이곳 바닷가에는 산이라고 해봤자 야트막한 야산이 고작이다. "꽃뫼"라 불리던 화산도 해발 1백미터 남짓한 낮은 산으로 옛날에 이 산 밑에 한 어부가 살았다고 한다. 일찍이 아내를 잃고 외롭게 살아가던 어부는 어느날 바다에 나갔다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여인을 구출한다. 어부가 구해 준 이 여인은 놀랍게도 지상의 온갖 꽃을 주관하는 선녀라 했다. 바닷가 벼랑 끝에 매달려서 시들어가는 꽃나무를 살리려다 그만 실족하여 자신이 죽을 뻔한 것이다. 외로운 홀아비에게 이런 행운이 올 줄이야. 선녀는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어부와 일년동안 동거하기로 약속하고 화산 중턱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한다. 이들의 신혼은 꿈같은 세월이었으니, 꽃을 관장하는 선녀답게 두 사람이 사는 집 주변은 온갖 기화요초로 장식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그녀는 야속하리만치 철저하게 약속을 지켰다. 어머니를 꼭 빼닮은 화심이라는 딸이 태어났을 무렵 선녀는 미련없이 하늘로 오르고 말았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상심은 컸지만 아내에 대한 그리움속에서 오로지 딸 화심만을 의지해 왔던 아버지는 딸이 성장하여 출가할 나이가 되자 병이 깊게 들었다. 미모의 딸을 탐하여 구혼자들이 줄을 이었으나 화심은 병든 아버지를 두고 시집갈 수는 없었다. 이럴 땐 으레 등장하는 권력자가 있게 마련, 그 구혼자 중에는 변사또와 비슷한 이 고을 부사도 끼여 있었는데, 화심에게는 불행히도 이 도령이 없었기에 억울하게 끌려가 참수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화심의 처형 장면은 여느 사형수와는 판이했다. 망나니의 칼이 목을 치는 순간 화심의 몸은 하늘로 치솟았고, 그 순간 그녀는 목청껏 "아버지"를 불렀다. 그 절규는 마디마디 피가 되어 튀었고, 그 피는 그대로 새빨간 꽃비가 되어 땅위에 흩어졌다. 이처럼 화심이 칼을 맞을 때 그녀의 몸은 선녀 어머니가 승천할 때처럼 하늘로 솟았는데, 지상에 흩어진 꽃비는 그 옛날 아버지가 선녀 어머니를 구할 때 그녀의 머리에 꽃혀있던 바로 그 꽃이라 했다. 형장으로 달려간 아버지는 딸의 시신 대신 흩어진 꽃비를 수습하여 그의 오두막집 옆에 고이 묻었다. 꽃비가 쌓여 만들어진 무덤, 그 꽃뫼를 후세 사람들은 화산이라 일컫는다. 화와 화는 서로 통하는 글자, 훗날 인구가 늘어 이 화산에 성을 쌓으니 물골 수원의 본고장인 지금의 화성이라는 얘기다. 아버지를 부르던 절규가 꽃비가 되고, 그 꽃비가 쌓여 이루어진 꽃뫼, 그 화산에 훗날 아버지를 못 잊어 몸부림치던, 조선조 정조대왕과 사도세자가 나란히 묻혀 있음은 진정 우연의 일치일까? 수원에서 병점을 거쳐 발안으로 향하는 화산 중턱에 두 왕릉이 나란히 누워있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를 합장한 융릉과 그의 아들인 정조부부를 합장한 건릉이 바로 그것이다. 다 아는 대로 지금의 수원은 정조에 의해 새로 건설된 도시로서 본 수원의 중심지는 융, 건릉과 그 원찰인 용주사가 있는 화산 주변이었다. 열 살의 어린 나이에 뒤주 속에서 굶어 죽어 가는 아버지의 최후를 본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선친의 묘를 이곳 화산으로 옮기고 해마다 여러 차례 능참길에 오르곤 했다. 아버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능역 주변은 온통 꽃으로 장식하였고 그 관리에 온갖 정성을 다했다고 한다. 능행길에 꼭 넘어야 했던 지지대 고개의 지명 유래나 고개 밑 노송지대에서의 일화는 아버지를 위하는 정조의 효심을 잘 대변해 준다. 한때 소나무 숲에 송충이가 들끓었을 때 정조는 그 중 한 마리를 잡아 씹으면서 이렇게 진노했다고 한다. "네놈들이 아무리 미물이라고 하나 어버이를 위하는 과인의 충정을 이다지도 좀먹는단 말인가!" 나랏님의 효심에 하늘도 감동했음인지 이 일이 있고 난 뒤 난데없는 까마귀떼가 몰려와 송충이떼를 모조리 잡아 먹었다던가. 능행길은 눈물겨운 효행길이었다고 한다. 시흥을 지나 화산이 보이는 고개에 이르면 정조는 "걸음이 왜 이다지 더디냐"며 행군을 재촉했고, 환궁 할때는 "제발 좀 천천히 가자"며 수십번이나 선친의 유택을 되돌아보곤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명명된 지지대와 선친의 내세 평안을 기원한다는 만안교도 정조의 효행길이 남긴 흔적들이 아니던가. 꽃뫼의 전설과 후일 정조대황의 효행사적이 절묘하게도 맞아떨어짐은 어떻게 설명될 것인가? "아버지"를 주제로 한 이 전설과 실화는 좋은 교훈이 된다는 점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 세대가 그대로 믿고 싶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지명이 숨기고 있는 본뜻은 전혀 그렇지 않다. 수원이나 화성은 물과 관련된 지명으로서 서해로 돌출하여 바닷가에 위치한 이곳의 지형상의 특징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수원은 "물이 많은 고을"이라는 뜻이요, 화성은 "바다로 삐죽이 뻗은 마을"이라는 뜻이다. 강이나 바다로 불쑥 내민 지역을 일러 "고지" 또는 곶이라 한다. 이 "곶"은 옛말의 곶과 음이 유사하므로 화 또는 화로 차자표기한 것이다. 따라서 화산은 바다로 삐죽이 나온 산을 뜻한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화산은 고지뫼가 아닌 꽃뫼로 새기고 싶다. 또한 수원은 영원한 "효원의 성곽도시"로 그 특성을 언제까지나 간직하고 싶다.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탄천과 동방삭 - 수청과 탄천 이승에서 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명계를 다스리는 염라대왕을 두려워 하지 않을수 없다. "염라 대왕이 문 밖에서 기다린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은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으며, 누구나 때가 되면 염라대왕의 소환을 거역할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런데 저승에 살면서 18명의 장관과 8만명의 옥졸을 거느리고 있는, 게다가 명석하기 이를데 없는 대왕이 어쩌다 실수할 적도 있었던 모양이다. 저승으로의 소환자 명단에서 그만 한 사람의 이름을 빠뜨리고 만 것이다. 말하자면 염라대왕의 리스트에서 빠진 대신 "쉰들러의 리스트"에 오른, 이 억세게 재수 좋은 사나이를 후세인들은 동방삭이라 부른다. 그의 이름 앞에 반드시 삼천갑자라는 수식어가 무슨 아호처럼 붙는걸 보면 사람들이 그를 한없이 부러워 하는 모양이다. 삼천갑자가 도대체 얼마나 긴 세월인지 한번 계산해보기로 하자. 한 갑자가 60년이니까 60 곱하기 3,000은 18만, 그렇다면 이승에서 그가 누린 나이가 무려 18만년이라는 얘기가 아닌가? 원래 영약하기 이를 데 없는 동방삭이 인간 사회에서 그토록 오래 살다 보니 세상 만사 모르는 것이 없게 되고 나중에는 명계의 일까지 꿰뚫어 보게 된 것 같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염라대왕은 노발대발하여 당장 그 놈을 잡아들이라고 엄명을 내린다. 그러나 인간의 잔꾀로 무장한 그 도사를 어떻게 잡아올 것인가? 경기도 성남 땅 어디메 살고 있다는 막연한 정보만을 가지고 온, 최 판관을 비롯한 베테랑 저승 사자들도 동방삭을 찾아내기에 진땀을 흘린다. 궁리 끝에 내 놓은 계책이 유인 작전, 저승사자 일행은 숯골에 이르러 숯을 몇 가마 얻어다가 이것을 시냇물에 빠는 시늉을 해 보인다. 숯골은 지금의 성남시 태평동과 수진동 일대인데, 옛날에는 숯 굽는 마을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숯이 너무 검어서 희게 하기 위해 숯을 물에 빤다고 떠벌리면서 며칠간 같은 짓을 반복해 보인다. 이런 엉뚱한 행동을 본 행인들은 한결같이 "숯을 희게 하다니 별 미친놈들 다 보겠네."라는 반응이다. 그러기를 여러날, 드디어 노리던 물고기가 계략에 걸려 들었다. "내가 삼천갑자를 살았어도 숯을 물에 빠는 미친놈은 처음 보겠네."라는 탄식과 함께 혀를 끌끌 차는 노인이 등장했다. "바로 이놈이다!" 그 순간 저승사자들은 번개같이 그 노인을 덮쳤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삼천갑자를 살았다는, 오로지 그 한마디로 동방삭은 황천객이 되고 말았는데, 18만 년의 생애가 단 한번의 실수로 허망하게 종말을 고한 것이다. 그가 저승사자에게 끌려간 뒤 후세인들은 이 시내를 숯내 또는 한자말로 탄천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그런 전설이다. 지명이 숯내이다 보니 이런 재미있는 전설도 묻어 들게 되었겠지만 아무렴 이처럼 맑은 물에 탄천이라는 검은 이름이 어울리기나 하는가? 어떤 이는 이 지역에 홍수가 나면 피해가 막심하기에 한탄스런 시내, 곧 탄천이 되었다고도 말한다. 한탄의 탄천이든 숯골의 탄천이든 아무튼 맑은 시내의 이름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탄천은 경기도 용인에서 발원하여 판교와 분당을 거쳐 서울에 이르러 한강의 품 안으로 흘러드는 한강의 제1지류이다. 서울 시민들은 이 탄천을 생각하기를 전에 운전면허 시험장이 있던 곳, 잠실 운동장에 경기가 있을 때면 주차장으로 이용되는 곳으로 알거나 그보다는 시커먼 폐수가 흐르는 샛강정도로 알고 있을지 모른다. 이름조차 탄천이다 보니 그럴만도 하다. 그러나 탄천의 물이 본래 검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맑고 푸른 물이 흐르던 큰 시내였음은 발원지의 마을 이름이 수청동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수청동의 전래지명은 "물푸레골"로 물이 푸른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런 고운 이름이 "검은 내"로 변질된 것은 고유지명을 한역화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어쩔수 없는 결과라 생각된다. 옛 지도를 보면 이 시내를 험천이라 하여 우리말로 "검내"라 부른다고 적고 있다. 한자 험은 검과 통하는 글자로서 현 발음대로 하면 "험"이 아니라 "검"으로 읽힌다. 그런데 이 "검"을 다시 소급하면 "거마" 또는 "고마"가 되어 옛날에는 "고마내" 정도로 불리었으리라 짐작된다. 고마는 크다는 뜻 외에도 방위상 뒤편을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팔꿈치, 뒤꿈치라고 할때의 꿈(곰)과 같은 말이다. 따라서 고마내, 곰내는 마을 앞으로 흐르는 시내가 아니라 마을 뒤로(북쪽으로) 흐르는 시내란 뜻이다. 여기서 마을이란 한신주, 곧 지금의 광주 일 것으로 짐작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탄천은 광주의 남쪽에 있으며, 이 내는 북으로 흘러 한강으로 들어간다고 언급하고 있다. 고을 뒤로 흐르는 곰내, 검내는 뒷날 검은 내로 오인되어 탄천이 되었으니 흑천이라 부르지 않는 것만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어쨌든 탄천이라는 이름은 잘못된 것임에 틀림이 없다. 동방삭이 저승으로 압송된 지도 벌써 삼천갑자 정도로 세월이 흘렀고, 또 저승사자가 숯을 구입했다던 숯골도 이제 도시의 한가운데가 되고 말았다. 최근 분당에 신도시가 형성되면서 탄천 주변도 말끔히 단장되어 멋진 시민의 휴식처로 거듭나게 되었다. 필자는 집에서 가까운 이 탄천의 물길을 내려다 보면서 수청이라는 발원지의 이름에 걸맞게 좀더 푸르고 맑은 물이 흐르기를 기대하고 있다.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춘천과 의암 - 맥국의 맥이 흐르는 쇠머리골 숨막히는 서울을 벗어나 청평, 가평을 거쳐 춘천의 의암호반에 이르면 28km의 경춘 계곡은 정말 멋진 드라이브 코스다. 그 중에서도 강촌 유원지에서 북한강이 삼악산을 휘돌아 흐르는 의암댐에 이르면 경춘가도의 풍경은 절정에 달한다. 이를 두고 누구는 "한국의 로렐라이"라 했던가. 그러나 이런 비유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등선 폭포 입구에서 옷바위가 마주 보이는 등선교에서 보는 풍정은 라인 강병 로렐라이의 무미건조함에 견줄 바가 못된다. 뿐만 아니라 그 옛날 맥국의 최후를 증언하는 삼악산성과 그 아래 옷바위의 전설은 그 규모나 내용 면에서 단연 로렐라이의 전설을 압도한다. 다만 아쉬운 게 있다면 우리에게는 그 슬픈 전설을 유명하게 만든 하인리히 하이네와 같은 대시인이 없었고, 또 전설의 현장을 잘 보존하고 그것을 널리 알릴수 있는 유람선과 우리것을 귀하게 여기는 인식이 없다는 점이라고나 할까. 삼악산성을 달리 일컬어 맥국산성이라고도 한다. 부족국가 시절 우리 민족의 근간이라 일컫는 맥족이 이 산에 성을 쌓고 북한강 남쪽의 개국과 대치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춘천을 중심으로 한 맥국은 한때 대단한 위세를 떨쳤지만 후일 개국에 패배한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지금도 군데군데 흔적을 남기고 있는 산성과 그 아래 의암은 맥국패망의 전설을 가만히 이야기 해준다. 북한강을 사이에 두고 두 나라 군사가 대치하고 있을 때 개국 장수 가운데 위장전에 능한 이가 있었다. 이 장수는 군졸의 옷을 모두 벗겨 물에 적셔 이를 삼악산성에서 빤히 내려다 보이는 바위둑에 늘어 놓고, 실제 주력 부대는 삼악산 뒤편 강선산에 매복시켜 놓았다. 교묘하게 맥국 군사를 유인한 셈인데, 이 전략이 그대로 적중하여 쉽사리 맥국의 진영을 유린할 수 있었다. 등선폭포 뒤에 있는 만경대는 최후의 격전지로서 당시 만여명에 달하는 맥국 군사가 이 절벽에서 희생되었다 하여 만군대, 망국대라 부르게 되었다. 만여명이 넘는 젊은 병사들이 꽃잎처럼 강으로 떨어져 죽은 곳을 불과 수십명의 어부가 야릇한 소리에 홀려 물귀신이 되었다는 로렐라이 언덕과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등선계곡의 폭포에는 금강산 전설을 닮은 나무꾼과 선녀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지만, 만군대의 비극에 묻혀 잊혀진 지 오래다. 폭포의 이름만은 소동파의 적벽부를 인용하여 등선폭포라 하였으나 하늘로 오른 것은 신선이 아니라 맥국 병사의 망국한이었을 게다. 벌써 2천년도 더 지난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지만 당시 기와를 구웠다는 "와대기"에는 지금도 기와 파편이 발길에 채인다. 성터의 흔적을 따라 삼악산 정상에 오르면 병사의 옷을 늘어놓아 적군을 유인했다는 그 문제의 옷바위, 즉 의암이 바로 발 아래 굽어 보인다. 어디 옷바위뿐일까, 북으로 굽이치는 북한강 줄기 따라 마치 조각배처럼 흩어져 있는 섬들을 비롯하여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춘천 분지의 원경은 정말 슬프도록 아름답기만 하다. 맥국이라는 이름은 중국인들이 우리를 낮잡아 붙인 이름이다. 맥은 "오랑캐 맥"자로 본래는 해성자인데 우리 민족 전통의 광명사상을 뜻하는 밝음을 표기한 차자이다. 이 밝음의 나라 백국의 본거지는 지금의 신북면 발산리라 일컫는, 춘천 북쪽의 한적한 마을이다. 이곳의 전래지명이 "바리뫼"로서 "바리"의 축약형 "발"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지금도 이 마을 뒷산을 맥국산 또는 왕대산이라 부르는데, 이 산앞으로 펼쳐진 광활한 벌판이 맥국의 도읍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춘천의 진산이 봉의산인데, 이 산 위쪽으로 또 하나의 한강인 소양강이 흐른다. 지도를 펴 놓고 보면 소양강과 북한강이 휘돌아 흐르는 그 북쪽에 꼭 소머리처럼 생긴 물돌이 벌판이 길게 펼쳐져 있다. 예로부터 하늘의 소가 강을 건너는 형상이라 하여, 쇠머리골, 곧 우두동이라 이름한 마을이다. 맥국의 맥을 이어 온 춘천의 역사는 바로 이 쇠머리골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지리지에 따르면 "고구려의 동남쪽예의 서쪽이 옛 맥의 땅인데, 현 신라의 북쪽이 삭주이며, 선덕여왕 6년에 우수주로 하여 군주를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우수주를 때로 우두주로 적은 기록이 보인다. 이는 한 나라의 으뜸고을이라는 뜻인 "수리마을"의 축약형 "쇠머리"를 한자를 빌려 차자표기한 것이다. 따라서 맥국의 도읍지 "바리뫼"가 신라때 "쇠머리골"로 바뀌고, 이를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수약주 또는 삭주로 적었다가, 고려때 춘주를 거쳐 조선소에 와서 춘천으로 정착되었다. 우두산은 지금 와보면 한낱 야산에 불과하지만 옛날에는 도성 방위에 없어서는 안 될 주요거점이었던 모양이다. 일제 때만 해도 이 야산에 토성으로 된 산성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거대한 충렬탑만이 솟아 있다. 비록 옛 모습은 사라졌으나 탑 위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멀리 소양강 줄기 따라 서쪽으로는 우두벌이, 동으로는 샘밭벌이 드넓게 펼쳐져 있어 옛 도읍지로서의 면모를 되새기게 한다.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철원과 한탄강 - 큰 여울 줄기 따라 한탄의 전설이 연천군 전곡에서 철권군 월저이로 이르는 한탄강 줄기에는 슬픈 전설이 흐르고 있다. 한탄강은 강원도 평강의 추가령곡에서 발원하여 철원과 연천벌을 거쳐 전곡에 이르러 임진강에 합류된다. 한탄이란 쉽게 말하면 "한여울", 즉 튼 여울을 뜻한다. 고유어로 불러야 할 강 이름을 굳이 한자말로 부르다 보니 자칫 한숨쉬며 탄식한다는 한탄으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 물살이 급한 개울을 일러 "여울"이라 한다. 한자어로 말하면 천탄이 되겠으나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지명이 가지는 주술성 때문인지 이 강은 이제 한민족의 비극의 강으로 인식되게이 이르렀다. 한여울과 같은, 이처럼 멋진 우리말 멋진 우리말 이름을 두고 왜 굳이 한탄이라는 한자말을 써야 하는지, 그래서 탄식 서린 비극의 강이 되어야 하는지 바로 그 점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한탄이라는 이름에 대한 색다른 풀이도 있다. 예로부터 이 강은 지배자에 대해 항거했던, 궁예나 임꺽정같은 걸출한 민중 지도자가 철저히 패배했던 쓰라린 역사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어쨌든 한탄강은 국토의 허리를 자르는 민족분단의 강이기에 우리의 뇌리 속에 비극의 강으로 인식되는 게 아닐까? 한탄이라는 강이름뿐만은 아닌 것 같다. 이 강 부젼의 지명에 물과 관련된 한자를 붙이다 보니 자연 "탄"이나 "천"과 같은 거센소리 지명을 가지게 되었다. 한탄, 신탄, 차탄, 포천, 회천, 연천, 동두천, 운천, 철원등과 같은 거센소리 지명들은 한결같이 슬픈 전설을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탄강이 긴 탄식을 그치고 임진강의 품에 안기는 전곡을 지나면 연천의 차탄리에 이른다. 차탄이란 "수레여울"이란 뜻, 여울이 수레바귀처럼 빙빙 돌기에 이런 이름을 얻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이 고을 원님이 수레를 타고 민정을 살피다가 태봉 앞여울에서 수레와 함께 빠져 죽었다고 한다. 선정을 베풀던 그 원님의 덕을 기려 차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이 고을 사람들은 유독 인정이 많고 그래서 울기를 잘했던 모양이다. 고을 원님이 순직했을 때도 주민들은 여울 앞에 나와 울었고, 조선조 마지막 임금인 고종이 승하했을 때도 마을 뒷산에 올라 서울을 향하여 다시 한 번 목놓아 울었다고 한다. 그 산이름마저도 망곡산이라니, 옛날의 울음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차탄리 북쪽 신탄리에는 또 하나의 통곡이 있다. 더 이상 달려갈 수 없는 철도 중단점이다. 이번에는 인간의 울음이 아니라 "철마는 달리고 싶다"면서 더 이상 갈수 없는 한탄을 토해 내는 수레바퀴의 울음이다. 남방 한계선 철책 앞, 예로부터 "달우물골"이라 불리던 월정리역에도 같은 구호가 적혀있다. 그것은 단순히 철마의 통곡이 아니라 민족의 염원을 담은 절규가 아니겠는가. 연천이라는 지명의 앞 글자인 "연"이 눈물을 흘린다는 뜻이어서 그럴까. 차탄천이 끝나는 군남면 남계리에도 눈물과 관련된 아픈 전설이 있다. 옛날 삼형제를 키우던 홀어머니가 그만 삼형제를 모두 차탄천 급류에 잃고 말았다. 아들을 잃은 어미는 매일 이 냇가에 나가 울다가 끝내 세 아들의 뒤를 따랐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최근 몇 해 동안 이 지역이 홍수가 나서 물바다가 되었다는 소식이 결코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연천읍 고문리의 재인폭포에 얽힌 전설도 슬프기는 매한가지다. 재인은 재주 부리는 광대를 일컫는 말인데, 옛날 외줄타기를 장기로 하는 재인이 아내와 함께 이 고을에 살았다. 대단한 미인이었던 재인의 아내를 탐낸 고을의 수령이 재인에게 폭포위에서 줄을 타게 한 뒤 그 줄을 몰래 끊어 죽게 만들었다. 재인의 아내는 용오 못잖게 절개도 곧았던 모양이다. 겁탈하려는 수령의 코를 깨물어 저항하고 그녀는 스스로 혀를 물어 자살하고말았다. 그 뒤 재인의 한이 서린 이 폭포를 재인폭포라 이름하고, 수령의 코를 깨문 여인이 살았다 하여 그 마을을 "코문리", 즉 고문리로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다. 철원으로 향하는 국도에서 삼팔교를 지나 지포리 방면으로 향하면 우람한 산줄기가 눈앞을 가로막는다. 바로 "울음산"이라 불리는 명성산인데, 이 산에는 한때 태봉국을 세워 위세를 떨쳤던 궁예의 울음이 아직 남아있다. 그가 부하였던 왕건에게 쫓기다가 이곳에서 성을 쌓고 저항했으나 끝내 운세를 돌이키지 못하고 식솔들과 헤어지면서 대성통곡했다는 그런 산이다. 산정호수쪽에서 보면 우람한 산세가 용트림이라도 하듯 위세를 펼치지만, 비라도 내리는 밤이면 지금도 울음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려 퍼진다던가. 궁예의 패주와 관련된 지명은 이 밖에도 더 있다. 왕건에게 항복했다는 항서밭골,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는 야전골, 싸움 끝에 줄행랑을 쳤다는 패주골, 적정을 살피기 위해 망원대를 세우고 봉화를 올렸다는 망봉등이 그것이다. 고아로 태어나 세달사라는 절에서 나무꾼 노릇을 하던 애꾸눈 승려 궁예는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정말 탐욕스럽고 흉악무도한 악한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당시 반란 농민군을 이끌고 부패한 왕조에 저항하면서 한 시대를 호령했던 걸출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월정역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면 비무장지대 한가운데에 희미하게 윤곽만 잡히는 하회산 근처가 궁예가 세웠던 태봉국의 대궐터라고 한다. 그 옆으로 흐르는 역곡천도 한탄강으로 합류될 것이지만 지금은 가 볼수 없는 곳이어서 궁예의 생애만큼이나 허무하게 느껴진다.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김포와 휴전선 - 애기봉에 울려퍼지는 어울림의 합창 본래 경기도 김포땅이었으나 지금은 서울로 편입된 강서구 가양동, 이 양천 고을을 끼고 흐르는 한강을 투금탄이라 부른다. 이른바 황금을 던져 버린 여울이 바로 이곳인 것이다. 성산 이씨가보에 전하는 이 형제의 이야기는 짙은 교훈성으로 인해 한때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한 전설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새삼 되새겨 보아야 할 이 전설을 두고 현지인들은 김포라는 지명도 여기서 유래했다고 믿는다. 형제애를 위해 금을 버린 포구, 이 전설이 너무 아름답기에 그대로 믿고 싶지만 문헌 기록상으로는 그렇지 않음이 유감이다. 그 옛날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지배했을 때 이 일대를 검포라 했고, 신라 경덕왕 때 이미 김포라 적고 있다. 전설의 주인공이 "다정가"의 시조의 작가로 알려진 이조년과 그 아우 이억년인데, 이들이 고려 말 인사들이고 보면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검"이나 "금"은 황금을 뜻하는 금이 아니라 방위상 뒤쪽에 있는 포구라는 뜻으로 쓰인 말이니 의미상으로도 역시 그렇다. 금을 버린 포구라면 김포가 아니라 "금포"가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김포는 서해안으로 돌출한 반도여서 지금은 그 넓은 개펄이 황금 옥토로 변모했으며, 더욱이 이곳에 공항이 생겨 우리나라의 관문이 되었으니 황금의 포구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듯하다. 양천골의 궁산에 오르면 강 건너편으로 마주 보이는 행주산성이 손에 잡힐 듯 들어온다. 행주라 하면 우선 임진왜란 때의 맹장 권율과 행주치마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행주치마의 어원 역시 아름다운 착각이다. 금을 버린 포구여서 김(금)포가 아니듯 행주대첩에서 부녀자들이 앞치마로 돌을 날랐다 하여 행주치마라는 말이 생긴게 아니다. "행주" 또는 "행자"는 본래 깨끗한 걸레를 뜻하는 불교 용어로서 행주대첩이 있기 훨씬 전의 문헌에서도 발견되기에 하는 말이다. 행주산성 옆을 스쳐 행주대교 밑으로 흐르는 한강은 이내 민족 분단의 상처를 안고 흐르는 임진강과 어울린다. 두 물줄기가 어우러져 서해에서 몸을 풀기 직전까지의, 그 드넓은 흐름을 우리는 할아버지의 강, 즉 조강이라 이름한다. 그런데 오늘날 한강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조강의 모습은 어떠한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아들과 손자강을 거느린 이 할아버지 강은 우리의 시대에 이르러 분단의 현장, 곧 한민족 한탄의 강이 되고 말았다. 조강리에 있는 작은 동산 애기봉에 오르면 이 비극의 현장이 더 극명하게 우리의 눈앞으로 다가온다. 본래 쑥갓머리산이라 불리던 애기봉이 지금처럼 독특한 이름으로 명소가 된 것도 비극의 역사가 만들어 낸 부산물이라 할수있다. 그나마 위안이 된다면 포연 서린 전선의 아름답지 않게 전설의 향기가 풍기는 운치 있는 이름을 얻었다는 점일 게다. 인조 때 평양 감사에게 애기라 불리는 귀여운 애첩이 있었단다. 마침 병자호란을 당하여 두 사람은 피난길에 나섰는데, 평양 감사가 그만 도중에 오랑캐 병사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천신만고끝에 애기만 살아남아 이곳에서 그를 기다렸으나 남편이 끝내 돌아오지 않자 애기도 뒤따라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애기는 임종시 자기가 죽으면 고향 평양이 보이는 산꼭대기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는데, 지금의 전망대 부근이 그녀의 시신이 묻힌 곳이라 한다. 세월의 흐름에 묻혀 망각의 피안으로 사라질뻔한 한 여인의 애틋한 전설이 묘한 인연으로 되살아나게 될 줄이랴. 훗날 이곳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쑥갓머리 정상에 애기봉이라는 빗돌이 세워지고 그 이후 해마다 이곳 전망대 철탑에는 연등이 켜지고 송탄 송가가 북녘으로 울려 퍼진다. 그런데 단순히 고유어 아기 또는 애기였을 여인의 이름을 왜 하필 "사랑하는 기생"이라는 뜻의 애기로 적었을까? 굳이 한자말로 써야 했다면 2천만 이산가족이 혈육상봉을 애타게 기원한다는 의미로 애기라 적었으면 좋으련만. 애기봉 전망대에 서면 지금은 갈수 없는 붘녘 산하와 조강의 도도한 흐름위에 한강과 임진강이 어우러지는 장관을 함께 조감할 수 있다. 임진강과 한강의 합류 경우에는 두 강이 만나고 합친다는 표현보다 두 강이 어우러진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실지로 두 강이 어우러지는 지점을 고구려 때는 어울매라 불렀고 신라 경덕왕때는 이를 한역해서 "교하"라 적었으니, 지금의 파주군 교하면이 그곳이다. 눈길을 서해쪽으로 돌리면 조강 가운데 작은 섬 하나가 외롭게 떠 있음을 본다. 자칫하면 바다로 휩쓸려갈 뻔한 위태로운 자태, 조강의 큰 흐름에 떠밀려 가다 가까스로 머물게 된 섬 "머머리섬"이다. 한자어로 유도라 부르는 이 머머리섬이 언젠가 한마리 소로 인하여 세인의 관심을 집중시킨 바 있다. 홍수로 떠내려 가던 소가 천신만고 끝에 이 머머리섬에 상륙하게 되었고,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게 되었을 때 우리 국군이 이를 구출해준 사건말이다. 비록 사소한 일이기는 하지만 유도 황소 구출 작전이 시사하는 바는 결코 작지 않다. 우리가 한마리소의 구출작전에 그토록 관심을 보인 것은 그 일이 상징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비료나 식량으로 또는 소떼로 붘녘동포를 돕는 길이 열린 지금, 이 일이 계기가 되어 남북이 함께 어우러지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애기봉에 세운 30m의 철탑에는 연말이면 오색 전구에 불이 밝혀지고 건너편 붘녘땅으로 성가대의 찬송이 울려 퍼진다. 부처님이나 예수님이 오신 날이 아니어도 좋다. 7천만에 이르는 우리 민족 모두는 삼백 예순 날 남과 북의 어울림의 합창이 늘 메아리치기를 기원하고 있다.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강화와 마리산 - 반도 한가운데 솟은 머리산 아득히 먼 옛날 이 땅에 하늘이 처음 열릴적 이야기다. 만리 밖 북서쪽 대륙에서부터 따뜻한 남국을 찾는 발걸음이 있었다. 맏형인 "마리"를 필두로 하여 혈구, 고려, 진강, 능주라는 이름을 가진 다섯 형제의 이주 행렬이었다. 남동 방향으로 향하던 이들 오형제는 반도에 이르러 이 땅에 먼저 와서 자리를 잡은 삼형제, 곧 삼각산이 있음을 알고 따로 육지 못 미쳐 서해 바다상에 앉기로 했다. 앞서 오던 마리가 먼저 뭍을 향해 자리를 잡자 뒤를 이어 혈구와 고려가 차례로 앉는다. 다만 넷째인 진강이 앉으려다 보니 자신이 앉으면 막내인 능주의 자리가 없을것 같아 그대로 돌아서려고 한다. 그때 먼저 자리한 마리 형이 그의 뒷덜미를 잡아 당기는 통에 그만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만다. 진강산이 지금처럼 돌아 앉은 것은 그 떄문이란다.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섬 강화의 생성에 얽힌 지명 전설이다. 이육사의 시 "광야"의 서두처럼 그야말로 하늘이 처음 열리고 닭 우는 소리 들리던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다. 특히 강화의 마리산에는 국조 단군의 신화가 숨쉬는 참성단이 있기에 더 그러하다. 흔히 강화를 소개할 때 지명에 대한 설명에서 이르기를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의 세 강 어구에 위치하므로 "강화"요, 마리산 참성단에서 겨레의 영화를 빌고 성화의 불꽃을 밝혔으므로 "강화"가 되었다고 말한다. 멋진 의미 부여요, 그럴 듯한 지명 해석이지만 맞는 말은 아니다. 강화를 고구려 때 "가비고지"라 했다. 삼국시대 지명을 기록한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갑화고치라 차음 표기하고 차훈하고 있다. "가비고지"는 "가운데 곶"이라는 의미로 본뜻에 맞게 한역했다면 중갑이 되었을 것이다. 가비에서 말모음이 줄면 "갑"이 되고 여기에 장소를 뜻하는 접미사가 붙으면 "갑은데", 곧 가운데가 된다. 음력 팔월 보름을 한가위라 하는데, 여기서 "가위"도 본래 가비 또는 가배와 같은 말이다. 가비고지의 가비는 앞서 말한 대로 세 강의 한가운데로 비죽이 나온 곳이기에 붙은 이름이다. 여기에 좀 더 차원높은 의미를 덧붙인다면 이곳 강화가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이어지는 한반도 전체에서 한 가운데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다. 가운데 곶 또는 가운데 입구를 뜻하는 가비고지는 신라 때의 해구를 거쳐 고려 태조때 지금의 강화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가비가 가람의 뜻인 강으로 바뀐것은 앞서 말한 세 강에 이끌린 탓으로 보인다. 가비고지의 차훈 표기인 혈구는 지금의 혈구산으로 남아 있고, 그 본래 이름은 탱자나무로 유명한 현 강화읍의 갑곶리에서 유지되고 있다.(현지민은 갑곶을 "가꾸지"라 부름) 가비고지(갑곶)의 중심은 역시 마리산이다. 이 땅에 멘 처음 들어온 맏형격인 이 산은 단군 성조의 숨결이 밴 성스러운 산으로 인식되고 있다. 더구나 정상에는 당신께서 하늘에 계신 삼신상제와 직접 교신하던 참성단이 건재한다. 참성을 혹은 삼성이라 기록한 문헌이 있는 걸 보면 이것이 바로 하늘과 교통한 증거가 아닐까 싶다. 마리산은 앞서 말한 전설처럼 멀리 만리 밖에서 이동해 왔다고 하여 만리산이라 부르기도 하나 최근에는 불경 한역표기로 인해 "마니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마니는 용왕의 뇌속에서 나온 구슬을 지칭하는 말로서 누구든 이 보주를 얻으면 무구 또는 여의라는 한역 그대로 만사가 형통하는 것으로 믿는다. "고려사지리지"나 "세종실록지리지"에서도 이 산명을 마니산으로 차음 표기하고 있다. 다만 "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그 이후의 문헌에서는 마니의 니를 니로 바꾸어 적고 있는데, 이는 불교의 영향이라 생각된다. 마리산과 이웃한 길상산의 길상도 역시 불교용어로서 길조를 뜻하는 범어의 음역이다. 마리는 머리와 같은 어사로서 마리와 머리의 관계는 모음교체에 불과하다. 산마루라고 할 때의 마루나 짐승의 머릿수를 세는 마리도 같은 말이며, 옛 신라의 왕칭어 마립간의 마리나 고구려의 관직명 막리지의 마리도 같은 말이다. 따라서 삼랑성을 쌓았다는 단군의 세 아드님 부우, 부수, 부여등의 이름도 이와 같은 계통의 이름일 것으로 추정된다. 마리산은 그다지 크고 높은 산은 아니다. 높이가 고작 467m에 불과한데, 이는 우리가 잘 아는 백운산 백운대(836m)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산은 크기나 높이로 따질 일이 아니다. 정상에 있는 참성단과 함께 우리 민족이 받들어 모셔야 할 성산이니 우리가 흔히 종산 또는 두악이라 칭하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우리나라 지도를 펴놓고 강화 마리산의 위치를 찾아보면, 북쪽 끝의 백두산과 남쪽 끝의 한라산을 일직선으로 연결할 때 마리산은 꼭 중앙에 위치한다. 마리산은 반도의 어떤 산맥과도 이어지지 않은 독립적인 산이다. 또한 앞서 소개한 마리산 형제의 이동은 태고적 우리 민족의 남행 이동과도 흡사한 데가 있어 신비감을 더해 준다. 중국의 자금성이 그 자체로서 고궁 박물관이듯 강화섬도 섬 전체가 우리의 역사 박물관이라 칭할 수 있다. 강화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마니산사고가 있었다지만 지금은 없어지고 대신 섬 전체가 우리의 역사와 신화, 전설을 보관하는 무형의 사고가 아닐까 한다.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지명 전설을 찾아 백령도와 심청 - 흰 새가 일러 준 기다림의 섬 황해도 어느 고을에 가난한 선비가 살았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고을 원님의 딸을 알게 되고 딸도 그 선비를 좋아하여 둘은 금세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원님의 집에서 이 선비 총각을 완강히 거부한다는 점이었다. 말하자면 아네모네의 꽃말처럼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랑, 맺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원님은 딸을 외딴 섬으로 쫓아버렸다. 얼마 동안 두 사람을 갈라 놓으면 곧 잊혀지려니하는 계산에서 였다. 그러나 이는 어른들의 희망사항일뿐 두 사람은 더 애절하게 상대를 갈구했다. 처녀의 행방을 몰라 애태우던 선비에게 하루는 뜻밖의 좋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날아들었다는 말 그대로 한 마리 백조가 날아와 날갯죽지에서 흰 종이를 떨구고 가는 꿈을 꾼 것이다. 갈망도 지극하면 기적을 낳는 법인가, 흰 날개를 가진 백조가 암시하는 건 무엇인가? 꿈에서 깨어난 선비는 이내 장산곶에서 배를 얻어 타고 백령도로 달려간다. 선비의 짐작대로 그 섬에는 흰 새와 함께 선비를 기다리는 연인이 살고 있었으며, 그들의 포옹을 방해하는 그 무엇도 없었다. 사랑하는 남녀가 죽음으로 결말짓는 서양의 "로미오와 줄리엣"과는 달리 우리의 러브스토리는 이처럼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다. 백령도에서 해후한 남녀는 평생 이 섬을 떠나지 않고 흰 새들과 함께 그야말로 백년해로 했다는 그런 이야기다. 일출이 동해의 독도보다 반 시간이나 늦고 인천보다 평양이 더 가까운 섬, 서해 5도 중 최북단에 위치한 백령도는 예로부터 철새의 보금자리로 한때는 수백만마리의 흰 두루미의 서식처였다고 한다. 백령도의 고구려 때 이름은 곡(혹)도 인데 여기서 곡자는 고니(백조)나 따오기를 지칭하는 한자다. 지금도 "곡곡"이라면 백조의 울음을 형용하는 의성어로 쓰이고, "곡립"이라면 백조처럼 목을 길게 빼고 서 있는 모습을, "곡망"이라면 뜻하는 바가 이루어지도록 학수고대하는 모습을 일컫는 말이다. 백조의 보금자리, 한때나마 선비부부가 살다 간 사랑의 섬 백령도는 이제 기다림의 섬으로 남게 되었다. 섬 북단에서 까마득히 보이는 임(인)당수에 빠져 죽은 효녀 심청은 봉사아버지가 눈뜨기를 목숨바쳐 곡망했다. 백령도의 곡망은 허구의 전설이나 소설로만 끝나는게 아니다. 6, 25 전쟁을 전후하여 많은 황해도 주민들이 이 섬으로 피난해 왔는데, 그들은 아직도 고향에 가지 못하고 있다. 손에 잡힐듯한 장산곶을 지척에 두고 있으면서 지금도 곡망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백령도와 그 앞 바다는 소설 심청전의 실제 무대로 알려져 있다. 이 섬은 신라시대 이후로 중국으로 내왕하는 각종 선박의 중간 기착지로서, 항해의 안전을 위해 용왕에게 사람을 재물로 바치는 풍속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심청이가 몸을 던진 임당수는 백령도 북단 삼십리 지점, 그래서 인지 그곳의 물빛이 유난히 시퍼렇게 보인다. 물로 뛰어든 심청이가 연꽃을 타고 인간 세계로 환생했다는 연봉바위는 이 섬의 남쪽, 곧 백령도와 대청도 사이에 외롭게 떠있다. 연꽃이 조류를 타고 이곳으로 밀려왔다는 소설 속의 이야기는 실제 임당수 부근의 조류 흐름과 일치한다니, 심청전을 단순히 허구로만 볼수 없을 듯하다. 연꽃은 불가에서 귀하게 여기는 꽃이다. 물에 빠진 심청이가 연 잎에 싸여 물 위로 떠올랐다는 건 환생을 뜻함인가? 소설에서의 심청은 왕비가 되었지만 우리의 가슴속엔 효심의 표상으로 새겨져 있다. 연꽃전설의 발상지라고 하는 연화리에는 아직도 연꽃이 피고 진다니 이 이야기가 결코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북위 37도, 남한 본토보다 북한 내륙이 더 가깝다는 지리적 여건탓으로 백령도는 지금껏 아름다운 날개깃을 접고 지내야 했다. 주민가운데 군인이 더 많은 것도 그런 이유지만, 이 섬도 이제 서서히 날개를 펼치려 한다. 하루에도 수차례 쾌속선이 닿는 용기 포구에는 육지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포구에서 마주 보이는 사곳 해안의 규조토사장에는 오가는 차량의 행렬로 분주하다. 규조 껍질로 이루어진 사곶해안은 바닷물이 빠지면 콘크리트 바닥처럼 단단해지기 때문에 자동차가 다닐수 있는 것은 물론 군용 항공기까지 뜨고 내릴 수 있다고 한다. 도착 순간부터 이색 정취를 선보이는 백령도는 섬 곳곳에 기암괴석을 비롯한 천혜의 절경을 감추고 있다. 그 가운데 압권은 해금강 총석정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무두진 일대의 병풍바위이다. 오랜 세월 해수의 침식에 의해 형성된 해층 기암들이 병풍을 두른 듯 즐비안 해안, 그래서 두무 라는 이름도 뭇 장수들이 모여 회의 하는 모습을 닮았다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름을 한자 뜻에 따라 새겨서는 안된다. 사방이 산으로 둥글게 둘러싸인 분지를 "두메"라 하는데, 이곳 포구가 천연적으로 둥글게 생겼기에 "도무" 또는 "두무"라 이름한 것이다. 기암 괴석 병풍처럼 두른 지형도 이 지명을 푸는 데 도움이 된다. 기다림의 섬, 백령도. 이제 다시 백로가 날아오고 남북으로 통하는 뱃길이 열리기를 이곳 섬사람들은 애타게 곡망하고 있다. [백령도 두무진]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어느 여인의 이름 - 최초로 이 땅에 시집 온 여인 옛사람의 이름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여성이름이 있다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황옥이 그 주인공이다. 대게 성도 없이 이름만 고유어로 불린 다른 여성들에 비해 현대 여성 못잖게 제대로 갖춘 한자식 이름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허황옥은 놀랍게도 그 옛날 머나먼 인도 땅에서 이 땅에 최초로 시집 온 이국 여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콧날이 오똑하고 피부색이 까무잡잡한 현대의 "미스김"이나 "미스허"는 특히 이 이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 여인이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의 시조할머니가 되기에 하는 말이다. 지금부터 무려 1947년 전의 일이지만 "삼국유사"는 이 여인의 생애를 매우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허황옥은 서기 32년에 태어나 열 여섯 나이에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에게 시집 오기 위해 머나먼 항해길에 오른다. 허 소녀 일행이 맨 처음 발을 디딘 곳은 김해 앞바다 망산도, 진해시 용원동에 있으나 지금은 간척 공사로 이미 섬은 아니다. 신부를 맞기 위해 나온 여섯 살짜리 신랑은 망산도와 왕궁의 중간 지점인 명월산 산자락에 장막을 치고 신부를 맞는다. 수로왕과의 첫 대면에서 신부는 먼저 입고 왔던 비단 바지를 벗어 산신령께 바치고 신랑앞으로 나가 자신을 소개한다. "신첩은 아유타국의 공주로 성은 허씨요,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열 여섯입니다.외람스럽게도 매미같은 얼굴로 용안을 가까이 모시게 되었습니다." 신부가 바지를 벗어 던지는 것은 인도 남부 지방의 전통 혼례 관습이란다. 이에 여섯 살짜리 신랑은 으젓한 태도로 화답한다. "이제 현숙한 그대가 스스로 왔으니 이 몸은 행복하오." 당시 이들 신혼 부부가 주고 받은 대화가 중국어였는지 아요디아(ayodhya)어 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통역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으니 이들은 한가지 언어로 대화를 나누었으리라 짐작된다. 우리나라 국제 결혼 제 1호로 기록될 법한 신혼례는 이렇게 진행되었다. 이들이 보낸 첫날밤에는 달이 무척 밝았던 모양이다. 신방이 꾸며졌던 산을 지금도 명월산이라 부르고, 전에는 명월사라는 절도 있었다고 하니 말이다. 이틀 밤과 하루 낮이 지나고서야 이들은 신혼의 단꿈에서 깨어나 가야국의 왕실로 환궁한다. 황금알에서 태어난 수로왕과 인도처녀와의 이 세기적 결혼은 허황후가 157세의 나이로 승하할 때까지 지속된다. 그동안 열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을 낳았고, 이들 가운데 한 아들은 어머니의 성 허씨를 하사받아 오늘날의 김해 허씨가 출현하게 되었다. 같은 부모에게서 나온 두 성인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가 지금도 혼인하지 않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신화나 전설은 액면 그대로 믿기가 어려운데 수로왕의 건국 신화에서도 수용하기 어려운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두 사람 사이에 누가 중매를 섰는지도 의아하고, 그 시절 그렇게 먼 뱃길 항해가 가능했을까 하는 점도 의문이다. 가야국의 신비라 일컫는 이 의문은 최근 두 마리의 마주 보는 물고기, 즉 쌍어문의 흔적을 추적하는 학자들에 의해서 하나씩 풀려 나가고 있다. 수로왕릉이나 신어산 은하사의 대웅전에 그려진 이 물고기 문양은 멀리 이라크의 메소포타미아에서 비롯되어 인도 남부 아요디아와 중국의 보주 및 무창을 거쳐 우리나라 김해일원과 일본의 구슈등지로 흩어져 있다. 이 흔적이 이 민족의 이동 경로를 알려 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줄이야. 허 왕후는 지금도 수로왕의 탄생지인 구지봉 옆에 잠들어 있다. 능 앞에는 비석이 서있는데, 이 비명 가운데 보주라는 지명이 앞서 제기한 의문을 푸는 열쇠가 된다. 대게 옛 여인들은 출신지명을 이름으로 삼는 것이 통례인데 여기서의 보주는 인도나 우리나라가 아니라 중국에 있는 땅(정확히 말하여 촉나라 땅이었던 사천성 안악의 옛이름)임이 밝혀진 것이다. 허황옥이 본디 인도 아요디아국의 공주이기는 하나 중국으로 이주해왔고 이곳에서 성장하여 가야국의 왕비로 시집오게 된 것이다. 지금도 보주 땅에는 허씨 집성촌이 있어 후손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허황옥이라는 한자식 이름이 붙은 것도, 배를 타고 이 땅까지 왔다는 기록도 쉽게 이해될 수 있다. 항해의 출발지가 인도가 아니라 가까운 중국이었던 것이다.